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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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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시모음, 그 외 시...
2015년 06월 15일 20시 36분  조회:5315  추천:0  작성자: 죽림

 

파도

      - 박천 최정순 -

 

억겁을 사납게 몰려들어

물 부수고 바위 깨는 파도야

어미 품에서 갈라져 나온

몽돌 부수지 마라

너한테 지지 않으려

둥글게 살고 있지 않냐

세월의 파도에

고개 숙인 아버지

 

 

파 도
         -  김현승  -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파랑새

    - 한하운 -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 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파랑새

      - 정연복 -

행복의 파랑새는
저 멀리 살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나의 곁을 빙빙 맴돌고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일 긴 사람

이 세상에서 나에게
밥상을 가장 많이 차려준 사람

이 세상에서 나의 안팎을
누구보다 세밀히 알고 있는 사람

내 삶의 환한 기쁨과 보람
몰래 감추고픈 슬픔과 고독의 
모양과 숨결까지도 감지하는 사람

그리고 나 때문에
종종 가슴 멍드는 사람

하루의 고단한 날개를 접고
지금 내 품안에 단잠 둥지를 틀었네

작은 파랑새여
아내여

 

 

파밭 가에서

         - 김수영 -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앉은 석경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파이프

     - 양준호 -


  팔을 잃어버린 바람이 돌아온다.
  소금의 사각의 방엔 여자가 보인다 백지의
  풀잎 속의 장미들
  X-ray 허파의 까만 개펄 바닥엔
  가지의 춤을 멈추는 게들
  새는 가슴에 불을 켠다.
  파이프의 땅강아지

 

 

 

파장 
     - 신경림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릴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파적

   - 정훈 -

 

  부-- 부--
  고동이 운다
  부두가 운다.

  항구와 항구에서
  향수를 쓸어 담아라
  떠날 때면
  그렇게 우는 것이냐.

  나도 이젠
  피리를 깨뜰고
  우람한 목청을 갖고 싶다.

  커어다란 슬픔을 노래할
  커어다란 기쁨을 노래할
  이런 날이면 섹스폰이라도
  한 아름 안고 서서
  부부부-- 불고 싶다.

 

 


파초(芭蕉)

     - 안도섭 -


늬는

너른 잎 출렁이다

진노을 젖어


바다 건너 어느 먼

물이 그리워

온 하루를 지켜 섰느냐

나의 파초여!

 

 

  파초

     - 김동명 -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 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라.

 

 

파충류의 사상

      - 장호 -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우리가 이러기 시작한 것은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러고만 있을 것은.

  찌그러진 바위를 뚫고
  불을 뿜는 숲을 지나
  추상의 동굴을 내려다보며
  죽은 놈의 팔뚝 같은 넘늘어진 거리를 건너

  우리들 옆의 누구나처럼
  우리들이 이렇게 기어엎대어
  쑥스러운 눈길로 서로의 얼굴들을 치어다보며
  해맑은 동체를 끄을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자궁에서부터 기어나와
  무덤에까지 기어들어야 할
  우리들의 포복은,
  혹은 삶과 죽음의 가로 세로 교차하는
  점의 작렬일지 모른다.

  하이얀 양광이
  백지 같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엉뚱한 장마철에,

  옆구리로는 검은 피를 쏟으며
  굼돌아 비트는 지렁이같이

  지각이 눈시울과 함께 붙어 버린 우리들의 망막에
  풍선같은 불만을 안고 기어들 구멍이 비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예감이 맴도는 10월의 해안에
  복징어 알을 주워먹고 나와 앉은 야윈 소년을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는 슬픔이란 게 없다.
  슬프다는 것은
  즐거웠던 시절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입실이다.

  우리들에게는 가을도 없고 겨울도 없다.
  소슬한 가을 바람에 떨어뜨릴 잎새 한 잎 익혀 볼 여름을 우리들은 가진
적이 없고
  꽃 한 포기 피워 볼 봄을 기다릴 구실을 우리들의 겨을은 가진 적이
없다.

  우리들에게는 우수라는 사치스런 삽화가 없다.
  우리들의 참회록엔 새까만 점액,
  골짜기마다 실종자의 발자취만 남루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꺼지지 않을 신호등,
  미묘한 바람결에도 굼돌아 비트는
  빛의 대열이다 대열!
  차알삭 땅바닥에 기어엎대어
  소리없이 포복하라, 소리없이!
  오만한 밤의 장막을 진 우리들의 생존은,
  숨찬 응시다, 응시!

  혹은 소리 없는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혹은 소리 나지 않는 입을 멍충히 열고
  우리들의 침묵은 어느 아우성보다
  더 높은 목청으로 역사의 문지기를
  두들겨 깨운다.

  풍경은, 현명한, 우리들의 예편네들을 닮아
  고요한 위험에 파랗게 질렸고

  소리라는 소리는 모두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박물관에 갇혔다.

  돌아다보면 아아 기어가는 이웃이 있고
  이웃너머 이웃이 그 이웃너머 또 다른 이웃이
  기어가는 이웃이 있다 우리들처럼.

  우리들이 죽지 않는 것은
  가혹한 하늘을 이고 있기 때문이다.
 

 

 

팔원(八院) - 서행시초(西行詩抄) 3
               - 백석 -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 자동차(乘合自動車)는 텅 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 리(三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백오십 리(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8미리 스타 

       - 장정일 -


스물 아홉 살의 돈많은 독신녀. 
그녀는 매일 WXY비디오로 전화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쓴 극본에 따라 
비디오를 찍는다. 일인극의 주인공이 되어 
비디오 찍히는 것이 그 독신녀의 
오래된 취미이자 생활이다.

 

어서오세요, 오늘은 특이한 걸루 찍기로 해요. 
그녀는 분홍 침실의 문을 열고, 치마를 걷어올린 채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전혀 새로운,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 보는 거에요. 그녀의 입가에 
재미로 넘친, 파스텔빛 미소가 번진다.

 

서서히 8미리 촬영기가 돌아가고, 그녀의 
두 뺌은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실연이자, 연기! 
그녀의 연기에는 대역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에 버터를 바른다. '여기서 컷!' 
'이 장면은 위에서 내리, 찍어, 줘요' 촬영기사에게 
명령하니, 그녀는 감독을 겸하는구나, '점점 클로즈 업 
시키면서 컷트, 알죠?' '레디 고'

 

이렇게 완성된 10분짜리 필름, 그녀는 
거기에 더빙을 하여 <나를 사랑하려는 욕망>이란 제목을 
갖다 붙인다. 그리고 이 최신작을 똑같이 복사하여 
유명감독과 인기배우들에게 발송한다. 그녀는 8미리스타. 
이미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은 그녀가 주연감독한 수많은 
8미리 필름을 보았거나, 가지고 있다.

 

30만 원만 주면, 누구나 찍힐 수 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따분한 삶을 화려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 영화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내심으론 얼마나 많은 은퇴와 
복귀를 반복했던가. 그러면서 그녀는 매일 8미리 필름을 찍었고 
이제는 그녀가 영화를 찍는 것인지, 영화 속의 그녀가 
그녀를 대신 사는 것인지 모르게 됐다.

 

 

 

피난민
      - 김동명 -


보퉁이는 목에 걸고
노약(老弱)은 업고 지고,...
지친 몸이 멧 기슭에 쓸어지니
찬 이슬에 젓는 것은 옷 자락만이 아니리.

성천강(成川江) 방축에는
때 아닌 밤 가마귀 떼
어린이의 죽음 앞엔
촛불 한 토막 없구나.

동본원사(東本願寺) 부처님도 加護(가호)를 잊으셨나
청루靑樓만 여기고 달려드는 밤 손을 맞어
찟어지는듯한 아내의 비명悲鳴도
못 들은체 돌아 누워 이를 갈며,
아아 어제 새날의 호화豪華를 추억追憶하는
역사歷史에 버림 받은 패잔敗殘한 민족民族이여
나는 이밤 밤 노래의 이중주二重奏에
三十六年 분노忿怒를 잊는다

 

 

 

피리
     - 전봉건 -

 

대나무
잎사귀가 
칼질한다

 

해가 지도록 칼질한다
달이 지도록 칼질한다
날마다 낮이 다 하도록 칼질하고
밤마다 밤이 다 새도록 칼질하다가
십년 이십년 백년 칼질하다가
대나무는 죽는다.

 

그렇다 대나무가 죽은 뒤
이 세상의 가장 마르고 주름진 손 하나가 와서
죽은 대나무의 뼈 단단하고 시퍼런
두뼘만큼을 들고
바람 속을 간다.

 

그렇다 그 뒤
물빛보다 맑은 피리소리가 땅끝에 선다
곧 바로 선다.
 

 

 

피리를 불자

           - 김광회 -


아직도 남은 한 밤 낮이
목이 마르다 피리를 불자.
이삭들은 아직 덜 여물고
열매도 풋내만 난다.
우리들의 소망은 별밭의 꽃
사랑도 저 문 밖에 지나간다.
그리고 모두 멀리만 있지
아직 반가운 대답은 없지
우리는 어디에선가 따로따로
높은 하늘밑 빈 땅위다.
오늘도 한줄기 강물이 간다
강물을 보며 피리를 불자.

 

 

피뢰침

        - 윤재철 -


  종일 비가 오고
  이윽고는 보이지 않게 비가 오고
  집이 젖고 아스팔트가 젖고 사람이 젖고
  지나치며 젖고 스며들며 젖고
  젖은 지붕 위로 젖은 사람들 위로
  피뢰침만 살아

  걷는다. 걸으며 본다.
  젖은 지붕 위 젖은 사람들 위
  피뢰침만 본다.
  피뢰침만 보인다.
  이제까지는 보지도 않던
  이제까지는 보이지도 않던
  피뢰침만 살아
  젖은 지붕 위 젖은 하늘 위

  그리하여 어쩌면 알 것 같다.
  피뢰침은 번개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그리 오라는 뜻인 것을
  불기둥을 예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기둥을 예언하면서 확실히 인도한다는 것을
  반란처럼 음모처럼 거꾸로
  우리들 속의 불기둥이 또한 그곳을 통해
  더욱 강하게 솟구쳐 흐르리라는 것을

  젖은 지붕 위 젖은 하늘 위
  지금 그것은 가장 확실한 감각
  피뢰침처럼 안테나처럼 어디에도 있고
  움직이며 예비하며
  하늘이 노여운 날은
  그렇게 꺼꾸러져 솟구쳐 오르는
  역동적인 감응의 역학, 피뢰침.

 

 

 

피아노
       - 전봉건(全鳳健) -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 차정미 -


  나의 윤택한 일상을 위해서
  일곱개의 옥타아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적마다
  생각하지
  피로 얼룩진 항거의 깃발
  나부끼던
  기미년 삼월 일일 점심무렵
  터지던 만세의 함성들을
  국사교과서 위인전에서나마
  간간이
  그때의 현장
  그때의 울분
  혹은 그때의 감격
  전율로 느껴 알 수 있지만
  부끄러워라
  나의 윤택한 일상을 위해
  일곱개의 옥타아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적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다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종횡무진
  쉰두개 피아노건반
  몽땅 두들겨대도
  기미년 삼월 일일 점심무렵
  피맺힌 그날의 절규
  그날의 함성소리를
  그릴 수가 없구나
  그릴 수가 없구나

 

 

 

핀 2

     - 이하석 -

 

  그들은 반짝거린다 눈만 날카롭게 뜬 채,
  흰눈 속 노을 묻은 어깨 묻힌 채, 엷은 푸른 하늘 속에
  두 손 든 나무 밑에서. 봄도 오기 전
  백치의 땅 밑에 누워 질퍽한 잠을 자는
  모든 것들의 정수리를 찌르며, 그들은 때로 풀처럼
  싱싱하게 땅에서 솟으며, 노을 묻은 몸이
  사악한 반짝임만으로 일어선다.

  세상 모든 그들 반짝이며 노는 곳마다
  우울하게 뒤로 일어서는 구름의 노을빛.


 

 

포도를 먹는 아이

      - 알시詩 7  - 정진규 -

 

 목욕을 시켰는지 목에 뽀얗게 분을 바른 아이가 하나, 사람의 알인 아이가

하나 해질 무렵 골목길 문간에 나앉아 터질듯한 포도알들을 한알씩 입에 따

넣고 있었다 한 알씩 포도라는 이름이 그의 입 안에서 맛있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름이 지워져 간다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나는 때묻

은 중랑천 언덕에서 비에 젖으며 안간힘으로 버티고 섰는, 추하게 지워져

가고 있는 망초꽃이라는 이름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아이는 마지막 한 알까

지 다 먹었다 포도라는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아이가 말랑말랑하게 웃었

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었다.

 

 

 

포도밭에서

      - 김후란 -

 

  내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면
  입 안에 가득 고이는
  감미로운 후회같은 것.
  흑진주, 네 곤혹의 눈빛을 피해서,
  넝쿨 사이로 빠져나오면
  짙은 방향
  어깨 너머로
  앵도라진 눈을 모으네.

 

 

 

포도주
        - 한용운 -


가을바람과 아침볕에 마침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들입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 잔에 가득히 부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

님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님이여

 

 

 

 

폭죽

    - 서은숙 -


  단 한번만의 통곡일망정
  단 한번만의 폭소일망정
  아, 단 한번만의 아우성일망정

  그대 어둔 밤 하늘에
  황홀한 섬광처럼 꽃피었다가

  순식간에 흔적 없이
  재가 되어 보았으면

  재가 되어
  별 하나 되어 보았으면.

 

 


폭 포

     - 이형기 -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2억 년 묵

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폭포                                                      
    - 김수영 -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김수영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 

瀑布는 곧은 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向하여 떨어진다는 意味도 없이 
季節과 晝夜를 가리지 않고 
高邁한 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金盞花도 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醉할 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懶惰와 安定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幅도 없이 
떨어진다

 

 

푸 른  곰 팡 이 /산책시1
                          - 이문재 -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읍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읍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읍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읍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푸른 산맥을 타고서

             - 김철수 -

푸른 하늘을 나는 간다 
푸른 산맥을 타고서 나의 핏빛 젊음이 
사슴처럼 출렁이는 풀숲을 헤쳐 간다 

駐屯軍의 파수병을 저리 돌아 오르면 
거기 隊列져 뻗어나간 산맥! 
게딱지같은 초가들이 軍號를 기다리듯 엎드려 있고 
새떼 숨어서도 무어라 저리들 우짖는 것일까 

열 일곱 나의 소년을 배반하고 돌아선 姸이란 계집애도 이런 봄에 떠났더란다 
망건 쓰고 自轉車로 노구찌상을 찾아다니던 아버지의 喪輿도 이런 마을을 갔더란다 
자유를 달라!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대에 잡혀 간 아저씨도 이런 산에 숨어 싸웠더란다 
병든 어버이와 굶주린 아내와 철모르는 자식들을 멀리 생각하면 
전쟁과 평화와 민족반역자와 먼 날의 빛나는 조국을 생각하면 

산새야 산을 안고 
통곡하고 싶으냐 
그래 이렇게 가는 게란다 
뜨거운 손길의 미더운 벗을 찾아 
隊列진 산맥을 타고 가는 거란다 

산맥을 타고 서면 
아 저 넓은 하늘 
복사꽃 붉은 언덕에 
내가 섰구나

 

 

 

푸른수염고래

          - 정끝별 -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젖은 바다날개 소리를 내며
조용히 수면 위로 부상하는 긴수염고래
백 살 난 지느러미로 모래를 휘저으며
불길 같은 꼬리로 바위를 후려치며
긴 수염을 성난 바다의 목구멍에 밀어 넣어
바다의 깊은 울음을 건져 올렸던가
바다의 담벼락이 하늘 높이 일어서
둥근달을 베었던가 베어진 달이 떨어지며
긴수염고래의 횡경막에 박혔던가
긴 휘파람소리
푸른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던가
수평선에 쌓인 달빛을 향해 꼬리를 돌렸던가
긴수염고래의 핏줄기가 새벽별로 부서지며
떨고 있는 떡갈나무 아래로 흘러내렸던가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바다가 백년을 품고 있던 긴수염고래를 내밀고는
왜 빠르게 삼켜버렸는지는 비밀이다
바다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비밀이다
썰물이 진다 이제 눈꺼풀을 걷는 바다여,
청춘의 조난자로 하여금 울게 하라
삼켜버렸기에 한없이 푸른 것들을

 

 

푸른오월 
        - 노천명 -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앞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씬 
향수보다도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에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호납나물,젓가락나물,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푸른 유월

       - 博川 최정순 -

 

산과 들

푸름 덧칠하고

논밭 농작물 한창인데

해 지평선 걸려 어둠 내려앉을 때까지 

호미 낫 든 아버지 허리 구부리고

논길 밭길 어정거리다

가끔 담배연기 내품으며

북쪽 하늘 바라보고 서 있어

그때, 어리석은 딸년

그저 먼 하늘바라기하나 했었지

오늘, 논둑에 우뚝 서

아버지 어른거리는 모습 따라

아버지 눈길 머물던

저 먼 북으로, 북으로 내 마음 가네

평안북도 박천 고을로.

 

 
푸른 하늘을
     - 김수영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르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르른 날
            - 서정주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른곰팡이의 변명 
                  - 손 해 일 -


음습한 그늘과 시큼한 산성 
 습기는 네 벗이다 
 곰팡이, 박테리아, 바이러스 
 셋이 쟁패하던 30억년 전부터 
 지구상의 붙박이는 너희

 별똥별 사라지는 나락의 한 끝 
 빙하도 큰물도 
 너를 어쩌진 못했으니 
 푸른 곰팡이의 영혼 
 탄소 질소를 일용할 양식으로 
 젖을수록 불타는 성욕 
 포자 하나를 1천만개로 늘렸다 
 무좀, 백선, 어루러기, 캔디다균도 
 병주는 게 아니라 
 치열한 생존일 뿐

 대장균 박테리아 
 감기, 에이즈바이러스야 
 내력없는 미물이요 
 너야말로 10만종 족보의 진균(眞菌) 
되다만 사람 
 숨을 쉬다 말다 
 세포벽을 갖고도 
 못 움직여 식물인가 
 광합성은 못해도 
 유기질 먹고 사니 동물인가 
 아리송한 너의 정체

 우리는 
 양심을 좀먹는 곰팡일까 
 죄업을 띄우는 누룩곰팡일까 
 육신을 치유하는 푸른곰팡일까

 눅눅한 그늘에서 
 갈무리한 애틋한 사랑   

 

 

 

   - 김종해 -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을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풀2
     - 김종해 -

 

 

풀이 몸을 풀고 있다
바람 속으로 
자궁을 비워가는
저 하찮은 것의 뿌리털 끝에
지구라는 혹성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지상을 잠시 
빌어 쓰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풀은 흙을 품고 있다
바람 속에서
풀이 몸을 풀고 있다

 

 

 


   -  김수영  -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따기

         - 김소월 -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울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풀리는 한강가에서
                   - 서정주 -

 
江물이 풀리다니
江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江물은 또 풀리는가

기럭이같이
서리 묻은 섯달의 기럭이같이
하늘의 어름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이 江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밈둘레나 쑥니풀 같은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보라함인가
黃土 언덕
꽃 喪輿
떼寡婦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江물이 풀리다니
江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江물은 또 풀리는가

 

 

풀밭

       - 김석규 -

 

  해 설핏하면 풀밭에 나가 뒹굴었다.
  힘 없고 가난해서 정다운 풀잎의 마을
  청솔가지 타는 연기 냄새
  뿌리쪽에서 숟가락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양잿물 먹고 죽은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어두워오는 속에 하얀 이빨 드러나는
  아직 한 번도 이름 부르지 않은 풀꽃
  머리 위에 묻어 있는 노란 가루를 털어주며
  이 세상 가장 귀중한 목숨
  착하게 살아라. 오래 오래 살아라.
  여윈 볼이라도 마구 비벼대고 싶은 저녁 때
  자전거 뒤에다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중학생도 보인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주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풀잎

   - 권일송 -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그 눈 속의 우뚝한 무덤이 되고 싶다

 

무덤에 돋아나는 엉겅퀴와

가느다란 몸살의 햇빛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늘 깨어있는 한방울의

술이 되고 싶다

 

뺏고 빼앗기는 마음의 줄다리기

실상 사람의 말씀은

죽음 속에서 돌아눕는

조용한 풀잎의 새벽.....

 

언제까지나 외로운 이승의 뱃길

글썽한 눈물로 풀이하는

내마음 깊디깊은 곳

서걱이는 갈대의 수풀.


 

 

풀잎  
  - 강은교 -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않는 피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수 없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풀잎

    - 박성룡 -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이라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 ^6 236^풀잎^356 3^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 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풀잎

   - 김진경 -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소리 들린다.
  얼음 밑을 시리게 흘러가는 강물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풀잎 속엔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엄니야, 네가 돌아오는 벌판의 어둠이 보인다.
  돌아보면 세상은 언제나 흰 눈으로 등 뒤에 멈추어 있고
  빨갛게 젖은 귀가 비인 바람소릴 듣고 있을 뿐
  세상 어디에 언 손을 녹일 한 뼘 지붕이라도 있었느냐.

  엄니야,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소리 들린다.
  힘없는 글줄에 매달려
  농약 공장 하루 일
  물집 잡힌 네 손보다 못한 것을 시라고 부끄러워질 때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시린 강물소리 들리고
  매운 바람에 쏠리는 따가운 불티
  시리고 뜨거운 한 점 사랑.
  무수히 쨍쨍한 햇볕 속을 흔들려 온다.

 

 

 

풀잎(斷章)

          - 조지훈 -

 

무너진 성城터 아래 오렌 세월을 풍운風雲에 깍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 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 가짐도 또 한 실 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太初에 생명生命의 아름다운 분신分身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 -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풀잎의 영혼

        - 조윤호 -


  풀잎의 영혼은
  풀잎의 머리 위에
  돋아난다

  풀잎의 영혼은
  풀잎의 머리 위에
  그러나 그리 높지 않게
  돋아난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풀잎의 영혼도
  흔들리고

  풀잎이 비를 맞으면
  풀잎의 영혼도
  비를 맞는다

  풀잎이 푸르를 때
  풀잎의 영혼은
  더욱 푸르지만

  풀잎이 시들어 질 때
  풀잎의 영혼이
  먼저 시들고

  풀잎이 뽑히면
  풀잎의 영혼도
  뽑혀진다

  다시 돋아날 풀잎을 위해

 

 

 

   풍뎅이

      - 박의상 -

 

  풍뎅이가 벽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다.
  바로 앉지 못하고 누워서 파닥이는 것이
  등이 둥근 때문보다는
  등이 무거운 때문이리라
  열 두 회사의 사장 회장을 하는
  모씨의 종합병원
  벽에 날아와 부딪쳐 떨어진
  풍뎅이 한 마리가
  미국에서 온 것도 아니련만,
  그것을 상징하는 듯한 것은 웬일인지?

  풍뎅이의 작은 날개보다
  더 작은 나의 날개
  나의 이상.

 

 

 

풍매화

         - 하종오 -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파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풍장 (風葬.1)
               -  황동규 -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풍장(風葬)

      - 이한직 -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뜯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 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날마다 밤마다

나는 한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워했다.


깨어진 오르간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풍장

        - 이능표 -


  1
  노새가 지나간다. 붉은 흙먼지 속에 햇빛이 쏟아지고, 아직, 4월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추억은,
  쓰러진 밀대인가? 누군가 일으켜 세워주기를 기다리는 한 쓸쓸한 죽음
곁에서목놓아 울고, 확인하고, 가라앉는다.

  2
  풀씨가 날린다.
  섬에서 섬으로, 내 가슴에 밀려와 주저앉는 그리움도 풀씨를 받고 있다.

  3
  불타는 저 나뭇잎은 누구의 삶이 흔들리는 소리인가? 신록의 햇빛이 짧게
쏟아지고 뜨거운 바람이 뼈에 스민다.

  춥다.

  호흡을 멈추고, 창공의, 막막한 그리움에 귀를 가져다 댄다.
죽음으로부터 풀려나오는 저 불안한 죽음들, 바다의, 썰물인 죽음 곁에
놓아둔 너의 생전의 식기에 금이 가고 내 살을 증발시키는 바람의 내부에도
짙푸른 금이 가고 있다.

  4
  눈이 내린다.
  작은 바다 위에 큰 눈이 내린다.
  눈 언저리에 낮달이 부서지고
  생피를 뿌리며
  다시 눈이 내린다.

  5
  산불 속으로 걸어갔다.
  초록색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새떼들을 보았다.
  포물선 끝에 열린 하늘나라의 문, 나뭇가지가 겨냥한 창공의 일부,
일부... 어디서 눈이 내리고

  꽃잎이 피는가?

  바람벽 속에 누워 풍화하는 내 무모한 피, 피의, 그 푸른, 소금기, 알 수
없는 노래의 악보가 내 가려운 관절에 불씨로 가라앉는다.
  하여,
  사랑은 노을인가?
  그 사랑의 빙점에서 내 생애는 낮고 낮은 불빛으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것인가?

  6
  바람 속을,
  그
  단단한 아침을,
  걸어 갔다.
  마늘 밭 건너
  그 뜨거운 길목을.

  7
  바다가 운다.
  이제 꽃신을 신어야 한다.

 

 

 

   풍차

      - 홍윤숙 -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그리움에 맴도는 나뭇잎 하나
  붉은 색지처럼 손끝에 돌리며
  멋없이 멋없이 배회하는 날

  외로움이 진하면 거울을 보고
  거울 속 눈물에 번져나는
  희미한 얼굴

  붉은 연지꽃처럼 진하게 칠하며
  웃어도 보는
  뉘라서 알까만 배율의 양심

  보랏빛 새옷이랑 갈아 입고
  검은 머리 꽃이랑 꽂고
  나비 같은 마음으로 나서 보건만
  짐짓 갈 곳이 없는...

  너 없는 이 거리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내 마음은 부칠 데 없는
  가랑잎 엽서 한 장
  바람에 돌고 도는 장난감 풍차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붉은 양관 긴 층계를 내리면서
  문득 내 나이 이미 젊지 않음을
  생각하는 날

 


 

風土

    - 모윤숙 -

 

연옥色 별들이 자주 휘장을 달고

잠들어 버린 오양간 길을 지나

아가씨 들창에 탱자 몸매로 산뜻하다.

 

꿈이 그늘진 이마와

아쉬움에 초조한 눈매

저므럼 강물에

닻줄을 늘인다.

서리 먹은 동짓달

고달픈 층계로 오르다가

저- 깊은 靈感의 밑층에서

한여름보다 더 짙게 풍기는

장미들의 호소를 듣는다.

 

포근히 여며진 꽃살들이

불빛 입술을 여는 밤!

 

나는 그대들께 예언을 원치 않고

女王에게 보낼 찬양을 임내내지 않으련다.

호사스런 수레에 앉아

속마음을 숨긴 채 사랑을 찾아다니는

가엾은 미녀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마치 낮과 밤이, 어제와 오늘이

흘리는 눈물에, 망설이며 씻겨가듯이

여기는 습기로 뻗은 갈래길

오만과 고독이 가랑잎에 구운다.

시간이 되면 우리도 그렇게

치마를 감싸고 그밤에 참례하리라

더운 별들이 닻을 나린 항구까지

거기서 우리는 후회하며 숨져가는

마지막 불씨를 달래며

행복의 축제를 울리리라.

 

 

 

편도선

     - 이정숙 -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 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티끌처럼 작은 이 몸 하나,
  쓰러져도 더하기 빼기엔
  흔적도 없을 삼라만상.

  온몸 성하게 돌아갈 적엔
  삼천 번을 넘게 외던 이야기도
  첫구절부터 외국어였읍니다.

  영혼이 날개를 달아도
  헐벗은 몸 하나는 짐짝같아서
  도솔천 가는 길은 멀었읍니다.

  육신의 아픔, 사지의 즐거움이
  혼백까지 다스려 버려서
  찍어 바를 미안수도 없는 날이면
  산천초목은 주근깨투성이.

  팥알만한 편도선 한 알이
  부처님도 예수님도
  못 부르게 했읍니다.

  몸살이 팔다리를 꺾어오는 밤이면
  베드로처럼 세 번 이상 도리도리
  어려울 것 없는 파문.

  나에겐 맡기지 마십시오.
  춤추는 혼백의 날렵한 심지는
  소관 밖으로 밀려납니다.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 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편지

     - 문정희 -


     --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 여덟 어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 하나
  그것은 생이 아니라
  약속이예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는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읍니다.

 

 

 

     편지

      - 박제륜 -

 

  내 마음 적막한 때는
  바다 저편 나라 벗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전신
  오늘 내 쓰는 말도 이같이 애절하다
  벗이여
  어디에 나의 연인은 있느냐
  어디에 나의 행복은 있느냐
  아아
  인생의 거치른 바다 위에
  그 아름다운 섬은 헛되이 사라져 없어지고
  오늘의 나는
  기이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름 모를 항구와의 무역엔 실패하다
  다시 어느 지각을 저어
  거치른 물결 이는 마음을 잠 재우리.
  다만 여기에 남긴 인생은
  사랑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탕조차 아니어도
  젊음은 헛되이 늙으려 하고
  남은 가재는
  홀로된 어머니의 마음 동산의
  또 하나의 꽃의 향기를 뺏으려 한다.
  얼마나 나는 불효자냐.
  어느 지점에 이르르면
  나에게도 말하고 남는 자랑을 얻으리.
  벗이여
  편지는 오늘 내 마음 싣고
  너를 찾아 표박의 길에
  아름답게 꾸며진 한 척의 범선.
  벗이여
  사람에게 말하고 남는
  나의 큰 자랑이여
  멀지않은 시일이 지나면
  너에게서
  감격에 넘친 글발이 올 줄로 믿는
  오늘날 나의 적막한 마음의
  바램을 끊지 마라.

 

 

 

편지

     - 윤석산 -


오뉴월 꽃그늘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우체부는 산골 조카의 편지를 놓고 갔구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고 꽃씨를 떨구듯.  
편지는 활짝 종이 등을 밝히며 서로들 파란 가슴을 맞대고 정겨운 사연을 속삭이고 있구나 
찬연한 속삭임은 온 마당 가득한데, 꽃씨를 티우듯 흰깁을 뜯으면 샘재봉 골짜기에 산딸기 익어가듯 조카는 예쁜 이야길 익혀 놨을까. 모두 흰 봉투에 숨결을 모두우며 꽃내음 흐르는 오뉴월 마당으로 <석 산 이 아 저 씨 께> 
아, 조카가 막 기어다니는 글씨 속에서 예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구나.

 

 

 

편지3

     - 이성복 -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편지

    - 김필곤 -


  편지를 쓰겠읍니다
  내 고향 산수유꽃
  향그러운 편지를 쓰겠읍니다

  민들레한테도
  종달새에게도
  강가에서 만난 밝은 바람과
  그리고 그날의 흰 구름에게도
  아득한 편지를 쓰겠읍니다

  저승의 어머님께
  속죄의 편지를 쓰겟읍니다

  신문배달 소년과
  청소부 아저씨와
  지하철 공사장의 박형에게도
  심청이 누이와 '쏘냐'에게도
  억새풀 편지를 쓰겠읍니다

  그리고
  고요가 소소히 익는 밤이면
  내가 나에게도
  포도주빛 편지를 쓰겠읍니다
  가시나무 편지를 쓰겠읍니다

 

 

 

편지

    - 석병호 -


  5월의 하얀 찔레꽃 내음이
  들숲 오솔길에 깔린 아침 나절
  비로소 말문을 연 편지

  유년의 그날이 강물 소리로 흐르던
  갈대 잎 소리
  이제
  서녘에 떨어진 햇살을 모으며
  아득한 날들을 헤이는 눈속엔
  처음 날개를 단 하늘을 본다.

  바람이 한결 맑은 소리로 불고
  하늘을 탄 마음은 자꾸만 꽃잎을 피운다.

  비맞은 앞산엔
  산꿩 울음이 강변 물새소리로 뜬다.

  목함 속에 남아 있는 편지들은
  이제 주름살로 남아 있다.

 

 

 

편지

    - 이우영 -


  지금은 밤이고 가을입니다
  저 달도 시름겨운 밤이옵니다
  새벽달이 홰를 치는 모꼬지거든
  놋양푼에 정한수를 떠놓옵시고
  구름이 저 달을 가리우거든
  가락지를 정한수에 띄우옵소서.

 

 

 

평일의 관심

       - 윤성근 -


  뉴욕시, 45번가의 서쪽
  헬렌.헤이스와 모르스코 * 의
  * 헬렌.헤이스와 모르스코는 뉴욕시 브로드웨이 소재의 오래된 전통을
가진 유명한 연극 극장들.
  무대에 나타난 관객들--
  오늘날 모든 것은 끝나고 메말라졌다고
  아더 밀러는 부르짖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길거리마다 휴지들을 몰아갈 때
  그들의 갈채도 함께 저물 때
  2천여 명 노동자들은
  보도에 침을 뱉았다.
  한 조각의 빵과 안식을 위해
  그들은 그곳에 호텔을 세워야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자
  1473년에 나서 1543년까지 살았다.
  단 하나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1530년에 썼으며
  1543년에 출판하였다.
  최초의 공개옹호자는 G.부르노였고
  그는 화형당했다.
  아이자크 뉴톤은 지동설이 나온
  꼭 100년 후에 출생하였다.
  그로부터 모든 물상들은
  침울한 상승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안구의 안팎으로 샅샅이
  피곤한 물길들이 엄습한다.
  창밖에는
  황혼의 정지된 풍경으로
  문득, 시간은 멎어 있다.
  바람맞이 언덕 너머에서
  요 며칠째 돋아나는 이른 별 하나가
  오랜 외유 끝에 돌아온
  우리들의 또 다른 동행에게
  악수를 청한다.
  나의 불탄 채 꺼멓게 남아 있는
  무취의 어금니 하나가
  저 깊은 어둠의 수렁에서 떠오른다.

 

 

 

폐 염전

      - 문병란 -

 

  평생을 뻘밭에 바치고
  대대로 소금 구워 먹던 김생원,
  정든 고향의 뻘밭
  폐염전만 길게 남겨 놓고
  오늘은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뜨거운 유월의 햇빛 아래
  미닥질로 익어가던 영롱한 보석,
  산더미 같은 소금산 아래서
  땀방울도 알알이 여물던
  소금풍년 조개풍년 꼬막풍년
  그날의 어부가는 들리지 않는다.

  만선 소식 감감한 남해바다
  시름처럼 길게 누워 있는 뻘밭 위에
  햇살만 너훌너훌 춤을 추는데
  어깨 실한 돌쇠도
  궁둥이 실한 갑순이도
  가난만 남은 뻘밭을 버리고
  오늘은 어느 공단으로 떠나갔는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검은 폐수 뿐
  멈춰 버린 수차는 말이 없고
  허옇게 죽어간 폐각 위에
  기운 없는 갈매기만 
  폐촌의 적막을 쪼으고 있다.

  공장 지어 번성한 땅 위에
  소금까지 외국에서 사다 먹으니
  실직한 김생원
  뻘밭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오늘은 어느 공단 품팔이 되어
  아스팔트 위에서 맥주를 마실까?

  여기는,
  여천 공단의 검은 연기가
  간간 불을 뿜는
  삼일만 가까운 어촌,
  조개도 죽어가고
  꼬막도 죽어가고
  정든 갈매기도 죽어가고
  마지막 김생원도 떠나간 마을.
  주인 잃은 수차 위에
  6월의 햇살만 눈부시게 곱고
  근대화를 모르는
  빈 뻘밭만 맨살로 타고 있다.

  5남매 7남매 쑥쑥 뽑아내
  아기 잘 낳아 자랑스럽던 아내
  이제는 하나만 낳는 시대
  그 누가 소금쟁이 어부를 낳을꼬?

  먹는 입만 생각하고
  일하는 손은 계산 안하니
  새끼 낳는 것도 부끄러운 인생
  바다는 옛정을 못잊어
  뻘밭을 적시며 정답게 출렁거린다.

  어매야 아배야
  어디로 갔느냐
  떠나간 사공의 배따라기도 없이
  포구의 새악씨 이별의 손수건도 없이
  멈춰 버린 수차 위에
  병든 갈매기 시름없이 날 때
  용왕님도 떠나 버린
  텅 빈 사당 앞에
  미쳐 버린 똥개만 컹컹 짖고 있다.

 

 

플라타너스

             - 김현승(金顯承) -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놓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조지훈 시인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1920~1968) :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민속학과 민족운동사에 공헌 
한국문화사를 최초로 저술 
주요저서 : 조지훈 시선, 한국민족운동사 등 
1920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한 조지훈은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준 큰 시인이다.

 
  • 너에게 묻는다 / 안 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락선 / 안 도현

     

     

     

    네가 떠난 후 바다는 눈이 퉁퉁 부어 올랐다

     

    해변의 나리꽃도 덩달아 눈자위가 붉어졌다

     

    나는 너를 잊으려고 너의 사진을 자꾸 들여다 보았다

     

     

     

     

     

    섬 / 정 현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제비 / 김 소월

     

     

     

    하늘로 날아 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

     

    일정한 깃을 두고 돌아 오거든!

     

    어찌 설지 않으랴, 집도 없는 몸이야!

     

     

     

     

     

    만리성 / 김 소월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루 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

     

     

     

    가는 길 / 김 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이슬 / 유 경환

     

     

     

    풀잎 끝에 반짝이는 이슬이

     

    풀벌레의 거울로 달려 있다

     

     

     

    내 얼굴 보이나 들여다보면

     

    햇빛이 빙그르 돌아 버린다

    2015.05.02 20:56|신고
  • 윤동주 시가 짱입니다.

    2015.05.02 22:17|신고
  • 버들피리 - 강소천 

     

    아버지가 밭갈이하시는 시냇가 언덕에 

    나는 동생과 나란히 앉아 

    버들피리를 불었지요. 

    삘릴리 삘릴리 

    버들피리를 불었지요. 

     

    "이랴 낄낄, 이랴 낄낄." 

    소 몰아 밭 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들이 부는 버들피리 속에 한데 어울려 

    곱다랗게 곱다랗게 들려옵니다. 

     

    졸졸졸 속삭이는 시냇물 소리도, 

    음매애 음매 

    송아지 찾는 엄마소의 목소리도, 

    우리가 부는 버들피리 속에 한데 어울려 

    정답게 정답게 들려옵니다. 

     

    ----- 

     

    벙어리장갑 - 신형건 

     

    나란히 어깨를 기댄 네 손가락이 말했지. 

    우린 함께 있어서 따뜻하단다. 

    너도 이리 오렴! 

     

    따로 오똑 선 엄지손가락이 대답했지. 

    혼자 있어도 난 외롭지 않아. 

    내 자리를 꼭 지켜야 하는걸. 

     

    ----- 

     

    보름달 - 이종문 

     

    밤마다 밤마다 

    잠도 못 잤는데 

    어쩌면 포동포동 

    살이 쪘을까? 

     

    날마다 날마다 

    햇볕도 못 쬐었는데 

    어쩌면 토실토실 

    여물었을까? 

     

    ----- 

     

    보슬비의 속삭임 - 강소천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 

     

    봄 - 김광섭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어떻게 알고 

    새들은 먼 하늘에서 날아올까 

     

    물에 꽃봉우리 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비는 저승에서 펄펄 날아올까 

     

    아가씨 창인 줄은 

    또 어떻게 알고 

    고양이는 울타리에서 저렇게 올까 

     

    ----- 

     

    봄 시내 - 이원수 

     

    마알가니 흐르는 시냇물에 

    발벗고 찰방찰방 들어가 놀자. 

     

    조약돌 흰 모래 발을 간질이고 

    잔등엔 햇볕이 따스도 하다. 

     

    송사리 쫓는 마알간 물에 

    꽃이파리 하나 둘 떠내려온다. 

    어디서 복사꽃 피었나 보다. 

     

    ----- 

     

    비오는 날 - 김용택 

     

    하루종일 비가 서 있고 

    하루종일 나무가 서 있고 

    하루종일 산이 서 있고 

    하루종일 옥수수가 서 있고 

     

    하루종일 우리 아빠 누워서 자네 

     

    ----- 

     

    빛 - 정유진 

     

    나는 항상 직진 

    아무도 말리지 못해요. 

     

    나는 항상 일방통행 

    아무도 날 막지 못해요. 

     

    때론 오목이가 와서 

    우리 사이를 벌려놓아도 

     

    때론 볼록이가 와서 

    우리 사이를 모아놓아도 

     

    요것들아 

    그래도 

    나는 항상 직진이다. 

     

    ----- 

     

    사슴뿔 - 강소천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꽃이 피니? 

     

    ----- 

     

    산유화(山有花) -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새벽종 - 강소천 

     

    아름다운 새벽종 소리가 

    내 귓가에 날아와 앉는다. 

     

    민들레씨가 바람에 흩날리듯 

    종소리는 종 속에서 마악 쏟아져온다. 

     

    종소리는 맑은 공기를 타고 훨훨 날아 

    마을로 집으로 찾아든다. 

     

    종소리는 문틈을 새어 방 안으로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아본다. 

     

    일찍이 잠이 깬 아이들의 귓가에만 

    아름다운 종소리는 날아와 앉는대요. 

     

    ----- 

     

    새와 나무 - 이준관 

     

    새는 

    나무가 좋다. 

     

    잎 피면 

    잎 구경 

     

    꽃 피면 

    꽃 구경 

     

    새는 

    나무가 좋다. 

     

    열매 열면 

    열매 구경 

     

    단풍 들면 

    단풍 구경 

     

    새는 

    나무가 좋아 

    쉴 새 없이 

    나무에서 노래부른다. 

     

    새는 

    나무가 좋아 

    쉴 새 없이 

    가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 

     

    새하얀 밤 - 강소천 

     

    눈빛도 희고 

    달빛도 희고 

     

    마을도 그림 같고 

    집도 그림 같고 

     

    눈빛도 화안하고 

    달빛도 화안하고 

     

    누가 이런 그림 속에 

    나를 그려놓았나? 

     

    ----- 

     

    서로가 - 김종상 

     

    산새가 숲에서 

    울고 있었다. 

    바위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산새와 바위는 

    말이 없어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한단다. 

     

    바람이 구름을 

    밀고 있었다. 

    하늘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바람과 하늘은 

    말이 없어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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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최룡관 시비 2015-03-18 0 3924
271 김문회, 리근영, 박화, 최룡관 시비 (화룡 선경대) 2015-03-18 0 4375
270 심련수 시비 2015-03-18 0 3881
269 김파 시비 2015-03-18 0 4581
268 정몽호 시비 2015-03-18 0 3929
267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2015-03-18 0 5084
266 김학철 문학비 (도문 장안 룡가미원) 2015-03-18 0 4449
265 조룡남 시비 2015-03-18 0 4427
264 최문섭 시비 2015-03-18 0 4028
263 김례삼 시비 2015-03-18 0 4333
262 채택룡 시비 2015-03-18 0 3911
261 윤정석 시비 2015-03-18 0 4591
260 동시인 - 강려 2015-03-18 0 4035
259 정판룡 문학비 2015-03-18 0 4441
258 연변 문학비 순례 2015-03-18 0 4096
257 리태수 시비, 조룡남 시비 (룡정 일송정 내) 2015-03-17 0 4678
256 선구자의 노래은? 2015-03-17 0 4226
255 윤동주 시비 ㄴ 2015-03-17 0 3725
254 윤동주 <서시>의 새로운 해석 2015-03-17 0 4890
253 윤동주 시비 2015-03-17 0 3927
252 김성휘 시비 2015-03-17 0 4265
251 詩碑의 是非 2015-03-17 0 3935
250 리욱 시비 2015-03-17 0 4292
249 시평 절록/ 김관웅 2015-03-15 1 4919
248 "시지기 - 죽림"의 詩와 관련하여ㅡ(김관웅 평론) 2015-03-15 1 4467
247 시인 - 최룡국 2015-03-15 0 4320
246 시인 - 리련화 2015-03-15 0 4320
245 시조시인 - 최혜숙 2015-03-15 0 4381
244 시인 - 박룡철 2015-03-15 0 3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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