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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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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시모음
2015년 04월 10일 22시 21분  조회:4135  추천:0  작성자: 죽림
 

<지구에 관한 시 모음> 


== 지구는 만원이다== 

죽을 수 있다는 것 

바위가 오랜 후 모래가 되고 
나무도 마침내 쓰러져 썩는다는 것 
저 이름 없는 풀꽃이 결국 시들듯 
그대와 나 
죽을 수 있다는 것 
미움도 마침내 스러지고 
그리움도 언젠가는 잊혀지듯이 
저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가랑잎처럼 
우리도 한 점 흙이 된다는 것 
그렇게 사라져주는 것 
그런 소멸의 길이 
얼마나 축복된 길인가


(김영천·시인, 1948-)


== 나는 한 평 남짓의 지구 세입자==

살다 보면 
보증금 십만 원에 칠만 원인 방도 
고마울 때 있다. 이별을 해도 편하고 
부도가 나도 홀가분할 때 있다. 
5만 원어치만 냉장되는 중고냉장고 
걸핏하면 덜덜거려도 
긴긴밤 위안될 때 있다. 
세상과 주파수 어긋나 
툭 하면 지직거렸던 날 위해 
감당할 만큼만 뻗고 있는 제 팔들 내보이며 
창가 은행나무 말 걸어올 때도 있다. 
먼 훗날 지구에서 방 뺄 때 
빌려 쓴 것 적으니 
그래도 난 덜 미안하겠구나 
싶을 때 있다.


(이성률·시인, 1963-)


== 지구는 하나== 
    
지구는 하나, 꽃도 하나, 
너는 내가 피워낸 붉은 꽃 한 송이 
푸른 지구 위에 피어난 꽃이 아름답다 
바람 부는 지구 위에 네가 아름답다.


(나태주·시인, 1945-)


== 지구를 한 바퀴== 
    
아빠는 일터에 나가시고 
혼자서 아기 키우는 엄마, 

아기를 재워놓고 
기저귀 빨려고 
들샘에 나가서는 
아기 혼자 깨어 우는 소리 
귀에 쟁쟁 못이 박혀서 
갖추갖추 빨랫감 헹궈 가지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듯 
바쁘게 돌아옵니다. 

마늘밭 지나 보리밭 지나 
교회 앞마당을 질러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발들이 웃으면 지구가 웃는다== 

찬바람 부니 잠자리에 든 발이 먼저 시리다 
심장과 먼 발이 시리다 
온종일 바닥에서 나를 세우던 
그 발 시려 온몸 시리고 
온몸 시려 마음 시리다 
어서 양말을 신겨야지 

읽지 않고 정치면을 넘겨 버려도 
사회면 반, 눈감고 지나도 
지구 공 위에 함께 발붙인 이들의 
발 시린 소리 
따듯한 심장과 멀어서 
지구가 발이 시립단다 
차가운 밤은 깊고 길기만 한데 

어서 양말을 신겨야지 
발이 따뜻해야 온몸이 웃는다 
모든 발이 따뜻해야 지구가 웃는다


(유봉희·시인)


== 지구본 ==

나보다 먼저 
지구를 끌어안은 아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구본 돌려대며 내 꺼야 
키득거리는 아이 
하나님이 아이처럼 웃으셨다


(김신오·시인, 황해도 신천 출생)


== 지구본을 돌리며== 
  
지구본을 돌리고 있으면 세계는 적막하다 
사막과 고원, 화산과 빙하가 
오대양 육대주, 남극과 북극이 
수박만한 씨알로 오므라들어 
봄 가을 열두 달을 믿을 수가 없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할 하늘은 
씨줄과 날줄 속에 들어앉고 
내 나라 내 도시는 점으로 찍혀 
산다는 것도 별 게 아니구나 알게 된다 
차를 타고 내려서 또 차를 타는 
동서남북을 믿을 수가 없다 
믿어야 할 진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이향아·시인, 1938-)


== 지구는 아름답다== 
    
아름답구나 
호수 루이스*. 
에머랄드 색깔이라 하지만 
어찌 보면 고려의 하늘색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육사의 청포도색 같기도 한 너의 
눈빛, 
살포시 치켜뜬 자작나무 속눈썹 사이로 
꿈꾸듯 흰 구름이 어리는구나. 
태고의 만년설로 면사포를 해 두른 너 로키는 
지구의 정결한 처녀, 
내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거니 
그 청옥한 눈매가 
그 무구한 눈짓이 
바로 병색임을 내 오늘 알았노라. 
모든 독을 지닌 것은 아름다운 것, 
모든 침묵하는 것은 신비로운 것, 
산성비에 오염된 호수에서는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 
결핵을 앓는 소녀가 아름다워지듯 
아마존에서, 킬리만자로에서 
폐를 앓는 지구는 더 아름답다. 
박명한 미인처럼 아름답다.


(오세영·시인, 1942-)  
* 호수 루이스(Lake Louise): 캐나다 로키 국립공원 밴프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호수,

근처 산봉우리의 하얀 만년설과 호수의 특이한 물색이 어울려 절경을 자아내고 있음.

그 특이한 물 색깔은 산성비의 오염에서 비롯된 것임.


== 지구의 독백==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태양 
짝사랑하느라 허송세월 할지라도 
화끈한 느낌만으로도 족해 
가지가지 생명체를 잉태할 수 있었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우여곡절 끝에 중심 잡았건만 
잘못 키운 영장류 하나 때문에 
스트레스가 떠날 날이 없는 몸 

이골이 난 자반뒤집기로 
애먼 세월만 
무시무종 끌어당겨 허비하다보니 
나도 몰래 오르는 체온 

되바라진 인간들이 
갈수록 묘혈을 파 
몸살로 시난고난하다 
결국엔 나도 달처럼 결딴나겠지


(권오범·시인)
* 자반뒤집기: 고통을 못 이겨 몸을 마구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 시난고난: 병이 오래 끌면서 점점 악화되는 모양


== 몸살 앓는 지구촌== 
    
가을비 토닥대며 
지붕을 때리는데 

처처의 재해소식 
참으로 심난하다 

지구촌 
편안한 날이 
하루라도 없구나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지구촌== 
  
구름 안개 몸을 휘감는 여기 
높은 재 위에 올라선 지금 
하늘과 땅이 한 움큼이요 
삶과 죽음이 한순간일네 
남북이 
한 뼘도 채 안 되는데 
이걸 가지고 피를 흘렸나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점 하나 찍은 듯 작은 지구 
개미집 같은 지구촌에서 
서로 싸우는 미련한 인간들 
우습다 
신이 보기에는 
비극이기보다 가증하리라 

그러나 우주가 넓고 커도 
지구는 필경 인류의 보금자리 
여기 생명을 붙이고 
역사를 누리며 살아온 곳 
우리 왜 
하나뿐인 보배를 
우리 손으로 깨뜨리려나 

무자비한 칼 거침없이 
휘두르는 강대국의 횡포 
능멸의 그물, 유린의 발굽 
못 벗어나는 약소민족의 아픔 
이것이 
지구를 더럽혀 온 
인류의 비참한 역사다 

애타게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 평화의 장벽 
불러도 응답이 없이 
대화조차 끊어진 적막 
이 순간 
텅 빈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꼬


(이은상·시인, 1903-1982)


== 하나뿐인 지구== 
    
하나뿐인 지구 위에 
숨쉬고 있는 사람들은 
함께 살고 있는 
꽃들과 동물들의 세계를 모른다 

바다가 있는 천체는 
오직 지구뿐인데 
사람들은 
물고기들의 씨를 말린다 

농부들은 
씨라도 뿌리고 
가을 수확을 기다리는데 
어부들은 
봄, 가을 없이 
새벽에서 밤까지 
물고기를 낚는다 

하나뿐인 지구를 
껴안으며 살자 
그러면 
오직 사랑과 평화가 
살아 나올 것을


(이지영·시인)


== 지구가 멈췄다==

절간 진입로바닥에 엎드려 수레를 미는 사내 앞에 
환경정화 단속원이 떴다
이제 겨우 마수걸인데
해넘이까지는 한참 멀었는데
도망치지 못하고 
죽은 듯 꿈쩍도 않고 있다 
뒤로는 부처님 품안이요
옆으로는 숨기 좋을 과수원이지만
저 너머 집에선
달빛 아래 삼겹살 파티를 기다리며
어린것들이 목을 뽑지만 
진퇴양난
없는 다리 노릇을 하는 뱃가죽 밑에는
지구가 놓여 있는데
한 뼘 한 뼘 굴릴 때마다 달이 가까워오는


(원무현·시인,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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