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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化된 人과 人化된 自然
-이시환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통해 본 시인의 시세계
김은자(중국, 하얼빈이공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사)
1. 들어가는 말
우연히 이시환 시인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마주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창작된 51편의 시가 실린 부피가 크지 않은 개인시집이다. 그럼에도『대공』 이란 이름 때문인지 손에 쥐여진 원고에서 그 무게가 전해진다.
시인 이시환(1957.9 ~ )으로 말하자면 일찍 1981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그 빈자리』를 펴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50여 편의 작품을 창작하고, 이미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내는 등 저력을 과시하는 중견시인이자 평론가이다. 하기에 이번 시집의 출간도 새삼스럽지 않지만 다만 새롭고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집에 실린 시들 모두가 ‘산문시’란 점이다.
산문시(散文詩)란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렵지만 말 그대로 산문(散文)과 시(운문,韻文)라는 서로 상반된 양식이 결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시가 지닌 형식적 제약(制約)은 물론 운율(韻律)의 배열 없이 산문형식으로 쓰여진 시로 정형시와는 다른 자유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행과 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적 요소도 없는 형식은 산문에 가깝지만 표현된 내용은 시(詩)인 만큼 당연히 시로서의 핵심적 요소인 은유, 상징, 이미지 등 내적인 표현장치나 시적인 언어를 택하고 있다.
산문시의 시초(始初)는 「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4~1867.8)의 "산문시는 율동(律動)과 압운(押韻)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兼備)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란 평(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파리의 우울」(1869)을 발표한 이래 산문시는 중요한 시의 한 부분으로 되었고 특히 프랑스 문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어렵잖게 산문시를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일찍 주요한의 「불놀이」(1919)에서 그 전형(典型)을 선보인 바 있고, 1930년대 와서 정지용의 「백록담」, 이상의 「오감도」, 백석의 「사슴」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어 1950년대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로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산문시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부족한 편이고 문학론적인 측면에서 장르의 성격 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개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산문으로 된 시만 골라 펴낸『대공(大空)』이란 시집은 사뭇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산문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그 매력을 공유하고자 시와 함께 실은 「산문시의 본질」이란 글이 더해져 무게를 더해준다. 부담 없이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되는 내재율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속삭임을 실어내는『대공』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 주제와 시인의 시세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自然과의 대화 시도
시골 태생으로 자연을 벗 삼아 자라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움직임을 보며, 그것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에 익숙해진 시인이어서인지 그의 시에는 자연과 물상(物象)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다.
“자연 속에서 인간 삶의 지혜를 배우고, 내 몸속에서 자연을 읽을 수가 있었으니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의 진실과 아름다움이 나의 가장 큰 시적 관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시인이 밝힌 바 있듯이 그의 시 쓰는 일은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현상과 연관되면서 ‘자연을 베끼는 일’로 거듭나고 있다.
「서있는 나무」에 심상(心象)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사람의 모습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있는 나무는 서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서있는 나무는 내내 서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울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시종 서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거리며 몰려다닐지라도 ,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있는 나무는 홀로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는 죽고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 전문-
시인은 나무는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 한다”고 하면서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라도’로 끝을 맺는 일련의 표현들은 겪게 되는 시련을 뜻한다. 시인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서있어야 하며’ 심지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서있는다’고 해서 시련이 닥쳐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세상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함박눈」에서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빌어 자연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짝사랑 같은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만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전문-
재미있는 것은 시인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한 방울의 물과 구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는 입술을 부비고”,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갈 수 있다”고 한다. ‘눈[雪]’이란 심상으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당신’이란 존칭어의 사용과 ‘옵니다’란 시어의 극존칭어미에서 더욱 간절하게 묻어난다.
이놈의 세상, 내 어릴 적 썩은 이빨 같다면 질긴 실로 꽁꽁 묶어 눈 감고 힘껏 땡겨보겄네만 이땅의 단군왕검 큰 뜻 어디 가고 곪아 터진 곳 투성이니 이제는 머지않아 기쁜 날, 기쁜 날이 오겄네,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이. 이 한 몸, 이 한 맴이야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된다면 푹푹 썩어, 바로 썩어 이 땅의 뿌릴 적시는 밑거름이라도, 밑거름이라도 되어야지 않컸는가.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 -「북」 부분-
제목이 「북」이란 시이다. 시의 그 어느 부분에도 북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저 마지막에 ‘둥둥’하고 북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시의 전반부는 물론 인용한 부분에서도 ‘썩은 이빨’, ‘곪아 터진 곳 투성’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곪아터진 살 위로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을 기다리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결말의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이란 시어는 우리민족 정서에 알맞은 가락의 하나로 특유한 흥겨움을 담고 있으며, 힘든 지금을 견디고 나면 머지않아 행복한 나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안겨준다.
「나사」에서는 ‘나사’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려’는 융합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불현듯 찬바람이 불면 내 몸뚱이 속, 속들이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조용한 흔들림.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다. -「나사」 부분-
시인은 ‘하양과 검정’ 이라는 한눈에 대조되는 흑백의 논리를 넘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이어주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흑백이 공전하는 삶의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서로 어울려져야 빛을 발하는 나사처럼 혼자서는 ‘찬바람’이 불면 ‘흔들리기’에 더욱 간절히 조화와 융합을 꿈꾸고 있다.
조화와 융합을 시도하는 작품으로 「로봇」도 빠뜨릴 수가 없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로 난, 수없는 난해한 길들을 은밀히 왔다갔다하는 정체불명의 숨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갖는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일로서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工程이다. 열심히 로봇이 사람을 닮아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로봇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꿈을 꾼다. 깊은 어둠의 자궁 속으로 길게 뻗어있는 뿌리의 꿈틀거림처럼 로봇이 나의 시녀가 되고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되는 것이다. -「로봇」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로봇을 만드는 과정을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이라고 하면서도 말미에는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봇이 사람을 닮아가서 불안하다는 것에 출발했음에도 로봇(기계, 나아가 물질문명)에 대한 부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시인은 바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인화된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감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서정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며 서정성이 주는 낭만에 대한 추구라고 보아진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 나무, 강, 산, 꽃, 단풍 등의 시적 소재들이 산문시임에도 불구하도 서정성이라는 시의 특성을 확보하게 하고 있다.
3. 人의 독백
이시환의 산문시 곳곳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많은 시인의 분신’들로 시인 자신 내지는 인간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다시 말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이도, 아버지도, 친구도, 나아가 예수의 모습도 모종의 의미에서 결국은 시인 자신이며 시인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바라고 있기에 결국 욕구불만족에서 오는 수많은 병을 앓고 있다. 그리움, 편집증, 외로움 등 그 이름도 다양한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먼저 「그리움」부터 보도록 하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 아니면 판독해 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腦髓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이거나 그도 아니면 치유불능의 정서적 불안. 아니면 여린 바람결에도 마구 흔들리는 어질 머리 두통頭痛이거나 징그럽도록 붉은 한 송이 꽃이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차라리 눈부신 억새 같은 나의 상사병이요. 그 깊어가는 불면不眠의 나락奈落이면서 추락하는 쾌감快感이다. -「그리움」 전문-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앓아보았을 그리움이란 병을 언어의 마술사인 시인이 아니라고 할세라 수많은 명사로 환치(置換)하고 있다. ‘방언’, ‘상형문자’, ‘어둠의 깊이’, ‘수렁’ 등 일련의 표현을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난해(難解)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꽃’을 제외한 모든 명사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꽃마저도 예쁜 꽃이 아닌 ‘징그러운’ 꽃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리움이란 지독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소리 없는 웃음을 눈치 채고 그 때부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라 불렀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들 앞에서 빈틈없는 바보가 되었고, 나는 바보가 아닌 위인들의 업적과 치부를 들여다보며 또 하나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은 온통 웃음덩어리라는 것을 슬프게도 나는 알아 차렸습니다. 때문에 내겐 실없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웃음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병病이 되어 깊어만 갔습니다. -「웃음을 흘리는 병」 부분-
「웃음을 흘리는 병」은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인 ‘웃음’을 ‘병’이라고 한 것은 결국 ‘병’이 ‘병’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음’이 병이 되는 그런 세상의 아이러니를 풍자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어휘의 나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보’와 ‘위인’, ‘업적’과 ‘치부’같은 어휘의 병치(竝置)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리듬감에서 비롯된다.
시 「각인(刻印)」 전편에서는 부제목에 붙인 것처럼 편집증을 앓고 있는 한 사나이의 고충을 담고 있다. 편집증증상을 갖고 있는 사나이를 ‘또라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을 부정하면서 시인은 ‘나는 나이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또한 시집의 마지막 시인 「봄날의 만가(輓歌)」와 첫 시가 되는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는 이야기의 서두와 결말처럼 서로 호응을 이루고 있으며, 시인이 던지는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시어로 풀어내고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고 보면 더는 허망할 것도, 더는 쓸쓸할 것도 없다. 세상이야 늘 그러하듯 내 눈물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스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분망奔忙하고 분망할 따름, 이 분망함 속에서 죽는 줄 모르로 사는 목숨이며, 한낱 봄날에 피고 지는 저 화사한 꽃잎같은 것을. 아니, 아니, 이 몹쓸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 같은 것을. -「봄날의 만가輓歌」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아낼 수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다”란 것은 생(生)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하기에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는 세상이고 봄날에 피고 지는 ‘꽃잎’같은 인생임에도 시인은 ‘허망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고 한다. 죽음을 넘어 죽음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의 마지막에 삶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같다는 표현에서 시인의 그러한 의식은 무가내(無可奈)와 탄식(歎息)을 넘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시집에는 가족애와 우정을 다룬 시가 몇 수 된다. 「하나님과 바나나」, 「안암동일기」, 「아버지의 근황」, 「어머님 전상서」, 「벗들에게」 등 시편들은 그 일부가 문체상에서 말 그대로의 일기나 서신에 가까워 정녕 산문시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가족과 친구와 함께하는 가장 정답고 삶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따뜻해나는 정이 가는 것임은 분명하다.
4. 맺는 말
이시환의『대공(大空)』은 산문시집에도 불구하고 시적으로 정제(精製)되어 있다. 산문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시마다 분명 내재율이 존재하여 서정시와는 다른 운율의 미를 지니고 있다.
산문시라서 그런지 다소 화법이 직설적이고 함축성이 약한 편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시편에는 고독과 허무의 감정이 흐르고 있지만 이 또한 부정적이라고 보아지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불교의 가르침과 무관(無關)하지 않은 듯싶다. 하기에 어쩌면 이런 부정적이지만 진솔한 사람의 감정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시인 역시도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조심스레 덮고 나니 시집의 첫 페이지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정녕(丁寧)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비우고서 시인의 목소리가 아닌 그렇다고 내 목소리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대공(大空)’이란 메아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클 대(大), 빌 공(空), 대공(大空)!
金銀子 (中國)
2005.9 - 2009.6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교육 전공.
2009.9 - 2012.6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 석사과정.
2012.7 - 현 재 하얼빈이공대학 한국어과 교사.
E-mail: kyzspac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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