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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시인 - 윤동주
2016년 01월 05일 05시 35분  조회:4029  추천:0  작성자: 죽림

별의 시인 윤동주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별의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 그는 28세의 짧은 생을 살다갔으나 우리 시단에서 잊히지 않는 큰 별과 같은 시인이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 늘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조국의 앞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 의식’을 시로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살아 있는 동안 문학적 영화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사후(死後)에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서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민족의식과 독립 사상을 깨우치게 된다. 이후 집이 용정으로 이주하여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고, 이 시절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 등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다. 1935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이듬해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으로 다시 편입했다. 이 당시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빗자루」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38년에는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이양하 선생으로부터 영시(英詩)를 배웠다.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다 실패했다. 이듬해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하여,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조국으로 귀향을 앞두고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조국 해방을 6개월 남겨 놓고 옥사했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간행하지 못했다. 1948년이 되어서야 유작 31편을 실은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썼다.
윤동주의 대표시는 아마도 <서시>일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전 국민의 애송시 <서시>는 국민의 뇌리와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대표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도 사랑을 많이 받는 시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위의 시 <자화상>은 윤동주의 내면의식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시이다. 
시에 등장하는 ‘우물’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적 대상이다. 이 우물은 아주 조용한 곳에 존재한다. 산모퉁이를 돌아야 하고 논가 외딴 곳에 위치해 있다. 우물은 자아를 생각하고 성찰하는 장소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도 그렇듯 늘 자신을 성찰하고, 고백한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물을 통해 자아를 성찰하고 자아의 내면을 고요히 응시한다. “한 사나이”는 시인의 모습과도 동일시된다. 즉 자신의 모습이 우물에 비췄을 때 미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돌아가다 생각하니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지는 것이다. 사내는 아무런 변화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시에서는 우물에 비친 사내의 모습이 미워졌다가, 가엾어졌다가, 다시 미워졌다가, 그리워진다. 미워졌지만 가엾어지는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당시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나약한 지식인의 초상이 그대로 시속에 드리워져 있다. 우물 속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흐름이 그대로 존재한다. 즉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사나이가 있고, 그 사나이는 추억처럼 존재한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윤동주는 치열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늘 부끄러움 의식으로 괴로워했던 지식인이다. 
우리는 성찰이 부재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위정자들부터 성찰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늘 핑계하며, 숨기고 속여 쉽게 넘어가기만을 바란다. 많은 이들이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감동하고 환호하는 것은 성찰과 부끄러움 속에 담긴 진실함을 읽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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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육필원고 갖고 월남한 여동생 
"당시엔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죠" 
[3.1절 특집] 유일한 혈육 윤혜원씨 인터뷰 
  윤여문(sydyoon) 기자    
  
  
6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많이 잊힌 상태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압정은 간교하고 잔혹했다. 모국어(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급기야 죽음까지 당한 윤동주 시인. 지난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다. 

그는 정확하게 27년 2개월 동안 살았다. 그것도 죽기 전 2년 동안 감옥에 갇혔으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전부 25살 이전에 쓰인 시들이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가 쓴 <서시(序詩)>는 가장 애송하는 시다.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2살 되던 해(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북간도에서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윤혜원(84)씨가 20여 년 동안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3·1만세운동 88주년을 맞아, 여동생의 증언을 윤동주의 생애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들어본다. <편집자 주> 
  
  
  
▲ 윤동주의 연희전문 졸업사진  
  
  
시인들은 말한다.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시인의 모국어다. 

그렇다. 시인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모국어와 함께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모국어(한글)로 시를 쓰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죄로 감옥에 가고, 급기야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주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였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자 자진해서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대신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3부를 묶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윤동주의 이미지는 왜 순결할까?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그의 순결한 이미지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일본경찰에 체포될 당시까지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학생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윤동주 시인의 순절(殉節)한 이미지를 오랫동안 명토 박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있는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한테 있다. 

  
  
▲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혈육 윤혜원 할머니.  
  
ⓒ 윤여문 
북간도 룡정(龍井)에서 짧은 기간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해방공간의 혼란스런 시기에 북간도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되고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주오빠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대학노트 3권을 아버지의 권유로 가져왔는데, 그 당시엔 그 노트에 담긴 시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윤씨는 회상한다. 

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이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48년 초간본 31편에 들어있지 않은 시편들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절반 이상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겨 월남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일을 한 윤혜원씨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피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동주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일관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윤혜원씨는 동갑내기남편 오형범(84.시드니우리교회 장로,작고)씨와 함께 서울에서 부산-필리핀-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들이 피했던 대상은 언론뿐만 아니라 수많은 윤동주 연구가들도 포함된다. 1986년, 시드니에 정착해서 21년째 살고 있는 윤씨는 호주에서조차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침통한 표정의 윤동주 "그 분이 글쎄..." 

  
  
▲ 은진중학 시절. 뒷줄 맨오른쪽이 윤동주, 가운데가 문익환 목사.  
  
  
윤혜원씨는 1924년 생으로 동주오빠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모습은 동주 오빠랑 문익환 오빠, 고종사촌인 송몽규 오빠 등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다. 다음은 윤혜원씨의 회고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출생한 동주 오빠와 문익환 오빠가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나중에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를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인데, 동주오빠는 11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서울로부터 정기구독 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문익환 오빠는 광명학교 시절 명동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어서 문익환 오빠의 지도로 성경이야기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 

또한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가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송별회 사진. 사진속 도시샤대학 동창들은 윤동주를 꿈 많고 수줍음타는 청년으로 회고했다.  
  
  
  
윤동주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아리랑' 

2006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윤혜원씨의 남편 오형범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공개됐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현대문학> 9월호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재학시절에 찍은 윤동주 사진과 사진설명을 쓴 일본여성의 기고문이 함께 실렸다"고 전해주었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우지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오형범씨와 함께 기사를 읽어보니,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영문과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윤혜원씨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랑이 오빠가 부른 마지막 노래일 것 같다. 그 후엔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니..."라며 윤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은 사진에 대해서 설명한 기타지마 마리코(83)의 글이다. 

'사진은 1943년 초여름, 교토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함께 도시샤대학에 다니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그 중에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 이 남학생이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다.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라는 급우의 부탁에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해 같은 혐의로 같은 형무소에서 고종사촌형인 송몽규(교토제대 재학 중 윤동주와 비슷한 시점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10일 사망)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했다. 

죽기 직전 친척들에게 전한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에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유골함에 다 담지 못한 윤동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일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 윤동주의 고향 룡정에서의 장례식 장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윤동주의 시들 

윤혜원씨에게 "오빠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망설임 없이 <서시(序詩)>를 꼽는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순수한 모국어로 담겼고, 거기에다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서 늘 숙연해진다"고 말한다. 

윤씨는 이어서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생활했던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는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면서 좀처럼 하지 않는 윤동주 시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광명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김태균(전 경기대 교수, 현재 캐나다 거주)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윤혜원씨의 소견과 일맥상통한다. 

"윤동주의 시 전반을 걸쳐서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이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주의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그것이 곧 그의 생활이고,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은 서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대단히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접근하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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