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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 - 채택룡
2015년 12월 30일 03시 23분  조회:4179  추천:0  작성자: 죽림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 -채택룡

 

 

지난 2004년 6월 1일 연길공원에서 《채택룡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그날 제막식에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평론가 김만석선생은 《채택룡은 우리 아동문학에서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을 제일 처음 개척한 에누리없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이며 자격이 당당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찍 1920년대말부터 조선문단에 얼굴을 보이고 해방후와 건국후에는 로작가로 대두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성장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한 채택룡선생, 생전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레브 똘스또이의 명언을 즐겨 인용했던 그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되기에 정녕 손색이 없었다.

 

아동문학에 몸을 바쳐 70여성상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29년 회령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1년 도꾜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고학하다가 경제난으로 중퇴했다. 1938년 12월 중국 동북으로 건너와 연길현 명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 연변고중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때의 채택룡선생.

해방전에 동요동시를 위주로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했던 선생은 1932년 《3인동요집》을 출판하며 이름을 날렸다. 1945년 10월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1950년까지 《한민일보》, 《길림일보》, 《인민일보》, 《연변민보》, 《동북조선인민보》, 《연변일보》사에서 편집, 기자로 활약하면서 문학창작에 정진했다.

초창기(1951년) 《연변문예》(<연변문학> 전신) 편집으로, 연변고중(1952년) 교원으로 열심히 사업한 선생은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면서 꾸준히 작가적 기량을 다져나갔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위원회 주임, 《아리랑》(<연변문학> 전신)잡지 편집비서를 력임하면서도 시종 붓끝을 쉬지 않았다. 1945년부터 1956년사이 종합집 《어깨동무》, 동요동시집 《나팔꽃》을 출판했고 이 시기에 창작한 가사 《베짜기노래》(1947년 창작. 허세록 작곡 방초선 노래)는 당시 중국조선족이 수상한 국가급상으로는 최고상이자 또한 최초로 전국군중가요 2등상(1954년)을 수상했다. 동요 《병아리》, 《나팔꽃》, 《사탕비 와요》, 《개구리》 등은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로 창작되여 어린이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 2, 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활약하며 자치주건설에 지혜를 모았던 그는 1959년 억울하게도 우파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를 강요당했고 1964년에는 핍박에 의해 해외망명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장장 19년이나 가족과 떨어져있던 선생은 1983년에야 정치명예를 회복받고 귀국했다. 이듬해(1984년) 동요동시집 《병아리》를 출간한데 이어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정력적으로 창작하며 새시대 중국조선족 어린이들의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던 선생은 애석하게도 1998년 10월 26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28년 처녀작 발표 카프문학에 동조

 

선생은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더듬어보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20년대말 30년대초에 나는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산생 발전한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은 소위 문학을 지향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먼바다 모진 풍랑속에서 헤매다가 발견한 등대마냥 진보적인 작가, 시인들이 추켜든 신경향파, 카프의 홰불을 따르던 애어린 문학애호가들속에 먼발치에서나마 나 자신도 고스란히 끼여든 셈이랄까…》

채택룡선생은 14세때인 1926년 6월부터 카프아동문학간행물인 《별나라》 잡지를 읽으면서 프로아동문학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1927년 동요 《어린동생》을 창작하여 1928년 신춘호 《별나라》에 발표한데 이어 그해 《별나라》에 또 동요 《개미》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선생은 1938년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리호남, 김조규, 천청송, 현경준, 리학성(리욱) 등 작가, 시인들과 접촉, 진일보 문학탐구활동을 전개했다. 해방후에는 김례삼, 윤정석 등 아동문학작가들과 손잡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화원을 꽃피우는데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선생이 중국조선족의 제1대 작가로, 조선족아동문학의 정초자로 존경받는 리유이기도 하다.

 

중국조선족아동문학 대부분 쟝르의 개척자

 

김만석선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1930년대에야 자기의 작가군체가 형성되였고 작품토대가 마련되였으며 발표원지가 해결되였다. 작가들로는 최서해, 윤극영, 리호남, 천청송, 안수길, 그리고 채택룡, 김례삼, 함형수, 리규화, 렴호렬 등이였고 1936년 연길교구장(敎区长) 백화동이 룡정에서 《카톨릭소년지》를 출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자기의 발표원지도 갖게 되였다. 이런 조건에 의해 형성된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초창기에 채택룡선생은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 쟝르 개척자로 나섰다.

 

당시 간도에 살고있던 우리글 아동문학작가들 중 제일 먼저 동요를 개척한 작가는 윤극영(<반달>1924)과 채택룡(<어린동생>1927년)선생이였다. 하지만 윤극영은 1947년에 조선으로 귀국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중국조선족동요의 개척자는 채택룡선생이였다. 동시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 최서해가 중국 간도에서 쓴 《시골소년이 부른 노래》가 첫작품으로 되지만 그는 그해 12월 서울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나온 동시가 바로 채택룡선생이 쓴 《사랑하는 누나여!》(1932년)라는 동시였다.

동화를 일찍 쓴 작가는 채택룡, 리호남 두분이였으나 리호남이 1938년에 동화 《딱소리》를 발표했다면 채택룡선생은 그보다 6년전인 1932년에 동화 《딱따구리》를 발표했었다.

아동소설을 쓴 작가들로는 채택룡, 리규화, 안수길, 렴호렬이였는데 리규화의 《가짜증서》와 안수길이 쓴 아동소설 《떡보》는 1940년대에 씌여졌고 렴호렬이 쓴 아동소설 《아름다운 미소》는 1940년 5월 26일까지 만선일보에 련재되였다. 반면에 채택룡선생이 《소년세계》에 발표한 아동소설 《삶의 빛》은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동소설 역시 채택룡선생이 개척한 것으로 볼수 있다고 김만석선생은 말한다.

 

가족과 생리별 장장 19년간 해외 망명

 

채택룡선생에게 있어서 해외 망명생활은 그의 인생과 가족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1959년) 모든 정치권리까지 박탈당하며(1962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로부터 권고퇴직까지 당한(1963년) 선생은 부득불 해외 망명의 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1964년).

채택룡선생의 아들 채영춘씨는 《아버님의 귀환》이란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점차 셈이 들면서 나는 아버님의 해외망명은 침묵을 위한 막부득이한 선택이였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기 위한 존엄의 표현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현실은 그 어떤 설전(舌战)으로 해명할 여건이 아니라 인내로써 극복해야 할 무거운 인생의 시련임을 깊이 감수하면서 내린 아버님의 선택이였음을 나는 뒤늦게 느끼게 된것이다. 아버님께서 이 같은 광란의 세월을 <우파>라는 신분으로 버텨낼수 있었겠는지가 의문이고 그러면 우리 이 가정은 어떤 참상을 당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아닐수 없다… 》

한창 정열에 끓어넘칠 40대 중반, 창작의 권리도 생활의 권리도 모두 박탈당한 선생이 선택한 길은 망명이였다.

정치적 핍박으로 1964년 합법적 수속을 밟아 조선으로 출국했던 선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가족과 생리별해야만 했다.

 

《카프》시기의 작가, 중국조선족 제1대 작가로서의 신분과 돈독한 인맥관계는 이국의 작가동맹, 신문사와 같은 문화기관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주어졌지만 그때마다 단연히 사절했다. 신상을 걱정해 주변에서 관심어린 뜻도 보내왔지만 《홀아비》의 적막한 생을 끄덕없이 영위해나갔다. 그러던 1983년 선생은 드디여 정치명예를 회복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식들과 지인들의 노력으로 중조 두나라 출입국관계부문의 허가절차를 밟아 드디여 정식으로 귀국의 길에 올랐다. 장장 19년만에 이루어진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귀환이였다!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운 채택룡시비.

 

참고도서 및 자료:

 

1)채택룡문집-연변인민출판사

2)김만석-《채택룡선생의 아동문학활동과 그 문학사적의의에 대하여[1999년 《문학과 예술》 제2기])》

3)채영춘-《아버지의 귀환》[연변문학 2011년 제8기]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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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동시인 채택룡선생의 예술적공로

 /// 김만석   2015년 12월 21일 08시 22분  
채택룡선생의 전반 아동문학창작을 투시하여 보면 그래도 동요동시인이라고 자리매김하는 편이 더 과학적일것 같다.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에 태여나서 1998년 10월 26일까지 85년간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만 71년간 창작활동을 하신 우리조선족의 자랑찬 아동문학작가이다.

채택룡선생은 생전에 필자와 많은 접촉이 있었다 필자는 북대신촌에서 산적이 있었댔는데 그때 채택룡선생은 농약공장 앞에서 사시였다. 필자는 일요일이면 채택룡선생을 찾아가서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이 걸어온 력사를 담론하고 나중에 어설프지만 아동문학사를 출판하여냈다.

그리고 채택룡선생의 창작활동을 정리하면서 채택룡선생의 분실한 원고들을 어떻게 복원할수없겠는가 토론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화 <<딱따구리>>를 살려서 <<딱따구리네 일가>>로 발표하였다 아동소설 <<삶의 빛>>은 필자한테 경개를 소개하여 주어 필자는 그것을 정리하여 필자의 <<아동문학사>>에 인용하였다 하지만 채택룡선생은 그 보귀한 소설을 끝내는 복원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채택룡선생에 대하여 필자는 일찍 론문 <<채택룡의 아동문학활동과 그 문학사적 의의>>와 <<채택룡재론>>에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한적이 있다 이런 평가는 과학적인 평가이며 또한 마땅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는 1927년에 처녀작 동요 <<어린동생>>을 써서 그누구보다 먼저 1928년<<별나라>>신춘호에 발표하였고 1932년동시 <<사랑하는 누나여>>를 그누구보다 먼저 동시를 발표하였으며 1932년 동화<<딱따구리>>를 그누구보다 먼저 동화를 발표하였고 1932년부터 1935년사이에 아동소설<<삶의 빛>>을 그누구보다 먼저 아동소설을 발표한것을 고증하고 내린 결론이였다.

오늘 필자는 주로 채택룡선생의 동요창작에서의 숨은 예술적 공로를 따져 보면서 채택룡선생에 대한 평가를 심화하려고 한다.

첫째,우리 조선말에서는 2음절 3음절의 규칙적인 반복에 의하여 운률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주로는 3.3조 ,4.4조.7.5조를 기본으로 하는 정형률이 있게 되었다. 그후 수많은 시인들의 창조적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정형률을 창조하여냈다.

일찍 1920년대 이른바 7.5조라는 정형률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일본의 정형률을 본딴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때 한반도에서는 7.5조 운률조성으로 동요창작에서 황금시기를 맞이하였다. 그 실례로 한정동의 <<따오기>>와 리원수의 <<고향의 봄>>등이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과 같은것이다.

그뒤를 이어 1930년대 조선의 박세영이 2음절과 3음절을 조립하여 이른바 6.6조 정형률을 개척하였다. 그 례로는 동요 <<갈매기>>이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른데>>,<<물에 뜨면 동동 날아서는 빙빙>>과 같은것이다.

1950년대 김례삼은 3음절과 4음절을 조합하여 이른바 7.7조 정형률을 창조하였다 그 실례로 <<기차놀이>>인데 <<기차놀이 하자여 모두 허리잡아라>>같은것이였다.

1927년 처녀작 <<어린동생>>을 창작한 우리의 채택룡선생은 1950년대 초기에 2음절과 3음절을 오묘하게 조합하여 이른바 우리 민족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4.5조 정형률을 창조하였다 그 례가 바로 <<병아리>>이다.

삐악삐악 갓난병아리
아장아장 걸음익히나
요리조리 조약돌 넘어
깡충깡충 재주 피우나
이 동요는 명동요로 우리민족 동요에서 특이한 형식인 4.5조로 씌여졌다.

4.5조 정형률은 우리말의 아름다운 본딴말 가운데서 2음절로 된 본딴말을 두 번 반복하여 4음절군을 만들고 그다음 2음절과 3음절을 조합하여 5음절군을 만들어 통합한 형식이다.

이런 4.5조 정형률은 앞에 력동적인 본딴말로 도약적인 감을 자아내고 뒤에 예술적인 설명을 가하여 아이들의 리해를 도와주어 깜찍하면서도 률동감을 안겨준다.
이것은 채택룡선생이 창조한 정형률인바 그것은 채택룡선생에게 그 특허권이 있게 된다.

력사적으로 보면 1950년대 김례삼의 <<고개길>>,채택룡의 <<병아리>>,리행복의 <<꽃동산>>,조룡남의 <<반디불>>과 같은 황금동요의 출현, 1980년대 최문섭선생이 동시창작에서 <<동시때벗이>>주장,1990년대 한석윤이 정형동시에서 자유동시로 이행한것.2000년대 김철호가 동심의 예술적 이미지화 등과 같은 시대적이고 돌파적인 성과작들의 출현은 우리의 동요동시창작을 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게 하였다.

1950년대 채택룡선생의 4.5조 정형률은 우리 민족 동요동시창작에서 새로운 개척이고 창조로 아동문학발전에서 획기적인 공로를 세운것으로 취급되여야 한다.

사실 우리 문학의 흐름 가운데서 이런 한가지 공헌을 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웁고 또 그런 공로를 세우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는 력사가 평가하게 된다. 채택룡선생은 우리 민족 동요동시 운률조성에서 4.5조라는 특정된 정형률을 창조한 동시인으로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둘째,동요창작에서 상징동요를 개발한것은 채택룡선생의 공로라고 본다. 1920년대 말에 순수문학에서 주장하던 방영종의 자연송가동요,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방정환의 애상주의 동요, 계급의식을 직접 고취하던 박세영의 계급주의동요 등 3개 류파의 동요들이 류행되였다 이런 동요들은 작자의 리념이 기본상 표출화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이럴때 1928년 그런 동요와 질적으로 다른 동요가 나타났는바 그것이 바로 채택룡의 동요 <<개미>>였다.

장다리밭 꿀돼지 놀고먹는 놈
개미집에 뛰여 들어 쌀을 뺏다가
모여든 개미들게 물어뜯기여
뚱뚱배가 터지여 죽어버렸네
이 동요는 프로동요에 속하지만 상징적수법으로 썼다 그것은 당시 일본놈들의 삼엄한 검열제도가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런 검열에 통과하자는 그런 의도에서 출발한것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예술작품인 동요에 어떻게 상징성을 부여할것인가에 대한 채택룡선생의 예술적 추구에서 비롯된것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이런 상징동요가 일제 김열에 걸리지 않은 원인이 바로 그 예술적인 상징수법에 있었다 채택룡선생은 지주를 꿀돼지로 비겨 가면서 그자들의 만행을 폭로하고 백성들의 뭉친힘에 의하여 그자들이 망하고 마는 통쾌한 결말을 예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을 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 전투적인 효과를 보았다 이 동요가 1920년대에 창작되였다는 그 시대적 배경이 이 동요의 가치를 한결 값지게 하고있다
셋째,채택룡선생은 주로 동요를 쓰면서 동요를 어떻게 혁신하여 볼것인가에 대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정형동시도 쓰면서도 동시창작을 혁신히여 보려고 한것도 그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엿보인다.

그리하여 채택룡선생은 7.5조 운률조성을 기본으로 하면서 동요와 정형동시를 창작할 때 7.5조 2행 1련,7.5조 3행 1련 ...지어는7.5조 8행 1련.7.5조 10행 1련,7.5조 12행 1련동요 동시를 써보았다 이것은 동요동시창작을 혁신하여 보려는 그의 노력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된다.

그러나 채택룡선생은 현대동시표현수법과 기교를 터득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갖은 실험과 피타는 노력을 하다가 돌아가시였다 그러나 채택룡선생께서 우리 동요의 페단을 인식하고 자기동요에 대하여 불만족을 느끼고 어떻게하나 혁신하여 보려한 그 애타는 심정을 우리후대들은 오늘 충분히 리해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동요동시는 1980년대까지 7.5조 4행1련의 정형동시가 판을 치면서 내려왔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석윤이 7.5조의 각을 뜯다가 점차 자유동시로 전이하여 우리동시는 자유동시 시대로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로부터 김현순 강효삼 림금산 김학송 김철호 등이 현대동시표현기법을 받아들여 우리동시는 질적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1980년대까지 우리동시는 작자의 리념이 로골적으로 표출화되여 작품에서 작자의 주장을 두눈으로 뚜렷이 볼수가 있었다. 하여 작자의 정치적리념의 표출을 동시의 사회적 효과로 리해하였던것이다.

동시는 작자의 리념의 적라라한 표출을 용허하지않는다 작자의 리념은 우리의 두눈으로 볼수 없어야 한다. 동시는 아름다운 시적 형상속에 무르녹아 있는 시적이미지는 눈으로는 볼수있는것이 아니라 아리숭한 상상속에 꽃피게 하여야 한다 하여 작자의 리념은 사색과 음미속에서 저마끔 터득할수있게 하여야 만 한다.

동시의 서정성은 감탄사의 련발로 실현되여서는 아니된다 동시의 서정성은 시적이미지가 발산하는 자연스러운 정감의 분출로 되어야 한다.

2000년대 우리의 동시는 선배작가들의 창작경험과 창작교훈을 받아들이며 지금 바야흐로 변화 발전하는 단계에 있다.
우리는 채택룡선생을 기념하면서 일생동안 아이들을 사랑하고 일생동안 아동문학창작을 견지하는 그런 분투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체호브의 단편소설<<완까>>에서 주인공 완까는 <<우리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살아있는 순간까지 다시 말하면 죽는 그날까지 아동문학창작을 견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채택룡선생을 기념하면서 작가로서 자기에 대한 요구를 높이 제기하고 자기 창작에서 부족점을 느끼고 자기 창작에 불만을 품고 자기 창작을 부단히 혁신하려는 그런 혁신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그것은 오직 혁신만이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그 많은 작품을 창작하시고도 상장 한번 타보지 못한 채택룡선생에게 우리는 몇 년전에 조선민족아동문학작가들의 이름으로 , 우리조선민족 아이들의 이름으로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 중국조선족 전체의 이름으로 채택룡선생에게 <<병아리>>시비를 공원동시동네에 높이 경립하여 주었다.

그 병아리는 영원히 삐약삐약 노래할것이고 그 병아리는 영원히 깡충깡충 춤출것이다. 채택룡선생은 저 세상에서 지금도 그런 병아리를 바라보시며 습관대로 허허허 즐거이 웃으실것이다.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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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룡선생의 처녀작<<어린 동생>>
2015년 12월 28일 11시 17분  
채택룡선생은 1927년에 처녀작 동요 <<어린동생>>을 창작하여 1928년 <<별나라>>신춘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그 원문을 모르고있다.
 
채택룡선생의 생전에 필자는 선생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문자로 써줄것을 부탁드리였다. 채택룡 선생은 친필로 그것도 정자로 또박또박 나한테 a4 용지로 11페지나 써주시였다 최근에 필자는 그 자료를 찾아 다시 보면서 선생의 처녀작 <<어린동생>>의 내용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알수있게 되었다.
 
채택룡선생은 자기의 친필재료 제 6페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요 <<어린동생>>
 
1928년 월간잡지 <<별나라>>에는 나의 처녀작 <<어린동생>>이 게재발표되였다. 당시 나로서는 자기 이름 석자가 활자화되여 새상에 알려진데 대하여 무한한 긍지와 더 없는 자랑으로 여겼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기도 하였다.
 
동요 <<어린동생>>은 당시 땅마지기나 소작을 주고 농민들의 피땀을 여지없이 빨아먹고 배를 불리는 지주놈에 대하여 증오감을 그린것이 그 주요 주제사상이다.
 
땅은 매우 중요하며 땅을 다루는 농민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것이다. 이에 소작인들은 땅을 떼울가 두려워 심지어는 지주집에서 온통 빨래감까지 갖다가 빨아주고 그를 말리워 두 어깨가 물러나도록 다듬이질 해준다. 이런 가지가지의 어머니의 고통, 이 곤경을 다듬이돌 옆에서 쏘아보던 어린 동생은 대뜸 어머니의 손에서 다듬이질 방망이를 빠앗아 들었다. 마치도 그 방망이로 지주놈의 대갈통이라도 내리 까듯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땅>>소리와 함께 그 다듬이 방망이가 다듬이돌에 맞아 튕겨올라 어린동생의 이마를 때렸다. 이에 방망이에 맞은 아픔보다도 격분에 더는 참을수 없어 어린동생은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어린동생은 다듬이돌 우에서 어머니의 책망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통 옷견지들을 냉큼 방바닥에 끌어내려놓고 맨발로 마구 짓밟아 놓는것이 그 내용의 전부인것이다. 
 
동요 <<어린동생>>의 내용은 보는바와 같이 서사적 이야기로 되어있다. 지주네 빨래를 하여 다듬이질 하는 어머니,그런 고생을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방망이를 뺏는 어린동생, 그리고 방망이로 다듬이돌을 내리치다가 자기가 되려 방망이에 얻어맞는 어린동생, 지주네 빨래를 팽개치고 마구 짓밟는 어린동생...이런 서사적내용을 동요로 썼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썼을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런 분노의 정서를 어떻게 썼을가? 정형률로 썼을가? 아니면 자유률로 썼을가? 력사적으로 고찰하여 보면 아마 정형률로 쓴것 같다. 그것은 작품의 장르를 동요로 빩혀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요 내용을 보면 화적동요형식(이야기식동요)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정형률로 어떻게 화적동요( 이야기식동요)를 썼을가?
 
추측은 언제나 과학연구에서 금물이다. 우리는 력사를 존중하여야 한다. 작자 본신이 복원 못한 그런 작품을 우리가 함부로 대하여서는 절대 아니된다.
 
이 동요는 채택룡선생이 14살 때 쓴것이다. 우리는 이 동요의 내용에서 채택룡선생이 나어린 14살 때의 계급적 의식수준을 능히 가늠해 볼수가 있다. 그것도 시적주인공을 어린애로 삼은 작자의 창작의도가 너무나도 돋보인다.
 
어른도 아닌 아이들까지 지주들의 착취에 분노를 느끼게 한 작자의 착안점이 기발하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마저 계급적으로 각성한 그런 시대에 대한 파악은 창작 초기로부터 프로문학경향을 지향하였다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채택룡선생이 어떤 형식에 그런 값진 내용을 담았는가는 아직 알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그 원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택룡선생이 필자에게 남긴 그 친필재료에 의하여 우리가 그 동요의 내용을 오늘 처음 알게 된것은 한낱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 동요는 채택룡선생의 처녀작이자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학에서의 첫 동요로 되며 더 나아가서 우리 조선족아동문학의 첫 작품으로 되는 그런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다. 하기에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동요 <<어린동생>>은 반드시 찾아내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제기되고있다.
 
앞으로 관계나라와 문학적인 련계를 강화하여 <<별나라>>잡지를 구하여 가지고 우리의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어린동생>>을 원문 그대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 과업은 오로지 우리 아동문학후계자들에게 의탁할수 밖에 없는 력사적 과업으로 남게 되었다.
 
/// 김만석 (아동문학가)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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