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역두에서
우리는 단지
잠깐 쉬고 있을 뿐이다.
저무는 플랫폼
길은 영원으로 열려 있고
영원에 종점이란 없다.
쉰다는 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
달리는 순간엔 모두가
하나다.
떠난 자를 미워마라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긴 터널과 외로운 가교
복사꽃 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폭풍우 치는 밤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은
승차와 하차로 이루어지는
평행선.
그 끝없는 레일을 달리며
우리의 이별은
만남을
다시 꿈꾼다.
원시(遠視)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은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라일락 그늘 아래서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황 홀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서 오고,
황홀은
후각을 통해서 온다.
봄에
뜻없이 황홀에 젖어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천자만홍(千紫萬紅)그의 찬란한 색깔보다
향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청순한
─백합,
20대 소녀의 순결한
─라일락,
30대 여인의 달콤한
─아카시아,
40대 숙녀의 요염한
─장미,
의
체취.
봄에 꽃들은
일제히 입을 벌리고
향기로 말을 쏟는다.
후각으로 오는
봄
강물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紹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신념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 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오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이별의 말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걱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에게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 둘 밟는데
문득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아니, 문득이 아니예요
어느 때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당신이 보고싶으니까요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른 뛰어 올라갔죠
빈 하늘만 있네요
당신 너무 멀리 있어요
왜 당신만 생각하면 눈앞에 물결이
일렁이는지요.
두눈에 마음의 물이 고여서
세상이 찰랑거려요
그래서 얼른 다시 빈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네요
나, 당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햇살 가득한 눈부신 날에도
검은 구름 가득한 비오는 날에도
사람들속에 섞여서 웃고 있을때도
당신은 늘 그 안에 있었어요
차을 타면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구요
신호를 기다리면 당신은 건너편 저쪽에서
어서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구요
계절이 바뀌면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내 맘속에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당신의 사소한 습관하나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작은 기억 하나에도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당신은 내 안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기꺼이 내 드리고요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단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당신이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8월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4월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그리운 이 그리워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듣 타 보는 완행 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적막
'아' 하고 외치면 '아' 하고 돌아온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아'와 '어', 틀림없이 다르게 돌아오는 그
산울림.
누가 불렀을까,
산벚나무엔 다시 산벚꽃 피고
산딸나무엔 다시 산딸꽃 핀다.
미움과 사랑도 이와 같아라.
눈물 부르면 눈물이,
웃음 부르면 웃음 오느니
저무는 봄 강가에 홀로 서서
어제는 너를 실어보내고 오늘은 또
나를 실어보낸다.
흐르는 물에
텅 빈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 오후의
그 적막.
그 사람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이별이란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 설 때를 알 듯
질그릇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暴風,
질그릇에 담긴 空間,
그 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슬픔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1월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바람의 노래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겨울 들녘에 서서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 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오세영 吳世榮 (1942. 5. 2 ∼ )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중견시인이자 교육자이다.
장성(長城)과 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0년 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동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에 진학해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를 취득했다. 충남대학교(1974~1981)와 단국대학교(1981~1985)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강의했으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했다. 2002년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68년 박목월(朴木月)에 의해 시 《잠깨는 추상》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첫시집 《반란하는 빛》(1970)에서 알 수 있듯이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던 초기시에서는 감각적인 언어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기교적이며 실험정신이 두드러지는 시들을 발표했다. 1972년 《현대시》에 동인으로 참여했다. 첫시집 출간 후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던 시인은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지성적인 시어로 현대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한다. 이러한 변화는 생에 관한 서정적 인식을 노래한 두 번째 시집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와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무명(無名)'이라는 동양적 진리를 통해 탐구한 세 번째 시집 《무명연시(無名戀詩)》(1986)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연작시 《그릇》을 들 수 있다.
1970년 첫시집을 펴낸 이래 2001년 열한 번째 시집 《적멸의 불빛》을 펴낸 시인은 예순 살을 넘긴 나이에도 언제나 서정의 초심을 잃지 않고 절제와 균형의 미덕인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민족정서와 세계정신의 보편성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 높이 평가되어, 한국시인협회상(1983), 녹원문학상(평론부문, 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편운문학상(평론부문, 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문학상(2000) 등을 수상했다.
저서에 시집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등이 있다. 이 밖에 평론집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1981) 《20세기 한국시 연구》(1987) 《한국현대시의 해방》(1988) 《상상력과 논리》(1991) 《문학연구방법론》(1993) 등이 있고, 산문집 《꽃잎우표》(2000)와 시론집 《시의 길 시인의 길》(200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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