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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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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김수영 - 풀
2015년 12월 16일 00시 34분  조회:6498  추천:0  작성자: 죽림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갈래 : 자유시, 주지시, 참여시 
*어조 :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주지적, 참여적 
*운율 : 반복과 대구에 의한 리듬 형성 
*특징 : 대립 구조 
*제재 : 풀 
*구성  
① 제1연 : 풀의 나약함 - 수동적인 모습(바람에 나부껴 눕고 우는 풀) 
② 제2연 : 풀의 생명력 - 수동성→능동성(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 나약함 → 강인함. 
③ 제3연 : 풀의 넉넉함 - 능동성 강조(→능동성과 여유까지 지닌 풀) 
  - 마지막 행의 '풀뿌리' : 끈질긴 삶을 표현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적인 시어 선택으로서 곧 일어설 것                             임을 전제로 한 침묵임. 
  - 눕고 일어남 : 삶의 반복성 
*주제 : 민중(民衆)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반서정성(反抒情性)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든 그의 후기시 세계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다. 
60년대 민중문학을 신동엽과 함께 이끌고 온 김수영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신동엽과는 달리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해서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의 진수를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이성부, 이시영, 조태일로 이어지는 1970년대 민중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독재권력, 외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바람에 의해 눕는 풀의 수동성과 바람에 앞서는 풀의 능동성, 그리고 바람을 넘어서는 풀의 넉넉한 생명력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 시는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날이 흐리고, 흐려서] 폭력화되었을 때[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풀은 눕고 울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바람보다 먼저 웃는] 인류 역사의 총체적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평이한 우리말 시어와 '풀·바람', '눕다·일어나다', '울다·웃다' 등의 시어를 과거시제에서 현재시제로 반복적으로 진행하면서 표현함으로써 '풀'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뚜렷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 현상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하여 중후하면서도 명징(明澄)한 현실주의적 의미를 제시하는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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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金洙暎, 1921 ~ 1968)

생애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
출생 서울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서울 출생.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으나, 점차로 강렬한 현실 의식과 저항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시정(詩情)을 탐구하였다. 시집으로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등이 있다.

작품


이 시는 순수한 삶을 지향하는 화자의 소망과 의지를 대립적인 시어의 활용과 시구의 반복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1연은 ‘눈은 살아 있다’ 라는 문장을 반복, 변형하여, 순수한 생명력을 지닌 ‘눈’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2연에서는 ‘기침을 하자’ 라는 문장을 반복, 변형하여, 순수한 내면 의식을 지향하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기침을 하도록 권유받는 ‘젊은 시인’은 곧 화자인 동시에 시인 자신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침을 하는 행위’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 화자의 내면 의식에 잠재해 있는 속물적 근성, 소시민성, 현실과 타협하려는 부정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을 정화하여 순수하고 정의로운 삶을 회복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3연에서는 ‘눈’으로 대표되는 순수의 세계는 오로지 자신에 대한 정화와 성찰에 매진하고 있는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임을 알려 준다. 한편 4연에서는 화자의 가슴에 불순한 ‘가래’가 고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가래’는 기침을 통해 뱉어 내야 하는 불순하고 부정적인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눈’을 바라보며, 가래를 뱉는 행위는 현실의 더러움을 정화하고 순수한 삶에 도달하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과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상문, 지학, 창비

폭포
이 시는 ‘떨어진다’ 라는 시어의 반복을 통해 ‘폭포’의 역동적 이미지에 어울리는 힘 있는 리듬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폭포’라는 자연물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연은 ‘폭포’의 외형적 모습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 시의 전체 내용을 개관하여 제시하고 있다. 2연은 1연에서 제시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에 화자가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여 표현한 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폭포의 ‘고매한 정신’은 현실적 효용이나 세속적 욕망 따위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인간의 정신적 지향을 나타낸다. 3 ~ 4연에서 폭포는 화자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비유하고 있는‘밤’을 뚫고 떨어진다.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는 ‘곧은 소리’는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양심의 소리이며, 그것은 또 다른 ‘곧은 소리’를 불러일으키는 자기희생적 선구자의 소리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5연은 역설적 표현을 통해 폭포의 절대적 자유로움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끝맺고 있다. ‘높이도 폭도 없이/떨어진다.’ 라는 모순된 표현은 폭포가 지향하고자 하는 정신, 곧 부정적 현실에 안주하는 소시민적이고 안이한 삶의 태도를 과감히 거부하고 절대적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시인의 치열한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한철우)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발표한 유작(遺作)으로, ‘풀’과 ‘바람’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민중의 건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그린 작품이다.
이 시에서 ‘풀’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자연물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 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 독재 권력과 외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연에서는 풀의 수동적인 모습을, 2연에서는 바람보다 빨리 눕지만 먼저 일어나는 풀의 모습을 노래하여, 민중들이 시대 상황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면모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어 3연에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 권력의 횡포를 지혜롭게 견뎌 내는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즉, 이 시는 폭력적인 시대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권력에 짓밟히는 듯 보이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고통을 이겨 내는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국어) 미래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고백하고 있다. 화자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땅 주인’, ‘구청 직원’, ‘동회 직원’과 같이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쟁이’, ‘야경꾼’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사소한 일로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함으로써 화자는 자기모멸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또한 절정 위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진지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 신사고

파밭가에서
이 시는 ‘묵은 사랑’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희망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묵은 사랑’과 연결되는 시구는 ‘잃는 것’이고 ‘새로운 사랑’과 연결되는 시구는 ‘얻는다는 것’이다. 즉, 화자는 새로운 사랑을 얻는다는 것이 묵은 사랑에 대한 집착과 미련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깨달으며 새로운 사랑을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적인 시각적 이미지(색채 대비)와 동일한 문장 구조의 반복, 일상생활 속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통해 주제 의식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우한용)

푸른 하늘을
이 시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투쟁과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1연에서 시인은 노고지리를 예찬한 어느 시인의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푸른 하늘을 자유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제압한다는 것은 단순히 즐겁게 노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따.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는 도외시한 채, 다만 자유로운 비상만을 노래한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2연은 그것을 설명해 주는 부분으로,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는 것은 '무엇을' 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피로 대유된 투쟁, 그리고 고독을 함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다시금 그러한 혁명적 행위가 고독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휩쓸리기 쉬운 타락상을 경계시키고 있다. 흔히 이 구절은 일반 대중과의 연대감을 획득하지 못한 엘리트 의식의 표출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보면 혁명에 수반되는 허탈감이나 승리의 기쁨 같은 일체의 감정을 배제함을 물론, 실패에서 오는 좌절까지도 견뎌낸다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
비평문. 이 글은 김수영의 시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글쓴이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시의 내용과 형식, 참여시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먼저 시를 쓰는 것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으로 그것이 곧 시의 형식이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산문의 의미, 모험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시의 본질은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으며, 언제나 모험의 의미를 띠며 산문의 정신과 통한다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글쓴이는 참여시가 정치적 ·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시적 대응 방법으로, 내용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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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본고는 1968년 4월에 발표된 김수영의 산문으로, 1968년 4월에 부산에서 김수영 팬클럽의 주최로 열린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연설문.)

본문 편집

나의 시에 대한 思惟(사유)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詩作上으로는 그러한 明晳(명석)의 開陣(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의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破算(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속칭 <시평>이나 <시론>을 쓰게 된 것은―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1의적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 하이데거가 말한 <大地의 은폐>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엇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엇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시의 음악」의 끝머리에서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라는 말로 <의미>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을 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留保(유보)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侵攻(침공)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隱性的(은성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精銳化(정예화)―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睡眠(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起點(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援軍(원군)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은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의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과격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또한 국민들이 그들의 <보수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間隙(간극)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 설사 그 사람이 다만 奇人(기인)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 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의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 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서방측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群居(군거)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知的 일치를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 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김수영 육필시(왼쪽)와 일기.

ㆍ‘긴장하지 말라구요 사회주의 동지들’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言論의 自由라고 趙芝薰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政治의 自由라고 張勉이란/ 官吏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金日成萬歲’ 미발표작.)

김수영 시인(1921~68)의 시 15편과 일기 30여편 등 미발표 작품들이 9일 공개됐다. 이 작품들은 다음달 고인의 40주기를 맞아 김수영 문학세미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부인 김현경 여사와 접촉하면서 발굴됐다. 

원고는 10여권의 수첩과 노트, 서류 봉투와 엽서, 광고지, 심지어 시멘트 포대에 쓴 것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1954년부터 61년 사이에 쓴 것이 대부분이며 날짜를 명기하지 않은 번역원고와 번역용 영시 필사본도 있다. 일기에는 미발표 시와 미완성 소설, 구상 중이던 소설에 대한 메모, 책을 읽으며 발췌한 문장 등이 기록돼 있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해제를 통해 “김수영의 시와 사유가 날 것 그대로 소용돌이치는, 가히 김수영 문학의 ‘진본’이라고 해도 좋을 귀중한 문학사적 자료들”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金日成萬歲’와 ‘연꽃’ 등 이념적 성향의 시 두 편이 눈길을 끈다. 김 교수에 따르면, 60년 10월 쓰인 ‘金日成萬歲’는 당시 최대의 금기어였던 ‘김일성만세’라는 다섯 음절을 통해 언론자유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으며, 61년 3월 쓴 ‘연꽃’에서는 ‘긴장하지 말라구요/ 사회주의 동지들’이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반동의 시대를 견디기 위한 자기 위안을 보여준다. 더불어 50년대 쓴 시 ‘꽃’ ‘탁구’ ‘대음악’ ‘나의 피’ 등의 작품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가열찬 정신의 힘과 비극적 속도감으로 시대의 중압과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의 치열한 시 세계가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일기는 시인의 인간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나의 머리 안의 많은 부분을 아직도 차지하고 있는 여자에의 관심을 나는 없애야 한다. 오직 문학을 위해서만 내 몸은 응결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1954·11·25) 등에서는 문학에 대한 치열한 다짐이 엿보이며 “허탈하고 황막한 생활”로 인한 우울함을 문학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결연함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생전에 소설을 발표한 적이 없지만, 한때 소설쓰기에 골몰했던 흔적도 발견된다. “앉으나 서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좋은 단편이여, 나오너라(1955·1·5)” “시를 쓰러 나온 것이 아닌데 또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시를 썼다(1956·2·9)”는 일기 구절에 더해 공개된 수첩 일부는 표지에 아예 ‘fiction’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공개된 자료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의 80%에 해당되며 나머지는 출판사 측이 정리하고 있다.
(공개된 미발표작품과 일기는 계간 ‘창착과비평’ 여름호에 등재.) 


<윤민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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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탄압받는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의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
.”_볼테르

 


 
출생 1921. 11. 27, 서울 종로
사망 1968. 6. 16, 서울 수유동
국적 한국

요약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生硬性)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에 겪어야 했던 방황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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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본관은 김해.

생애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969년 5월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그의 마지막 시〈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꾀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태도를 잘 보여준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사령 死靈〉 등의 초기시에서는 '느낀다, 생각난다, 본다'와 같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많이 썼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이며 상식적인 태도와 방법을 뛰어넘고자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이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음을 깨달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生硬性)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에 겪어야 했던 방황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1959년에 펴낸 첫 개인시집 〈달나라의 장난〉은 이런 시정신을 잘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시인들 가운데 김춘수와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반시론'(反詩論)에 있다. 그의 반시론은 1960년대 시의 주류인 참여시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시적 경향, 즉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시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에서 과거의 자기를 부정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에서도 일대 변화를 보였다.

그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초월적 태도와 조화의 논리에서 참여적 태도와 분열의 세계관으로 바꾸고, 또 세련된 간접표현 대신 독설과 요설이 뒤섞인 직설법을 쓰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4·19혁명과 그 정신이 퇴색되어간 현실에 있었다. 시 〈사령 死靈〉·〈그 방법을 생각하며〉·〈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에서는 1960년대 현실이 '자유·민주·정의·혁명' 등을 내세웠던 4·19정신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며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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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포로생활

 

                                   /맹문재

 

 

근래에 김현경 여사의 증언에 의해 한국전쟁 동안의 김수영 시인 행적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김현경은 『김수영의 연인』(책읽는오두막)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뒤 필자와의 대담에서(『푸른사상』, 2014년 가을호) 한층 더 상세하게 밝혔다. 근래에 박태일이 발굴한 김수영의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해군』, 1953년 6월호)도 도움을 준다. 지금까지 시인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부인에게도 두어 번밖에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 생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수영 전집』(민음사)에 따르면 김수영은 1950년 9월 문화공작대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어 평남 개천에서 1개월 군사 훈련을 받고 순천에 배치되었다가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탈출해 서울로 돌아오지만,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부산 거제리 수용소로 이송되어 미 군의관 피스위치와 가깝게 지내다가 1953년 12월 석방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 상황을 보충 및 수정하고자 한다.

김수영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 어느 날 답답하다고 외출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이 된 것이다. 1950년 8월 23일 전후였다. 김수영의 미완성 소설 작품인 「의용군」을 보면 그 일은 어느 정도 자발성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월북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남에 남아 그동안에 혁혁한 투쟁도 한 것이 없는 순오는 의용군에 나옴으로써 자기의 미약한 과거를 사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라거나, “<강해져야겠다.> 이것이 순오의 의용군을 지원할 때부터의 신념이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기가 공산주의를 잘 인식하고 파악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자랑도 생기었다.”라는 구절에서 유추되는 것이다.

김수영은 다른 의용군들과 함께 충무로 근처에 있는 일신초등학교에서 하루를 묵은 뒤 북으로 이동했다. 「의용군」에 따르면 의정부를 거쳐 삼팔선을 넘은 뒤 임진강을 건너 전곡을 지나 연천까지 이르렀다. 실제로는 개천까지 갔다. 김수영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에 실망했다. 인민군에 대한 공포와 억압은 물론이고 북쪽 사회의 빈약한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순오는 대체 사회주의 사회의 발달이란 어떤 곳에 제일 잘 나타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기차 안 구조로 보아 이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진보의 진상이라면 침을 뱉고 싶었다.”라거나, “미국의 문명보다도 훨씬 더 앞서 있을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던 사회주의 사회의 문명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김수영은 개천에서 훈련받고 순천에 배치된 즈음 탈출했다. 개천과 순천에서의 생활은 부인에게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작품인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에서 “내가 6․25 후에 개천(介川) 야영 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라거나, 산문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에서 “열대여섯 살밖에는 먹지 않은 괴뢰군분대장들에게 욕설을 듣고 낮이고 밤이고 할것없이 산마루를 넘어 통나무를 지어날르던 생각을 하면 포로수용소에서 받는 고민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토로한 것을 보면 많은 고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은 북쪽으로 진격한 국군 및 유엔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벌어진 틈을 타 도망쳤다. 김수영이 국군에 투항하지 않은 이유는 북한 의용군으로 처리되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 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낙오자처럼 꾸몄다. 그런데 그것이 큰 착오였다. 국군의 입장에서는 낙오자들을 전선에 끌고 다니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처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다른 낙오자들과 함께 밤중에 저수지로 끌려가 사격을 당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와 기적적으로 총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어 나와 근처의 민가에 들어가 쪄놓은 옥수수를 먹고 덤불 속에서 한잠 자고 남쪽으로 향했다. 옥수수를 쪄놓은 민가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는데 간밤의 총소리에 겁이 나 도망을 쳤는지, 아니면 끌려가 죽음을 당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수영은 남쪽으로 도망쳐오다가 후퇴하는 소련군 부대를 만났다. 소련군이 제공하는 군복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함께 이동하면서도 부단하게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고, 어느 날 밤 마침내 성공했다. 그리고 탈출해오다가 미국 흑인 병사들이 운전하는 트럭들을 보게 되었다. 전방에 기름을 나르는 트럭들이었다. 김수영은 손에 피를 흘리며 소련군 군복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민간복을 구해 입고 큰길로 나가 한 트럭을 세웠다. 자초지종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영어를 잘한 덕분이었다.

충무로의 집 앞까지 왔는데, 파출소 소장한테 붙들렸다. 술에 취한 파출소 소장은 김수영을 보자마자 빨갱이라고 욕하며 구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식구들이 인민군의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다리에 피가 철철 흘렀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이튿날 중구지서로 넘겨졌다. 그곳의 지하에서 역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던 중 트럭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탈 힘이 없었지만 타지 못하면 시체가 되어 청계천변에 버려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울면서 부탁해 간신히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가 배를 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 1950년 10월 말 무렵이었다.

이 부분은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 김수영의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에 따르면 “이태원육군형무소에서 인천포로수용소로 인천포로수용소에서 부산서전병원으로 부산서전병원에서 거제리 제十四야전병원으로― 가족 친구 다 버리고 왜 나만 홀로 포로가 되었는가!”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문에 따르면 뒷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이송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부산 거제리로 돌아온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김수영은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 대부분을 보낸 것이다.

포로수용소에서(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인지,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인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김수영은 상처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젊은 미군 장교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치료를 받는데, 그 일로 김수영은 미군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된다. 포로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 간의 살상, 폭동, 구타 등으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김수영은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한 인민군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또한 견딜 수 없는 억압과 적막감에 시달렸다. 김수영은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리하여 흔들리는 이를 하나씩 뽑으며, 아픔을 느끼며, 역설적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의용군으로 북에서 겪은 경우에 비해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임 간호사(김현경 여사는 노 여사라고 증언했다)와 브라우닝 대위와의 사랑도 힘을 주었다.

1952년 12월,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석방은 온양에서 이루어졌는데 원래의 날짜보다 다소 늦춰졌다.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안전상 이유에서였다. 김수영은 막상 자유의 몸이 되자 길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영등포에 있는 어머니한테 가야 할지, 아내와 아들한테 가야 할지 망설여진 것이다. 결국 석방될 때 받은 담요 2장을 팔고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 조암리로 향했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

 

김수영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 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망(有刺鐵網)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

「여보세요 내 가슴을 헤치고 보세요. 여기 장 발장이 숨기고 있던 격인(格人)보다 더 크고 검은

호소가 있지요

길을 잊어버린 호소예요」

 

「자유가 항상 싸늘한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는 포로의 애원이 아니라

이미 대한민국의 하늘을 가슴으로 등으로 쓸고 나가는

저 조그만 비행기같이 연기도 여운도 없이 사라진 몇몇 포로들의 영령이

너무나 알기 쉬운 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당신의 뺨에다 대고 비로소 시작하는 귓속이야기지요」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隔)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갔는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느냔 것에 대한 대변인이 아니다

또한 나의 죄악을 가리기 위하여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기 위한 연명을 위한 아유(阿諛)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이 지루하다고 꾸짖는 독자에 대하여는

한마디 드려야 할 정당한 이유의 말이 있다

「포로의 반공전선을 위하여는

이것보다 더 장황한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戰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싸워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우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어 일어나서

나는 예수 크리스트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감(錯感)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나오려고

무수한 동물적 기도(企圖)를 한 것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용서하여 주시오

포로수용소가 너무나 자유의 천당이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으로 만일을 염려하여 말해두는 건데

이것은 촌호(寸毫)의 풍자미(諷刺味)도 역설도 불쌍한 발악도 청년다운 광기도 섞여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리 38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傷病) 포로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

 

내가 6․25 후에 개천(介川) 야영 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北院)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順天)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中西面) 내무성(內務省)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 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버렸어도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 포로와 UN군 상병 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였습니다」

 

「돌아오신 여러분! 아프신 몸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는 UN군에 포로가 되어 너무 좋아서 가시철망을 뛰어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못 뛰어나오고

여러 동지들은 기막힌 쓰라림에 못 이겨 못 뛰어나오고」

 

「그러나 천당이 있다면 모두 다 거기서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넘어진 반공 포로들이

다 같은 대한민국의 이북 반공 포로와 거제도 반공 포로들이

무궁화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戰勝)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직이 부를 수도 소리 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지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발굴 원문] 김수영 시와 산문

 

“이승만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하라”

 

⊙ 변한 것은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의 결핍

⊙ 어용시인·아부시인들은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자격을 상실한 자들

⊙ 1960년 4·19, 4·26사태를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인의 자격이 없어

 

[편집자 註]

시는 김수영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실었다. 다만 시어는 표준어규정에 따랐다. 산문은 원문을 충실히 유지하되 한글맞춤법을 따랐으며 한문으로 된 단어를 국한문체로 옮겨 썼다.

(자료 제공=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씨)

 

 

 

 

한강변

 

관광도로가 곧 생긴다고 벌써 부터

땅값이 들먹거리는

얼음 창고 자리 옆의 큰 나무 선

낭떠러지는 현기증이 나서 안된다.

盧(노)씨 지붕이 보이는

왕년의 미두왕 조준호 네 땅이라나 하는

전나무가 선 골짜기가 좋은데

명동의 ‘은성’ 마담과 그의 일당들이

이사를 왔고 유현목감독의 장인 되는

분이 二百평 가량 땅을 사 놓았고

이대 음악과를 나온 서울시장의

조카딸 되는 미인이 그

부근에 살고

있는 것을 안지 부터는

그쪽도 가지 않게 된다.

四, 五年 전 까지 일본 사람들이 만든

못 쓰게 된 風雨計(풍우계)가 섰던

붉은 벽돌의 얼음창고 서쪽의

시멘트로 된 얼음창고 두동은

그러고 보니 그 동안에 상당히 역사가 바뀌었다.

영화촬영소를 하다가 납공장이 됐다가

지금은 캐비닛 공장

그 옆의 바라크집은 걸레 만드는 공장

福(복)자와 禧(희)자를 그린 캐비닛이

트럭이나 구루마에 실려 갯벌 길옆을 돌아 나오고

古鐵 부스러기를 실은 트럭이

또 그 갯벌 옆길을

돌아 들어 간다.

관광도로는 이 공장 앞마당을 자르고

風雨計가 선 벽돌 탑을 부수고

나갈 모양이다.

잘 됐다.

第二漢江橋(제이한강교)를 지나서 앞으로 運河(운하)가 생기면

汽船(기선)이 정박할 예정이라는

蘭芝島(난지도)까지 뻗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밤섬에서는

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와서

동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는

밤섬의 이 신기로운 여름 열매.

 

(출처=《女像》 1965년 8월)

 

 

 

 

 

아침의 誘惑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山林과 時間이 오는 것이다

서울驛(역)에는 花環(화환)이 처음 生기고

나는 秋收(추수)하고 돌아오는 伯父(백부)를 期待(기대)렸다

그때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무지한 坑夫(갱부)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것은 千字文이 되는 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스푼과 성냥을 들고 炭鑛(탄광)에서 나는 나왔다

물 속 모래알처럼 -

素朴(소박)한 習性(습성)은 나의 아내의 밑소리부터 始作(시작)되었다

어느 敎科書(교과서)에도 嫉妬(질투)의 感激(감격)은 무수하다

먼 時間을 두고 물속을 흘러온 흰모래처럼 그들은 온다

U.N委員團(위원단)이 每日(매일)오는 것이다

花環(화환)이 花瓣(화판)이 서울驛에서 날아온다

모자 쓴 靑年이여 誘惑(유혹)이여

아침의 誘惑이여

 

 

(출처=《自由新聞》 1949년 4월 1일)

 

[편집자註-2003년 민음사판 <아침의 유혹>에는 8행의 ‘탄광’을 ‘여관’으로 표기했다. 또 11행 ‘감격’을 ‘○○’라고 쓴 뒤 주석을 달아 ‘판독할 수 없어 복자(覆字)로 처리했다’고 밝혔다. 14행 ‘화환이 화판이’를 ‘화환이 화환이’라고 오독(誤讀)했다. ‘화판’은 ‘꽃잎’을 뜻하는 말이다.]

 

 

內室에 감금된 愛慾의 탄식

 

-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

 

남존여비의 철학

 

 

 

 

 

대체로 한국 하급 사회의 부인들은 교육도 없고 취미도 없고 교양도 없고, 일본의 하류부인의 단정한 품과 중국 농가 부인들의 친절한 맛에 비해서 너무나 비교가 안 되고, 입고 있는 옷은 때가 새까맣게 절어서 흰 옷인지 까만 옷인지 분간이 안 가고 세상에 태어나서, 남의 아내가 되면 자기의 옷은 개의치 않고 다만 남편의 옷만 빨게 마련인지, 어떤 개울엔 가 보아도 천을 물에 담가서 널찍한 돌 위에 펼쳐 놓고 빨랫방망이를 양손으로 번갈아 휘두르면서 불이 나게 두들기고 있는 여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렇게 마구 두들긴 천은 물에 헹궈서 모래 방죽에다 말리는데 정성껏 두들긴 보람이 있어 볕을 받은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희고 윤이 난다.

 

여름옷은 그대로 참을 수도 있지만, 춘추복의 바지저고리 같은 것은 솜을 넣은 것을 뺄 때마다 뜯어서 빼어 빨고 나서 또 넣고 꿰매야 하니 여자의 일생은 실로 뼈저린 고행(苦行)인 것이다.

 

농촌의 아내들은 온 식구들의 옷 바라지를 하는 것 이외에 부엌 안 일체를 한다. 쌀 빻기, 키질, 물 긷기도 아내의 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내의 일, 절구질을 하고 물동이를 이고 먼 곳에 있는 우물에까지 다니는 것도 아내들이 도맡아 하는 일이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고, 밤에는 제일 늦게 잠자리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피로한 손으로 밤에는 바느질을 하고, 실을 꼬고 베를 짜는 것도 아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할 일, 그 밖에 적지 않은 아이 어미가 되면 쉴 때도 일을 할 때에도 세 살이 되기까지는 노상 등에 업고 다녀야 하는 비참한 꼴이라니, 농부의 아내가 되어서 무슨 낙이 있고 무슨 즐거움이 있는지 도시 모를 일이다. 몇 년이 지나서 며느리를 보게 되기까지는 이 고통은 도저히 면할 길이 없다. 불쌍하게도 그들은 서른만 되어도 벌써 쉰 살이나 되어 보이는 노상(老相)을 하고, 마흔이면 이가 다 빠지고 할머니 소리를 듣는다. 사랑에 취하는 젊음이 언제 있었는지, 청춘의 방황은 그들에게서는 찾아볼 길이 없고, 나날이 지옥 같은 시집살이어니, 마음에 위안을 주는 신랑은 그저 귀신을 섬기는 일 정도다.

 

상류로 갈수록 여자는 격리되어서 절대로 세상과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부인은 집에 있어서, 내실이라는 방안에 처박혀서 남자의 방을 향해 창문도 열어 놓지 못하게 되어 있고, 방문자는 몇 번을 찾아가도 내실이 어디인지 추측도 할 수가 없다. 부인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된다. 정중한 유폐리(幽閉裡)에 있는 부인은 물론 교육도 없고, 교양도 없다. 그저 저속한 생물(生物)로서 취급되고 있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는가. 다만 오래된 관습으로 여자에 대해서 존경을 강요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배우고 수양하는 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가리키는 천박한 철학, 간단한 역사 그 밖의 다소의 문학뿐이다.

 

다만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한 팔자 때문에 성년이 되면 이유 없이 여자의 존경은 일층 더 두터워진다.

 

여성은 안방 재산

 

부인의 격리유폐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습관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조(李朝) 초기에 사회의 도의(道義)가 퇴색하고 음비(淫卑)의 풍조가 성한 시대에 시작된 것 같다. 그 후 5백년 동안을 면면히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기원은 남편이 그의 아내의 소행(素行)을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의 친구를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서울의 부패는 특히 상류계급의 문란한 기풍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남편이 그의 아내를 감추고 딸을 감추고, 타락한 남성에게 근접하는 것을 꺼려하고, 미천한 상년이 아니면 문밖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어느 틈에 풍속화되어서 법률 이상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의 외출은 사람 눈을 피해서 밤에만 하게 하고, 낮에 나갈 때에는 밀폐된 가마나 조군을 타고, 그런 것에 타지 않는 것은 미천한 노동자의 계집뿐이다.

 

언젠가 민비(閔妃)가 배알(拜謁)했을 때 전하(殿下)는 “나는 서울 거리를 나가 본 일이 없다우. 그 밖의 곳은 더 말할 것두 없구” 하고 말씀하셨다.

 

<일부러 그랬든 과실로 그랬든 간에 적어도 남자가 여자의 몸에 손을 대면 큰일 난다. (어떤 책에서 본 것인데)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의 딸을 죽이고, 남편이 그의 아내를 죽이고, 혹은 아내나 딸들이 스스로 자살을 했다. 그러나 그런 희생쯤은 예사로 생각한다. 최근의 일이다. 어떤 한 귀부인이 불에 타 죽었다. 그것을 보고 위급한 경우라 어떤 한 사나이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부인을 껴안았다. 그러나 남녀가 서로 몸을 대는 것은 관습상 일체 용납되지 않는 터이라, 이 경우에 있어서도 남자는 여자를 구명(救命)해서는 아니 되고 사나이는 이 법도를 어긴 것이 되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이 시녀의 불찰이었다고 해서 시녀가 벌을 받았다. 법률이 내실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사실이며, 모반죄(謀反罪)에 걸리지 않는 한, 남편은 아내의 방으로 피신만 하면 관헌의 손을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집의 지붕을 수선할 때에는 먼저 옆의 집에 가서

 

“오늘은 지붕에 올라갑니다. 어쩌다 댁의 부인이나 따님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하고 인사를 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결혼하기까지는 아버지와 형제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남자와 얼굴을 대해서는 아니 된다. 결혼 후에도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은 남편과 남편의 근친에 한해서이다. 아무리 친한 상(常) 사람이라도 당당하게 사람들이 있는 곳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나는 오랜 시일의 여행 중에 6세 이상의 계집아이의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 세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처녀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나라이다. 그렇다고 여자는 이런 사회의 조직을 원망도 하지 않고, 자유를 동경하고 있지도 않다. 수백 년 내의 유거생활(幽居生活)은 여자의 자유정신을 마멸(磨滅)시켜 버렸다. 오히려 여자는 가정의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정중(鄭重)하게 저장(貯藏)되고 있는 것이라고쯤 여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은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 여자의 《한국(韓國)과 그 인방(隣邦)》이라는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저자는 1893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전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외국 여자로서는 최초의 방대한 한국 기행문을 남겨 놓았는데 어떤 대목은 우리들이 뻔히 다 알고 있는 일이면서도 포복절도할 지경의 재미있는 데가 많다.

 

“한국여성의 비극적인 애욕상(愛慾相)”에 대해서 쓰라는 청을 받고 보니 나는 우선 위에 인용한 구절들이 생각이 나서 좀 길지만 구태여 인용해 보았다. 사실 나보고 쓰라면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의 생활에 대한 이처럼 간명한 조감도(鳥瞰圖)를 쓸 자신이 없다. 내 얼굴은 내가 모른다. 또 못난 얼굴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저 억지로 남이 본 내 얼굴을 꾸어온 셈이다.

 

性보다 돈을 숭배

 

지금 이런 글을 읽고 과거를 회상해 보면 끔찍끔찍하게 변한 점도 많지만 끔찍끔찍 변하지 않은 점도 많다. 변한 것은 노출된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데이트, 트위스트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個性)의 결핍이다.

 

아직도 신문 4면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는 성의 개방 같은 문제도 여자의 개성의 자각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볼 때, 정말 연애의 감정이 솟아나올 만한 여자가 없다. 판에 박은 듯한 양장, 하이힐에 핸드백은 정말 구역질이 난다. 여자가 보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 저녁에 백 원에 몸을 파는 종삼네 집 골방에도 핸드백만은 계절에 맞추어서 4, 5개가 걸려 있다.

 

봉건의 노예이던 여자는 지금 금전으로 그 상전이 탈을 바꾸어 있을 뿐 상전은 여전히 상전대로 엄존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불란서까지 갔다 온 멋쟁이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는 걸핏하면 “돈은 돈이고, 섹스는 섹스이지요” 하면서 돈 있는 늙은이하고 살면서, 가끔 오입을 하기도 하는 자신을 자못 현대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것이 현대적이라고 보기가 좀 수상한 것은, 그 늙은 남편이 이름난 부자인데도 그 여자는 그보다 더 부자인 어떤 가정의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여복(女福)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나의 주위에서 보는 여자들은 돈 있는 여자나 돈 없는 여자나 모두가 돈의 귀신들뿐이다. 세계의 조류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면 그뿐이겠지만, 한국의 젊은 현대여성들은 성(性)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돈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중류 이상의 교양 있는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들의 성 생활을-나아가서는 애정생활을 마멸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암(癌)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다. 섹슈얼한 할리우드식 영화. 그것을 본뜬 무수한 국산영화들. 이것을 보고 온 둘의 잠자리에서 실제로 재현해 보고 싶은 유혹도 생기겠지만 잘 안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골 여자들이 좀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서울에 가고 싶은 생각에 눈물을 짜고 고민을 하고 있는 한 행복하지는 않다.

 

순천인가에 가서 오입을 해 본 일이 있는데, 서울로 치면 종삼네 집 여자들이, 손님방에 들어올 때면 다소곳이 반절을 하고 들어오는 것은 퍽 좋게 보였다.

 

(출처=《女像》 1964년 10월호)

 

 

 

책형대에 걸린 詩

 

- 인간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4·26(1960년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편집자註) 전까지의 나의 작품 생활을 더듬어 볼 때 시(詩)는 어떻게 어벌쩡하게 써왔지만 산문(散文)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감히 써 볼 생각조차도 먹어 보지를 못했다.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쥬(camouflage, 위장·은폐-편집자註)’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自由)뿐이 아니다. 태도(態度)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6·25 때에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이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文學團體)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感情)의 자유 역시 그렇다.

 

이를 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不快)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하여서는 아니 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作品)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咀呪)가 아니면 비명(悲鳴)이 아니면 죽음의 시(詩)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앞으로 이에 대한 복수(復讐)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요사이는 시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 4·26이 전취(戰取)한 자유는 나의 두 손 아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정말 이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지난날의 낡은 시단(詩壇)의 과오(過誤)나 폐습(弊習)을 나는 여기서 재삼(再三) 뇌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듯 숨 막힐 듯한 괴로운 시대 속에서 과감하게 자기의 세계를 지켜 가면서 싸워 온 시인이 현(現) 시단(詩壇)의 기성인(旣成人) 중에서도 몇 사람은 있다는 것을 나는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나라의 시단이고 진짜 시인보다는 가짜 시인이 훨씬 더 많은 법이고, 요즈음 세간(世間)의 여론(輿論)의 규탄을 받고 있는 소위 어용시인(御用詩人)이나 아부시인(阿附詩人)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서는 완전히 자격을 상실한 자들뿐이다.(아니 애당초 시인이 되어 보지도 못한 자들뿐이다.) 그러니까 그까짓 것은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4·26 이전의 우리나라의 시단의 작품들이 대체로 낡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시로서 합격된 작물(作物) 중에 특히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제작(製作)상의 모험적 기도를 용납할 수 있는 시대적 혹은 사회적 여백(餘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고민을 처절히 체득한 시인이라면 4·26은 그에게 황금(黃金)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시인들만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4·26의 역사적 분수령을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넘어온 기성시인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새 시대의 선수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는지는 확언하기 힘든다.

 

‘책임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서구의 고언(古言)이 있는데 이 말은 4·26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출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이 필히 느꼈어야 할 기본인식이다. 이 인식의 감득(感得)이 없이는 새 시대의 출발은 불가능하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다. 이제야말로 꿈을 가지라.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이와 같은 꿈은 여직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태도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를 투박하게 요구한다. 여기에 과실즙이나 솥뚜껑 위에 어린 밥풀 같은, 달콤하고도 거룩한 시인의 책임이 있다. 시인들이여! 새로운 시인들이여! 이제야말로 인간 해방의 경종(警鐘)을 울려라.

 

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趙芝薰)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 나라는 구원(救援)을 받지 못한다’고 ‘휘트먼’인가의 말을 차용(借用)하여 가면서 기염(氣焰)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윤돈(倫敦·런던-편집자註)에 있는 박태진(朴泰鎭)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물(한) 시(詩)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 구제(救濟)가 없겠지요’라는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傳播)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면 반드시 시작품(詩作品)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把握)하고 통찰(洞察)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資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某)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장 다 봤어. 그런 폭도(暴徒)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校監)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李承晩)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道峰山)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

 

(출처=《京鄕新聞》 1960년 5월 20일)

 

[편집자註-책형대(?刑臺)는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

 

 

 

 

 

무더운 날은 신경질이 더 나는 법이다. 밤잠이 부족하거나 하여 머리가 휴지통같이 뒤숭숭한 아침이면 사랑에 대한 갈망이 불안한 마음과 엉키어 온 가슴을 서로 잡는다.

 

S는 아담하고 정숙한 여자이었다. 나의 모―든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불안도 그의 앞에서는 태양 앞에 자취를 감추는 무수한 군성(群星)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그가 알게 된 것은 해운대 넓은 바닷물 속에서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영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때 S도 여학생들을 인솔하여 온 부산 모 여학교 간호원이었다. S가 인솔하여 온 여학생들 중에서 자개바람을 일으키고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한 것을 내가 데리고 간 학생 중의 제일 수영을 잘하는, 반에서도 제일 키가 크고 말썽도 제일 잘 부리는 학생이 구하여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와 S는 그 후 일요일이고 토요일이고 서로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번번이 바다에서 만났으며 ‘우끼(튜브-편집자註)’를 타고 될 수 있는 대로 물빛이 짙은, 뭇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까지 가서는 사랑이 통하는 이성(異性)에게만 신(神)이 용납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웃음을 웃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천천히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놀았다.

 

바다에다 모―든 몸과 마음의 피곤을 씻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을 넘어 집을 향하여 돌아갈 때면 S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나왔다.

 

S에게는 여자다운 원한이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간호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교의 교만한 여교원들 틈에 끼어서 자기 직업의 열등성(劣等性)을 그는 나에게 종종 하소연하였다.

 

“단 한 사람을 못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해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남편을 가리키는 이야기인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도 나는 재우쳐 그의 가정 내막을 물어보기를 사양하였다.

 

나도 처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S의 노골적인 정열(情熱)은 눈앞에 숨 가쁘게 느끼고 있는 나에게 S가 남편과 아이를 가진 여자라고는 설마 믿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S는 나에게 도리어 이러한 아픈 질문을 하고 놀리었다.

 

“빨리 사모님 모시고 와서 같이 사세요. 젊은 부부가 아무리 피난생활이라 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아요.”

 

하는 S의 말에,

 

“나는 당신만 있으면 그만이오.”

 

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우리들의 사랑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대포알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깊어만 갔다.

 

“개자식!” 이런 욕인지 애교인지 알 수 없는 S의 말을 나는 너그러운 미소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입술 한번 훔쳐 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S는 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많은 S의 나이와 지혜가 저 허허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 위에 깜박거리는 아침의 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S는 나를 완전히 자기의 사랑의 포로(捕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여름도 가고 구월 초승 어느 날 밤 나는 환도를 앞두고 비로소 S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인사하세요. 앞으로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친해 주세요.”

 

하고 S는 방 한구석에 앉은 몸집이 큰 남자를 나에게 소개하였다. 이것이 S의 남편이었다. 그 이외에 S에게는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있었다.

 

“내년에 중학교 시험을 보아야겠는데 어떻게 될지 근심이에요.”

 

하고 S는 돌아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나도 미소로 대답하였다.

 

S와 S의 남편인 검고 무트듬한 건축기사라는 사나이와 눈이 큰 딸아이와 나는 한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극도의 흥분과 당황과 비분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의 남편이 맹인(盲人)이라는 놀라운 비극을 밥상을 받기 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끌어 가리켜 주는 대로 눈이 먼 건축기사는 묵묵히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만화를 번역해 주셔서 아이들이 여간 좋아하며 읽지 않습니다. 자주 놀러 오십시오.”

 

하고 이 맹인은 나에게 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S가 자기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만화를 번역해 달라는 것을 틈이 있는 대로 정성껏 번역하여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환도 후 학교의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기자생활을 하게 된 나는 S의 아름다운 이름을 나의 ‘팬 네임’으로 즐겨 쓰고 있다. S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잃어버린 해운대의 넓은 바다가 생각이 나고, S의 어디인지 ‘모나리자’를 닮은 가냘픈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머리 위에 떠오르고, 그보다도 토건사고로 실명을 하고 아내가 벌어다 주는 것으로 답답한 삶을 하고 있는 가련한 건축기사의 일이 몹시 가슴에 사무친다.

 

그리고 아예 S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출처=《新太陽》 1954년 8月號)

 

 

 

[발굴] <풀>의 시인 김수영의 시와 산문

 

반세기 만에 빛을 본 번뜩이는 시와 산문

 

⊙ 1964년 여성잡지 《女像》 8월호에 시 <한강변> 실어

⊙ 사후 44년이 지나도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 읽을 수 있어

 

 

 

반시(反詩)의 시인, 타협하지 못했던 직선(直線)의 산문가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시와 산문이 세상에 나왔다.

 

《월간조선》 8월호와 9월호에 걸쳐 공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김수영 전집》(민음사刊)에서 빠진 것으로 시와 산문, 번역문, 시월평을 망라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의 극(劇)”(유종호)이란 표현처럼,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이 타계한 지 44년이 지났으나 지금의 시각에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먼저, 시 <한강변>은 1965년 8월호 여성잡지 《여상(女像)》에 게재됐다. 모래섬에 불과하던 여의도에 개발바람이 일던 1960대 중반의 어수선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여의도의 땅을 돋우기 위해 인근 밤섬을 폭파하기 직전의 이야기다. 시인은 ‘아직도 밤섬에서는/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이라며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그 어조는 무척 쓸쓸하다.

 

또 1949년 4월 1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에 게재됐던 시 <아침의 유혹(誘惑)>의 시어(詩語)를 일부 복원해 《월간조선》에 다시 싣는다. 그동안 마이크로필름 보관상태가 나빠 의미전달이 불가능했던 오탈자(誤脫字)를 바로잡은 것이다.

 

直線의 산문가

 

 

김수명 선생과 김수영(오른쪽).  

 

 

 

1964년 《여상》 10월호에 실린 산문 <내실에 감금된 애욕의 탄식>은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이란 어깨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은 ‘남자가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느냐’고 반문하면서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돈의 귀신’이라고 비꼰다. 직설적이며 타협하거나 비켜 가지 않는 ‘직선의 산문가’다운 표현이다.

 

1960년 4·19와 4·26(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일) 이후인 5월 20일자 《경향신문》 4면에 실린 〈책형대에 걸린 시(詩)>는 김수영의 날카로운 산문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책형대(?刑臺)란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시인은 ‘…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詩)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고 선언한다. 시대에 편승하거나 권력에 기대는 작가들을 ‘아부시인’, ‘어용시인’으로 규정하며 시인 휘트먼의 말을 빌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 이 나라를 구원받지 못한다’고 썼다.

 

성인취향의 잡지 《신태양》의 1954년 8월호에 실린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는 에피소드 형식의 콩트, 혹은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다. 실화인지 가공의 얘기인지 헷갈린다. 작품을 발표한 1954년은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부산·대구 등지에서 통역관, 선린상고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실제로 이 작품 속의 ‘나’는 학교 선생이다.

 

 

누이 김수명이 오빠의 작품을 널리 알려

 

 

김수영시비 앞에 선 김수명 선생.

 

 

김수영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준(儁)은 1983년 4월 사망했고, 둘째 우(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1년과 2003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을 펴낼 때, 누이동생 김수명(金洙鳴·78)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문학》 편집장 출신의 수명씨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빠의 작품을 찾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월간조선》의 발굴에 대해 그는 “평생을 오빠의 작품을 찾고 다듬는 일을 해 왔는데, 아직도 작품이 남아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한국문단에서는 ‘동생 김수명이 없다면 김수영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누이는 오빠의 시가 세상의 조명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빠가 생전에 선별해 준비해 두었던 작품들을 한 자, 한 획 다치지 않고 살려서 1981년 출간한 전집에 묶을 수 있었지요. 또 1981년판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누락·발굴 작품도 보완해 2003년 한글판으로 새 전집을 펴냈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전집을 준비 중인데 새로운 작품을 찾게 됐으니 기뻐요.”

 

그는 “시인 김수영이 한국시단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 시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오빠는 언어를 통해 자유를 읊었고, 또 자유를 살았다”고 회고했다.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자나 평론가의 오독(誤讀)은 없었을까. 김수명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엔 좁은 소견으로 많이 속 끓이기도 하고, 안타까워한 적도 있어요. ‘왜 그 깊은 뜻을 알려 하지 않고 껍질만 보나’고요. 이젠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이상, 모든 것은 독자의 몫이요 평론가의 몫이라고요.”

 

 

김수영과 도봉산

 

김수영 조카 김민.

 

 

시인 김수영은 도봉산에 본가가 있었고 선영도 그곳에 있었다. 김수명씨는 “수복 후 도봉산 텃골 선영에 생활터전을 삼게 됐다”며 “그곳에서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길렀다”고 했다.

 

“이후 오빠 묘도 그곳(도봉산)에 썼다가 1994년 폐묘하게 되어 조상 유해와 함께 화장을 해 모셨습니다. 1998년 우리 가족은 그곳을 떠났지요. 제가 그곳에서 20대에서 60대까지 살았으니 오빠 생전에도, 사후에도 함께한 공간이랄 수 있겠죠.”

 

현재 도봉구 방학3동 문화센터 건물 1~2층에 시인의 자료관이 조성되고 있다. 시인의 육필원고, 저서, 김수영론과 관련한 자료, 시인의 작품이 포함된 서적, 시인의 애장도서와 애장품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시인 김민은 김수영의 조카다. 2001년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2007년 처녀 시집 《길에서 만난 나무늘보》를 펴냈다. 김민씨는 “제가 태어나기 넉 달 전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도봉산 선영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김수영시비’에 자주 올라가곤 했다”고 말했다.

 

큰아버지 시 중 제일 좋아하는 시편이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이 시처럼 꾸밈이 없고 솔직하면서도 가슴이 찡해져 오는 것, 이 점이 김수영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 월간조선.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도봉산 하산길 막바지에 김수영 시비가 있다. 

그의 대표작은 <풀>.

 

 

 

  김수명은 출판사에 경리를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현대문학"의 편집장 자리에 올라, 김수영의 시가 문단에 조명을 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의 여동생 김수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김수영에 대한 평가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김수명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김수명은 당시 문인들에게 "한국의 잉그리트 버그만"으로 칭송될 정도로 아름다워서, 많은 문인들이 그녀에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김수명이 편집장으로 있었을 당시, 현대문학은 작가들로 넘쳐났으며, 자신이 알기로도 그녀를 짝사랑했던 작가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시인 황동규씨가 김수명에게 헌사한 시를 발표했다는 기사와 함께 사진을 발견했다.
기사에 따르면,
황동규씨의 아버지 황순원
과 김수명은 반 세기에 걸친 정신적 우정을 나눴고,
황동규씨도 김수명과 오랜 기간 술친구를 했다고 한다. 

사진은 김수영과 김수명 남매를 찍은 것으로, 김수영은 길다란 얼굴에 다소 냉소적인 모습이며, 김수명은 정말로 잉그리트 버그만을 연상케 하는 우아함과 단아함을 지닌 분위기를 지녔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미인형이 아닐 수 있으나, 사실 화장을 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어떤 여자가 미인으로 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문인들에게 보여주었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 도봉구에 '김수영문학관' 연 누이동생 수명씨

"오빠가 이걸 원할까? 객쩍다 이거예요. 살아 있으면 '이게 뭔 짓이야?' 할 것 같은데, 세상이 변하니 오빠도 바뀌어야죠(웃음)."

시인 김수영(1921~1968)의 누이동생 김수명(79)씨는 듣던 대로 '미인'이었다. 젊은 시절 당대의 문인들이 앞다퉈 연정을 쏟아냈던 단아한 미모가 잔설처럼 남아 있었다.

그가 앞장서 지난달 27일 개관한 '김수영문학관'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오빠가 생전에 선별해 넘겨준 원고들을 1976년부터 선집과 전집으로 묶어왔어요. 내가 나이가 있으니 이 자료들 보관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는데 2011년 6월 도봉구청에서 제의가 왔지요. 본가와 묘소가 도봉구에 있고, 구청장(이동진)이 시인 김수영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더라고요."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커다란 성취를 남긴 시인의 명성에 비해 문학관이 너무 작고 외진 곳에 있지 않으냐 묻자, "너무 커도 허술해 보인다"며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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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명씨가 생전의 김수영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1000여점의 육필 원고를 오동나무에 넣어 보관한 수장고를 자랑스러워했다.
작은 사진은 1961년 막내동생 졸업식에 모인 김수영 가족. 오른쪽에서 둘째가 김수명씨(왼쪽 사진).
 
8남매 중 다섯째인 김수명씨가 큰오빠인 김수영의 육필 원고를 보관하게 된 것은 그가 국내 최장수 문예지인 '현대문학' 편집장이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그저 시 한 편 실어주는 것만으로, 화가들은 잡지 표지에 자기 그림 한 편 실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하던 시절이었죠. 김환기, 박노수, 이상범 화백 등 누구나 할 것 없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니까요."

현대문학 시절을 얘기하다 그가 눈시울을 붉혔다. "(편집장 맡을) 자격은 없었는데 내가 살림은 잘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원고료라는 걸 드려보자 제안했죠. 한번은 오빠가 시 한 편 가져왔길래 원고료 3000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더니, 그걸 앞 저고리에 넣으면서 '아, 이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하는 거예요. 고까짓 3000원을 받고는 아이처럼 좋아서…. 아이고, 또 눈물 나네."

까다롭고 괴팍하기로 유명한 시인 김수영에 대한 누이의 사랑은 애틋했다. "어렸을 땐 오빠가 미웠어요. 큰아들 노릇을 전혀 안 했으니. 아버지는 장남인 오빠가 은행가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훌쩍 일본으로 유학 가 학비를 대라고 하니 화가 나셨겠죠. 집에 있을 때도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오빠는 '무서운 사람' '별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어요. 어머니 생전에 기자가 와서 '김수영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시인입니다' 하니까, 어머니가 '그 알량한 시인? 나는 고무신 한 짝이라도 사주는 아들이 좋아' 하셨지요(웃음)."

철이 들면서 시 쓰는 오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오빠 원고를 보면 단 한구석도 고칠 데가 없어요. '이게 뭐지?' 하고 의문이 가는 문장이 없다고요. 마침표 하나도 찍었다 지웠다가 또 찍었다 지웠다가…. 어떻게 이렇게 시를 쓸까, 팔불출처럼 오빠의 시에 감탄하고 감탄했지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김수영의 시는 '사랑의 변주곡'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라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산이….'

김수영의 시라고 다 좋았던 건 아니란다. "4·19 때 거칠게 쓴 시들은 좀 그래요. 좀 더 승화됐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또한 시인 김수영의 모습입니다." 문인 지망생이었지만 "오빠에게 모든 재능을 빼앗겨버렸다"며 웃는 김수명씨는 최고의 시인으로 미당 서정주를 꼽았다. "오빠가 따를 수가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시인 김수영이 버스에 치여 마흔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날을 동생은 또렷이 기억했다. "다행인 게 오빠가 쓰러지고 한 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와 헤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김수영문학관은 벌써 문인들의 사랑방이 된 듯했다. '그리운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자 그가 반색하며 맞았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그에게 물었다. "누구는 시인 김수영을 '푸른 늑대'라고 하던데요?" 김수명씨가 답했다. "양심이었죠. 시대의 양심! 오빠를 참여시인이다, 민중시인이다 하는데, 그건 오빠 작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해서예요. 그냥 시인이죠. 김수영은 어떤 이념 같은 것에 묶일 사람이 아니예요."




 

오랫동안 묻혀 있던 무언가가 ‘발굴’ 된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크나큰 기쁨이다. 발굴된 것이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 작품임은 물론이고, 재능을 숨기고 있었던 예술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모든 것이 빛을 본 순간, 그 사실은 역사가 되고 작품은 가장 큰 조명을 받는다. 발굴은 일반적으로는 땅 속에 파묻힌 것을 파내는 일을 뜻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지상으로 드러내는 일’을 말한다. 무언가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은 언제나 인류의 가장 중요한 숙제이며 숙원이었다. 



9일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미공개 작품 


지난 12월 9일, ‘영원한 청년 시인’ 김수영 시인의 미공개 작품이 한 계간지를 통해 공개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3년 만에 발굴된 시다. 그가 생전에 남긴 작품이 많지 않은 탓에 이번에 작품이 발견된 것은 우리 문학사에 매우 뜻 깊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발굴된 작품은 문학사가 될 뿐만 아니라 시대를 기록하는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오랫동안 묻혀 있다 잊혀질 뻔한 작품들은 거의 그 시대의 뼈 아픈 모습을 담고 있는데, 당시의 시대상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작품들은 그 자체만으로 역사가 되기도 한다. 

세대의 고뇌와 함께 작가 개인의 아픔까지 담겨 있는 작품은 이제 더 이상 ‘미공개’ 작품이 아니다. 세상의 빛을 본 ‘역사적’ 작품으로 사회적∙문학적 기록이다. 때문에 이번 시간에는 최근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비롯, 그 동안 문학사에서 귀중한 자료로 기억되는 거목들의 미공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거목들이 남긴 작품을 찾아내 그들의 생과 작품세계를 갈무리 하는 일 또한 우리 문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현대 시의 거대한 뿌리, 김수영 
전쟁 중 느꼈을 외로움이 느껴지는 작품 



 

실낱같이 잘디 잔 버드나무가 / 지붕 위 산 밑으로 보이는 객사에서/ 등잔을 등에 지고 누우니 / 무엇을 또 생각하여야 할 것이냐 // (중략) //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가야 할 곳도 가지 못하고 / 이제는 나의 천직도 잊어버리고 / 날만 새면 / 차디찬 곳을 찾아 / 차디찬 곳을 돌아다닌다

- 1953년 作 ‘그것을 위하여는’ 중에서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매우 독창적인 시론가로 꼽히는 김수영 시인. 그의 평론은 발표될 때마다 중요한 문학적 쟁점으로 떠올랐고, 날카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높이 평가를 받은 시인으로, 그가 죽은 뒤 <거대한 뿌리> <퓨리턴의 초상> 등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근대적 자아 찾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자 시 세계 속에 정치 문화와 질타, 비판 등을 담아낸 명실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가 죽은 뒤 40여 년의 시간 동안 유족들은 원고 보관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인 김현경 여사는 시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작은 종이쪽 하나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누이 김수명 선생은 자택에 화재가 났을 때 시인의 원고들을 제일 먼저 챙겨 나왔을 정도였다. 그 작품은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을 통해 2009년 공개되었다. 

그 뒤 최근 발굴된 ‘그것을 위하여는’는 김수영 시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6.25 전쟁 직후에 발표한 시로, 1953년 10월 3일자 연합신문에 발표된 것이다. 고서 수집가인 문승묵 씨가 발굴해 제공, 계간지 <문학의 오늘>에 공개되었다. ‘그것을 위하여는’은 김수영 시인이 시인으로서의 천직을 잊어버리고 부산에서 차가운 곳을 전전하며 살아갔던 때를 기억하게 하는 작품으로 자유롭고도 우둔한 ‘생각’의 공간으로 그가 들어갔음을 느끼게 한다. 전쟁 중 시인이 느꼈을 외로움과 삶이 느껴지는 이번 미공개 작품은 김수영 시인의 초기 작품으로 그의 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그린
                             소설가 황순원
 
역사적 의식을 놓지 않았던 서정적 작품



 

황천 간 우리누나 / 그리운 누나 / 비나리는 밤이면 / 더욱 그립죠// (중략) //그리운 누나 얼굴 / 생각날 때면 / 창밧게 비소리도 / 설게 들니오

- 1931년 作 ‘누나 생각’ 중에서


소설문학이 추구할 수 있는 예술적 성과의 한 극치를 시현한 소설가 황순원. 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바로 <소나기>다. 간결하고 세련된 문제로 소설 미학의 전범을 보여주는 그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에 대한 애정을 고루 갖춘 작품을 많이 집필했다. 서정적인 작품으로 많이 기억되는 그의 문학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근대화가 제창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긴 기간 동안 우리 정신사에 대한 적절한 조명을 이룬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 9월 경희대학교는 황순원 작가의 동요와 시, 단편 소설 등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초기 작품을 대거 발굴했다고 밝혔다. 국문과 김종회 교수가 발굴한 황 작가의 작품은 동요ㆍ소년시ㆍ시 65편, 단편소설 1편, 수필 3편, 서평ㆍ설문 각 1편 등 모두 71편으로, 이중 앞서 공개된 작품을 제외하면 60여 편이 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발굴된 작품은 황순원의 등단 직후인 1930년대 전반 작품이 대부분이며, 한국전쟁 이후 작품도 일부 포함돼 있다. 서정성과 사실성, 낭만주의와 현실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황순원 작가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발아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요소가 들어 있는 미공개 작품은 9월 23일 열린 ‘제8회 황순원 문학제’에서 공개되었다. 



순수 자연의 시인, 천상병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느낄 수 있는 시 



 

등대에 불이 켜진다. 바다로 향하여. 하늘은 / 무수한 갈매기떼처럼 가버리었다. / 황혼이 어두어져가는 저쪽에서 여자처럼 있었다. / 그 수평선을 가는 것은 항해하는 상선(商船)이 아니고/내일의 나의 내일의 항구(港口)별이여

- 1952년 作 ‘태양 빛나는 만지의 시’ 전문


‘문단의 마지막 순수 시인’ ‘문단의 마지만 기인’이라 불리는 <귀천>의 천상병 시인은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압축한 시를 주로 집필했다. 위 시는 천상병 시인이 1952년 10월 동인지 ‘제2처녀지’에 실은 ‘별’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별’은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씨가 발굴한 것으로 2007년 공개되었다. 공개되었을 당시 1950년대 동인지와 일간지에 실린 시 4편, 평론 1편, 편지글 1편 등 모두 6편의 작품이 새롭게 발굴되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목순옥 씨는 미공개 작품을 공개하며 “발굴된 시를 읽다 보면 바다가 보이는 마산에서 자란 시인의 풍부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고 전하며 “풀벌레 소리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시인의 서정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 뒤 2009년에는 집 안에 있던 서류봉투에서 ‘세월’이라는 시도 발굴되었다. 삶의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한 이 시는 그가 1988년 간경화증으로 치료를 받고 나서 퇴원한 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다. 천상병 시인의 숨겨진 미공개작은 대부분 그의 부인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2007년 발굴된 네 편의 시와 한 편의 평론글은 <천상병 평론>을 통해 출간되었다. 



‘4.19’ 시인, 신동엽
시대 상황에 따른 슬픔이 절절히 묻어난 작품



 

꽃들의 음악 속 / 말발굽소리 들리면 / 내일 고구려 가는 石工의 주먹아귀 / 막걸리 투가리가 부숴질 것이다. /오 답답한 하늘 / 국경 그어진 두 토막 // 오 雜草 무성한 休戰地의 / 녹 쓴 京義線 레일이어

- 1963년 作 ‘태양 빛나는 만지의 시’ 중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동엽 시인의 별명은 ‘4.19’ 시인이었다.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던 그는 4.19 혁명의 기억을 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완성시켰다. 그 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하고 간암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가 타계한지 40주년이 된 2009년 발굴된 작품은 이런 그의 작품세계가 절절히 녹아있는 시 2편이다. 1963년 7월 발행된 동인지에서 발굴된 시는 분단의 민족적 아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태양 빛나는 만지의 시’와 12행으로 이뤄진 간결한 시 ‘십이행시(十二行詩)다. 

두 편의 시 모두 1963년 3월 출간된 신동엽 시인의 생전 유일한 시집 <아사녀>는 물론, 이후 출간된 <신동엽 전집>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미공개작이었다. 발굴된 시는 그의 초기 작품으로 당시 시대 상황의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심층적인 상처가 채 다스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유미주의에 치우친 경향을 보였다. 한국전쟁 당시 입산했던 체험을 분단의 아픔이라는 민족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두 시는 발굴 당시 시인 작품세계는 물론 시대적 상황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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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문학관은 아파트 단지 건너편, 새삼스러운 곳에 있다. 김수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유시인으로,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읽었던 나는 그에게 퍽 매료됐었다. 김수영 문학관 앞에 서니, 그의 글을 찾아 읽었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설렜다. 왠지 모르게 김수영의 시는 용기가 되었다. 거창하거나 웅장하지도 않았고, 마냥 예쁜 모습을 노래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았는데 그 시 한 구절, 한 구절 힘이 있었다. 그때처럼 그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약간의 긴장과 함께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 중간)장질부사와 뇌막염 등 병을 앓고 난 직후

 

김수영은 해방 후 한국 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이전 인제 박인환 문학관에 갔을 때에도 그의 이름을 발견했었다. 박인환 시인이 그 당시 문학인의 술집이었던 ‘모나리자’에 술값 대신 맡긴 만년필을, 자신을 우습게 여겼던 친구에게 줬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김수영이었다. 김수영에게 시는 고상한 예술이 아니었다. 현실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그는 자신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어였고 특유의 반복기법으로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는 보통학교 시절 6년 동안 줄곧 성적이 뛰어났으나, 14살에 장질부사에 걸려 폐렴과 뇌막염을 앓았다. 그는 곧 회복했고, 이후로 다양한 일을 했다. 연극의 연출과 배우를 담당하기도 했고, 영어 선생님도 했다. 1945년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발표를 계기로 문학의 세계에 들어왔다. 1946년 문학의 길에 접어든 그는 김병욱, 박인환 등과 함께 ‘신시론 동인’을 결성했다. 여기서부터 박인환과의 인연이 시작된 듯했다. 

 



문학관은 1, 2층 전시실과 3, 4층 작은 도서관, 강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김수영 시인의 삶의 궤적을 연대순으로 볼 수 있고, 한국전쟁 등 현대사에 따라 달라진 그의 시를 확연히 비교할 수 있다. 김수영 문학관은 세련되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영의 대표작 「풀」이었다. 관객들의 걸음걸이에 따라 화면상의 풀이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었다.

 

▲육필원고. 1950년대. 한국전쟁의 영향. 왼)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오) 봄밤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준 것이 이 포로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나의 시는 이때로부터 변하였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서러운 일뿐이었다. 
–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 1953, 《해군》 6월호에서

 

김수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었다. 훈련소로 간 그는 유엔군과 인민군의 혼전을 틈타 야간 탈출을 감행했으나, 경찰에 체포당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그곳에서 끔찍한 대립과 살상을 경험한 후, 약 3년 동안 갇혀 있다 석방됐다. 그는 이러한 경험이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설움의 원천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육필원고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 포로 동지들에게」 (1953.5.5)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위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중에서

 

김수영은 시대의 흐름을 시 안에 담고자 했다. ‘내가 움직일 때 세계가 함께 움직이기를 바란다’고 할 정도로 그는 과장이나 생략 없이 솔직하게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했다. 비속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서는 비속어를 사용했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직설적인 문장을 택했다.

 

 

문학관 한 벽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김수영을 만난 감상을 글로 쓰거나 그림을 그려 전시할 수 있다. 그의 짧은 삶을 안타까워하는 이도, 그의 영원한 젊음을 찬양하는 이도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종이. 그중 한 장에 그려진 그의 모습이 어쩐지 실제의 김수영과 많이 닮아있을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시작(詩作)’이라 하여 직접 시를 지어볼 수도 있다. 김수영 시인의 시와 산문에 자주 쓰이던 단어를 집자하여 시어 막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으로 본인만의 시를 짓는 것이다. 한 구절 지어볼까 했으나 괜한 멋쩍은 마음에 나무막대를 이리저리 옮겨보기만 했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 산문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

 

한쪽에는 낭송실도 마련되어 있다. 터치스크린과 마이크가 있는 현대식 기계에 본인의 목소리로 낭송하고, 그것을 간직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제2전시실에는 그의 육필원고뿐 아니라 지인과 주고받은 서신, 그가 글을 쓰던 탁자 등 그의 생활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을 볼 땐, ‘봐서는 안 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엿보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시 「잠꼬대」 

 

10월 6일
시 「잠꼬대」를 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는데, 현경한테 보이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 여부는 고사하고, 현대문학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거기다가 조지훈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ooooo」. 시집으로 내놓을 때는 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

 

10월 18일
시 「잠꼬대」를 자유문학에서 달란다. 「잠꼬대」라고 제목을 고친 것만 해도 타협인데, 본문의 를 로 하자고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고치기 싫다. 더 이상 타협하기 싫다. 하지만 정 안 되면 할 수 없지. <>부분만 언문으로 바꾸기로 하지. 후일 시집에다가 온전하게 내놓기로 기약하고. 한국의 언론자유? Goddamn이다!

 

이 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표현의 자유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다. 김수영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말대답은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문 「창작 자유의 조건」에서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라고 말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는 김수영이 자신이 쓰고 있는 참여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 시에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온몸의 시학’이 표현되어 있다.

 

아아, 행동에의 계시. 문갑을 닫을 때 뚜껑이 들어맞는 딸각 소리가 그대가 만드는 시속에서 들렸다면 그 작품은 급제한 것이라는 의미의 말을 나는 어느 해외 사화집에서 읽은 일이 있는데, 나의 딸각 소리는 역시 행동에의 계시다. – 산문 「시작 노트2」에서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의 시 「서풍의 노래」 번역을 위한 단어정리 노트

 

그는 생활비를 위해 영어와 일본어로 된 문학을 번역했다.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시작한 번역은 그의 시와 산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번역에 열중했고, 그 작업을 통해 김수영만의 문학 세계를 정밀하게 형성해 나갔다.
능통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였기에, 그는 해외서적도 원서로 읽었다. 그는 현대 영미 시인(예이츠, 오든)과 철학자(하이데거)의 책을 즐겨 읽었다.

 

 

▲왼 위) 지인들로부터 받은 서신 / 오 위) 『엔카운터』지 봉투와 뒷면에 쓴 「사랑의 변주곡」초고
왼 아래) 좌탁, 하루 일과를 적어놓은 노트 / 오 아래) 금연(禁煙) 금주(禁酒) 금다(禁茶) 메모

 

김수영은 『엔카운터』지(문화자유회의의 영국 지부 기관지)를 정기구독했다. 그는 봉투 뒷면을 이용해 메모하거나 시 쓰기를 즐겨 하였고, 일기를 꾸준히 쓰는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하루 일과노트와 일기를 보면 문학과 일상생활 모두에 성실했던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금연(禁煙), 금주(禁酒), 금다(禁茶)도 있었다. 그 옆으로는 ‘합법적인 도적들에게 자진해서 납공을 하지 말아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의 서재는 고풍스러웠다. 의자가 여섯 개 딸린 테이블과 멋스럽게 쓰인 글자, 그의 풍류를 나타내는 듯한 도자기가 있었다. 저렇게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커다란 테이블은 김수영 씨에게 시와 에세이와 번역을 자리를 바꿔가면서 쓸 수 있게 했다.
시를 쓸 때는 동편으로 향해 앉았고,
에세이를 쓸 땐 북쪽으로,
번역인 경우에는 남으로 향해 앉았다고 한다.
– 소설가 최정희

 



제2전시실에는 독서대가 마련되어 있다. 김수영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김수영 관련 서적들과 논문을 열람할 수 있다.

 

▲박일영 씨가 김수영 시인에게 준 초상과 메모, 그 옆으로는 김수영의 생이 담긴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영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하던 길, 그는 집 근처에서 버스에 부딪혀 다음 날 아침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동료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동료 박두진시인이 그를 기리는 조시를 썼다.

 

김수영 형/ 김수영 형/ 지금 우리는 김 형을 마지막 보내고/ 김 형은 우리 앞을 마지막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이 사실/ 김 형과 우리의 이 마지막 고별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김 형도 그러시겠지요/ 너무나 갑자기인 너무나 가혹한/ 너무나 애석하고 아픈 이 충격을/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김 형은/ 우리의 현실의 어떤 난폭한 무질서에 의해/ 강탈을 당했고 이별을/ 고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는/ 김 형을 강제로 빼앗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중략)/ 영복을 누리소서/ 1968년 6월 18일 문우 박두진

 

▲왼) 김수영 문학상 상패(민음사 제정) / 오) 김수영 두상 조각상(1985년 조각가 이해주 제작)

 

김수영 문학상은 1981년 <김수영 전집>이 발간되면서 제정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이 상은 두세 번에 걸친 심사과정을 공개하고 각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발표하는 등 당시의 문학상 심사로는 파격적인 절차를 거쳤다. 이 과정 자체가 치열한 양심의 시인이었던 김수영 시인의 시정신을 이어받았다 하여 후보에 오른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김수영 문학상은 다른 문학상에 비해 상금이 많지 않았으나 젊은 문학인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인상으로 간주되었다.

 

 

문학관을 나오면서 재미있는 원고를 발견했다. 초등학생 6학년이 남긴 것이었다. ‘김수영처럼 집중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 낯설고 엉뚱했다. 어쩌면 훗날, 이 글을 쓴 날을 기억하며 멋진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학관을 나와 해설사 아주머니께서 이야기하신 방학동 은행나무를 찾았다. 그녀는 여기까지 왔으면 꼭 봐야만 하는 나무라고 호들갑스레 말씀했다. 문학관을 왼쪽에 끼고 걷다 보니, 어느새 웅장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이 나무는 서울시 지정 보호수 제1호로,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600년 된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도 있다. 주민들 모두 이 편안한 그늘 터와 신성한 나무를 아끼는 듯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미완성이었지만 끝까지 봄이었다. 그는 반항하는 젊음이었고 양심 있는 청춘이었다. 김수영이 왜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이라 소개되겠는가. 그는 난해하면서도 새로웠고, 엉뚱하면서도 현대적이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시는 계속해서 외치고 있다.
아직 김수영 문학관을 찾는 발걸음이 뜸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시인 김수영의 흔적을 찾아, 끊임없이 그의 시를 노래하기 바란다. 

 

3년 전에 죽은 나의 오빠는 시인이었다. 그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시인이었다. 명색 장손이었건만 끝내 아들노릇도 오빠노릇도, 그리고 지아비나 아버지, 그 어느 구실도 못 하고 그는 오직 시인으로 살다 죽었다. – 김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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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있다.

그는 작품이 써지지 않거나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혹은 저 자신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딜레마에 부딪힐 때마다 거의 발광 상태로 진통을 겪었다. 그런 발작은 먼저 그의 가족을 극단적으로 괴롭히는 일로 나타난다. 그가 평화신문에 있다가 태평양신문 문화부에 옮겼을 때 이봉구 등과 다방 '분홍신'의 마담에 빠져서 서로 라이벌이 된 적도 있지만 그의 연애는 순수할수록 도리어 황량했다. 그의 결혼생활의 잠정적인 파탄, 그리고 연애 따위의 갈등이나 시인으로서의 고민이 1950년대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가족을 해체하는 일로 나타난 것이다.

"노루꼬리 같은 내 피 빨아먹지 마라. 이것들아, 왜 나만 빨아먹느냐."

이런 독설을 새파랗게 질린 가족에게 퍼부어댄 것이다. 날마다 술에 취해서 거의 날마다 욕을 퍼부었다. 그는 그가 탕진한 유산 따위에는 전혀 가책도 가지지 않고 폐허생활의 생계 일부분을 그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그가 통속적으로 구두쇠라는 의미 밖에서 예술가에게 있는 피해의식이나 이기주의가 그런 것으로 솟아난 것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한테도 대들었다. 그렇게 아무도 그를 달랠 수 없다. 다만 그의 첫째 누이 김수명의 말만은 곧잘 들었다. 

"오빠!"라고 한번 부르면 그 '오빠'라는 싱싱하고 이국적인 음성에 의해서 이제까지 발광하던 그가, "응, 내가 왜 이러지?"라고 격정을 가라앉힌다.

오빠라는 대명사는 국어 속에서 분명히 우수한 단어다. 오빠라고 하면 올케라는 말고 함께 청결한 친밀감과 어떤 종류의 세련된 관능까지도 유발한다.

"오빠 밤이 깊어요. 자야지."
"그래, 자야겠다."

그런 일이 있었던 다음 날에는 눈깔사탕 한 봉지나 군고구마 한 아름을 사들고 올 때도 있다. 그의 영훤한 소년 기질이 그럴 경우에 강조된다. 그런 애정을 아직도 풀리지 않은 가족이 거절하면 또다시 가족은 동란을 치러야 한다.아마도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욕을 퍼부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신의 어떤 콤풀렉스를 증오하기 때문에 옥을 퍼붓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찰나로 절망하고 찰나로 발광했다. 그리고 찰나적으로 후회하고 찰나적으로 희열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의 성욕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프로이트 모델케이스의 시인인 것이다. 그는 날마다 파괴되어야 하고 다시 날마다 그 자신이 회복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시시포스적인 감정이 되풀이에 의해서 그 되풀이의 틈에 뮤즈가 혼란 속에서 떨어져나올 때 시를 쓴다.

그런 가족이 그와 함께 폐허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김수명은 구호물자시장에 가서 낡은 밤색 투피스를 사 입고 文化堂에 첫 출근을 했다. 그것이 프리마돈나의 운명 , 그녀 자신의 운명이 개막된 사실은 그녀 자신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 취직되기 전에 그녀는 오빠에게 취직을 부탁했지만 그러나 시인의 요령 없는 처세술은 누이의 취직을 성취시킬 사회적 의지나 기교를 가질 수 없었다. 결국 네 일은 너 혼자서 하는 거야라는 퉁명스러운 말뿐이었다. 그런 말에도 용기를 얻어서 그녀는 그 당시 高大新聞의 기자 모집에 응했다. 약간 명을 뽑는데 응시자는 4500명이었다. 전쟁 직후의 失業社會를 말해준다. 불합격이었다. 그러나 편집국장 吳周煥이 그녀를 특별히 기억했다가 그의 친구가 있는 문화당에 소개한 것이 그녀의 취직이었다. 

그 무렵 문화당의 자매기관으로서 편집실 일부는 현대문학사가 있었다. 조연현 오영수가 있고 김구용이 있다가 나간 뒤 박재삼이 있었다. 任相淳의 미망인 趙衣雪이 있었다. 그 당시의 현대문학은 빚투성이였고 주간 조연현은 그것을 꾸려나가느라고 온갖 굴욕을 견디고 있었다. 수금이 되지 않아 판매의 실적이 없었던 현상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황순원 허윤석 그리고 원응서 들이 거의 날마다 출입했다. 허윤석의 직선적이며 섬세한 김수성, 오영수의 우여곡절의 풍토성 사이에서 황순원의 노한 눈알처럼 영리한 이지가 어울려서 "아따 이것 보래이" "간나새끼 민하구나"따위의 농담이 꽃을 피웠다. 

그들은 김수명을 데리고 곧잘 낚시질의 여가도 보냈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들 중 한 순수작가의 식물성에 이끌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현대문학사의 여사원 조의설이 거액의 공금을 횡령, 도주한 뒤로 김수명이 현대문학사로 옮겼다. 조인현은 조의설사건 때문에 사표를 냈으나 반려되었다. 조연현은 훨씬 전부터 김수명을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문화당 간부에게 졸라댔지만 정작 늦게 그 부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부터 현대문학사는 경리가 안정되고...
...

 


 

2013년 11월 27일, 도봉구 방학3동에 <김수영 문학관>이 그의 생일날에 맞춰 개관. 사후 45년 만에 눈 내리는 시인의 생일날.

 

 

 

 

 

 

김 시인 동생인 김수명씨(사진 왼쪽)는  당시 [현대문학]의 편집장으로 많은  문인들에게 "한국의 잉그리트 버그만"으로 통했답니다.

 

 

 

저의 국민대학교 대학원 문창과 스승이신 윤후명 시인, 강민 시인, 천양희 시인 등등 유명 시인의 모습이 대거 보입니다전관 4층의 김수영문학관은 1층과 2층은 시인의 전시 공간으로, 3층은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꾸몄고, 4층은 시인을 추모하는 각종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강당이 마련됐습니다. 시인 김남조, 문학평론가 유종호 등 당시 지인들이 보낸 편지와 시 179편, 산문 123편, 번역 43편 등과 박두진 시인이 친필로 쓴 추모시도 함께 전시됐습니다.

 

 

 

 

 

 

 

김수영 선생님의 유품이 정리돼 있는 공간에서 김수영시인이 직접 쓴 '풀' 육필 원고와 일기장, 탁자와 스탠드 등. 도봉구 방학동 주민인 김수영 시인의 여동생인 김수명씨는 오빠의 유품 전체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김수영 부인 김현경
 

인물에 대한 회고담은 당대성과 맞물려서 최대한 객관화된 언술을 펼치지만, 살아남은 자의 입장에서 그 숙제를 떠안고 애도를 완성하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든가, 죽었지만 여전히 유효하고 계속해서 유효할 영원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 수밖에는 없다. 숙제를 떠안고 애도를 완성하려면 인물을 직시해야 하고, 영원성을 부여하려면 인물을 신화화해야 한다. 직시를 통해선 남겨진 자의 극복할 몫이 전수되고 신화화를 통해서는 남겨진 자의 의지처가 확보된다.
 

 


나는 이 두 가지 중에서 숙제를 떠안는 방식을 좋아한다. 숙제는 출구와 같다. 사방이 자물쇠로 꼭꼭 잠겨 있는 듯한 이 현실에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인물이 신화화되는 것을 좋아하지 못한다. 신화화된 인물은 숭배되기 마련이고, 그 어떤 위대한 인물도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어떤 스승에 대해서도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싶어서다. 

 


인물에 대한 회고담이 우리에게 왜 필요할까. 작고한 인물을 다시금 불러내어 그에 대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서다. 왜 다시 생각해야 할까.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를 다른 거울로 비추어 보고 반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반성 이후에 오롯이 남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숙제를 풀기 위해서다. 그러나 숙제를 푸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어떠한 역할에 대한 향수를 지나치게 갈구하곤 한다. 우상을 만들고 적도 만들고 자꾸만 제대로 살았을 것만 같은 시대를 재현하고 싶어해한다. 그런 욕망이 회고담을 제공하거나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은 우상이 될 수 없다. 단지 우상으로 덧칠된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이 덧칠 중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라 하는 부분은 어쩌면, 우리의 우상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순간일지 모르겠다. 우상이되 평범한 우리와 닮은 구석이 있는 우상. 인간적인 우상. 우상 숭배의 가장 편안한 방식이다.
 

 

 

▲ <김수영의 연인>(김현경 지음, 책읽는오두막 펴냄). ⓒ책읽는오두막
 

시인 김수영의 미망인 김현경 여사가 쓴 <김수영의 연인>(책읽는오두막 펴냄)을 읽었다. 김수영의 작품을 자주 꺼내 읽는 나에게 이 책은 김수영의 사적 영역에 초대되는 즐거움을 주었다. 그의 키가 178센티미터였다는 것도 알았고, 그가 어떤 옷을 즐겨 입었는지도 알았고, 그의 집필 습관과 집필 공간도 엿보았다. 1년에 12~13편 정도의 작품을 썼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가 비교적 살 만해졌을 때에 교통사고를 당해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살만해졌을 때에 쓰인 시가 '풀'이라는 사실을 알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문학적 태도와 생활의 태도 사이에서 절룩이며 지침과 부침에 시달리는 나 같은 소심한 시인에겐 그 역시 지침과 부침에 시달렸고, 그의 아내도 그로 인해 지침과 부침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 사연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그게 위안이 되었다기보다는 길고 긴 한숨이 나왔고, 설움(김수영의 전문 용어)이 밀려왔다. 그 설움은 김수영 식 독기를 수반한 것이어서 좋았다. 자기모순을 노려보다 한 차례 허물어진 뒤 찾아오는 독기어린 의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고 김수영은 말했다. 이 책의 2장에 소개된 김수영의 한 편 시와 그 시가 쓰인 경위를 따라가자니, 시인이 지향하는 문학적 환경과 시인이 몸담고 있는 시대적 환경과 시인이 꾸려가야 할 생활의 환경, 이 세 가지 현실 모두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독한 시를 썼던 듯 싶어진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시대와 싸울 겨를이 없을 만치 치열하게 자기와 싸우는 것으로 시대와 싸우는 시인. 이 책을 다 읽고 나자 내게 요약된 김수영의 초상이다. 

 


인물에 관한 회고담이 추억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과 인물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뉠 수 있다면 이 책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에 가깝다. 글의 흐름과 구성 방식은 인물의 사적 영역을 보완해서 인물을 완성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필자가 자신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문장을 풀어나가고 있는 걸 목격하게 된다. 연인에 의해 재구성된 회고담이라 두 사람 간의 사랑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고, 특히 김수영의 사랑보다는 김수영이 어떤 여인을 사랑했는지, 연인에게 시인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가 더 비중이 크다.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나니, 이미 신화화된 김수영이 좀 작아진 느낌이 든다. 회고록이 신화화된 한 인물의 인간미를 지향해서 좋았지만, 그게 이 책의 집필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여서 미묘한 모순이 독후감으로 내게 남았다. 이 모순은 어쩌면 사랑의 모순이자 시인을 사랑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지 않을까. 더군다나 속물됨과 성(인군)자 사이에서 자기모순을 앓던 염결한 김수영이었으니까. 

 


김수영은 소위 "불침번의 세계"(고은의 발문에서)에서 생을 연소한 시인이다. 그런 그가 연인은 어떻게 사랑하였을까. 그의 시에서는 물론 이에 대해서마저도 불침번이었다. '성', '죄와 벌' 같은 시에선 잔인하거나 우스꽝스러울 만큼 불침번이었다. 김수영의 연인의 사랑은 그 반대에 가깝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렇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도, 그의 생활에 대해서도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모든 멍에를 짊어진 사람처럼. 눈먼 사랑처럼. 한 사람은 불침번을 서듯 시를 썼고, 한 사람은 불침번을 서듯 사랑을 다했다. 시인은 사랑에 대해서도 불침번을 서듯 했고, 시인의 연인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듯 살았다. 

 


<김수영의 연인>은 김수영의 신화화를 완결 짓기 위한 출발을 했는가 싶었지만, 신화화에 실패한 느낌이 든다. 김수영의 인간미를 보태기 위한 많은 구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자신을 혹독히 까발리듯 써놓은 시들 덕분이었다. 덕분이라는 표현은 이 실패가 좋았다는 의미다. 회고록이 자주 지향하는 신화화는 내가 김수영에게서 배운 시정신과 반대 방향에 있으니까. 어쩌면 김수영은 훗날 자신의 일대기가 미화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그런 시들을, 그 적확하고 신랄한 언어로 써놓은 것은 아닐까. 

 


추억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억은 완성될 리 없다. 기억은 언제나 제멋대로이고 자기증식을 일삼으며, 그래서 부실해지기 일쑤다. 추억을 완성하려 할 때 기억의 왜곡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이다".** 불가능한 완성을 불가피하게 애쓸 때, 불가능한 완성을 더 아름답게 추억하려 애쓸 때 삶은 더 아름답게 지탱된다. 시대의 모순과 시인의 모순과 사랑의 모순, 그 모든 모순을 애써 껴안는 불가능의 체험은 김수영의 아내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 중요하진 않지만, 필자가 정지용 시인을 만난 대목과 칼(KAL)기 납북 사건을 기술한 부분은 연대기가 좀 맞지 않는다.
** 르네 샤르, 소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패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세계사 펴냄)에서 재인용했다. -필자 주)

 

김소연 시인

 

 

 

김수영시인님의 육필원고

 

 

 

 

 

김수영시인님 가족사진

 

 

 

 

 

 

 

회 고

  • 김수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 시인 김현승

  • 그러나 우리는 기려 기억할 것입니다.
    한 시대를 바르고 진실하게, 순정하고 양심의 지시대로 살아보려던 김형의 예리한 지성, 성실한 행동력,
    참다운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그 찬연한 업적을 우리들의 우정과 우리의 문학사는 길이 기억하고 전승할 것입니다.

    - 시인 박두진

  • 그가 어느 날 대폿집에서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신형, 사실 말이지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 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
    그러나 그의 커다란, 사슴보다도 천 배, 만 배 순하디 순한 눈동자를 기계문명의 부속품들은 궁지로 몰아넣으려했다.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민족시인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민족의 알갱이들은 다 알고 있다.

    - 시인 신동엽

  • 이윽고 양주동 선생의 소개를 받고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시인이 걸어 나왔다.
    검은 싱글에 후리후리한 키의 그는 약간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듯이 보이는 피부에 검고 깊던 두 눈,
    시를 낭독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할 만큼 그가 내게 준 인상은 깊었다.
    그가 바로 김수영이었던 것이다.

    - 시인 김   철

평 론

  • 김수영의 시는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탐구적이고 가장 준열하고 우상 파괴적이며 가장 유연한 시적 양심이었다.
    김수영은 탕진됨을 모르는 가능성이자 안타까운 미완성이었다.

    - 문학평론가 유종호

  • 그럴듯한 언사를 농함으로써 시 자체와의 만남을 회피하고 심지어 시를 죽이기까지 하는 작태는
    오늘날 그 어느 때 못지않게 극성스럽다.
    혹은 ‘민중시’ 혹은 ‘순수시’에 관한 논의들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름이 붙는 작품들 자체에도
    그러한 혐의를 걸게 되는 일이 흔하다. 김수영의 살아있음을 올바로 증언하는 산 자의 책무가 막중해진다.
    그것은 김수영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삶답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부인 것이다.

    - 문학평론가 백낙청

  • 김수영의 생애는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 시대에 있어서의 예술가의 의미를 밝혀준다.
    그는 예술가의 양심을 넘어서 인간의 양심을, 예술가의 자유를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였다.
    그의 자유로운 언어는 사실이나 감정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의 언어이고
    자신의 모든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의식을 포착하려는 데서 나온다.
    그는 시에 있어서 무엇보다 거짓을 미워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워했던 것은 감정이나 태도의 거짓 꾸밈이었다.
    그에게는 일체의 정립된 언어, 고정된 언어는 부정직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으로서의 시의 언어의 이상은 완전히 정직한 언어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예술가적 양심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유로운 언어는 사실이나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정직한 언어이고 그러한 언어는 비판적 언어였다.
    이 비판은 자기비판을 포함하여 언어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위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언어는 언어행위 한가운데에 스스로의 행위를 살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밀착되어 있으며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앞지르는 언어가 된다. 비판적 각성이 언어의 자기몰입과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문학평론가 김우창

  • 김수영은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다.
    이 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 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시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이 넓어지면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 문학평론가 황현산

  • 김수영의 시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인간 상실로부터의 인간 회복이 시인의 임무’임을 말했을 때,
    요컨대 그는 인간을 가난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노력 속에서 시작의 본질을 보았고,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죽음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중대한 결론이 사랑이며
    이 사랑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

    - 문학평론가 김종철

  • 김수영은 해방 후 한국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그에게 시는 일상에서 벗어난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양심의 산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사소한 개인의 일상에서부터 정치 현실까지 다양한 소재가 그의 시에서 새로운 표현을 얻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어였고 특유의 반복기법으로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어내었다.
    난해하면서도 새롭고, 엉뚱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한 그의 시는 1960년대 이후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한국인이 처한 서러운 현실을 고스란히 껴안은 김수영의 시는 자유와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다.
    그는 자유가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였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으로서의 자유였다.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으려는 양심과 세상을 바로 보려는 그의 정직은
    비속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 비속어를 사용했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직설적인 문장을 사용했다.
    그의 시 쓰기는 사랑의 작업이었고 자신의 시가 세계사의 전진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내가 움직일 때, 세계는 같이 움직인다. 이것이 김수영이 희망한 시의 영광이자 기쁨이었다.

    - 문학평론가 이영준

 

 

 

 

 

 

* 참고 사진

 

1. 본가 원형 사진 :

 

 

2. 본가 입구 사진

 

 

3. 시비와 묘소 원형 사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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