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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원시와 현실도피 그리고 현실순응
조선족 이주민의 다수가 농민이였으면서도 불구하고 이 시기 시작품에는 농민이 화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다. 이는 아마도 시인들 다수가 도시에 사는 직장인들이였고 또 중국땅에 이주해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때문에 사실상 농촌이나 전원의 체험이 절실하지 않았던것과 관련이 있을것으로 보인다. 이들 시속에 등장하는 농촌이나 전원의 풍경이 대개 조선땅의 고향이 되고있는 점은 이런 사실을 반증한다고 할수 있다. 앞의 항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는 천청송의 《드메》나 《書堂》 등이 이런 류형에 속하는 전형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그렇기는 해도 가끔 화자가 농민으로 되여있는 이주민 작품들이 가끔 눈에 뜨인다. 신상보(申尙寶)의 《흑과 갓치 살갯소》가 그런 작품에 속한다.
화자는 흙은 나의 모든것, 내 뼈요, 재산이요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래서 흙과 더불어 살고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이땅 이민지에 흙을 찾아왔다고 한다.
내 발에 미트리를 신고
내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한 박아지에 목슴만 가지고
흘글 차저 여기 왓소
흘글 파러 여기 왓소
언제나 난 해와 함
일하기 즐거울
파기 즐거울
千萬年이 흘너도 흘너도
흑과 갓치 살갯소
흑과 갓치 죽갯소
《흑과 갓치 살갯소》의 후반 2련이다. 여기서 《한 박아지에 목숨만 가지고/흘글 차저 여기 왓소》라는 이미지는 앞의 항에서 언급한바 있는 윤해영의 《아리랑고개》에 나오는 《二十年前!/아버지 등뒤에 봇다리뒤에/박아지 두 은 방울이 커서》 류의 이미지와 동일하다. 이주농민의 이주의 모습인것이다. 이어서 화자는 그냥 일하기가 즐거워서, 땅 파기가 즐거워서 흙과 같이 살고 흙과 같이 죽겠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 개발과 더불어 형성된 도시문명의 발전과 그러한 도시문명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으려는, 혹은 도시문명에서 소외된 농민의 의식이 반영되여있을수도 있고 지식인으로서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의미도 없지 않은것 같다. 즉 이 시에서 시인은 도시문명의 반대편에 서있는 농민의 근원적인 이미지로서의 땅에의 귀속감을 드러내고있다는 말이 된다.
리학성(李鶴城)의 《五月》에서 그려진 전원풍경이나 전원 지향의 의지도 같은 차원에서 리해할수 있지 않을가 한다. 물론 이 작품의 기본적인 정서는 자연의 생명력과 그러한 생명력에 감동한 화자의 감흥이 된다. 자연에 대한 찬송가라 할 정도로 화자의 정서는 흥분되여있다.
五月은
초록물결이 넘치는 한낮 牧場을 꾸몃다.
들薔薇도 香氣 품은 넓은 둔덕위
염소등에 휘파람이 구운다.
연분홍빛 구름도 뭉기뭉기 피는데
종다리 그린 譜表를 처다보며
풀잎피리라도 불리라.
이 法悅-
이 멜로듸-
우리는 豊饒한 自然을 呼吸하는 太陽의 아들,
五月의 푸른 한울을 風俗하고.
五月의 푸른 大地를 習性한다.
《五月》의 전문이다. 5월 봄빛속에 생기활발한 자연의 모습을 초록의 물결속에 생동하는 하늘과 들과 들속의 생명들을 통해 표현하고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이한게 아니냐는 혐의가 있지만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강한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큰 흠은 되지 않는다 하겠다.
《五月》이라는 같은 표제의 송철리의 시작품은 그 시풍이 리학성의 그것과는 전혀 판이하다. 송철리는 소설문단의 안수길에 비견될 정도로 철저히 이주민문단에서 등단하여 성장한 향토시인이다. 그만치 그의 시에서 이민지 향토에 대한 애착은 특별한것이다. 시골 5월의 정취를 이 시만큼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미지로써 펼쳐놓은 작품도 별로 많지 않은것 같다.
새하-얀 비둘기 두어마리
은빛 금을 그으며 미끄러지는 하늘아래
마슬은 호졸곤-이 파-란 아즘에 쩌저 누었는데,
초록물결 부서지는 포푸라 가지에서는
채르렁 채르렁 가벼운 금방울 소리,
맑은 숨소리,
바람은 물고기 보다도 젊어
나물보구니 노래 부르는 두던위에
눈빛 고름끈을 춤추이고,
문둘레꽃 밟으며 흘러가는 염소귀에다
가마-ㄴ 가만 옥색 휘파람을 호이 호이
이 모다 五月의 아름다움이어니,
그곳 五月의 꼬임이어니,
나는 가고십노라 어데던지
풀잎 피리라도 하나 사-ㄹ작 따물고
호돌대는 어린 사슴처럼.1)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맑고 부드럽고 상큼한 이미지들만을 골라서 시골의 모습을 그린 이 시에서는 시인의 향토에 대한 애정이 절실하게 묻어나고있다. 송철리의 다른 작품인 《落鄕》2)에서 풍기는 분위기 혹은 정서 또한 《五月》에서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五月》에서는 화자의 립장이 객관적인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화자 자신이 직접 그러한 환경 혹은 분위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있다는 점이 조금 다를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도 뚜렷한것은 아니다.
이상 살펴본 작품외에도 자연이나 향토, 전원에 대한 관심을 시화한 작품들은 많이 있다. 여기서 제시한 작품들이 좀더 전형적이고 순수하다고 할수 있을뿐이다. 그렇다면 일제식민지하 이민지의 현실에서 전원이나 향토에의 집착이 혹 현실도피의 성향을 보여준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미 살펴본 작품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의식적인 도피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김조규(金朝奎)의 《室內》3)와 같은 작품에서 그러한 도피의 혐의가 더 두드러져보인다.
파아란 煙環속엔 天使가 산다
天使는 憂愁를 宿命 진엿다
오늘밤도 말업시
나의 室內로 天使를 조용이 불너들이다
天井으로 올으는 煙氣는 외로운 憂愁의 舞라한다
회오리 落葉도 안인 휘파람도 안인
天井과 벗하는 쓸쓸한 思想이라 한다
가슴을 콕 쑤신다 오란다 卓上時計
손을 드니 오오 열손가락이 透明코나
고양이도 안산다 花盆도 업다
울지도 안흘련다 외롭지도 안흘련다
室-內
우리 슬픈 天使는 숨소리 하나 업는 房속만이 좃탄다
이 작품에서 외로움 혹은 상실감이나 슬픔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마저도 폐쇄된 공간속에 갇혀버린다. 이 정도가 되면 일종의 도피라 볼수도 있겠는데, 《고양이도 안산다 花盆도 업다/울지도 안흘련다 외롭지도 안흘련다》라는 표현에서 그것은 반전된다. 즉 숙명이나 체념은 일종의 아이러니적인 표현이 되는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도피하려는 주체는 화자가 아닌, 《天使》이기때문이다. 결국 화자와 천사의 두 얼굴의 주체가 시속에서 충돌하고있는셈이다. 즉 암울하고 무정한 현실에서 폐쇄된 공간으로 도피하려는 의식과 그러한 타락에 반항하려는 의식의 충돌이 이 시의 기본적인 정서가 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모순된 사상 혹은 의식을 드러낸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순이나 의식의 충돌은 김조규 한 시인에 한한것만은 아니였던것 같다. 이른바 친일시라고 불리는 현실순응의 작품들의 출현은 그러한 의식출돌의 결과로 비롯된 한 양상이라 하겠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할수 없던 시인들에게 있어 현실에 순응하고 괴뢰만주국이라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을 인정하며 심지어 그들 통치에의 동조를 강요받던 시대적 환경에서 시인들이 선택할 길은 그리 많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나 《친일시》라는 개념은 이민시의 경우에 적절한 표현은 아닌것 같다. 비록 만주국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이고 그 정책이나 정치적인 담론 모두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것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국체이고 또 받아들이는 이주민들의 립장에서 보면 일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있던 조선의 경우와 꼭 같지만은 않았던것이다. 남의 나라 땅에 정착해사는 이민의 립장이기때문에 원주민인 현지 중국인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며 하였던것이다. 따라서 만주국이라는 정치체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제의 꼭두각시로서 저항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받아들여져 그러한 국체의 강역내에서 생존해야 하는 이중적인 립장이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친일시라는 개념보다는 현실순응의 시라는 개념이 좀더 적절하지 않을가 한다.
이 류형에 속하는 작품들로 흔히 지적되는 작품들은 별로 많지 않다. 흔히 전형적인 친일시라고 지적되는 윤해영(尹海榮)의 《樂土滿洲》4)와 작자미상의 민요인 《滿洲아리랑》, 그리고 최수복의 《滿洲메나리》를 보자.
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백성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사르리.
《樂土滿洲》의 제1련이다. 滿洲건국10주년기념문집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에 처음 발표된 이 시에서 화자는 백만의 재만조선인을 《福을 받은 백성》, 《흙을 맡은 일군》, 《터를 닦는 선구자》라고 자랑스럽게 읊고있다. 특히 《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나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사르리》라는 표현은 괴뢰만주국을 미화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것이다. 만주국 건국리념이 오족협화와 락토만주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제를 직접 미화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를 미화한것이나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미화한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만주국이 백만 척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뜻도 되겠지만 만주국 강역이라는 이 땅이 희망을 주었다는, 이주민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이 보다 중요한 시적인 정서로 드러나기때문이다.
작자미상의 민요 《滿洲아리랑》이나 최수복의 《滿洲메나리》도 비슷한 상황이다. 《滿洲아리랑》의 경우 《젖꿀이 흐른 기름진 땅에/五族의 새 살림 평화롭네》는 만주국을 미화한듯하고 《비였던 곡간에 五穀이 차고/잎담배 주머니에 쇠소리 나네》라는 표현은 아마도 만주국의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주민의 풍족한 모습을 보여준것이여서 현실을 왜곡하고 분식한것이라 할수 있다. 최수복의 《滿洲메나리》의 경우에도 《비개인 하늘에 오색이 영농/거츠른 이 강산에 새봄이 왔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봄마지 나서는 滿洲라네》 등의 표현들이 만주국 치하 이주민의 삶을 분식 미화한것이 분명해보인다.
이런 류형의 시들은 그외에도 더 있다. 기본적으로 만주국의 국체를 옹호하거나 만주국의 현실을 분식, 미화한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 이를테면 현실순응 혹은 비민족적인 시작품들이 출현할수 있었던것일가?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할것이라 여겨진다.
첫째는 장기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다. 우리의 시들이 제작되였던 194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거슬러올라가면 1910년 한일합방까지 계산해도 벌써 30년의 세월, 일제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19세기말까지 계산하면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이 우리 민족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수 있다. 그때까지도 항일투쟁이 계속되였으므로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의 상당수가 2세대에 걸치는 일제 식민주의담론의 영향을 입으면서 점차 일제의 공모자가 되여갔던것이다. 즉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이 몸에 배이게 되였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정체성의 변화이다. 우리 이주민들은 만주국 강역내에 생존하면서 점차 조선본토의 조선인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였던것이다. 조선본토의 조선인과 스스로를 구분하고자 하는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이들 시인들로 하여금 만주국의 현실을 분식하고 미화하는 우를 범하게 하였던것은 아닐가 한다.
4. 주제의식과 형식적 특징
이민지의 서정과 고국에 대한 향수, 암울한 현실에의 대응, 그리고 그러한 대응의 또다른 방식이라 할수 있는 초현실주의의 실험, 현실도피와 현실순응의 문제 등의 측면에서 《만선일보》시기 즉 해방전 우리 시의 전성기 시문학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우리 시인들은 이주민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주목했던것으로 보여진다. 이민지의 현실과 이주 및 정착과정의 고난, 정착하고난후의 고향상실감과 짙은 향수 등이 시작품에 자주 등장하는것은 바로 이주민으로서, 이민시인으로서 정체성 확인의 한 징표로 리해된다. 단군의 후예로서의 민족적 정체성과 만주국 국민이라는 국민적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이주민들은 항상 그러한 이중적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시달려야 했던것이다.
한편 해방전 우리 시는 일제말의 암흑기라고 하는 암담한 사회적 현실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뢰만주국의 정치적인 지향성때문에 그러한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할수 있는것도 아니였다. 그래서 우리 시인들은 현실의 모순에 직설적으로 저항할수 없는 상황에서 어두움, 차가움, 서러움, 괴로움 등의 이미지와 여러가지 상징적인 기법들을 동원하여 현실에 대한 부정을 나타냈고 그런 방식으로 소극적으로나마 현실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것도 어렵게 되자 초현실주의라는 서방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여 파괴적인 이미지들을 난해한 결합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현하고자 했다. 조선문단에서는 20년대말에 등장하여 30년초반에 큰 성과없이 흐지부지해진 초현실주의의 실험이 40년대초반의 중국의 조선족문단에서 부활하고 한때 강한 세를 이룰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현실적 상황과 그에 대한 지성인들의 시적인 대응의 결과였다고 할수 있다.
물론 현실에 대한 저항적대응을 삼가고 사회정치적인 문제와는 무관한 전원에의 지향성을 보여준 작품들도 일부 존재한다. 이들 작품은 상당정도 현실도피의 성격을 띠며 정신적인 타락의 정서마저 로출시키고있다. 이에서 더 진일보하여 심지어 현실을 미화하고 괴뢰만주국의 리념에 동조하는 작품마저 가끔 눈에 뜨인다. 그렇다고 이런 작품들을 친일작품이라고 보는것은 적절하지 않은것 같다. 만주국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인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이주민시인들이 만주국의 리념에 순응 혹은 동조한것은 일제에 대한 용납과는 차이가 나기때문이다. 물론 이런 현실미화나 만주국리념에의 동조가 야기된것은 장기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 이주민시인들이 일부 현실미화나 만주국리념에 동조하는 작품들을 제작한데는 정체성의 변화와도 깊은 련관성을 가진다. 이주민들의 이중적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부분에서 루루히 지적한바 있거니와 좋든 궂든 이제 우리 이주민은 만주국의 국민이 되였으며 따라서 이민지에서 끝까지 생존해가기 위해서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고초가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력사적인 불가피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항일유격군들이 눈보라치는 장백의 밀림속에서 피를 흘리며 일제 및 괴뢰군들과 저항하고있던 현실에서 이러한 순응이나 동조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장르적측면에서 이 시기 시문학유산들을 살펴보면 신시운동이래 점차 형성된 자유시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러나 전통지향적성향이나 실험적성향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다. 이국타향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주민들의 생존환경을 감안하면 전통지향적성향이 끈질기게 이어져온 원인을 짐작할수가 있고 본토에서 여러 민족매체가 강제폐간되던 시기에 건너간 문인들의 경우 탈이념화의 순수서정을 표방한채 형태마저 비교적 짙은 실험성을 드러내였던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지향적성향을 드러내는 부류의 작품들은 시조와 민요를 들수 있다. 이런 부류의 작품들로부터 조선족 이민시인들이 보여준 전통시가 수용의 시각이 명백히 드러난다. 즉 조선본토에서는 전통지향적성향과 실험적성향이 대립되고, 김동환의 경우 민요시형을 7·5조나 4·4조 같은 평이한것을 답습하는것이 좋다5)고 하여 전통에 대한 복귀의 의지를 강하게 지니고있었던데 비해 비록 그보다는 썩 나중의 일이긴 하나 조선족 이민시인들은 민요조의 시가 아니라 아예 민요자체의 창작을 특별히 중요시했던것 같다. 신춘문예모집요강에 민요가 한 장르로 나와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뒤받침해준다.
실험적성향을 보여준 작품들은 여러 형태가 발견되지만 가장 전형적인것은 기법상의 실험이다. 《시현실》동인들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 기법에 대한 실험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수 있다.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나 장르적측면 혹은 형식적측면에서나 우리 시인들이 지향했던것은 민족성의 보존이였다고 할수 있다. 여기에는 남의 나라 땅에 정착해산다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자각이 한몫을 한것이지만 렬악한 문화환경에서지만 오히려 조선 본토의 시인들보다도 민족성 보존을 위해 더 많은 고민을 했던 조선족시인들의 노력은 반드시 인정해야 할것이다.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연장되여 우리 조선족문학의 민족적개성이 존재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자긍심마저 든다.
덧붙이는 글: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을 6회에 걸쳐 연재하였습니다. 긴 논문을 읽어주신 분들께 경의를 드립니다. 그리고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좋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다음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족 비평문학 개관>이라는 논문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역시 긴 논문이어서 5-6회 정도에 걸쳐 연재할 생각이오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기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지적도 미리 부탁합니다.
장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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