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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로마로 가는 길 여러가지...
2016년 03월 12일 03시 30분  조회:4587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시환 시의 리얼리티 : 빼앗긴 이들에게 바치는 헌가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양파의 껍질을 벗긴다. 마를 대로 말라 표피를 싼 붉은 껍질을 까면 그 속에 매운 즙을 품은 하얀 몸을 보인다. 붉은 껍질은 하얀 몸이 말라서 그렇게 된 거다. 어떻게 흰 몸의 물기가 다 빠져나가 저렇게 붉고 얇은 껍질이 되었을까. 껍질을 까고 땅 속 깊이 뿌리 박아 양분을 섭취했던 뿌리를 도려내고 윗부분의 대궁이 마른 꼭지를 도려내면 둥글고 하얀 양파 하나가 된다. 둥글고 하얗게 손에 쥐어질 때까지 양파는 뿌리와 긴 대궁을 잃었다. 현재의 이 둥글고 흰 몸은 다리와 팔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까 동체라 불리는 몸통만 남은 것이다. 이것을 반토막 내어 수돗물에 씻어 매운 맛을 없애면 양파는 도마에 오른다. 겹겹이 싸인 양파 조직의 내부는 치밀하다. 저렇게 치밀한 양파는 허망하게 죽었다. 농부의 손에 나의 손에 난도질당한다. 까고 까도 속을 잘 보여주는 않는 이 양파의 강고함은 무너져 버렸다. 단단함도 치밀함도 칼 한번 지나가면 속을 싱겁게 드러낸다. 너무 싱겁게 다 보여주는 양파의 속에는 거의 어린 대궁에 가까운 것이 서 있는 듯하다. ‘속꼬갱이’라고 하였던가?

양파와 다르게 한 사람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알 수가 없다. 뇌를 쪼갤 수 없다. 아니 외과적으로 쪼갤 수는 있어도 보이지 않는 생각을 잡아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의 뇌수 깊이 감추어진 생각들, 의식에서 전의식, 무의식에 이르는 것들을 짐작할 뿐이다.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은 본인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타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평소의 그의 행동과 다른 말이나 행동들을 대하면서 그 때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벽을 느끼는 것이다. 프로이드식의 이 무의식에 감추어진 것들은 마치 양파의 속꼬갱이와 같을까?

한 시인의 세계도 마치 이 양파 껍질과도 같다. 열어봐도 열어봐도 또 열어야 할 것이 있는 한 편의 작품이라면 독자들은 어떤 매료를 느낄까? 로마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카프카의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양파처럼 칼 한번에 속을 다 들어 내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우리가 부르는 명작이란 의도적으로 정전화된 점도 있지만 최소한 여러 가지 들어가는 길을 내포한 양파와는 다른 것이어야 할 거라고 기대해본다. 한 시인의 시세계가 풍성하고 깊다는 의미는 양파의 껍질처럼 벗기고 벗기는 식이 일변도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이 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강물들처럼, 여러 시원(始原)을 가진, 여러 지류를 가진, 여러 역사를 가진, 여러 시공간을 가진, 여러 전설과 설화를 가진, 여러 추억을 가진, 여러 모형을 가진, 그런 강물처럼 말이다.

양파는 인간의 탯줄과도 같은 뿌리를 버렸다. 인간의 탯줄이 태아기의 어머니의 피로 양분을 먹고 자라듯 대지의 자궁에다 뿌리를 내려 양분을 섭취했던 뿌리를 버린 것이다. 뿌리가 잘림으로써 대지에 뿌리박고 양분을 섭취했을 때의 기억을 단절시킨 자. 물론 그 기억도 현재의 단절이지만 전의식과 무의식과 의식에는 자리가 잡혀 있을 뿐 현재의 습관은 아닐 뿐이다. 혈연, 지연, 학연의 뿌리에 얽혀있는 것을 잘라버린다. 바다에 흘러들어온 강물은 강물이었을 때를 버린다. 그의 형질마저 민물에서 소금물로 변한다. 이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바닷물과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서양의 근대가 데카르트(René Descartes)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에서 끝나고 파스칼이 말한 파라디그마(전체 성좌)의 변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구된다. 탯줄을 잘라버려라. 하나의 탯줄에 달려오는 것들을 잘라 버려라. 혈연, 지연, 집단, 가족, 국가 이런 것들로부터 카프카는 바깥에 있었다. 그의 소설 『성』(1926)에서 K는 바로 그런 주인공이다. 그것은 서구에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상징이었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차별은 아우슈비츠라는 근대의 종말과 무더기 재앙을 낳았다. 거대한 뿌리인 성과 탯줄을 잇고 있는 사람들에게 카프카의 K는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거대한 뿌리를 해체하여 잘라내려는 자들과 거기에 큰 뿌리 잔뿌리를 박고 있는 사람들에게 K는 하나의 공포, 전율, 불안의 아이콘이었을 것이다. 결국 K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왔으나 성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돌아간다. 마치,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이방인처럼. 그러나 성은 강고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듯 안개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K에게, 성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성은 오늘날 거대한 뿌리나 잔뿌리와 같은 크고 작은 권력 집단들, 크게는 국가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현재의 국가경쟁력이란 말에는 힘의 논리가 있고 여전히 양육강식의 논리가 힘이 되어 작동하며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분장을 하고 그 이빨을 숨기는 것이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원 뒤에 나신을 숨긴 핵탄두미사일의 남근 모양 그것이 그 어딘가를 겨누며 조준되고 있다. 의롭지 못하며 그릇된 힘들이 모여 거대한 성채나 뿌리가 되어 혈연, 지연, 학연 등등과 같은 것들을 포섭하여 작은 성읍들과 잔뿌리들을 포식하고 한 방향으로만 치달으며 분장을 통해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어 가는 불의한 힘들에는 구토가 밀려온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구토 La Nausée』(1938)는 그런 부조리의 톱니바퀴와 모터가 계속 돌아가고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품들인 불의한 힘이 대형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끊임없이 완제품으로 조립을 원하는, 불의한 힘의 대량생산체제에서 느끼는 권태와 무력감, 삶의 실존을 잃어버린 구토이다. 이런 힘의 대량생산체제에서 유기되고 방치된 이들이 『구토』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이다.

 

이시환의 시에는 큰 두 줄기의 흐름이 있다. 자연관조와 묵상을 통한 관상생활을 통해 일구어낸 유심론적 시적 깊이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성』의 K,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앙투안 로캉탱과 같은 억압과 수탈, 경쟁의 대상이 된 끝에 유기나 방치된 자들이다. 현실비판으로 이어지는 후자에 속하는 시편들은 제1시집 『안암동日記』와 제2시집 『백운대에 올라서서』, 제8시집 『상선암 가는 길』의 후반부, 제9시집 『백년환주를 마시며』의 후반부 등에 산재해 있다. 먼저, 제2시집 『백운대에 올라서서』둘째마당-손돌바람-에는 「손돌바람」, 「잡풀1」, 「잡풀2」, 「잡풀3」, 장시에 속하는 「아버지의 일기」가 있다. 주로 조선 말기 봉건제와 일제 강점기 하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하층민들과 조선의 민초들의 고통스런 삶을 형상화 하고 있다. 「손돌바람」을 읽어보자.

 

그냥 ‘손돌’이라 하네

이름 석자 없어 나는

오며 가며 스치는 대로

그냥 ‘손돌’이라

덕포진과 광성진을 잇는

타고난 業을

거꾸로 지고 살다보니

아닌 몽고바람 불어닥쳐

쫓기는 이 나라 어르신

물 건너 강화도를 재촉한다

가면 어디까지 갈거나

가면 어디까지 갈거나

깊고 험한 손금 따라

노를 저어 가노라니

놀란 아이 성을 내어

한 마디 말로 목을 친다 허허

나무등걸 같은 이 몸이야

두 동강이 나버려

하나는 강화땅이요

다른 하나는 김포땅에 묻혔지만

눈을 감을 수 없는 나는

살아 두 번 세 번 죽는 너를 위해

바람 바람으로 일어나

풀뿌리 사이 겨울을 굴리고

무시로 우리들의 밑둥을 흔들고

 

-「손돌바람」전문

 

이 시는 뱃사공인 ‘손돌’에 얽힌 사연을 시로 쓴 것으로 죽어서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바람의 혼으로 떠도는 손돌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잡풀1」에는 봉건제 아래에서 지주 계급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소작인의 일생을 노래하였다.

 

가난이란 죗값으로

아내를 저당 잡히고

자식마저 奴와 卑로 바치니

주인나리 재산목록에서나 들랑날랑

사람탈만 쓰면 다 가지는

그놈의 족보도 항렬도 없이

돌멩이처럼 낙엽처럼

이리저리 뒹굴고

저리이리 뒹굴고

나리 나리 개나리 죄 지으면

이 몸이 대신하여

곤장도 좋고 옥살이도 좋아라

이래저래 헤어진 이 몸이야

쥐어 짜 밤을 세우며

심지를 돋우고 돋우면

숯이 되는 이 아침 뼈 속으로

비가 내리다 바람 불고

밤새 젖은 넋, 목을 휘어

깔아놓는 하얀 울음

저승 문고리를 흔들고

 

-「잡풀1」전문

 

「잡풀」은 1, 2, 3편의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고, 시적 화자는 「잡풀」 1, 2에서 가난으로 아내를 저당 잡히고 자식마저 노비로 팔린 소작농의 삶을 형상화 하였다. 잡풀 2, 3은 여성 화자인데 아씨의 몸종, 「잡풀3」은 여종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처자식은 물론 아내까지 저당 잡히고 그렇게 산 사람들은 잡풀처럼 아무렇게나 길가에 나서 짓밟히는,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억압 받고 착취당하여 인간 이하의 짐승과 같은 취급을 당하다가 강물에 던져지거나 주인 대신에 곤장을 맞고 헤진 몸으로 저승을 가는 봉건 지주계급들에 착취당하는 하층민을 잡풀에 비유하고 있다. 「아버지의 일기」는 1~6으로 연작시적 구성인데 하나의 시제에 갈무리 하고 있는 시편으로 시인 자신의 아버지의 일생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수탈의 역사적 리얼리티를 재구성하고 있다.

거기에는 ‘허리가 휘도록 일 년 내내 가꾼 농사/알맹이는 왜놈들이 빼앗아가고/쭉정이만 가지고 살아가기엔/너무도 기가 차고 배가 고파’하는 아버지, ‘숨길 수 없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어쩌다가 들키기라도 하면/죄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교무실에 끌려가면 영락없는 호랑이/교장나리’한테 종아리를 맞으면서 ‘조선 땅에 태어난/조선의 아들임’을 깨닫는 우리말을 빼앗긴 아버지, 식민지 관리의 쪽제비 같은 왜놈들의 아들딸과 거기에 빌붙어 사는 면장나리, 순사나리 아들딸 사이에서 차별 받는 아버지,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하의 총동원체제에서 징용, 징병, 쇠붙이, 곡식 수탈의 역사는 ‘제국주의 매서운 채찍은 우리 알몸 속으로 속으로 파고들어’ 강압에 눌린 아버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시인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수탈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들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이 땅의 아버지들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러한 혹독한 세상을 살아온 아버지이기에 ‘아버지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6의 부분은 주름살과 얼굴 속 두 눈에 침묵만이 고여 조용히 살아가는 노년의 고단한 아버지의 말없는 모습을 통해 아버지의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백운대에 올라서서』의 셋째마당 -달동네-에는「안중근」, 「義兵」, 「一家」, 「놈과 者」, 「조선낫」, 「호미」, 「달동네-질경이의 노래」, 「오동도」, 「백운대에 올라서서」를 실어서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과 의사 안중근을, 일제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역사를 조선낫이나 호미에다 비유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조선낫은

아들이 손자에게 물려준 넋이라

 

멀리서 손을 저어 부르면

무뚝뚝한 검은 무쇠 네 얼굴은

차라리 컴컴한

곳간에서나 더욱 빛이 난다

 

밤을 새며 새며

함마소리에 귀가 트이고

불구덩이 속에서 눈을 뜨는

야무진 몸매의 조선낫이여

밑둥을 쳐도 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이 빠지지 않는

조선의 뿌리련만

이 민족 모진 역사 지켜오며

닳고 닳아 이제는

혼백으로나 남아

우리들 깊은 상처 속에서나 숨을 쉬는

서슬이 퍼런

無言의 조선낫이여

 

세상엔 왜낫 양낫도 많다지만

낫일테면 조선낫이라

낫일테면 조선낫이라

 

-「조선낫」전문

 

낫은 농경사회의 도구이다. 주로 풀이나 벼를 벨 때 쓰는 것으로 이 시에서 조선낫은 양낫과 왜낫과는 구분이 되는 변별성을 가진다. 낫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넋으로 표상된다. 무쇠로 만든 조선낫이기에 컴컴한 곳간에서도 빛이 나고 불구덩이 속에서도 눈을 뜨며 야무진 몸매를 가진 낫이다. 낫이 불구덩이에서 벼려지듯 조선의 민초들도 고통 속에서도 더 단단해지며 야물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여 양낫과 왜낫과는 변별성을 가진다. 그래서 낫일테면 ‘조선낫’이라고 주장한다. 이 안에는 한민족의 문화와 정신이 흐른다. 대대로 농경사회를 이루어온 우리네 조상들을 얼이 조선낫에 암유(暗喩)되어 있는 시이다. 낫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오는 남성적 이미지의 도구이라면 이와는 달리 호미는 여성적 이미지인 ‘어머니’로 비유되고 있다.

 

행여 놓칠세라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종일

논두렁 밭두렁 따라

기우뚱 기우뚱 굼벵이처럼

풀을 매며 억척스레 살아온

조용한 아침의 나라

어머니여, 호미여

갸날픈 허리는 어디로 가고

슬프게 슬프게 엉덩이만 커진

이 땅의 우리 어머니여

평생을 호미 하나로

눈물고개 아리랑고개 넘나들며

콩 심고 팥을 심어

가난을 깨우고

아픔을 일구어 왔으니

이제는 너 없이 못살고

나 없이 힘 못쓰는

호미여, 어머니여

너는 지금 흙 속에 묻혀

타다 남은 몸뚱일 마저 풀어 삭히는가.

 

-「호미」전문

 

낮이 풀이나 벼를 베는 도구라면 호미는 잡초를 제거하거나 가볍게 땅을 일구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이 호미는 주로 아녀자들이 썼다.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김을 매기 위하여 조선의 여인네들은 골을 타고 앉아서 김을 맸다. 여름의 뙤약볕에 고된 노동을 인내하면서 남성들을 도와서 들일을 하는 것이 그네들의 일상이었다. 자녀를 낳고 기르고 집안일을 하면서 낮에는 들이나 밭에 나가서 일을 하였다. 그러니 여인들은 인종의 세월을 사는 동안 마음이 숯이 되었다. 가난을 깨우고 아픔을 일구어 타다 남은 몸뚱일 흙속에 풀어 삭히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한 생애를 이 호미라는 도구를 통하여 풀어내고 있는 절편의 시라 하겠다. 이제까지는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본 우리네 민초들의 삶의 리얼리티라면 제1시집『안암동日記』의 시편인「刻印」에서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향해 독이 묻은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면서 그럴 때 ‘지금-여기’의 시인은 ‘안암동으로 마포로 옮겨다니며 대낮에도 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 살아야만 했다’고 어둠의 원인이 된 폐쇄(유폐)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어둠 이미지들의 연결고리로써 시「강물」에 더 구체화되어 있다.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트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중략)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 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없는 뿌리가 보일까. -「강물」부분

 

어둠 이미지들은 주름살의 깊이, 밑바닥, 무거운 칼날, 눈물없는 뿌리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들이 강물의 물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유동적이며 유연한 이시환의 시학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자신의 밑바닥과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 가슴들에서 한없이 흐르는 어둠의 강물은 흘러가고 시인은 그것을 보는 내면의 눈이 열리며 그 깊이를 가늠하고 그들의 절망과 간절한 기도를, 다시 일어나 외치는 아우성을 보는 것이다. 시「서울의 예수」를 읽어보자.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타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 같이 사흘만에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느님 왼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의 예수는 갈라진 이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 밑둥을 적실꼬. -「서울의 예수」전문

 

이 시에서는 시대적 어둠과 고통을 성경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하여 성경에서의 실재인물 예수 그리스도와 도둑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다가 권력의 폭압에 고문당한 70년대‧80년대 투사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 의미를 뒤집어 ‘하느님 왼편에 앉지도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라고 하여 분단된 이 땅에 묻혀서 우리의 밑바닥의 고통을 적셔준다고 한다.

제9시집 『백년완주를 마시며』의 후반부에는 이른바 노숙자 연작이라 할 수 있는 「던져진 話頭-안국역의 한 노숙자」, 「원남동의 한 노숙자」, 「신문지 한 장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 중에「신문지 한 장의 무게」를 읽어보자.

 

폭염 속 공원 벤치에 널브러져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신문지 한 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버려지는 족족 물이 살얼음이 되는

거리에서, 지하도 모퉁이에서,

버려진 신문지 한 장 속으로

온몸을 숨기고,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그 마음까지 숨겨도

하룻밤 새

목숨을 보장해 주지도 못하지만

그 얇고, 그 가벼운 신문지 한 장이야말로

구겨진 채 버려진 깡통 같은 이들에게는

두터운 이불이 되고, 깊은 그늘이 되어 주네.

그런 시문지 한 장의 가벼움과

그런 신문지 한 장의 얇음만도 못하는 나는,

냄새나는 그들의 얼굴과 눈빛을 외면하고

돌아서며 침을 뱉으면서도

밤새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안녕을 걱정하네.

 

-2004. 11. 05. 23:24 -「신문지 한 장의 무게」전문

 

‘지금-여기’의 혹독한 사회, 경제적 환경으로부터 밀린 끝에 유기되거나 방치된 자인 노숙자는 ‘구겨진 채 버려진 깡통 같은 이들’이다. 신자유주의의 경제 구조에서 밀려난 이들이 거리를 집으로 삼아 떠돌고 있다. 물질이 넘쳐나지만 남북문제가 심각하여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굶어죽고 체제나 종교에서 오는 문제를 견디지 못하여 난민들이나 탈북자들이 엑소두스(Exodus)를 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노숙자들 역시 거리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모든 것들이 유기되거나 방치된 그들에게는 박탈되었다. 이들에게 한 장의 신문지는 마음의 이불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 한 장의 얇은 신문지도 되어주지 못하는 시인은 자책하고 있다. 이런 거대한 사회문제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 무슨 힘이 될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그들을 자신의 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공유하려고 한다. 독자들과 함께 아파하며 뭔가 세상이 바꾸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상선암 가는 길』의 후반부에 위치한 남미기행 시편에도 나타나 있다. 이 시편들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인디오들의 역사와 동일시된다. 인디오들 역시 유기되거나 방치된 이들이다.

 

‘이과수’ 폭포의 굉음이 들리는 것 같은

국립공원 근처 어귀 길바닥에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웃음을 잃어버린 인디오들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먼 옛날 우리의 조상

농투사니를 만난 것 같아.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시내

큰 음식점을 돌며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파는,

키가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검으튀튀한 얼굴의 인디오들을 바라보노라면

먼 예날 우리의 형제

형제들을 만난 것 같아.

 

-「내 슬픔의 그림자」전문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남미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된 땅이다. 시인은 그 남미의 인디오들에게서 우리의 형제를 본다. 타자를 통하여 나를 보게 되듯이 인디오들에게서 우리의 역사적 리얼리티를 발견하고 있다. 시인에게 남미의 유럽이라 불리는 상파울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리마나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가서 본 대성당들은 한낱 침략자들의 힘의 역사가 남기고 간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시환은 ‘인디오들을 돼지 소 잡듯이 살육했고,/ 수많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한 때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이기에/회개할 것이 그리 많았음일까?’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인디오들과 역사적으로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민초들인 우리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페인, 포르투칼 사람들에 의해 유린된/원주민들의 황토 같은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는/침묵의 절규를 또한 들어보았는가?’(「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라고 반문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에서 보여준 고통의 세월을 산 시인의 아버지이자 우리들의 아버지, 역사 속 우리 형제들의 침묵하는 모습과 겹쳐지고 있고, 그 말없는 침묵이야말로 백 마디의 말로 떠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은 간취하고 있다. 만해의 『님의 침묵』이 침묵하는 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처럼 시인은 침묵 속에 준동하는 역사의 흐름에 귀를 기울인다. 그 흐름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처럼 바다에 이르러 폭풍처럼 밀려오는 의롭고 거대한 힘에 의해 한 번씩 심해까지 갈아엎어지는 역사의 흐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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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 詩作初心 - 시는 두겹으로 그림을 그려라 2016-03-09 0 5527
1159 詩作初心 - 시는 20행이하로... 2016-03-09 1 6735
1158 <개> 시모음 2016-03-08 0 4185
1157 [안녕?- 아침 詩 한송이]ㅡ 봄소동 2016-03-08 0 3871
1156 "나는 단어를 찾는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 2016-03-07 0 3525
1155 [동시야 놀자]- 지각 대장 싸움 대장 2016-03-07 0 3965
1154 [동시야 놀자]- 쫑마리 2016-03-07 0 3615
1153 [동시야 놀자]- 오줌싸개 지도 2016-03-07 0 4057
1152 [동시야 놀자]- 아름다운 국수 2016-03-07 0 4239
1151 [동시야 놀자]- 까만 밤 2016-03-07 1 4176
1150 [동시야 놀자]- 봉숭아 2016-03-07 0 4117
1149 [안녕?- 아침 詩 두송이]- 들깨를 터는 저녁 / 뜨개질 2016-03-07 0 4279
1148 {안녕? - 아침 詩 한송이} - 白石 詩 2016-03-06 0 5216
1147 詩作初心 - 좋은 시를 모방하되 자기 색갈 만들기 2016-03-06 0 7835
1146 詩에서 상상은 허구, 가공이다... 2016-03-04 0 4996
1145 {안녕?- 아침 詩 두송이} - 나무들의 목소리 2016-03-04 0 4167
1144 詩는 그 어디까지나 상상의 산물 2016-03-04 0 4453
1143 [아침 詩 두수] - 황지우 시 두수 2016-03-03 0 4338
1142 산문시가 산문이 아니다라 詩이다 2016-03-03 0 4444
1141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 알아보기 2016-03-03 0 4618
1140 산문시와 산문을 구별해보자 2016-03-03 0 4134
1139 "시의 본질" 이라는 거울앞에 서보자 2016-03-03 0 3999
1138 독자가 없으면 詩는 존재할수 있다... 없다... 2016-03-03 0 4458
1137 밀핵시(密核詩)란? 2016-03-02 0 4482
1136 [아침 詩 한수] - 내가 뜯는 이 빵 2016-03-02 0 3968
1135 눈물보다 독한 술은 없다... 있다... 2016-03-02 0 3943
1134 詩의 천하루밤 2016-03-02 0 4077
1133 詩作初心 - 독자 없는 시대를 독자 있는 시대로... 2016-03-02 0 4398
1132 詩作初心 - 詩를 읽는다는것은... 2016-03-01 0 4209
1131 詩作初心 - 한편의 시를 탈고하기 위하여... 2016-03-01 0 5021
1130 [아침 詩 한수] - 어떤 평화 2016-02-29 0 4543
1129 詩作初心 - 좋은 詩 없다... 있다... 2016-02-26 0 4193
1128 詩作初心 - "詩의 본질"이라는 거울앞에서ㅡ 2016-02-26 0 4284
1127 [아침 詩 두수] - 늙은 꽃 / 기적 2016-02-26 0 4090
1126 [아침 詩 한수] - 가벼운 농담 2016-02-25 0 4243
1125 민족시인들을 찾아서... 2016-02-25 0 4865
1124 詩作初心 - 詩의 출발은 사춘기, 고정관념 벗어나기 2016-02-24 0 4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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