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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金顯承,1913년 ~ 1975년)-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다형(茶兄). 평양 출생. 기독교 장로교목사인 아버지 창국(昶國)과 어머니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목회지(牧會地)를 따라 제주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7세 되던 해에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기독교계통의 숭일학교(崇一學校)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하였다.
그 뒤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1936),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전대학 교수(1960∼1975),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을 역임하였다. 문단활동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 장시(長詩)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梁柱東)의 추천으로 ≪동아일보≫(1934)에 게재되면서부터 시작된 이후, 낭만적 장시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읍니다>(1934)·<새벽 교실(敎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 뒤 1953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 新文學≫을 6호까지 간행하였으며, 이때의 시로 <내가 나의 모국어(母國語)로 시(詩)를 쓰면>(1952)이 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정신과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을 시로 형상화하여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었다. 제1시집 ≪김현승시초 金顯承詩抄≫(1957)와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1963)에 나타난 전반기의 시적 경향은 주로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하였으며, 점차 사회정의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도덕적 열정을 표현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들의 특징은 가을의 이미지로 많이 나타나는데, 덧없이 사라지는 비본질적이고 지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꽃잎·낙엽·재의 이미지와, 본질적이며 천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뿌리·보석·열매의 단단한 물체의 이미지의 이원적 대립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표현한 시적 방법의 특징은 절제된 언어를 통하여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事物化)하거나, 구체적 사물을 관념화하는 조소성(彫塑性)과 명징성(明澄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시세계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제3시집 ≪견고(堅固)한 고독≫(1968)과 제4시집 ≪절대(絶對)고독≫(1970)의 시세계는 신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 고독을 시적 주제로서 줄기차게 추구함을 보여준다.
1974년에는 ≪김현승전시집 金顯承全詩集≫을 펴냈고, 유시집(遺詩集) ≪마지막 지상(地上)에서≫(1977), 산문집 ≪고독(孤獨)과 시(詩)≫(1977)가 간행되었다. 문학개설서로는 ≪한국현대시해설≫(1972)이 있다. 1955년 제1회전라남도문화상,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광주 무등산도립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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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고 정직한 시인 - 김수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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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과 교훈과 시사를 한국시단에 던지던 김수영은 너무도 일찍 가고 말았다.
그는 과게에 만족하는 시인이 아니었다.언제나 앞을 내다보고 오늘의 정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기만족을 모르는 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자책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인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김현승)
무등산 자락에 있는
다형 김현승님의 시비...
님은 갔어도 시는 영원하리라...
김현승 <신앙과 고독>
Ⅰ. 머리말 시인 김현승은 기독교 문인으로서의 생애(1913~1975)를 이루어 간 사람이다. 그의 아호는 다형(茶兄)이다. 그는 중학생 시절인 1927년부터 40년간의 시작 활동을 통해 270편의 시를 6권의 책에 남겼다. 김현승 시인은 1913년 전북 익산 출신인 아버지 김창국과 황해도 은율 사람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양응도 사이의 차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숭실중학과 당시의 유일한 신학교엿던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1917년 제주도의 성내교회로 첫 부임을 하였다. 그곳에서 3년을 지낸 뒤 김현승이 7세때 부친의 전근에 따라 광주로 오게 되었다. 광주 승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중학에 진학하기까지 약 10년간을 광주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가정환경 때문에 서양 선교사와의 접촉이 많았고 기독교 문화속에서 성장함으로써 경건한 종교 의식과 생활 분위기는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인간과 종교의 영원한 신비에 대해서 써나간 그의 시적 소재와 주제 면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 깊에 뿌리 박힌 그의 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시에 나타난 정신사적 맥락을 살핌에 있어 <양심>과 <고독>으로 대표되는 인간적 사고의 삶, <참회>와 <신에 대한 찬미>로 대표되는 종교적 사고의 삶과의 관계라 할 것이다. 왜나하면 그의 시와 삶속에 나타난 이 두가지 요소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정신사적 면모를 파악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김현승의 일생을 통한 시작을 인간중심의 세계관과 신 중심의 세계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그 관계에 따른 시인의 삶과 시정신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기독교가 그의 삶에 끼친 전반적인 영향을 알아보려 한다.
Ⅱ. 김현승 문학의 시기별 분류 제 1기 : 시대적 불행에 대한 인식을 민족적 센티멘털리즘으로 표현 (1934~1945) “나는 그 시절의 시풍은 나 자신이 생각할 때 민족적 로맨티시즘이 아니면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그리고 그 무렵 나의 시에는 자연미에 대한 예찬과 동경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중략)…불행한 현실과 고초(苦楚)의 현실에 처한 시인들에게 저들의 국토에서 자유로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아무도 거기서는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자연뿐이었다.” -굽이쳐가는 물굽이같이 문단에 데뷔하여 해방 전까지 발표된 시는 18편이며, 이 중 16편이 『김현승시전집』중『새벽 고독』이라는 시집 이름으로 합본하여 수록되었으나 2편은 어느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때의 시풍은 로맨티시즘과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으로서 낭만적인 서정을 구가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띄게 된 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던 우리의 민족적 울분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젊은 혈기에도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야기 하고 있다.1) 당시의 시인들이 노래하는 자연은 두가지 방향으로 설정될 수 있다. 한가지는 자연에 안주한 도피주의적 경향이며, 또 한가지는 자연을 상대로 하되 기지, 풍자, 현실에 대한 불만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경향이었는데, 김현승은 후자에 속하는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제 2기 : 인간 내면 세계에 대한 성찰 (1934~1960년대 초) "나는 지금까지 내가 등한히 하였던 나의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너무도 外界的인 자연에만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내면적인 자연은 몰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외계로부터 내면의 세계로 관심을 돌렸다“ -굽이쳐가는 물굽이같이 생존의 문제로 인해 10여년간 시작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김현승은 새로운 고민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국이 광복된 현실에서 시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의 로맨티시즘이나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은 이미 그 막을 내린 후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의 생활속 깊이 뿌리박힌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경건한 기도와 신앙심을 노래하고 인간의 내변적인 본질을 추구, 생명과 희망을 노래하였다. 또 사회 정의와 민족애의 시를 강렬하게 토로하기도 하였다.2)
제 3기 : 신보다는 인간에 의한 인간적 삶의 본질을 추구 (1960년대 중기~1972) “정신상의 문제로는 나는 인간으로서 새로운 고독에 직면해야 하였다. 이것은 앞서 말한 사회적인 이유로서의 고독과도 그 성질은 다르다. 그것은 한마디로 신을 잃은 고독이다. 내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거대한 믿음이 무너졌을때에 허공에서 느끼는 고독이었다.…(중략)…나의 고독은 구원에 이르는 고독이 아니라, 구월을 잃어버리는, 구원을 포기하는 고독이다. 수단으로서의 고독이 아니라 나의 고독은 순수한 고독 자체일 뿐이다.” -나의 문학백서 『견고한 고독』『절대 고독』의 두 시집이 간행되었던 시기다. 제 1기와 제 2기에서는 신앙을 전제하고 시작활동을 했으나 제 3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고독의 세계로 가라앉게 되며 이러한 고독의 추구 결과 견고한 것들에 대한 지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제 2기의 시에서부터 복선을 드러내고 있는데 신성과는 결부된 자연과 양심의 견고함을 바탕으로 사회정의를 노래하던 그의 시에는 이미 신성 보다는 인간적 삶의 중요성이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의 문제에 대한 시적 형상화 작업은 근본적으로 유일신에 대한 부정과 신앙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독에로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났다.
제 4기 : 인간적 삶의 한계와 허무를 깨닫고 오로지 절대자인 신에게로의 감사와 참회의 기도를 시로 형상화 (1973~1975) “그러나 내가 쓰러지고 나서는 나의 지대한 관심이 매우 달라져 버렸다. 지금 나의 애착과 신념은 결코 시에 있지 않다. 따라서 시에 대한 야심이나 욕심이 그 전과는 매우 달라졌다. 지금의 나의 심경은 시를 잃더라고 나의 기독교적 구원의 욕망과 신념은 결단코 놓칠 수 없고 변할 수 없다.” -나의 생애와 나의 확신 김현승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하기까지 2,3 년의 짧은 기간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에 대해 쓰러지기 이전의 생애는 양적으로 거의 나의 일생에 해당하는 세월이었고, 쓰러진 후 지금까지의 생애는 2, 3년에 지나지 않으나 질적으로 나의 두 개의 생애는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3) 제 3기에서 신을 상실하고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며 존엄성의 이념인 자유를 가지고자 하는 순수의지로서의 고독을 탐구하였으나 제 4기에 와서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신에게 귀의함을 보여준다.
Ⅲ. 종교 - 김현승 문학의 전반적 주제 “기본적으로 내 시에 아는 듯 모르는 듯 세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성경일 것이다.…(중략)…예수의 말은 모두가 구체적이며 시적이다. 그의 행동도 그렇다. 그의 온 생활 자체가 시다. 나는 사복음을 읽으면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시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고결하고 인정많고 고독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 예수의 언행을 어려서부터 읽었다. 그러므로 이 훌륭한 시가 내 시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것인가.” 김현승 시인의 삶에서 그의 종교인 기독교를 빼놓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가 잠시 신을 버리고 고독을 갈구 하였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절대적인 고독 마저도 그의 신앙을 더욱 굳히기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다형 김현승 시인의 문학관에 대한 전기적 배경과 그의 시 세계에서 나타난 기독교적인 특성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시적 운율을 나타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적 특성을 이루게 하였던 해방 이전까지의 성장 및 작품 활동 배경과 해방 이후의 생에와 작품 활동 배경 그리고 생애의 변천과정에서 나타나는 그의 시의 특성을 살펴봄 으로써 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삶의 현상과 그의 시 세계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 에게서도 발견해 볼 수 있었고, 앞으로 그 누구의 작품을 읽던간에 그가 살아온 삶의 질곡에 대해서 알아 본 후에야 제대로 그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할수 있으리라 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보다 못한 나의 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대목과 “시를 버릴지언정 나의 구원이신 나의 신앙을 다시금 떠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누구나 추구해야 할 인간 본연의 절대자로의 귀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인간 본연의 가치추구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그의 시를 통하여 올바른 문학적 탐구 정신을 잘 마무리한 시인의 삶을 이룩하였음을 엿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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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의 기념사업 등과 맞물려 광주에서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광주시와 다형 김현승시인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김현승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등과 맞물려 '광주문학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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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형의 동생인 김현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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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현승 선생은 교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7세때 광주 양림동으로 이사와 숭일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등을 수료했다.
숭일학교 교사(1936)와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실대학 교수(1960-1975)를 거쳐, 한국 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을 역임했다.
다형은 한국전쟁때 광주에서 문학잡지 '신문학'을 4호까지 발간했으며, 이 과정에서 황순원의 '소나기'가 신문학을 통해 세상의 빛을 봤다.
또 다형은 문단에서 쟁쟁한 역할을 하고 있는 문병란, 손광은, 진헌성,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김종철 시인 등 40여명을 '현대문학'에 추전, 문단에 입문시켰다.
손광은 김현승시인 기념사업회 회장은 "다형 선생은 광복 후의 혼란기에 김기림류의 모더니즘과 정지용류의 감각적 이미지즘에 경도돼 있던 우리나라 시단에 지성적 감수성을 개척하고 새로운 한국 현대시를 정립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며 "6.25때 자칫 단절될 뻔했던 시문학사는 물론 문학사의 맥을 이어온 것도 큰 업적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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