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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의 시인 - 서정주
2016년 01월 05일 05시 29분  조회:3961  추천:0  작성자: 죽림


혼(魂)의 시인 서정주

 

이재훈(시인)

 


2010년은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을 중심으로 미당기념사업회(회장 : 홍기삼)가 창립되었다. 미당기념사업회에서는 미당의 시를 낭송하는 월례 행사와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미당 자택을 복원하여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미당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는 매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4월부터 동백꽃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1915~2000). 미당(未堂)은 한국 시사에서 가장 영예를 많이 받은 이름이다. 미당 서정주를 부르는 이름 또한 만만치 않다. 시의 정부(政府), 시의 귀신,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한국 부족 언어의 주술사, 시선(詩仙) 등등. 미당 서정주는 시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들을 받았다. 시인으로서의 찬사만큼이나 그의 시적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예술관련단체의 굵직굵직한 자리를 역임했으며,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냈다. 또한 서라벌예술대, 중앙대, 동국대 등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死後), 과거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과의 영합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비판을 받아 왔다. 아직까지 미당의 평가에 대한 후학들의 입장은 논란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당 서정주가 가진 문학적 업적과 자산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우리의 시문학은 미당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념의 상징주의, 한국적 정한의 토속세계, 불교적 세계, 신화적 세계, 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의 시적 형상화 등등. 그가 도달하지 못한 시적 세계관은 없을 정도이며, 그가 닿고자하는 시적 지향점에서 뚜렷한 시적 완성품을 문학사에 제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자화상>은 전국민이 애송하는 미당의 대표작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어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화상> 전문

시 <자화상>은 언제 읽어도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애비는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 결핍의 운명. 부모의 연이 단절된 이유가 “종이었다”는 운명론적 감수성은 우리 민족 저변에 깔린 한(恨)을 잘 드러내준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싯귀는 시련을 그대로 받아내고 참아내는 인고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또는 아버지 없는 운명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선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운명에 구속되어 오히려 피해자인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온 삶일지라도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도 서려 있다.
죄인과 천치를 읽고 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어떤 문제가 없는가. 시에서는 가장 밑바닥의 운명적 실체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너무 늙었고, 집안은 어머니가 풋살구 하나도 못 먹을 정도였으며,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서 살 정도로 가난했다. 그 집안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톱이 까맣다. 자신은 그런 가족사에 편입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부재했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가르친 것은 저 들판의 바람뿐이었으리라. 
이 시는 현재의 관점에서 읽어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 이기주의, 날로 발달해가는 자본 문명,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치 문명인의 운명처럼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 당시와 달라진 건 없다. 가난의 대물림은 오히려 현재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악착같이 버텨내기 위해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비춘 형상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가치관으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닥친 운명에 대해 뉘우치지 않는 각오를 해본다. 이 각오가 새로운 희망으로 변주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_ <논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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