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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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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킴이의 노래
1
하-, 그때가 언제였던가. 풍 맞은 늬 애비와 삼십대 초반
의 늬 에미가 머잖아 묵샘에 빠져 죽을 늬 큰성을 앞세우고,
다리가 휘도록 포대기 끈을 조른 갓난쟁이 둘째를 업고 이
솔뫼골 산지기 외딴집에 찾아드는 것을 보았다. 하마 사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다만 회초래기 같은 구렁이 새끼
였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늬 에미, 산지기 외딴집
에서 등잔불에 그을은 칠남매를 내리 낳을 때마다 산파 대신
손 잡아주던 문고리처럼 늬 집에서 지금껏 머물러 살아왔다.
2
패가 망신하여 산지기 동생 오두막 열댓 살 뼈무른 조카 등
에 업혀온 늬 큰애비가 풍 맞은 애비보다 먼저 타고 가는 상
여를 보았다. 이태 후 그 춥던 겨울, 풍 든 애비마저 숨거둘
때 산발한 에미와 감자알 같던 늬 형제들이 오열할 때도 나는
그져 청뜰 밑에서 점점 예민해져 가는 청각을 곧추고 있을 뿐
이었다. 뭍짐승들의 소란스런 울음소리 틈에서도 젊은 암구
렁이의 목소리를 가려낼 줄 아는 나이라면 이해하겄는가. 그
때 나는 다만 늬 누이 한 줌 머리채만큼 자란 구렁이 총각에
불과했다.
3
인간의 나이 스무 살, 헌걸찬 인물의 늬 큰성이 뇌염에 걸
려 맥없이 샘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다. 샘골 그득한 푸른
이내 탓이었을까. 안친 쌀보다 턱없이 큰 무쇠솥을 데우고 나
온 저녁 연기 탓이었을까. 까닭없이 코끝을 자극하는 재채기
를 털어내듯 나는 그저 음산한 울음을 나직이 풀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제법 지겟작대기만큼 자란 청년구렁이로 세 번째
허물을 벗었다.
4
내남없이 주려 넘던 보릿고개였으나 사발입보다도 형제들
목구녕이 턱없이 크게 벌어지던 그 시절, 마른 눈물도 없이
술찌게미를 집어넣던, 새 주둥이처럼 빨간 늬 형제들의 목젖
을 보았다. 다만, 보았을 뿐이다. 나로서도 살찐 개구리 만나
기가 늬 형제 이밥보기처럼 어려운 시절이었다.
5
그 해, 울도토리가 여물 무렵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의 허
물을 벗었다. 허물을 인간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구렁이 세
계의 금기였으니, 칠칠치 못한 나의 허물은 두고두고 구렁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큰 허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
의 실수는 나를 다른 구렁이의 운명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이
기도 했다. 흐물흐물 내 근육의 틀림대로 양껏 부푼 내 허물
은 실제 몸보다 크게 보였을 터, 마당을 쓸던 누이를 보고 에
미가 말했다 '두거라, 이거는 아마도 우리 집 업이 틀림없
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에미의 목소리는 나
직하고 경건했다. 그 목소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6
나는 곧 이 집으로부터 나직하고 경건하게 불리는 어떤 존
재가 되어야 함을 눈치챘고, 열심히 그 나직하고 경건한 존재
의 형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오래잖아 나는 그것이 이 집안
의 길흉화복을 당기고, 물리치는 가신의 역할임을 깨달았
다. 나직하고 경건한 존재의 다른 이름이 지킴이라는 것도 알
게 되었다.
7
늬 에미는 억척스럽고 총명했으며, 형제들은 착하고 똑똑
했다. 이것은 나, 지킴이의 말이 아니라 동리 사람들의 수군
거림이다. 큰성이 명문 중학교에 붙자, 둘째 성과 시째 성이
우등상을 타왔으며, 누이는 글짓기 상을 타고 에미는 장한 어
머니 상을 타왔다. 부끄럽지만 큰애비와 애비의 죽음도, 발가
락 움이 돋는 양말의 가난도 내 탓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모
두 내 탓은 아니다.
8
지킴이가 된 나는 연애도 잊고 이 집에 '내 탓'을 얹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난했으나 스스로 꿈을 세울 줄
알았고, 꿈을 세웠으나 꿈을 위해 남과 다투지 않았으니, 아
무것도 도울 수 없는 나야말로 이 집에서 가장 가난한 지킴이
였다.
9
너 막내의 수염이 거뭇해지자 머리 큰 성들은 명절마다 수
군거렸다. '도시로 가자!' 나는 찬피동물의 속성도 잊어버린
듯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필시 이 이농 계획은 나를 빼놓은
구상이 틀림없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도시의 아파트에 깃들
어 사는 지킴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10
늬 가족이 도시로 떠나가던 날, 나는 아침 일찍 슬그머니
건너말 송골로 가서 이삿짐을 옮기는 너희 가족을 보았다. 나
직이 울었으나 늬 가족이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관절 빈
집을 지켜야 하는 지킴이란 무엇인가. 그 해 가을. 겨울잠 준
비도 잊고 가으내 굶었다.
11
가끔 소식을 듣기는 했다. 첫째가 장가가고, 둘째가 장가가
고, 셋째가, 마침내 너 막내마저 장가갔다는, 형제들 모두 메
추라기 흩어지듯 분가해버리자 어지간히 늙은 나는 또 혼란
스러웠다. 나는 이제 첫째네 지킴이가 될 것인가. 둘째네 지
킴이가 될 것인가. 그러나 곧 깨달앗지. 모두 도시 속에 자리
잡은 그 어느 곳도 내가 갈 곳이 아님을.
12
늬 가족 떠난 지 십몇 년, 마당과 청뜰엔 잡초 무성코, 방마
다 들쥐들이 쑤알거리는 빈집이지만 아직도 이 집안엔 늬들
은 잊어버린 늬 형제들이 살고 있다. 성들은 부산하게 책가방
을 싸고, 오늘도 짱아찌 반찬에 보리밥 도시락을 싸는 에미
와, 빈집 지키며 처마 그림자를 재는 막내둥이가 이토록 선명
하거늘, 나는 언제까지나 이들의 유년을 꿈에 귀기울이며,
'내 탓'을 얹기를 희망할 것이다. 어쩌면 오래잖아 이 집을
찾은 형제들 중 하나는 다시는 보지 못할 내 마지막 허물을
집어들고 나직하고 경건하게 중얼거릴 것이다. '아아, 이것은
우리 집 업이었지'라고
어머니 4
아유, 나야 뭐 손구락에 흙 안묻히고 쟤들 덕에 호강이
지유.
호강은 손바닥부터 나타날까? 모처럼 잡아본 엄마 손이 보
드라워 깜짝 놀라 살펴보니 주민증에도 흐릿하던 지문이 또
렷하다.
시상에 아파또에 살어보니 어찌나 존지 촌에선 다시 못 살
것 같아유. 따신 물 틀믄 따신 물 나오구, 즌깃불 화안하지.
테레비 잘 나오지, 호미질을 하나 낫질을 하나, 물지게 진다
구 어깨가 벗어지나, 애들 올 때마다 이놈 저놈 용돈 주구-,
이제 고생 다 끝났시유.
호강탄 우리 엄마, 앵무새처럼 되뇌는데 자세히 보면 먼산
바래기다. 검은 손 보얘졌으나 검버섯 더욱 선명해진 우리 엄
마, 종일 할 일 없다.
아버지 1
풍으로 떨던 아버지, 나 하나도 슬프지 않았네
내 나이 다섯 살, 지팽이 짚은 아버지 허리춤 풀어주며
오줌 시중 들어도 나 하나도 가엾지 않았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는 사람, 아버지는 그저 방 안에 있는
사람
이따금 콜록거리는 기침과 긴 한숨이 문턱을 넘어왔지만,
나 무시했네
나를 사로잡은 건 그보다 능구렁이나, 다람쥐 울음소리였
다네
어느 날 아버지, 잠자리 꼬리 밀짚 꿰어 시집 보내던 나를
불렀네
막내야. 산내끼 좀 가져다 다오-
고무신 꿴 아버지 댓돌 아래 나오시네
아부지, 산내끼 여기
가까스로 헛간으로 오신 아버지, 새끼줄로 목을 매시네
나 말리지 않았네
발버둥치던 아버지, 새끼줄이 끊어지자 청뜰에 떨어져 피
투성이가 되었네
나, 그제서야 앙 하고 울었네
아버지는 그 후로 일 년을 더 사셨네
누나야
누나야
다섯 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
땀 뻘뻘 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이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 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 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이 다름아닌
냄새 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 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 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반칠환의 가족사 시편은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동이 있다.
맺힌 것이 있어야 시가 쏟아짐을,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 시가
솟구침을, 나는 그의 유년기 추억담 시를 통해서 배운다.
충청도 산골 출신 촌놈 반칠환의 '속도'에 대한 명상도
촌각을 다투며 살아가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갈 수 없는 그곳
- 1992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
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
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
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에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 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속도에 관한 명상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
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
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누나야
다섯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
땀뻘뻘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아닌
냄새 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목격
- 속도에 관한 명상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물결
그랬구나! 가슴의 통증이 가시고 눈앞이 환해진다. 어리석고 아둔한 것처
럼 보이던 사람들의 굽은 어깨와 허리가 매화 등걸처럼 휘영청 내걸리고 가
슴마다 꽃이 핀다.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끌마저 모두 꽃핀다.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곳에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걸려 있다니, 가슴
에 박힌 대못은 상처인가 훈장인가?
언제나 벗어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통증과 치욕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으
며, 가슴 속 잉걸불에 묻어둔 뜨거운 열망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을 것인
가?
봄날 새순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피며, 손가락 잘린 솔가지는 관솔이 되
고, 샘물은 바위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내 근심이 키우는 것이 진주였구나, 네 통증이 피
우는 것이 꽃잎이었구나.
바퀴
- 속도에 관한 명상 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봄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어떤 채용 통보
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어린이날
공군 3579부대 기동타격대 반 방위병, 무사히 기지 방어
야간 근무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어, 풍년
전기밥솥 열어 김치에 밥 한 술 혼자 뜨는데, TV 채널을
돌리니 '오월은 푸르구나 - 우리들은 자란다아 -.'
이쪽으로 돌려도, 저쪽으로 돌려도, '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 '에이 재미없어.'
ON/OFF 스위치를 픽 눌러 끄는데,
'우리 막내둥이 오셨나?'
삽짝문 열고 칠순 노모가 들어오시네.
'마실 다녀오셔유?'
'아니다. 아침에 테리비를 보니까 오늘이 어린이날 아니냐.
우리 막내 뭘 슨물할까 하다가 막걸리 한 병 받아오는 질이다.'
'야? 막걸리를?'
어머니, 빙긋 웃으며 빈 스뎅 그릇을 내미신다.
어머니 5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 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바라보신다
칠십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질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지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한 걸음
-속도에 대한 명상 11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호두나무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과자는 정말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나무 가로수 下 칠십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과자 먹다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
확인 못한 이야기들
참외밭
누나, 누나, 여기 누가 참외 따갔네? 꼭지만 남았어.
아, 그거! 아마 고슴도치가 따갔나보다. 너, 고슴도치가 왜
밤송이처럼 가시가 돋쳤는지 모르지? 이빨로 참외꼭질 갉아서
똑 뗀 담에 등가시로 콕 찍어서 짊어지고 엉금엉금 기어간단다.
증말이야?
뒤란에 다람쥐
성, 니째 성, 나 다람쥐 한 마리만 잡아 주면 얽으미에 넣고 키우지.
임마, 다람쥐를 어뜨케 잡냐. 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다.
장독대 뒤에, 밤나무 밑에 다람쥐 많지? 다람쥐가 밤 줏어 먹느라
정신 없을 때 갑자기 바람 불면 알밤이 떨어져 가끔 다람쥐들이
뒤통수 맞고 기절한다더라. 알밤 맞은 다람쥐 보면
내 주워서 너 주지. 너도 바람 불 때 잘 봐라?
..............알았어!
꿩동산
꿔어꿔꿔 - 엉 -
아부지, 꿩괴기가 닭고기보다 맛있나?
그으럼,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른단다.
아부지 그러면 꿩 좀 잡아오지.
니가 좀 잡아서 아부지 꿩괴기 맛좀 보여주거라.
에이, 내가 어떻게 잡아.
꿩 잡는 건 어렵잖다. 장끼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한 놈이 죽어야 끝나거든. 넌 가만히 쌈 구경하고 있다가
죽은 놈 한 마리 줏어오면 아부지가 구워주지.
으응............ 근데 어디서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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