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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석의 영원한 여인 란 ( 蘭)|작성자 행복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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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때글다: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다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울력: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하거나 이루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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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입니다. 온통 무채색이네요. 외로움이 잔뜩 묻은 낮음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시에 나오는 님은 백석의 첫사랑이자 짝사랑했던 대상인 박경련이라는 여성입니다. 시인 백석의 청혼을 거절하고 결국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이죠. 이 시에서 시인은 지아비와 그 사이에서 난 어린 것을 끼고 저녁을 먹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을 흰 바람벽을 통해 그저 바라봅니다. 시인 백석이 이토록 가련한 존재였나, 한편으로 연민마저 들게 하는 시입니다. 시인이란 가장 외로운 자리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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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가슴에 난초(蘭)로 남은 여인, 박경련 | ||||||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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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는 동백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는 ‘충렬사’라는 낡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서 조금 안쪽으로 길을 걷다 보면 고즈넉한 기와집이 하나 보인다. 바로 명정동 396호 ‘박경련’의 집이다. 박경련의 다른 이름은 ‘란(蘭)’으로 백석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운명의 여인이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깜앟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1936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그의 수필 「편지」는 사랑에 빠진 24살 청년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백석과 란이 처음 만난 것은 백석의 절친 허준의 결혼 축하 회식이었다. 책 「시인 백석1」은 백석이 란을 만나기 위해 이듬해 1월 다시 통영을 방문하는 모습을 생생히 서술하며 백석의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화고녀(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란이 방학을 맞아 고향인 통영에 내려가자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만나러 간다. 조선일보 백석’이라는 전보와 함께 통영으로 달려가지만 란이 서울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연이어 백석이 발표한 세 편의 「통영」은 통영의 모습을 서정적인 시어로 아름답게 표현하면서 한 여인에 대한 젊은 청년의 풋풋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 해 12월, 백석은 란에게 청혼을 하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다시 통영을 방문한다. 하지만 란의 집안에서는 백석의 집이 가난하고 그의 어머니가 기생의 딸 혹은 무당 딸이라는 소문때문에 백석을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보다 백석을 더 낙담시킨 것은 얼마 뒤 란이 신현중과 혼례를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애국지사로 명망이 높았던 신현중은 백석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서울과 통영을 오가며 딸에게 구혼하는 청년이 궁금했던 란의 어머니는 친오빠인 죽사 서상호에게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서상호는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어보았고 신현중은 백석에 대한 것들을 상세히 말하며 앞서 말한 소문들로 ‘백석이 란의 신랑감으로 부적당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 신현중은 스스로 “어르신, 제가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란의 신랑감이 될 것을 자처한다. 소문난 애국지사이자 후배이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신현중은 란의 신랑이 되고 한순간에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백석은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 한다’라고 말한다. 또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이 그녀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함과 쓸쓸함을 담고 있다. 고형진<고려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사랑’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으로 백석의 경우 통영 출신의 ‘란’이란 여자에 대한 연정이 그의 시심 촉발과 시 세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또 백석이 남긴 여러 기행시와 연시 그리고 헤어진 이후 인생의 본질을 돌아보는 시들을 언급하며 “그의 시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도 그렇게 탄생한 시”라고 말했다. 백석의 시는 시적정조나 언어의 차원이 아닌 문학적 소재나 대상, 이야기까지 포괄하였을 때 ‘여성 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고 교수는 “한 시인의 시적 특징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애매하며 대부분의 시인들은 좀처럼 그러한 이분법적인 틀 안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다만 “우리 시의 가락과 정서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적인 느낌과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백석의 시도 전통 시에 닿아 있기 때문에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후 남한에서는 1948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끝으로 더 이상 백석의 작품이 발표되지 않았다. 백석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분단을 맞았기 때문이다. 백석의 북한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윤동주, 정지용, 박목월 같은 보통의 문학인들이 아동 문학에서 일반 문학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비해, 백석은 일반 문학에서 아동 문학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시인 백석과 통영
이성모
1.
백석 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기행시라고 하는 데에 이의는 없을 듯하다. 곁제목을 붙여 놓은“남행시초” 4편과 “서행시초” 4편, “함주시초” 라는 제목 아래 엮은 시 5편은 물론이고 낱낱의 작품들 역시 이리저리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시로 담아낸 것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를 두고 김명인은 “정주(定住)가 없는 삶의 뼈저린 슬픔을 환기하면서, 역설적으로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동경을 굴절시켜 보여 준다” (「매몰된 문학의 제자리 찾기」,『창작과 비평』1988년 봄호, 357쪽)고 말한다. 물론 「八院―서행시초3」과 같은 작품에서 “내지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계집아이”의 슬픔이 전민족적 비애와 맞닿아 있으며, 「북방에서」와「藻塘에서」등 일련의 작품에서 쓸쓸하지만 그지없는 순연함으로 살아가는 나와 나의 민족의 삶에 대한 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 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는 백석 기행시의 특징이라기보다 백석 시의 전체를 관류하는 시적 정감이라는 점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 길을 걷는 것은 자연의 풍광을 건너다보는 것이 아니라 제 나름의 풍물과 습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며 그에 대한 표상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재구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는 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아울러 전 생애에 걸친 백석의 기행시 전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묶어 읽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초기 기행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통영」(『조광』, 1935.12), 「통영」(『조선일보』1936.1.23),「창원도―남행시초1」(『조선일보』1936.3.6),「통영―남행시초2」(『조선일보』1936.3.6),「고성가도―남행시초3」(『조선일보,1936.3.7),「삼천포―남행시초4」(『조선일보』1936.3.8)에 이르는 일련의 시들이 백석의 남다른 통영 나들이 사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시인 백석의 통영 나들이와 관련한 일들은 송준의 『시인 백석 일대기 1』(지나. 1994)와 박태일의「백석과 신현중, 그리고 경남문학」(『한국 근대문학의 실증과 방법』, 소명출판. 2004. 39쪽~60쪽)의 연구 성과물과 신현중「서울문단의 회상」(『영문』7집. 1949)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35년 봄, 신현중은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되고, 그 곳에서 이미 입사하여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조광』지의 편집 일을 맡고 있는 백석과 만난다.
2> 신현중은 자신의 여동생을 백석의 가장 친한 벗인 허준에게 맡긴다. 1935년 6월, 허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백석은 통영 출신 처녀인 박경련을 소개받는다. 박경련은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이며, 신순정이 포천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이화고녀를 다니면서 옛 스승 댁을 드나들며 신현중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3> 축하모임에 이어 백석은 허준, 신현중과 더불어 통영으로의 첫걸음을 한다. 같은 해 12월『조광』지에 시「통영」을 발표한다. 백석의 나이 24세, 박경련의 나이 18세의 일이다.
4> “겨울방학이 지나고 서울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학기 등교하러 갈 때니까 아마 정월 초순쯤 백석이와 나(신현중)는 통영을 들러서 이 진주로 왔다”(신현중의 앞글)로 미루어 1936년 1월 초순 백석은 두 번째 통영 걸음을 하였다. 그러나 박경련은 방학이 끝나 서울로 되올라가 만날 수 없었다. 1월 23일 『조선일보』지에 시「통영」을 발표한다.
5> “같은 해 2월 9일 무렵 다시 통영으로 여행을 한 느낌을 받았다”는 송준의 진술과 “4월에 함흥의 영생고보로 일자리를 옮기기 직전이라 마음을 정리할 겸, 홀로 박경련의 고향인 통영과 그 가까운 곳을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박태일의 연구 결과가 있다. 백석은 1936년 3월『조선일보』지에 ‘남행시초 1․2․3․4’의 딸린 제목아래 시「창원도」(3월 5일),「통영」(3월 6일),「고성가도」(3월 7일),「삼천포」(3월 8일)를 연작시로 발표한다.
4> 후일담으로 시인 백석은 1936년 가을 함흥에서 자야(子夜) 여사를 만나고 (이동순「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자야 여사의 회고」), 1937년 4월 신현중은 박경련과 혼인한다. (송준의 앞의 책)
3.
백석은 1936년 2월 22일『조선일보』지에 ‘사내사외 신춘 단문 리레’라는 기획으로 쓰여진 서간형 수필「편지」를 발표한다. 전체 글의 이야기는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라고 하는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이를 말하고 그이에게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를 전하다가 이윽고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을 생각하겠습니다”로 글을 끝맺는다. 다음은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 갑니다.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는 통영에서 나고 자란 박경련이다. 그녀의 아버지 박성숙은 박경련의 나이 15세 때인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박태일, 앞의 책. 43쪽) ‘어느 해 유월’은 허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통영 출신 처녀인 박경련을 소개받은 1935년 6월이다.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함은 당시 어울리던 신현중의「서울 문단의 회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답고 청순한 여자를 비겨 “란(蘭)이라고 해 두자”(신현중의 앞의 글) 라는 친구들 간의 통칭이라고 여기면 되겠다.
이제 백석의 시「통영」3편을 발표순대로 읽는다.
4.
統 營
녯날엔 統制使가있었다는 낡은港口의처녀들에겐 녯날이가지않은 千姬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늬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六月의 바다가에선조개도울을저녁 소라방등이붉으레한마당에 김냄새나는비가날였다
위의 시는 1935년 6월, 백석의 통영 나들이 첫걸음의 시적 체험이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천희’라는 이름이 통영 지역에서 많건 적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통영에서 느낀 처녀의 이미지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 것인데, 겉으로 시의 화자가 통영 처녀들에 대해 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백석 자신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라고 하겠다. 말 못할 애틋함으로 그는 “천희의 하나”인 박경련을 만났고, 그때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그윽함 속에 청신한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아래의 시는 1936년 1월 초순, 백석의 통영 나들이 두 번째의 시적 체험이다. 박경련을 만나려 들렀으나, 그녀는 방학이 끝나 서울로 되올라간 즈음이어서 만날 수 없었던 백석의 울울하고 처연한 심회가 고스란히 시에 녹아있다.
統 營
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같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든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冬栢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栢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통영에 가기 위해 구마산 선창의 뱃길을 잡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오는 물길이 반날” 걸려 통영에 다다랐다. 그때 구마산 뱃머리에서 백석은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나 반가워 울며 내리는 것을 목도한 것인지, 혹은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토로이든지 간에 그는 통영에 들렀다. 남해안어업의 전진기지로서 통영의 활기찬 모습을 말하고 있으나, 정작 그의 눈길은 여성에게 가 있다. “산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이거나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이거나 청초한 모습을 떠올리면 통칭 그러한 이를 일컫던 “난”이라는 이가 그의 눈에 잡힌다.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 말하자면 “박경련과 그 가족이 살고 있었던 집은 바로 명정골 396호”이다. (박태일, 앞의 책. 46쪽) 명정샘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 앞에 있는 샘인데 백석은 명정샘을 오가는 처녀들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에 잠긴다.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 설레임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은 화자는 통영 바다를 바라보며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는”처연함에 젖는다. 그는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혹여 그리운 사람이 찾아올까 집밖으로 눈길을 두고 있는 그곳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속에서 디딜방아를 찧으며 눈길을 바깥으로 두고만 있는 이는 백석 자신이다.
백석의 세 번째「통영」시는 전술한 바, 1936년 3월 초, ‘남행시초 1․2․3․4’ 의 딸린 제목 아래 쓰여진 연작시의 두 번째로 3월 6일 발표된다.
統 營
― 남행시초․2
統營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접 사고 홍공단단기 한감 끊고 술 한병 받어 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위의 시가 두 번째 통영 걸음에 쓰여졌던 것을 3월초에 발표한 것인지, 혹은 이후에 다시 통영에 들러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남행시초 일련의 연작시에 드러난 계절을 볼 때,「창원도」는 “업데서 따스하니 손 녹히고 싶은” 겨울녘이며, 「고성가도」는 “진달래 개나리가 한참 퓌였구나”는 봄이며, 「삼천포」역시“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봄날이다. 통영으로 가거나 혹은 나서거나 간에 그가 지나쳤을 길이며 곳이다.
어쨌건 위 시의 화자는 통영장으로 내리달려들어 “술 한 병 받어 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술 한 병 받아들고 뱃고동 우렁차게 울리는 화륜선을 만져보고 싶을 만큼의 화자의 울울한 심사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오다가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을 듣다가”라고 하는데, 이 곳 역시 박경련이 살고 있을 명정골을 마주한 야마골 들머리인지 알 수 없다. 당시 야마골은 통영 화류계의 본산지이다. 울울한 심정에 가수네 있는 객주집에 들러 대취한 것인지 혹은 취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에는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통영의 운하가 뚫린 어름의 수로를 지나간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다 간다.”
백석은 1936년 3월 남행시초 연작시를 발표하고 같은 해 “4월 초순 함흥에 있는 함흥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자리를 옮긴다.”(정효구,「백석의 삶과 문학」,『백석』문학세계사. 1996. 177쪽) “1936년 가을 함흥에서 스물여섯의 백석은 스물두살의 김자야 여사를 만나 자리가 파할 무렵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이동순 앞의 글, 앞의 책. 313쪽) “1936년 겨울방학이 되자 그 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백석은 허준을 앞세워 통영의 박경련의 집으로 청혼을 넣으러 갔으나, 집안의 완강한 거부로 혼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온다.” (박태일 앞의 책. 48쪽)
연작시 ‘남행시초․1’인「창원도」의 마지막 행 “떠꺼머리 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에 눈길이 가는 것도 박경련을 향한 백석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통영은 백석에게 있어 그의 두 번째「통영」시에 나오는 것처럼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편지」)이다. 낡은 항구에 옛 그리움만 남아 일렁이고 있다.
백석(白石) 시인은 본명은; 백 기행(白 夔行) 필명이; 백석(白石, 白奭) 평안북도 정주에서 1912년 출생하여 1996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산고보 졸업 후,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의 아들]로 등단(登壇)하여,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동경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 출판부에 입사하여 [여성]잡지 편집일을 한다. 1935년 [정주성]이란 詩를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1936년 [사슴]이란 시집을 간행하여 혜성과 같이 등단하는 수려한 외모의 촉망받는 백석!
1935년 당시 시인이자 기자였던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동료(신현중)의 소개로 이화여고 학생이던 통영아가씨 (박경련, 18세, 蘭 이라 부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편지>에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산문 <편지> 중에서
蘭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는데.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친구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 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 일게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된 <통영>이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넷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통영>
이후 두 번 더 통영을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엇갈려 못 만나게 되고 상실감에 빠진 백석은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두 번째 시 <통영2>를 남기게 되는데, 이 시는 자신이 통영을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하였다. 서울에서 공개구혼과도 같은 시를 읽었던 "난"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조아하는사람이 울며날이는배에 올라서오는 물길이반날 갓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조코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ㅅ것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십흔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안간 대구를 말리는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십어한다는 곳
산넘어로 가는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이 갓고 내가들은 마산객주집의 어린딸은 난(蘭)이라는이 갓고
난(蘭)이라는이가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가튼 물이솟는 명정샘이 잇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조아하는 그이가 잇슬것만갓고 내가조아하는 그이는 푸른가지붉게붉게 동백꼿 피는철엔 타관시집을 갈것만가튼데 긴토시끼고 큰머리언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듯한데 동백꼿피는철이 그언제요
녯 장수모신 날근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안저서 나는 이저녁 웃듯울듯 한산도바다에 뱃사공이되여가며 녕나즌집 당나즌집 마당만노픈집에서 열나흘달을업고 손방아만찟는 내사람을생각한다.- <통영2>
1936년 마침내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또다시 통영을 방문하여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오빠를 만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한다. 당시 난은 외삼촌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난의 외삼촌은 아끼는 고향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데, 그때 신현중은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그 둘의 혼사는 깨지고, 신현중은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이듬해 봄,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애간장이 녹았으리라. 자신을 배반한 절친,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에, 너무도 애절했던 첫가랑을 잃은 백석은 이런 시를 남기고 한양을 떠나 함흥의 영생여고보에 영어 선생으로 가는데 여기서 두 번째 사랑인 자야(子夜)를 만나게된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의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에서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가산이 파산하자 16세 때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진향 眞香]이 되었다. 그곳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에게서 궁중무,창,시조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기생 진향의 능력을 높이샀던 조선어학회 회원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동경에서 공부하던 중 ,신윤국선생이 일제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당시 함흥 감옥에 갇힌 신윤국을 면회코저 했으나 면회가 원천 금지되었다는 말에 함흥에 눌러 앉는다. 그는 고민 끝에 함흥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는데, 다시 권번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서 함흥 법조계 유력 인사들을 만나게 되고, 스승을 특별 면회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현국을 면회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곳에서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영생여고보 선생들의 회식 장소에서....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眞香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하였다. 어는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 백(이태백)의 詩 <자야오가 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진향에게 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 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가는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子夜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 라고 김영한은 <내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1939년 백석은 만주 신경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953년 김영한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다.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인<백석, 내 가슴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1990년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사랑 백석>을 펴냈으며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 문학상 을 제정케 하였다.
"백석을 안다면 내가 그이 부모 다음일 거야. 그의 하트(heart)를 아니까, 그런데 다 없어졌어요."
"내 탓입니다. 미스터 백은 자식도 낳고 결혼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총각이 기생과 결혼하면 남자 집안이 망하던 세월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 첩, 소실이 될래요.- 했지요. 거기서 실망한 거야. '사랑을 버려도 괜찮아? 말 다한 사람이군.' 하면서 떠났어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더 그리운 사람이 그 사람이지요"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살아있다는데, 난 영혼을 안 믿어요. 꿈에 그사람 늙은 모습은 안 나오고 60년 전 인생이 나와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1997년 미국 LA 고려사 (高麗寺)에서, 자매처럼 지내던 대도행 보살(가수 이상열 장모, 고려사 창건주)을 만난 김영한은 대도행 보살의 권유에 따라 평소 <무소유>책에 감명 받았던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할 뜻을 밝힌다.
법정 스님은 거절을 했고, 9년 간이나 [시주하겠다]. [못 받겠다]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실랑이 끝에 1997년12월14일 요정 대원각은 승보 사찰 송광사의 말사 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吉祥寺)]로 개원을 하게 되었다. 개원식에서 창건주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서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佛名)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죽기 전 날 길상사 길상헌에서 하룻 밤을 지낸 후,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 주시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 눈이 온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지금 길상사에는 자그마한 공덕비와 1937년 겨울에 백석이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최초의 원문이 새겨진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에필로그 ...
백석의 본명은; 夔(조심할 기) 行(다닐 행) 예술가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한, 필이 꼽히면 쭈~욱 빠질듯한...
아무튼 그의 부모는 이런 백석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 하기를 바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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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이 아흔아홉 살을 ‘백수(白壽)’라고 부른다. 일백을 뜻하는 ‘백(百)’이 아니다. 여기에서 ‘一’ 한 획을 빼면 ‘白’ 자가 되는데, 그게 아흔아홉이라는 데서 비롯한 단어다. 2014년 봄, 백수의 노인을 뵈러 가는 길은 사뭇 떨렸다. 그동안 벼려오던 <백석평전>을 마무리할 무렵이었는데, 백석이 연모했던 아가씨 박경련과 인연 있는 분이 통영에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분이 바로 제옥례 선생이다.
주소를 들고 찾아간 봉평동의 한 아파트 문은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빼꼼 열려 있었다. 열두세 평쯤 될까. 주방은 말끔했고 벽에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선생은 성모상을 모신 안방에 요를 펴고 누워 있다가 하얗게 센 머리를 가다듬으며 일어나셨다.
통영의 ‘한산신문’은 일찍부터 제옥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보면서 소상하게 선생을 소개해왔다. 제옥례 선생에게 ‘통영 문화예술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수사를 얹어준 것도 이 신문이다. 제옥례 선생은 1915년생이다. 통영보통학교, 진주일신여고(현 진주여고),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 여자연습과를 졸업했다. 그녀의 꿈은 교사가 돼 식민지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주도로 교사 지원서를 냈다. 일본 북해도 농대를 다니던 연인이 졸업하고 돌아오면 제주에서 젊은 날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던 발령이 나지 않았고, 남자한테서 소식이 끊겼다.
20대의 신여성 제옥례는 절망했다. 그녀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천주교에 자신을 맡겼다. 황해도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 교사가 되어 근무하다가 건강이 악화돼 5년 만에 통영으로 돌아왔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뜻밖에 또 한 번 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통영의 한 부잣집에서 중매가 들어온 것이다. ‘하동집’으로 부르던 박씨 집안의 부인은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새어머니를 물색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옥례가 수녀 아닌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을 천주교 쪽에서도 쾌히 동의해주었다. 그리하여 나이 서른에 하동집의 안주인이 되었고, 그 후로 두 자녀를 낳아 10남매를 잘 키웠다.
통영 명정동의 하동집은 박경리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제옥례 선생은 원주에 살던 박경리 선생을 찾아가 만난 적도 있었다. 그때 열한 살 아래 박경리 선생은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따뜻하게 대접을 했다고 한다.
한옥기와집 4채가 ㅁ자로 짜인 하동집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회의장으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시인 유치환·김춘수와 같은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수시로 이 집 사랑채로 모여들었다. 김춘수의 동생은 나중에 하동집의 딸 하나와 혼인을 맺기도 했다.
지금 통영에 가면 통영 출신 문화예술인들 이외에 백석의 시가 담벼락에 적혀 있는 게 눈에 띈다. 충렬사 앞에는 백석의 시 ‘통영’을 시비에 새겨 세워두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이 남쪽 바닷가 도시에서 그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것은 왜일까? 이루지 못한 연애이야기 때문이다.
백석은 그가 근무하던 조선일보 1936년 2월21일자 ‘편지’라는 수필을 통해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라며 통영 처녀 박경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실제로 백석은 통영을 세 차례나 방문하지만 구혼에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절친한 직장동료였던 신현중은 백석이 짝사랑하던 박경련과 1937년 4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때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가 충격에 빠져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제옥례 선생은 낡은 사진첩에서 1930년대에 촬영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박경련이 이화여고보를 다닐 때 통영에 내려와 하동집 딸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폐결핵을 앓던 박경련은 꽤 멋진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박경련의 사촌오빠가 제옥례 선생의 남편인 박희영이었다.
“남편은 신현중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 집에서 집을 지을 때 빌려준 건축자재가 있었는데 신현중이 끝내 갚지 않았지요. 친구가 좋아하던 여자를 중간에 가로챈 비겁한 사람이라고도 했어요.”
귀가 많이 어두운 제옥례 선생은 귓등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내 말을 들었다. 큰소리로 꼬치꼬치 묻는 내가 오히려 더 송구스러웠는데, 때로는 필담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백석과 박경련이 결혼을 했더라면 제옥례 선생이 백석을 시매부(媤妹夫)로 불렀을지도 모르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신현중과 박경련은 금실이 좋았어요. 그런데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어요.”
의외의 소득이었다. 백석은 1940년 초에 만주국의 수도가 있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떠난다. 시시각각 죄여오는 징용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 또 친일 부역 문인들의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보는 게 힘들어 선택한 일이었다. 만주에 머무는 동안에도 백석은 국내 문예지에 가끔 시를 발표했다.
1941년 4월 ‘문장’ 폐간호에 실린 절창 ‘흰 바람벽이 있어’는 국외자로 떠도는 한 영혼이 황폐한 현실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시다. 머나먼 만주 땅에서도 백석은 박경련을 완전하게 잊지 못했다. 백석은 시에서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고 안타까워했다.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 ‘어린것’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만주의 백석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72년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뜬 이후 제옥례 선생에게 또 시련이 닥쳐왔다. 가난해서 작은 식당을 열어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고, 대건성당에 살다시피 하면서 각종 봉사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해 여러 권의 수필집도 출간했다. 통영에 수백년 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통제사 음식을 복원하고 재현한 일에 앞장선 것도 선생이다.
통영 문화의 거점이었던 하동집 사랑채는 올해 ‘잊음’이라는 근사한 숙박공간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100세를 넘긴 제옥례 선생을 옛집 툇마루로 모시고 가서 큰절을 올리고 따뜻한 찻잔이라도 쥐여드리고 싶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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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시인들은 통영에서 가슴으로 울었다. 사모하는 여인 때문이었다. 강구안 골목과 주변, 통영중앙우체국에서는 인연이 닿지 않은 여인을 그리워하던 시인들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강구안 골목 곳곳에는 백석의 시가 벽면에 걸려 있다. 평안도 정주 태생인 그의 시가 통영의 후미진 골목에 내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1935년 6월 당시 24세였던 시인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동료 기자이자 친구인 신현중의 소개로 ‘난’(박경련)이라 불리던 꽃다운 여고생을 만나 한눈에 반했다. 곧 그는 친구들과 난의 고향인 통영으로 향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다. 그는 ‘통영’이란 시에서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이라며 당시의 심사를 토로했다.
이듬해 1월 백석은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간 난을 만나려고 신현중을 졸라 다시 통영에 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그는 다시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통영2’ 중)라고 노래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두 달 뒤에도 통영에 갔지만 역시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함흥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겨울방학을 맞아 이번에는 허준을 앞세워 난의 집으로 아예 청혼을 하러 갔다. 하지만 난의 부모는 가난한 시인이자 교사인 백석을 박대하고 혼인을 반대했다.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을 친구 신현중이 귀띔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난은 4월에 신현중과 혼인을 하고 말았다. 백석은 ‘내가 생각하는 것은’을 통해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을 한탄했고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며 가슴으로 울었다.
◇ 낭만적인 강구안 골목길을 거닐며
강구안 항남동 골목길은 백석과 유치환, 이중섭, 전혁림 등 시인과 화가가 술잔을 기울였던 곳이다. 1980년대 후반 여객선터미널이 옮겨가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최근‘강구안 골목만들기 프로젝트’로 부활에 나서고 있다. 유서 깊은 골목에는 백석의 시가 걸려 있고,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프랑스 조형예술집단 ‘아트북콜렉티브’가 만든 윤이상의 가곡 ‘달무리’ 악보, 이중섭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은빛 물고기 등을 볼 수 있다.
백석의 시를 감상하며 좁은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오래되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중섭의 이름을 내건 식당과 해산물 한식으로 유명한 ‘풍년식당’, 반백년이 다된 대장간과 전당포 등을 볼 수 있다.
◇ 평생을 이어간 순수한 사랑 이야기
통영에서는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함께 근무한 통영여중에서였다. 당시 이영도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둔 29살 과부였고, 유치환은 그녀보다 아홉 살 많은 유부남이었다. 청마는 퇴근 후 수예점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녀를 보려고 수예점이 눈에 들어오는 중앙동우체국 창가에서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때 쓴 시 가운데 한 편이 지금까지도 많은 이의 감성을 울리는‘행복’이다.
1967년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5천여 통이나 된다고 한다. 이영도는 청마가 보낸 편지 중 200통을 골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펴내기도 했다.
정량동 언덕에 자리한 청마문학관에서는 유치환의 생애와 사랑 이야기를 엿보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입구에는 1950년을 전후해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김상옥, 정윤주, 김춘수 등 통영문화협회를 결성, 통영의 문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함께한 커다란 사진이 비치돼 있다. 스피커를 통해서는 그의 주옥같은 시가 흘러나와 가슴을 적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의 ‘행복’ 중)
분단에 갇힌 영혼, 시인 백석
김선호(현대사분과)
[사진 1]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 시절의 백석
도쿄 시부야에서 22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지금도 보기 드문 미남이다.
키 185cm의 이 미소년은 안타깝게도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이다. 안타까운 이유는 그의 인생에 담겨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이다.그렇게 유명한 시인이지만, 그의 집안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그는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백석은 아버지가 37살에 얻은 첫아들이었다. 그 뒤로 2남 1녀가 태어났다.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백석의 고향, 정주는 문인의 고장이다.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출신이다. 김소월은 1902년 평북 구성군에서 태어났지만, 백일 후부터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에서 자랐다. 백석의 아버지는 백시박(白時璞)으로 사진사였다. 그는 사진 기술을 익혀 조선일보에서 사진 반장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백석의 어머니는 이봉우(李鳳宇)다. 그녀는 서울 출신으로 백시박과 결혼해 정주로 왔다. 백시박과는 13살 차이다. 백석의 모친은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았다. 고당 조만식은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교장 시절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버지 백시박은 동향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도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버는 데는 재주가 없었던 듯하다.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에 있던 오산 소학교에 입학한다. 1924년에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한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는 이광수가 있었고,김억도 교사였다. 근대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이중섭도 오산학교 출신이고, 인민군 초대사령관 최용건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백석은 집이 가난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조선 문단에 등단한다. 백석의 소설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눈에 띄어 장학금을 받고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된다.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한 백석은 유학 시절 영어, 불어,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백석은 1934년 졸업해 귀국했다.
나타샤
유학 시절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백석의 첫 직장은 학교가 아닌 조선일보 출판부였다. 조선일보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여성』을 만들며 안톤 체홉의 작품을 번역해 신문에 싣기도 했다. 단편소설로 등단하고 번역가와 편집자로 활동하던 백석은 1935년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1936년 첫 시집『사슴』을 출간한다. 왜 그랬는지 백석은 이 시집을 100부만 찍었는데, 그의 시를 좋아한 윤동주는 시집을 못 구해 직접 필사해서 애송하고 다녔다 한다.
조선일보를 다니던 백석은 1935년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갔다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한 여학생을 만난다. 그녀는 이화여고를 다니던 박경련으로 백석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1912년생인 백석은 스물넷, 박경련은 열여덟이었다. 1936년 백석은 박경련을 만나러 두 번이나 통영에 내려간다. 그러나 번번이 만나지 못하고 올라온다. 이 시절「통영」이라는 시를 썼다. 다음 해인 1937년, 백석이 사모했던 첫사랑 박경련은 친구 신현중과 결혼한다.
[사진 2]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머리스타일과 양복 옷매무새에서 모던뽀이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백석은 더는 서울에 살기 싫었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 교사채용에 응시해 함흥으로 간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랑이 그를 찾아온다. 백석은 어느 날 학교 회식에 참석했다가 옆에 앉은 여인을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자야'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권번, 즉 기생출신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1937년 가을, 잠시 고향에 갔다가 부모님의 강권으로 맞선을 보고, 초례까지 치르게 된다. 허나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으로 달려간다. 백석의 초례소식에 실망한 김영한은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길로 이불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내려온다. 1937년 말의 일이다.
1938년 봄, 백석은 서울에 있던 청진동에 있는 김영한을 찾아온다. 둘은 다시 만나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백석은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간다. 그의 시「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1939년 6월, 출장을 간다고 하고 집을 나가 고향에 갔다가 또 한 번 혼인을 한다. 집으로 돌아온 백석은 말이 없었으나, 김영한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백석은 섬세했으나 유약한 남자였다. 1939년 말, 백석은 김영한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확실히 대답하지 않자 혼자 신경으로 떠나버린다. 신경으로 간 백석은 그곳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국내 문학지에「北方에서」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1940년 조광사에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를 번역해 출간하였고, 러시아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그도 사람인지라 먹고 살아야 했다. 백석은 만주에서 지인의 소개로 측량보조원과 측량서기를 했다. 일제 말기에는 안동(지금의 단동)의 세관에서 근무했다. 측량기를 들고 만주벌판에 서서 백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 3] 백석의 첫사랑 박경련(오른쪽) 신현중과 결혼한 후 통영에 내려가서 살던 신혼 시절의 사진이다.
[사진 4] 백석의 연인 김영한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녀의 법명이 ‘길상화’라서 법정스님이 절 이름을 ‘길상사’라고 지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백석은 중국 단동(丹東, 옛명 안동, 安東)에서 다리를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다. 그는 신의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고향인 정주로 갔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1945년 9월 백석은 돌연 평양으로 간다. 그의 평양행은 오산학교 시절 스승인 조만식 때문이었다. 조만식은 백석의 부친, 백시박과 가까운 사이였다. 백석은 조만식의 요청으로 러시아통역비서를 맡는다. 1945년 10월 중순에 평양 일본 요정 '가센'에서 열린 김일성 환영만찬에도 조만식과 함께 참석해 통역했고, 소련군정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 시기 백석의 행적을 증언해주는 이가 있다. 월남한 극작가 오영진이다. 오영진은 평양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를 졸업한 인물로, 일본에서 영화 조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에 참여한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아버지인 오윤선이었다. 8월 27일 건준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통합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확대 개편된다. 오영진은 조만식의 비서였는데, 해방 직후 백석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외사과장 백석은 본업인 시를 집어치우고 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하기에 바빴다. 최아립이라는 중노인(中老人)은 군사령부 직속 통역관으로 전출했으므로 노어를 해독하는 유일한 존재인 백석은 몸이 열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 - 하나의증언』, 중앙문화사, 1984, 83쪽)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사과장”이란 직책이다. 소련군 본대가 평양에 들어온 날은 8월 26일이다. 오영진은 백석이 소련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백석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외사과장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간부명단을 확인해 보았으나, 위원 이하의 명단은 찾을 수 없었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오윤선과 현준혁이었고, 32명의 위원이 있었다. 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군사령부와 수시로 업무를 조율했다. 백석은 이곳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외사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5] 당시 조만식은 머리에 종기가 나서 늘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가운데는 소련군사령부의 정치군관 메끌레르 중좌고, 양 옆의 여인들은 평양권번 기생들이다.
고요한 돈
백석은 러시아어 통역을 하던 중, 1945년 12월 평양에서 결혼한다. 신부는 당시 스무 살이던 이윤희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백석이 인민정치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닿은 것 같다. 백석의 신혼집은 평양 대동강가에 있는 돌각담집이었다. 그러나 시인에게 정치는 독약이다. 조만식은 11월 3일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가 결정되자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소련군사령부의 회유를 거절해 1946년 1월부터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조만식이 연금되자 백석은 비서를 그만두고 절필한다. 그는 시를 쓰는 대신 아동문학으로 전향한다. 그리고 외국문학을 번역하며 먹고 살았다고 한다.
1946년 이후 백석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그는 1947년 12월 당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1946년 3월 평양에서 결성된 좌익 문예단체다.문예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카프 출신의 한설야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문예총에는『두만강』의 소설가 이기영, 시인 임화, 평론가 김남천, 소설가 이태준도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문예총 외국문학분과에 소속되어 번역활동을 했다. 백석은 이미 일제 말기에도 영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 시절 백석이 번역한 작품이 미군이 북한에서 가져간 문서에 남아있다. 러시아 소설가 숄로호프가 쓴『고요한 돈』이라는 작품이다.『고요한 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품 외에 백석의 번역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50년 2월 20일에 북한 교육성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기 백석은 교육성에 소속되어 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출판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대개 '국립인민출판사'나 '조쏘문화협회'에서 출판되었다.
[사진 7] 미군 노획문서에서 발견된 백석의 번역 작품『고요한 돈』제2권
다른 작품들과 달리 우리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교육성’에서 출판하였다.
시인의 후반생...
시인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백석은 외국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아동문학작품을 쓰며, 그 원고료를 받아먹고 살았다. 그런데 백석은 1957년 북한에서 벌어진 아동문학 논쟁에 뛰어든다. 이 당시 백석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 창작실에 있으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백석은 순수 문학을 강조하며 계급적인 요소를 반대하다 비판을 받는다.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살던 그는 1959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협동조합으로 하방 된다. 그는 이곳에서 축산반에 배치되어 돼지와 염소를 키웠다. 삼수에 내려간 백석은 갑자기 창작 활동을 활발히 펼친다. 이 시기 백석의 시는 대부분 ...의 항일운동과 ...체제를 찬양하는 시였다. 대표적인 시로「사회주의 바다」,「강철장수」,「나루터」등이 있다.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시인은 구호를 쓴다.
...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
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
그 가슴속에 터지듯 불끈
맹세 하나 솟아 올랐단다
‘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백석,「나루터」)
이것도 잠시.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 1962년 완전히 절필한다. 그해 북한 교육문화상 한설야가 좌천되었다. 한설야는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국장이었다. 아마도 이때 조만식 계열로 찍혀 재능을 썩히고 있던 백석을 기용했던 것 같다. 한설야는 그 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맡는다. 월북한 예술가 중 가장 대우받은 인물이 한설야인데, 이는 그가 우상화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 북한 최초의 우상화 작품인『...장군 개선기』를 출판했다. 우상화 선봉장으로는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만도 유명했다. 결국 둘 다 좌천되었다. 한설야 좌천 이후 백석은 삼수갑산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글밖에 모르던 백석은 농사일을 제대로 못해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백석은 하루에 한 사람을 열 번을 만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갈 만큼 겸손하고 어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삼수군 사람 가운데 백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문학창작을 지도하며 살았다. 시인 백석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삼수에서 사망한다. 1996년 1월7일, 향년 85세였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한설야는 그 전에 지방으로 좌천되어 1976년 사망했다.
[사진 8]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에서 살던 말년의 백석
이 사진은 그의 아들이 보관했던 사진, 백석 왼쪽이 부인 이윤희, 뒤가 둘째 아들과 막내딸이다.
왼쪽 사진은 백석의 인민증(주민등록증)이다. 아들ㆍ딸을 낳아 키우며 85세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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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해방 후 서울에 있던 김영한은 제법 돈을 모았다. 그리고 전쟁 중이던 1951년 삼청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구입한다. 당시에 정치협상은 국회가 아니라 요정에서 이루어졌다.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 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부수상이 미국 측과 몰래 만난 곳도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이란 요정이었다. 그렇게 역사의 뒤편을 목격해온 김영한은 1980년대까지 수백억의 돈을 모은다. 그리고 이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한다. 지금의 삼청동 길상사다. 그녀는 1999년 11월 14일 사망했다. 백석의 부인 이윤희와 자식들은 아직도 삼수군에서 살고 있다.
신현중과 결혼한 박경련은 어떻게 됐을까? 박경련은 결혼 후 서울 가회동에 살았다. 가회동 시절 신현중은 백석을 가회동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들어서는 백석은 어색해서 얼굴이 빨개졌고, 박경련은 자리를 피해 옆에 있던 외삼촌집으로 갔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현중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다. 퇴직금을 받은 후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간다. 부부는 충무공 사당이 있는 명정동에서 살았다.신현중은 원래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다. 그는 경성제대 시절 반제동맹사건을 주도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통영에 내려온 후 진주 여고와 통영 중학교 등에서 교직에 종사하며 평생 통영에서 살았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지방에 살면서 정치판에 나가지 않은 보기 드문 경우다. 그는 1993년 10월 13일 통영에서 사망한다. 박경련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녀는 통영에서 문학 활동을 했는데, 남편 사후 그를 사모하는 시를『늘빛문학』을 통해 절절이 전하곤 했다. 김광석이 가수는 부르는 노래처럼 산다고 했던가? 지금도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백석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그림 ] 1959년부터 1996년까지 백석이 38년 동안 살았던 북한 양강도(원래 함경남도) 삼수군 백두산이 있는 개마고원 끝으로, 국경 너머가 중국 장백현. 삼수군 주변은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보천군’ 등등. 한설야도 하방된 이후 양강도 낭림군의 협동조합에서 살았다.
나타샤를 찾아서 - 시인 백석과의 가상대담
백석의 처녀 시집 『사슴』이 발표되었던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 군국주의 파시즘의 수탈로 인해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던 민족 수난의 시기였다. 당대의 문학사 역시 국민문학과 계급문학의 첨예한 대립에서 계급문학 쪽이 수세에 몰리던 시기로, 한쪽 눈을 감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외눈박이 시절의 탄생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 현실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도 1930년대 문학은 예술성과 모더니티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꽃을 피웠다.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문학의 꽃을 피웠고, 주지주의 문학이론의 전개를 바탕으로 모더니즘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민족어의 시적 심화와 기교적 탐색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런 면에서 ‘구보씨가 경성을 거닐던’ 이 시기는 한국 현대문학 사상 전환기라는 의의를 가지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문학도들로부터 구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만큼 숱한 유명 시인들이 나타나 화려한 작품세계와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1930년대는 많은 유파 - 시문학파, 주지파, 생명파 등 - 의 등장으로 그 속에다 시인들을 구겨 넣는 분류의 오류를 범하면서 몇몇 시인들의 성과가 빛을 잃기도 했다.
백석이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유파에도 끼워지지 않아 당대에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불운한 시인이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오늘날 그는 모더니즘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풍으로 발전시켰다는 찬사를 받는가 하면,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방언의 사용은 모국어 고수라는 측면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30년대 국가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시집 『사슴』에 나타나는 향토적 이미지를 고향 상실과 접목시키면서 그의 고향의식에 대해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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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나이 일흔 중반일 무렵의 사진.
백석 연구가 송준 씨가 1999년 ...입수.
백석과 부인 이윤희, 두 자녀.
백석에 대한 관심은 작품세계 뿐만 아니라 일화에서 육필원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다. 자야 여사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지고지순한 시인의 사랑이 화제가 되었다. 2001년에는 1995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의 말년 사진이 공개돼 관심을 모았고, 그해 9월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육필원고가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2003년 대입 수능에서는 그의 시 「고향」이 인용된 문제가 복수정답 파문으로 화제가 되면서 ‘수능 시인 백석’이란 별칭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각별한 관심 속에서도 아직까지 백석은 분단과 주목받지 못한 반세기의 소외로 인해 많은 부분이 배일에 가려져 있다. 하여,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릴 날을 기다리는 이때에, 백석을 만나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 하나 풀어본다.
오 선생님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처녀 시집 『사슴』 출간 이후 빼어난 시작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단에서 홀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기림과 박용철 정도가 호의적이었던 같고, 오장환, 임화, 김남천 등은 굳이 격하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 글쎄, 순수시와 모더니즘에 관심 있는 쪽에서는 향토적 정서에 후한 점수를 줬을 테고, 반면 임화나 김남천 등 카프계열에서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모던 현상의 한 지류로 보고서 호의적 입장을 취하기는 힘들었을 것일세. 1940년에 나온 최재서 선생의 시단평을 기억하는가? 그분의 말마따나 어느 유파에 넣고 평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네.
오 요즘 학자들의 추측과 별 다르지 않군요. 하지만 이 시대에 와서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아주 큰 간극을 보이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높은 찬사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첫째, 리얼리즘 내지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평안도 방언의 구사와 모국어 고수가 특별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고전적 모더니즘의 잣대인데, 자신만의 독특한 시풍을 확장시켰다는 평가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특정 관점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백 반세기가 지난 이 시대에 북쪽도 아니고 이곳 남쪽에서 이런 후한 대접을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네, 그려. 특히 모더니즘을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시풍으로 발전시켰다고 평가를 해주니, 시인으로서 이만한 찬사가 어디 있을까 싶네. 하지만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방언의 사용을 민족주체성의 확보로 높이 평가해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 그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네.
오 시집 『사슴』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집약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향’이란 이미지에 천착하여 자족적 공동체의 삶을 설화적이고 동화적으로 노래한 시세계에 주목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감각주의적 시세계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도 많은 연구가들이 첫 번째의 ‘고향’ 이미지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 화자가 현재 시제로 고향의 풍속을 보여주는 시는 여성적 이미지, 특히 어머니의 이미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머니는 늘 아버지와 짝으로 등장하며, 많은 가족 혹은 가족에 준하는 인물들과 같이 등장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가는 선생님의 ‘고향’은 상상적 어머니이고, 그리움의 자체는 곧 결여의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백 설화적이고 동화적인 시세계는 내가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분야라네. 자네도 알고 있듯이 나는 북쪽에서 아동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집게네 네 형제』란 동화시집을 출간하지 않았는가? 사실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서 나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보다는 소극적인 내면세계로 침전할 수밖에 없었네. 그런 면에서 민족시인이란 과대평가에 많은 부담을 가지는 것이라네. 고향 이미지가 상상적 어머니이고, 그리움의 결여라는 견해를 접하고는 남쪽에서 소개되고 있는 나의 작품들을 찬찬히 한 번 훑어보았네. 그중에서 어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이 화자가 현재 시제로 고향의 풍속을 보여주는 초기 시밖에 없고, 어른 화자로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가 언급되는 작품은 「흰 바람벽이 있어」 한 편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당대의 많은 시인들의 시가 고향을 노래하거나 고향 지향성을 드러내면서 그 고향 자체를 어머니의 이미지로 처리하는 방식을 많이 보였는데, 그런 관점에서 특이하게 받아들일 만했던 것 같네. 특히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는 「고향」이란 시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런 견해들이 어느 정도 힘을 받지 않았나 싶네.
오 『사슴』의 목차는 4부로 구성돼 있습니다. ①얼룩소새끼의 영각 ②돌덜구의 물 ③노루 ④국수당 너머. ‘얼룩소새끼의 영각’은 송아지가 암소를 찾는 황소의 울음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인데, 연구가들은 암소는 어머니의 세계를 가리키고, 황소는 바로 선생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이 시편에 나오는 「고야」 「여우난골족」 「가즈랑집」 등의 시들은 아이 화자가 어머니의 세계가 그리워 그 세계를 목놓아 부르는 소리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시들은 당대의 시인 오장환의 평처럼 갖은 사투리와 옛이야기 등 묵은 추억들이 아무런 질서 없이 곳간에 볏섬 쌓듯이 마구 섞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엄마를 찾는 아이의 절규, 즉 ‘얼룩소새끼의 영각’이 없습니다. 엄마는 그저 고모, 할머니와 같은 가족 구성원의 일부분에 불가합니다. 적어도 ‘얼룩소새끼의 영각’이 되려면 가즈랑집 할머니에 대한 연민이 잘 드러난 「가즈랑집」 같은 시 한 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백 그런 견해도 남쪽에서 소개되고 있는 나의 작품들로 살펴볼 때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느끼네. 「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에서는 분명히 어머니가 서울서 왔다고 되어있는데, 「외가집」의 이미지에서는 ‘수원백씨 정주백촌’의 ‘여우난골족’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네. 어머니와 외가집의 간극은 충분히 의식적 조작으로 볼 만하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오장환이 비판한 시들은 무의식의 흐름에 충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네. 어떻게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을 공통무대로 하여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어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영문학도였던 나는 한때 『조이스와 애란문학』을 번역하지 않았던가?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내용이 주제에서 자주 벗어나 논리적이지 못하고, 또 어휘사용에 있어서도 실수가 많아 통상적인 용례를 많이 벗어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네.
오 선생님의 시들을 감상하다 보면 동정과 연민이 교차하는 관조적인 여성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정문촌」처럼 먼지가 켜켜이 앉아 낡고 흉물스럽고, 「흰 밤」의 수절과부의 죽음처럼 슬프고, 「여승」처럼 쓸쓸하고 서럽고, 「팔원」의 계집아이처럼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터져 아프고, 그래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 한때 선생님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두고 나타샤가 누구인지가 큰 관심으로 떠올랐습니다.
백 나타샤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네. 시는 시로서 감상하면 그만 아닌가? 「통영」에서는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과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와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千姬”의 이미지를 느끼면 그만이고,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는 “푹푹 눈이 내리는 겨울밤”과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생각하는 나타샤”와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들어가는 풍경”만 느끼고 감상하면 그만 아닌가?
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역시 시인은 시로서 이해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유랑과 월북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백 이 역시 작품으로 감상하면 그만이네.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통해 ‘낙백한 영혼이 보이는 비관론의 절창’으로 보든, ‘체념수락의 수동적 세계관으로 후퇴’라고 보든, 유랑의 세월을 성찰의 모색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걸세. 그리고 월북이 무슨 말인가? 아직까지 분단의 잣대를 들이대야겠는가? 평안도 정주 출신이라면 몰라도, 재북이란 표현도 합당하지 않는 것 같네. 어쨌든 이렇게 기억하고 찾아줘서 즐거운 시간이었네.
글 / 오명근_프리랜서 작가. 팩션소설 <그 이상은 없다> 등
백석_시인.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본명 백기행. 오산중학과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하였다.
평북 방언을 사용하여 토속적인 세계를 그리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여 개성적인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애초 1963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유족들에 의해 1995년에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대산문화>
시인 백석(白石) 이야기 시인 백석(白石)의 이야기를 몇 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시에 대한 제 감상은 따로 적지 않습니다. 백석의 시어와 배경 스스로 읽는 이의 가슴 속에서 저마다 공명을 불러일으킬 터이니까요. 백석에 대해서는 자야(子夜)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렵니다. 자야 김영한은 삼청각ㆍ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요정의 하나로 한 시절 뭇 정객들이 요정정치를 하였던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습니다. 법정(法頂) 스님에게 1997년 당시 시가 1천여억 원이었던 그곳을 시주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가 되었지요. 자, 그럼 시 감상부터 할까요.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멫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곬족 : 여우가 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매감탕 :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혹은 메주를 쑤어낸 솥에 남아 있는 진한 갈색의 물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오리치 : 야생오리를 잡으려고 키를 끈 달린 막대기로 받쳐 물가에 세워 놓은 것 반디젓 : 밴댕이젓 숨굴막질 : 숨바꼭질 화디 : 등경(燈檠). 등경걸이.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놓는 기구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턴낪새. 처마의 안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부고장 같은 것이 오면 방안에 들이기를 꺼려 이곳에 끼워놓는 풍속이 있었음 무이징게국 : 징거미(민물새우)에 무를 숭덩숭덩 썰러 넣고 끓인 국
백석과 자야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과 헤어짐 우리나라 현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평가된 바 있는 백석(본명 백기행白夔行)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정주 출신 시인 김소월과 오산학교 선후배 사이로 10살 위 소월을 무척 따르고 선망하였습니다.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 <녀성> <조광>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6년 서정시집 <사슴>을 출간하면서 문단의 혜성으로 떠올랐는데, 한정판 100부 출간 탓에 당시 문학 지망생들에게 이 시집을 필사하는 것이 대유행이었으며, 윤동주도 이 시집을 필사해서 간직했었다고 합니다.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평론가 김현), “한국 사람만이 미득(味得)할 수 있는 최상의 시”(평론가 유종호). “난 나의 ‘시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댄다”(시인 신경림) 등의 찬사가 잇는 백석은 한국 현대시사의 전설입니다.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백석은 1939년 홀연히 만주로 떠납니다. 호구를 위해 소작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귀국 길에 올라 잠시 신의주에서 거주하고는 고향 정주로 돌아옵니다. 분단 이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백석의 문학적 성과와 활동은 한국문학에서 매몰되고 세인에게는 한동안 완전히 잊힌 작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1988년 해금이 되자 백석 붐이 일어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극악무도했던 유신시절 대학 때 시집 <사슴>을 어렵게 복사하여 무슨 불온문서인 양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시험에도 자주 출제될 정도니, 금석지감(今昔之感)! 백석과 자야 김영한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조선일보 퇴직 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이루어집니다.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내가 스물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 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며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 자야 여사의 회고 ▶100부 한정판으로 찍은 백석 시집 <사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36년 1월 20일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낸 시집 표지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서지인’이 뚜렷합니다. <사슴>은 2005년 계간 시인세계의 설문조사에서 한국 현대시 100년사 최고의 시집으로 꼽혔습니다. 백석이 ‘자야(子夜)’라 부른 김영한(金英韓)은 관철동 반가(班家)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몰락하자 조선 권번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명을 받고 기생이 됩니다. 그러나 평범한 기생은 아니었습니다. 정악계의 대부인 금하 하일규 선생에게 궁중무와 여창가곡을 배우고, 파인 김동환의 추천으로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해 ‘문학기생’이라는 별칭도 듣습니다. 훗날 자야는 여창가곡을 복원하는 데 힘쓰면서 김진향이라는 기생 때 이름으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도서출판 예음, 1993)을 펴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죠. 자야의 총명함은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눈에 띄어 그의 주선으로 1935년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이듬해 해관이 함흥교도소에 투옥되자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함흥으로 가지만 면회가 이루어지지 않자 실력자와 접촉하기 위해 다시 권번에 들어가 기생 옷을 입습니다. 그 때 마침 영생고보에 부임해 온 백석과 어느 연회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댄디보이 백석’과 ‘문학기생 진향’은 운명을 직감합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샙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줍니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수자리하러 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죠.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백석 자신이 두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1937년 함흥 영생고보 교사 시절의 백석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자야 여사의 회고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도피. 자야는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옵니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입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은 여관에 투숙시켜 놓고 자신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웁니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니다 학생 지도 합동 단속 교사에게 적발됩니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자야와 살림을 차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상(李箱)도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종로 우미관 뒤편에 살림을 차리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 다방을 엽니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 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의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 자야 여사의 회고 ◀조선 권번 기생 시절의 자야 김진향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습니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합니다. 백석은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도망쳐 나와 자야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두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 도피행을 설득하지만 자야는 거절합니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이때의 백석의 심경을 을은 작품입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1939년 백석은 홀연히 만주 신경으로 떠납니다. 자야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그리고 그 길이 자야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맙니다. 만주에서 백석은 여러 일에 종사하다가 해방 직전에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작 일을 하는 등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합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 신의주 변두리의 한 하숙방에서 잠시 묵게 되는데 이때에 시 한 수를 써서 서울의 친지에게 부칩니다. 이것이 남한에서 발표한 그의 마지막 시이자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애송하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유명한 시입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야 여사의 회고.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 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 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 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 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은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을 1987년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가 정착한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인 셈이지요.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백석문학이 해금이 된 1987년 11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은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는데 한 달 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동순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자야 김영한 여사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습니다. 자야 여사는 이동순에게 자신을 백석이 지어 준 이름 ‘자야’로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지난날을 털어놓습니다. ▶젊었을 때의 자야 여사 이동순은 1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여 세상에 백석의 여인, 자야 여사의 존재가 알려집니다. 이 글이 나온 뒤에 어느 날 자야 여사에게 이동순은 백석과 보낸 3년간의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합니다. 자야는 백석과의 사랑의 세월에 대한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너무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나 평생을 사모한 사랑이기에 심혈을 기울여 1995년에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합니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지요. 생전의 자야 여사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자야 여사에게는 백석의 시를 혼자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자야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기부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고, 이어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에 있는 옛 대원각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 원 대의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그의 법명 길상화(吉祥華)를 딴 길상사를 세웁니다. 이 일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자 자야 여사는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니 의미가 없다”는 말만 남기고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2000년 4월 길상사 경내에 세운 서울대 최종태 교수의 작품 관세음보살상. 성모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이라 하여 유명한데, 그 앞에 서면 자야 여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과 자야,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임종 열흘 전 문병 간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유언대로 자야 여사는 사후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습니다. 까치가 날아와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백석일까?
백석은 한동안 1963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1년 뜻밖에도 이북에서 결혼한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가족사진과 함께 소식이 날아 들어와 그가 1995년 11월경 사망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야는 이 소식을 생전에 못 듣고 말았군요... 백석은 해방 후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면서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을 번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ㆍ25 전쟁 중에는 중국에 머물다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 파견작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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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백석의 시는 국내 시문학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시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주옥같은 시 110여 편은 시인으로서 남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시를 우리 국민들에게 선사를 해 주었다.
백석의 초기시들은 그대로 고향의 정취가 가득한 풍경호를 연상케하는 수준 높은 명시들로 이루어졌고 시집 사슴 이후의 시들에 해당하는 중기의 시들은 시인 백석의 성숙해져가는 서정적 자아가 펼치는 주옥같은 명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중기시들을 지나서 백석의 후기시들이다. 만주시절을 중심으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작품들은 한국시가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박씨, 호박씨〉를 필두로 해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까지의 시들이 그것이다. 친구를 노래한 〈허준〉이나 만주의 목욕탕을 묘사한 〈조당에서〉 그리고 〈두보나 이백같이〉와 〈북방에서〉 그리고 〈힌 바람벽이 있어〉나 심지어 남의 시집에 써준 서문격인 〈호박꽃초롱 서시〉는 백석이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시금석이기도 했다.
백석의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인 〈나 취했노라〉는 친구인 노리다께 가쓰오에게 개인적으로 써 준 시였다. 술을 마시면서 둘의 우정이 변치 말자는 뜻에서 백석이 술에 취해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말로 끄적거려 써준 시였다. 이 시를 받아본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쓰오는 평생 백석의 시를 찬미하고 백석을 우러르는 백석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시 한편으로 일본의 시인을 감복케 한 백석. 그 결과 평생 백석을 흠모하는 시인이 된 노리다께 가쓰오. 국경을 초월한 우정이 지금도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정녕 이것이 시인의 역량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시인 백석의 찬란한 면모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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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사랑에 긴 이별
ㅡ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사랑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 여사’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지요.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 서울 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에라 머리나 식히자고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그대는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신 선생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저는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그대는 술잔을 저한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지요.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시던 그대의 부모님은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지요. 쉰이 넘은 그대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습니다.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대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7년 4월에는 그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분과. 저는 그저 애인 정도였고, 란이란 분과 결혼을 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돼버린 것입니다.
다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8년 봄이었지요. 저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그대의 아내가 누구이던지 간에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이 납니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일보사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넥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반찬을 좋아했지요.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 들이기로 했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테지요.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에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황급히 나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더군요. 저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새색시를 버려두고 또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숨어살고 싶었나 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 권했지만 저는 기생으로서의 제 생활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겠지요. 그대의 역마살을 제 사랑이 부족하여 붙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분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였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저는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자야 여사는 1999년에 작고하였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여사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 갔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ㅡ『빠져들다』에서
여기의 김영한 여사는 언제 시인이 가장 보고싶냐는 기자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때가 따로있겠냐는 대답을 했고 대원각을 길상사로 봉헌할때 백억이 아깝지 않냐는 물음에 "백억도 백석시인의 시 한줄만 못하다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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