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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에게 있어서 그 생존의 소멸, 그 멸망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그 위안, 순수고독과 순수허무로써 일신을 포기할 수 있는 그 해방과 희열, 그 힘을 길러주던 유일한 성체였다. 실로 나에게 있어서 시는 내 존재의 숙소, 그 등불, 그 휴식 또한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 그 손짓, 그 힘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살라온 경험의 흔적, 그 총체였다.> (조병화, <너와 나의 시간에>)
이 짧은 글에는 논증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그 생각 혹은 느낌이 무엇인가? <시는 적어도 나에게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나에게 해당되는 이 생각을 더 일반화시킬 수 있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진짜 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유종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는 그의 말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학개론 흐름의 책>을 의도하고 쓴 책이다. 그는 피터 버거의 <사회학에의 초대>(문예출판사, 1995)에서 느낀 매력, 즉 <확고한 대상 파악을 기반으로 해서 감칠 맛 나는 문체로 사회학의 기본 문제를 자유자재로 흥미 진진하게 설명하는 솜씨에 매료>되어, 문학을 그런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의 한 장이 <플라톤의 시인 추방>이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이나 화가를 추방하고자 한다. 왜 추방하고자 하는가? 잘 알려진 논거가 예술가들이 진리로부터 두 단계 떨어진 모방의 모방을 모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예술가에게 진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시는 우리에게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예술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그의 이데아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실재와 현상, 이데아와 경험적 현상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공박은 약화될 것이다.
예술가, 시인을 공박하는 플라톤의 다른 논거는 <시가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한 영혼의 부위이며, 우리 감각처럼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비극 시인들은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기 커녕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무대 주인공의 기쁨이나 슬픔에 몰입하는 사이 우리의 이성은 정지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감정이 이성보다 열등한가? 그것들은 어떤 위계질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기능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분명히 지나친 감정이 부작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지나친 이성의 작용도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유종호는 플라톤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그의 예술관이 소박한 사실주의나 모사주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에 대한 그의 비판이 <시 쪽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식론적 관점의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에게 제기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둘째, 오히려 플라톤이 진정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참다운 예술은 이데아를 직접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하늘도 동의할 수 있는 인간 전형을 만들어 낸다.> 플라톤의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플라톤이 했던 것은 당대의 잘못된 예술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셋째, 해블락크라는 고전학자의 재해석이다. 플라톤이 비판했던 것은 구두(口頭)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새롭게 문자적 기록이 가능한 시대에 플라톤은 <독창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새로운 이성의 시대>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시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지 구두로 전승해 되어온 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종호가 소개하는 둘째, 셋째 비판은 시나 예술이 갖는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플라톤을 해석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시나 예술이 충분히 이성적인 것과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앞 부분에 나온 비판을 본다면 플라톤의 생각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추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유명한 영웅들의 통곡과 애도이다. 만약 두 친구가 모두 고결한 인품이라면 자기 동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친구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 ... 그러므로 영웅들이 사자(死者)를 애통해 하는 묘사는 지워버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러한 통곡은 여자들이나 비천한 사내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다. 나라를 위해 우리가 훈련시키고 있는 수호자들이 이들을 흉내 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유명한 영웅들의 통곡과 애도가 바로 문학 작품, <오디세이>에 나온다. 플라톤은 이런 것들을 젊은이들이 읽으면 해롭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나중에, 스스로 성숙하게 된 나중에 읽어야 하는가? 그러나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영웅들조차 보여주는 통곡과 애도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듯이 비천한 사내들이나 여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싸움터에서 용기 있게 죽을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용기와 함께 나약함, 죽음과 함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성숙하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 시나 문학 작품은 중요한가? 바로 이런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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