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 김형영 -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 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모나리자의 손
- 고원 -
저녁 냄새가 번지는 미소,
그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유난히 크다란
모나리자의 손을 느낀다.
두껍고 따뜻하다.
이 손은 나의 어느 부분이든지
스쳐가거나 휘감을 수 있고, 나를
저 아래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소 뒤의 세계는
그 손, 큰 손 때문에
어둡고 차지 않는가?
놀빛 속에 입술이 흐르는구나.
모닥불
- 이가림 -
한무더기 동백꽃인 양
변두리 눈밭에서 피어나는 것
숨어서 더욱 타오르는 것
강아지도, 구두닦이도, 자전거 수리공도,
몸 파는 아가씨도
서로 다투어 꽃송이를 꺾는가
둥그렇게 둥그렇게 어우러져
언 손들을 내뻗고 있구나
노을빛인 양 물든 인간의 고리
모닥불
- 백석 -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래벌판
- 오정환 -
우리는 늘 거칠거칠해.
깜깜한 어둠으로 눌러 씌워도
차마 잠들 수 없지.
저 스러져가는 불빛이며
점점 어눌해지는 목소리
쉴 새 없이 닦아내야 해.
비벼대고 비벼대어 낱낱의
미세한 가루로 만들어야 해.
바다가 제 아무리 길길이 뛰어봤자
우리는 전혀 신경쓰질 않아.
얼굴을 쳐들지도 몸부림치지도 않아.
서로서로 움켜잡은 손아귀마다
끈끈하게 묻어오는 신뢰의 땀.
크게 숨 한번 내쉴 수도 없는
좁아빠진 공간이지만
어깨와 어깨로 밀착한
우리들의 끝없는 세상.
한 번씩 미친 바람이 불어
꼰아 쥔 손 매듭을
마구 잘라가기도 하지만
어디서건 우리는 가라앉지.
밑바닥으로 밑바닥으로
그리고 잽싸게 다시 모여들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해.
견딜 수 없는 슬픔도
너덜너덜한 하늘도, 가슴팍으로
모두 깔아뭉개면서 쉴 새 없이
닦고 비벼대고 닦고 비벼대고
매끈하게 반짝반짝 눈뜨는
푸른 햇살을 위하여, 우리는
늘 거칠거칠해야 해.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순의 흙
- 오세영 -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모악산 기슭 나그네
- 박희선 -
--충만에의 거액, 마침내 침묵을 깨고 가지끝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순수의 배반자여!
어쩌다가 눈을 뜨고 물소리를 생각하면서 다시 소년이고저 기리던
생각 순간으로 돌아와서 머웃 나를 잊는 때가 있다.
눈을 뜨고서, 물소리를 그려보는 것은
지리산 볍솔염,
내려오다가 만난 사람, 숫돌에 날을 세우던 그 중년 늙은이
수리개 빙빙 삿갓을 씌워놓고서 오르는
하늘 아래의 첫 마을, 날을 고눠
세워든 새을자로 휘어진
황새목 낟자루,
어쩌다가 헐어진 터 묵은 초가집 삼간에 세를 들고
살면서,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갑을병정 누구라고 이름하여도 좋은 것이지만,
수리개 빙빙 돌던 하늘, 성 돌을 주워서 ?아두고
시인이여, 시인이여, 누구도 없이 불러보던 이름들
백불목은 고스라니 죄다가 스러지고
개가죽나무 열매보다도 그늘이 없어서 슬프더라고(말하던)
젊음, 오늘은 귀신사에서 목욕탕 주머니
왼 손아귀에 꾸겨서 쥐고 드나드리로 나와서
뒤돌아보는 모악산, 너는 이제 한 사람의 시인
그 이름을 알리라. 개구리 모냥 빠그락 빠그락
늦 피기 비롯하는 자목련,
그 가지 끝에서 쉬어가던 목소리를 가다듬다가
떠난 사람들, 저승 소식과 같은
갈구리, 어쩌다가 눈을 뜨고
어쩌다가 다시 소년이 되고져
물소리 생각하는, 오늘은 한 모서리
그리하여 신문사의 데스크
경금속성 소리나는 유리판과 함께 생각하느니
오늘 새벽 바라보던 달 모악산 기슭의 새벽달
실눈, 벗이여 평상할지라 오늘은 4월
1984년, 즈문 날
문턱에서 피어난 태음력
푸른 산의 청솔가지 아궁이에 밀어 넣고서 생각하는
초가삼간, 가맛틀과 같이 기리운 초하룻날이다.
모 촌(暮村)
- 오장환 -
초라한 지붕 썩어 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 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싱싱하던 넝쿨이 사그라 붙던 밤, 지붕 밑, 양주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히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 들고 초라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로술집의 모스크바
- 예세닌 -
그렇다! 이제는 결정된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는 일이 없게
나는 고향의 들판을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날개 같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서 미류나무가 소리를 내지는 않으리라.
내가 없는 동안
나지막한 집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내 늙은 개는 오래 전에 죽어버렸다.
구불구불한 모스크바의 길거리에서
죽는 것이 아무래도 내 운명인 성싶다.
나는 이 수렁 같은 도시를 사랑하고 있다.
설사 살갗이 늘어지고 설사 쭈글쭈글 늙어빠졌다손 치더라도.
조는 듯한 황금빛의 아시아가
성당의 둥근 지붕 위에서 잠들어 버렸다.
밤에 달이 비치고 있을 때,
달이 비치고 있을 때...... 제기랄,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고개를 떨구고 간다.
골목길을 따라 단골 목로술집으로.
소름을 끼치게 하는
이 굴 속에는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는 소리.
그러나 밤을 새워가며 샐녘까지,
나는 창녀들에게 시를 읽어주며
불한당들과 보드카를 들이킨다.
심장은 차츰 세차게 고동친다.
나는 이제 알지 못할 말을 한다.
"나는 당신네와 똑같이 구제받지 못할 자이다.
나는 도로 물러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나지막한 집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내 늙은 개는 오래 전에 죽어 버렸다.
구불구불한 모스크바의 길거리에서
죽는 것이 아무래도 내 운명인 성싶다.
목련을 보며
- 박일규 -
환한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숨차고 어둡던 죽음을 지나
모닥불에 눈매운 삼년상 지나
밝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허술히 살았던 한 세상이랴.
어려운 고비고비 지난 일들을
저승에서 호젓이 되뇌이자면,
꽃잎들이 포개어져
어데론가 환하게 드리어지고...
머언 하늘로 가는 길이다.
어떤 날은 속삭이는 밝은 비단별
멀리 있으면 푸르른 하늘
부르지 마라.
다 다 청명으로 이르름인가.
목련화
- 조영식 -
1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순결하고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2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내일을 바라보면서 하늘보고 웃음짓고
함께 피고 함께 지니 인생의 귀감이로다
그대 맑고 향긋한 향기 온누리 적시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우아하게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라
목련화
- 박정이 -
너의 몽오리
도톰하게 살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
살풋한 입술
희디흰 숨결
오 내 사랑 목련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네게로
발걸음 옮기고
나는
이 봄의 문턱에 서본다
목마
- 윤승천 -
풀이 없다고 이 도시에서
목마를 타는 것은
슬픔을 삭히는 일일까
광화문이나 시청 앞을
목마를 타고 한바퀴 돈다고
서울의 표정없는 얼굴이 변할까
갈기없는 말을 타고 말 탄 양 하는 것은
과연 서럽지 않는 일일까
앞발을 치켜들고 하늘로 통할 수도 없고
천리를 단숨에 달리며 천하를 누르지도 못하는
목마를 타고 이 도시를 돌아보면
얼마나 확 트인 기분이 될 수 있을까
목마는 주인의 말도 잘 듣고
적당히 이끌기만 하면
서울쯤은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 수 있지만
말의 용트림이 주는 살아있음을 알까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최후의 말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아무리 목마를 타고
죽는 날까지 말잔등을 때린들
근엄한 위엄을 갖추고 금빛 휘장을 날린들
무표정한 서울의 모습들이
단 한 번이라도 변하기나 할까.
목마름으로
- 이상백 -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이제껏 뼈마디에서
떨어져 내리던 글들이
잠시 목을 축이고 달아나 버린
빈자욱에,
바람은 불어
나목의 높이를 키우는
흰 뼈가 드러난 위로
다시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물이 조금만 감돌아도
노을 빛 몇 가닥을 잡고
살점이 나가도록 긁어대던 밑바닥.
다시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목마름은,
오랫동안 비워 둔 창으로 돌아와
어둠을 밀치는 몸살을 앓으며
그 자리가 채워지는 것을 봅니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
[1]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2]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3]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목숨
- 변학규 -
엄마 눈 눈맞추는
젖꽃 문 아이같이
방울 물 움켜 받는
떨리는 손목같이
내 목숨 푸름에 젖어
날개 치는 저 높이.
흰 눈을 털고 있는
새움 튼 가지같이
별빛을 쓰다듬는
가슴 젖은 강물같이
내 목숨 머릿물 터져
출렁거리는 저 깊이.
목숨
- 신동집 -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 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者)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者)는 살은 자(者)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목숨
- 김남조-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목숨이여-Mehr Licht
- 구상具常 -
살이 잎새되고
뼈가 줄기 되어
붉은 피로 꽃 한떨기
피는 날엔
비린내 나는 운명도
향내를 풍기오리니
목숨이여
목숨이여
마음이 하늘같은
거울이 되어
어마, 님의 얼굴
비최이도록
가슴이 사랑의
도가니 되어
차라리 님의 심장
데우오도록
목숨이여
목숨이여
목 잘린 한국문학
- 방영주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한통속 되어
검은 뒷거래
은밀히 사통하여
작가는 장고 치고
출판사 북 치고
비평가는 꽹과리 치고
언론인 징 치는
어설픈 사물놀이
오감 마비된
독자들
우민화 일조하는
우리 문학
어느 분야보다
악화가 양화
구축하는
그레샴 법칙
철저히 지배하는
우리의 서러운
목 잘린 한국문학
목포항 1
- 명기환 -
푸른 빛이 감도는
나의 다정한 항구...
목포는
목밑샘의 고향
시방 가늠자의 눈금 위에서
위태롭게 생동한다.
늙은 배들이
목쉰 기적을 울리고
정은 있어도
발전이 더딘 도시
이 도시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 속에 끼여
술도 배우고 노래도 부르며 살아
간다.
푸른빛이 감도는
나의 다정한 항구
목포는
영원한 향수로만 머물 것인가
목화바구니
- 양치상 -
구름 조각
머물다 간 언덕받이에
달빛이 치마를 벗는다.
분이의 목화바구니엔
늘
흰구름이 머문다.
파도 울어
지샌 지금
녹슨 대리석 기둥에
낡은 교회 종소리를 갈며
바람은
바람은 서로 기운다.
몰운대 안개
- 손해일 -
얼마나 흘러왔을까.
낙동강이 굽이굽이 남녘바다와 살섞는 곳
타성받이 하나 없이 대물리며
안개를 먹고 안개만 낳는
안개들의 집성촌
부산 다대포 몰운대(沒雲臺)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ㄲㄹ ㄲㄹ ㄲㄹ ㄲㄹ ㄹㄹ
현해탄을 돌아온 을숙도 갈매기떼
안개비에 젖을 때
몰운대 물살에 옷자락을 끌며
가덕도 산자락에 지는 노을
아직도 내는 모른데이
낙동강 물은 썩어도
버릇처럼 부딪치는 포말을 휘적시는 남녘바다
솔바람 가지 끝에 걸리는
몰운대 안개꽃
그 현란한 일렁임을
몸 부딪치는 비둘기
- 김재원 -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 앞에선 유일의 왕자
우주의 제1조인 내가
출근시간 5분전
회사 근처의 횡단로
황새처럼 꺼부정한 신체로
시계 보며 뛰어서 건너가는 것을.
인생은 뛰어가도
그렇게 가끔 지각하는 것을.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에겐 두 번째 아빠.
제 그림자 말고는 둘째인 내가
내 키보다 5분 낮은
어느 장관의 비서실,
빼랑빼랑한 말투 대신 서류를 읍하고
눈치 보며 힐끔힐끔 숙이는 것을.
인생은 그렇게 절을 해도
가끔씩 나보다는 상전인 것을.
그러나 아내는 알 것이다.
그대하고, 또 하나 득남의 셋이서
세 간짜리 전세방
착실한 오욕으로
시어머니가 사시는 구에
문패라도 걸려면 야근을 하고
인기보다 싼 글을 써야 하는 것을.
인생은 받은 명을
득남의 몸에 묻어 놓고 가는 것을.
구공탄으로 꽃을 피우고
눈물로 협박하는
아내는 아는 것, 모르는 것 합쳐서
내 인생을 빼고 더해 제자리에다
묶어놓고 정착시켜 가장이게 하고
양복 저고리에 단추되고 포케트 되어
심심한 낮, 대견스런 밤을
단둘이서 우리는 몸 부딪는 비둘기.
못
- 임보 -
내 젊은 시절 한 짓은
못을 박는 일이었네
한 여인의 연약한 심장에
매일 구멍을 뚫었네
청춘도 사랑도 다 잃고
가난과 싸우던 가련한 여인
청맹과니 한 아들에게
이 세상의 문을 열어준 댓가로
그녀는 천 개의 못에 박혀
드디어 가라앉고 말았네
못된 불효
- 유 순 -
나도 같이 가자.
- 노인네는 집에서 애들이나 보세요.
나도 용돈 좀 다우.
- 노인네가 어디 쓸데가 있어요.
나도 이런 옷 입고 싶다.
- 노인네가 아무거나 입으세요.
힘들어 못 가겠으니 오너라.
- 노인네가 택시 타고 오세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 노인네가 가만히 방에나 들어가 계세요.
못잊어
- 김소월 -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라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롷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질
- 강신용 -
못질을 한다.
험물어져 가는 나의
가슴,
바르고 곧은 것들만을 골라서
못질을 하지만
상처로 되돌아오는 나의
일상,
못질을 한다.
출근길, 퇴근길 혹은
모진 세상 언저리
내 모진 것들을 모아서
못질을 하지만
매일같이 빗나가는 나의
하루.
묘지송(墓地頌)
- 박두진 -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에 어둠에 하이얀 촉루(燭累)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섧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무교동
- 박태진 -
정말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심각했던 말끝을 흐리어
약주잔이 뒤받은 뒤를 이어
비 오듯이 해 저물듯이
그것은 무교동 언저리
하루는 달력에 미끄러진 숫자
사람들이 변했다고 그는
가래 낀 목청, 술을 엎질렀다
달력의 숫자는 왜 속지 않느냐고
인생이 짧다뿐 잘못은
짧아서 초라하다 뿐
속는 것도 즐거움인 줄을
그는 미처 몰랐다고
이 지붕 밑은 그렇다 치고
웃음이 감도는 눈자위
주름이 거북한 눈자위
그는 나더러 나는 그더러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무너지기 위하여
- 안혜경 -
파도는 동네 입구에서 멈추었다.
바람의 신호소리 지붕 위에 앉고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고
한밤에서 나를 떼어놓았다.
공터에 앉은 사내가
꿈의 흐름을 변화시키기 위해
담배로 불꽃을 그렸다.
어디선지 돌멩이가 날아오고
정원의 꽃이 떨어졌다.
집들은 조용하게
감히 말하려 들지 않았다.
문은 귀가 멀은 채
활짝 열려 있고
바다로, 강으로, 무덤으로,
돌아왔다.
무너지기 위하여.
사과를 입에 물고는
모래처럼 범람하여
견고한 어둠 안에
팔은 책상 밑으로
다리는 재봉틀 위로
머리는 의자 밑으로
가슴은 창문으로
찢겨진 채 장사지낸다.
밤은 낮게 낮게 흐르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당황한 것은 훨씬 후.
새벽이 그의 걸음을 옮길 때
당혹스러움으로 나를 흐르게 했다.
무등을 보며
- 서정주 -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애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덩에 놓일 지라도
우리는 늘 옥(玉)돌 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무등에 올라
- 나해철 -
무등에 올라
그리운 분지 광주가 눈시울에 가득할 때
행복했던 어느 봄 남쪽바다 제주에 보았던
분화구 산굼부리를 생각했다.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 땅과 하늘을 태우던 용암과
뜨거운 불 토하기를 잊은 채
깊고 깊은 가슴의 끝까지
푸르른 숲과 바람과 안개를 가두고 키우던
적막의 웅덩이.
그때 나는 여행중이었고
햇빛과 나의 신부가 따뜻했으므로
둥글게 가라앉은 억 년의 고요가
차라리 평화로와 좋았다.
절망과 희망으로 혼을 놓고 다시 깨어나는
그 후의 몇 봄이 지나면서
단단하여 결코 죽지 않는
세상에 흔한 한 풀씨가 되어
어느 날 무등에 올랐을 때
의롭고 귀한 것을 위하여 눈물겹게 아프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침묵 속에 아름다왔으므로 오래 생각했다.
무엇이든 없애고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용솟음의 불덩이를 갈무리한 채로도
다만 소리없이 숲과 바람,벌레를 키우며
참고 견디며 끝끝내 기다리던 분화구
그리고 우리들 무등.
깊은 소용돌이 희망의 화염을 다독이는
넉넉한 사랑과
끝까지 기다림에 드는 아름다움.
무등차
- 김현승 -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양 마음에 젖는다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무심사로
- 이충이 -
간천을 따라 내려갔다
구겨진 아내의 가슴
마름질하듯
무심천변
사월의 꽃잎 한둘
떨어진다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려니
마른 손 놓고
자갈밭에 앉아 있다
아내는 지금 설운 산행
땅속 그루터기 그 밑에
묻어버리는 것이려니
죽어서야 기른 새끼 모여들듯
뒷날
이 땅에서 꽃으로 피어
색색 나비나 모으려니
이제서야 한 세상 등짐으로 하고
간천을 건너간다.
무지개
- 김동리 -
내 어려서부터 술 많이 마시고
까닭 없이 자꾸 잘 울던 아이
울다 지쳐 어디서고 쓰러져 잠들면
꿈속은 언제나 무지개였네
어느 산 너머선지 아련히 들려 오는
그 어느 오랜 절의 먼 먼 종소리
그 소리 타고 오는 수풀 위 하늘엔
지금도 옛날의 그 무지개 보이리.
무지개
- 김동리 -
숲 속에 물 솟는 소리
물 괴는 소리
靑山에 물 솟는 소리
물 괴는 소리
내 사랑은 사철
가슴속 피는 꽃
가슴속에 무지개 솟는 소리
무지개 괴는 소리
하늘과 땅 사이엔
사랑의 무지개
이승과 저승 사이
다리 놓는 무지개
무지개
- 한하운 -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칠채(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궁륭(穹륭)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묵화(墨畵)
- 김종삼 -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문
- 이난수 -
매일 아침
하나의 문이 열린다
열린 문으로
오늘이 조심스럽게 들어 오고
들어온 어제는
나래를 편다
손시린
지난 겨울
문은
하늘을 이고
밤새도록 몸살하더니
사이사이로
바람을 타고
비를 꺾어
드디어는 햇살로 가득히
우리를 지켜주는
문
아가야!
우리가 세우고 가꾼 문 안에
또 하나의
푸른 네 문을 열어 주고 싶다
문득 고요하게 하옵소서
- 이창기 -
귀뚜라미는 늘 귀뚜라미가 우는 저녁을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이별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물 위를
뛰어다니던 이름도 기억의 밖에서
문득 고요하다
잠자는 바람의 내부에 촛불이 켜지면
안경을 벗어도 죽은 사람들의 꿈이
보인다 그 꿈과 어울리면
창을 부수고 반짝이는 죽음의 나라에 애인들
가자 아무 이름도 없는
모래 위를 발자국도 들고 가자
그림자도 벗어버리고 꿈에 묻혀
문득
이
순
간
에
문둥이
- 서정주 -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문맹
- 류시화 -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젊은 사두에게
더 늦기 전에 글을 배울 것을 강조하자,
그는 내게 들으라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글을 모르는 것보다 더심각한 것은
영적인 문맹이 되는 일이다.
세상에는 많은 학식을 자랑하지만
영적으로 문맹인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문상
- 이정숙 -
그 영혼이
나들이를 떠났다고 합니다.
주인 없는 자리에
명함 놓고 돌아서듯
향 피우고 일어설 때
답례로 만장이 펄럭였다고 합니다.
격식이 수월찮은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도착한 모든 사람이 떠난다는
합의가
파약처럼 여겨지면
상주는 짐승처럼 슬프다고 합니다.
사씨댁 상가라고
등불 켠 골목에서
산 사람이 만난 죽음은
얼굴이 없었다고 합니다.
영혼을 신이 데리고 나가서
얼굴은 없는 채
곡성으로만 남아 있는 죽음은
수월찮은 격식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만난 죽음에서
마지막 만난 죽음까지
죽음은 그저 어디서나
내 세상 얘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문의
- 김년균 -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모두 오는데,
창가에 서면 꿈들이 오듯
버려진 생각들도 따라서 오듯
강가에 서면 강물이 오듯
강물의 줄기따라 세월이 오듯
삼라만상을 이끄는 평범한 바람
거리에 오듯
모두 오는데,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가랑잎 떨어져서 길목에 지듯
패어진 웅덩이로 빗물 스미듯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어디론지 어디론지 가고만 있는가.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 고 은 -
겨울 文義(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小白山脈(소백산맥)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文義(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正義(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文義(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어와 조기의 먹물논쟁
- 손해일 -
조기(助氣)는 낫놓고 기역자를 모르고
문어(文魚)는 기역자를 알고도 낫을 몰랐다.
20세기 저물녘
지구촌 동방의 한 끝
머리좋고 난사람도
경제학 박사도 흔전만전 했다는데
오늘날 우물안 개구리로 나라살림 거덜내고
코쟁이 경제신탁통치로 체면 구긴
한반도가 있었더라.
나라살림 되살린답시고
방방 뜨는 신지식인이 쉰지식인 몰아치는
구조조정 살벌했기에
단연 화두는 신지식인
내남없이 기갈들려 묘방찾기에 골몰했더라.
]
걸핏하면 수해요, 가뭄이요, 대형사고라
넘치는 실업자에 먹거리, 입을거리, 잘거리
까맣게 잊고 살던 보릿고개 횡행하니
차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더라.
- 이에 보다못한 문어와 조기도 먹물논쟁에 한다리 끼었으니
$문어 가라사대:
"이세상 물고기중 지식 많기로는 머리에 먹물든 내가 으뜸이라. 어려서부터 천자문에 소학, 동몽선습, 고문진보,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서역경에 불경까지 천문지리 좌르르 통달하니 그래 내 이름이 글월문자 문어(文魚) 아니더냐. 게다가 입에 붙은 외국어에 신학문 유학파니 나야말로 명불허전 명실공히 신지식어(新知識魚)라. 내 큰 머리통에 총기가 좍좍 흐르는 형형한 눈빛이 깨어 있는 신지식인의 표상이라. 어허참, 요새 책을 너무 읽었더니, 어째 눈이 좀 침침하더라니. 헌데 조기 네 별명이 뭐였더라. 그렇지! 석수어(石首魚), 얘긴즉슨 돌대가리, 그것도 머리에 돌이 둘씩이나 들었으니 딱허다 딱해. 그러니 돌머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 분기탱천한 조기 가라사대 :
"먹물만 들었으면 대수더냐. 흐믈흐믈 뼈도 없이 형편 따라 변색하는 너야말로 간신의 전형이지. 을사오적 이완용이 무식하여 매국노더냐. 명필이 아니라서 매국노더냐. 우리처럼 뼈대가 있어야지, 뼈대가. 내사 서해상을 주유천하로 노닐다가 살신성어(殺身成魚) 장한 뜻에 아이디어 좋지, 부가가치 그건 또 얼마더냐. 그러니 나야말로 지조있는 신지식선비라."
% 문어가 코웃음치며 반문하여 가로되 :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니 네가 석어(石魚)지. 부가가치,부가가치 하는데, 그거라면 나야말로 원조니라. 저 동방의 한국재벌들이 앞다퉈 흉내내는 '문어발기업' 소리도 못들었느냐, 너는. 유식한 말로 그로벌경제니 다국적기업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그게 그거라. 어떠냐, 케인즈경제학도 뉴딜정책도 다 내 경영학을 한수 배운 것이니, 내가 노밸상을 받기로 말하면 벌써 수십개로도 모자랐을 터, 뭘좀 알고 애기해라. 공부좀 더 하고..."
$ 조기가 기가 막혀 재차 반문하여 가로되 :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너는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느냐. 그리 잘난 네가 어디 제사상에라도 한 번 올라 봤느냐. 기껏 탕국거리 주제 아니냐. 나야말로 제사상의 웃자리 진객으로 아무리 찟어지는 가난뱅이도 일찍이 고려 인종때 실세 이자겸이 상감께 이몸을 진상해 올리면서 비록 전라도 영광땅에 잠시 귀양사는 처지지만 비굴하게 아첨은 않겠다고 영광땅에 잠시 구양사는 처지지만 비굴하게 아첨은 않겠다고 내이름 석자를 '굴비(屈非)'로 지었다니 얼마나 비장한 애기냐. 그래 인종이 내 고기맛을 보고 기막힌 별미에 뿅, 갔다지 뭐냐. 네 튀어나온 주둥이와 다리 발판이야말로 힘없는 민초들 피빨아 먹는 탐관오리의 물증 아니더냐. 어때 더 할 말 있느냐. 문어야 "
? 그로부터 이땅에 먹물논쟁과 신지식인 타령은 유행처럼 끝이 없어, 새천년 21세기를 앞둔 오늘까지도 이러쿵 저러쿵, 따따부따, 횡설수설, 설왕설레로 실속없이 말싸움만 일삼고 있다더라.
물
- 전봉건 -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읍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사월 어느 날 혹은 오월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일음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물
- 안애경 -
물이 아주 멀리서 오나 보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욕실에 앉아 기다린다
아아 아아 아아
수도관 울리는 소리가 들릴 뿐
물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섭씨 34.5도
습도는 85
허덕허덕 직장으로부터 돌아왔지만
아아 아아 아아
처랑한 소리로 관이 울린다
물이 필요하면
물가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데
언제부터 물을 가두고 관을 꽂아서
집에 앉아 오라고 명령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물이 우리를 배반하는가
어떤 높은 사람이
이 동네에 올 물을 대신 쓰는 걸까
욕실 바닥에 앉아 물을 기다린다
오지 못하는 물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손톱으로 긁으며
까마득하게 굴러 떨어져 내려가고 있다.
물구나무 서기
- 정희성 -
뿌리가 뽑혀 하늘로 뻗었더라.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을 새가 들으니
입이 열이라서 할 말이 많구나.
듣거라 세상에 원
한 달에 한 번은 꼭 조국을 위해
누이는 피 흘려 철야 작업을 하고
날만 새면 눈앞이 캄캄해서
쌍심지 돋우고 공장문을 나섰더라.
너무 배불러 음식을 보면 회가 먼저 동하니
남이 입으로 먹는 것을 눈으로 삼켰더라.
대낮에 코를 버히니
슬프면 웃고 기뻐 울었더라.
얼굴이 없어 잠도 없고
빵만으로 살 수 없어 쌀을 훔쳤더라.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보고
멀리 고향 바라 울었더라.
못 살고 떠나온 논 바닥에
세상에 원
아버지는 한평생 허공에 매달려
수염만 허옇게 뿌리를 내렸더라.
물구나무서기
- 이수정 -
따분할 땐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아라
어린 날 기쁨들이 줄지어 달려온다
발까지 매만져주는 체온 같은 세상인 걸...
23.5도 기울기로 돌아가는 지구본
그대로 두 지축을 물구나무 세우면
부황증 앓는 생명들이 허물벗고 환하랴.
물결
- 노자영 -
물결이 바위에
부딪치면은
새하얀 구슬이
떠오릅디다.
이 맘이 고민에
부딪치면은
시커먼 눈물만
솟아납디다.
물결의 구슬은
해를 타고서
무지개 나라에
흘러 가지요......
그러나 이 마음의 눈물은
해도 없어서
설거푼 가슴만
썩이는구려.
물방울 튀기는 노래
- 구중회 -
물방울 튀기는
물가에 섰다.
벼랑이 보였다가
바닥이 드러났다가
수런거리는 물.
지금 물은
매우 위험한 어린애다.
권투를 하듯이
물방울 튀기는 물가에
사람들이 지나갔다.
물의 계율 1
- 이병천 -
잠을 자고 난 뒤에는 꼭 흐르기
흘러간 다음에는 잠이 들기 처음부터
끝내 우리의 일은 흐르기
흘러서 떠나가기
가다가 누운 밭을 일구어 놓기
그 밭으로 하여
흘러서 기름지게 함도 그렇지만
우리의 하루의 일이 되게 하기
겨울산은 얼굴을 푸르게 하거나
푸른 낯빛을 다시 닦고
자꾸 떠나 변하게 하기
바다의 등에 수천 수만 개로
내리는 물방울로 부딪쳐
바다가 몸살을 앓게 하기
작은 몸으로 싸운 우리도 몸살을 하여
늪에 갇히면 더욱 아프게 잠이 들기
우리의 흐름으로 우리의 잠이 깨기
우리의 흐름으로 모두가 흐르게 하기
그러나 우리의 흐름으로
그들이 저절로 일하여 흐르게 하기
물의 나라에서
- 이성복 -
1
물 속에 잠든 풀잎
한번 발 내리며
영원히 무너지는
물방울
작은 물이 큰 물
만나는 감격
잠깐 번지는
감격
흐르는 물과 내리는 물의
서로 몸 바꾸기
그대가 물의 발이라면 나는 물의 발가락
그대가 물의 鍾이라면 물의 分子와 分子 사이를
헤집고 밀치며 살 부비는 나는 물의 鍾소리
그대가 물의 입이라면 벌어진 물의 입이라면
나는 하늘에 땅을 잇는 물의 울음 오, 그대가 물의 일그러진 입이라면
2
풀잎 위에 구르는 물방울
풀줄기를 흔드는 물방울
풀밭을 흔드는 물방울
풀밭을 누르는 물방울
맨발로 지우면 맨발에
맺히는 물방울
눈감으면 마음에
구르는 물방울
마음 기울면
흘러내리는 물방울
제 옆의 물방울에 어리는
다른 물방울의 얼굴
제 옆의 물방울에 걸리는
다른 물방울의 목소리
맨발로 지우면
날개 없는 방아깨비
뛰는 연습을 하고
맨발로 지우면
네 눈은 팍,
흩어져 흐르고
3
누가 물 위를 지나가면
물의 목소리
누가 풀잎 흔들면
풀빛 마음 흔들려
누가 거기 있어?
눈초리, 목마른 눈초리
누가 누구를 흔든다
……안개……
누가 나를 흔든다
풀잎 사이
물방울,
떠 있는
물의 비밀
- 임문혁 -
모올래
너를 만나면
뜨는 무지개
부드럽게 휘어지며
내게로
가슴에 꽃이
꽃이 피었네
다년간 창문이 열려 있고
열매, 열매가 맺히네
곁에서 울리는 목소리, 아하
나는 풀이란다
네 오면 금새 푸르러지는
풀잎이란다
알 듯
모를 듯
은밀한 비밀
창문만 열리면
속삭임만 스치면
산도
들판도
싱싱하게 일어서는
신비한 비밀이란다
물의 역사
- 박기영 -
물이 움직인다.
물이 닿아, 이를 곳은 바다이겠지만
물은 움직여서 어딘가에 닿고 싶어한다.
끝없는 물결의 채찍으로
자신을 후려치며 바다로 다가가는
저 물의 두려움
뮬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
어디엔가 자신을 담아보고 싶어한다.
물이 움직인다.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하는 법
그러나 물은 잊지 않는다
그곳 태양이 아무리 자신을 칭찬한다 해도
보다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물이 움직인다.
흐를수록 깊어지는 물의 저 수심
한때는 무엇엔가 갇혀 썩기도 하겠지만
물은 움직여 더욱 낮은 곳
흘러, 가장 깊숙한 곳에 멈춘다.
물이 움직인다. 닿아,
자신을 가둔 그릇을 두드리며 물이
물통
- 김종삼 -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뭉게구름
- 최승호 -
나는 구름 숭배자가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
만 할아버지가 구름을 이고 걷다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을
이고 걷다가 사라졌으며 어머니는 구름을 이고 걷는 동안 늙으셨
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는 서리,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뭉쳐졌다 흩어지는 내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
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이고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변두리에서 올해도 아리따운 꽃들이 해와 달을 이고
피었다 진다 말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가을이 오리라
먼 후일
- 김소월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곳에서부터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바다
- 박용래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먼 산(山)/천상병
먼 산은
나이 많은 영감님 같다
그 뒤는 하늘이고
슬기로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이고
통일은 없지만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되면
달라지리라고---
먼 산은
애오라지 역사의 거물
우리 인간은
그 침묵에서 배워야 하리......
멸입(滅入)
- 정한모 -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멸치
- 김기택 -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명궁
- 윤후명 -
잡목 숲은 무덤처럼
어둠의 둘레를 무지개로 감고
별빛을 모아 물결의 장단에 따라
바람이 하늘거렸다,
날새의 제일 유심히 반짝이는
두 눈깔을 꿰뚫음에
공명하며 하룻밤을 흔들린 이의
사무치는 뜬 눈의 웃음
드넓고 광포해라,
새가 온 들을 채어 쥐고
한 기운으로 푸드드득 오를 때
활짝 당겨 개이는 먼오금
숲과 들을 벗어나 휘달려
그는 죽음의 사랑에 접근한다
명태
- 양명문 -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미국으로 입양가는 아이들에게
- 정대호 -
좋아하지 말아라 이 땅을 떠나면서
누가 길러줄지 모르며
반도를 떠나는 아이들아
굶주림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이 땅을 떠나는 너희들
신문은 쉽게 적응하고 온순하다고
너희들을 자랑하며 말하지만
그건 결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감사할 때 감사해야지 내 땅에서 쫓겨나
남의 밥을 먹는다고 기마저 죽어서야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너희들
이 땅에서 먹여주지 못하고 보내는 우리들
부끄러움과 죄 지은 마음으로
무어라 말할 수도 없지만
코 높은 백인들 양육보증 요구할 때
말 한마디 못하고 떠맡기는 우리들
늘 죄스럽고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뜨거운 피 속에
우리들의 얼음같은 염치가 숨어 있음을
우리들의 부끄러운 피 흐르고 있음을
아시아의 동쪽 작은 반도 너희들이 태어난 강물임을
머리 속에 남겨서 기 죽어서야
떳떳하게 살아라 이 땅을 떠나서도
밥그릇을 위해서 양육을 위해서 떠나가는 너희들
떠나서도 이 땅의 강물을 잊지 말았으면
먹여주지 못하고 내 땅에서 보내는 우리들
염치같은 부탁이지만
좋아하지 말아라 내 땅을 떠나면서
울지는 말아라 살아가는 쓰라림 속에서
그 땅의 강물도 너희 몸속 흐르며
때로는 거부를 일으키지만
흐르고 흐르면 흑, 백의 명암 속에서
그 물도 너희 살이 될 수 있음을
살아가면서 너희들의 눈과 귀도 염색하여 줄 수 있음을
너희들도 깨닫게 되지만
너희들이 울면 내 땅에서 보내는 사람들이야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 없단다
울지는 말아라 내 땅에 쫓겨난대서
기뻐하지 말아라 내 땅에서 쫓겨나면서
미륵사 5층석탑
- 이희자 -
다시 바람이 와 흔들어도
돌은 두께로 앉은
이끼만 쌓고
언덕의 막바지에서
더는 나아갈 길 없어
마련없는 약속만 목을 늘어뜨린다
지등 몇
초파일의 하늘에다
명줄을 올려
상수리나무의 단잠을 깨우고,
벽층 타고 오른 질경이풀들
내 기다림을 올려준다
내려다 보아도 닿지않는
산 너머 그 너머 마을
앉아서 버티는 궁금증에
탑은 또 조금씩 또 조금씩
제 몸을 헐어가고 있다
미술시간
- 권태현 -
새가 날지 않았으므로 하늘은
비어 있었다. 비어서
스스로의 깊이로 푸르렀다.
새의 깃털 같은 구름이 잠시
떠다니고 그 사이로 새의
부리 같은 햇살이 새어나왔다.
처음 백지 위에 맨손을 펼쳤을 때
조심스럽지 않은 땅이
없었다. 모서리 한 곳도
다치지 않으려고 화판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실핏줄 모두 벌려
산만한 높이의 산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허전하게 엎드리고
구부린 등이 알맞게 곡선을 그었다.
드믄드문 제 키를 자랑하는 나무 몇 그루
뿌리내리는 동안 산의 허리가
튼튼해지고 일어서는 풀빛 울음에
풍경 전체가 흔들렸다. 계곡을 적시며
흐르는 물줄기는 약속대로
하류로 흘러 산의 연장선을 그었다.
부러진 크레용을 던지자
놀라 흩어지는 산짐승들
좇으며 산 깊숙이
들어서면 비로소 한 마리씩
바위, 혹은 동굴 안쪽으로 숨어들고
헐벗은 꿈을 숨기려면 무슨 색깔이
제일 안전할까. 온 산을 뒤져야
오두막 한 채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색칠해도 채워지지 않는
빈 무덤 위로 노을이 지고 그 너머
돌아올 수 없는 거리에서 새울음
몇 마디 산등성이를 넘어왔다.
민간인(民間人)
- 김종삼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가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민들레
- 박천 최정순 -
임진강변 철조망 날아가
싹 틔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 아니더라도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북녘 향해 북바라기하며
피어나는 외줄기 그리움
매일 새로이 꽃을 피우며
개화(開花)의 아프메
눈물 흘리며
잔잔히 미소 짓는
철조망 민들레.
민들레
- 배찬희 -
바람의 목소리로만 이야기하리라
태양의 오랜 갈증으로만 사랑하리라
죽음조차도 조객을 부르지 않는
그 결벽함으로 고백하노니, 민들레
향기를 잃고 손님을 잃어버린
죽어서 더욱 빛나는 네 이마 위에서
순결을 보았노라, 민들레
제 무덤까지도 마셔버리는
그 냉정함으로 울어대는 산새처럼
이젠 더 이상 슬프게 노래하지 않으리니, 민들레
바람에 날려 방향 잃은
한 마리 십자매로
내 집에 네 둥지를 틀어다오.
애장을 파먹고 미쳐버린 여우처럼
온 산 누비며 달아난 곳
네 온기가 남아 있는
불빛 홀연한 토담집 꽃 밭
눈 맑은 소녀의 손 끝에서
수줍게 다시 피어나는
요절한 시인의 숨결.
민들레의 영토
- 이해인 -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로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처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처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민들레꽃
- 조지훈 -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민중선언
- 김영안 -
시대는 확실히 좋아졌다.
농민 열 명 노동자 다섯 명만 모이면
비싼 대학물 먹고 나와 할일없는 놈들
어느 놈이든 한 놈 끼어들어
이름을 만든다
명예를 만든다
기구를 만든다
전봉준을
전태일을
진리라는 책갈피 속에 모신다.
4월 5일 팔아먹은 놈들
노동자가 투신자살을 하면
재야는 투쟁거리가 생겨 좋고
농민이 폭삭 망하면
야당은 발언감이 생겨 좋으리라
어림없는 놈들
우리가 논밭에 엎으러져
이 뜨거운 여름을 지고 있을 때
위원은 그의 마누라와 2명인
'강경민주투사선두주자연합회'
'극렬민중운동가범세계적협의회'를 만들어 놓고
너희는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삶보다 먼저 투쟁을 교육시켰다
눈물이 많고 맘이 보드란 사람들
그대들의 더 온당한 투쟁은
이들의 이름 없는 시간 속에 들어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라고 불렀던 해직교수는
우상이 가고 난 봄날 아침 학교로 돌아가고
땅을 빼앗겨도
국졸인 이유로 나는 야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손목을 잃어도 우리는
국졸인 이유로 기계를 떠나지 못하는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끝까지 우리의 투쟁은 멈출 수 없는데
노조와 농민회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시회과학을 공부하고 온 학생의 애국심만을 믿고
우리는 계속 유인물만 받아 보고 있을가
아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노동자의 각성
농민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그대들은 애써 말하려 하지 말라
전봉준을 전태일을 뺏어
책갈피 속에 가두지 말고
저임금
저곡가에
목숨이 모져 살아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해 두지도 마라
기독교회관 금요기도회에서
자유실천문학회 맨 뒷자석에서
외로이 울다
외로이 울다 도망쳐 온
우리 불쌍한
쌩 알몸들
이젠 우리가 모여 할 때다
농약 먹고 목 매고 분신자살로 죽지 말고
우리들의 어둑한 거리에 혼으로도 살지 말고
이젠 우상놈 다리 후려칠
낫 놓고 기역자 한자 한자 쓰는
기 터지는 시로 살아날 때다
수천년 알몸으로 뜨겁고 차운 것 배운
양심의 소리로 살아
분노로
선언으로 살아
너희들의 오래도록 긴
책갈피 속
십자가 속
부처님 마빡 속
가을비 우산 속 룸싸롱의 계집 속
남산 위의 둥근 달 단상 위의 대머리
그 철판보다 두꺼운 철판바닥을
용서할 것인가
어림없다 땀 흘리지 않는 놈 공자 맹자 따위는
함석헌도 강원용도 김대중도
노동으로만 먹고 살고
죽음으로만 말해 온 우리에게
한낱 티끌이다
어이 할 것인가
어이 할 것인가
전태일이 노동자 약혼 반지 속에 있고
전봉준이 농민의 제상 위에 있을 터인즉
교회는 하나님을 석방하고
학문은 진리의 포승줄을 풀어
그것들이 일하는 사람 등 아무데나 가 붙게 하고
그것들이 일하다 죽은 혼 아무데나 가 절하게 하고
목사 중놈 신부 다
군인과 학생과 교수 다
그런 신 앞에 횡으로 서 절하게 하고
우리가 노동하다 지쳐 여름이 지겨울 때면
우리도 사무실로 가 동지의 전화도 받고
자전적 에세이도 쓰고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라고
거침없는 논문도 써 돈도 받고
우상은 없으되 민중은 무섭고
율법이 없으되 세상은 고른
참말로 믿어도 되고
참말로 하나이 되는
삼청교육대 애들이 들고 뛰던 통나무처럼
우리 이 미치게 뜨거운 역사를 이고 져야겠지 않은가
벗이여 동지여 친구여
우리들의 크나큰 사랑이여
밀어(密語)
- 서정주 -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
마당에
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 별
연필 깍는 소리처럼
떠서
이 世上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 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마른 나뭇잎
- 정현종 -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마른 여울목
- 서정주 -
말라붙은 여울 바닥에는 독자갈들이 드러나고
그 위에 늙은 무당이 또 포개어 앉아
마른 손 바닥의 금을 펴 보고 있었다.
이 여울을 끼고는
한켠에서는 소년이, 한켠에서는 소녀가
두 눈에 초롱불을 밝혀가지고 눈을 처음 맞추고 있던 곳이다.
소년은 산에 올라
맨 높은데 낭떨어지에 절을 지어 지성을 다리다 돌아가고
소녀는 할 수 없이 여러 군데 후살이가 되었다가 돌아간 뒤……
그들의 피의 소원을 따라 그 피의 분곷같은 빛깔은 다 없어지고
맑은 빛낱이 구름에서 흘러내려 이 앉은 자갈들 위에 여울을 짓더니
그것도 할일이 없어선지 자취를 감춘 뒤
말라붙은 여울바닥에는 독자갈들이 드러나고
그 위에 늙은 무당이 또 포개어 앉아
마른 손바닥의 금을 펴 보고 있었다
마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
--고향에로 가는 길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아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 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마을
- 박남수(朴南秀) -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마을
- 박남준 -
흰구름 하늘
박꽃이 피고
벌거벗은 아이들 강둑을 달린다
물장구 치며
송사리 피리붕어 쫓아다니고
아낙들의 빨래터엔
흰빨래 희게희게
검은 머리 감았네
어디로 가는 걸까
흰구름 하늘
빨래터엔 검붉은 물떼들
아이들은 이제 강으로 오지 않았다
마을은 비어 있었다
강물은 그리움으로 저리 울며 눕는데
돌아 올 수 없을까
마을 까치
- 최건 -
소식 나르며 살아 왔었지
기쁨을 울음으로 살아 왔었지
수백의 하루가 들고 나는 하구 느티나무나
수천의 생애를 기적으로 돋구는
철로변 키 큰 미류나무 높이
분교의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아침 저녁 인가로 나들이하며
인정의 담장 안을 기웃거리는
혈연의 족속
새벽별 서둘러 제 몸 사르고
아침햇살 제일 먼저 너의 집 들어서자
눈 비비며 부스스 일어나
밤새 두근대던 소식
지붕 위에 내리어 목청 베푸니,
살이 옹ㅅ길을 나서는 꼭두새벽
가랑잎 대신
발 끝에 채이는 동전 한 닢 우울과
청소차가 쓸고 갈
간밤의 어수선한 휴지조각 딩구는
네모창 빌딩의 숲 찾아가
죽음을 곡예하며 세상사 거느릴지언정,
적막한 빈 산은 매어달린 조롱
그곳에서는
다정한 햇살조차 추워라
밤마다 꿈길도 머뭇거리겠네
애옥한 사람들 오늘도
고향 길에 오르질 못했다
깊은 숲 침묵의 골짜기는 죽음보다 싫어
온종일 하구 밖 사위에서 빙빙 돌다가,
해거름 전
남의 소식 부지런히 전해 주고
제 집 소식 남이 가져 오는
우체부와 고샅길 동행하며
남기고 돌아갈 저녁 소식 더듬으니,
흥겨운 방아찧듯 주둥이와 꼬리 흔들어
뽑는 목청이야 슬픔 많은 세상에서
모진 기다림이 변해 된 가락
기쁨의 가락
기쁨을 울음으로 살아 왔었지
소식 나르며 살아 왔었지
두고두고 세월을 함께 하는
동거의 무리, 마을의 새는
밤 새워 흐들히 달빛으로 갈고 닦은
소식 노래 부르며
오늘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오지 않는 내일을 물어 나르네
마음
- 김광섭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마음 마을
- 천상병 -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천씨요 구천(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 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摩天樓)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 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萬字)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포 강변 동네에서
- 김정환 -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단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아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뻔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히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만가(輓歌)
- 심훈 -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만장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壽衣)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 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악재를 넘는다.
만월
- 이시영 -
누룩 같은 만월이 토담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이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만주(滿州)
- 심연수(沈連洙) -
잘 살려고 고향을 떠나
못 사는게 타향살이
간 곳마다 펼친 심하(心荷)
뜰 때마다 허실됐다
흐뭇할 품을 찾아
들뜬 마음 잡으려고
동해를 둘려서 어선에 실려
대인 곳은 막막한 벌판이었다
싸늘한 북풍받이 허넓은 곳
떼 장막을 치고 누워
떠돌던 몸 쉬이려던 심사
불쌍한 유랑민의 꿈이었다
서글퍼 가엾던 부모형제
헐벗고 주림을 참던 일
지금도 뼈아픈 눈물의 기록
잊지 못할 척사(拓史)의 혈흔이었다
만적
- 김윤현 -
너무 오랫동안 가라 앉았어
너무 깊이 잠들었어
어둡고 칙칙한 성왕성대 동구 밖에서
이젠 사람 가운데 살고 싶어
때가 되면 다리를 펴고 살 수 있어
배우고 익히면 정승도 우리 것이야
원님 배부르면 우리도 등 따신 시절 다 지났어
우리도 눈을 떠야 돼
개는 개만이 알아 주는 거야
가는 막대기도 함께 모이면 꺾이지 않아
초전에서는 반란군이 전멸되었다는 풍문도 들려오고
북산에서는 관군이 몰려온다는 소문도 떠돌지만
가랑비도 많이 오면 보는 터지는 거야
콩밭머리 혹은 허리 굽은 논배미에서도
잡초끼리 꼭 껴안으면 들불은 죽지 않는거야
생각해 봐 모여 가슴 맞대 봐
우리들 흔뜰림은 빛이 되지 못했어
우리들 흔들림은 구원이 아니었어
세상은 구름 오늘은 안개
우리의 소매자락 혹은 숨결을 되찾기 위해
모여! 내일이면 늦어
말(馬)
- 정지용 -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말
- 박천 최정순 -
눈에 보이는 것
다가 아니듯
입 뛰쳐나간 게
다는 아니지,
아름다운 향기 품은
입바른 꽃잎들
거센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 뿌려지는 수 많은 말,
피지 못한 꽃
몽오리 터져 죽은 기억
가지야, 너는 아는가
뿌리야, 너는 그슬픔 아는가.
생각의 가지 마음의 뿌리
인고의 계절 견디며 너희들,
화신(花神) 만나 순리 배워
말의 꽃을 피워라.
말(馬)
- 이수익 (李秀翼) -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聖歌)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은 아마포(亞麻布) 위에
하늘에는 슬픈 전별(餞別)이.
말 -1-
K·M에게 - 김수영 -
당신을 찾아갔다는 것은 현실(現實)을 직시(直視)하기 위하여서였다
마침 당신은 집에 없고 당신의 아우만이 나와서 당신이 없다고 한다
부산(釜山)에서 언제 올라왔느냐고 헛말 같이라도 물어보아야 할 것을
나는 총(銃)에 맞는 새같이 가련(可憐)하게도 당신의 집을 나와버렸다
그 아우는 물론 들어와서 쉬어가라고 미소(微笑)를 띄우면서 권(勸)하였다
흔적(痕迹)은 없어도 전재(戰災)를 입은 것만같은 (그렇게 그 문은 나에게는 너무나 컸다)
낡은 대문 사이에 매일같이 흐르는 강(江)물이 오늘에야 비로소 꽉 차 있다
설움의 탓이라고 이 새로운 현실(現實)을 경시(輕視)하면서도
어제와 같이 다시는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서
자꾸 수그러져가는 눈을 들어 강(江)과 대안(對岸)의 찬란한 불빛을 본다
횃불로 검은 물속을 비춰가며 고기를 잡는 배가 증언(證言)처럼 다가오고
나는 당신의 아우에게로 뛰어가서 나의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였다
말
- 남궁벽 -
말님.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든지 숙명을 체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간혹 웃는 일은 있으나
그것은 좀처럼 하여서는 없는 일이외다.
대개는 침묵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온순하게 물건을 운반도 하고
사람을 태워 가지고 달아나기도 합니다.
말님, 당신의 운명은 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외다.
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악을 볼 때
항상 내세의 심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당신의 은명을 생각할 때
항상 당신도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사람도 당신이 될 때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말뚝에 대한 기억
- 박현솔 -
눈부신 햇살 아래 새끼들과 장난을 치는
어미 소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 있다
아카시아나무 잎사귀에 부딪혀서 급강하하는
햇살의 칼날, 소의 몸통이 무수히 조각난다
아버지 약값을 위해 소를 팔던 날
외양간을 나서는 소의 깊은 눈망울 앞에서
후줄근한 몸빼 차림의 어머니가 휘청거린다
다음 생엔 네가 내 주인이 되어 만나자꾸나
자꾸만 머뭇거리며 고삐를 넘겨주지 못하는
제 주인의 맘을 읽었는지,
어미 소가 어머니의 손등을 핥아준다
고삐를 잡은 손이 위태롭게 허공을 향한다
무딘 날을 세워 굳은 땅을 갈아엎던 고집으로
무너지는 일가를 지탱해온 어머니,
어머니가 내준 길을 따라 어미 소가 트럭에 오르고
철제 문이 소의 그림자를 가두자,
젖을 갓 뗀 새끼, 어미 소를 향해 울음을 내지른다
트럭의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햇살에 잘린 붉은 파편들이 궤도 밖을 뒹군다
트럭이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말뚝처럼 박혀 있다
말씀
- 김대구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성서 요한복음 1장 1절)
말은 그렇게 한다
- 나태주 -
너 떠난 뒤
너 없이 나
어떻게 살 것이니
모르지만
나 떠난 뒤
나 없이도 너
잘 살아라
씩씩하게 살아라
아침에 새로 피는
꽃처럼
한낮에 하늘 나는
새처럼
말은 그렇게 한다
망나니의 노래
- 마광수 -
떨어져 내리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긴 한낮 태양을 비집던 태양,
제 미처 바다에 못가 미처버린 폭포,
모든 게 운명처럼 떨어져 내리나니
아, 어찌 모든 것들은 떨어져 가야만 하는 것이냐
시간의 힘은 이리 무섭기만 한 것이냐
어쩔 수 없이 울긋불긋 휘황한 치장을 하고
내 한껏 신명나게 칼을 휘둘러대면
칼끝은 본능처럼 선그어 떨어져 내린다.
--늠름하던 네 모가지는 어찌 그리도 힘없이 떨어져 버리는 거냐
내 마음 난파당한 어느 쇠배마냥
스스로 무거움겨워 가라앉아 버렸나니
나를 휘감는 건 죽음같은 고독일 뿐.
네 목을 찾지 말라, 날 욕하지 말라.
억겁 이전 인연으로 우리는 만났거니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단 한번뿐
짧은 생, 우리 업보를 누가 막으랴.
그래도 우리는 소매끝 인연보다
피엉겨 다붙은 찬구되어 만났으니
천년, 만년 뒤 저 세상에서
우리, 다시 한번 합하게 될지 그 뉘 알리?
망부의 한
- 박천 최정순 -
천지 피로 물들이며
포성 목터지게 울던 날
평북 박천 봉하리 막혀
말고개 숨 가쁘게 넘으며
가슴 터져라 통곡했지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고독한 발걸음 눈물 흘리고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데
떠나는 사람 붙잡지 못하여
기적 소리도 목이 쉬도록 울었지
휴전선 허리 동강나
아득한 망영자실
평생 속울음 안고 살았을 아버지의 한
철 없이 산 내 가슴 적신다.
망초꽃 하나
- 이건청 -
정신병원 담장 안의 망초들이
마른 꽃을 달고
어둠에 잠긴다.
선 채로 죽어버린 일년생 초목
망초잎에 붙은 곤충의 알들이
어둠에 덮여 있다.
발을 묶인 사람들이 잠든
정신병원 뒷뜰엔
깃을 웅크린 새들이 깨어
소리없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윗가지로 윗가지로 옮겨가면서
날이 밝길 기다린다.
망초가 망초끼리
숲을 이룬 담장 안에 와서 울던
풀무치들이 해체된
작은 흔적이 어둠에 섞인다.
모든 문들이 밖으로 잠긴
정신병원에
아름답게 잠든 사람들
아, 풀무치 한 마리 죽이지 않은
그들이 누워 어둠에 잠긴
겨울, 영하의 뜨락
마른 꽃을 단 망초.
망향(望鄕0
_ 인소리(印少里)
오십년 끊긴 안부가 바람으로 서 있다.
목이 멘 이산의 아픔 불러보는 사람아
송악산 솔밭 사이로 고향 하늘 보인다.
망향의 아픈구비 얼마를 울었을까
핏금친 산하에서 귀향을 꿈꾸나니
그 언제 사랑하는 사람과 고향 땅을 밟을까
반 백년 침묵 속에 한 맺힌 임진강아
신의 손도 비켜간 상흔을 찍어내어
피 묻은 모반의 땅에 둥근 해를 띄워라.
망향(望 鄕)
- 김남조 -
바라보지마라
눈 감아도 환한
옥양목빛 하늘
이름 부르지마라
안 불러도 대답하는
마음의
산울림인 사람
반 백년 살아
이적지 중심이 안 잡히는
어설픔이언만
봄눈 다녀간 후
모든 추위 덥히는 아지랑이만큼은
가슴으로 알겠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지척에 숨소리 들리고
얼어터진 속살에까지
봄햇살 기름 붓는
이 세상 아름다와라
따뜻하여라
사랑이여
우리 사이 보고짐도 과분하고
고향인들 웬만큼은 떨어져 그리는 일
이나마도 복된 줄을
잘 알겠네
망향
- 정공채 -
강원도에서 울던
새가
그 삼림 속으로 날아
가
버린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청공은
저편 동해 물소리에
귀가
멀었다.
대한민국의 한쪽,
아직도
청청하게 푸르러
빛나는 목화의
기를
흔든다.
원목을 두들기는
통소리,
강원도에서 날던
새가
울며 가버린
아득한
삼림에
희디흰 빛이 자꾸 일면서
가만한
옛 고향의 소리도 살아나온다.
명상
- 한용운 -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는 가이없이 출렁이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러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장하여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나라 사람은 옥새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나라 사람은 옷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 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에 메었더니
이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을
꾸미려고 돌아 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구름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맞추어 우쭐거립니다.
매장
- 김종희 -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꽁꽁 묶어서 땅 속에 깊이 묻었다.
발로 꾹꾹 밟아가며 단단히 묻었다.
삽으로 때려가며 봉분도 만들었다.
우리는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했다.
'부디 안녕히 계셔요'
나는 작별인사까지 했다.
아버지를 등지고 산을 내려올 때는
수많은 무덤들을 만났다.
허물어진 낡은 무덤, 새 무덤
큰 무덤, 작은 무덤, 초라한 무덤.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또 보면서
아버지의 무덤을 확인했다.
무섭다, 우리는 무슨 짓을 했는가
--아버지를 메어다 산에 묻어버린 자식들--
나는 몸을 떨며 차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와 계셨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아버지와 함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안고--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맨발
- 문태준 -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
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
고 슬픔을 견디었을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맷돌의 염원
- 강정화 -
쉼 없는 노역의 권태 속에
천년을 휘감고 돈다
보석같은 꿈들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체증처럼 갑갑한 가슴앓이는
연륜의 껍질을 벗기는 지문이다.
입다문 불상처럼 앉아서
혹은 기적의 비상을 꿈꾸면서
끌고온 긴 생애
세월에 갈리어 부서지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가
지워지지 않는 멍울로 남는다.
돌다가 닳아버릴 돌
끝없는 소멸의 아픔을 염주로 엮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도 삼키고
삶의 굴레를 도리어 거역하지 않는
끝내 뜨거운 맷돌이기를...
맹인 부부 가수
- 정호승 -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쎄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 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 사람이 되었네
메이비
- 장영수 -
(천막교실, 가마니 위에 비는
내리고)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 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주으려고
아이들은 밀려 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 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 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 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를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브르지 않을 메이비.
멧새소리
- 백석 -
처마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明太)는 꽁꽁 얼었다
명태(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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