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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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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보다 독한 술은 없다... 있다...
2016년 03월 02일 03시 56분  조회:3950  추천:0  작성자: 죽림
선술집에서

강만수


창 밖으로 늦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양철 원탁을 가운데 두고 시큼한 홍어회 한 접시를 앞에 놓은 채
날 숨을 들이키듯 잔을 비우면
식탁 밑으로 빈 소주병과
프라스틱 막걸리통은 바닥에 넘어진채로 굴러
까칠한 얼굴과 무거운 침묵.
땀방울에 젖은 몸은 슬픔을 부비며 고개 숙이고
낯설은 세상살이에 하! 많이 아파
입안 가득 담은 욕설처럼 어깨를 들먹이면
열에 들떠 더러는 자리를 뜨고, 몇몇 사람들은 남아 훌쩍이듯
속 맘을 나눈다.
굶주린 들꽃같이 떼지어 몰려들던 오랜 욕망과 기억할 수 없는 상처.
부담없이, 훌훌 일어나 휘적휘적 어디 어디에
다 썩어 이제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 난잡한 변명처럼
푸른 물, 흙 묻은 얼굴.
눈과 귀를 씻으며 찾아 헤매었던

아! 그대, 이제는 따뜻한 집을 짓고 싶다.

 

숭어회 한 접시

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소주

최영철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쟝르에 있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를 토악질로 여기가지 보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희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은 아니다.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곰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아름다운 폐인

한명희


미쳐도 어쩜 이렇게
지저분하게 미쳤을까
소주물에 넣고
헹구어 주고 싶다
쓸쓸한 눈빛 하나만 남기고
모두 소독해 주고 싶다

그래도 남아 있을 네 눈물기
귤 껍데기 같은 네 곁에 누워
살보시라도 해 줄까

해는 지는데
집에 가기가 싫어......


오늘의 병

박정만


어제도 세 병 반의 술을 비웠다.
비우고 비워도 마음은 비워지지
않았다 병만 깊어 가고

늘어 가는 병을 바라보며
깊어 가는 병을 생각했다 봄꿈처럼
허망한 일에 꿈을 걸고 다시 봄이 오리라고
기다리는 일처럼 부질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초에 천번도 넘는 죽음을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래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 법이라고
퀭한 눈에 힘을 주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백번도 넘게 길을 떠났다.

길은 실타래처럼 수없이 헝클어지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찾아
오늘도 세 병 반의 술을 기울였다.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내가 먼저 기울어지고
석 달째 세 병 반씩 곡기는 끊고
곡기를 끊은 것이 아니라 위장이 반란을
일으킨다 나를 일으키기 위하여
나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술기운으로 사랑과 시를 생각하는 것도
좆이거나 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씩 사랑과 시를 버리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아내도 친구도 버리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도 버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기
모든 것을 다 버리기.....


포장마차

이건청


소주에 젖은 자정,
꽃도 잎도 없이 앙상한
장미밭 철조망 길로
푸슬 푸슬 첫눈이 내렸다.
毒氣에 잡힌 시인아,
미친 시인아,
잠도 자렴, 꿈도 꾸렴
흩날리는 말, 말, 말들이
환청으로 스치고 있었다.
아, 첫눈이었던가
포장마차 되어 웅크린 날들,
다져진 푸른 파와, 붉은 고추와
연탄 불과 석쇠와, 석쇠 위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익던
딜런 토머스와 스티븐 스펜더
신구문화사 판 세계전후문제시집
르네 샤아르……
그런 날들은
지쳐 시들어 버렸거나 너무 먼 곳에
기가 꺾여 서 있다. 그리고 그리로
고속화 도로가 났다.
그 때 그 포장마차들의 자리로
정체된 차량들의 행렬이 늘어서
깜빡이를 깜빡이고 있고
찾아도 찾아도 흔적조차 없다.
2차던가 3차였던가
상의를 벗어든 채 귀가하던
포장마차 같은 청년 하나,
거기 살며 남편이며 애비였던
사내 하나, 먼 곳에 웅크리고 있다.
다만,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소주병과, 일회용 컵과
볼펜, 크레디트 카드 사용 전표와
쉰네 살 된 시를 담은
비닐봉투들만 수상하게, 의심스럽게
쌓여 있다.

 

잔없이 건네지는 술

류시화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취객

이윤택

 

난 말이야.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백 살까지 살고 싶었어
술에 반쯤 절어서 기분 좋게 죽고 싶었어
봄에는 아지랑이 속에서 나도 아지랑이 되어 흥얼거리고
여름에는 뜨거운 자갈돌에 알몸으로 퍼질고 누워 독한 중국 술을 빨고
가을에는 단풍을 안주로 삼고
겨울에는 메주로 익고 싶었어
내 관절 마디마디 술이 가득 고여서
흐르는 시간 속에 형체도 없이 스며들어 가는 액체로
영혼 저편으로 흘러가고 싶었어
그런데, 틀렸어, 다 틀렸다
이 세상이 날 술 마시게 하지 못했어
십 년을 긴장하고 살다 보니까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아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한다 하길래
그렇게 십년을 보내고 나니
내 관절 마디마디가 굳어져서
당취 술을 받지 않아
그래서 난 지금 복날 털 빠진 개로 이렇게 드러누웠어
소주가 되려고

추억에 대한 경멸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가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 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주

한용운

 

가을 바람과 아침 볕에 마치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고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들입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잔에 가득히 부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

님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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