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원문] 김수영 시와 산문
“이승만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하라”
⊙ 변한 것은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의 결핍
⊙ 어용시인·아부시인들은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자격을 상실한 자들
⊙ 1960년 4·19, 4·26사태를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인의 자격이 없어
[편집자 註]
시는 김수영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실었다. 다만 시어는 표준어규정에 따랐다. 산문은 원문을 충실히 유지하되 한글맞춤법을 따랐으며 한문으로 된 단어를 국한문체로 옮겨 썼다.
(자료 제공=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씨)
한강변
관광도로가 곧 생긴다고 벌써 부터
땅값이 들먹거리는
얼음 창고 자리 옆의 큰 나무 선
낭떠러지는 현기증이 나서 안된다.
盧(노)씨 지붕이 보이는
왕년의 미두왕 조준호 네 땅이라나 하는
전나무가 선 골짜기가 좋은데
명동의 ‘은성’ 마담과 그의 일당들이
이사를 왔고 유현목감독의 장인 되는
분이 二百평 가량 땅을 사 놓았고
이대 음악과를 나온 서울시장의
조카딸 되는 미인이 그
부근에 살고
있는 것을 안지 부터는
그쪽도 가지 않게 된다.
四, 五年 전 까지 일본 사람들이 만든
못 쓰게 된 風雨計(풍우계)가 섰던
붉은 벽돌의 얼음창고 서쪽의
시멘트로 된 얼음창고 두동은
그러고 보니 그 동안에 상당히 역사가 바뀌었다.
영화촬영소를 하다가 납공장이 됐다가
지금은 캐비닛 공장
그 옆의 바라크집은 걸레 만드는 공장
福(복)자와 禧(희)자를 그린 캐비닛이
트럭이나 구루마에 실려 갯벌 길옆을 돌아 나오고
古鐵 부스러기를 실은 트럭이
또 그 갯벌 옆길을
돌아 들어 간다.
관광도로는 이 공장 앞마당을 자르고
風雨計가 선 벽돌 탑을 부수고
나갈 모양이다.
잘 됐다.
第二漢江橋(제이한강교)를 지나서 앞으로 運河(운하)가 생기면
汽船(기선)이 정박할 예정이라는
蘭芝島(난지도)까지 뻗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밤섬에서는
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와서
동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는
밤섬의 이 신기로운 여름 열매.
(출처=《女像》 1965년 8월)
아침의 誘惑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山林과 時間이 오는 것이다
서울驛(역)에는 花環(화환)이 처음 生기고
나는 秋收(추수)하고 돌아오는 伯父(백부)를 期待(기대)렸다
그때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무지한 坑夫(갱부)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것은 千字文이 되는 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스푼과 성냥을 들고 炭鑛(탄광)에서 나는 나왔다
물 속 모래알처럼 -
素朴(소박)한 習性(습성)은 나의 아내의 밑소리부터 始作(시작)되었다
어느 敎科書(교과서)에도 嫉妬(질투)의 感激(감격)은 무수하다
먼 時間을 두고 물속을 흘러온 흰모래처럼 그들은 온다
U.N委員團(위원단)이 每日(매일)오는 것이다
花環(화환)이 花瓣(화판)이 서울驛에서 날아온다
모자 쓴 靑年이여 誘惑(유혹)이여
아침의 誘惑이여
(출처=《自由新聞》 1949년 4월 1일)
[편집자註-2003년 민음사판 <아침의 유혹>에는 8행의 ‘탄광’을 ‘여관’으로 표기했다. 또 11행 ‘감격’을 ‘○○’라고 쓴 뒤 주석을 달아 ‘판독할 수 없어 복자(覆字)로 처리했다’고 밝혔다. 14행 ‘화환이 화판이’를 ‘화환이 화환이’라고 오독(誤讀)했다. ‘화판’은 ‘꽃잎’을 뜻하는 말이다.]
內室에 감금된 愛慾의 탄식
-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
남존여비의 철학
대체로 한국 하급 사회의 부인들은 교육도 없고 취미도 없고 교양도 없고, 일본의 하류부인의 단정한 품과 중국 농가 부인들의 친절한 맛에 비해서 너무나 비교가 안 되고, 입고 있는 옷은 때가 새까맣게 절어서 흰 옷인지 까만 옷인지 분간이 안 가고 세상에 태어나서, 남의 아내가 되면 자기의 옷은 개의치 않고 다만 남편의 옷만 빨게 마련인지, 어떤 개울엔 가 보아도 천을 물에 담가서 널찍한 돌 위에 펼쳐 놓고 빨랫방망이를 양손으로 번갈아 휘두르면서 불이 나게 두들기고 있는 여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렇게 마구 두들긴 천은 물에 헹궈서 모래 방죽에다 말리는데 정성껏 두들긴 보람이 있어 볕을 받은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희고 윤이 난다.
여름옷은 그대로 참을 수도 있지만, 춘추복의 바지저고리 같은 것은 솜을 넣은 것을 뺄 때마다 뜯어서 빼어 빨고 나서 또 넣고 꿰매야 하니 여자의 일생은 실로 뼈저린 고행(苦行)인 것이다.
농촌의 아내들은 온 식구들의 옷 바라지를 하는 것 이외에 부엌 안 일체를 한다. 쌀 빻기, 키질, 물 긷기도 아내의 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내의 일, 절구질을 하고 물동이를 이고 먼 곳에 있는 우물에까지 다니는 것도 아내들이 도맡아 하는 일이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고, 밤에는 제일 늦게 잠자리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피로한 손으로 밤에는 바느질을 하고, 실을 꼬고 베를 짜는 것도 아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할 일, 그 밖에 적지 않은 아이 어미가 되면 쉴 때도 일을 할 때에도 세 살이 되기까지는 노상 등에 업고 다녀야 하는 비참한 꼴이라니, 농부의 아내가 되어서 무슨 낙이 있고 무슨 즐거움이 있는지 도시 모를 일이다. 몇 년이 지나서 며느리를 보게 되기까지는 이 고통은 도저히 면할 길이 없다. 불쌍하게도 그들은 서른만 되어도 벌써 쉰 살이나 되어 보이는 노상(老相)을 하고, 마흔이면 이가 다 빠지고 할머니 소리를 듣는다. 사랑에 취하는 젊음이 언제 있었는지, 청춘의 방황은 그들에게서는 찾아볼 길이 없고, 나날이 지옥 같은 시집살이어니, 마음에 위안을 주는 신랑은 그저 귀신을 섬기는 일 정도다.
상류로 갈수록 여자는 격리되어서 절대로 세상과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부인은 집에 있어서, 내실이라는 방안에 처박혀서 남자의 방을 향해 창문도 열어 놓지 못하게 되어 있고, 방문자는 몇 번을 찾아가도 내실이 어디인지 추측도 할 수가 없다. 부인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된다. 정중한 유폐리(幽閉裡)에 있는 부인은 물론 교육도 없고, 교양도 없다. 그저 저속한 생물(生物)로서 취급되고 있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는가. 다만 오래된 관습으로 여자에 대해서 존경을 강요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배우고 수양하는 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가리키는 천박한 철학, 간단한 역사 그 밖의 다소의 문학뿐이다.
다만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한 팔자 때문에 성년이 되면 이유 없이 여자의 존경은 일층 더 두터워진다.
여성은 안방 재산
부인의 격리유폐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습관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조(李朝) 초기에 사회의 도의(道義)가 퇴색하고 음비(淫卑)의 풍조가 성한 시대에 시작된 것 같다. 그 후 5백년 동안을 면면히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기원은 남편이 그의 아내의 소행(素行)을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의 친구를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서울의 부패는 특히 상류계급의 문란한 기풍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남편이 그의 아내를 감추고 딸을 감추고, 타락한 남성에게 근접하는 것을 꺼려하고, 미천한 상년이 아니면 문밖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어느 틈에 풍속화되어서 법률 이상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의 외출은 사람 눈을 피해서 밤에만 하게 하고, 낮에 나갈 때에는 밀폐된 가마나 조군을 타고, 그런 것에 타지 않는 것은 미천한 노동자의 계집뿐이다.
언젠가 민비(閔妃)가 배알(拜謁)했을 때 전하(殿下)는 “나는 서울 거리를 나가 본 일이 없다우. 그 밖의 곳은 더 말할 것두 없구” 하고 말씀하셨다.
<일부러 그랬든 과실로 그랬든 간에 적어도 남자가 여자의 몸에 손을 대면 큰일 난다. (어떤 책에서 본 것인데)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의 딸을 죽이고, 남편이 그의 아내를 죽이고, 혹은 아내나 딸들이 스스로 자살을 했다. 그러나 그런 희생쯤은 예사로 생각한다. 최근의 일이다. 어떤 한 귀부인이 불에 타 죽었다. 그것을 보고 위급한 경우라 어떤 한 사나이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부인을 껴안았다. 그러나 남녀가 서로 몸을 대는 것은 관습상 일체 용납되지 않는 터이라, 이 경우에 있어서도 남자는 여자를 구명(救命)해서는 아니 되고 사나이는 이 법도를 어긴 것이 되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이 시녀의 불찰이었다고 해서 시녀가 벌을 받았다. 법률이 내실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사실이며, 모반죄(謀反罪)에 걸리지 않는 한, 남편은 아내의 방으로 피신만 하면 관헌의 손을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집의 지붕을 수선할 때에는 먼저 옆의 집에 가서
“오늘은 지붕에 올라갑니다. 어쩌다 댁의 부인이나 따님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하고 인사를 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결혼하기까지는 아버지와 형제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남자와 얼굴을 대해서는 아니 된다. 결혼 후에도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은 남편과 남편의 근친에 한해서이다. 아무리 친한 상(常) 사람이라도 당당하게 사람들이 있는 곳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나는 오랜 시일의 여행 중에 6세 이상의 계집아이의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 세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처녀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나라이다. 그렇다고 여자는 이런 사회의 조직을 원망도 하지 않고, 자유를 동경하고 있지도 않다. 수백 년 내의 유거생활(幽居生活)은 여자의 자유정신을 마멸(磨滅)시켜 버렸다. 오히려 여자는 가정의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정중(鄭重)하게 저장(貯藏)되고 있는 것이라고쯤 여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은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 여자의 《한국(韓國)과 그 인방(隣邦)》이라는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저자는 1893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전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외국 여자로서는 최초의 방대한 한국 기행문을 남겨 놓았는데 어떤 대목은 우리들이 뻔히 다 알고 있는 일이면서도 포복절도할 지경의 재미있는 데가 많다.
“한국여성의 비극적인 애욕상(愛慾相)”에 대해서 쓰라는 청을 받고 보니 나는 우선 위에 인용한 구절들이 생각이 나서 좀 길지만 구태여 인용해 보았다. 사실 나보고 쓰라면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의 생활에 대한 이처럼 간명한 조감도(鳥瞰圖)를 쓸 자신이 없다. 내 얼굴은 내가 모른다. 또 못난 얼굴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저 억지로 남이 본 내 얼굴을 꾸어온 셈이다.
性보다 돈을 숭배
지금 이런 글을 읽고 과거를 회상해 보면 끔찍끔찍하게 변한 점도 많지만 끔찍끔찍 변하지 않은 점도 많다. 변한 것은 노출된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데이트, 트위스트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個性)의 결핍이다.
아직도 신문 4면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는 성의 개방 같은 문제도 여자의 개성의 자각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볼 때, 정말 연애의 감정이 솟아나올 만한 여자가 없다. 판에 박은 듯한 양장, 하이힐에 핸드백은 정말 구역질이 난다. 여자가 보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 저녁에 백 원에 몸을 파는 종삼네 집 골방에도 핸드백만은 계절에 맞추어서 4, 5개가 걸려 있다.
봉건의 노예이던 여자는 지금 금전으로 그 상전이 탈을 바꾸어 있을 뿐 상전은 여전히 상전대로 엄존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불란서까지 갔다 온 멋쟁이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는 걸핏하면 “돈은 돈이고, 섹스는 섹스이지요” 하면서 돈 있는 늙은이하고 살면서, 가끔 오입을 하기도 하는 자신을 자못 현대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것이 현대적이라고 보기가 좀 수상한 것은, 그 늙은 남편이 이름난 부자인데도 그 여자는 그보다 더 부자인 어떤 가정의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여복(女福)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나의 주위에서 보는 여자들은 돈 있는 여자나 돈 없는 여자나 모두가 돈의 귀신들뿐이다. 세계의 조류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면 그뿐이겠지만, 한국의 젊은 현대여성들은 성(性)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돈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중류 이상의 교양 있는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들의 성 생활을-나아가서는 애정생활을 마멸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암(癌)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다. 섹슈얼한 할리우드식 영화. 그것을 본뜬 무수한 국산영화들. 이것을 보고 온 둘의 잠자리에서 실제로 재현해 보고 싶은 유혹도 생기겠지만 잘 안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골 여자들이 좀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서울에 가고 싶은 생각에 눈물을 짜고 고민을 하고 있는 한 행복하지는 않다.
순천인가에 가서 오입을 해 본 일이 있는데, 서울로 치면 종삼네 집 여자들이, 손님방에 들어올 때면 다소곳이 반절을 하고 들어오는 것은 퍽 좋게 보였다.
(출처=《女像》 1964년 10월호)
책형대에 걸린 詩
- 인간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4·26(1960년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편집자註) 전까지의 나의 작품 생활을 더듬어 볼 때 시(詩)는 어떻게 어벌쩡하게 써왔지만 산문(散文)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감히 써 볼 생각조차도 먹어 보지를 못했다.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쥬(camouflage, 위장·은폐-편집자註)’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自由)뿐이 아니다. 태도(態度)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6·25 때에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이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文學團體)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感情)의 자유 역시 그렇다.
이를 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不快)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하여서는 아니 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作品)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咀呪)가 아니면 비명(悲鳴)이 아니면 죽음의 시(詩)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앞으로 이에 대한 복수(復讐)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요사이는 시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 4·26이 전취(戰取)한 자유는 나의 두 손 아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정말 이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지난날의 낡은 시단(詩壇)의 과오(過誤)나 폐습(弊習)을 나는 여기서 재삼(再三) 뇌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듯 숨 막힐 듯한 괴로운 시대 속에서 과감하게 자기의 세계를 지켜 가면서 싸워 온 시인이 현(現) 시단(詩壇)의 기성인(旣成人) 중에서도 몇 사람은 있다는 것을 나는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나라의 시단이고 진짜 시인보다는 가짜 시인이 훨씬 더 많은 법이고, 요즈음 세간(世間)의 여론(輿論)의 규탄을 받고 있는 소위 어용시인(御用詩人)이나 아부시인(阿附詩人)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서는 완전히 자격을 상실한 자들뿐이다.(아니 애당초 시인이 되어 보지도 못한 자들뿐이다.) 그러니까 그까짓 것은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4·26 이전의 우리나라의 시단의 작품들이 대체로 낡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시로서 합격된 작물(作物) 중에 특히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제작(製作)상의 모험적 기도를 용납할 수 있는 시대적 혹은 사회적 여백(餘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고민을 처절히 체득한 시인이라면 4·26은 그에게 황금(黃金)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시인들만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4·26의 역사적 분수령을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넘어온 기성시인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새 시대의 선수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는지는 확언하기 힘든다.
‘책임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서구의 고언(古言)이 있는데 이 말은 4·26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출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이 필히 느꼈어야 할 기본인식이다. 이 인식의 감득(感得)이 없이는 새 시대의 출발은 불가능하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다. 이제야말로 꿈을 가지라.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이와 같은 꿈은 여직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태도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를 투박하게 요구한다. 여기에 과실즙이나 솥뚜껑 위에 어린 밥풀 같은, 달콤하고도 거룩한 시인의 책임이 있다. 시인들이여! 새로운 시인들이여! 이제야말로 인간 해방의 경종(警鐘)을 울려라.
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趙芝薰)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 나라는 구원(救援)을 받지 못한다’고 ‘휘트먼’인가의 말을 차용(借用)하여 가면서 기염(氣焰)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윤돈(倫敦·런던-편집자註)에 있는 박태진(朴泰鎭)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물(한) 시(詩)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 구제(救濟)가 없겠지요’라는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傳播)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면 반드시 시작품(詩作品)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把握)하고 통찰(洞察)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資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某)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장 다 봤어. 그런 폭도(暴徒)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校監)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李承晩)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道峰山)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
(출처=《京鄕新聞》 1960년 5월 20일)
[편집자註-책형대(?刑臺)는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
무더운 날은 신경질이 더 나는 법이다. 밤잠이 부족하거나 하여 머리가 휴지통같이 뒤숭숭한 아침이면 사랑에 대한 갈망이 불안한 마음과 엉키어 온 가슴을 서로 잡는다.
S는 아담하고 정숙한 여자이었다. 나의 모―든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불안도 그의 앞에서는 태양 앞에 자취를 감추는 무수한 군성(群星)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그가 알게 된 것은 해운대 넓은 바닷물 속에서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영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때 S도 여학생들을 인솔하여 온 부산 모 여학교 간호원이었다. S가 인솔하여 온 여학생들 중에서 자개바람을 일으키고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한 것을 내가 데리고 간 학생 중의 제일 수영을 잘하는, 반에서도 제일 키가 크고 말썽도 제일 잘 부리는 학생이 구하여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와 S는 그 후 일요일이고 토요일이고 서로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번번이 바다에서 만났으며 ‘우끼(튜브-편집자註)’를 타고 될 수 있는 대로 물빛이 짙은, 뭇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까지 가서는 사랑이 통하는 이성(異性)에게만 신(神)이 용납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웃음을 웃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천천히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놀았다.
바다에다 모―든 몸과 마음의 피곤을 씻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을 넘어 집을 향하여 돌아갈 때면 S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나왔다.
S에게는 여자다운 원한이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간호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교의 교만한 여교원들 틈에 끼어서 자기 직업의 열등성(劣等性)을 그는 나에게 종종 하소연하였다.
“단 한 사람을 못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해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남편을 가리키는 이야기인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도 나는 재우쳐 그의 가정 내막을 물어보기를 사양하였다.
나도 처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S의 노골적인 정열(情熱)은 눈앞에 숨 가쁘게 느끼고 있는 나에게 S가 남편과 아이를 가진 여자라고는 설마 믿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S는 나에게 도리어 이러한 아픈 질문을 하고 놀리었다.
“빨리 사모님 모시고 와서 같이 사세요. 젊은 부부가 아무리 피난생활이라 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아요.”
하는 S의 말에,
“나는 당신만 있으면 그만이오.”
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우리들의 사랑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대포알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깊어만 갔다.
“개자식!” 이런 욕인지 애교인지 알 수 없는 S의 말을 나는 너그러운 미소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입술 한번 훔쳐 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S는 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많은 S의 나이와 지혜가 저 허허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 위에 깜박거리는 아침의 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S는 나를 완전히 자기의 사랑의 포로(捕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여름도 가고 구월 초승 어느 날 밤 나는 환도를 앞두고 비로소 S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인사하세요. 앞으로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친해 주세요.”
하고 S는 방 한구석에 앉은 몸집이 큰 남자를 나에게 소개하였다. 이것이 S의 남편이었다. 그 이외에 S에게는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있었다.
“내년에 중학교 시험을 보아야겠는데 어떻게 될지 근심이에요.”
하고 S는 돌아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나도 미소로 대답하였다.
S와 S의 남편인 검고 무트듬한 건축기사라는 사나이와 눈이 큰 딸아이와 나는 한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극도의 흥분과 당황과 비분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의 남편이 맹인(盲人)이라는 놀라운 비극을 밥상을 받기 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끌어 가리켜 주는 대로 눈이 먼 건축기사는 묵묵히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만화를 번역해 주셔서 아이들이 여간 좋아하며 읽지 않습니다. 자주 놀러 오십시오.”
하고 이 맹인은 나에게 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S가 자기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만화를 번역해 달라는 것을 틈이 있는 대로 정성껏 번역하여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환도 후 학교의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기자생활을 하게 된 나는 S의 아름다운 이름을 나의 ‘팬 네임’으로 즐겨 쓰고 있다. S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잃어버린 해운대의 넓은 바다가 생각이 나고, S의 어디인지 ‘모나리자’를 닮은 가냘픈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머리 위에 떠오르고, 그보다도 토건사고로 실명을 하고 아내가 벌어다 주는 것으로 답답한 삶을 하고 있는 가련한 건축기사의 일이 몹시 가슴에 사무친다.
그리고 아예 S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출처=《新太陽》 1954년 8月號)
[발굴] <풀>의 시인 김수영의 시와 산문
반세기 만에 빛을 본 번뜩이는 시와 산문
⊙ 1964년 여성잡지 《女像》 8월호에 시 <한강변> 실어
⊙ 사후 44년이 지나도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 읽을 수 있어
반시(反詩)의 시인, 타협하지 못했던 직선(直線)의 산문가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시와 산문이 세상에 나왔다.
《월간조선》 8월호와 9월호에 걸쳐 공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김수영 전집》(민음사刊)에서 빠진 것으로 시와 산문, 번역문, 시월평을 망라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의 극(劇)”(유종호)이란 표현처럼,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이 타계한 지 44년이 지났으나 지금의 시각에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먼저, 시 <한강변>은 1965년 8월호 여성잡지 《여상(女像)》에 게재됐다. 모래섬에 불과하던 여의도에 개발바람이 일던 1960대 중반의 어수선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여의도의 땅을 돋우기 위해 인근 밤섬을 폭파하기 직전의 이야기다. 시인은 ‘아직도 밤섬에서는/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이라며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그 어조는 무척 쓸쓸하다.
또 1949년 4월 1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에 게재됐던 시 <아침의 유혹(誘惑)>의 시어(詩語)를 일부 복원해 《월간조선》에 다시 싣는다. 그동안 마이크로필름 보관상태가 나빠 의미전달이 불가능했던 오탈자(誤脫字)를 바로잡은 것이다.
直線의 산문가
김수명 선생과 김수영(오른쪽).
1964년 《여상》 10월호에 실린 산문 <내실에 감금된 애욕의 탄식>은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이란 어깨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은 ‘남자가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느냐’고 반문하면서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돈의 귀신’이라고 비꼰다. 직설적이며 타협하거나 비켜 가지 않는 ‘직선의 산문가’다운 표현이다.
1960년 4·19와 4·26(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일) 이후인 5월 20일자 《경향신문》 4면에 실린 〈책형대에 걸린 시(詩)>는 김수영의 날카로운 산문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책형대(?刑臺)란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시인은 ‘…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詩)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고 선언한다. 시대에 편승하거나 권력에 기대는 작가들을 ‘아부시인’, ‘어용시인’으로 규정하며 시인 휘트먼의 말을 빌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 이 나라를 구원받지 못한다’고 썼다.
성인취향의 잡지 《신태양》의 1954년 8월호에 실린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는 에피소드 형식의 콩트, 혹은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다. 실화인지 가공의 얘기인지 헷갈린다. 작품을 발표한 1954년은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부산·대구 등지에서 통역관, 선린상고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실제로 이 작품 속의 ‘나’는 학교 선생이다.
누이 김수명이 오빠의 작품을 널리 알려
김수영시비 앞에 선 김수명 선생.
김수영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준(儁)은 1983년 4월 사망했고, 둘째 우(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1년과 2003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을 펴낼 때, 누이동생 김수명(金洙鳴·78)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문학》 편집장 출신의 수명씨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빠의 작품을 찾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월간조선》의 발굴에 대해 그는 “평생을 오빠의 작품을 찾고 다듬는 일을 해 왔는데, 아직도 작품이 남아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한국문단에서는 ‘동생 김수명이 없다면 김수영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누이는 오빠의 시가 세상의 조명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빠가 생전에 선별해 준비해 두었던 작품들을 한 자, 한 획 다치지 않고 살려서 1981년 출간한 전집에 묶을 수 있었지요. 또 1981년판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누락·발굴 작품도 보완해 2003년 한글판으로 새 전집을 펴냈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전집을 준비 중인데 새로운 작품을 찾게 됐으니 기뻐요.”
그는 “시인 김수영이 한국시단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 시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오빠는 언어를 통해 자유를 읊었고, 또 자유를 살았다”고 회고했다.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자나 평론가의 오독(誤讀)은 없었을까. 김수명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엔 좁은 소견으로 많이 속 끓이기도 하고, 안타까워한 적도 있어요. ‘왜 그 깊은 뜻을 알려 하지 않고 껍질만 보나’고요. 이젠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이상, 모든 것은 독자의 몫이요 평론가의 몫이라고요.”
김수영과 도봉산
김수영 조카 김민.
시인 김수영은 도봉산에 본가가 있었고 선영도 그곳에 있었다. 김수명씨는 “수복 후 도봉산 텃골 선영에 생활터전을 삼게 됐다”며 “그곳에서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길렀다”고 했다.
“이후 오빠 묘도 그곳(도봉산)에 썼다가 1994년 폐묘하게 되어 조상 유해와 함께 화장을 해 모셨습니다. 1998년 우리 가족은 그곳을 떠났지요. 제가 그곳에서 20대에서 60대까지 살았으니 오빠 생전에도, 사후에도 함께한 공간이랄 수 있겠죠.”
현재 도봉구 방학3동 문화센터 건물 1~2층에 시인의 자료관이 조성되고 있다. 시인의 육필원고, 저서, 김수영론과 관련한 자료, 시인의 작품이 포함된 서적, 시인의 애장도서와 애장품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시인 김민은 김수영의 조카다. 2001년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2007년 처녀 시집 《길에서 만난 나무늘보》를 펴냈다. 김민씨는 “제가 태어나기 넉 달 전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도봉산 선영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김수영시비’에 자주 올라가곤 했다”고 말했다.
“큰아버지 시 중 제일 좋아하는 시편이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이 시처럼 꾸밈이 없고 솔직하면서도 가슴이 찡해져 오는 것, 이 점이 김수영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 월간조선.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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