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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을 위한 진혼곡
**《詩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 1975
나는 솔직히 시(詩)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시는 확실히 규정짓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 장르에 속한다. 어렸을 때 처음 시라는 것을 접하고 나서 한 번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시를 잘 읽지 않게 되었다. 그땐 너무 어렸을 때라서 시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겁부터 먹었던 거다. 시에 대한 두려움은 어른이 되고도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내게 특별한 공감을 선물해 준 시인이 있다. 바로 김수영이다.
시인 김수영은 1921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을 일제 강점기로 모두 보낸 그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징집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틈틈이 시를 쓰던 김수영은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마지막 시인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김수영을 평가하는 시선은 그의 초기 시들을 ‘모더니즘’ 계열에 둔다. 솔직히 나는 그의 시가 왜 모더니즘이며, 심지어 시에 있어서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한국 전쟁 이후 조금만 특별한 작품을 발표하면 평론가들은 그 작품을 두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옷을 입혀줬다. 김수영의 초기 시들은 대부분 ‘느낀다’, ‘생각한다’, ‘본다’ 같은 틀 속에 있었다.(실제로 그의 시에 이런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사물이나 현상을 대하는 태도는 시인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소질이다. <공자의 생활난>, <사령(死靈)>같은 김수영의 초기 시를 보면 그가 대단히 ‘모던한’ 태도로 세상을 보았다는 걸 안다. 이런 시들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진보적인 기법으로 가득하다.
그러던 김수영이 1960년대 이후 갑자기 변한다. 시인의 시가 변했다는 건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거다. 모더니스트인 김수영은 세상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시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도리를 찾기를 원한다. 그는 이제 리얼리즘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있던 자신을 버리고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저 유명한 말 ‘시여, 침을 뱉어라’가 나온다.
그가 죽고 난 후 민음사에서 펴낸 《시여, 침을 뱉어라(1975)》는 이러한 그의 ‘반시론(反詩論)’에 대한 해석이다. 1960년대부터 그가 갑자기 생을 마감하기까지 썼던 시들은 확실히 초기에 나타났던 세련된 간접표현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독설과 풍자로 가득한 시를 선보였다. 1960년 4월 19일, 영구집권을 노리던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을 종식시킨 시민혁명으로 이 사회는 무언가 새로운 빛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선 제2공화국은 그야말로 허무했다.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이 임명됐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뒤를 이어 박정희 대통령 체제는 이 사회를 더욱 비참한 독재국가로 몰아갔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했던 건 시인들이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말 할 수 없었던 분위기에서 시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사회에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은 ‘자유, 민주, 정의, 혁명’으로 대변되는 4.19정신이었다. 시인이 해야 할 일, 시가 노래해야 할 대상,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절박한 요청과 욕구가 《시여, 침을 뱉어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독립된 책이 아니라 김수영이 죽기 전에 썼던 일기와 수필, 시론 등을 모아서 책을 엮은 것이다. 그 내용 중에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짧은 시론 제목을 따서 책에 이름을 붙였다. 그가 했던 시 창작 작업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내용일 수 있지만 이 책은 그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나침반이다.
내가 지금ㅡ바로 지금 이 순간에ㅡ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시여, 침을 뱉어라 中)
<시여, 침을 뱉어라>는 연설문이다. 1968년 4월 익산에서 팬클럽 주최로 열린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그대로 실은 것이다. 그는 이 세미나를 마친 뒤 6월에 집 앞에 있는 도로에서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48세 때 일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가 그가 죽고 난 이후에 나왔지만 소중한 책으로 대접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의 시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죽기 두 달 전에 말했던 저 내용을 보면 정말 그의 죽음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마음에 와 닿게 된다. 이처럼 그의 시 세계는 이제 막 힘찬 나래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같은 연설문에서 김수영은 더욱 유명한 말을 한다. 이 말은 ‘침을 뱉는 시’와 더불어 그의 사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이고, 후에 많은 후배 시인들이 가슴에 두었던 교훈이 된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 中)
그의 말에서 ‘머리’는 행동이 없는 사상이다. 머리에 생각만 가득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지 못하는 시는 죽은 시이다. ‘심장’은 감정이다. 감정에만 치우쳐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시 역시 죽어서 땅속에 들어가 누운 것과 다르지 않다. 김수영은 시를 쓰려면 머리, 심장, 손, 발 -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밀고 나가면서 쓰라고 권한다. 온몸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게 바로 시다.
나는 가끔 김수영이 그 때 어이없이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세상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거라는 공상에 빠질 때가 있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아니더라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인 ‘온몸’으로 이 세상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수영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바로 지금 이런 시인이 필요하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中)’이라고 말하며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릴 시인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말했다. 세상을 향해 침을 뱉는 사람은 바로 ‘당신, 당신들’이라고. 시인의 입에서 나오는 침은 거룩한 침이 아니다. 그가 말한 숭고한 침은 민중들의 입에서 나오는 마른 침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마지막 부분은 바로 그런 우리들이 작은 소리일지라도 이제부터 내어달라는 그의 유언 같은 당부의 말로 끝을 내고 있다.
그는 오래전에 죽고 없지만 그의 시와 시 정신은 여전히 남아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1981년부터는 유족들과 민음사가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젊은 시인들을 배출한다. 2001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수여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풀>은 교과서에 실려서 어린 학생들에게도 아주 익숙하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1975년에 민음사에서 처음 펴낸 것을 마지막으로 1977년에 중판까지 나왔다가 판이 끊겨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이다. 초판이건 중판이건 할 것 없이 중고 책 시장에서 하드커버가 깨끗하게 보존된 책을 구입하려면 웃돈을 들여야 구할 수 있는 책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김수영의 시는 전집으로 엮여 많이 나오는데 그의 시론이 담겨있는 이 책이 여전히 판이 끊긴 채로 있다는 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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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작성자 달콤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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