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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문학의 개념에 대하여
/장춘식
1. 문제의 제기
조선족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개념과 범위는 어떻게 확정할것인가?
얼핏 생각하면 너무도 상식적인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조선족이 만들어낸 문학적 생산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족문학의 개념과 범위를 확정하고자 하면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중국조선족문학, 조선족문학, 조선민족문학, 간도문학, 만주문학, 재만문학, 이민문학, 망명문학, 대륙문학, 동포문학 등이 있는가 하면 지역 명칭에 “조선인”, “한인”, “동포”, “교포” 등의 개념이 첨부되여 또 수많은 개념을 파생시키고있다. 앞의 세 개념은 주로 중국에서, 특히 조선족학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고 그 외의 것은 주로 해외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인데, 여기서는 국내 조선족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 즉 “중국조선족문학”, “조선족문학”, “조선민족문학” 등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2. 조선족문학과 관련된 개념들
윤윤진은 조성일․권철 주편으로 된 ꡔ중국조선족문학사ꡕ 등에서 사용된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 리유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는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건국 전후의 중국내 조선인문학은 《작품의 제재, 주제 나아가서는 거기에 반영된 의식 등 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는 점을 들고있다. 그러면서 《광복전 문학을 조선족문학이라고 호칭하기보다 조선인문학이라고 하는것이 더 적절할뿐만아니라 사실에 접근된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조선족이란 호칭이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인을 호칭하는 대명사로서 그 전시기와는 좀 다른 성격을 갖고있다는 여건을 파악할 경우 사정은 더 자명해지는것이다.》1) 고 지적한다. 이런 견해는 윤윤진 한사람의 견해만은 아닌것 같다. 안수길이나 현경준, 김조규 등 건국전 이주민 문단에서 상당히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으며 한국이나 조선에 ぐ?작가들의 문학적 업적을 조선족문학사에서 다루기를 꺼려하는 학계의 상황을 감안하면 윤윤진의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대표성을 띤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앞에서 든 건국이전의 우리 문학을 조선족문학의 개념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윤윤진의 견해에서 요점은 두가지다. 즉 “조선족”이라는 개념의 내외연과 건국전후 우리 문학의 차이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분명한 시기는 나와있지 않으나 “조선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정식 붙여진것은 건국직후인것으로 알려져있다. 지금은 공식적인 혹은 법적인 명칭으로 굳어졌고 조선이나 한국에서도 이 명칭은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는 기호로 통용되고있기도 하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있기전까지는 “조선인”, “선계만주인”, “만주조선인” 등으로 불려져왔다. 그때문에 현재도 한국에서는 이런 명칭들이 자주 쓰이고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조선족에 대해 “조선족”이라는 명칭 외에도 “재중동포”, “중국동포”, “중국교포” 2)등의 명칭을 사용하고있다. 이는 한국인의 립장에서 우리 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경우 윤윤진이 건국이전의 우리 문학의 개념을 “조선족문학”이 아닌, “조선인문학”으로 정립하여야 한다는 견해는 중국적립장에서 력사를 파악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같은 차원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법적인 개념이 아닌,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확인할수가 있다. 그렇다면 윤윤진의 지적과는 달리 “조선인문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족문학”이라 개념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건국전이나 건국후를 아울러서 사용했을 경우 하나의 관통된 전통을 가진 민족공동체로 인식할수 있다는 리점이 있다. 특히 민족정체성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민족공동체적 인식은 우리의 전통성 확인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큰 력사적흐름에서 보았을 때 건국전이나 건국후를 구분하는것은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요인이 작용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전과 건국후의 문학이 그 특징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것은 사실이다. 이점은 전반 중국문학의 경우와 별 다르지 않으며 우리의 경우 1949년이 계기가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1945년 8.15해방이 뚜렷한 분기점이 된다고 보는것이 나을것이다. 그렇다면 1949년을 분기점으로 한 중국문학은 건국전과 건국후의 문학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하여 건국전의것은 중국문학이 아니고 건국후의 문학만이 중국문학이라 할수 있을까? 그럴수는 없을것이다. 건국전후 문학의 차이는 이데올로기의 변화에서 기인된 문학의 변모를 말해줄뿐이다. 조선족문학 역시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또 창작주체의 물갈이를 리유로 건국전후 문학의 차이를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1945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우리 문단의 창작주체는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뀌였다. 김창걸과 리욱 외에 소수 무명작가만이 례외가 될뿐 건국전 조선족문단에서 활약하던 창작주체는 거의 전부가 반도의 남과 북 내지는 다른 나라로 이주해갔다. 그 빈 자리를 차지한 창작주체는 주로 공산당 계렬의 지식인들과 건국후 문단에 진출한 신인들로 채워졌다. 이점은 전반 중국문단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문학의 전통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수가 있을까?
우리는 건국후 우리 작가들의 구성으로부터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을것 같다.
건국후 우리문단의 창작주체인 작가들은 크게 두가지 류형으로 분류할수 있다. 첫째는 공산당 부대나 항일군에서 문예활동을 하던 문예전사들이고 둘째는 이주민의 후예들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건국전 우리 문학의 영향으로 문학적 수양을 닦았으리라는 사실은 별로 이의가 없을줄 안다. 당시에는 조선문학의 영향도 상당 정도 있었을것으로 보이므로 이들이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문학적전통은 조선문학과 우리 이주민의 문학이였음은 당연한 사실이라 하겠다.
문제는 건국초기 작가 대부분이 이러한 이주민의 후예가 아니였다는데 있을것인데, 가령 의용군 문예전사라 할수 있는 김학철의 경우 그의 문학적 수양은 주로 조선에서 형성되였고 의용군에서 활동하면서 점차 성숙되였다고 할수 있다.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대체로 상황은 비슷하다. 그렇다고 이들을 조선족문학에 편입시키지 않을수는 없을것이다.
한 지역문학, 혹은 민족문학의 성격을 이루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다. 창작주체, 소재원, 창작객체(즉 독자그룹) 등이 그 중심이 된다 하겠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것은 창작주체와 창작객체 두 요인이 될것이다. 앞에서 창작주체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해명이 되였으리라 믿고 다시 창작의 객체 즉 독자그룹의 경우, 이 또한 수용미학적 견지에서 보면 중요한 요인이 아닐수 없다. 독자의 수용자세와 반응이 창작주체의 창작적 개성과 경향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결정적영향을 미친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여지도 없이 우리 문학의 독자들은 그 다수가 건국전이나 건국후를 막론하고 이주민의 후예로 이루어진것 같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 “조선인”이라는 개념과 “조선족”이라는 개념의 련관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령 “조선”이라는 국명, “한국”이라는 국명과 우리 민족 명칭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두 국명은 주지하는바와 같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의해 한 겨레가 두 국가를 설립한 경우다. 그런데 우리 겨레를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보는데는 양국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명칭은 다르다. 조선에서는 “조선민족”으로 부르고 한국에서는 “한민족”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부르는 “조선민족”은 북쪽의 국민만을 지칭하고 “한민족”은 남쪽의 국민만을 가리키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서로가 반도의 민족을 아울러서 지칭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들이 부르는 “조선민족”이나 “한민족”은 현재 반도 남북에 거주하는 민족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 남북 모두의 선조들까지를 아울러서 지칭한다.
물론 광복전 “만주”땅에 거주한 우리 민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한다. 조선에서는 “조선인”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재만한인” 혹은 “재만조선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이는 이북의 국명인 “조선”이라는 개념을 피하려는 의도와 “한국”이라는 이남의 국명 개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동시에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은연중에 일제하의 “조선총독부”라는 개념을 피하려는 의도마저 포함하고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광복전 “만주”에 거주한 우리 민족을 “조선민족”이나 “한민족”으로 호칭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냐하면, “조선민족”이나 “한민족”이라는 명칭은 력사적으로 정통성을 부여한 개념이고 “재만조선인”이나 “재만한인”이라는 명칭은 특정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특수한 개념임을 말해주는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족”이라는 명칭과 “재만조선인” 혹은 “조선인”의 경우, 위“만주국” 당대에 우리 민족이 “재만조선인”, “선계만주인”으로 불렸던 력사적개념을 사용한다(경우에 따라서는 당연히 사용할수 있다)고 하여 정통성을 부여한 개념인 “조선족”의 개념을 사용하여서는 안된다는 리유는 없는것이다.
3. 건국전 우리 작가들의 주장
확장된 조선족문학 개념의 타당성 여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건국전, 그러니까 윤윤진이 “조선인문학”으로 분류하고자 했던 그 당대 우리 작가들의 견해를 살펴보는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것 같다.
이러한 당대 문인들의 인식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례가 바로 당시 조선족문학의 거의 유일한 발표지면이였던 《만선일보(滿鮮日報)》에서 행해진 “만주조선문학건설신제의(滿洲朝鮮文學建設新提議)”라는 주제의 지상토론이라 하겠다. 이 지상토론에서는 1940년 1월 12일자에 먼저 《기자서문》이라는 것을 발표하고있는데 그 서문에서 기자는 《이곳에 사는 우리 수효가 百萬을 넘으며 우리에게는 말이 잇고, 글이 잇스니 거기에 따라서 文學이 업슬 수 업다.》고 하고는 《滿洲에 朝鮮文學을 建設하랴면 어떤 方面, 어떤 角度에서 어떤 形式 어떤 手法 等等으로 着手하며 開拓해나가야 될까. 여기에 對하야 滿洲안에 게신 여러분의 意見을 綜合하여 文學人의 參考에 이바지하며 우리 文壇의 向할바 길을 檢討해볼까 한다.》고 그 취지를 밝히고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당시 만주조선인문학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학임을 전제로 하고있다.
그번 토론에는 당시 문단의 다수 문인들이 참여했는데 그 첫 토론으로 게재된 《滿洲朝鮮人文學의 特殊性》에서 황건(黃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滿洲朝鮮人文學이란 끗까지 ‘朝鮮文學’이며 滿洲에 와잇는 滿洲國鮮系國民, 卽 滿洲朝鮮文學人만이 이룰수 잇는 文學이다. 다시 말하면 滿洲라는 國家와 그 歷史와 特異한 性格만이 가질수 잇는 獨自的文學, 卽 滿洲文學이여야 할것이며 그러기 爲하여서는 朝鮮文學의 傳統을 가장 잘 消化攝取하여야만 될것이다. 이로써만 비로서 그의 圓滿한 成就가 期待될것이다.》3) 그 구체적 추진의 방법으로 황건은 《1. 當面問題로 滿鮮日報를 通하여 有機的 文壇聯結을 圖謀할것》, 《2. 協和會文化部文藝班에 加入活動할것》, 《3. 同人誌의 出現을 企圖할것》, 《4. 作品集의 出版을 劃策할것》, 《5. 先輩大家들의 後輩를 爲한 參加와 引導를 바랄것》 등을 제안하고있다. 그는 만주조선인문학이 조선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조선내 조선문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적문학 즉 만주문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으로 독자적문단의 결성 혹은 형성을 제안하고있는것이다.
윤도혁(尹道赫)은 《滿洲內에서 制作된 幾篇의 作品을 檢討해볼 때 朝鮮內에서의 文學形式, 거긔다가 若干의 滿洲的色彩를 糊塗하엿고 鄕愁的인 情緖를 加味하여노흔 作品이 大部分인것이다.》 라고 하여 아직은 독자적문학 형성이 미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數年前의 移民文學이 現在는 開拓文學이 될수 잇》다고 하여 전자를 소위 “이민문학”으로 보고있는것 같다. 《昔日의 移民이 現在 開拓民으로 變遷을 보게된것이 時代의 要請》이라고 한것을 보면 또한 앞으로의 문학이 “개척문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의미인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독자적문학을 제창한데서는 황건과 별 차이가 없다. 《文學에 잇서서도 우리의 三十年間 傳統을 無視하야서는 안될것은 煩說을 要치 안흠으로 이것을 母體로 하기는 하되 더 廣汎한 世界觀이 잇서야 하고 좀더 스케-일이 큰 主觀을 가저야 할것이며 滿洲라는 特異性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안흐면 안될것이다.》4) 라고 하여 《滿洲라는 特異性》을 강조하고있다. 그런데 이 만주의 특이성이라는것을 그는 만주땅의 광활함과 수많은 민족의 잡거로 인한 생활의 특이미묘(特異微妙)함으로 파악하고있다. 《他民族과 協助生活을 하게 되는 運命에 잇게 됨으로 그만치 우리의 主觀이나 世界觀이 커》진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신서야(申曙野)는 《各民族이 제각금 所有하고잇는 固有의 傳統과 自主性을 尊敬하며 서로 理解하며 서로 民族的 苦痛을 除去하며 無差別하여 바야흐로 民族間의 紐帶를 結聯식혀 同化하며 때로 和하여 分化連綿하여 繼續하는데서만 비로소 民族間의 眞實한 協和는 永續性을 가질것이다.》5) 라고 하여 민족협화의 문제로 해석하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협화의 사상이 《滿洲國은 王道政治를 基礎로 한 民族協和의 國家인만큼 이곳에는 一强力民族의 獨斷이 存在할수 업스며 또한 過去의 米國의 建國當時와 갓치 宗敎的 信念下에 母國을 버리고 自由의 종소리에 憧憬하여 달여온 民族도, 더욱 母國延長을 賦與하는 殖民地도 안》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있다. 어쩌면 현실인식의 자세가 체제영합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없지 않으나 시각을 바꿔 살피면 오히려 리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즉 비록 만주국이라는것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이긴 했으나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독립국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의 문화인으로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이주민의 생존문제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일제의 감시밑에서 오족협화라는 국책을 최대한 리용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획득해야 했던것이 당시 지성인들의 립장이 아니였을까 한다.
김귀(金貴) 역시 《諸民族協和의 精神을 根幹으로 하여 超民族的인 特異의 滿洲國民文學의 樹立에 究極目的이 잇슬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滿洲朝鮮人의 文學은 朝鮮內地文學의 延長도 되지 못하며 模倣도 아님을 말하고십다.》6) 고 하여 역시 독자성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좀더 大陸農民의 創造的精神, 말하자면 深刻한 人間的精神의 모든面을 分析하고 綜合하여 그것으로서 農民文學의 世界를 만드러야 할것을 밋는바이다.》고 하면서 그 창작방법에서는 《어떠한 架空的 妖術도 물리치며 어떠한 虛構도 드려놋치 말고 生新한 寫實主義方法으로 典型的인 滿洲農民의 性格을 創造》할것을 주장하며 《보담 더 長江流水와 갓흔 自由奔放한 飛躍으로써 가장 眞實하게 그 文學建設을 꾀하여야 할것》7) 이라 하여 진실성과 자유분방성을 강조하고있다.
박영준(朴榮濬)은 구체적인 지적은 하지 않고있으나 만주가 조선인의 일시적 거주지가 아니고 뼈를 묻고 살 영주지가 되였기때문에 만주조선인문학의 필요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튼 民族이 가튼 言語를 使用하며 두가지 文學을 가질수 잇느냐가 問題일것이나 이것은 滿洲朝鮮人文學의 槪念을 밝힐 때 自然 解決될것》8) 이라 하여 역시 독자적 문학이라는데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볼수가 있다.
이상 제씨들의 주장을 우리는 조선문학의 전통과 “만주”현실이라는 이중성을 띤 독자적문학(黃健), 다민족의 협조공존과 오족협화라는 건국정신(윤도혁, 신서야); 대륙적 농민문학과 자유분방한 풍격(金貴) 등으로 귀납할수 있을것 같다. 만주조선인문학을 하나의 독자성을 가진 문학임을 강조한것이 이들의 공통된 견해인데 그렇다면 그 독자성이라는것이 무엇일까? 신서야의 다음 기술이 이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우리는 이에서 우리 文學이 後天的으로 가지고 잇는 性格―自主性을 固執發揚하며 아울너 先天的 性格―朝鮮의 文學傳統을 批判的으로 繼承하여 兩者를 有機的으로 結合抑揚식혀 渾然一體의 完全한 一個의 性格을 形成》하여야 한다고 보았고 《今後 우리의 文學의 形態는 如上의 根本的 性格을 基準으로 할 때 大陸文學, 建設文學 及 移民文學 其外 엇던 形態를 가출지는 現階段의 文學人의 眞摯한 檢討와 氣焰의 輩出로써 決定된 問題》라고 하여 구체적인 성격 규명은 피하고있다. 그는 특히 만주조선인의 생활적근거가 태반수 개척민에 관한것이라고 하여 만주조선문학이 곧 농민문학이라야 한다는것은 너무 협애하고 근시안적편견이라고 비평하면서 이는 《어듸 까지던지 文學人 自體의 敎養形態와 性格, 素質 如何에 依하여》《滿洲文學으로써의 獨自的 性格을 體得創造할수》 있는것이라 보고있다.9)
그러니까 이들 건국전의 우리 작가들은 자신의 문학을 후천적성격으로서의 자주성과 선천적성격으로서의 조선문학의 전통이 비판적으로 계승된, 량자가 유기적으로 결합억양(結合抑揚)되여 혼연일체를 이룬 《完全한 一個의 性格》을 가진 문학으로 인식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 당시 조선내 기성문인들의 견해도 대동소이하였다. 《만선일보》에서 조선내 기성문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이점을 잘 알수 있다. 설문조사는 다음과 같은 3개의 질문으로 진행되었다.
一. 滿洲內에서 朝鮮文으로 發表된 作品을 읽어보신 일이 게십니까
一. 貴下께서 滿洲에 對한 作品을 쓰신다면 어느 方面에서 取材하시겟습니까
一. 將來 할 滿洲朝鮮文壇에 對한 希望을 말슴해주십시오.
여기에서 두번째와 세번째 질문이 이들의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견해와 관련이 될것인데 《滿洲朝鮮文學을 말함》이라는 표제로 1940년 1월 16일부터 2월 2일까지 5회에 걸쳐 도착순으로 발표된 유진오, 리기영, 안석영, 박영희, 최정희, 리찬, 방인근, 채만식, 로자영 등의 회답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이민생활과 거치른 만주땅을 배경으로 한 이주민생활, 그중에서도 이주농민의 생활을 그리고싶다고 대답한 작가가 다수이고 두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대부분 작가들이 역시 이주민의 생활반영과 스케일이 큰 대륙적인 문학을 희망한다고 대답하고있다. 그중에서도 채만식은 “朝鮮的인 滿洲性”을 가진 문학을 주장하여 만주조선인작가들의 주장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니까 전래의 민족적인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될수 있는 새로운 문학을 개척해야 한다는것이 만주조선인작가들이나 조선작가들의 공통된 인식이 되는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당시 조선본토의 문학과는 어느모로든 구별된다고 생각했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러한 인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는것이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에 쓴 렴상섭(廉想涉)의 서문이다. 《여긔에 나타난 作家 全部가 반드시 父祖代부터 이따에 뿌리박은 所謂 二世 三世가 아닌것이며, 個中에는 어제 越江하엿다가 來日이면 도라갈 사람도 잇슬것이나, 이 作品들만은 亦是 호미와 박아지와 피땀 以外에 아모것도 가진것 업는 “墾民”속에서 자라난것이다. 그속에서 呼吸하고 그속에서 살찌고 기름진 詩魂이 나흘수 잇는 滿洲朝鮮人의 文學이다. 一望無涯의 荒漠한 高梁바테서 진흙구덩이를 후벼파고 도다나온 開拓民의 文學이다. 開拓의 文學이라 하야 自卑하거나 侮蔑을 느끼지는 안흘것이다. 物質로 그리함과 가티 文化의 遺産을 분명히 지니지 못하고 現代의 文明文化에서 떠러저와서도, 오늘날 朝鮮 本土의 그것에 遜色업는 文藝의 싹시 도다낫다는데에 도리혀 커다란 矜持가 잇는것이다.》10) 그리고 신형철(申瑩澈)은 이 작품집의 편찬과 관련하여 《<싹트는 大地> 뒤에》에서 《現地居住人의 現地取材의 現地作品으로서 現地發表를 中心 삼고 原稿를 모으기로 햇습니다.》고 하여 현지성을 특별히 강조하고있다. 물론 작품집에 수록한 작품도 모두 그런 원칙에 의해 편집되였다. 역시 조선본토의 문학과는 구별되는 문학으로 생각했다는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당대 문인들이 자신의 문학의 독자성을 특별히 강조한 리면에는 정체성인식 즉 일정한 공동체에의 소속감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문학을 조선문학이나 한국문학과 구별하여 인식하고있는것과 같은 차원이다. 이는 1930-40년대에 우리 문단에서 활약하다가 건국직전에 조선이나 한국에 돌아간 작가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주민작가들의 문학은 우리 문학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광복후 조선이나 한국에 나가 그곳에서 다시 문학활동을 계속하여 한국문학사나 조선문학사에서 다루어진(그들의 광복전 문학활동을 포함하여) 작가들의 문학을 “조선족문학사”에서 제외시키거나 “조선족문학”이 아닌 “재만조선문학”이나 한국작가(혹은 조선작가)들의 “재만시기의 문학”으로 보는 견해는 합리성이 없다 하겠다.
4. 결 론
이제 지금까지 론의된 내용을 총정리해야 할 때가 된것 같다. 이상에서 필자는 “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의 합리성을 실증하기 위하여 우리의 건국전문학과 건국후문학의 명칭을 따로따로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윤윤진과 그 류사 주장들을 론박했다.
이상의 론의를 종합해보면 중국조선족문학, 조선족문학, 조선민족문학과 윤윤진이 주장한 조선인문학 등 여러 개념중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조선족문학”으로 대체하는것이 좋을것 같다. 왜냐하면 “조선족”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 공동체는 중국에밖에 없기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고려인”,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 미국에서는 “재미한인” 하는식으로 불려 조선족과는 구별되는것이다. “조선민족문학”이라는 말은 상당 정도 불확실성을 띠고있기때문에 우리의 문학을 아울러 표현하는데는 편하지만 조선에서 사용하고있는 “조선민족”이라는 개념과도 관련되고 또 “한민족문학”이라는 말과 더불어 한반도를 포함한 전세계 우리 겨레의 문학을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기가 십상이기때문에 역시 적당치는 않은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립장에서 볼 때 “조선족문학”을 건국전이나 건국후 할것없이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문학의 개념으로 사용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겠다. 그러면 조선족문학의 범위는 자연히 건국전문학과 건국후 현재까지의 우리 문학, 즉 중국땅에서 이루어진 모든 우리 문학을 포함하게 되는것이다. 이를 뒤받침해주는것은 바로 정체성의 원리이다.
주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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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윤진, 「중국조선인문학연구에 나서는 몇가지 문제」, 《문학과 예술》, 1993년 6호.
2) “중국교포”라는 말은 분명 잘못된 호칭이다. “교포”라는 명칭으로 불릴수 있는 “조교”들이 얼마간 있으나 현재 사용되고있는 “중국교포”라는 명칭은 이들 “조교”들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오류가 분명하다.
3) 黃健, 「滿洲朝鮮人文學의 特殊性(中)」, 1940.1.13.
4) 尹道赫, 滿洲朝鮮文學의 傳統性과 特異性(上), 1940.1.17.
5) 申曙野, 「滿洲朝鮮文學의 性格과 特異性(上)」, 1940.1.30.
6) 金貴, 「農民文學의 方向으로(上)」, 1940.1.20.
7) 金貴, 「國民文學으로부터 世界에 進出토록(下)」, 1940.1.22.
8) 朴榮濬, 「作家의 輩出과 讀者의 向上을 緊急動議(上)」, 1940.1.23.
9) 申曙野, 「滿洲朝鮮文學의 性格과 特異性(下)」, 1940.1.31.
10) 廉想涉: 申瑩澈 編, 《싹트는 大地》, 新京, 滿鮮日報社,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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