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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기
- 오정환 -
우리가 닿아야만 할
확신의 나라
가장 빛나는 마을어귀까지
나의 화차는 달리고 있다.
아직도 분별되지 않는
형상들의 정수
떨어져 쌓이는 좌절을 실어나르며
혼미의 동굴, 숨죽여 누운
어둠의 깊은 강을 건너
나의 불면의 화차는 달리고 있다.
잠들어버린 세상의 곤혹도
먼지묻은 온갖 생애마저도
뜨겁게 아프게 쏟아내면서, 나는
외줄기 불빛이 밝히는
마태복음 십삼 장 십삼 절
이사야의 예언의
하얀 소금이 되어 싸늘하게 살아 있다.
밤마다
밤마다 동결된 흙더미를 찍어내는
나의 야망의 삽날
은밀한 집중, 캄캄한 어둠
우리들의 가난 속으로
홀연히 하늘은 밝아올 것인가.
선혈처럼 뜨거운 금맥
끝없이 이어진
성스러운 새벽의 나라
가장 빛나는 마을어귀까지
나의 화차는 달리고 있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체념
- 김달진 -
봄 안개 자욱히 내린
밤 거리 가등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렬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하오.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첼로를 켜는 여인
- 김종문 -
무대는 여인의 차지다.
부푼 유방, 파인 허리, 부푼 만삭,
긴 머리채로 가리우고, 긴 팔로 가리우고
진동하는 저음, 아가의 고성을 묻고,
비트는 긴 모가지, 꼬아 붙이는 두 다리,
객석은 남자의 차지다.
추락은 가벼워 - 황인숙 -
그렇도다! 살아서 천국에 갈 수 없는 법이로다.
--비용
그건 난다는 것
날으는 길은 허공
(허와 공으로 길이 나다니!)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시여
땅 속 깊이 저는 꺼지나이다
위로 난 길은 너무 멀어
저는 지름길을 찾았나이다
그건 난다는 것
(허공 거울에 비친 공허)
어쩌면 아버지
받침대를 잃고 담쟁이 덩굴이
밑으로 자지러드는 건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시여,
나의 어머니 뿌리
땅 전체가 뿌리이며 중력은 그녀의 애정입니다
그건 난다는 것
당신의 경멸과 그녀의 중력으로
아뜩한 허공으로 난 길
공기와 나는 서로에게서 빠져나와
담백해지려고 서두른다
날면서 나는 죄, 혹은 의식을 토해내고
끊임없이 나를 용서하고
세계의 운율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숨과 교체하고
날아오를 때 나는
내가 무거웠나이다
안녕, 아버지
빛처럼 가벼이 나는
터지나이다
추석
- 신석정 -
가윗날 앞둔 달이 지치도록 푸른 밤,
전선에 우는 벌레 그 소리도 푸르리.
소양강 물 소리며 병정들 얘기소리,
그 속에 네 소리도 역력히 들려오고.
추석이 내일 모레, 고무신도 사야지만,
네게도 치약이랑 수건도 부쳐야지...
추삼제
- 이희승 -
벽공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를
드리우고 있건만.
낙엽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보니
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
남창
햇살이 쏟아져서
창에 서려 스며드니
동공이 부시도록
머릿속이 쇄락해라.
이렇듯 명창청복을
분에 겹게 누림은.
추억(追憶)에서
- 박재삼 -
진주(晉州) 장터 생어물(魚物)전에는
바닷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어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추억에서
- 박정숙 -
국민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머리 곱게 땋은 여선생님이
처음 부임해 오시던 날.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얼굴울 붉히고
수업도 제대로 못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에 와서야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울 줄이야.
가끔 하얀 도화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하얀 겨울을 그리라고 하시던 선생님,
나는 하얀 겨울 대신에
선생님이 자주자주 얼굴 붉히시던
그 순진한 모습을
도화지에 몰래몰래 담아 그렸다.
하얀 얼굴의 눈사람이 아닌
얼굴이 붉은 눈사람을 그려놓고
아이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야단법석이었지만,
선생님은 내 마음을 이시는지
싱긋이 웃으면서 "수"라고 적어 주셨다.
지금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선생님,
아니 마음씨가 고와서
자주자주 얼굴을 붉히시던 선생님이
12월 겨울의 문턱에서
누구의 그리움을 우는지,
하얀 눈이 아닌
부끄러운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린다.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 허영선 -
내가 아직 들풀이었을 때
벌판은 쏟아져 강으로 흐르고,
흘러서 나의 자유는
탓할 것 없었네
철든 바람과도 입 맞추고
목화처럼 번져,
하늘이 강물로 풀려서,
흘러서 돌아오는 강가에 서서
나의 자유는
오랑캐 꽃
미나리아제비
민들레 씨앗으로 날아오르던
내 살점의 꽃들
예감하는
소금기로도 남아 있었다
추일서정(秋日序情)
- 김광균 -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근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 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추운 벌레
- 이건청 -
마른 풀섶에서 울고 있는
푸른 벌에의 다듬이는 밤새도록
허공을 향해 흔들린다.
저들에게 지상의 추위는 너무 가깝다.
저들의 노래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수목들은 몇 개의 잎을 남기고
들판의 잡초들도 풀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서 있다.
살아 있는 저들을 위해서 나는
귀를 열고 다가선다.
저들의 작은 알들이 겨울을 지날 때까지,
저들의 슬픔이 별빛에 닿을 때까지.
추천사(楸韆 詞) - 春香의 말 (1)
- 서정주 -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추풍령
- 박산운 -
해가 지면 골짜기 물소리만 높아 가는
가죽나무 잎사귀 긴 초가 동리
죽은 듯 고요히 밤이 깊어 오면
못견디게 솟아오는 하늘 별빛 따라
어느 곳 내 사랑하는 이는 오늘도
연세 베 잉아 걸고 몸이 가늘어져……
아아 그곳은 내 노래의 요람 터
짐짓 내 노래는 그곳에서 자랐도다
서울이여 소란한 나의 도시
그는 불인 듯 또 나를 재촉하고
일찍이 땅에 묻힌 큰할아버지
황홀히 꿈을 안고 넘어선 이 재 위에
숨이 가쁘다 부르는 깊은 피리소리
인제는 나를 다시 또 서게 하느뇨!
―신선한 인민의 깃발에 열리는
바다, 서늘한 바다 속으로
보라 즐거운 새벽에 깨어 소리치며 나르는
나는 한낱 젊은 갈매기와도 같구나
―합동시집 {전위시인집}, 1946.
怖匐의 詩
껍데기 두꺼운 강냉이 알과
의복이나 낯바닥에 함부로 묻어오는
은혜의 밀가루도 마저 먹고
나 배탈이 나 방바닥을 이리저리
牛馬와 같이 포복하며
잠 못 자고 생각는 것은 무엇이뇨?
달밤에만 흐르는 미시시피
自由神 훨훨 하늘에 아름다운
노래에 남은 나라 아메리카―
한 번은 가고 싶던 아메리카에
굶주린 우리네 눈을 감기고
엄청나게 낸 빚도 빚이련 만은
입천장 데이고 웃음이 나던
우리 땅 白米가 하 그리워
牛馬와 같이도 포복하네
춘신
- 유치환 -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춘설
- 정지용 -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어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춘인(春因)
- 한하운 -
꽃샘바람은
꽃이 시새워서 분다지만.
초근목피에 주린 배를 채우면
메슥 메슥 생목만 올라
부황증(浮黃症)에 한속(寒粟)이 춥다.
노고지리는
포만증(飽滿症)을 새기느라
진종일 울어야 하지만
아예 배고픔을 내색않는 문둥이는
얼마나 울어야 하는 이야기인가.
굶주림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
아지랭이는
아지랭이는
비실 비실 어질병만 키운다.
春雨池塘歎無衣(춘우지당탄무의
- 매창(梅窓) -
春雨池塘歎無衣 춘우지당탄무의요
草中逢蛇恨不飛라 초중봉사한불비
封口生涯人若得봉구생애인약득이면
夷齊不食首陽薇이제불식수양미리라
둑을 적시는 봄비에 맨몸이 한탄스럽고,
수풀 속 뱀 만나 날지 못하는 이네신세.
만약 입 닫고도 살 수 있는 인생이라면,
夷齊도 수양산 고사리를 먹지 않았으리.
춘향
- 김영랑 -
큰 칼 쓰고 옥에 든 춘향이는
제마음이 그리도 독해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 일편단심
원통고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 첫날 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설움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의 외론 혼은 불리어 나왔으니
논개 !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 일편단심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 주는 도련님 생각
오 ! 일편단심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 잎이 창살에 선듯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을 새우다가 그는 고만 단상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 고을도 깨어지고
오 ! 일편단심
춘향 유문(春香 遺文) -春香의 말 參
- 서정주 -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맞나든날
우리 둘이서 그늘밑에 서있든
그 무성하고 푸르든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것입니다
천길 당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래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되야 퍼부을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거에요!
출항기
- 최문수 -
1
새벽을 퍼올리는 밤안개를 헤치며
노를 저었다, 서서히
불안의 바다 한 쪽을 열어
빙하기를 딛고 선 나의 입지를 저었다
눈물의 풍어가를 부르며
잠의 흰 등뼈를 타고
수없이 별똥이 빠지던 동경의 나라에
아, 불시착을 위하여
전생애만큼이나 힘닿는 노를 저어
멀리 수평선에 보이던 유빙을 만났다
저으면 저을수록 겨울 속으로 한없이 자맥질하며
눈발을 녹이던 건강한 물떼들
빙산의 일각, 시계의 끄트머리는
빙산의 하얀 비늘을 벗기고
매운 눈물에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어둠을 통째로 씹고 있던
섬을 보았다
2
접혀 돌아누운 기억과 꿈 쪽,
진실로 모든 것은 멈추어
태고로부터 찾아드는 굳은 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유년으로 지칠 줄 모르게 흘러드는
성좌들의 장엄한 행렬을 맞으며
20세기의 서러운 작은 돛 하나 마지막 불길 지피어
한 줄의 시를 담고 침몰한 목선의 이야기와
바다에 잠긴 일몰의 전설이
바람으로 불어왔을 때,
손끝에 느껴오던 팽팽한 시위
나는 힘차게 닻을 던졌다 한 해의 맨 끝에 서서
내일을 위하여 중량 없이 낙하하던 별빛 속으로
그때 서서히 안개를 걷으며
어둠은 타올라 은백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산을
보았다, 마치 내 유년의 영산처럼
육중하게 떠오르던 바다의 뿌리
원시의 눈발 위를 달리던 예지의 날개를 꺾고
수 세기 전 빙하 속으로 곤두박질치던
시조 한마리
섬의 흰 등뼈를 쪼고 태초의 폭설 위를 훨훨 날자
잿빛 바다로 우수수 떨어지는 수천의 꽃다발
아, 키가 모자라 깨금발로 보았다
내 어린 한 살은 점점 붉어져 아침 바다로 황홀히 빛나는 것을...
3
돌아오는 길에
나는 원양을 안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마리 싱싱한 정어리로
파닥거리며
이제사 아침을 몰고 오는 겨울 새떼들의
나직한 비상을 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수평선
나는 뱃머리에
날짐승의 흰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만선의 깃발에 미끄러지듯이
풍어의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마침내는 흰 눈을 따라
여명의 폭설로 쉴 새 없이 흩어 내리는 날개를, 날개를
초 가
- 이 육 사 -
구겨진 하늘은 묵은 얘기책을 편 듯
돌담울이 고성(古城)같이 둘러싼 산기슭
박쥐 나래 밑에 황혼이 묻혀오면
초가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고향을 그린 묵화 한 폭 좀이 쳐.
띄엄띄엄 보이는 그림 조각은
앞밭에 보리밭에 말매 나물 캐러 간
가시내는 가시내와 종달새 소리에 반해
빈 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도 부끄러워
술래 짠 두 뺨 위에 모매 꽃이 피었고.
그네 줄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더니
앞 내강에 씨레나무 밀려 나리면
젊은이는 젊은이와 뗏목을 타고
돈 벌러 항구로 흘러 간 몇 달에
서릿발 잎 져도 못 오면 바람이 분다.
피로 가꾼 이삭에 참새로 날아가고
곰처럼 어린놈이 북극(北極)을 꿈꾸는데
늙은이는 늙은이와 싸우는 입김도
벽에 서려 성애끼는 한겨울 밤은
동리의 밀고자인 강물조차 얼어붙는다.
초대장
- 황석우 -
꽃동산에서 산호탁을 놓고
어머님께 상장을 드리렵니다.
어머님께 훈장을 드리렵니다.
두 고리 붉은 금가락지를 드리렵니다.
한 고리는 아버지 받들고
한 고리는 아들딸, 사랑의 고리
어머님이 우리를 낳은 공로훈장을 드리렵니다.
나라의 다음가는 가정상, 가정훈장을 드리렵니다.
시일은 ^6 236^어머니의 날^356 3^로 정한
새 세기의 봄의 꽃.
그 날 그 시에는 어머님의 머리 위에
찬란한 사랑의 화환을 씌워 주세요.
어머님의 사랑의 공덕을 감사하는 표창식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개임을 가리지 않음이라.
세상의 아버지들, 어린이들
꼭, 꼭, 꼭, 와 주세요.
사랑의 용사,
어머니 표훈식에 꼭 와 주세요.
초롱불
- 박남수 -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 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를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초설
- 김은자 -
하릴없이 숫눈발 속에 다시 서노니 초경의 비린내 풋풋한 순수함이여.
너의 심부에 언제나 깊고 어둔 발자취를 남겼으되, 이 눈길 위에 다시
새로운 발자국. 오오 편편으로 흩어지는 하늘의 전신이 흰 북소리 둥둥
울릴 때 과거가 어찌 남김없이 용서받고 기억들이 어찌 위무 받느뇨.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번째 만남이듯 흰 눈썹 부비며 낯선 미명의
거리를 가노라. 미진한 기억 속에 흰 북소리 낮게 질주하고 빈 나무등걸은
바람에 부풀면서 시간 밖으로 무수한 기억의 휴지부를 날려보내도다.
해마다 한차례 심령 속에 하늘이 갈갈이 찢어지나니 묵은 기억의
모서리를 이지러뜨리며, 미지의 경험 속에 나를 미끄러뜨린다. 새로운
시간의 숫눈길 속에 그날의 풋풋한 순수로 유입하리라.
초설
- 유경환 -
겨우 발자국 묻을 만큼
가는 초설 나부끼는 골목에
아들아이 신자국 칫수가
얼마나 자랐는지
한 뼘에 한 치나 모자라던 기억에서
옆으로 웃는 송곳니 귀엽던
고무신 한 켤레 사들고 온 적 없는
이 아버지의 허실이
초설의 골목길 들어설 때
아버지의 사계를 돌아본다.
초야
- 노영란 -
정열의 채단으로 커어튼을 내리어라
헤리오드로오프의 향내 같은 수줍음
비단 숨결은 보랏빛 연륜을 수놓는다
엷은 밤빛에 빛나는 너의 얼굴은
오오 이밤의 주피터어
초토의 시 8 - 적군 묘지 앞에서 -
- 구상 -(具常,본명 具常浚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초 한대
- 윤동주(尹東柱) -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초혼(招魂)
- 김소월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촛불
- 황금찬 -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극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촛불
- 정태춘 -
1.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 오면
창가에 촛불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나를 버리신 내님 생각에
오늘도 잠못이뤄 지세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밤이 다 가도록
사랑을 불빛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를 버리신 내님 생각에
오늘도 잠못이뤄 지세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밤이 다 가도록~
2.
사랑을 불빛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를 버리신 내님 생각에
오늘도 잠못이뤄 지세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밤이 다 가도록~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밤이 다 가도록~
처용
- 김춘수 -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뽄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처용가
- 백무산 -
東京明期月良, :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入良沙寢矣見昆, :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 아아, 둘은 내 아내것이나
二肹隱誰支下焉古. : 둘은 누구의 것이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 본디 내 것이다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처용단장(處容斷章)
- 김춘수 -
□ 1의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 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 1의2
三月(삼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山茶花(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드는 南(남)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숫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山茶花(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 1의 3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廻廊)의 벽(壁)에 걸린 청동시계(靑銅時計)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또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 *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주(主)님 생일(生日)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 1의 4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軍艦)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1의 5
아침에 내린
복동(福童)이의 눈과 수동(壽童)이의 눈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가 되어
하늘로 갔다가
해 질 무렵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오곤 하였다.
한밤에 내린
복동(福童)이의 눈과 수동(壽童)이의 눈은 또
잠자는 내 닫힌 눈꺼풀을
더운 물로 적시고 또 적시다가
동이 트기 전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곤 하였다.
□ *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아침을 뭉개고
바다를 뭉개고 있었다.
먼저 핀 산다화(山茶花) 한 송이가
시들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넛 둘러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이들의 목덜미에도 불 속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 1의 6
모과(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지는 석양(夕陽)을 받은
적은 비탈 위
구기자(枸杞子) 몇 알이 올리브빛으로 타고 있었다.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쉬게 하는
어항(魚缸)에는 크낙한 바다가
저물고 있었다.
Vou 하고 뱃고동이 두 번 울었다.
모과(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장난감 분수(噴水)의 물보라가
솟았다간
하얗게 쓰러지곤 하였다.
□ 1의 7
새장에는 새똥 냄새도 오히려 향긋한
저녁이 오고 있었다.
잡혀온 산새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눈 속에서 눈을 먹고 겨울에 익는 열매
붉은 열매,
봄은 한 잎 두 잎 벚꽃이 지고 있었다.
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
비 개인 해안통(海岸通)을 달리고 있었다.
한 계집아이는 고운 목소리로
산토끼 토끼야를 부르면서
잡목림(雜木林) 너머 보리밭 위에 깔린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1의 8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찐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 1의 9
팔다리가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 1의 10
은종이의 천사(天使)는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수염을 달아 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조금 기운 천사(天使)의
어깨 너머로
얼룩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 1의 11
울지 말자,
산다화(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리워지고
바다는 비로소
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가벗은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설청(雪晴)의 하늘 깊이
울지 말자,
산다화(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 1의 12
겨울이 다 가도록 운동장(運動場)의
짧고 실한 장의자(長椅子)의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아이들의 목덜미는 모두
눈에 덮인 가파른 비탈이었다.
산토끼의 바보,
무르팍에 피를 조금 흘리고 그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봄이 와서
바람은 또 한번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겨울에 죽은 네 무르팍의 피를
바다가 씻어 주고 있었다.
산토끼의 바보,
너는 죽어 바다로 가서
밝은 날 햇살 퍼지는
내 조그마한 눈웃음이 되고 있었다.
□ 1의 13
봄은 가고
그득히 비어 있던 풀밭 위 여름,
네 잎 토끼풀 하나,
상수리나무 잎들의
바다가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언제나 거기서부터 먼저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이 있었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서(西)녘 하늘이 내 옆구리에
아프디아픈 새발톱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처용무 79
- 오환영 -
바다가 밀려 간 뒤
아산만 포구에는
고갱이 다녀갔다.
갯벌에 앉은
선체들이 한나절 꿈을 꾸며
겨울은 아직 멀리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북 쪽 하늘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며
낡은 목선엔
몇 조각의 나이팅게일의 가슴 뼈가
드러나 있다.
처용무 80
흰 비둘기 한 마리가
눈 녹은 얼음 물을 마시고 있다.
아직 목마른 봄은
어디쯤 와서 머물러 있을까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향유병을 깨뜨려
그녀의 안개같은 모발로 예수의 발등을
씻었는가
목마른 봄은
사마리아 어느 우물가에서
골고다의 하늘을
적시고 있는 것일까.
1961년의 강설
- 김종목 -
1
어둡고 질긴 밤이
연탄 난로 위에서 지글거릴 즈음,
우리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 시대의 비밀을 꺼집어내고 있었다.
녹쓴 손가락 끝에 집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어 들고
확실하게 다가오는 절망이라든가
혁명적인 우리의 피도 이야기하고
서로의 눈 속에 숨은 비밀도
손바닥을 뒤집듯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미리 준비된 약간의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그저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우리의 가난을
탁탁 소리내어 떨어내기도 하면서
한 시대의 울음을 어루만지듯
뻘꺽뻘꺽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2
약한 바람 앞에서도
자주 삐꺽거리는 싸구려 대포집에서
가장 고귀한 우리의 대화는
때로는 위험한 어둠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애국자가 어떻고 독재자가 어떻고
그저 주먹을 쾅쾅 내리치던
그해 겨울 밤,
우리는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자유를 보았다.
연탄 난로 곁에서 피에 젖은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의 귀를 피하고
저 순하디 순한 눈발의 귀를 피하면서
우리의 대화는 날카롭게 움직였다.
3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몸에 흐르는 애국심을 정돈하였다.
지껄이고 또 지껄여도
술집을 나오면 변함없이 눈이 내리고
한 겨울 내내 눈이 내리고,
우리의 가슴은 늘 비어 있었다.
순결한 눈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신음하는 우리의 한 세대를
내면 깊숙이 잠재우고 있었다.
우리가 찾는 부끄러운 단어들이
눈의 나라에 천천히 묻혀가고 있음을 보면서
귀가길에 날리는 내 슬픈 영혼은
그해 겨울 내내 잠들지 못했다.
천년의 바람
- 박재삼 -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천년 사랑
<작자 미상>
천년에 한 알씩
모래를 나르는 황새가 있엇단다
그 모래가 쌓여 산이 될때 까지
너를 사랑하고 싶다.
천년에 한 번 피는 꽃이 있었는데
그 꽃의 꽃잎이 쌓이고 쌓여
하늘에 닿을 때까지
너를 사랑하고 싶다.
학은 천마리 를 접어야
행복을 가져다 주지만
나 에겐 너만 있으면 행복하다.
하늘에 소중한 건 별이고
땅에 소중한건 꽃이고
나에게 소중한 건
바로 너란다.
한 강에 백원을 빠뜨렸을 때
그거 찿을 때까지
우리 사랑 하자.
예전에 모르던 사랑,
지금은 편안한 사랑,
나중에 편안한 사랑,
바로 너 란다.
장미 꽃은 사랑
안개 꽃은 죽음을 뜻하는데,
난 너에게
안개 꽃의 장미를 꽂아 주고싶다.
왜냐 하면
난, 너를 죽도록 사랑 하니까?
영혼이 맑은 당신
일생을 통해 만난
이 세상 다, 변해도
사랑 해요 영원히,
햇살이 눈부신 날
투명한 유리에
햇살을 가득 담고 싶다
너의 흐린 날에 주기위해.
사랑 한단 말이다,
사랑 한단 말이다,
사랑 한단 말이다.
천리향
- 김유신 -
차가운 땅에 피어
눈속에 뜨거운 잎을 펴는
그 속을 나는 안다.
향의 바다
출렁이며
끓어 오르는
혈기,
한쪽 가지로만 뉘워 놓는 바람.
겨울 한나절
순한 짐승들의 핏발선 눈동자로
솟아나는
너의 열망,
멀리서
너의 향그러움 듣는다.
바람에 흐르는
너의 영혼
뜨거운 몸짓을 본다.
천목
- 조석현 -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쩌면 천둥
갈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번개
도자기에
내 눈물을 찍어 바르고
먼 산울림
기왓골마다에
마른 비늘이
살아있는 붕어가
바람불면
때로는 천둥
때로는 번개
곰 나루
얼음 밑에서도
천수만에서
- 박천 최정순 -
운명이 된
쓰린 가슴 삭히며
안면도 영목항 떠나
효자도 지나는 뱃길
맥주거품 하얀길
꼬리 무는 선미파 뒤로
괭이갈매기 시김새하며 선회하고
수면은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거센 물살 몸 가누면서
이마 맞대고 속살거리는 조각섬들
옹기종기 동양화처럼 떠 있는데
거센 바람 외씨버선발로 뛰어가며
한 음 한 음 키운 처절한 한(恨)소리
이 섬 저 섬 휘돌다 허망하게 부서진다.
아득한 옛날의 지순한 사랑
가뭇없이 묻혀가고 슬픈 전설
파도길 타고 슬그머니 흘러들어
팔작지붕 처마끝 올라 앉은 바다제비
목놓아 소리하는 부침새 꺽음새는
미학의 절제 없이 제멋데로 출렁인다.
천생연분
- 최명자 -
아버진 엄마보고
예펜네란다
우리 예펜네, 저 예펜네
저 주책없는 예펜네
절대로 마누라가 아니다
울 엄마 아버지보고
웬수란다
저 웬수 술주정뱅이
저놈의 웬수
단 한번도 당신이 아니다
웬수와 예펜네가 단칸방에서
새끼를 다섯이나 낳고
한평생을 같이 살았다
난 이제야 깨닫는다
웬수와 예펜네는
전생에 인연으로 맺어진
천생연분이란 것을!
천안 함
- 박천 최정순 -
번개와 천둥, 폭우 속
격랑의 세월
참혹하게 파괴된 과거를 안고
벌거벗은 몸뚱아리로 우뚝 섰다는데
참혹하게 파괴된 잿더미에서
세상은 발전인지 퇴보인지
검은 세월 혼란만 가중되고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져 가는 전쟁
아버지의 머릿속
해마다 6월이면
악령처럼 되살아나는데
분단을 잊는 세대
아니, 잊게 만드는 정치술수에
아버지처럼 땅으로 잦아드는
오늘과 내일의 수많은 목숨들
아버지처럼,
죽어서 갈 곳 없는 구천의 영혼들이여!
천천리의 새벽비
- 이희자 -
말했다
밤새 옹크리고 내가
고하지 못한 말
문 밖에서 그가
전하고 있었다
어둠의 목을 감고
진종일 기다리던 조바심을
천천히 식히며,
숨겨온 말 낱낱이
쏟아놓고 있었다
아침이 가까워올수록
비는 점차 거세어지고
천천리 마을로 치닫는 그의
말소리도 빨라져 갔다
이젠,
어떤 것으로도 지킬 수 없는
기도실 안의 나
쉬임없이 부서져 내리는
사랑의 젖은 발길질에
온몸 내맡기고 있었다
철거민 1
- 박영근 -
어디일까, 주저앉은 신음소리를 밟고
잦아드는 망치소리를 따라
해가 기울고 판잣더미를 흔들며
캄캄하게 바람이 멱살을 잡는 곳.
알 수가 없네, 한길 건너 번지는 아파트 환한 불빛들 곁에
매달려 떨고 있는 깜부기 같은 얼굴들
구둣발 같은 것들이 무심히 밟고 갈 때
언제부턴가 작은 불길들이 오르고 밤을 따라
깊어갈수록 모여드는 사람들
알 수가 없네.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사시장철 어디서나
불던 바람 아니던가 한숨일랑 걷어차고
갈퀴손에 횃불 들고 어서어서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쏟아질 듯 잔별들도
찬 바람에 떨다가 먹장구름 속에 숨는 밤
밝은 하늘 너른 땅이 눈 앞에 넘실 가슴에 뭉클
눈물 짓는 사람들아 이 밤이 새고 해 솟으면
남는 것은 이름 석자 서슬 같은 인심일세
비켜서는 걸음걸음 반평생 어둡던 빛
큰 삽날로 베어내고 어서어서 집을 짓세
망치소리 치맛자락 속에 기어드는
아기 울음소리 밤새 솟아오른 하꼬방 위에
쇠망치소리 열두 살 순이 허기진 손바닥 위에
구호품 떨어지는 소리 잊혀질 것인가
김씨 오장육부에 화주 타는 소리
가자, 가자 또 어느 언덕받이 어두운
빗줄기 속에서 남쪽하늘을 바라볼 것인가
계고장 움켜쥐고 손이라도
흔들 것인가, 정이월 눈보라 건너
이 거리 저 바닥에
철없이 봄빛 쏟아질 때.
철길
- 김정환 -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쇠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끊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벼텨온 것은
그 위로 밟고 자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짖누르는
답답한 것이였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찿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 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 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방면으로 그리고 수원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 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치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져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 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을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자욱이 된다.
철모와 수통
- 이하석 -
철모와 수통은 우연히 만나, 조수 속 기우뚱 거리며
쓸려내려간다, 굴 껍질 딱딱한 바위 기슭에
때로 휴전처럼 쉬며, 탄혼의 질린 표정을
굴 껍질 밑에 서로 숨기면서. 망가뜨려진 몸으로 갖는
그들의 휴식과 비탄은 공허하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수고의 값도 없이.
오직 쓸려갈 뿐, 차가운 동해의 깊이 속에
내던져진 채, 끊임없이 밑바닥으로만 내려가면서.
몇 마리 광어 새끼들 눈 비비며 철모 속에
숨어든다. 밤, 인광의 흰 소금물 속에서
문득 철모의 한 끝이 떨어져 나간다, 붉은 녹의 껍질로만
사라져간 어둠 속만이 아프다. 광어 새끼들의
잠 속으로 몇 개의 불덩이가 지나갔다.
불덩이 쪽으로 열린 광어 새끼들의 꿈을 향해
수통은 막연히 속이 출렁거림을 느낀다.
죽음과 함께 병사의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 버렸던
물. 광어 새끼들의 잠깬 눈을 숨기는
바위 기슭, 수통의 헤진 구멍 틈으로
몇 방울 물이 고즈너기 흘러내렸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갈증도 남김 없이
오직 쓸려갈 뿐인 거대한 소금의 밑바닥에서.
철자법
- 문인수 -
겨울 포도원의 포도나무 넝쿨들은 줄줄이 팽팽하게 가로질러놓은 철선
을 따라 삐뚤삐뚤 끌려가고 있다.
그래, 삐뚤삐뚤 삐져나오는 이 철자법!
울퉁불퉁 만져지는 것이 거친 계류 같다. 결박당하지 않는 血行이 있다.
이걸 붉게 마셨구나 혹한의 한복판에다가 굵게 양각하는, 그렇게 계속
길 뚫는, 오 오매불망오매불망 가는,
자필의 끔찍한 기록이 있다. 달콤한 사랑,
첫눈
- 김윤희 -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 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첫눈
- 홍석화 -
낙엽지는 소리
네 관에
은장을 막는다
멀고도
가까운 길
지금
저승에서
구름 한장
돌아오고 있다
들리는 얘기론
올해
첫눈이
일찍 온다지
가슴을
떠나 버린
옥양목 두루마기
풀 비린내
첫날 밤
- 오상순 -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바다 속에서
어족(魚族)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涅槃)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운의 성모 현빈(玄牝)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 간다.
첫사랑
- 박남철 -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청개구리
- 백기만 -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차디찬 비 맞은 나뭇잎에서 하늘을 원망하듯
치어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미의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미 청개구리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물에 가서 놀았고,
또, <물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 갔었느리라.
알뜰하게 애태우던 어미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려 할 때,
그의 시체를 산에 묻어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모로만 가는 자식의
머리를 만지며 <내가 죽거든 강가에 묻어다고!> 하였다.
청개구리는 어미의 죽음을 보았을 때 비로소 천지가 아득하였다.
그제서야 어미의 생전에 한 번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뼈 아프게
뉘우쳐졌다.
청개구리는 조그만 가슴에 슬픔을 안고,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쫓아 물
맑은 강가에 시체를 묻고, 무덤 위에 쓰러져 발버둥치며 통곡하였다.
그 후로 장마비가 올 때마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였다. 싯벌건 황토물이
넘어 원수의 황토물이 넘어 어미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러므로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고는 먹을
줄도 모르고 자지도 않고 슬프게 슬프게 목놓아 운다.
청노루
- 박목월 -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년 그리스도께
- 유안진 -
숱한 남성을 짝사랑한 후에
가을숲이 되어버린 내 머리터럭
흙먼지만 날리는 사막같은 가슴
그 어디쯤서
그대는 발견되었는가
내 미처
보아도 보지 못하던 눈
들어도 깨우치지 못하던 귀
그 누가 열어주어
아아 한스러운
이 몰골
이 형색
그대 어찌
이제사
내 앞에 뵈었는가
청년 그리스도
나의 사랑아.
청동항아리
- 홍석화 -
해와 달과
별이 잠들어 있읍니다
숱한 슬픔으로 지켜온 오늘
구름 잠긴 목으로
기러기가 울고 있읍니다
악랑과 임둔도 아침 나절
새싹이 보고 싶어 물을 주었읍니다
천년 새싹을 기다리며
동해 바닷빛으로
성천강이 흐르고 있읍니다
청령포에 와서-자규시에 답함
- 이근배 -
1
물이 우는구나
겹겹의 일월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슬픔이 있었구나
흰옷 입은 어린 상왕
새 되어 토해내던
피묻은 가락 떨며
온몸으로 젖어 우는구나
뼈마디 마디 꺽으며
쓰러지며 흘러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이 우는구나.
2
낯선 겨울이 지나가고
봄풀이 돋는 청령포
늙은 관음은 팔을 늘여
제궁의 새를 기다린다
막아도 열리는귀
감아도 보이는 눈
그러나 입은 열리지 않는다
왕조의 검은 화살을 받고
이 외딴 숲에 쫓겨와
가슴 찢던 원통한 새의
못다한 말은 다 쏟을 수가 없다.
3
구름으로 떠돌다가
눈비되어 내렸는가
초립으로 하늘을 가린
숱한 충절들이 엎드려
이끼 낀 금표를 쓸고 있다
귀머거리 하늘을 떠받치고 선
돌탑에 굳은 촉루
춘삼월이 와도
자규는 날아오지 않는다
자규의 울음을 들을 줄 아는
제왕은 돌아오지 않는다.
청량리 역에서
- 최건 -
쾌청쾌청일요일청량리역아침
하늘의신호등도파란불내걸었다
광장에는물고일어나는유행처럼
배낭배낭의물결술렁거리고
햇살쪼아대는비둘기의몇발치뒤에서는
여행자한사람
담배꽁초하나줍고있었다
아침을일으켜세우듯빨아들이려
꽁초하나줍고있었다
가시오어서가시오
낡은빌딩음습한그늘빠져나가
신개발지편입지구푸석푸석먼지이는
마을도떠나고프로야구프로축구도떠나
산그림자밟고밟으면서
멧새울음싱그러운청솔바람마시어
오장육부만말고
변비처럼꽉막힌오살놈의양심훤칠하게
번영된시대의고속도로처럼
통로도뚫고
익숙해진만성류머티즘쯤고칠수있게스리
아파트뼈대같이직각처럼딩구는우리들미움
어둠속음모의칼날까지
데불고가시오슬은녹닦으면서
홀홀가시오
해기웃어스름청량리역광장
풀어헤쳐놓고담아온것풀어젖힐것도없이
시들어가는유행처럼훌쭉해진
배낭배낭들이꾸역꾸역기어나와
지하철입구쪽으로빨려들어가고있었다
비둘기이미둥지로들고여행자의모습간데없이
역사안에는제몸체보다더큰
반도의슬픔같은것저혼자
오지않는막차를기다리고있었다
밤깊도록웅크리고앉아
기다려도기다려도막차는오질않았다
청보리 밭에 오는 봄
- 손해일 -
진눈깨비 날리던 겨울엔
생솔가지 군불 지핀
아랫목 뜨신 맛에 살았다
이불 호청을 벗기듯
청보리 밭 살얼음 녹이는
돌 개울 물소리
비늘 돋친 바람에 실리는
씀바귀의 봄 몸살
은쟁기 보습에 뭉툭뭉툭
겨울이 잘려 나간다
젖은 나목의 가지마다
불을 켜는 눈망울들
오요요, 기지개 켜는 버들개지
몽정(夢精)하는 들녘
내 이제 들로 나가
더운 피 흐르는 대지의 흙살을 보듬고
꽃씨를 뿌리리라
청산도
- 박두진 -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가고 밤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청산도에서
- 博川 최정순 -
완도 저 멀리 남쪽
몇 마리 새끼 거느린
산 푸르고 물 푸르러 청산도(靑山島)
그러나 바닷길 요충지라 전란도 많았지
불쑥 솟은 매봉산 허위허위 올라 굽어보면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 진저리 치며
뱀처럼 구불거리며 좁다란 평야로 스며들다
아득히 펼쳐진 넓디넓은 바다에 발 적시네.
고샅 고불고불 둘레길 어깨 마주하고 늘어서
산 찾아 물 찾아 온 나그네 발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바람결 고개 끄덕이는 청 보리 파도 속
파랗게 일어나 서글프게 일렁이는 그리움 하나
느리게 느리게 님의 초분(草墳) 넘어간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懶翁禪師) 작시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 양성우 -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자부
- 박종화 -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려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빠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무늬
꽃무늬 백학무늬
보상화문 불타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냐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청자수병
- 구자운 -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가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프름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 지은 달이라커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려진 운학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어!
오, 저어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청자송
- 원용문 -
비바람 아득히 가고
기다리다 눈먼 세월
피울음 기인 목을
메아리로 뉘이다가
화석이 금가는 미학
청상의 고 매운 빛깔.
청댓잎 흩는 바람
적을 물고 날아가는
수석에 이끼 돋아
목숨이 한결 돋뵈고
티없는 추정을 깨고
깃사리는 청자 상감.
흙 속에 얼이 살고
얼이 살아 숨쉬는 태갈
놓으면 품위가 되고
들면 전설이 되는
고금을 구슬 꿰는 이야기
속엣말을 엿듣는다.
청 춘
- 사무엘 울만 -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한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 가는 것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雪)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氷)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청춘곡(靑春曲)
- 조명암 -
젊었을 때여 즐거워라
삼천리 하늘에 붉은 피 흐른다
이 가슴에
아, 북소리 둥 둥 둥
노래하자
해뜨는 동방에 웃음이 오린다
젊었을 때여 즐거워라
삼천리 하늘에 무지개 흐른다
이 마음에
아, 종소리 듸ㅇ 듸ㅇ 듸ㅇ
노래하자
꽃피는 이 땅에 사랑이 오린다
청천의 유방
- 이장희 -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별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 송이보다 더 아름다와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의 정이 눈물 겨웁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라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라지어다.
청포도
- 이육사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파동을 기억 하는가
- 최승자 -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차에서
- 박정온 -
눈이 날린다
차가운 것이 유리에 와 닿는다.
제각기 가야 할 종점-
마음은 어느 하늘을 달리는가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가는
지친 몸짓도
어둡게 살아온 흐린 눈망울도
손을 잡으면 정다운 이웃들!
십 이월 하늘은 북구라파의 표정을 하고
눈발이 세차게 휘몰아 오는데
아무도 말이 없는
이 차가움 속에
누구의 기침소리인가
비늘처럼 가슴을 찌른다
차 한잔
- 김정원 -
물빛이 도는 창가
짐을 풀어 놓은 큰 섬 하나를
잔으로 내려놓는다
하루 나그네의
흔들리는 땅 위에
한 순간 고요를 저어 본다
철이 들 무렵
어머니의 용서를 구하던
그날의 다사로움을 담고
아껴
한 모금씩 들며
깊은 겨울산의 명상을 부른다
떨리던 하루해가
빈 잔 속에서
바람개비로 돈다.
찻잔 앞에서
- 이지영 -
빈 가슴
채우질 못해
가만히 바라보는 너의 눈
몸과 영혼 불태워
흑진주에 담아
캄캄한 밤하늘에 별로 뿌릴까
티끌 없는 한마음
늘 헐벗고 비에 젖어
내 빈 찻잔의 공허
채우질 못해
가만히 매만지는 침묵의 손
찻집에서
- 김종목 -
방금 배달된 코피잔에서
따뜻이 뎁혀진 겨울을 보며
나는 외투깃으로 스치는 비발디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약속한 시간을
뚝뚝 부러뜨리는 성냥개비마다,
잠시 그리움이 찌직찌직 타오르다
하얀 재로 꺼진다.
차는 식어가고
음악은 누군가의 목청에서 피를 적시며
끝없이 끝없이 흐르는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삶의 비애를 달래며
석꼬처럼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때로는 기다림에 지쳐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시인이나 작가처럼
하루의 허무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이
더러는 이러한 아픔과의 부딪힘 속에서
무쇠처럼 단련되고
또 단단한 뼈대를 갖춘다는 것을,
스스로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나는 또 언제까지나 기다려야만 하는지.
낙엽같은 창문에서
누군가가 붉게붉게 흐느끼고
하얗게 삭아 있는 코피잔 위로
약속의 껍질을 소리없이 만지작거리면서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얼마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지.
착한 詩
- 정일근 -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숭어 새끼는 동어,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 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찬송(讚頌)
- 한용운 -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참깨를 털며
- 김준태 -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한 게 있는 것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 불어가면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회록
- 윤동주 -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취한 배
- 랭보 -
A.R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타고 내려올 때에
이젠 선원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어.
형형색색 말뚝에 발가벗긴 채 못박아 놓고서
인디언들 요란스레 그들을 공격했었지.
플라망드르산 밀이나 영국산 목화를 져나르는
선원들이야 내 아랑곳하지 않았지
나의 선원들과 더불어 그 소동이 끝나자
강물은 내 마음대로 흐르도록 날 버려 두었지.
격렬한 밀물 요동 속에 밀리며
어느 겨울 아이들 머리보다도 더 귀멀었던 나,
나는 헤쳐나갔지. 그리고 출범한 반도들은
그보다 더 기승하는 소동을 겪은 적이 없었다.
폭풍우가 해상에서 잠깨는 날 축성했고
콜크마게 보다 더 가벼이 떠돌며, 영원한 희생자들의
흔들 배라고 불리우는 물결 출렁이는 대로 난 춤추었지.
희한없이 열 날 밤을, 초롱불들의 흐리멍텅한 눈!
초록색 물은 시큼한 사과 속살처럼
어린애들에게 보다 더 부드럽게 내 전나무 선체에 스며들고
청포도주 얼룩들과 토해 낸 찌꺼기들이
키와 갈고리 닻에 흩어지며 날 씻었네.
이제 그때부터 초록 창공을 탐식하는, 젖빛의, 별들이 잠긴,
바다의 시 속에서 난 헤엄쳤지
거기엔 해쓱하고 넋 잃은 부유물처럼
이따금 상념에 잠긴 익사체가 떠내려오고
거기엔, 갑자기 푸르스름한 색깔들 물들이며, 태양의 불그스름한
번득거림 아래에 느릿한 착란과 리듬,
알콜보다 더 진하게, 우리의 리라보다도 더 드넓게
사랑의 씁쓸한 붉은 얼룩들 술렁이며 삭아갔지!
난 알고 있었지 섬광으로 찢어지는 하늘들, 물기둥들,
격랑들, 그리고 해류들을: 난 알고 있었지, 저녁녘,
붉게 달아오른 여명 그리고 비둘기떼들,
또 난 가끔 보았어, 인간이 본다고 믿었던 것을!
난 보았지, 신비로운 공포 점점이 박힌 나지막한 해,
머나먼 고대 연극의 배우들 모양의
길다란 보랏빛 응결체들을 비추는 태양을
저 멀리 출렁이는 수면을 굴리는 물결들을!
난 꿈꾸었지, 현란스레 눈 덮힌 푸른 밤,
서서히 바다위로 복바쳐 오르는 애무인양
놀라운 수액들의 순환
그리고 깨어나 노래하는 누렇고 푸른기 도는 인광들을!
내 여러 날 쫓아다녔지. 히스테릭한 암소떼처럼
넘실넘실 암소들을 덮치는 큰 파도들.
성모마리아의 빛나는 발이라도
숨가쁘게 헐떡이는 태양을 억누르진 못했을 꺼야!
짐작하다시피 난 부딪쳤네, 엄청난 플로리다주와,
꽃무리 속에 인간의 피부를 한 표범들 눈초리가 엉켜 잇었고
수레바퀴 테처럼 탱탱한 무지개들,
수평선 아래 바다의 청록색 양떼들과 어우러지고 잇었지!
난 보았네, 어마어마한 늪들이 통발처럼 삭아가는 것을,
거기엔 골풀들 안에서 거대한 바다괴물 통째로 썩어가고!
바다의 고요한 가운데에서 부서지는 물의 붕괴,
그리고 심연을 향해 카르릉거리는 원방의 물결들을!
방하들, 은빛의 태양들, 진주모빛 물결들, 잉걸불처럼 붉은 하늘들!
갈색 물구비 복판에 꼴사나운 좌초물들,
거기엔 빈대들이 할퀴버린 거대한 배암들
시커먼 냄새 풍기며 비틀린 나무들처럼 쓰러져가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 푸른 물결의 그
만새기들, 그 황금색 물고기들 노래하는 물고기들을,
꽃모양 물거품들이 항상 나의 출범을 어르고
형언할 수 없는 바람들은 시시각각 날개치듯 날 스쳤네.
이따금 극지들과 지대들에 지친 순교자처럼
바다는 흐느낌으로 내 몸을 부드러이 흔들어대며
노란 통풍창 뚫린 그늘의 꽃들을 내게로 올려 보내고
난 거기 쪼그리고 있었지 무릎꿇고 거의 넋 잃은 채.
섬 처럼 내 뱃전 위로 달라붙은 하소연을 뿌리치고,
글빛눈을 빈정거리는 새들의 똥무더기를 가르며
나는 떠내려갔네. 어렴풋이 날 스쳐간 혼백들
다시금 뒷전으로 잠잠히 가라 앉더라!
하여간에 난, 길 잃은 배 되어 머리카락에 휘감기듯
폭풍에 말려 새도 없는 창공으로 내던져 졌지.
모니토르 군함들도 한스조합의 범선들도
물에 취한 내 몸뚱아리 건지지 못했을 나:
자유로이 보랏빛 안개를 타고, 피어올라
불그스름한 하늘을 돌파할 나, 벽은 돌파하듯
훌륭한 시인들에 바치는 별미의 과일쨈처럼,
태양의 지의들이며 창공의 넝마들을 걸친 나:
반달 전구들 점점이 박혀, 미쳐 날뛰는 판자처럼,
검은 해마들 호송 받으며 달음질치는 나,
군데군데 타오르는 구덩이 난 군청색 하늘을
칠월의 몽둥이 삿대질로 무너뜨릴때:
50리 밖에서, 발정하는 베헤못과 어마어마한 말스트롬 돌풍이
우는 소리를 느끼며 전율하는 나,
푸르른 부동으로 영구히 실을 잣는 자, 나는
고대 흉벽들 늘어선 유럽을 애석해 하노라!
난 보았네 항성의 군도들을! 그리고 열관하는 그곳 하늘
항해자에게 열려 있는 섭들을:
- 바로 이 끝없이 깊은 밤들 사이에 그대 잠들어 달아나는 건가
백만의 황금새들, 오 미래의 활력이여?
하지만, 정말이지, 난 너무나도 흐느껴 울었네! 여명들은 비통하고
달이 온통 잔혹하고 해는 온통 가혹하고:
쓰디쓴 사랑은 취기 어린 마비 상태로 날 부풀렸네.
오 나의 용골을 터뜨리라! 오 날 바다로 가도록 하라!
내가 유럽의 물 갈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검고 차가운 웅덩이, 거기엔 향긋한 황혼을 향해
슬픔에 겨워 쇠잔한 한 아이 쪼그리고
가벼운 배 한 척 오월의 나비처럼 떠 있는 곳.
오 물결들이여, 그대들 무기력함에 휩싸인 나,
이제는 목화 짐꾼들로부터 그들의 자국 지울 수 없네,
깃발 들과 불길들의 오만함 가로지를 수 없네,
이제는 부교들의 험악한 눈들 아래에서 헤엄칠 수도 없네.
친구여
- 법정스님 -
나이가 들면
설치지 말고 미운소리,우는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 , 불평일랑 하지마소.
알고도 모르는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척 어수룩하소.
그렇게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친구여!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마소 .적당히 저 주구려
한걸음 물러나서 양보하는 것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친구여 !
던,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돈을 가젔다해도 죽으면 가저갈 수 없는 것
많은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많이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친구여 !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 돈은 놓치지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하오.
옛친구를 만나면 술 한 잔 사주고 불쌍한 사람 보면 베풀어주고
손주보면 용돈 한 푼 줄 돈이 있어야
늙으막에 내 몸 돌봐주고 모두가 받들어준다오.
우리끼리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라오.
침향
- 서정주 -
침향(沈香)을 만드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
나러 흘러내려 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담가 넣어둡니
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담긴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것입니다
만, 아무리 짧아야 2-3백 년은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은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드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육수(陸水)와 조류
가 합수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
들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
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
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
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분할 것도, 아늑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77년 가을
- 조정권 -
이삿짐을 꾸리다가 장롱 뒷벽 먼지 구덩이에서 찾아낸
결혼 사진첩을 아내는 애지중지 책더미와 함께 싸기 시작한다.
육개월에 한 번씩 소동을 벌일 때마다 들쑤셔지는 세간살이 속에서도
책과 사진첩은 의례 따라 가야 되는 것이라고 아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는 일체 상관할 바 없이
안심하고 허리에 매달려 따라오는 어린 것들과 같이
그러나 나는 반대다.
우리가 미련을 가지고 끌고 다니던 것
한사코 소중하게 모셔 놓았던 것들 가운데도
버려야 할 것은 너무 많고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또다시 긴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애지중지 정돈하려 하는 책과 기념사진첩
그 속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는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고
정이 되어 있는 과거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장식이 되는
그런 이로움은 이제부터는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한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더 좁디 좁은 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사람에게는
이삿짐이란 가벼워야 하고 간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칠월
- 한기찬 -
아침은 밤보다 더 심심하다
이슬 한 웅큼 머리에 끼얹고
빛이 되는 나무, 나무
달려드는 바람을 힘껏 뿌리치다
몸속 깊이 잠든 절벽을 깨우면
비로소 잎사귀는 모두 뿌리처럼 깊다
어린 힘은
어린 독수리, 자라려고
몸을 찢는다
피와 살이 한데 섞인
육혼 하나, 태아마냥
조용히 쉬고 있다
낮엔 알몸의 바닥까지 뒤집어서
흰 고무신 끌고
빛의 발톱 아래 선다
하늘은 어느 날개보다도 사나워
맹금 한 마리 땅에 내리지 못하고
벼랑에 산다
눈감은 그 안에 잠겨 있을
사나운 눈
실뿌리마다 매달려 있을 벼랑
먹이를 억누르는 힘으로
먹이를 물면
뒤틀리고 만다
몸을 움직여도 더는 자라지 않는다
그림자는 바위 속에서 부서지고
핏방울은 풀뿌리에서 멈춘다
이제 한줌의 평지도 가파르다
불에 닿은 천의 입술 스스로 다물려
다시 열리지 않는다
그 정신없음이 바람처럼 자유롭다
그 앉아있음이 햇살처럼 반듯하다
그 기울어짐이 빛줄기처럼 힘차다
빛에 싸인 바윗덩이는
산산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뿌리에 머리를 기대고 어두워지다
바람 한 줄기 마시고
저녁에 시든다
물보다 가벼운 꽃이
가슴에 떠서
평안히 흐른다
아아, 오늘 아
이마를 때리는
피 한 방울
누가 쥐었다 놓은 것인지
아프고
아직 따스하다
최익현
- 오태환 -
1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 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 같은 울음이 가려지겠느냐.
파도같은 분노가
그만 가려지겠느냐.
어둡게 쓰러지며 울고 있다.
희디 흰 도포자락
맑게 날리며
성긴 눈발, 뿌리고 있다.
눈감고 부르는
사랑이 무심한 시대에
하염없이 하염없이.
2
바다가 보이는 곳
한 채의 유림이 춥게
눈발에 젖어 있다.
희고 작은 물새 하나가
끌고 가는 을이
이후의 정적
너무 크고 맑구나.
서럽게
서럽게 황사마다 사직의
흰 뼈를 묻고
일어서는 낫, 곡괭이의
함성이 들린다.
불길 타는 순창의 하늘
말발굽 소리의
눈발, 희미하게 날린다.
문득 돌아다 보아
무심한 이성의 들판
거칠게 대숲 쓰러지는
얼굴이 더 이상
서책도 필묵도 아닌데
자주 찬 바람이 일고 있다.
몇 닢, 눈발을 따라.
3
얼마를 더 용서하고
이 이상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려야 하랴.
자꾸만 하늘빛은
낮은 곳으로 모여들고
뇌성같은 마음
다 하지 못한 난세의 꿈은
그냥 한이 되고
물살이 되고 만 것을
왜 저리 눈발은 화사한지.
지척마다 희게
몰려서 날으는지.
깨끗한 두 눈알이 남아서
적막에 이르는
바닷길은 너무나 멀다.
조금씩 세상의 저녁은
어두워지고
푸르고 큰 바다는 저렇게 잔잔한데.
무정함도 간절함도
없이 저렇게 조용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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