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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꽃 -
【노자(老子)와 플라톤】의 눈으로 - 시평(詩評)
구약(舊約)성경에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창조에서 이름이 붙여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創造)하시고....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 창세기(創世記) 1장- 」
수(數) 많은 초목들이 어우러져 있었던 초원(草原)에서 【사람 - 아담】은 개개(箇箇)의 꽃과 풀에게 각각 이름을 붙였다. 「장미(薔薇)」「소나무」「질경이」...
그【이름 名】이라는 것은 다른 존재(存在)와 구별 (區別)짓기 위한 표시이면서 【차이(差異) difference 】가 된다.
이 이름을 받으면 그 【존재 (存在)】는 【실재 (實在)】에서 【현상(現象)】으로 떠오르고 그로부터 【차이】에서 오는 속성 (屬性 attribute)을 받게 된다.
【장미(薔薇)】는 인간의 감성(感性)으로 「가시」와 「넝쿨」,「향기」와 「하얀 꽃」… 이라는 「특징 (特徵)」들이 정립(定立)되어 지고 이들은 【속성】이라는 틀 속에 축적(蓄積)된다 .
이름이 붙여진 이제부터의 장미(薔薇)는 원초(原初)의 【실재 】와는 차이가 나는 오직 【속성 】들로 꾸며진 【상(像) image】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미의 【개념 (槪念)】만 있지 장미의 【실재 】는 인간에게서는 사라진 것이다.
【스무고개】알아맞히기는 바로 【속성】을 길잡이로 하여 【상(像) image】을 찾아가는 미로(迷路)의 게임인 것이다. 「식물성(植物性)」-「꽃」-「넝쿨」-「향기」-「가시」…「장미」
【속성】과 【이름 名】은 있으나 【진정한 존재 實在】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道)라고 이름을 붙여지면 그것은 이미 원래 모습의 도(道)가 아니다.
이름(名)을 붙이면 그것 또한 원래 있었던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떨어지게 된다.
세상의 처음(初)은 허공(虛空)의 무(無)를 바탕으로 하여 그 안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 어울리는 관계(關係)로 맺어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이 각기 그 이름을 받음에서 현상(現象)으로 나타난 것이다.
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 오산(吳山) 역(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나의 【몸짓】은 【실재 - 이데아】였는데, 【이름】을 붙임으로 올림포스 산상(山上)에서 지상(地上)의 인간 세계로 【하강(下降) - 현상(現象)】된 것이다.
무수한 여인(麗人)들 틈에 있던 그녀가 【사랑】이라는 꾸밈을 붙이니 【연인(戀人)】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여기서 자연적인 존재(存在)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소유론 (所有論)】적(的)인 「존재자(存在者)」-【장미】가 되고 【내 연인】으로 좁혀진 것이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素月)은 【산유화】에서 「저만치 혼자서」라는 거리감(距離感)을 두고 오직 존재(存在)로만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춘수는 그 꽃에【이름을 불러 주어】그 존재는 【나에게로-】 소유(所有)가 되는 【존재자】인 【꽃】으로 만들었다.
심연(深淵)에 있던 「물고기- 몸짓」은 「낚시 - 이름」에 걸려 「뭍- 나의 것」으로 올라온 것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연에서도 이름을 붙임으로 하여 순수(純粹)한 존재(存在)에서 소유(所有)의 존재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그것이 투영(投映)된 【현상 (現象)】을 말했다.
김춘수의 【꽃】이 【현상(現象)】이 되면, 이름이 불리기 전은 【이데아 - 실재(實在)】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에 담고 손에 잡히는 것은 【현상(現象)】이요 【모상(模像)】이요 존재자(存在者) 일뿐이다.
현상(現象)은 가변적(可變的)이고 생멸(生滅)하고 불완전(不完全)한 것이다.
인간은 영원불멸(永遠不滅)한 진실한 세계를 추구(追求)한다.
즉 현상(現象)의 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발돋움하려는 지향(指向)힌 것이다.
所有와 執着의 貪慾으로 뭉쳐진 현상(現象)의 세계 - 「이름 불려진」것 -에서 그냥 【몸짓】으로 나타나는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망향(望鄕)에 젖는다.
이것이 진정 시인(詩人)이 노래하여야 하는 귀로(歸路)인 것이다.
김춘수의 【꽃】은
이 【망향 (望鄕)】을 그리지 못하고
겨우 그 중간에서 머뭇거린
존재론(存在論)적에 머문 시(詩)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
위의 【시평(詩評)】은 어느 할아버지께서 【수능(修能)】시험에 골몰하는 외손자 등 같은 또래들을 위하여 강론(講論)한 것을 간추린 원고(原稿)를 가져 옴 .
[출처] 김춘수 -꽃 -【노자(老子)와 플라톤】의 눈으로 - 시평(詩評) (시산문(詩散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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