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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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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24분  조회:5750  추천:0  작성자: 죽림

하관
      -  박목월  -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하나씩의 별

         - 이용악(李庸岳) -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하나의 슬픔

        - 신동집 -

 

하나의 슬픔이 태어나기 위해선 
적어도 1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의 슬픔이 삭기 위해선 
적어도 노래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1억 년의 시간이 또한 필요하다.

 

하나의 슬픔이 타락키 위해선 
타락하여 달짝한 설탕물이 뒤기 위해선 
얼마나 또 시간이 필요할까.

 

암층속에 박히 고생대 
화석은 이를 알리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이를 알리라.

 

 

하늘
     - 서정슬 - 동시


하늘이 바다에서 내려왔어요
새들이 고기떼 속에 놀고 있네요

하늘이 샘터에 내려왔어요.
구름조각 새물로 휑궈가려고

하늘이 우물에 내려왔어요
두레박으로 구름조각 건져볼까요?

 

 

하늘

   - 박두진 -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하늘에 쓰네

       - 고정희高靜熙 =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땃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하루만의 위안 
       - 조병화 -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하얀 카네이션

              - 博川 최정순 -


자식 농사 소박하나 구순하여

아이들 명랑하고 씩씩하니

저승 가면 조상님 뵐 면목  선다며

서쪽 하늘 보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

아버지 낳으시고 아껴준 어진 은혜

염치 없는 핑계로 피하고 피하다

창졸지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니

아쉽고 그립기 그지 없어라

 

목 매어 불러도 대답 없는 북녘 고향

그리고 그리다 지친 한 많은 세월

가슴앓이 하던 아버지 가신 지 몇 년 지나

하늘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모으고 모아 어렵사리 시집 펴내니

북에서 온 혈육 언니 시집 보고

인연인지 기적인지 기별 닿아

어버이 날 영전에 꽃 두 송이 바치니

부족하고 부족한 딸들의 회한

 

아버지 가슴처럼 숯덩이 같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며

딸들이 올린 하얀 카네이션 달고

아이처럼 밝게 활짝 웃고 계시네

 

 

하여지향(何如之鄕

             - 송욱 -


솜덩이 같은 몸뚱아리에
쇳덩이처럼 무거운 집을
달팽이처럼 지고,
먼동이 아니라 가까운 밤을
밤이 아니라 트는 싹을 기다리며,
아닌 것과 아닌 것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모순(矛盾)이 꿈틀대는
뱀을 밟고 섰다.
눈 앞에서 또렷한 아기가 웃고,
뒤통수가 온통 피 먹은 백정(白丁)이라,
아우성치는 자궁(子宮)에서 씨가 웃으면
망종(亡種)이 펼쳐 가는 만물상(萬物相)이여!
아아 구슬을 굴리어라 유리방(琉璃房)에서  
윤전기(輪轉機)에 말리는 신문지(新聞紙)처럼
내장(內臟)에 인쇄(印刷)되는 나날을 읽었지만,
그 방(房)에서는 배만 있는 남자들이
그 방(房)에서는 목이 없는 여자들이
허깨비처럼 천장에 붙어 있고,
거미가 내려와서
계집과 술 사이를
돈처럼 뱅그르르
돌며 살라고 한다.
이렇게 자꾸만 좁아들다간
내가 길이 아니면 길이 없겠고,
안개 같은 지평선(地平線)뿐이리라.
창살 같은 갈비뼈를 뚫고 나와서
연꽃처럼 달처럼 아주 지기 전에,
염통이여! 네가 두르고 나온 탯줄에 꿰서,
마주치는 빛처럼
슬픔을 얼싸안는 슬픔을 따라,
비렁뱅이 봇짐 속에
더럽힌 신방 속에,
싸우다 제사(祭祀)하고
성묘(省墓)하다 죽이다가
염념(念念)을 염주(念珠)처럼 묻어 놓아라.
'어서 갑시다'
매달린 명태들이 노발대발하여도,
목숨도 아닌 죽음도 아닌
두통(頭痛)과 복통(腹痛) 사일 오락가락하면서
귀머거리 운전수(運轉手)  
해마저 어느새
검댕이 되었기로
구들장 밑이지만
꼼짝하면 자살(自殺)이다.
얼굴이 수수께끼처럼 굳어 가는데,
눈초리가 야속하게 빛나고 있다며는
솜덩이 같은
쇳덩이 같은
이 몸뚱아리며
게딱지 같은 집을
사람이 될 터이니
사람 살려라.
모두가 죄(罪)를 먹고 시치미를 떼는데,
개처럼 살아가니
사람 살려라.
허울이 좋고 붉은 두 볼로
철면피(鐵面皮)를 탈피(脫皮)하고
새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들창처럼 떨어져 닫히며는,
땅꾼처럼 뱀을 감고
내일(來日)이 등극(登極)한다.

 

 

하회에서

      - 김종길 -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 늙은 종손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대감 구택 충효당 뒷뜰,
  몇그루 모과 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학교

    - 이승훈 -

그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는 책상이 
많았습니다 
그는 책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의자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가 의자에 앉자 
그만 의자가 부서졌습니다 
[이런 개새끼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학생들이 마악 
웃었습니다 
그는 공부할 게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그만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젠 끝난 거야] 
그리고 그는 웃었습니다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 김해강 -

 

  학도 아니면서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을 모르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날만 새면 뭇 참새
  떼지어 지절대도
  조으는 채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비바람
  번개가 날리고 우뢰가 흘러도
  천 년인 양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오욕과 허화의 도가니 속
  어지럽고 시끄러운 실의의 나날에도
  한가한 손님같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가나
  시장마다 악화가 판을 치고
  흙탕물 도도히 거리를 휩쓸어도
  오연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해는 빛을 잃고
  꽃밭은 향기를 잃고

  눈이랑 무너지듯
  하늘은 무너져도 무너져도
  으젓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금촉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도
  끝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징그러운 비늘에 온 몸이 휘감겨도
  그저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흙 썩는 냄새만
  코를 찌를 뿐
  바위틈 콸콸 샘 솟고,

  하늘 한 자락 파랗게 깔린
  아름다운 해뜨는 동산
  삼삼한 솔밭도 아닌데

  춤 너울너울
  빛 풍요로운
  눈부신 아침도 아닌데

  언제나 고고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도 못추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한가위.1

         - 이영걸 -

 

  우련한 능선들은
  안개 속에 이어지고
  길 옆 코스모스
  바람에 나부낀다
  언제부터 내려오는
  한가위 명절인가
  묵직한 호박 덩어리
  저 아래에 누워 있다
  고향 잃은 사람들의
  그리움도 간절하리
  버얼겋게 익은 벼는
  가을비에 젖고 있다.

 

 

 

  한가윗날에

         - 이혜선 -


  오늘은
  햇빛 밝은 가을날
  오곡이 무르익어 더욱 밝은 날
  이 나라 하늘 땅 하그리 많은 새들이
  하늘빛 닮아 마음 흰 학들이
  달빛같이 흰 날개를 달고
  산마다 들마다 무리지어 만나는 날

  이 나라 황토흙 분이라도 피어
  언덕 위의 새빨간 감 가지의 감같이
  저마다 한 덩이 쪼대흙되어
  저마다 한 뿌리 진달래되어
  만나서 껴안고 정에 겨워 웃는 이
  만나서 볼 부비며 울음 우는 이

  오래 전 흙으로
  고이 돌려보낸 피 한 사발
  오늘 비로소 새 한 마리 오누나
  이 나라 하늘 떠도는 맑은 빛되어
  이 나라 기름진 땅 흐르는 물되어

  돌아와 볼 부비는 날
  껴안고 불타오르는 날
  산에서
  들에서
  떨어지는 잎새 위에
  햇빛 밝은 풀꽃 위에
  한 줄기 향연되어 타오르는 날
  저 어둠에 잠긴 혼불도 불러
  밝디밝은 보름달로 떠오르는 날

  오늘은
  조선사람들을 만나는 날
  장롱 깊이 간직한 날개옷 꺼내 입고
  남쪽나라 북쪽나라 넘나들며 만나는 날
  하나되어 만나는 날

 

 

 

한강을 보며

          - 김사인 -

 


  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 때
  그러나 눈 있는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 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는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쓰림을 부둥켜 안고
  가거라 속 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 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 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한국의 아이

          - 황명걸 -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남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맹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빚과 함께 남겼단다
  뼈공이 부숴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이야
  혈혈단신의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올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나라 생각
         신채호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서 베면 
고우나 고운 
핏 덩어리가 
줄줄줄 흘러 
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덤썩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자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한복 
   - 박목월 -


품이 낭낭해서 좋다. 
바지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치면 
그 푸근한 입성.

옷 안에 내가 푹 싸이는 
그 안도감(安堵感)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발(毛髮)은 거품으로 일어 
먼 해안선(海岸線)으로 벋어가며 어는데 
귀는 다른 바다의 소리를 듣는 요즈음 연령(年齡)을 
눈은 쌓이고 
바람은 언 땅 위로 휘몰려도 
햇솜을 푸짐하게 놓은 한복.

그것은 입성이 아니다 
비로소 돌아오는 질기고 너그러운 
숨결이 베틀질한 씀씀한 생활. 
육신(肉身)을 싸안아 육신(肉身)을 벗게 하는 
무명바지 저고리에 옥색을 물들인 한복(韓服).

 

 

 

 

한 발로

          - 노진선 -


  두 다리로 말하는
  방정식이 비끄러져
  서는 만치 간편한 한 발로
  새로 빗는 계율

  징검돌 투성이인 강기슭은
  살여울물 흔들리는 세파
  기우는 몸매로 모래알을 짚고
  두리번거리는 두 다리 사이
  굽 높은 강둑을 온 몸으로 넘어

  물을 쪼던 먹황새가
  외다리로 서는 슬기로
  시름 잊은 표본실 유리눈이 되고

  겨눈 허리통을 쓰다듬어
  앞서 가는 발걸음을 짝수로 말하며
  앙감질로 홀치는 횡단로

  두 다리로 말하는
  율법에 싫증이 나
  간편한 한 발의 곡예로
  홀수뿐인 줄타기를 셈하려나
  이낀 낀 징검다리를 가늠하려나.


 

 

한밝뫼

     - 박천 최정순 -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0.1㎦ 화산재

유럽 항공대란 일어났는데

먼 옛날 한밝뫼(白頭山)  화산 폭발

10배나 100배 넘는다,

전문가 분석 있었지

발해 거란에 멸망한 것

한밝뫼 대폭발 때문

원귀만 늘어갔었고

오늘도 이산가족 한밝뫼 주변

원혼으로 떠돌다

하늘 못(天池) 고여 

20억t 물 되었네.

전쟁 상흔 안고 살다

죽은 수많은 눈물

어찌 아버지뿐이랴

답 없는 탁상공론 뱀 떼 출몰하고

원귀 마그마 되어 오늘도

한밝뫼가

소리 없이 대폭발 한다.

 

 

한수이북

       - 김영안 -


  강북의 하늘엔 쌕쌕이 두 마리
  곡예를 부리고
  파주 문산 동두천 포천
  자꾸만 죽음 같은 전선이 남하한다.

  그린벨트 +
  이전촉진지역 +
  작전지역이면 
  하늘 밑 지표에
  감히 발댈 곳이 없다.
  태아가 머리 밀고 나올 곳이 없다.

  녹음 속에 있던 갈비집은 하나 둘
  문을 닫고
  꿩 토끼 은여우 농장뜰도
  강남으로 쫓겨가고

  발칸과 헬기장이
  형제봉 일곱 봉우리를
  여대생 유방처럼 도려 내고

  북이 막히고
  남이 터진
  명당을 잡아
  우물 파고 마당 들여 살라치면 금방
  탄약고가 들어와 진을 치고

  봄이 와도 철물점이 뇌졸증처럼 잠을 잔다.
  버려진 땅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를 베고
  시꺼먼 침묵으로 죽어 누운 땅
  나로 하여금 뜨거운 조국애로
  동네를 지키며 살게 하라
  활화산 같은 자유의 이념으로
  민주주의의 농토를 갈며
  북진하게 하라 조국의 땅
  휴전선 155마일까지
  도처에 애국 청년들이 살아숨쉬게 하라
  그리하여 해주 사리원 신의주까지
  훌륭한 민주주의를 갈고
  북진 운산 용원 금광을
  우리 손으로 캐 나르게 하여라.

 

 

 

한설

       - 博川 최정순 -

 

한설 무렵

평북 박천 봉화리 마을

사나흘 굶긴 매 방울 달아

꿩 사냥 나서면

날 선 冬天 鮮碧에

은 이불 덮고 누운 산하

매와 날리는 휘파람 

산 허리춤 조카들 그물망 포위

매 꿩 포식 전 방울소리 듣고

구럭 무게 커져간다.

 

꿩 깃털 넣어 푹신한 베개 만들고

발갯깃 먹물 뚝뚝 수묵 담채화 치고 

꿩 꽁지 잉크 묻혀 쓰던 일기 덮으면

 

가마솥 꿩 뼈 우려낸 국물

김치 꿩고기 다져 넣은

입 안 가득 채우는 주먹 꿩 만두

고향 설 풍경

아버지 이제, 함께 하겠지요.

 

 

한 송이

        - 정현종 -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詩想에 잠기셔서......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쪽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를 예감하노니......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같은 여자, 
시집(詩集)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 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 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하나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한 잎의 여자 3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늘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같은 여자 
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감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 
물푸레 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한 자락의생

         - 원재길 -


  1
  한 자락의 바람
  한 자락의 햇빛
  가늠자에 고이는
  어린 새의 한 자락 날개
  그리고
  모든 한 자락을 꿰뚫는
  탕!

  달려갑니다 무삼 뜻 흘리며 쫓기듯 그러나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길 골라
그림자 앞질러 달려갑니다 어린 아이 우마차 포플라 상그럽게 부딪는
눈이란 눈 모두 헤치며 달려 갑니다 누군들 잡을 수 있겠읍니까
어머니마저도

  얘야, 잘 디디거라.
  아직 발 마음껏 뻗고
  꿈 한 편 만들 수 없었을 적에
  잠 속에 흘린 땀까지 닦아주시던
  어머니.
  얘야, 들짐승이 많구나.
  꽃말 일일이 일르시며
  포충망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
  얘야, 정녕 마음 안 놓여라
  네 날개를 잡고 있구나.

  2
  입상, 1982년 겨울
  부서질 얼굴 더 남지 않아서 긴 잠을 잡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주머니,
짧은 거리를 반 원 그리며 조용히 율동할 줄 알고 가끔은 사랑도 나눠주고
싶은 그런 여자는 없겠는지요. 불 붙는 겨울 소리없이 식는 이마 들판의
모든 풀 모든 살기를 태우며 눈의 고독 얼음의 합창--얘들아 계속 노래를
불러다오. 불러도 돌아가지 말아라--속으로 떠나렵니다. 그 뒤에 내 얼굴
조각 남거든 주워서 손거울이나 삼지 그러세요.

 

 

 

한 잔 포도주를

      - 임 화(林 和) - 


찬란한 새 시대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향(芳香) 우에

화염같이 붉은 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은

뼛속까지 취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승리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를 후회하지 않는다

승패란 자고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로하지 않는 것이다

적*에 대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결별에 임하여 무엇 때문에

한 그릇 냉수로 흥분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코 위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는 붉고 애인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의 단란과 고요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가는 슬픔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잔 냉수로 머리를 식힌 채

화려했던 희망과 꿈이 묻히는

무덤을 찾느니보단

아! 내일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해설지라도

꽃과 애인과 승리와 패배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로 찬미할 수 있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벗들아! 축복의 붉은 술잔울 들자


* 적: 원 발표문에는 '그녀(彼女)'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시집 {찬가}(1947)의 발표를 따랐다.

 

 


한 잔 혹은 두 잔

              - 김영태 -

 

  시고 텁텁하고 쓴 잔 받으세요
  같이 사는 세월 받으세요
  한 잔 두 잔 석탄 백탄 받으세요
  말탄 고추 가루 가랭이 좆대
  이쁘다 이뻐 너는 이뻐 인마 너는 이쁘다 이쁘지 이뻐 받으세요
  양복쟁이도 한 잔
  한산모시 두루마기에게도 한 잔
  수염단 풍각쟁이 한 잔
  덕대같은 건너편 왈패에게 거푸 한 잔
  총독의 소리 오동추야 우리 구보에게도 한 잔
  이 거리 저 읍내에서 또 한 잔
  웃으세요 웃으세요 오래 웃으며 많이 많이 속으로 우세요
  개울가에서 멱 감다 한 잔 숲에서 한 잔
  연탄광에서 한 잔 뜻 있는 곳에 뜻끼리 두 잔
  이마를 맞대고 코가 비뜰어지게
  겹잔 처마밑에 날나리들이
  깜부기들 바지저고리 머리 위에
  근사한 달이 조명이네요
  조명 안주삼아 이판사판
  뜻 있는 곳에 열 잔

 

 

 

한줄기 눈물도 없이

                      - 박인환 -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전
제트기 박겨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각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함곡관 밖으로 가는 길에서

            - 이효윤 -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다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배암 한 마리를 본다.

  산하는 이미 청색 깃발을 내리고 황색 깃발을 게양하는 여름도 끝 그금밤
어디쯤인가 본데.

  한 뿌리에서 태어난 콩은 솥에서 울고 콩깍지는 아궁이에서 울며 오늘
아침도 이름만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행렬의 발자욱 소리.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해 징그러운 언어들의 비늘을 달고 2연과 4연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냇물의 그림자여.

  작대기를 들고 쫓아가서 단번에 두 동강 내버리고 다시 휘파람 불며
함곡관 밖으로 길을 재촉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항아의 노래

       - 정상일 -

                           

인간의 봄날은 짧았습니다

사랑도 잠깐이었지요

당신 어깨 위에 하염없이

날리고 또 날리던 꽃잎은

이제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한 치의 목숨에

어이 그리도 기나긴 시름은 지었던지요

나 당신께 죄도 참 많이 지었습니다

마음 오로지 하여 사람을 믿지 못한 까닭에

이제 이렇듯 차가운 허공에 홀로 떠서

외롭다고

아, 외롭다고 어두운 눈물 글썽일 때

당신도 그 달 쳐다보고 있을까요

인간의 사랑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  사랑 가득 차면 행여 남에게 넘칠까

다만 두려운 마음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돌아가고 싶어요

이렇게 당신의 마음 밖에서

나는 차가운 달빛으로 날릴 때

저 지상의 따스한 한점 불빛마저

왜 이렇게 눈물겨운지요

당신 참으로 착하고 따스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어요

하마 오래 전에 우리가 떠나왔던 세상,

그 천상의 봄날을 꿈꾸며 오늘도

그리운 당신께 안녕, 용서하시어요

 

 

 

 

항해일지.18

      - 김종해 -

 

  아구란놈에대해이야기하고자한다.아구란놈이해진에서입을벌리고물길을
가고있을때는오징어.전광어.칼치.고등어.가오리.게따위가통째로들어와뱃
속에쌓인다.힘없고왜소한것들이눈을뜬채삶의본전까지아구의뱃속에상납해
버린다.철벽위장을가진바다의낡강도아구란놈이빠르게물길을가고있을때,불
쌍한것들아무력한것들아가급적밑바바닥에더욱머릴쳐박고소리내지말라.
  나는확신한다.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반드시이도시의어느곳에몇백마리,
몇천마리가눈빛내며서식하고있는것을,이도시의가장기름진물목에서음흉하
게덫을놓아두고있는것을.
  허전한 저녁나절
  종로에서 입을 벌리고 앞으로 앞으로 물길을 나
  아가면 아아, 내 뱃속에 와 쌓이는 것들.
  몇 잔의 소주와 몇 잔의 적개심.
  종삼 아구탕집의 아구찜을 어금니로 물어뜯고 뜯으며
  씹고 또 씹을 분이다.

 


 

향미사(響尾蛇)

     - 이원섭 -

 

향미사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원을 그어 내 바퀴를 삥삥 돌면서

요령처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나는 추겠다. 나의 춤을!

사실 나는 화랑의 후예란다.

장미 가지 대신 넥타이라도 풀러서 손에 늘이고

내가 추는 나의 춤을 나는 보리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이 사하라에서

누구를 우리는 기다릴 거냐.

 

향미사야.

너는 어서 방울을 흔들어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향 수(鄕愁)

        - 김광균 -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메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플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오지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향수

    - 김상용 -

 

  인적 끊긴 산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향수(鄕愁)
          - 조벽암 -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롬이 저린 여수(旅愁)
오늘도 나그네의 외로움을 차창에 맡기고
언제든 갓 떨어진 풋 송아지 모양으로
안타까이 못 잊는 향수를 반추(反芻)하며
 
아늑히 살얼음 깃들인 안개 마을이면
따스한 보금자리 그리워 포드득 날러들고 싶어라

 

 

 

향수(鄕愁)
        -  정지용  -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 수

     - 유진오(兪鎭五) -


금시에 깨어질듯 창창한

하늘과 별이 따로 도는 밤

 

엄마여

당신의 가슴 우에

서리가 나립니다


세상메기 젖먹이

말썽만 부리던 막내놈

어리다면 차라리

성가시나마 옆에 앉고 보련만

 

아!

밤이 부스러지고

총소리 엔진소리 어지러우면

파도처럼 철렁

소금 먹은듯 저려오는 당신의 가슴

이 녀석이

어느 곳 서릿 길

살어름짱에

쓰러지느냐


엄마여

무서리 하얗게

풀잎처럼 가슴에 어리는

나의 밤에


당신의 옷고름 히살짓던*

나의 사랑이

지열(地熱)과 함께

으지직 또 하나의

어둠을 바위처럼 무너뜨립니다

 

손톱 밑 갈갈이

까실까실한 당신의 손

창자 속에 지니고


엄마여

이 녀석은 훌훌 뛰면서

이빨이 사뭇

칼날보다 날카로워 갑니다

 

 


향현(香峴)

       - 박두진 -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다른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호롱

     - 이수익 -

 

  골동품 가게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호롱을 하나 샀다,
  어느 초가의 안방이나 사랑채
  한 모서리에
  밤마다 소중히 모셔졌을 이 빛의 도구를
  국수 한 그릇 값으로 나는 가져왔다.

  지금은 쓸모없는 퇴기처럼 버려진
  골동 중에서도
  대접이 서자 같은
  이 고전의 기물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마음 한가운데 보드라운
  희열의 물살이 이는 것은,

  아, 누군가
  가물대는 이 호롱의 불빛을 이마에 쓰고
  터진 식구들의 옷가지를 땀땀이 기웠을
  그런 아낙과
  이 호롱 아래서 조용히 책장 넘기며
  불빛 따라 희미한 새벽의 여명 속으로 건너갔을
  한 꿈의 소년과
  이 호롱의 불빛으로 잠 못 이루는 해수의 밤을
  혼령처럼 앉아 지샜을 그런 노인과
  이 호롱 아래서 잠든 아이들 얼굴을 지켜보며
  나즉이 두런대던 근심어린 대화의
  한 부부와
  이 호롱의 불빛에 부끄럼과 갈증을 느끼며
  칠흑 어둠 속으로 자지러들던 초야의
  한 신혼과...

  아, 어쩌면 그들은 내 부모였고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모
  아니면 내 이웃들의 선친이었을 그런 가까운 사람들의
  그립고 눈물겹고 간절한 사연들을

  호롱,
  이 침묵의 유물은
  가만히 뿜고 있기 때문이다.

 

 

 

호롱불

     - 김상훈 -

                                                   

석유를 그득히 부은 등잔은

밤이 깊도록 홰가 났다

끄으름을 까-맣게 들어마시며

노인들의 이야기는 죽구 싶다는 말 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고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썼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흉한 소문이 대수롭지 않다

삼백석이 넘어 쌓여 있다는 곡식이

그들의 아들이 굶어 죽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까닭이다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손주 며느리 낙태를 했다고

등잔에 하소해 보는 집집마다의 늙은이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왔다


 

 

호미가 필요해

        - 권혁찬 -


뙤약볕 오후

호미를 사러 간다

시장 어디쯤엔가 아버지가 사다 주시던 할머니의 호미 가게를 찾아 헤매다

기생집들만 잡초처럼 더부룩한 골목을 지나며

호미의 흔적을 놓치고 돌아서는 미물

 
좌판이 흐트러진 월요일 오후

휴지 조각처럼 구겨진 뒤 울 안 엉성한 고추밭에

쓰다 만 이력서처럼 던져 놓은 거름들이 마르고 있다

콩밭 언저리에 유기됐던 유년

할머니의 무기는 호미였다

해가 기울도록 할머닌 그것을 놓지 않은 채 노을들을 배웅했고

굽은 허리로 호미와 나를 업고 늦은 사립문을 여시곤 했다


거름을 이고 앉은 초라한 고추밭 언저리에 걸터앉은 무명초 같은 하루

할머니의 호미 소리가 머릿속을 쪼아대고 있다

일렁이는 두통을 재우려 호미를 찾아 나섰던 일이 허사가 되고

스무 포기의 고추들은 오후의 역사를 모른 채

호미처럼 내 눈 언저리를 쪼아대고 있다

이제 젖은 이력들을 정리할 나의 호미가 필요해.

 

 

 

 

호소(呼訴) 
    - 김현승 -
                                  
사랑하지 않고서 
나는 이 길을 더 나아갈 수 없나이다, 
사랑하지 아니하고서는...... . 

缺乏된 우리의 所有는 
새로운 假說들의 머나먼 航路가 아니외다, 
길들은 엉키어 길을 가리우고 있나이다. 

사랑의 기름 부음 없이 
꺼져가는 내 生命의 쇠잔한 횃불을 
더 멀리는 태워 나갈 수 없나이다, 
사랑의 기름 부음 없이는...... . 

배불리 먹고 마시고, 지금은 깊은 밤, 
모든 知識의 饗宴들은 이 따위에 
가득히 버리워져 있나이다, 
이제 우리를 풍성케 하는 길은 
한 사람의 깊은 信仰 사랑함으로 神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외다.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찌하리이까, 
허물어진 터전, 짓밟힌 거리마다, 
싸늘한 鐵筋만이 남은 假說들을 부여잡고 
오늘 멍든 우리들의 가슴을 부비어야 하리이까? 
부러진 우리들의 죽지를 파닥거려야 하리이까? 

하염없이 무너져 나간 文明의 자국들--進步의 이름으로 
우거진 주검의 쟝글 속에서, 
지난날 智의 冠을 꾸미던 모든 나라의 찬란한 寶石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오늘 사랑의 한끝인 당신의 눈물이외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하리이까, 
偉大한 喪失을 通하여-- 
숨지던 極東의 山脈에서 디엔비안의 더운 屍體 위에서 
저무는 날 救援을 기다리던 北海의 먼 港口에서 
오오, 마침내 兄弟의 義로 맺어진 咀呪받은 따위 우리들, 
푸른 하늘에 사는 눈동자, 타는 입술이 그렇게도 닮은 우리들 

우리들의 처음 고향은 사랑이었나이다! 
永劫에도 그러할 것이외다!

 

 

호수

     - 이형기 -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호수

   - 정지용 -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湖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한다 

             - 이수익 -


바람이 불 적마다 
흔들리는 
나무는, 
흔들려서 차츰 가지가 굵어지고 
흔들려서 잎들은 더욱 파랗게 짙어지고 
흔들려서 뿌리도 더욱 땅속 깊이 
튼튼히 박히는 것이겠지만

나는 흔들리는 것이 싫다. 
육지가 먼 곳으로 나를 가두듯 
나도 먼 곳의 하늘을 가두고 
별이 뜨는 밤과 해가 솟아오르는 낮, 
낮의 구름이며 숲과 새들을 
그저 평온한 가슴으로 바라보고 싶다.

누구든 나를 가만히 있게 내버려다오. 
나는 
저 무지하게 날아오는 돌멩이가 싫다.

 

 

호수

    - 이육사 -

 

  내어 달라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줏빛 안개 가벼운 명상같이 내려 씌운다.

 

 

호수근처

       - 김영태 -

 

  그대는 지금도
  물빛이다
  물빛으로 어디에
  어리고 있고
  내가 그 물 밑을 들여다보면
  헌 영혼 하나가
  가고 있다
  그대의 무릎이 물에 잠긴
  옆으로, 구겨진 수면 위에 나뭇잎같이

 

 

호접

     - 박화목 -

 

  가을 바람이 부니까
  호접이 날지 않는다.

  가을 바람이 해조같이 불어와서
  울 안에 코스모스가 구름처럼 쌓였어도
  호접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적막만이 가을 해 엷은 볕 아래 졸고
  그 날이 저물면 벌레 우는 긴긴 밤을
  등피 끄스리는 등잔을 지키고 새우는 것이다.

  달이 유난하게 밝은 밤
  지붕 위에 박이 또 다른 하나의 달처럼
  화안히 떠오르는 밤

  담 너머로 박 너머로
  지는 잎이 구울러 오면
  호접같이 단장한 어느 여인이 찾아올 듯 싶은데...

  싸늘한 가을 바람만이 불어와서
  나의 가슴을 싸늘하게 하고
  입김도 서리같이 식어간다.

 

 

 

 혼야

    - 이동주 -

 

  금슬은 구구 비둘기...

  열 두 병풍
  첩첩 산곡인데
  칠보 황홀히 오롯한 나의 방석.

  오오 어느 나라 공주오이까.
  다수굿 내 앞에 받아들었오이다.

  어른일사 원삼을 입혔는데
  수실 단 부전 향낭이 애릿해라.

  황촉 갈고 갈아 첫닭이 우는데
  깨알 같은 쩡화가 스스로와...

  눈으로 당기면 고즈너기 끌려와 혀 끝에 떨어지는 이름
  사르르 온 몸에 휘감기는 비단이라
  내사 스스로 의의 장검을 찬 왕자.

  어느 새 늙어 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다시 찾아오는 그대 아직 신부고녀.
  금슬은 구구 비둘기.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 먹는 밥

       - 송수권 -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生(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혼자 앉아서

      - 최남선 -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홀로 가는 길
               -  박천 최정순 -

 

어느 닭 울던 날 새벽

빈 손 울음 터트리며 세상 움켜쥐고

종달새 짝 찾아 하늘 교감 하는 벌판 넘어

독사 대가리 치켜들어 독 품는 골짜기 지나

벌 나비 향기롭게 춤추는 장미 정원 가로질러

달 별 꽁꽁 어는 극지방 어둠 서성이다

지천명 고개 허위허위 올라 보니

저 멀리 이순고개 운무(雲霧) 쌓여 아득한데

바위 달린 팍팍한 무거운 발걸음

오르다 뒤돌아보니 외로움만 길게 누워 있네

진애(塵埃) 고개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폭풍한설 사지 동강나며 위태위태 걸어 온 길

저 고개는 또, 누구와 함께 갈까

 

 

 

홑꽃잎 뒤풀이 2. 닻

         - 김송배 -

 


  기다림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은
  서러움
  그래도 기다려야 한다.

  올 수 없는 발걸음 소리
  갯펄에 꽂힌 채
  밤새도록
  피를 토하는
  아픈 꽃망울

  피어나기 위한 기다림은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이다.

 

 

 

 

회색 그림자

         - 신중신 -

 

  깊은 밤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
  땅 속으로 잦아들 듯 사라져 가는 회색의 그림자
  지난 일에 대해서 입 다물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렇게 해야했을 것을 늘 그만큼의
  미진을 깨우쳐
  혼자 밤을 향해 가는 사내.
  손에 든 아무것도 없어
  짐스럴 것 없는 허탈이 달무리로 걸리고
  언젠가 어린 것에게 사다 준
  완구쯤은 기억해 내기도 하며
  여윈 목덜미 어둠으로 묻혀 간다.

 

 

 

화사(花蛇) 
               - 서정주 -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辨)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화살
      - 고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화해에 대하여 5

         - 나종영 -


  돌려주는 것
  화해란 빼앗아간 것
  다시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주는 것
  가히 발끝이 닿지 않는 천길 어둠
  그 절망의 낭떠러지로부터
  빛을 찾아
  눈물과 한숨 치떨리는 분노로부터
  희망을 찾아
  어여쁜 젖무덤 안스러운 가슴팍 위에
  다습게 돌려주는 것

  콸콸 생수가 솟아나듯
  봄비에 새 잎 돋아나는 버들가지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너는 너 나는 나 담을 쌓지 않고
  돈이나 출세 따위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잘 살아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음이
  흥겹고 자랑스러워
  서로서로 눈치봄이 없이
  말도 잘 나누고
  막힌 곳이 없이 가슴이 확 트여
  밥 한 술 한 벌 옷에도
  이웃들 가난한 이웃들이 흘린 땀을
  생각하는 그런 세상 그런 시절로
  돌려주는 것

  화해란 칼을 들어 형제를 치는 일이 없고
  네 편 내 편 잘남을 다투지 않고
  술잔을 높이 쳐들고
  목소리 높여 화해의 시대 화해의 시대
  외치지 않아도
  고향 텃마당에 모닥불 피워놓고
  도란도란 동네 이야기 잘잘못
  주거니 받거니 하던 옛사람들처럼
  먹고 일하는 것이 같아서
  억울한 일도 없고 분한 일도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

  땀 흘려 일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아서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옳은 일은 북돋아주고
  그릇된 일은 볼기를 쳐서 다시는
  사악한 무리들이 고개를 쳐들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자유로운 세상 만드는 것

  화해란 단 하나 사람의 길로 가는 것
  도둑이 없는 동네 담이 없는 것처럼
  빼앗아간 것이 없어서
  내가 너에게 용서할 것이 없고
  너 나 골고루 나누며
  서로서로 타고난 제 권리 찾아주니
  자유니 평등이니 피흘림이 없이
  지금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오손도손 사람답게 잘 살아
  민주주의로 가는 것
  화해란 지금 우리 이 땅
  여기에 살아 민주주의 나라로 가는 것.

 

 

 

 

환상도시 9

       - 최휘웅 -


  관객들은 커튼 밖으로 밀려났다
  바깥에서는 바다가
  깨진 올갠 곁으로 밀려오고
  아이는 두 팔을 든다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흉내를 낸다
  저 멀리 눈송이 속으로
  사라지는 흉내를 낸다
  그때 쾌종시계가
  은행잎으로 날은다
  사라지는 스포트 라이트 뒤곁에서
  무희의 발톱만 뒹굴고 있다

 

 

 

환상조

     - 김종섭 -


  비가 천년의 석탑을 적시고
  오늘은 또 삼복의 지열을 적시고
  꺼져가던 환상의 조각들을 씻으며
  이미 빈 공원의 의자에서
  십년은 젊어진 내 얼굴의 때를
  벗기고 있었다
  점점 밝아지는 아랫도리마저 젖어 선
  내 곁엔 어느새 잊혀졌던 과거의 장미가
  환히 웃으며 섰다.
  어쩌면
  울고 선 아사녀의 전설을 읽고 있다
  저쯤에서 비는 비껴 선 꽃잎을 찢으며
  그 잔인한 웃음을 던지다 사라지고
  문득 번개가 우뢰소리 더불어
  천년의 종을 울리고 있다
  탑신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놀란 장미꽃 이파리들이
  내 발등을 덮고 있다
  열기에 젖었던 아랫도리는 말라들고
  다시 지열은 들떠서 비를 걷어가고
  백랍같던 시벌의 하늘이
  한때의 꿈처럼 구름을 태워가고 있다
  내 곁엔 이국소녀가 석탑을 향해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쏘아대고
  놀란 한 마리 금오조가
  염천의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잠자는 내 먼 눈을 쪼으며

 

 

 

황사 현상(黃沙現象)

              - 김종길(金宗吉) -

 

그 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

오한의 땅에


오늘은 발열처럼 복사꽃이 핀다.

목이 타는 봄가뭄,

아 목이 타는 봄가뭄,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만 일렁거리고,

 

앓는 대지를 축여 줄 봄비는

오지 않은 채,

 

며칠째 황사만이 자욱이 내리고 있다.

 

 

 

황산메기

      - 박용래 -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개펄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하류

  노을밴 황산메기는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황조가(黃鳥歌)  
                - 유리왕 -

 

펄펄 나는  저 꾀꼬리  
翩翩黃鳥(편편황조) 

 

암수 서로  정답 구나  
雌雄相依(자웅상의) 

 

외로워라  이내 몸은  
念我之獨(염아지독) 

 

뉘 와 함께 돌아 갈까  
誰其與歸(수기여귀)

 

 

 

황진이 서설

     - 윤성근 -


  1
  그대, 오늘은 누구에게 몸 주겠다고 그렇게 정성들여
  화장을 했는가. 황진이, 그대가 갖은 교태로 낯선 사내 품에
  안기는 사이 그대는 순결한 슬픔에 살고 순결한 기쁨에
  죽는다. 계약금을 선불로 지급하고 오늘은 전세방을 전전하는 그대
  물방울 속에도 있고 지하도 앉은뱅이의 접시 위에도 있고
  300원정의 한 잔 커피 속에도 있는 당신
  피곤한 몸, 피곤한 시절을 살다 가는
  무수한 당신이여.

  2
  비는 순수한 생명에의 에로티시즘
  영화 속에서는 간혹 배우들의 이마를 적시기도 하지만
  비는, 여름비는 죽은 아이의 몸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은 황토가 씻기워진 붉은 핏빛
  아이의, 형체도 가늠할 수 없는 반 너머 그을린 탯줄
  썩은, 말갛게 흘러내리는 꽃다운 상처의 액
  아아, 나는 보았다. 보았는데 차마 눈을 감고 보았다.
  어제 두 남녀가 이 강변의 모래알을 밟아 지나가던 것을
  대숲 사이로 부둥켜 안고 쓸쓸히 멀어지던 것을.

  --야 너무 빼지 마, 죽으면 썩어질 몸 하나를 가지고 뭘 그래

  --아이, 씨팔! 내가 언제 뺐어. 언제 한번 엄숙히 달라고나 해봤어, 나도
잘 준단 말야.

  나는 또 느끼고 냄새맡았다. 상처가
  곪아 터지는 농밀한 향기, 비맞으며 나는 본다.
  나보다 먼저 비맞는 그대, 황진이

  3
  고뇌하는 풀이여 불타는 풀이여.
  이 무덤가에 무수히 돋아난 잔디떼를
  떼간 사람은 누구인가.

  아침마다 일어나면 우리들 중의 일부는 솎아내어져서
  서방정토로 집단하역을 떠나가고
  누군가 말 좀 해다오 아아아아 인간의 말
  이것은 인간의 말이다. 들어라, 듣기 싫어도 들어라
  우리들 앞에 가로막힌 이 보이지 않는 장막을 찢고
  우리들의 또 다른 황진이가 달려오게 하기 위해서는
  들어라,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차라리 물어뜯어라
  패대기쳐다오. 풀이여, 그대들이 한번 누웠다 일어나면
  시가 생겨난다 혁명이 생겨난다 역사가 생겨난다
  풀이여 고뇌하는 잎새여 변혁이여.

  4
  성당은 못질이 되어 있었다.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하여 혹은 신도가 없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사제가 없다. 아무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예정된 종말이다. 사제가 없다 사재기는 있다.
  먹을 물이 없으니 물을 찾는 사람도 없다.
  갈증도 느끼지 못한다. 목마를 리 없다.
  지금 내 몸은 반 이상 분뇨로 찼다. 신선한 물이
  먹고 싶다. 입만 벌리면 매연향기가 꽃핀다.
  여태까지는 우리들 몸속에 있던 뜨거운 정충들이 한순간
  촛농처럼 녹아서 떨어진다. 노곤한 성기를 움켜쥐고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신선한 물이 먹고 싶다.
  황진이여, 금욕은 아름답다. 나는 순결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금욕은 아름답다.
  황진이, 그대도 순결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금욕을 한다. 성기가 거세당한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는 것이 우연히 목격된다.

  5
  아아, 그대는 모든 것에서부터 온다.
  4월 불임의 나뭇가지 사이 뿌옇게 피어오르는
  최루탄 가스 속에서
  우리들의 키 작은 연인들이 소소히 배회하는 길모퉁이
  연탄가게 앞 쓰레기 더미에서 혹은
  아무것도 되지 말라고 아무거나 되라고 현란하게
  중얼거리는 낯 두꺼운 위정자들의 썩은 양심 앞에서
  아아, 그대는 온다. 그대는 와서 머문다,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날 때까지.

 

 

 

황토 1

    - 박만기 -


  기우제 모서리에
  손 비비는 빗방울마다 먼지투성이다
  갈라진 논바닥 틈서리에
  뿜어나는 한의 열기
  흉년 때 타관으로 떠나버린
  당숙모의 산발한 오열이
  남아
  한 방울의 허기로 기다리는
  잠뱅이의 촌로
  활처럼 굽어진 허리만 할퀴고 있다
  비가 내려야지 비가 내려야
  저 서글픈 노래들 모두 그치고
  답답한 가슴들
  숨 몰아쉬며 살아야지
  먼지 묻어 쫓겨나는
  저 인심들
  그 인정들 돌아와
  활활 들녘을 타 들어가지


       황토 11


  그렇습니다. 당신은 도시인
  나는 가냘픈 농민의 아들입니다
  긴세월 일궈 놓은 어머니의 가슴
  파릇한 싹눈이 노닐고
  시원한 한 여름
  그늘을 적시우는 쓰르라미의 잔 가락이
  겨우내 자라는 땅.
  깊숙이 흐르는 냇물의 속삭임
  꿈으로 피어 오르는 바람소리가
  몸짓하는 아름다운
  숲속을 거닐어 보십시요
  하늘을 날으는 새소리
  맑은 음계를 발견할 것입니다
  불협화음이 쫓기고 쫓는 도시에서
  숨을 거둔 철새들의
  빗나간 음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들불이 타고 있읍니다
  풀쑥냄새를 이어가며
  세실세실 피어 오르는, 불길이
  마지막 뿌리까지 스며들고
  들녘은 아침을 일으키는
  무서운 힘으로
  그러나 묵묵히 걸어갑니다
  지난해 가뭄의 아픔으로 뿜어내던
  열기속에 뒤집히며 씨앗을 뿌리며
  걸어가고 있읍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화려한 불꽃이 튀깁니다
  먼곳에서 바라보는
  당신의 풀잎이 타고 있읍니다.

 

 

 

황토길

     - 한하운 -

 

         가도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 더라 
         낫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거리를 지나도 
         쑤세미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며 더위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짤릴때 까지 가도가도 
         천리길 전라도 길

         

 

 

황톳길

      - 김지하 -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에 대가 성긴 동그란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황혼(黃昏)

       - 이육사 -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황혼(黃昏)

        - 오장환 -

 


직업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모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워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알로 깔리어 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기-ㄴ 그림자는 군집의 대하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히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흐터저버리고. 나는 공복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띠엄띠엄 서 있는 포도( 道)우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마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삿*.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어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鶴)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墮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휘파람

      - 이우석 -

 

  나는 늘 휘파람을 불면서
  입을 오무리고 걷는다.
  오무린 입속에 봄 바람이 일어
  버들개지가 푸릇 푸릇 싹을 띄운다.

  휘파람은 늘 입속에서
  버들개지의 대롱을 타고 밖으로 나온다.
  나와 흡사한 사람을 나는 가끔 본다.

  파밭을 지나면서
  그것은 오히려 더욱 싱싱히
  파잎을 타고 나오는 닐리리 닐리리
  소리.

  검은 커튼을 드리우고
  깊이 방에 묻혀 있는 날
  봄 볕을 타고 흐트러지는
  수많은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휘파람은 입속에 있는
  가장 가벼운 침방울을 흔들어
  홀홀 날려 보내는
  일상인 것이다.

 

 

 

휴전선

    - 박봉우 -

 

산관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둠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 박두진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에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동단장(초)

        - 전원책 -


    1. 내 어머니 두레박 속

  내 어머니 두레박 속엔
  살아 퍼덕이는 바다가 담겨 있읍니다
  내안으로 질풍처럼 달아나던 하늘로 그득합니다
  내려다 보면 그냥 허공일 뿐이지만
  좀더 다가가서 보면
  고조선의 잠의 뿌리가
  예까지 뻗어 수초처럼 일렁입니다
  나는 그 실뿌리를 타고 들어가
  관능의 질긴  육질의 끝까지 올라가
  황홀했던 소년으로
  깊이 잠긴 장인의 잠을 두드립니다
  정갈하게 다듬어지는 노래를 듣습니다
  음계의 맨끝에 쌓인 숲에는
  풀풀 날리는 햇덩이의 살도 있읍니다
  온 세상은 그냥 잠든 채입니다
  내 어머니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진주로 만들어진 마을이 있어
  내 팔매질로도 다하지 못한
  하늘만으로도 그득합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른 아침이면
  눈부셨던 아이로 일어나
  이만큼 자라날 수 있읍니다

    2. 해동청 일수

  불어도 불어도 당신은 더는 커지지 않는 풍선입니다
  이 세상 강풍을 다 쏟아 넣었읍니다
  내 잠 어느 귀퉁이쯤
  당신은 온 누리에 내리는 햇살의 중량을
  홀로 감당하고 있읍니다
  그 감동을 받들고 섰읍니다
  나는 문득
  바람이고 싶다가
  폭풍우이고도 싶다가
  터질 듯 터질 듯한 꽃봉오리이기도 합니다
  그 위를 밤새 실눈 뜬 꽃뱀이 넘어가고
  십년이 뭉텅 지났읍니다
  그 십년을 또 일순에 뛰어넘는
  해동청 일수가 있읍니다
  나는 그냥 당신의 종이기도 하다가
  영겁을 날아 화석이 되기도 합니다

    4. 신라의 아이들은

  오는 비 맞으러 뛰어나간 아이는
  신라의 하늘 밑을 내닫고 있읍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수로부인의 기슴팍까지 걸어 들어가
  음악책이나 그네 사독 어디에서쯤
  소나기 한줄기를 쏟아 놓습니다
  개나리 꽃송이 환한 속살마다
  투명했던 하늘에서
  왜 먹구름은 울까요
  개운포 가는 신라 성왕의
  터벅대는 발자국소리도 들려옵니다
  그 발자국마다 폭우가 그득합니다
  열릴 듯 열릴 듯 열리지 않는
  홍수같은 내 잠 근원입니다

    6. 불의 눈

  싯붉은 불 뿜어내고
  말라죽은 신석기시대가 누워 있읍니다
  잠은 많은 세월을 퇴적하여
  긴 해안선이 되어 있읍니다
  무시로 불어내리는 태백의 바람이
  숱하게 지워가지만
  만조의 아침이면 다시 솟읍니다
  이 바다가 다시 한 바다가 되어
  빛나는 불의 눈 되쏟으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더러는 깊이 모를 잠 속으로
  더러는 행방모를 바람에 품어져
  달아난 관능입니다
  설령 이 바다가 꿈꾸는 중이라
  아이들의 밝은 눈엔 형형하게 되살아나는
  고조선의 동해라 하더라도
  동세의 동해라 하더라도
  아무도 그 세월을 건질 수 없읍니다
  그 심연을 건질 수 없읍니다

    9. 별밭

  땅 위에도 별은 숱합니다
  줄기마다 굵은 놈들이 듬직해져 있읍니다
  별 하나마다 쏟아놓은 푸른 빛이
  이내 바다로 변해 한 마을을 넘실댑니다
  나는 매일밤 별밭에 가서
  조금씩 떨리며 가라앉는 눈물을 봅니다
  눈물도 이내 바다로 변해
  꿈 하나
  세상 하나를 넘실대고 있읍니다
  아마 삼킬 것이지요

 

 

 

해마

    - 음예원 -


  이 도시에 나는
  소화불량처럼 끼어 있다.
  밤마다 흐물거리는 네 지느러미로
  해변을 거닌다는 소문에
  외출하는 나의 문고리는 녹이 슨다.

  자연스럽게--
  해가 진다 해안의 사람들은
  여유있는 한숨을 쉴 줄 안다.

  해질 무렵 시간은
  황동의 바다에서 기어나와
  모래밭에서 허물을 벗는다.
  하나...
  둘...
  뵈지 않을 때까지.

  이 고장 사람들은
  해시계를 재우는 법을 알고 있다.
  물고기 모양의 달이 나부끼며
  풍경소리를 낸다.
  아무도 해마를 보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해안의 도시는
  수천 년을 누빈 밤의 이불을 덮는다.
  소문이 홀로 걸어간다.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해망동 일기.

           - 강형철 -


  떠밀려 오는 것이 뻘뿐이면 어떠랴
  금강 구비구비 절망 외엔 할 것이 없는
  우리들의 이웃이 툇마루에 걸터 앉아
  보리밥 깨물어 바라보던 눈빛이
  흙과 버무러져 갯물과 버무러져
  칙칙한 뻘물인 것을

  게를 잡으러 나갔다가
  밀물 때도 잊고
  꽃발게 울음소리 뒤쫓다 잠이 들어
  둥둥 떠가는 양동이
  위태론 손짓만 남기고
  뻘구덩이 빠져죽은 친구가
  아직 잠들지 못하고

  나왕나무 등허리에 기어오르다
  미끄러져 다시 죽는
  늦은 해변
  깃발 없이 돌아오는
  새우젖배 그물코의 매듭
  마디마디 햇빛 때려 눈부신 것을

  떠밀려 오는 것이
  파란 강물이 아님으로 오히려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아직 살아남아 너왕나무 엮음의
  밧줄에 출렁이며 살아있는 것을

 

 

 

해맞이

     - 박상우 -


  서산에 있는 나의 집
  저녁이 되면 불여귀--몸에서 광란하는 일몰의 추종자--가 노래를 부른다
  정원의 잎새들이 엿보는 줄도 모르고.
  새벽이 되면 추워져 난 일터로 나가지 못한다
  정원으로부터 태양의 사망설이 나돌기 때문이다.

  가장 뜨거운 땅을 골라 잎들의 머리를 동쪽으로 놓고 파묻으면
  대지는 해가 부활하는 춤을 추리라.

  비의 어머니인 구름을 사모하는 잎새와,
  동굴을 흠모하는 박쥐 떼들이 천사의 나팔을 부는
  기적의 시간이 있어,

  비로소
  나의 집에 지구가 돈다.

 

 

 

해바라기

          - 강방영 -


  바다 건너서
  언니가 부쳐 온
  해바라기 씨

  봄내 싹나고
  대 올라
  마디마디
  피어나는 꽃

  한치 꽃대 자라면
  한송이 더 달린다고
  마당에서 아버지는
  금빛 꽃송이를
  세신다

  구름이 뜨고
  바람이 불고
  흰 빨래가 날리는
  해바라기의 하늘

  황금의 시간 이울어
  달빛 빠져 나가는 밤
  잎 시들고
  대 마르면

  산이 멀리 가고
  가을이 멀리 가고
  해바라기도
  하늘을 이고
  멀리 가지만

  언니의 하늘
  아버지의 하늘에서
  해바라기는 꽃 핀다

  시간의 바퀴 자국 속에
  금빛으로 해바라기는
  피어난다.

 

 

 

해바라기 3

      - 설정식(薛貞植) -


해바라기는 차라리 견디기 위하야

해바라기는 차라리 믿음을 위하야

너희들의 미래(未來)를 건지기 위하야


무심(無心)한 태양(太陽)이

사슴의 목을 말리고

수풀에 불을 질르고

바다 천심(千尋)을 짜게 하여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너의들의 타락(墮落)을 거부(拒否)하였다


모든 꽃이 아름다운 십자가(十字架)에 죽은 날

모든 열매가 여지(餘地)없이 유린을 당한 날

그들이 모다 원죄(原罪)로 돌아간 날


무도(無道)한 태양(太陽)이

인간(人間) 우에 군림(君臨)하고

인간(人間)은 또 인간(人間) 우에 개가(凱歌)를 부르고

이기랴든 멍에냐 어깨마저 꺼저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태양(太陽)에 필적(匹敵)하였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 함형수 -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해바라기 피는 마을

               - 이성교 -

 

  아무도 오지 않는 마을에
  해바라기 핀다.
  갇혀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노오란 햇살이 퍼져
  온 천지가 눈부시다.

  지난 여름
  그 어둠 속에서
  열리던 빛
  눈물이 비친다.

  이제 아무 푯대없이
  휘청휘청해서는 안된다.
  바울처럼 긴 날을 걸어서
  까만 씨를 심어야 한다.
  해바라기 피는 마을에.

 

 

해방춤

       - 이륭 -


  날이 저물면 우리는
  허수아비를 화형시키고 춤을 춘다
  붉은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몇 개의 횃불이 하늘로 치솟는다
  가볍게 위로 솟을 땐
  땅을 차며 앞으로 뚫고 나갈 땐
  그것은
  이미 춤이 아니다
  서럽게 끓어오르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살아 있는 원혼들의 피맺힌 절규, 그 안타까운 몸부림이란 것을
  그러나
  이제는 통곡을 그쳐야할 때,
  산을 넘으면 강이 앞을 막고
  강을 건너면 더 큰 산이 앞을 가로막는 저 검은 구름
  오너라, 가자
  칼같은 의지로
  아픈 몸
  아픈 피
  아프지 않을 때까지
  마침내 터뜨려야만 하는 것들,
  끝내 해방되어야만 하는 것들,
  칼날을 물고
  뜨거운 가슴
  거친 숨소리로
  춤을 춘다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말뚝처럼 완강하게 박혀 있는
  저 검은 구둣발
  저 민둥산을 향하여
  너 쓰러지면 내 일어나
  내 쓰러지면 너 일어나
  결코 내릴 수 없는 깃발로
  횃불 치열하게 솟는 가슴, 다시 한번
  으스러지게 껴안을 타는 그리움으로
  온 몸에 불을 지른다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최남선 -                                          

 

1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2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서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3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없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누구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4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山)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5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6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해와 달 이야기

         - 윤형근 -


  그의 아이들은 불륜의 가격을 매기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짜드라 웃으며 아우르자
  애미는 까무러질 듯이 놀라 호들갑스럽게 달아났다
  에비는 덤터기쓰고 싶지 않아 아이들을 모두 거리에 내던졌다

  아이들은 아무데서나 다떠위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면 늙은 갈보의 둥지로 몰려간다
  갈보의 찌그러진 젖가슴에서 순교자의 피라도 발견한 양 탐욕스럽게
식욕을 채운다

  아이들은 옷을 입는다
  한 아이는 군복을 입고
  한 아이는 수의를 입고
  한 아이는 법의를 걸친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밤새도록 쥐를 잡고
  술을 퍼마시고
  한쪽에서 화투를 치면 한쪽에선 쌩이질 한다

  한 아이가 계집애를 잡아오면
  한 아이는 요리하고
  나머지는 그것을 팔아먹는다
  팔려가서도 돌고돌아 그것은 다시
  한 아이의 술잔 속으로 기어든다

  한 아이가 관구를 짜면
  한 아이는 칠성판을 깔고 눕는다
  한 아이는 관구를 장식할 꽃을 피우고
  나머지는 무지의 꽃이 된다
  꽃봉이 벙글 때 꽃밭에 불지르고 튀어오르는 불똥으로 별을 만들어
날린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린다
  한 아이는 하늘을 한 아이는 땅을
  나머지는 바다를
  그러나 캔버스는 비어 있다
  아이들이 날린 별이 떨어질 때까지
  캔버스는 비어 있다

  아이들은 집을 짓는다
  한 아이는 창문을 만들고
  한 아이는 침대를 만들고
  한 아이는 종을 매단다
  별이 떨어지기 전에 집을 다 지으면
  아이들은 뿔뿔이 헤어진다

  한 아이는 그를 교수하고
  한 아이는 그의 아내를 능욕한다
  한 아이는 종을 치며
  떨어지는 별에 맞아 죽는다

  아이들은 무덤을 판다
  한 아이는 그를 화장하고
  한 아이는 죽은 아이를 묻는다
  그의 아내는 떨어진 별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투기를 한다
  한 아이는 해가 되고 한 아이는 달이 되어
  간단없이 감시한다.

 

 

 

햇빛부신 날은

           - 김경옥 -

 

  나는 한 식물이 화분에서 자란다는 것이 슬펐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은 햇빛과 꿈과 자유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화분에
핀 적동백 한 그루의 그 보호받은 빛깔은 나를 슬프게 했다.

  낙동강 어귀의 나무들이 때때로 거센 폭풍우와 홍수에 떠밀리면서도 그
어두운 대지 아래로 조금씩 불 밝히며 들어가 낙동강의 작은 물줄기를
찾아내는 기쁨을 4월의 저 봄비는 안다 그 기쁨을 흔드는 실바람은 안다.

  언제부턴가 스스로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나를 놓아 주고 싶었다.
흘러가며 어딘가서 대지를 사랑하므로 고독한 뿌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우리 모두의 화분 속에 갇힌 사물도 그대도 떠나 보내주고 싶었다.
오늘처럼 햇빛부신 날은 세계가 화분 밖에서 스스로 꿈꾸었으면 좋으리라.

 

 

 

행복(幸福)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흐린 저녁

      - 김용옥 -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서면
  뾰족한 첨탑 끝에 와
  얼어붙은 흐린 바람.

  아픔마저도 잊고 지낸 날.
  경부가도 지나
  잡목림 너머
  희미하게 슬리는 낮달,

  나직한 언덕으로도
  늘 초조히
  기다리던 것들은
  오지 않는다.

  나무 사이의 간격이
  선명히 떠오르는
  어스름 사이로
  선회하는 겨울 철새의
  낮은 울음에 맞서
  등이 굽은
  우리 뒷모습이
  지워지고 있었다.

  기다림보다
  먼저
  윤곽을 지우며 오는
  어둠에 
  우리의 관계가
  묻히고 있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릴 때마다 한 잔

          - 감태준 -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죽은 참새를 굽고 있다 한놈은 너고 한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얼키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흔적

     - 김춘구 -

 

망석이 어디갔나

말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송찬호 -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깃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화

   - 최영 -


  김씨는
  토지구획이 고시된 후로
  지주가 되었다
  이제는 김사장이란 말을
  땡감처럼 씹지도 아니하고
  발밑에 새어나는
  논배미 물고 소리도 잊은 채
  경장동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감고
  머리카락 속의 농약 냄새를
  열심히 드라이한다
  가뭄처럼 타들어간 얼굴에
  이슬비처럼 로숀을 뿌리고
  무논에서 피를 뽑듯이
  무성한 수염을 면도질한다
  농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맛사지까지 하고
  이발소를 빠져 나와
  주막을 밟고선 관광호텔
  그 스카이 라운지에 앉아
  열심히 아주 열심히
  목구멍에 양주맛을 길들이고 있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 석 -

 

   오늘 저녁 이 좁다른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무더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소를 찾아서(尋牛圖)
                   - 방영주 -
 

망망한 풀 헤쳐 가 찾으니, 물 깊고 산 멀어 길 다시 험하네
힘 다하고 마음 역시 피로하여, 찾을 길 없는데 다만 들리는 것
은 나무 가지 풀벌레 소리 뿐

 

물가 숲 아래 발자국 많아 꽃과 풀 어우러져 있으니, 보느냐 못 보느냐
깊은 산에 다시 깊은 산 있어도, 먼 하늘 눈구덩이
에 어찌 자신을 감출 건가

 

꾀꼬리 나무에서 즐거이 노래하니, 날 따뜻하고 바람 좋네
언덕의 버들 푸르러, 여기 피할 자리 없지만 눈
에 삼삼한 뿔 그리기 어려워라

 

정신 모아 저 잡아도 소 마음 굳고, 힘 장해, 속히 얻기 어렵네
어떤 때는 높은 언덕, 그리
고 깊은 川으로도 가네

 

채찍 잡았을 때 몸 놓지 마라 두렵다, 걸음 塵埃에 들까봐
저 생긴 대로 내버려두면 순해질 것, 줄 묶지 않아
도 너를 따르리라

 

소 비스듬히 걸터앉아 집으로 돌아가는데, 퉁소 소리 노을로 흘러가고
한 노래의 한 박자에 무한한 뜻 있으니, 노래 아
는 자 입술을 치겠는가

 

집에 가니 소는 空하고 사람은 한가로운데, 붉은 해 한참 솟아
모든 것이 꿈결 같고 채찍, 고삐는 쓸 데 없어, 초당
에 버려 있네
 
채찍, 고삐, 사람, 소, 모두 空하고, 蒼天은 넓고 넓어 믿기 어려워라
불타는 화로에 누가 어리석게 雪을 넣겠는가, 이에 이르러 죽음 알리
는 종소리에 미치는구나

 

제 자리 돌아가도 空을 모르니 어이할거나, 맹인 聾啞 같은 것을
암자 안, 암자 밖 모든 물상 바라보니, 물은 스스로 망망하
고 꽃은 저 혼자 붉네

 

始原도 모르는 물 끝없고 꽃과 새소리 늘 같고, 만상은 그대로이나
소는 소가 아니고, 집은 집이 아니더라, 이제야 마음 찾아 소, 집 버리
고 한 지팡이 의지하여 먼 하늘 바라보네          

 

 

     흰 여름의 포장마차

           - 김승희 -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의 푸른 속력 속에서
  그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들판.
  그 들판 속의 포장마차의 황혼.

 

 

 

  허리운동

        - 장경린 -


  이 얼 싼 쓰
  유 류 치 빠
  명동 2가 83번지 화교소학교
  열 살 남짓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혔다가
  허리운동을 합니다
  뽀얀 모래먼지 이는 운동장
  담장을 타고 넘는
  이 얼 싼 쓰
  우 류 치 빠
  조국은 크고 머나먼 나라
  굽혀도 굽혀도
  손 끝에 발등이 닿지 않는
  머나먼 나라

 

 

 

허수아비

        - 김세완 -


  모든 빛들이 잠쩍해 버리고
  죽은 풀들마저 쓰러져 마른 몸을 뒤척일 때
  너는 절망의 끝에서 홀로 돌아왔다.
  달빛 속에 우울하게 깨어 있는 길 위엔
  울며 몰려가는 가랑잎뿐
  까닭없이 바람은 불고
  온종일 고단한 허리를 풀고
  귀가를 서두르는 저문 벌판에서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지 않는 새들의 안부와
  죽은 꽃들을 버리지 못하는 꽃대궁의 ?픈 임종
  또는 이 땅의 마지막 길손이 되기 위하여.

  무엇인가
  햇빛을 꿈꾸며
  간간이 모였다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가는 별빛을 갈아 꽂으며
  빛나고 있는 저것은.
  깊은 밤에도 쉬지 않는
  적막한 길 위에
  살아 남기 위한 잡초들만
  서로의 목숨을 굳게 껴안고
  어둠에 묻혀 갈 대
  불꽃처럼 확실히 빛나고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이제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떠오르리라
  우리가 만나지 못한
  새벽을 그리워하며 너는 언제까지나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인가
  침묵의 뿌리를 뽑아 들고
  마침내 너의 영혼은
  눈물 빛깔의 꽃으로 승천한다.
  남루에 드러나는 굽은 등으로
  이 하늘의 높이
  이 땅의 끝까지 견디고 있는
  울음 소리만 홀로 세워 둔 채.

 

 

허 준

      - 백석 -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뒷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 우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 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한울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어깻죽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詩人)은 안다.

'도스토이엡흐스키'며 '죠이쓰'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모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안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 냥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든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독판을 당기는구려.

 

 

 

현명한 새

     - 백추자 -


  여름,
  오동나무 가지에 앉은 저 새는
  직업이란 무엇인지
  알 리가 없다.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는 게 무엇인지
  알 리가 없다.

  커다란 잠에 풍덩
  깊이 깊이 가라앉는 시간
  알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보면 계면쩍어서
  아마 아노라고 슬쩍 눙칠 것이나

  단언하건대
  저 새는 모를 것이다.

  해탈이 무엇인지
  업이란 무엇인지.

 

 

 

 

현상 붙은 시

         - 하길남 -


  시를 한 편 쓰리라는 생각에서 시작 노트를 머리 맡에 펴놓고, 서재 한
가운데 벌렁 드러누웠더니
       임의 정거장
  이란 낱말이 퍼뜩 머릿 속에 떠올랐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느님의 선거
       귀 먼 안사돈
       유언의 발기
       나르던 인어상
  따위의 말들이 속속 귓전을 때리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언어들을 가지고 끝내 한 편의 시를 쓰지는 못했읍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시를 써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위에
예시한 글귀들을 토대로 해서시를 한번 지어보십시오  필요하다면 제가
현상금을 걸 수도 있읍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이 시 한 편을 꼭 당대에
끝내야 하겠다고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애기들 돌잔치 때 산 인형들이 다시 임신한 몸이 되어
입덧이 날 때까지라도 기다려 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자라서 하느님을
우리 손으로 다시 뽑겠다고 칭얼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줄 것입니다
  귀 먼 안사돈이나, 유언의 발기 같은 것도 말이 통한다면, 나르던
인어상까지 영원히 기억해 두실 것입니다
       임의 정거장에서

 

 

헌화가 유감

     - 백창수 -


  사랑없이 살 수는 없을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벼랑 밑 저 철쭉마냥
무심하게 살 수는 없을까.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안 된다 이를 악물며 버텨도
감은 눈에 더 또렷한 모습, 막은 귀에 더 분명한 음성, 노인은 어느새 벼랑
끝에 선다.

  물안개 피는 아득한 절벽. 차라리 떨어지어 철쭉으로 피어날까. 닿을 수
있을까 벼랑 밑의 저 꽃, 흔들 수 있을까 뿌리 깊은 저 나무, 꺾을 수
있을까 풀꽃처럼 쉽게.

  헛된 정열 저주하며 그네 남자 앞에서 꽃으로 가네 그네에게 가듯, 꽃을
흔드네 그넬 흔들듯, 꽃을 꺾네 그네를 꺾듯, 꽃을 바치네 그네를 잊듯.

  부인의 노래소리 멀어져 가고, 노인도 미련없이 고삐를 든다.

 

 

 

현해탄
          -임화 -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나면
한가닥 수평선 밖엔 티끌 한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南進)해 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몽블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세아(亞細亞)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리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 걸린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 번 항로에 담배를 피우고
둘쨋번 항로엔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인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 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도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이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 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喪帳)으르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 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었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의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玄海)의 물결을 걷어찼다.
그러나 관문 해협 저쪽
이른 봄 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사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얕았는가?

오오! 어느 날
먼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1890년대의 
1920년대의 
1930년대의
1940년대의
19××년대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페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출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좇던 실내(川)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형제의 울음

          - 이유경 -

 

  싸움을 하고 울면서 돌아온 아우의
  어깨를 싸안고 나는 속으로 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매일처럼 싸우고 돌아오는 그의
  소망과 꿈을 풀어내지 못하는
  형인 나의 무력을 탄식하면서
  나는 지금 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아... 아우의 어깨나 싸안고 상처에
  약이나 바르는 일
  아침이면 밥상이나 차리게 하는 것

  (겨울 바람이 사납게 골목을 지나고 시팔 세상은 무지하게 춥다)

  내 어린 날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지고 울면서 오진 않았는데
  오늘 울면서 돌아온 아우를 보고
  내가 왜 속으로 울기만 하는가
  대신 싸우지도 못하고 아우의
  어깨나 싸안고 약냄새 속에 내가
  왜 자꾸 목이 메이는가

 

 

헬렌에게

         - 에드가 알렌 포우 -

 

헬렌이여, 그대의 아름다움은 내겐 마치

옛날의 저 니케의 범선 같구나.

조용하게 향기로운 바다위로

피로에 지친 표랑자들을 싣고

고향 바닷가에 돌아 오는,

 

오랫동안 떠돌던 거칠은 바다위로

그대의 히야신스(검푸른) 머리칼, 그대의 고전적 얼굴,

그대의 수정(水精)같은 자태는 나를 데려다 주었다.

희랍의 영광과

로마의 장엄으로,

 

보라! 저 빛나는 창 모퉁이에서 나는 보노라

마치 조각처럼 그대가

손에 마노의 램프를 들고 서 있는 것을!

아, 성스러운 땅에서 온

"사이키"여!

 

 

 

 

회복기의 노래

      - 송기원 -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 없이 퓰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읍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 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오르지.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묻은 환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후레지어

      - 엄승화 -


오래 앉아있으면 내가의자처럼 붉어진다  
삼십번의 실의와 새벽의 샛터 강
오입을 하듯이 불안한 사랑
다리가 긴 새들이 날아 가다 내리는 꽃 나무 가지
해진 이불속에서 의자처럼 불타는 사랑

 

 

 

후여 후여 목청갈아...

           - 윤재걸 -

 

  후여 후여 이삭 쪼는 새떼들을 날린다.
  새떼 쫓는 후여 후여 목청 속에서
  물 말아 넘긴 보리알 반쪽이 일어선다.
  푸른 하늘이 내 편을 들어 새떼들을 쓸어간다.

  무심히 고개 숙인 이삭이여,
  허구헌 날 그런 몸짓으로 죽을 순 없어.
  삼베 적삼 입은 허수의 어미 아비
  이젠 당신네들도 후여 후여 목청 갈아
  사지 흔들며 푸른 하늘하고 손잡을 것이며

 

 

 

후예들

     - 이혜선 -


  함박꽃이 피는 덕수궁 뒷뜰에 한마당 벌어진 사당패 춤을 본다. 꽹과리
소리에 열두 발 상모, 쾌자자락 너풀대며 환한 대낮에 춤추는 칼. 푹푹
인왕산 허리춤 찔려 피 보면 미치는 승냥이같이 바람 으르릉으르릉거려
앞발을 두드린다. 양반님네 상투끝 산호 동곳의 누런 해가 진다. 한 치씩
내려앉는 청자하늘 아랫도리. 강변 탈바가지 닮은 할머니가 아파트창에
젖은 눈을 내다본다. 긴 막대기로 지구같은 접시를 돌리는 사내 웅크린
저승 몇 계단 쯤에서 웃고 있다.

 

 

 

훈 련

        - 박남수(朴南秀) -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 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 보고

국도 끓여 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 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 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나로 살기 (예)

이런놈끼리 
저런놈끼리 
요런놈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작은 괄호로 묶고 
큰 괄홀 묶고 
묶고 묶다 보면 결국은 하나 

하나라는 것을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요런 놈도 
알고 있을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나로 살기 (고침)

 

모래알은 모래알끼리

조약돌은 조약돌끼리

버려진 돌들은 버려진 돌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게울가에서 만나고

여울로 가다가 만나고

골짝을 넘는 구비구비에서 만나는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모래알도

조약돌도

버려진 돌들도

알고 있을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람들은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면 
시골집의 난로와 따뜻한 아랫목을 이야기한다. 
토끼몰이나 눈썰매 타던 일을 자랑하며 마음속에 고향의 난로를 
다시 피우는 것이다. 
쌓인 눈을 털어 내고 
낡은 문을 열면 어머니가 반가이 맞아 주신다고,

옛날 나의 집 사립문은 늘 열려 있었다. 
눈 내리는 날은 
저 쌓인 눈을 밟고 반가이 가족이름을 부르며 
누군가 와 주기를 얼마나 목메었던가?

몇 마리 까치가 울고 
매서운 바람이 늙은 소나무 위로 넘어가면 
눈 내리는 나의 하루는 그리움으로 저물어 
땟국물 절은 이불 속으로 야윈 몸을 숨긴다. 
-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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