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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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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육사의 <<로신추도문>>
2015년 09월 16일 19시 12분  조회:5770  추천:0  작성자: 죽림
 
...북경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이곳에 있는 감옥에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관광객도 많이 찾는 베이징의 명소 왕푸징(王府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 밖이나 안이나 아무런 표지도 없어 이 건물의 정체를 일반인이 알 길은 없어 보였다.

1925년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에 가입해 일생을 오롯이 조국독립에 바친 육사는 1943년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광복을 앞둔 1944년 40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옥사했다.  

북경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지금 일부 공간이 개조돼 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건물의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폐쇄된 상태였다.  

중국에서 해당관리 및 보존조치가 없다면 조만간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될 우려가 크다.

건물 앞에서 마주친 한 중국인 남성은 "이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다. 한국의 리루스(李陸史)가 여기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히 마주친 중국인의 입에서 이육사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의외였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의 시 '광야' 중에서)라고 노래했던 저항시인 이육사의 자취는 이처럼 미약하게 남아있다...
...보존, 관리 되기만을...
그리고 력사를 잊지말기...




李 陸 史 
출전 :《朝鮮日報》(l936·10·23∼29) 

노신 약전-부저작 목록-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연에 귀국하야 절강성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회문학운동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문학에 대하야 자연주의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교육부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연 도하문 대학교수로서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가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제거하였다. 형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눌함( 喊)}{방황(彷徨)}{화개집(華蓋集)}{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약(藥)}{공자기(孔子己)} 등이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엿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팔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과 인제는 고인이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여사를 중심으로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열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뒤 3일이 지난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 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읽고 났을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견디겠다』고 한『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 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난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정신의 삼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나치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동성파와 사기당과 원수단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박사는 『문학개량 추의}라는『문학혁명론』을 1917年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도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운동을 방해코저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 호에 노신의『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화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은 그 후 얼마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열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열마나한 해독을 끼처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송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중에 한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둬적거려 보았다. 역사란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씨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자가 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소설의 일편은『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맞는다. 실로 이 한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따라 문학화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이(孔乙已)』『藥』『明日』『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문학부간에 그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현화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가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디테일스』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파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孔乙己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이금십구적 주책가 어느때까지 쓰여져있는데로 언제인지 행방이 부명된 체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농민인 阿 Q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얼어난 폭도의 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가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가 공을 이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레얄 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 였으니 당시 『阿Q正傳』이 發表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 時代』이 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지식군들은 『阿Q相』이라거나 『阿Q時代』라는 말을 평상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야 일실하여있는 노신정신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않은 흥미를 갖게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나 하나 문제가 엇지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문제는 그의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後年『눌함』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로으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을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 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 이였겠지만은 이꿈도 결국은 깨여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해도 또 아무리강상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中略---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눌함자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하남』 등에 쓰든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납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의 복수시인 『아담·미케뷧치』『항가리』의 애국시인『베트피 ·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리샬』등의 작품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서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녀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닭게 한 것은 물론 이래기천년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서 영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항 무한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부촌이 때마침 프로 문학론이 드셀때인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보았다. 그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딱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的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이서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민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반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해서 그의『四五』전후의 작품을 프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해서 작가 노신의 명의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서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수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난하다. 現在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해도 용이치않다. 어떤 사람이 즉 이런 문제를 제출한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그래도 좋다. 왜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프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기피 현실의 핏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中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전 모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삼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는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담 만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료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준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生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느면 안될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려나가기 더 바밨다.}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의 수령 단사서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오십여명 체포령을 내렷다. 우리 노신은 이 오십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等이 고문으로 광동에오고 『전국민적공사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 일계단인 광동시기에는 프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지 였다』 

그래서 급진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수백여명의 사상자가 낳다. 그때 노신은 북경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병원이나 공장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이래 최암흑일에 지』하였다는 명문은 단사서로 하여금 기자에 내려안게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속화개집)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양리 ·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오십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폐타는 광동일성만 노동자 농민급진지식분자 삼천여명을----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여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악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권로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더 생기있는 것이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더 아낌이 없시------(而己集) 

이 글은 그가 심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보인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가 상해에 왔을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불만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난한 수형에 의하여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점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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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迅

1. 생애

 

1-1. 출생일본 유학귀국 이후의 활동

노신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노신은 그의 필명이며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다그는 지방에서 위세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노신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어려서부터 전통 교육을 받고 한 때 과거에도 응시했지만가정 형편을 고려해 학비가 무료인 남경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했으며곧 광무철로학당(철도학교)로 옮겨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한다기본적인 어학공부를 마친 1904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강의도중에 중국인 처형장면을 보여주는 영화가 상영되자이에 분노해 의학공부를 파기하고 자퇴한다.

공부를 중단한 뒤에도 노신은 한동안 동경에 머물면서 현지의 중국인 유학생등과 교류했다.특히 문학을 통한 민족 계몽을 목표로 삼아 외국 작품을 널리 접하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그가 최초로 유학생 잡지에 투고한 글은 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번역소설 스파르타의 혼이었으며후에 동생 주작인과 함께 번역 단편집 역외소설집’(1909)을 간행하기도 했다그러나 가정 형편이 악화되어 장남인 노신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돌보아야하는 처지가 된다.

1909년 귀국한 노신은 항주에서 교사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직하고, 1919년 우창봉기로 인해 소흥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노신은 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지만역시 몇 개월 견디지 못하고 고위층과의 갈등으로 사직한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남경 임시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된 채원배가 노신을 찾아그 때부터 그는 교육부에서 일하게 되었고다음해 임시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다.

 

1-2 본격적인 문학 활동

노신은 그 당시 허무와 자조 상태에 빠져교육부의 업무 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고전 연구에만 전념했는데 이는 유학 시절에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귀국 이후에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허물어졌기 때문이다이런 노신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문필활동을 하게 한 계기가 있었는데이에 관해 그는 첫 번째 작품집 외침’(1923)의 서문에서 밝힌다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서 잡지에 수록할 원고를 청탁하자 노신은 반론을 제기한다.

“ 가령 창문이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는데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어 있다면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게 아닌가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반문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노신은 글을 한 편 기고하게 되는데그것이 1918년 515일자 신청년에 실린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이다노신이라는 필명도 이때에 처음 사용한다.

문화 혁명이후에 신문화운동이 한창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노신의 작품은 곧 주목을 받게 된다노신의 동생 주작인도 뛰어난 글 솜씨로 명성을 얻지만, 1919년 노신과 주작인 사이에 큰 불화가 생겨 남은 평생 동안 서로 인연을 끊고 지내는 일이 발생했다. 1921년 12월 4일자신청년에는 노신의 소설 Q정전의 첫 회가 간행되었다이 소설의 주인공 아Q의 딱하고 어리석고 불운한 인생은 당신 노신이 절감한 중국과 중국의 현실을 집약한 것으로 평가되며,연재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그 외에도 노신은 소설집 방황’(1926),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1927), 산문시집 들풀’(1929), 문학론 중국소설사략’(1924)를 간행했으며, 70개가 넘는 수많은 필명으로 여러 잡지에 잡문’ 또는 잡감문을 기고했다.

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지만정작 그가 남긴 문학 작품은 중편 1단편 32편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며 수준도 들쑥날쑥하다.

 

1-3. 말년의 본격적인 투쟁

1920년부터 노신은 베이징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그중 한 곳인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에서의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현실의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1924년 반동 성향의 학교 이사진이 개혁 성향의 학생 상당수를 퇴학시키자이에 반발하는 학내 투쟁이 지속되어,결국 교육부에서 폐교 조치를 단행한다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학생도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 사건에서 공개적으로 학생들을 지지했던 노신은 결국 13년간 몸 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된다.

그 즈음 노신과 인연을 끊은 동생 주작인과 동료 문인 임어당이 각각 물에 빠진 개는 때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패배한 자를 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페어플레이 정신이 필요하다.”라는 요지로 논쟁의 자제를 요청하는 글을 발표했다이에 노신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건 안 빠졌건 간에 무조건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페어플레이라는 말조차도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하게 사용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7년 노신은 국민당 정권의 4/12대학살에 분노하고그해 가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창작보다는 강연과 논쟁에 몰두한다신문학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노신을 향한 신세대 작가들의 비판이 거세었으며논쟁을 위해 뒤늦게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2년 송경령과 채원배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의 발기인이 되었으며같은 해에 동지인 양전이 국민당의 테러로 사망하자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다녀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나라 시인 이육사가 노신을 직접 만나고 감동했다는 일화가 있다. 1936년 노신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그해 10월 19일 새벽에 상해의 자택에서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사망 한 달 전에 발표한 죽음이라는 글에서 노신은 평소의 직선적인 성품에 걸맞는 유언을 남긴다. “장례 때 조의금을 받지 마라.”, “가급적 빨리 매장하라.”, “기념행사 치르지 마라.”, “나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당신들이나 열심히 살아가라.”, 등등의 내용이었다아울러 그는 임종에 직면해서 오랜 원수조차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서양의 관습을 언급한 다음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결코 원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들도 얼마든지 증오하게 내버려 두어라나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2. 노신의 사상

 

2-1. 노신과 계몽

노신은 5.4 계몽운동을 깊이 공감하고 진심으로 계몽을 후원했으며더 나아가 계몽의 본질을 깊이 통찰하고거기에서 인생과 세계의 어두운 심연을 발견한다따라서 노신은 계몽을 제창하고 계몽을 초월한다그는 제자들에게 계몽의 길로 가라고 권유를 했지만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뇌했다왜냐하면 계몽의 길은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며혁명전쟁에 참여하면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름 없는 산골에서들판에서 죽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몽의 길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은 이름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그래도 권해야 하는가노신은 계몽의 어둡고 깊은 심연 앞에서 계몽을 초월한다그의 소설 Q정전에서 그는 중국의 국민성에 깃든 노예근성을 통렬하게 비난한다.Q라는 근본 없는 야비한 인간의 정신 승리법’, 그것이 중국인의 노예 근성이라는 것이다.Q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는 계몽의 길을 그는 제시한 것이다그러나 5.4운동 무렵 북경 여자사범학교 선생을 하면서 학생들의 데모와 경찰의 총격으로 유화진이 사망하고사범학교 교장과 다투고교육부 장관과 싸우고진원 등과의 설전을 벌이면서 그는 점점 계몽의 심연을 보게 된다그는 들풀이라는 시집에서 계몽의 본성과 계몽의 초월을 말한다.

 

2-2. 고독과 비애흡인력초인 사상

중국의 평균적인 국민성을 아Q로 설정해 통렬하게 비난한 노신은 아Q와 반대되는 초인을 설정한다계몽은 특별한 길이고험난한 가시밭길이며자신을 계몽하고 나서 세상을 바꾸려 나서는 길이다자신을 바꾸는 것도 힘들지만세상을 바꾸는 것은 더 힘들다이런 힘든 계몽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바로 초인인 것이다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그래도 의무이고 당위이기에 계몽의 길로 가는 것이다노신의 문학 활동이 바로 그런 초인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일생 동안 통속을 멸시하고 전통을 공격하며용맹하게 세상에 뛰어들어 국민성의 마비를 끊임없이 폭로하고 통렬하게 비판했고그에 대한 댓가는 계속되는 싸움비난멸시그리고 탄압이었다.

그가 초인을 외치는 것은 바로 이점자신의 계몽된 이성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되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이 세상의 냉혹한 반격차가운 세상인생에 대한 당혹스러움에 대한 통찰이 있는 지점이다이 지점에서 성립되는 그의 감수성은 고동과 비애의 감정이며생활의 근거이며 그의 작품 활동의 힘이 된다초인의 정서는 우울한 허무주의 사상인 것이다그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신랄한 비판과 도독의 비애가 내비치는 현대적 인생의 의미인 것이다.

 

2-3. 실존의 느낌형이상학적 감수성

계몽의 길은 개인의 실존과 직면하는 길이다죽음으로 이르는 가시밭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실존의 느낌을 노신은 그림자의 작별 인사에서 말한다.

어떤 그림자가 주인에게 너는 계몽을 따르는 고상한 인간이다그러나 나는 평범한 그림자일 뿐이다너를 따라다니다 이제 지쳤다네가 천국에 간다 해도네가 지옥에 간다 해도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나는 빛과 어둠의 중간에서 서성대다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조용히 잠겨 가고 싶다.’고 말한다그림자는 계몽과 혁명의 길로 나서는 지식인들의 자의식을 나타낸 것이다그림자가 보았을 때너는 평범한 인간이다그런데 왜 편한 길을 버려두고 계몽의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을 그림자는 묻고 있다그림자는 그의 실존의 바닥일 것이다이런 일상의 평범함을 떨치고 계몽의 길로 나설 때 사람들은 차가운 현실당혹스런 세계와 부딪치게 된다이러한 비참한 생에 대한 황당함당혹감음랭함죽음과 삶에 대한 강렬한 감수성은 노신으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의 감정을 넘어서 형이상학적 감수성인 비애와 고독으로 빠지게 했을 뿐 아니라일생 동안 지속된 노신의 고독과 비애에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의미를 띄게 했다노신은 불교 이론을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으며니체로부터 안드레예프에 이르는 현대 서구 문예 속에서 현대 의식을 느꼈으며일본 문학이 표방하는 인생의 비애감에도 영향을 받아노신의 고독과 비애가 일종의 철학적인 풍취를 갖게 된 것일 것이다.

그는 낡은 문화낡은 세력과의 싸움에서 느끼고 짊어지고 인식한 어두운 현실무거운 고난,고통스런 전투아득한 전망머나먼 길깨어나지 않는 인민 대중악의 세력의 거짓과 잔인성아는 사람들의 은밀한 공격 등등 이 모든 것이 그를 고독과 비애로 이끌었으나그는 기래도 경박한 인도주의’, ‘집단주의나 과학주의’, ‘이성주의에 빠져들지 않고개체의 현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했다.

2-4. 귀신과 용사죽음과 용기의 변증법

계몽의 제창과 초월 속에서 그가 당면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를 어둡운 곳으로 끌고 갔으며그는 늘 죽음을 생각했다이에 그는 결국 귀신과 죽음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다그는 중국에서 대표적인 귀신인 무상(無常)과 여적女吊)을 찬양한다저승사자에 해당하는 무상과 처녀 귀신인 여적 모두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삶의 용기의 변중은 그의 문학의 기본적 분위기이다그는 계몽의 제창에서 세상의 차가움 속에 절대 고독과 비애를 맛보고초인사상으로 나아간다그는 고독과 비애 속에서 형이상학적 감수성으로 이 세상을 통찰한다그는 계몽의 끝에 있는 죽음을 보고귀신을 본다그는 그런 죽음과 귀신까지도 사랑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계몽을 향한 강한 의지를 가졌다.

 

 

[출처] 노신|작성자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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