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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씨를 뿌리는 시인 - 이시환
2016년 03월 12일 02시 37분  조회:3645  추천:1  작성자: 죽림

생명의 씨를 뿌리는 시인

-이시환의 전 시집을 읽고 평문을 써가는 끝 무렵에 나와 시인과의 관계를 뒤돌아보며

심종숙

 

 

이시환 시인의 시업(詩業)은 전체 13권의 시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더 전개될지 모르지만 2015년 12월 현재까지는 그렇다.

시인은 말씀[言]의 절[寺]에서 수행(修行) 정진(精進)하는 사람이다. 시를 쓴다고 하여, 시를 쓴다기에, 대개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해서 ‘시인(詩人)’이라고 불러준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일본의 어느 시인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 시인은 스스로 시인이라 불리는 것을 꺼려하였다. 오히려, “저와 같은 사람은 시인이 아닙니다.”라고 난처해하며 말했었다. 그 중의 한 명은 “진정한 시인은 10년에 한 사람 정도가 나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근현대시사에서 100명 안에 들며, 예리한 평론가와 원로가 된 지금에도 시의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서 여전히 예술의 전위에 서서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이다. 그런 분도 ‘자신은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는 좋은 인상이 아주 깊게 박힌 것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을 다 읽고서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애써본 나의 입장에서 나는 지금까지 서른 편 가까운 평문을 썼지만 그의 시세계를 다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날씨가 춥고 동지(冬至)가 가까운 이 어두운 계절에, 나는 그의 시업을 지난 여름부터 줄곧 읽어오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시인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서서히 심신(心身)이 지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런 작업 중에 일용할 양식과, 건강과 기분전환을 위하여 밥과 술을 사주시며, 글 쓰는 고통을 위로해 왔다.

나는 내 스스로 이시환 시인과 인연이 깊다고 생각한다. 시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내게 큰 관심사도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시인의 생각도 살피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나의 작업에는 그렇게 그와 나의 친분관계를 따져 묻거나 신경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좌우간, 한 20년 다 되어가는 인연인 것 같다. 90년대 중반에 내가 결혼하기 전 처녀시절이었었다. 나 나름대로는 학문과 창작의 길을 걸어보리라 마음먹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낯선 환경에 적응할 때였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편해지게 된 3년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곳 서울의 추위도 힘들었고, 표준어, 식초나 후추 설탕 등을 많이 쓰거나 간이 짙은 음식,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 지나쳐야만 하는, 냉랭하면서도 인간미가 나지 않는 빌딩 숲 사이 골목골목을 누비며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러면서도 조직화된 서울은 한국 사회의 커다란 ‘견본’ 같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초보자인 양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의 빌딩들 속에는 크고 작은 공적 사적 단체의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기 위하여 머물고, 저녁에는 하루의 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밥이나 술로 동료들과 어울려 달래면서, 밤이 되면 자신이 소유한 집이나 세 들어 사는 집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또 나오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인지되었었다. 수없이 많은 집들 중에서도 자기 집을 소유하지 못하고 심지어 딛고 서 있는 땅 한 평도 자기 것이 없는 서울 사람들은 종로, 명동, 을지로, 신촌, 홍대, 강남 등 거대한 부가 번쩍거리는 땅을 밟으며 끊임없이 흘러간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학문을 해보겠다고 고향에서 나와 대구를 거쳐 서울로 와서, ‘안암문예창작강좌’의 문우들과 함께 문학 창작의 길을 꿈꾸었었다. 그 때에 나에게 시집을 주시며, ‘희망’이라는 글자를 써주셨던 선생님은 이제 정년을 앞두셨고, 그 때로부터 시 창작을 했던 나는 불행하게도 2003년에 이미 끝나버렸다. 나의 시 창작의 샘이 말라버려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바라시’ 동인회에 들어가 총무를 할 때, 어느 날 만났던 분이 이시환 시인이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추신(追伸)』이라는 시집을 받아서 읽다가 이해가 안 되어 읽는 걸 그만두었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참으로 시 창작에 의욕적인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 이유인 즉, 그 분이 문학평론가이기도 하여 시 창작 관련 합평(合評)을 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던 우리 동인들에게 시 창작 지도를 해주었던 듯싶다.

그 후 내가 일본시가 전공이기 때문인지 나중에 그 분으로부터 일본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고, 그 때로부터 시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잊을 만하면 만나는 기회가 생기고, 또 그러다가 내가 삶의 심산을 마시고 죽을 힘만 있었으면 죽었을, 그래서 어떤 글도 쓰지 못할 때에 그분의 권유로 시와 문학평론으로, 그것도 그 분이 발행인으로 있는 종합문예지 격월간 「동방문학」에서 이유식 원로 문학평론가의 심사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았다. 그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한 채 방바닥에 누워서 지낸 시기였었다. 내 나이 40대 초반의 일이다.

그 후 심신이 여전히 아픈 상태였는데 나에게 당신의 시 10여 편을 이메일로 보내며 촌평을 좀 써달라고 청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원고를 읽으며 그나마 뭔가 해봐야겠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로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 때도 내 정신은 혼미하여 논리적으로 뭘 쓸 것 같지는 않았었는데 그의 시 작품 속에는 내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고, 또한 뭔가 끄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의 생활은 여전히 어두운 수렁 속에 가라앉아 있었는데, 겨우 ‘마음의 분노’를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 성조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의 빛으로 마음을 비추어 2년간의 정화(淨化)의 시간을 가지면서 삭이어 갈 무렵이었다. 그 해 2월에 나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몸에 외상까지 겹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고, 그 일로 나는 충격과 슬픔으로 더 고통스런 상황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심지어는, 나의 가정이 해체되는 이혼의 고통 속에서, ‘불행은 언제나 연쇄적으로 오는구나.’를 생각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내게 딱 들어맞았다. 눈이 내리고 그 위에다 다시 서리가 더 내린다는 말이니 ‘혹독한’ 상황일 게다.

불행의 도가니에 갇혀 있는 듯한 그 시기에는 이상하게도‘유혹(誘惑)’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아픈 처지로 있다 보니 대학 강의도, 글 쓰는 일도 못하게 되고, 뒤따라오는 것은 지독한 물질적 궁핍이었다. 어느 대학에 강의 갔다가 돈을 줄 테니 논문을 써달라는, 정당하지 못한 제의가 바로 그런 유혹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아서가 아닌 냉수욕을 하며, 한 겨울에도 연료비를 못 내어 전기장판으로 버티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나 할까, 크리스마스이브 날, 궁색한 내 집에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기쁨의 날도 있었다. 이 무렵, 나의 생활이란 거의 얻어먹으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나는 내 자신이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기도 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양쪽(친가와 외가) 가족, 사회, 일터 등 모두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憤怒)’로 가득 차고 있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보스런 나 자신에 대한 자학(自虐)과 분노(憤怒)였다. 도무지 스스로와 화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조 요셉을 2년에 걸쳐서 세 번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통회(痛悔)로 괴로울 무렵에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경운기 사고소식을 들었다. 급히, 시골집으로 내려가 가슴과 어깨, 팔 등 반신을 붕대로 감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다가 제부가 갑자기 많이 아프다는 소식까지 들으면서, 나는 내가 분노로 가득하고 이렇게 원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저 분들이 죄 없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없이 슬퍼서 울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다 내가, 죄가 많고, 못나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요셉처럼 나를 구렁텅이에 던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내 스스로가 나 자신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젊은 혈기를 제멋대로 썼던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 멋대로 살아온 결과였고, 내가 자초한 파국이었다. 가족들과도, 심지어 같이 살고 있는 아들에게도, 나는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하고, 어미 노릇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심신의 병마를 껴안고 아들까지 괴롭히는 어미가 되었다.

그런 혼돈(混沌)과 슬픔과 분노(憤怒) 속에서 난파의 세월을 살면서 나는 늘 아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심리 상담소를 들락날락 했으나,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정작, 고쳐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내 병이 고쳐지지 않으니 아들의 병이 고쳐질 리 없었고, 아들은 못난 어미 때문에 병이 더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요셉은, 이복형제들이 죽이려 했고, 르우벤의 간곡한 설득으로 형제들은 그를 겨우 목숨만 살려 구렁텅이에 던져 넣듯 이집트로 종살이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 처지의 그가 천신만고의 고난과 시련과 유혹을 극복하고, 파라오의 재상이 되었다. 7년간의 기근 동안 온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 이집트로 양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을 몇 번의 시험 끝에 자신을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과 온전히 재회하고 불행한 과거를 용서하면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자신의 품에서 보살펴 주었다. 이런 내용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모두 내가 못난 탓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관계(關係)들과 화해한 후 분노가 마음에서 떠나자 아버지가 돌연 돌아가셨다. 이 못난 삶을 살아온 나는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그 후,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를 때였다. 이시환 시인이 당신의 전 문학 작업 결과인 저서들을 큰 박스 하나에 넣어 가지고 와서는 자신의 모든 저작물이라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일독해 보고 가능하면 평가해 보라 했다. 나는 정말 부담스러웠고, 이 분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나 싶었다. 내가 한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시와 평론 등단도 그 분의 권유로 했을 뿐인데, 그것도 그분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어서 도리 없이 응했을 뿐이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 그 당시에는 죽을 힘만 있으면 죽어버리고 싶다고 늘 생각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시인이 되고 문학평론가가 되는 일조차 나한테는 아무런 위로도 의미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내가 해왔던 모든 일에 대해 회의(懷疑)와 절망(絶望)뿐이었고, 그 어떤 일도 하기가 싫었었다. 철저한 무력감으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악의 세력은 한 인간을 완전히 거꾸러뜨려서 쓰러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한 듯 나는 그렇게 스스로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이시환 시인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그 간의 저작들을 박스에 담아 가을비가 오는 어느 날 내가 사는 동네로 와서 건네주고 갔다. 나는 그 때만 해도 어디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고, 집과 늘 나가는 성당, 학교뿐이었다. 학교는 1주일에 한번 나갔고, 그 외에 다른 데는 가급적 나가지 않았고, 나가는 것 자체도 싫었었다. 나의 유일한 호구지책인 대학 강의도 정말 어쩔 수 없이 했었고, 그것은 심히 정신적 부담이었으며, 나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이런 죄스런 마음으로 더 강의한다는 것은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다녔었다. 시인으로부터 받은 책 박스를 한 달에 30만원을 주고 사는 반지하 셋방의 좁고 어두운 거실에 두고는 한 달 동안 가슴이 짓눌렸다.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지냈었다.

 

나는 일본문학에서 출발하여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때까지의 내 삶을 저주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일근대시 비교, 그러나 그 안에서 문학과 종교적 영성의 접점(接點)을 찾으려다가 스스로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기억 속에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도시가스를 들여 넣어 라이프라인이 제대로 가동된 바로 그 날에 나는 성경 신구약 전권을 어두운 반지하방에서 17년 넘게 쓴 나무책상에 앉아 만 1년만에 요한묵시록의 마지막 챕터를 덮었다. 그 분한테는 말할 수 없이 죄송하였다. 변명하자면, 그 해 가을은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었다. 그래서 결국은 병을 일으켜 한 밤 중에 응급실을 찾고,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울화병’에 시달렸다.

그 무렵, 나는 어떤 할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가족들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셋방에 독거하고 있는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는 환청(幻聽)환시(幻視)가 보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본당 수녀님이 써준 주의 기도와 성모송, 영광송 등으로 밤새 기도하며 바쳤던 밤에는 천국의 예수님과 성인성녀를 만났다며, 자신의 딸이 준 ‘광명진단’이라는 불교의 주문 같은 글귀가 적힌 종이 두루마리를 나보고 불태워 달라고 하여 내가 직접 나의 집 앞에서 태울 때에 ‘너무 시원하다’고 하셨는데, 나 역시도 그 불길을 바라보며 내 가슴이 시원해지는 신비(?)를 느꼈었다. 그 할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기간 동안은 정말로 가슴이 너무 아팠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이시환 시인의 책은 여전히 나의 거실에 있었다. 나는 작년(2014년)에 지금의 새집으로 이사해 오면서 짐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한동안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지난 여름에 울화병을 또 일으키고는 몸져누워서 며칠 고생하다가 회복하면서 겨우 거실에 자리 깔고 누워서 비로소 그분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었다. 책 박스를 창고에서 거실로 가져오고, 한 권 한 권 읽으면서 나는 몹시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 가슴은 아파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그냥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두껍지 않고 얇으며 가벼운 시집을 손에 들고 읽는 일이었다. 뒤돌아보면, 늘 내가 아플 때에는 책을 읽으며 그 책 속에서 생명력을 회복했듯이, 그분의 시집은 나도 모르게 나를 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남동생이 죽고 무상감을 느끼고 자폐의 1년을 지내면서 친한 친구들과도 말을 하지 않았던 내가 오로지 학교 도서관 서가에 꽂힌 동화들을 읽으며 버티다가 신약 성경 루카복음 속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해주었던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의 소개로 어린 시절 알 수도 없는 나라, 멀리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한테 처음으로 찾아오시던 날, 나에게도 물과 포도주의 기적으로 자폐가 치유되어서 해방되었듯이, 그분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늘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 내가 아플 때에 삶과 죽음의 존재, 비존재의 고통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그분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인도해주시리라 믿게 되었다. 나는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난 사람이고, 서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직립보행,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분의 시집에서 그분은 먼저 이런 고독과 고통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시적 에스프리로 넘쳐흘러 아름답고 화려한 이미지를 구조(構造)하는 언어들을 숨 쉬게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온몸으로 부딪쳐 언어의 칼을 들고 맞서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스스로 초연한 모습으로 삶의 본질에 다가서거나, 또 어떤 때에는 구도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선시풍의 시편들로 가득 채우기도 하였다. 건장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신 앞에서는 아주 단아하고 겸손하며 부드러운 한 여성으로 구도의 여정을 걸어가는 모습도 내비춰 주었고, 고독과 고통 속에 가슴이 탈 때에, 현실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신물이 나서 권태롭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에, 그는 벌판이나 들판으로 나갔다.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산 속 계곡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말없는 바위와 돌들과 이야기하고, 꽃 속에서 지친 마음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작은 풀 한 포기, 야생화 한 송이를 소중히 여기면서 소통하였다.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불모의 광활한 사막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혀 정화시키고, 불법(佛法)의 땅 인디아를 여행하면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空)과 만상(萬象) 동귀(同歸)의 이법(理法)을 깨달았다.

그의 묵상과 관상의 생활은 소란스러운 실제의 세계를 벗어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소통하고 공감하려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실상의 세계로부터는 그의 시가 자라나지 못함을 인식하였기에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고, 그는 그 길로 초대와 부르심을 받아 그곳으로 낮은 몸으로서 알몸으로 자기를 던졌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알몸의 시 태동은 그런 배경과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였으며, 그가 먼저 그 길을 걸었기에 나는 다만 충실히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이 책속에 실린 나의 글들이 바로 그 증거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리서, 11:1-2).” 나는 그의 문학 작업에서 성경의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학적 평가는 나에게 큰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설사, 내가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한들 평가해서 무엇하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코헬렛에서 가르치지 않았던가. 다만, 한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려는 작은 몸짓과 그 글이 내게 말을 걸어와 내가 말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써 감사하게 여기는 그 만남이 내게 큰 기쁨인 것을.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어린 양의 피로써 승리하리라. 죄로 물든 세상을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은 가장 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 문학은 인간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문학의 꽃이라는 시에서 시인이 그 역할을 다함으로써 끝까지 싸워 승리하길 바랄 뿐이다. 한국문학을 빛내는 어린 양의 피는 바로 그 시인이 흘린 고뇌의 눈물, 눈물로써 씨 뿌린 시인만이 거두는 곡식 단의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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