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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 [象徵主義, symbolisme]
"상징주의란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
시인 장 모레아스(1886)
Jean Nicolas Arthur Rimbaud
(20 October 1854 – 10 November 1891)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중의 하나인 랭보는
거칠고 의미심장하며 곳곳에 숨겨놓은 상징으로
버무린 은율적이며 실험적인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19세기말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15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이
이루어졌던 시인 중심의 이 운동은 1890년에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구가 했습니다.
이성적이며 과학적 분석으로는 포착할수 없는 주관적인 정서를
시로 정착시킴을 목표로 했던 상징주의 詩. 랭보의 대표적 시 하나를 감상해보도록 하죠.
* Voyelles *
A noir, E blanc, I rouge, U vert, O bleu : voye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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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음 * (Voyelles 해석)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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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시인들이 주관적 정서를 시어로 표현하는데 애쓰는 가운데
일군의 화가들 역시 당시 대세를 이루고 있던 인상주의 그림들의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며
명징한 그림들에 대한 반동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 하자면 인상주의의 실증적인 표현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었다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관심은
형상화 할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그리고
내면에 응축 되어있던 관념과 자아를 상징적이며 우의적인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게 하려 했던 겁니다.
즉 삶과 죽음 불안과 고통, 사랑과 성, 꿈과 환상등이 그들 상징주의 작가들의
주된 주제가 되었으며 주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실재적이지 않은 색채와
묘사적이지 않은 넓은 색면의 사용과 분방한 필법도 상징주의 화가들의 중요한 무기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Paul Gauguin (1848-1903)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습니다.
상징주의 작품의 선구적인 대표작으로 꼽히는 고갱의 그림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 실존적인 제목의 이작품은 이후의 많은 상징주의 작가들이 나아갈 길을 예시해 주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여인들의 군상으로 보이는 이작품은 여인들을 통한 생명의 탄생과 기원 그리고
인간의 생노병사들을 파노라마와 같이 보여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작품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이 표현 하려 했던 생과 사 불안과 고통, 사랑과 성 그리고 환상과 꿈등이 혼재 되어 있는
고갱의 이 그림을 정작 고갱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채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던것은 주지해야 할 일이 분명 합니다.
즉 우리가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주의해야할 부분은 작품의 주제에만 좁아 질수 있는 우리의 시선을
이들 작품들의 조형적 구성과 표현법에까지 확대해서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4.20~1916.7.6]
The Crying Spider, 1881.
내면세계를 여행하는 조용한 순례자 - 르동을 떠올릴때 마다 생각 나는 말입니다.
여러 종류의 미술서에서는 르동을 "보이지 않는것을 위한 보이는것의 논리"라는 길고 난해말로 설명 하긴 하지만..
그는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병약하고 고독하며 내성적인 소년으로 성장헀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격은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50세가 될때까지 주로 단색 계열의 판화 작업을 하면서
독자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괴상하다고 할정도로 독특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 하였습니다.
당시 화려한 인상주의 작품이 판을 치던 무렵 이러한 괴기스럽다고 할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한다는것은
평론가들이 그에게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고 할정도로 외롭고 고단한 작업의 길이 였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수가 있을 겁니다.
일상적 현실의 외면과 환각적 시각의 추구는 그의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상징적이며 이교도 적이고 환시적인 작품의 구성은 그를 상징주의 화가중 중요한 작가에 손 꼽히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동시대의 작가군에게서도 찿아 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고 선구적인 것이어서
이후의 달리를 비롯한 쉬르리얼리즘 작가(초현실주의) 들에게도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을 겁니다.
The Cyclops, 1914,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르동이 사망하기 2년전인 74세때 그려진 이 그림은 신화를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채색을 보면 인상주의 화가들의 채도보다 높은듯 하고 자유로운 붓질은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듯 합니다.
하지만 르동 자신은 50세가 될때까지 흑백화만을 그렸습니다.
흑백의 화면만 50년간이나 그리던 작가가 채색을 할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화창한 여름 오후 오랜 시간을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다가 벗었을때 눈에 따갑게 물결치며 쏟아지는
가지각색의 색의 향연을 떠오르면 이해가 쉽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흑백화를 그릴때 컬러라는 중요한 표현 무기를 포기한 대신 르동은 형태에 비중을 둘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르동이 컬러라는 비장의 무기를 획득한 순간 그의 그림에서 형태성은 점점 무너지며 색채의 풍부한 감성을
그의 그림속에 녹여 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작가가 50세까지 무채색만 사용했었던 작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그림은 50세 이후에 색채의 작렬이 빛을 발합니다.
색채와 함께 여전히 그의 그림에 녹아 들어있는 비현실적인 비유와 상징 또한 더욱 능숙해지고 깊어짐을 알수 잇습니다.
Gustav Klimt (July 14, 1862 – February 6, 1918)
A section of the Beethoven Frieze
클림트는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볍게 터치만 하고 지나가겟습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전시가 되었던(물론 해외 전시용 복제품 이었지만) 베토벤 프리즈 입니다.
그의 상징주의적 작품은 물뱀 시리즈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 1853.3.14~1918.5.20]
호들러의 작품은 자연주의와 구성이 견고히 조합된 양상을 보입니다.
가로선의 직렬적인 병렬의 반복을 통한 그의 경직된듯한 구도법은 흡사 이집트 미술의 견고성을 닮아 있는듯합니다.
'병렬주의'라는 용어로도 불리우는 이러한 기법은 우리가 예전에 공부했었던 비쟌틴시대의 그림과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수도 있죠.
그가 이러한 이집트, 비쟌틴적인 견고하고 경직된 병렬주의식 작업을 하는 이유는
아카데믹한 관점에서 결코 세련되지 못한 그의 작업 방식이 대부분의 미술이 지니는 난해함에 혼란스러워 하는
대중들에게 전달 됨으로서 현대사회의 그릇된 가티관에의해 억압된 근본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어렵게 보거나 복잡하게 이해 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작품의 진실성을 차단할 뿐입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느끼는것.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마티스, 뭉크, 몬드리안등의 작품과
독일 표현주의, 소련의 온건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에서
그 영향력을 찿아 볼수 있습니다.
Ferdinand Hodler - Die Lebensmüden 1892
호들러는 스위스 출신의 반인상주의 화가이며 풍부한 독창성으로 많은 화가와 화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을 '단순한 회화에 저항하는 사상가’로 부르며 기존의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철학적 사상을 담은 작품을 창조하려
애썼습니다.
소목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은바 없지만 동시대의 작가 중에서 가장 독창성이 풍부하며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불리어 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풍경화는 뛰어난 색조감으로 인상주의의 영향력하에 있지 못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작가들에게 색채 충격을 전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Lake Geneva as seen from Chexbres, 1905, oil on canvas
La mort du fossoyeur ("The death of the gravedigger") by Carlos Schwabe is a visual compendium of symbolist motifs. Death and angels, pristine snow, and the dramatic poses of the characters all express symbolist longings for transfiguration "anywhere, out of the world."
카를로스 슈바베Carlos Schwabe (1877 - 1927)
그의 작품중 하나인 죽음과 천사 (무덤 파는이의 죽음).
노인은 평생 남의 무덤을 파는 일을 하던 사람 이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그에게도 죽음의 천사가 다가왔고 매혹적인 죽음의 천사는 이제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결국 언젠가는 죽어 땅에 묻혀 마무리가 되고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다는 상징을 담고 있는 슈바베의 그림입니다.
슈바베의 그림에는 요부들이 많이 등장 합니다.
하지만 평범치 않은 요부들(요부 자체가 평범치는 않겠지만)
즉 악마적이고 괴기 스러운 세기말적인
스타일의 퓨전 요부가 자주 등장 하는 겁니다.
또한 그의 장식성은 아르누보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Fernand Khnopff's The Caress
벨기에 출신의 페르낭 크노프(1858-1921)는 한마디로 일탈과 갈등 그리고 긴장과 마력의 작가라고 할수 잇습니다.
그에게는 5살 연상의 친누이를 모델로 한 그림들이 많은데 그녀는 크노프의 누이이자 연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의 비난받아 마땅한 이러한 일탈은 그에게 평생 신비주의로의 회피와 긴장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합니다.
위에 보이는 그의 작품 '애무' 는 스핑크스를 그린것 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크노프의 스핑크스는 원래 왕의 무덤을 지켜야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19세기형 스핑크스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자를 유혹 하는듯한 스핑크스는 크노프의 창작이 아니라 당시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죠세핀 파라당의 저서 '스핑크스의 땅'(1900)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파라당은 그의 저서에서 -예술의 시작은 괴물로 부터 시작된다(중략) 그괴물은 사람의 머리, 여인의 유방,
사자의 신체를 지녔다. 즉, 생각하고, 정감 있으며, 본능적인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즉 예술의 개념을 형태화
한것이 스핑크스이다- 라고 예술의 개념을 주장 하였고 사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당시의 여러명의 화가들이
이러한 소재를 작품으로 시도 하기도 했었는데 크노프의 '애무'도 그러한 작품증의 하나라고 할수 있습니다.
위의 슈바베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요부성 스핑크스는 당시 19세기말의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지니고 있던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의 도착의 한종류일수도 있을 겁니다.
현재의 관습에서 볼때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작가의 태도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시대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엿볼수 있는 좋은 예가 되기도 합니다.
예술은 괴물로 부터 시작되고-사람의 머리, 여인의 유방, 사자의 신체와 같은것-사고와 정감,그리고 본능이
그들의 예술이었던 거라는것.
Hugo Simberg's The Wounded Angel.
Hugo Simberg (24 June 1873, Hamina - 12 July 1917, htri)
위고 심버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입니다.
부상당한 천사가 상당히 불만 많은듯한 표정의 소년들에 의해 들것에 의지하여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얼핏보면 재미있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다보면 소년의 표정 만큼이나 우울해 집니다.
천사는 없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천사나 신을 믿지 않는다는 화가의 주장이 그림 전체에서 베어 나오기 때문 입니다.
과연 이들이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성당과 많은 건축물의 벽들을 천사와 전지전능 하다고 믿었던 예수의 그림으로
도배 하고 찬양하던 그 유럽인들이 맞는지 의아해 질 정도 입니다.
만약 심버그가 중세시대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분명히 화형감 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펄펄 끓는 기름솥에 들어가서 튀김이 되었던지..(제가 써 넣고도 좀 혐오 스럽네요,,죄송..식사는 하셨나요?)
이러한 그림들이 나오는 계기중의 하나는 조금 미안하지만 독일의 대 철학자 니체를 꼽을수 있을 겁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은 19세기 말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세기말적 사조의 한 부류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세기말사조 [世紀末思潮]는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하여 1890년대의 유럽 각국에 퍼진 인간정신의 퇴폐적인 경향을 말합니다.
즉 당시의 회의주의, 유물주의, 염세주의, 찰나적 향락주의가 이러한 사조에 포함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현실세계를 환영으로 보고 진보, 사랑, 신앙등을 모두 허망한것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며
인간의 야수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염세적이며 무관심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고 특히 상징주의자들의 경우
예술 활동에 자신을 몰입 하면서 현실세계를 외면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크게
세기말 사조라고 할수 있습니다.
Edvard Munch (12 December 1863 – 23 January 1944)
Death of Marat I (1907)
뭉크는 여러명의 애인이 있었는데(절대 부럽지 않습니다) 1900년을 전후하여 툴라 라르센이라는 여성과 깊은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부잣집 딸에다가 관능적인 '세기말적 여성' 즉 저주 받은 숙명의 여인이자 죄 깊은 여인의 전형이었다고 할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오히려 그녀가 아깝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만..
1902년 결혼을 원하는 라르센과의 격렬한 말다툼끝에 뭉크는
자신의 왼손을 쏘았고 결국 그는 평생 손가락 하나를 쓰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뭉크는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그의 관념은 그의 그림속에 그대로 스며들어있는것을 많은 작품을 통해 확인 할수 있습니다.
위의 '마라의 죽음'도 그러한 연장성 상에서 볼수 있는 작품 입니다.
뭉크는 이작품을 그리는데 9년이나 걸렸다고 고백한바 있는데 평생을 성과 사랑을 주제로
추구한 뭉크의 최후의 도달점은 바로 사랑과 죽음 또는 여자의 죄와 죽음 이었다고 할수 잇습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뭉크가 성과 사랑 그리고 여자에 대한 생각을 읽어 내릴수가 잇습니다.
그림속의 남자는 살해 당한것이 아니라 격렬한 섹스후의 피로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아마도 피를 토하고 죽은것 같은데(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죽을수가 있는 것인지,,흠)
침대 시트의 선홍색 피보다 더 무서운것은 여인의 표정 입니다.
남자의 시체를 옆에 두고 마치 임무를 완성한듯한 로보트같은 자세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만족한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
그녀의 모델은 바로 툴라 라르센 이었습니다.
물론 죽은이는 뭉크 자신을 그려낸 것입니다.
Tulla larsen & Munch Tulla larsen
Madonna. 1894-95. Oil on canvas. 36 x 28 in. Nasjonalgalleriet, Oslo.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는 암살자이기도 하고 마리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마리아도 또한 성모가 될수 있고 요부가 될수도 있다는 혐오감을 나타내곤 했지만.
그의 세기말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환상적인 격렬한 표현법은 상징주의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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