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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산문이 시와 함께 빛 발하다 / 연변에서 "동주" 소설이 나오다...
2016년 03월 12일 05시 00분  조회:5257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의 散文과 詩의 관련양상
- 산문 <終始>와 시 <길>을 중심으로 -

류 양 선


<목차>

1. 머리말
2. 새로운 출발에 즈음하여 ; 산문 <終始>
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시 <길>
4. 맺음말


1. 머리말

윤동주는 모두 4편의 산문을 남겼다. <달을 쏘다>, <화원에 꽃이 핀다>, <종시>, <별똥 떨어진 데>가 그것이다. 이 산문들은 시인의 학창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씌어진 이 산문들은 당시의 시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세세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산문들은 이처럼 그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의 산문들은 그의 시작품들과의 관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의 산문은 때때로 그 시인의 시작품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는데, 윤동주의 경우가 특히 그러한 것이다. 이 글은 윤동주의 산문과 시의 관련양상에 대한 일련의 연구 중의 하나이다. 윤동주의 산문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그의 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작업이다. 이 글에 앞서 필자는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와 시 <자화상>의 관계에 대해 검토한 바 있다. 류양선, 「윤동주의 <자화상> 재론」(『성심어문론집』, 2003. 2) 참조.
그의 시와 산문이 모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윤동주의 문학이 지니는 이러한 특성에 착안하여, 산문 <종시>와 시 <길>을 중심으로 그의 산문과 시의 관련양상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차차 밝혀지겠지만, 산문 <종시>와 시 <길>은 그 씌어진 시기가 거의 같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산문 <종시>가 산문 <終始>에 대한 연구로는 홍장학,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문학과 지성사, 2004), 지현배, 『영혼의 거울』(한국문화사, 2004) 등이 있다.
어떤 정황 속에서 씌어졌으며, 그리하여 시인의 어떤 생각과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시 <길>이 시 <길>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는 김남조, 「윤동주 연구」(권영민 편, 『윤동주 연구』, 문학사상사, 1995), 김현자, 「대립의 초극과 화해의 시학」(위의 책), 최동호, 「윤동주 시의 의식현상」(위의 책) 등을 들 수 있다.
씌어지게 된 최초의 시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러나 시와 관련된 산문을 검토함으로써 그 시작품 최초의 시상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시에 대한 해석이 완료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관련 산문을 검토하는 것은 그 시작품을 쓰게 된 첫 착상을 밝혀 그 시에 대한 오독을 방지하려는 것일 뿐, 관련 산문의 내용을 뛰어넘는 시의 깊은 의미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산문은 산문이고 시는 시인 것이다. 더욱이 윤동주의 시는 시어가 지닌 고도의 상징성으로 인해, 순도 높게 정화된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욱 깊은 차원의 기독교적 의미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시 <길>이 지니고 있는, 산문 <종시>을 넘어서는 이러한 차원의 의미까지 밝혀볼 생각이다.
그런데 이를 다시 생각하면, 윤동주의 시가 제아무리 순결한 내면과 깊은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아니 그럴수록 그것이 시인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실제로 겪었던 개인적 방황과 시대적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 산문이 다시금 중요해진다. 말하자면 그가 처해 있던 현실상황에 대한 그만의 고유한 반응이 그의 시에 고도의 상징성을 부여하도록 했다고 할 수 있기에, 이번에는 그의 시에 대한 해석이 그의 산문으로 하여금 좀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와 산문은 서로를 비추어 주며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산문 읽기에서 시작해서 시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 읽기에서 시작하여 산문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단지 논의의 편의상, 산문 <종시>를 먼저 읽을 따름이다.


2. 새로운 출발에 즈음하여 ; 산문 <終始>

‘終始’란 무엇인가? ‘마치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문 <종시>는 시인이 지난 일을 끝맺고 뭔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에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고,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인생행로와 관련된 더욱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도 암시되어 있다.
그러면 산문 <종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인가? <종시>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먼저 이 산문에 담겨 있는 시인의 행로를 추적하면서 이 산문이 씌어진 시기를 추정하고, 다음에 이 산문이 시인의 전체 인생행로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글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산문 <종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終點이 始點이 된다. 다시 始點이 終點이 된다.
아츰,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밥게 되는데 이 자국을 밥게된 緣由가 있다. 일즉이 西山大師가 살아슬뜻한 욱어진 松林속, 게다가 덩그러시 살림집은 외따로 한채뿐이엿으나 食口로는 굉장한것이여서 한 집웅밑에서 八道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뫃아놓은 미끈한 壯丁들만이 욱실욱실하엿다. 이곳에 法令은 없어스나 女人禁納區엿다.
(…중략…)
눈온날이 였다. 同宿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時間 남짓한 門안들어가는 車時間까지를 浪費하기 爲하야 나의 친구를 찾어들어와서 하는 對話엿다.
“자네 여보게 이집 귀신이 되려나?”
“조용한게 공부하기 자키나 좋잔은가”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부ㄴ줄 아나 電車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光景 停車場에서 맛볼수있는 光景, 다시 汽車속에서 對할수있는 모든일들이 生活아닌것이 없거든, 生活때문에 싸우는 이 雰圍氣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分析하고, 이거야말로 眞正한 意味의 敎育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人生이 어드럿니 社會가 어드럿니 하는것은 十六世紀에서나 찾어볼일일세, 斷然 門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나안테하는 권고는 아니엿으나 이말에 귀틈뚤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엿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증보판)』(민음사, 2002) - 이하, 『사진판 전집』이라고만 한다 -, 127∼128면.


<종시>의 초두인 이 부분은 윤동주가 문안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와 그리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같은 길을 다니게 된 연유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는 당시에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친구의 친구가 하는 말을 듣고는 “공부도 生活化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門안으로 들어가기를 內心으로 斷定해 버렷”던 『사진판 전집』, 128면.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西山大師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松林 속”에 외따로 위치한 ‘女人禁納區’였던 기숙사에서 나와, 등하굣길에서나마 살아있는 현실을 접할 수 있는 문안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결과 친구의 친구가 했던 말대로 “電車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光景, 停車場에서 맛볼 수 있는 光景, 다시 汽車속에서 對할 수 있는 모든 일들” 즉 ‘生活’을 보게 되었고, “生活때문에 싸우는 이 雰圍氣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分析하”게 되었는데, 산문 <종시>는 이처럼 ‘생활’을 보고 생각하고 분석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終始>는 기숙사에 갇혀 있던 윤동주가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 밖으로 나와, 서울 거리에서 대하게 된 풍경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서술해 놓은 산문인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가 기숙사를 나와 문안으로 들어간 경위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하숙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닌 경위에 대해, 그의 지기이자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였던 정병욱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혹독한 식량 정책이 더욱 악화되었다. 기숙사의 식탁은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다. 학생들은 맹렬히 항의를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당국의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주가 4학년으로, 내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봄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마침 나의 한 반 친구의 알선으로 누상동 마루터기에 조용하고 조촐한 하숙방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매우 명랑하고 유쾌한 하숙 생활을 한 달 동안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뒤 하숙집 형편으로 그 집을 떠나야 할 신세가 되었다. 참 좋은 하숙이었는데, 실망과 아쉬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두 사람은 새 하숙을 구하려 그 집 대문을 나섰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서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 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金松)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 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집문당, 1980), 15∼16면.


이러한 우리의 빈틈없고 알찬 일상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었다. 당시에 요시찰 인물로 되어 있었던 김송 씨가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온 지 몇 달이 지난 후인지라 일본의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숙집 주인이 요시찰 인물인 데다가 그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와졌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서가에 꽂혀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고,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 학기에 올라와서 우리는 다시 이사짐을 꾸리고 이번에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7, 8명의 하숙생이 들끓는 전문적인 하숙집이었다. 오붓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뒤숭숭한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옮겨온 우리는 퍽 당황했었다. 어딘가 어설프고 번거롭고 뒤숭숭한 그런 분위기였다. 게다가 졸업반인 동주 형의 생활은 무척 바쁘게 돌아갔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일들이 겹쳐서 동주 형은 이때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위의 글, 18면.


정병욱의 이 회고에서 당시의 시국의 불안과 일제의 탄압의 정도를 엿볼 수 있거니와, 그와 동시에 윤동주가 개인적인 문제나 시대적인 문제로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는지를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 회고에 의해, 연희전문학교 4학년 시절에 윤동주가 어떻게 거처를 옮겨다녔는지 밝혀진 것이다. 이것을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는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에서 한 달→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金松) 씨 집으로 옮겨서 5월 그믐 때부터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북아현동 하숙 전문집으로 옮겨서 9월부터 12월 말의 4학년 졸업 때까지”라고 송우혜, 『윤동주 평전』(푸른역사, 2004), 288면.
요약하고 있다.
이상에서 드러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산문 <종시>를 다시 읽어보면, 윤동주가 <종시>를 쓴 개략적인 시기가 저절로 밝혀진다. 산문 <종시>의 내용이 누상동에서 신촌에 이르는 등굣길의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산문이 씌어진 시기를 윤동주가 4학년 때인 1941년 5월경에서 9월경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종시>가 씌어진 시기를 1941년경으로 보아 왔던 것을 송우혜, 앞의 책, 551면 및 『사진판 전집』의 연보 참고. 그런데 홍장학 편, 『정본 윤동주 전집』(문학과 지성사, 2004)에서는 산문 <종시>가 씌어진 시기를 1939년으로 잡고 있는데(161면 및 166면),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추정했는지 알 수 없다.
좀더 좁힌 것으로서, 시 <길>의 창작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띤다. <길>의 창작일자가 작품 말미에 1941년 9월 31일로 적혀 있음을 감안할 때, 산문 <종시>가 씌어진 시기에 대한 이러한 추정은 이 시가 산문 <종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산문 <종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계제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정병욱의 회고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의 인용에서 정병욱이 말한 바, 소설가 김송 씨의 집에서 하숙하던 당시 윤동주와 더불어 보낸 ‘빈틈없고 알찬 일상 생활’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至誠堂), 일한서방(日韓書房), 마루젠(丸善), 군서당(群書堂) 등,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多の宿)나 ‘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 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 책방을 다시 순례한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有吉書店)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기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면…… 정병욱, 앞의 글, 16∼17면.


정병욱이 윤동주와 함께 다녔던 하굣길을 적어놓은 대목이다. 두 사람은 신촌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전차로 갈아타고 명동에 있는 한국은행 앞까지 와서는, 그곳의 책방을 순방하고 음악다방이나 극장에 들르기도 하였다. 때로는 명동에서 도보로 관훈동까지 가서 그곳의 헌 책방을 다시 순례하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그들의 거처인 소설가 김송 씨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하굣길을 뒤집으면, 바로 윤동주가 산문 <종시>에서 그려낸 등굣길이 된다. 다만 등교할 때는 누상동 김송 씨의 집에서 정류장까지 걸어나와 전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신촌에 도착하여 학교에 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하는 이 산문 첫 문장의 1차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제 하굣길의 종점이었던 전차 정류장이 오늘 등굣길의 시점이 되고, 아침 등굣길의 시점은 다시 저녁 하굣길의 종점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문 <종시>에는 윤동주 혼자서 등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등굣길의 전차 안에서 또 기차 안에서 내다본 풍경이 곧 산문 <종시>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윤동주의 등굣길을 축자적으로 따라가 보자.
윤동주는 하숙집에서 나와 전차를 타고 창 밖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현대로써 캄푸라지한 옛 禁城” 『사진판 전집』, 130면.
(경복궁;인용자)의 성벽을 따라 달리다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한다. 또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서부터 여러 건물들을 내다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기도 하다가 남대문을 지나치게 된다. 이윽고 그는 서울역에 도착하여 종점을 시점으로 바꾸면서 기차로 갈아탄다. “느릿느릿 가다 숨차면 假정거장에서도” 『사진판 전집』, 135면.
서는 기차 안에서도 그는 창 밖으로 사람들을 관찰한다. 기차가 터널을 벗어났을 때, 그는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보면서 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신촌에 도착할 즈음 “이제 나는 곧 종시를 박궈야 한다.”고 『사진판 전집』, 137면.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떤 최종적인 목적지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 하면서 이 산문을 끝맺는다. 홍장학, 앞의 글에서는 “원고지 23장 분량의 수필 <종시>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윤동주의 의도적이고 주기적인 나들이, 즉 ‘신촌역⇆남대문 성벽 부근’ 체험과 그에 부수된 상념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윤동주가 당시에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던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종시>에 나타난 길은 신촌에서 남대문을 왕복한 길이 아니라, 앞서 살폈듯 누상동에서 시작하여 남대문과 서울역을 거쳐 신촌에 이르는 등굣길이다. 윤동주가 전차 안에서 내다본 건물들이 “總督府, 道廳, 무슨 參考舘, 遞信局, 新聞社, 消防組, 무슨 株式會社, 府廳”(『사진판 전집』, 130면) 등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물들은 당시 경복궁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 윤동주가 등굣길의 차 안에서 내다본 풍경 또는 거리에서 마주친 풍경은 어떤 것들인가? 그리고 그는 그런 풍경을 대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나만 일즉이 아츰거리의 새로운 感觸을 맛볼줄만 알엇더니 벌서 많은 사람들의 발자욱에 鋪道는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햇고 停留場에 머믈때마다 이많은 무리를 죄다 어디갓다 터트빌 心算인지 꾸역꾸역 작구 박아실는데 늙은이 젊은이 아이할것없이 손에 꾸럼이를 않든 사람은 없다. 이것이 그들 生活의 꾸럼이오, 同時에 倦怠의 꾸럼인지도 모르겠다.
이꾸럼이를 든 사람들의 얼골을 하나하나식 뜨더보기로 한다. 늙은이 얼골이란 너무오래 世波에 짜들어서 問題도 않되겟거니와 그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슴이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憂愁 그것이오 百이면 百이 다 悲慘 그것이다. 이들에게 우슴이란 가믈에 콩싹이다. 必境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골을 보는 수박게 없는데 아이들의 얼골이란 너무나 蒼白하다. 『사진판 전집』, 128∼129면.


나는 終點을 始點으로 박군다.
내가 나린곳이 나의 終點이오, 내가 타는 곳이 나의 始點이 되는 까닭이다. 이쩌른 瞬間 많은사람사이에 나를 묻는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皮相的이된다. 나의 휴맨니티를 이네들에게 發揮해낸다는 재조가 없다. 이네들의 깁븜과 슬픔과 앞은데를 나로서는 測量한다는수가 없는까닭이다. 너무 漠然하다. 사람이란 回數가 잦은데와 量이 많은데는 너무나 쉽게 皮相的이 되나보다. 그럴사록 自己 하나 看守하게에 奔忙하나보다. 『사진판 전집』, 134면.


이윽고 턴넬이 입을 버리고 기다리는데 거리 한가운데 地下鐵道도 않인 턴넬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슬픈일이냐, 이 턴넬이란 人類歷史의 暗黑時代요 人生行路의 苦悶相이다. 空然히 박휘소리만 요란하다. 구역날 惡質의 煙氣가 스며든다. 하나未久에 우리에게 光明의 天地가있다.
턴넬을 버서낫을때 요지음 複線工事에 奔走한 勞働者들을 볼수있다. 아츰 첫車에 나갓을때에도 일하고 저녁 늦車에 들어올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始作하야 언제 끝이는지 나로서는 헤아릴수없다. 이네들이야말로 建設의 使徒들이다. 땀과피를 애끼지않는다.(이하 2행 탈락)
그융중한 도락구를 밀면서도 마음만은 遙遠한데 있어 도락구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新京行이니 北京行이니 南京行이니 라고써서 타고다니는것이아니라 밀고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엿볼수있다. 그것이 苦力에 慰安이 않된다고 누가 主張하랴. 『사진판 전집』, 136∼137면.


여기 인용한 대목 중 첫 번째 것은 윤동주가 전차를 타고 내다본 풍경이고, 두 번째 것은 서울역에서 기차로 갈아타는 시간에 겪은 내용이며, 세 번째 것은 기차를 타고 내다본 광경이다. 여기 인용한 부분들은 윤동주가 문안으로 거처를 옮긴 뒤 등굣길에서 본 광경이 어떤 것인지 또 그러한 광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말하자면 기숙사에서 나와 공부를 생활화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인 것이다.
먼저 위의 인용 중 첫 번째 것을 보자. 윤동주는 전차 안에서 내다본 광경, 즉 정거장마다 손에 손에 꾸러미를 들고 서 있다가 꾸역꾸역 전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말할 수 없는 비애감을 느낀다. 늙은이들의 얼굴은 세파에 찌들었고, 젊은이들의 얼굴은 우수와 비참 그것이며, 아이들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하다. 도무지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그는 “내상도 필연코 그꼴일텐데 내눈으로 그꼴을 보지못하는것이 다행”이라고 『사진판 전집』, 129면.
생각한다. 여기까지 오면, 윤동주가 그 당시 민족의 가난한 현실과 자기 자신의 무력한 모습에 대해 거의 절망에 가까운 느낌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번째 인용에서는 전차에서 기차로 갈아타는 짧은 시간에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느낌을 서술하고 있다. 윤동주는 그 많은 사람들과 자기 자신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에게는 사람들에게 다가설 방법이 없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할 길도 없다. 도무지 ‘휴머니티’를 ‘발휘’할 재주가 없다. ‘皮相的’이라는 단어가 이러한 사정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민족의 현실과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이러한 좌절감은 위의 세 번째 인용에서 인류역사와 인생행로로 확장되어 역시 비관적으로 나타난다. 기차가 터널 속에 들어서자 윤동주는 인류역사와 인생행로를 터널 속의 어둠에 비유하고 있다. 즉 인류역사는 암흑시대에 처해 있으며, 인생행로는 고민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윤동주는 “未久에 우리에게 光明의 天地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차가 터널을 벗어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터널을 벗어나자, 그는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목격하게 된다.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 그들을 ‘건설의 사도들’이라고 부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윤동주는 이 노동자들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세 번째 인용 중간에 2행 정도 탈락된 부분이 있는데, 홍장학은 그 앞뒤의 문맥을 검토하면서 이 탈락된 부분의 “내용 역시 ‘노동자 예찬’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앞의 책, 644면)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윤동주는 노동자들이 밀고 다니는 ‘도락구 판장’에 서투른 글씨로 ‘新京行’, ‘北京行’, ‘南京行’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끝없는 ‘苦力’에 ‘慰安’을 삼으려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시인은 4학년 졸업반 학생으로서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나는 곧 終始를 박궈야한다. 하나 내車에도 新京行, 北京行, 南京行을 달고 싶다. 世界一週行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眞正한 내故鄕이 있다면 故鄕行을 달겟다 다음 到着하여아할 時代의 停車場이 있다면 더좋다. 『사진판 전집』, 137면.


시인은 “곧 終始를 바꿔야 한다.” 이제는 1938년에 시작했던 연희전문학교의 생활을 마치고(終),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始) 한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처럼 “新京行, 北京行, 南京行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라도 하고 싶다. 하여간 어디론가 떠나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시의 바꿈이 단순히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따위의 것만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眞正한 내 故鄕’ 또는 ‘時代의 停車場’을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 뭔가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뭔가 새로운 도약이 요구되는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또는 도약은 좀더 근원적인 것으로, 한편으로는 시대적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대적 의미를 그 안에 품는, 무엇보다 깊은 차원의 내면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현배는 산문 <종시>가 순환론적 사고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이에 따라 윤동주의 시 전체를 ‘순환적 반복’으로 설명하고 있다.(앞의 책, 157∼174면) 그러나 산문 <종시>는 순환론적 사고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시인 내면에서의 근원적인 변화를 암시하고 있는 글이다. 또 연희전문 졸업반 당시에 씌어진 이 산문을 북간도 시기, 연희전문 시기, 토쿄유학 시기에 씌어진 시들 전체에 두루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이 점, 그의 시 <길>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시 <길>

윤동주의 시적 편력은 대략 3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1) 용정 은진중학교→평양 숭실중학교→용정 광명학원 시절(1934∼1937) 2) 연희전문학교 시절(1938∼1941) 3) 동경 유학 시절(1942년 이후)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시기는 두 번째 연희전문학교 시절이니, 바로 이 시기에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희전문 시절의 작품들을 잘 살펴보면, 그가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실로 눈에 띄게 시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연희전문 시절을 다시 3시기로 나눌 수 있으니, <새로운 길>(1938. 5. 10), <자화상>(1939. 9), <무서운 시간>(1941. 2. 7)이 각각 그 3시기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연희전문 시절에만 국한시킬 경우, <자화상>과 <무서운 시간>은 각각 제1기와 제2기, 제2기와 제3기를 가르는 분수령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 된다. <자화상>은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살펴, 스스로 존재론적 근거를 확립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자화상>이 지닌 분수령적 의미에 대해서는 류양선, 앞의 글 참고.
<무서운 시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시인이 종교적 실존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길>은 <무서운 시간> 이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하고 시작하여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끝나는 『사진판 전집』, 154면.
<무서운 시간>의 “‘무서운 시간’이란 죽음의 사자가 오는 시간이요, ‘나를 부르는 것’은 죽음의 사자다.” 김우종, 「암흑기 최후의 별」, 권영민 편, 앞의 책, 149면.
이 시는 시인의 죽음 체험, 즉 가장 깊은 의미의 근본체험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의 면전에서 훌륭한 처분 가능성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다.” 김남조, 앞의 글, 30면.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죽음에 마주친 몸부림 이후, 시인은 홀로 하느님 앞에 마주서는 단독자 즉 종교적 실존으로 변화해 가게 된다.
윤동주는 이 ‘무서운 시간’을 거친 이후인 1941년 5∼6월경에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1941. 5. 31), <새벽이 올 때까지>(1941. 5), <십자가>(1931. 5. 31), <눈 감고 간다>(1941. 5. 31), <돌아와 보는 밤>(1941. 6), <바람이 불어>(1941. 6. 2) 등의 기독교적 의미를 드러내는 시들을 쓰고, 1941년 9월에 이르러 <또 다른 고향>(1941. 9)과 <길>(1941. 9. 31)을 써서 그러한 종교적 의미를 심화시키게 된다. 그리고는 이어서 <별 헤는 밤>(1941. 11. 5), <서시>(1941. 11. 20), <간>(1941. 11. 29), <참회록>(1942. 1. 24)을 쓰면서 시적 성숙도를 더해가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윤동주의 시적 편력을 살펴보았거니와, 그렇게 한 것은 이 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작품인 <길>(1941. 9. 31)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즉 <길>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작품은 이 시인이 종교적 실존으로 성숙해 나아가는 도정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시 <길>을 읽어보자.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츰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츰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처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프름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길을 것는것은
담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사진판 전집』, 162면.


<길> 全文이다. 이 시는 그 제목에서부터 산문 <終始>와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길’이란 말은 ‘종시’란 말의 변형이다. ‘마치고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길’을 떠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둘을 연결시켜 보면, 지난 일을 끝맺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다는 뜻이 된다.
산문 <종시>와 시 <길>의 관련성은 <종시>의 문장과 <길>의 시행을 서로 비교해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종시>의 다음 대목을 <길>의 3, 4, 5연과 비교해 보자.

나는 내 눈을 疑心하기로 하고 斷念하자!
차라리 城壁우에 펄친 하늘을 처다보는 편이 더 痛快하다. 눈은 하늘과 城壁境界線을 따라 작구 달리는 것인데 이 城壁이란 現代로써 캄푸라지한 넷 禁城이다. 이안에서 어떤일이 일우어저스며 어떤일이 行하여지고 있는지 城박에서 살아왓고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알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가닥 希望은 이 城壁이 끈어지는 곳이다. 『사진판 전집』, 129∼130면.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산문 <종시>와 시 <길>은 그 소재와 발상에서 서로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공통된 소재란 성벽과 돌담, 그 안과 밖, 성벽 또는 돌담 위에 펼쳐진 하늘 등이며, 공통된 발상이란 성벽 또는 돌담으로 성 안과 성 밖이 굳게 차단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위로 높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소재와 발상의 유사성은 시 <길>을 쓰게 된 최초의 착상이 산문 <종시>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이제, 이 최초의 시상이 시에서 어떻게 발전하여 산문을 넘어서는 더욱 깊은 차원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길’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길’이라는 단어처럼 다양한 의미층위를 지니는 말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길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만든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뜻하는 것이면서, 또한 그 길을 가는 행위 자체인 노정이나 여정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길은 세월(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여곡절과 시련을 겪는 인생행로를 뜻하면서, 동시에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길은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의 구도적 행각을 뜻하기도 하고, 그가 찾고 있는 진리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길이라는 말은, 땅 위에 난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는 길 최초의 의미를 제외하면, 모두가 상징이다. 요컨대 ‘길’이란 상징적 언어이며, 따라서 그 의미는 시시각각 변하면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 자유자재하고 무궁무진한 의미변용으로 인해, ‘길’이라는 어휘는 그 자체로 시적 함의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길’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상징적 시어가 되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 <길>에 나타난 ‘길’ 역시 이러한 상징적 언어로서, 그 의미의 폭이 상당히 큰 경우에 속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길’의 의미변용에 유의하면서 이 시를 1∼2연, 3∼4연, 5연, 6∼7연의 4부분으로 나누어 읽어 보기로 한다.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1연;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시작되는 이 시의 첫 행은 상실감을 다소 급박하게 토로하는 단정적 서술로 되어 있다. 이 급박하고도 단정적인 서술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함의를 지닌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 어디다 잃었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쉽게 되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지만, 잃어버렸다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간다. 여기에는 가장 본질적인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현재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느낌, 김남조, 앞의 글에서는 이 1연에 “표백된 것은 바로 신앙의 지표를 잃은 때의 그 막막함이다.”라고 하였다.(46∼47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승의 삶 자체가 잃어버린 데서 시작하여 그것을 찾아가는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길에 나아가 걸음을 옮기면서도 두 손은 주머니를 더듬는다. 김현자, 앞의 글에서는 여기서의 “주머니는 길에 비하여 작고 내밀한 공간으로 화자의 내면과 동일화될 수 있다.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는 행위는 곧 잃어버린 대상이 화자의 내면에 존재해 있던 상임을 추정케 한다.”고 하였다.(266∼267면)
주머니를 더듬는다는 것은 시인이 뭔가 깊은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듬는 두 손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향해 뻗어 있는 촉수이다. 따라서 시인이 밖으로 나간 것 자체는 무목적의 산책길에 불과하다. 이 산책길의 발걸음은 두 손이 주머니 속을 더듬는 것을, 즉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돕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2연; 무목적의 산책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길이다. “길은 돌담을 끼고” 간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이어진 돌담길이기에 길은 돌담에 따라 생겨났고 돌담을 의지해 계속된다. 본래적인 어떤 영원한 세상을 차단해 가리우고 있는 돌담, 그 돌담을 끼고 길이 나 있다. 담 너머 고궁 안은 바로 가까이 곁에 있지만, 그 안을 볼 수도 없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담 너머 고궁이 있기에 돌담이 있고, 돌담이 있기에 길도 있다. 이런 까닭에 돌담길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으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찾아가야 하는 마음의 길이 된다. 1∼2연에 나타난 ‘길’은 실제 밖으로 나선 길이자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츰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츰으로 통했습니다.

3연; 끝없이 이어진 돌담길을 걷다가 마침내 고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무엇이 고궁 안에 있는데, 굳게 닫힌 쇠문에 막혀 들어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담의 긴 그림자 또는 담이 던진 쇠문의 긴 그림자가 길 위를 덮고 있다. 이 긴 그림자는 어둠의 느낌과 함께 시간의 감각을 자극한다. 이제 해질녘이 가까워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의 공간 감각을 다음 연에서 시간 감각으로 바꾸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고궁의 안과 밖을 차단하고 있는 담과 쇠문은 시간의 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인간은 이 시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여기서 또한, 다음 연과 관련하여 시간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암시되기도 한다.
4연;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해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아침에서 저녁까지 걸었는데, 이제 다시 저녁에서 아침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간감각에 의지했던 길이 여기 와서 완전히 시간감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의 공간(길)의 이동은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 표현된 것일 따름이다. 아침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아침이 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은 이어진다. 길은 시간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해 있는 길, 시점이 종점이 되고 다시 종점이 시점이 되는 길이다. 여기까지 와서, 이미 언급한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하는 산문 <종시>의 첫 문장의 2차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저녁이 아침이 되고 아침이 다시 저녁이 된다는 것, 말하자면 인생 행로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산문과 시의 관계를 살피면 산문의 의미도 깊어진다.
인간은 이 길을 단축시켜 살아갈 수 없기에, 담 저쪽(고궁 안)을 걸어 볼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만 걷을 수 있는 길, 끝없이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나는 길, 이것이 바로 인생행로이다. 이처럼 3연에 나타난 공간의 길은 4연에 와서 시간의 길, 인생행로로 바뀌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처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프름니다.

5연; ‘길’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걸음이 멈추어졌기 때문이다. 내면세계를 더듬던 촉수가 그 바닥에 닿았기 때문이다. 이 전환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6∼7연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길로의 의미변용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내면은 어떤 것인가? 담 이쪽의 삶임에도 담 저쪽을 향하는 그런 내면이다. 시인은 갈 수 없는 담 저쪽을 그리워하면서 주머니를 더듬던 손으로 돌담을,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더듬는다. 그러면서 눈물짓는다. 이 눈물은 담 이쪽, 현실세계에서의 삶에서 오는 슬픔의 표현이다. 본래적 자아를 떠나 비본래적 자아로 추락한 데서 오는 지극한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이 시행은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부끄러워집니다.”라고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이 시행은 후에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변형된다.
쾌청한 하늘의 푸른 빛은 시인을 부끄럽게 하는데, 왜냐하면 시인의 내면이 거기 비추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부끄러움 속에는 시인의 여리디 여린 마음이 들어 있고, 그런 시인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엄정한 자기성찰이 깔려 있으며, 시인만이 지닌 깨끗하고 명징한 윤리적 감각이 녹아 있다. 최동호, 앞 글에서는 이 시에서의 “부끄러움은 자아와 세계가 상호 이해의 한계에 부딪힐 때 자아의 내면성을 보장해 주는 감정이며, 현실에서의 자아의 비합리성을 표현하는 도덕적 가치로서 윤동주에게 의식된 것”이라고 하였다.(492면)
가슴을 열어 보여주는 투명한 슬픔과 따뜻한 사랑, 이런 것들로 시인은 6∼7연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여로를 준비한다. 전우주적 높이를 지닌 푸른 하늘은 시인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하늘은 담 위에 높이 펼쳐져 담 이쪽과 담 저쪽을 두루 비추어 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추락한 비본래적 자아는 하늘에 계신 님을 통해서만 본래적 자아와 연결된다.

풀 한포기 없는 이길을 것는것은
담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6연; 여기까지 와서, 신앙적 결단을 내릴 시간에 이르렀고, 시인은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결단을 내리려 한다. 이제 시인이 내리려 하는 결단은 자신의 삶의 이유와 근거를 찾았기에 가능한 그런 결단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부터 ‘∼(하)는 것은’→‘∼까닭이고’ 하는 담담한 설명적 어조가 나타난다. 시인은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이지만, 그 길을 걷기로 하는 것이다. 하늘의 푸른 빛으로 자신의 내면을 맑게 씻어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본래적 자아, 푸른 하늘에 비추인 자신의 영혼을 보았기 때문이다. 풀 한포기 없는 길이란 말할것도없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현실세계를 가리킨다. 여기서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은 산문 <종시>에서 보았던 윤동주의 등굣길을 연상시킨다. 등굣길에서 차창으로 내다본 창백한 얼굴들, 그런 풍경을 보고 느끼는 절망에 가까운 무력감 등은 어떤 방식의 합리적 해결도 불가능한 일제 말기 현실세계의 삶의 불모성 그 자체이다.
인간다운 본래적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불모의 현실임에도 그 현실을 살아내겠다는 것은 본래적 자아, 즉 자신의 영혼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와서, ‘길’은 두 번째의 의미변용을 일으킨다. 본래적 자아로 돌아가는 길, 그것은 이 세상의 길을 넘어선 신앙의 길이다. 본래적 자아가 남아 있는 담 저쪽은 내가 떠나온 곳이자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그리하여 ‘길’은 이제 영적 여로가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다. 하늘에 비추어 그 푸른 빛에 씻기운 나만이 본래적 자아이다.
7연; 이 마지막 연에서 조용한 신앙적 결단이 드러난다. “내가 사는 것”은 6연에서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시인이 불모의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오직 “잃은 것은 찾는 까닭”이다. 시인이 ‘잃은 것’은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이다. 그런데 이 담은 고궁의 돌담이라 할 수 있으므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이 잃어버린 ‘나’를 민족적 정체성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특히 이것을 <종시>에서 살핀 일제 말기의 삶의 불모성과 관련시켜 보면, 이 시에 그러한 민족적, 시대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가 이 시의 전체적 구도를 지배한다고 볼 수는 없다.
1연 첫 행에서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의 그 ‘잃은 것’이란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본래적 자아이다. 이제부터 시인이 살아가는 것은 다만 본래적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서, 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존재론적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일 뿐이다. 시인은 ‘다만’이라는 단어의 앞뒤에 쉼표를 두어,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실존을 회복할 수 있음을 표나게 지적하였다. 오직 님을 향한 매순간의 결단을 통해서만, 나는 본래의 내가 된다. 이렇게 해서, 6~7연의 ‘길’은 인생행로이자 신앙의 길, 다시 말해 척박한 현실에서의 영적 여로가 된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하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명확한 서술로 뒷받침되어 있다. 김남조, 앞의 글에서는, “<길>은 삶의 지표를 잃어버린 신앙의 회의기에 씌어진 작품으로 <십자가>의 서원이 그 향방을 잃게 되는 자아 상실의 위기를 보여준다.”고(53면) 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적 편력에 따르면, <길>은 오히려 신앙의 성숙기에 씌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 할 때, 잃었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잃은 것’을 찾기 위해서만 살아간다고 하는 다짐이 중요한 것이다. 윤동주는 <무서운 시간> 이후, <십자가> <또 다른 고향> <길> <서시> 등에서 이러한 신앙적 다짐을 반복하고 있다.

지금까지 ‘길’의 의미변용에 유의하면서 시 <길>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리하여 이 시에 나타난 ‘길’은 땅 위에 난 돌담길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행로를 거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영적 여로까지 멀리멀리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길은 푸른 하늘에 비추어 자신을 가다듬는 그런 길, 길 걸으며 님 그리고 님 그리며 길 걷는 그런 길이다. 시인은 이제 세상에 휩쓸려 가는 삶을 마치고, 오직 님을 향한 새로운 영적 여로를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오직 이 영적 여로만이 일제 말기 현실세계에서 삶의 불모성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이 시에 최초의 시상을 제공한 산문 <종시>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이미 앞에서, 시 <길>은 그 제목부터가 산문 <종시>의 변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졌는가? <종시>의 ‘길’은 등굣길이자 생각의 길이었다. <길>의 ‘길’은 돌담길이자 마음의 길이다. <종시>의 ‘길’은 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 선택 등의 현실세계에서의 방향을 찾아 고민하는 길이었다. <길>의 ‘길’은 잃어버린 자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선 존재론적 갈망에 따른 길이다. 이처럼 시 <길>은 그 최초의 착상을 산문 <종시>에서 가져왔으나, 그것을 발전시켜 <종시>를 훨씬 뛰어넘는 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된 것은 시 <길>이 여러 상징시어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길’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변용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산문 <종시>가 시 <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글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은 <종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眞正한 내故鄕이 있다면 故鄕行을 달겟다.”고 써 놓지 않았던가? 여기서 ‘진정한 내 고향’이란 시 <길>에서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 즉 본래적 자아에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길>과 같은 시기에 씌어진 <또 다른 고향>(1941. 9) 역시 산문 <종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또 다른 고향>을 미처 다루지 못하였다. 미리 말해 두자면, <길>에서의 잃어버린 ‘나’는 <또 다른 고향>에서의 ‘아름다운 혼’에 해당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시 <길>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석이 다시금 산문 <종시>를 비추어 이 산문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까닭이다.


4. 맺음말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씌어진 윤동주의 산문들은 그의 학창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작품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의 시와 산문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어, 그 소재와 발상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윤동주의 문학이 지니는 이러한 특성에 착안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씌어진 산문 <終始>와 시 <길>의 관련양상을 논의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산문 <종시>에 대한 꼼꼼한 이해를 통해, 시 <길>이 창작된 그 최초의 시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 산문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만이 지닌 깊은 차원의 의미까지 밝혀보고자 하였다.
산문 <終始>가 씌어진 시기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4학년 때인 1941년 5월경에서 9월경 사이로 추정된다. 이때 윤동주는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산문 <종시>는 그가 전차와 기차를 타고 누상동에서 신촌까지 등교하는 길에서 본 여러 광경을 기록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終始>는 제목의 뜻 그대로 ‘마치고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에는 윤동주가 연전을 졸업하고 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인이 자신의 삶의 노정에서 어떤 질적인 변화와 새로운 도약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있다는 사실도 읽어낼 수 있다. 그가 이 산문의 말미에서, ‘진정한 내 고향’ 또는 ‘시대의 정거장’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 이를 암시한다.
시 <길>은 그 제목에서부터 산문 <종시>를 이어받고 있다. ‘마치고 시작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길에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시>와 <길>은 성벽과 돌담, 그 안과 밖,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 등의 공통된 소재를 보여준다. 또 그 발상에 있어서도, 성벽 또는 돌담으로 그 안과 밖에 굳게 차단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 등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된 소재와 발상은 <길>을 쓰게 된 최초의 시상이 <종시>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길>은 <종시>의 내용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넘어서고 있으니, <길>의 ‘길’이 지닌 다층적 의미가 이를 말해 준다. 1연에서 7연에 이르기까지, 이 시에서 표현된 길의 의미는 ‘실제로 걸어가는 돌담길’→‘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길’→‘시간의 흐름을 통한 인생행로’→‘자신의 새로운 영적 여로’의 순서로 발전해 나아갔다. 시인은 여러 상징시어들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길’의 의미를 종교적(기독교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길>에 함축된 그런 의미로서의 ‘길’이야말로 시인 윤동주가 일제 말기라는 현실에서 삶의 불모성을 극복해 나아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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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장편소설 <<詩人 윤동주>>에 대한 평심단 의견

 

1, 제출된 기획서들중에서 김혁소설가의 <<시인>>이 작가의도, 가치가 투철하다.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를 잘한 것 같다. 다만 쓰는 기교문제이다. 작가의 능력으로 보면 잘 쓸수있을 것 같다.
윤동주가 실제인물이기에 자료가 많아 쓰기 쉬울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

여태 윤동주에 관해 방송소설만 있고 분량, 질적으로 적으나 모자라며. 윤동주의 동년부분 실제와 다른부분이 많다고 했는데 실제로 력사사실 그대로 쓰면 너무 국한되며, 자서전체에 빠져 실화에 가깝게 접근한다면 우려된다.

하지만 작가의 재주로 극복할수 있을 것 같다.


2, 장편소설 <<시인>>의 준비가 충분하다.

제출한 기획서중에서 <<시인>>이 가장 기대된다.
윤동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윤동주를 통해 당시 력사에 대한 좋은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근심은 실화로 치울칠까봐 걱정된다. 윤동주를 통해 보는 그때의 력사상황을 잘 그려냈으면 좋겠다. 예술적으로 충분히 소설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3, 김혁소설가의 장편 <<시인>>이 제출된 작품중 논리가 가장 정연하고 괜찮다.
송우혜의 <<윤동주평전>>이 있어서 윤동주에 대한 참신한 리해가 없으면 쓰기가 어렵다. 윤동주라는 시인을 윤동주로 말할것이 아니라 력사로 말하고 그 문화를 컨트롤할 능력이 있어야한다. 이에 걱정이다. 허와 실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든다.

윤동주는 가치성이 있다. 진짜 좋은 소설이 되면 대단히 좋은 상황이 된다.

그때의 상황을 리얼하게 재현할수 있겠는가. 암흑기의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시대를 같이 써야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때 최남선까지도 투항했던 그때의 사회 암흑의 심각성을 심각하게 알아야 한다. 그때의 상황에서 윤동주는 감옥 옥사의 상황까지 갔다.

이 작자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4, 우리는 연변 태생인 이 걸출한 시인에 대해 써야할 의무가 있다. 한반도를 통틀어 그렇게 뛰어난 시인에 대한 소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난이도가 크다는 얘기다.

이 작품을 완성하려면 윤동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석박사 논문 50프로는 읽어야한다. 시인의 시작품은 완전히 파악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윤동주시인에게는 난해시가 많고 모더니티하기도 하다.

제출한 창작 기획서와 스토리를 보면 두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인물의 기본성격이 반드시 파악돼야 한다. 이 스토리에서 보면 윤동주가 남성화 돼 있는데 윤동주는 사실 여성화된 인물이다. 부끄러워 하고 참회하고. 성격설정이 기본성격과 맞지않는다고 본다.

둘째, 시인의 가장 중요한 사상을 홀시하지 않았나 본다. 외면은 아니했지만 윤동주는 가장 민족적이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이다. 이것이 감춰져 있다. 반드시 기독교를 잘 다뤄야 윤동주가 살아날수 있다
.
셋째, 극본화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혁소설가는 영화, 극본에 각별한 흥미가 있고 소설도 많이 극화돼 있다.


5, 장편 <<시인>>은 시만 라렬할 것 아니라 윤동주라는 인간을 잘 써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돌파가 있을수 있다.

그때 암흑기에 놓고 그 인간을 써야 한다. 문화함량이 적고 사실만 엮은 작품은 목적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윤동주는 기독교영향을 받으며 성실하게 자란 사람이다. 성격이 조용하고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의 벽에 부딛쳤다.

윤동주는 고민이 많았다. 자아성찰을 하고 돌파구를 찾아 자기완성을 한 사람이다. 이런 지식분자다. 고민하면서 인간답게 살려고 애를 썼다.

송몽규를 만나는데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윤동주는 송몽규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송몽규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시인>>이 인간으로 잘 부각돼야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윤동주 사건에만 매우지 말고 시대적 분위기, 배경을 잘 그려야 성공한다.


 

연변작가협회 제7기 계약작가 평심위원단

 

조성일
(평론가, 전 연변작가협회 주석, 중국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

 


한석윤
(동시인, 전 중국조선족소년보 사장,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문학박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허련순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경훈
(연변대학 교수, 평론 <<윤동주론>>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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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변이 낳은 한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가 처음으로 소설화될 전망이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에 대한 평심회의가 연변작가협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40대의 중견소설가 김혁은 연변, 나아가 한민족의 자랑인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에 대한 논픽션(非虚构) 작품은 많으나 그에 반해 픽션(虚构) 작품들이 전무한점을 감안해 사명감을 가지고 2008년부터 국내외 자료를 열심히 수집연구한데 기초해 스토리를 구성하고 반복적인 수정을 거쳐 작품을 탈고했다. 작품의 기획안은 일찍 연변작가협회 제7기 계약작가 작품으로 선정되였다.

평심회의에는 본작품의 심사위원들인 연변대학 문학박사 김관웅, 소설가 허련순, 연변대학 교수 김경훈 그리고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과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소설가 리혜선등이 참가했다.

평심위원회는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중국조선족문학의 개척자중의 대표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전기소설로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위상을 밝히는데 한몫을 했으며 전기소설의 형식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윤동주생애에 대한 실증적재료에 대한 수집이 완비했으며 류창한 언어와 방대한 스케일의 그 자료를 담아냈다.”고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긍정했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연변문학”지를 통해 2010년 1월부터 련재를 시작하고있다.

김미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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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와 김혁 소설가

 

[ 길림신문] 편집/기자: [ 김청수 ]


소설이 련재되고있는 "연변문학" 표지
 







윤동주를 중국에 맨 처음 알린 일본 와세다 대학 오오무라 교수(가운데)와 필자(맨 오른쪽)
《연변문학》지에 김혁의 장편소설《시인 윤동주》가 련재를 마무리하게 되면서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소설화과정에 대해 독자들은 퍽 호기심이 동해하고 또한 위인의 령혼과의 대화시도에 탄복을 앞세우고있다.
이에 대한 김혁작가의 답을 들어본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위상은 력사와 시간의 검증속에 더욱 거룩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면서 연변, 한국, 일본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서 그의 고고한 삶에 대한 추모붐이 다시금 일고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시를 문화재로 등재하고 새롭게 윤동주시비를 건립하고, 문화제가 폭넓게 열리고있다. 가해국인 일본에서까지 그의 시, 평전이 번역출판되고 그의 시 읊기활동이 해마다 펼쳐지고있으며 그의 생애를 그린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얼마전에는 한국에 거주하고있는 스웨덴과 아일랜드 대사가 어느 모임에서 각각 자신이 좋아한다는 윤동주의 시를 랑독해 화제가 된적도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도 50명이 넘다. 윤동주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수십권,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한 실정이다.
너무나 알려져있는 시인이였지만 그 높은 위상때문일까? 윤동주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하려 한 사례가 극히 적었다. 소설로는 1992년경에 한국에서 한부가 나온줄로 알고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방송드라마의 씨나리오이다. 그 공백의 부분이 나에게 어딘가 사명감과 창작충동을 주었다. 그리고 고향이 낳은 시인 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또 나는 순 룡정태생이다. 룡정에서 태여나고 또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많은 시간을 룡정에서 보냈는데 이 요소가 《시인 윤동주》의 창작과 무관하지 않다.나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룡정중학을 졸업했다. 윤동주의 가족이 명동에서 이사를 와 거주한 영국더기부근도 우리가 즐겨 봄소풍을 다니던 곳이고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에도 동창친구가 몇명이 있어 자주 놀러다니곤 했다.
사실 윤동주의 숨결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의 곳곳에 어려있었다. 고향 연변에서는 그의 모교 명동학교를 복원하고 그의 동시비를 구축하고 문화제준비작업이 한창이지만 고향이라는 이 지리적으로 특수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아직도 미비한 편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윤동주 》를 장편으로 다룸에 있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맞띠웠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였다.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기신 분이지만 그이의 생활경력은 오히려 알려진 부분이 극히 적었다. 때문에 그 생활화폭수집이 아주 힘들었다.
이곳에서 발표된 윤동주에 관련 론문 수십편을 거의 다 읽었고 한국에 가서도 윤동주에 관련된것이라면 평전으로부터 론문집, 지어 아이들을 위해 씌여진 윤동주전기물까지도 시중에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뿐만아니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인 문익환평전, 문익환의 친지들의 회고록, 윤동주의 후배들이 남긴 일화, 추모문들도 세세히 읽었다.
관련된 론문, 평전들을 읽는외 윤동주가 연변에서 생활했던 곳들, 명동과 같은 지역들을 돌아보았고 옛 은진중학 졸업생들을 찾아보면서 당시 시대상, 풍물, 일화들을 들어보고 자료집과 인터넷에 떠도는 그 년대의 귀중한 사진들도 모으고 스캐너 하여 들여다보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읽으려 노력했다.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여사 부부와 함께
그리고 윤동주의 친지와 많은 윤동주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분들을 찾아보았다. 윤동주시인의 녀동생인 윤혜원 녀사도 세번 정도 만났다. 이곳 연변문학지에서 세운 윤동주문학상과 같은 시상식관련 행사를 위해 윤혜원부부는 여러번 오스트랄리아에서 연변을 찾은적 있다. 그때마다 윤동주를 소설화하려는 의도를 표명하면서 그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도 만났다. 1994년 《연변일보》 문화기자로 뛰고있을무렵 그분을 큰 편폭으로 취재한적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로서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한분이였다. 그리고 《윤동주평전》의 일본어판 역자인 아이자와 가크씨와도 만났다. 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

《윤동주 평전》 일본어판 번역자 아이자와 가쿠 선생과 함께.
자료들을 읽고 관련 연구자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차 머리속에 작품의 륜곽을 세우고 내용을 채워나갔다. 그러는중에 연변작가협회의 계약작가창작제도가 있어 거기에 선정되였다. 작가가 자신의 창작기획을 세우고 스토리와 창작의도서를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가 교수,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평심단을 뭇고 제출된 많은 기획서중에서 가능성있는 작품을 엄선해낸다. 그리고 그후 일년간 선정된 작가의 작품에 창작기금을 지원하게 되는것이였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이런 절차를 통해 선정되였다.
잘 알려진 위인의 일생을 그리는건 작가로서는 부담감이 아주 컸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다. 이때문에 창작생에 처음으로 창작슬럼프에 빠져들 정도로 애초에 세웠던 창작계획에 맞추지 못하고 근 1년간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부담감에 시달렸다.그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윤동주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대로 통독했다. 또한 당시의 국면을 더 깊게 료해하기 위하여 일본력사며 태평양전쟁에 관한 력서서적들도 대량 통독했다. 또 나는 원체 영화광이라 소장해둔 테잎과CD가 많은데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다큐, 영화와 드라마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 영상물들이 나에게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다.
김혁작가는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의 창작과정을 핍직하게 들려주면서 윤동주의 고향, 우리들의 고향에서 다시 윤동주의 붐을 일으켜가면서 그의 고고한 삶과 문학정신을 길이길이 기리여가자고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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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들
-불멸의 윤동주-

황인수


감시병 둘이 황급히 3등실 쪽으로 달려갔다. 희미한 등불에 어린 그들의 낯빛이 삶아 담가놓은 우거지처럼 검푸르죽죽했다. 성질 사나운 노동자들이 자리다툼을 하며 또 난동을 부린 모양이다. 선실문을 따고 들어간 감시병들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그들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 대리라.
“이 돼지만도 못한 조센징 놈들!”
성난 이리처럼 눈빛을 희번덕이면서 그들은 온갖 욕설로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모든 조선인들을 싸잡아 모욕할 것이다.
“이 비좁은 선실에서 싸움질을 해? 그러니까 너희들은 개돼지처럼 맞아야 해! 쓰레기 같은 놈들.”
그는 선실 바닥으로 거적때기처럼 내쳐진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춘도 같은 모습을 상상을 했나보다. 3등실로 향하는 감시병들을 돌아다보는 영춘의 눈빛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가 영춘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조심해. 감시자들이 많아.”
영춘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알았어요, 형님. ……죽일 놈들……크악, 퉤-.”
영춘이 바다를 향해 가래침을 날려 보았지만, 왠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삭여지지는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북간도를 뜨면서부터 영춘의 말끝에는 늘 ‘죽일 놈들’이 붙어 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일본 사람들은 모두 ‘죽일 놈’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나갔다.
“죽일 놈들.”
그도 영춘을 흉내 내어 중얼거리듯 그렇게 내뱉어 보았다. ‘죽일 놈들, 죽일 놈들.’ 그의 마음속에는 잠실에서 꿈틀거리는 누에만큼이나 많은 ‘죽일 놈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죽일 놈들’밖에 없었다. 그의 온몸에 ‘죽일 놈들’이 달라붙어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죽일 놈들. 우리의 터전을 수탈하고 능멸하는 저 쳐 죽일 놈들.’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가슴으로 분노가 차올라 퍽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난 해 7월, 아들이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어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세상은 무너졌다. 집안의 기둥인 아들. 자신의 희망이요, 목숨과도 같은 아들이 아무 죄 없이 유치장에 갇히다니. 출판사로 엎어지고, 양계장하다 말아먹고, 하는 일마다 신통치 않아 생업을 전전하며 팍팍하게 살았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고단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아들 때문이었다. 그의 희망이 동경의 하늘 밑에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무죄를 선고받고 하루 빨리 풀려나기를 기도하기 위해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의 사망 전보를 받은 그날 그는 죽었다. 넋이 나갔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천붕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은 보아야 했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는 우지끈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사촌동생 영춘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거기에서 다시 후쿠오카까지 갔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발걸음은 왜 그리 더디든지, 기차는 왜 그리 느리든지…… 아들의 몸뚱이가 더 식기 전에, 얼굴이 망가지기 전에 빨리 만져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기차도, 배도, 걸음도 너무 느리기만 해서 조바심했던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배는 현해탄을 지나 쓰시마 쪽을 향해 나아갔다. 거세진 않았지만 밤바람이 제법 날카로웠다.
“추워요, 들어갑시다.”
팔짱을 끼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2등선실을 향해 돌아서며 영춘이 그에게 말했다. 그는 먼저 올라가라고 영춘에게 손짓을 하고 다시 바다를 마주하고 섰다. 암흑의 바다. 그는 자신이 그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암흑이다. 햇빛 아래서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암흑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그는 자식을 잃고, 희망을 잃었다. 조선은 땅을 잃고 넋을 잃고, 갈 길을 잃었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니 꿈을 잃고,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암흑 속을 헤매는 사람들도 더욱 늘어나리라.
배가 지나가면서 걷어내는 물결 소리와 귀를 웅웅 울리는 둔탁한 엔진 소음, 그리고 사정없이 뱃전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 갑판은 소란스러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들도 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겠지? 의대에 가라는 내 소원을 뿌리치고 문과를 선택했지만 나름 푸른 꿈을 안고 동경으로 갔겠지. 릿교대학에서 교토의 동지사 대학으로 편입하겠다고 지난 여름 고향에 오갔을 때도 이 배를 탔겠지? 3등실에 타면 개돼지 취급 받으니까 2등실에 타라고 당부했지만 돈을 아낄 요량으로 굳이 3등실에 타서 선창마저 굳게 닫힌 그 비좁고 냄새나는 선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불안한 눈을 껌벅였겠지?
6개월 동안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또 얼마나 고생했을까?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특고 경찰들이 증거자료로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조서들을 보며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
“지난 일 년 동안 특고 경찰은 그림자처럼 나를 미행하고 엿들었어요. 내 자취방에 불이 몇 시에 꺼지고 켜지는 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지, 누구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난 꼼짝없이 당했어요. 우리 유학생들 모두가 감시당하고 있어요.”
그는 아들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조카 몽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면회를 갔던 날, 형무소에는 푸른 죄수복을 입은 50여명의 조선 청년들이 줄을 서서 주사를 맞고 있었다. 간수에 의해 이름이 불리어진 젊은이 하나가 그와 영춘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것이 몽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몽규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반쯤 깨진 안경을 겨우 콧등에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몽규가 뭐라고 인사말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가 몽규의 두 손을 부여잡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 모양이냐?”
몽규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삼촌. 동주도 이 모양으로…….”
몽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절망을 느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들 동주가 저런 몰골로, 저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발밑이 무너지며 수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동주가 독방에서 깡보리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몇 쪽으로 연명했었다는 말은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했다. 주사를 맞다가 갑자기 아-인지, 어머니-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학질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온몸이 후들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따뜻한 아랫목에 등을 지지며 편한 잠을 자고 있을 때, 자신의 분신이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 그는 한없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밀려드는 어둠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죄고 흔들었다.
죽어라, 너는 아비의 자격이 없다. 죽어라 이 놈.
그가 눈을 감는 날까지 어둠은 그를 흔들리라. 죽을 때까지 자신은 새벽이 오지 않은 어둠 속에서 살리라. 그렇게 살다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리라.
꿈이 없는 인생. 빛이 사라진 세상에서의 삶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뱃전 쪽으로 다가섰다. 바로 발 밑, 검푸른 바닷물 위로 허연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 찬 물속에 몸을 던져 먼저 간 아들을 따라 가리라. 가서, 춥고 병든 아들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주리라. 못난 아비를 용서하라고 눈물로 호소하리라.
그가 난간을 잡고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는데 누군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형님, 그러다가 떨어지면 시신도 못 찾아요. 추우니까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동주는 잠시 잊읍시다. 어쩌겠소. 이미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영춘이 돌려 세웠을 때에야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간상으로는 대마도 근방을 지날 때가 되었는데 구름이 드리워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네요.”
영춘이 허공 여기저기에 눈빛을 꽂으며 말을 이었다.
“1926년인가? 7년인가? 그러고 보니 벌써 20년 전 이야기가 되었네요. 윤심덕과 김우진이 사건 말이오. 바로 여기 어디 쯤 될 것 같은데……. 둘이 껴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잖아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윤심덕과 김우진 이야기 중에는 그들이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기도한 것처럼 꾸미고 로마나 파리로 도망가서 이름과 국적을 바꿔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은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만들어진 이야기.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주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윤심덕과 김우진처럼 죽음을 가장하고 어딘가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도망쳐서 이름을 바꾸고 살고 있을 거라고, 그가 화장해서 들고 온 저 유골함 속에 있는 뼛가루는 동주의 것이 아니라 그냥 미숫가루이거나 쌀가루일 거라고.
“기차로 갈아타면 눕지도 못해요. 가서 선실 바닥에 다리 죽 뻗고 누웁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영춘의 손에 이끌려 2층 선실로 올라갔다. 선실문 앞에 등이 하나 걸려 있었고, 굳게 닫힌 선창에서는 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았다. 새벽 세 시 반 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시간을 어림해 보았다. 엔진 소리와 울렁임 때문에 사람들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실의 불을 끄고 모두 잠을 청한 까닭은 내일의 여정을 염려한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승선객들은 부산이 목적지가 아니라 부산을 경유하여 지금까지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기차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영춘이 서 있던 갑판 난간에서 출발해서 그들이 서있는 2등실 쪽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선실문을 열려다 말고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직감이라고 하는 걸까? 그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옷의 사람이 다가와서 문 앞에 섰다. 여자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온몸을 두꺼운 털옷으로 감고 있었고, 자주색 머플러로 머리와 목을 감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여자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히라누마 도오주(윤동주)의…….”
“맞소. 내가 윤동주의 아비입니다.”
“난 윤동주의 당숙이오. 무슨 일로 우리 동주를 찾습니까?”
그와 영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그와 영춘이 얼굴이 마주보았다.
“아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영춘이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여자가 고개를 바닥으로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여자의 목소리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저 때문입니다. 히라누마君이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여자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아니 형님, 동주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왜 이 여자는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걸까요? 참, 알 수 없는 일이네…….여보시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거 아니요?”
영춘이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영춘의 말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말했다.
여자를 내려다보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림자 하나가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아니다. 그건 그림자가 아니라 미행자였다. 검은 옷을 입고 그와 영춘의 뒤를 줄곧 따라오던 미행자. 그 미행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와 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했던 날, 형무소 앞에는 몇몇 사람이 출소자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생각해 보니까 그 검은 옷의 미행자가 그 속에 섞여 있었던 것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10여리 떨어진 화장터에서 아들의 주검을 화장시켜 나올 때까지는 검은 미행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유골함을 들고 다시 형무소를 찾아가 몽규를 면회하고 나온 뒤부터 그는 그 미행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도 감시를 당하고 사는데, 일본 땅에서는 오죽할까?’하는 생각으로 미행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들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그도 충분히 감시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래서 일본 경찰이 자신을 따라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미행자가 일경이 아니라 여자였다니……. 이 여자는 내가 동주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걸까? 그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여자가 상체를 세우더니 몸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그에게 디밀었다. 편지봉투였다.
“이건 또 뭡니까?”
영춘이 그것을 낚아채 불빛 아래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불빛에 비친 글씨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히라누마 도오주’였고, 두 통 모두 ‘수취인부재’라는 붉은 木印이 찍혀 있었다.
“제 이름은 기타지마 마리코입니다. 히라누마君과 저는 영문과 클래스메이트였습니다.”
여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좀 전보다 차분했다.
여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무슨 말인가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판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뭐야?”
감시병 둘이 이쪽을 주시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까 3등실 쪽으로 갔던 검푸르죽죽하고, 우거지상을 한 자들이 분명했다. 영춘은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시킨 채 몸만 살짝 돌려 들고 있던 편지를 허리춤에 구겨 넣었다. 여자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다리가 꼬여 주저앉고 말았다. 세 사람이 모두 어정쩡한 자세로 잠시 ‘얼음’이 되어 있을 때 감시병들이 후닥닥 올라왔다. 그들의 눈에는 두 남자가 한 여자를 폭행하는 것으로 비쳤던 것일까? 검푸르죽죽한 감시병이 손전등을 그와 영춘의 얼굴에 비추며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여자는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키며 당황한 목소리로 감시병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감시병들은 여자가 일본인임을 확인하고, 그와 영춘에게 도하증(渡河證)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여자가 감시병들을 가로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분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우거지상을 한 감시병이 막무가내로 여자를 뒤로 젖히고 그와 영춘에게 총을 겨누었다.
“앞장 서라. 좀 더 상세히 조사해 보아야 겠다.”
불길한 느낌이 그에게로 엄습해 왔다. 자초지종을 말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층계 쪽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 때 영춘이 감시병들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아, 글쎄, 우린 아무 잘못 없다니까. 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우리 동주를 죽였다고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다니까.”
“닥쳐라, 조센징.”
우거지상이 총으로 영춘을 칠 기세였다. 여자가 다시 감시병들을 막아섰다.
“사실이에요. 이 분은 옥사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에요. 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서 용서를 빌던 참이었어요. 이분의 아들이 저 때문에 죽었거든요. 그러니 제발 이 분에게 결례하지 마세요.”
“결례라고? 이 자들은 조센징이요. 두드려 맞아야 겨우 말귀를 알아듣는 한심한 족속이라구. 아시오?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 저까짓 조센징 앞에 무릎을 꿇다니!”
검푸르죽죽한 감시병이 도끼눈을 뜨고 여자를 쏘아보았다.
“아무튼 이 분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그랬다간 그냥 있지 않을 거예요.”
여자의 눈빛과 목소리가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감시병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좋소. 잠시 따라오시오.”
우거지상이 여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층계를 내려가 선원실이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갔다. 여자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그는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일이 자칫 꼬였다면 아들의 장례식은 물론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춘과 함께 다시 갑판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와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다간 아들을 생각하면 편안코자 하는 마음을 품은 사실만으로도 죄라고 여겨졌다.
“형님, 이 편지는 어떻게 할까요?”
난간에 기대어 허리춤에 감추었던 편지를 꺼내며 영춘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내용일까요? 화근 덩어리가 될 지도 모르니까 그냥 바다에 던져 버릴까요?”
“수취인 부재라는 도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 우리 동주한테 보냈던 편지가 다시 되돌아간 것 같다. 그 여자가 보냈던 거니까 그 여자에게로 되돌아갔을 테고……. 동주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여자는 동주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편지를 보낸 것이 틀림없어.”
그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가서 편지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실로 들어가야 한다. 선실 어딘가에 비상용 손전등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번엔 그가 영춘의 팔을 붙잡고 앞장섰다.
그와 영춘이 2등실로 오르는 층계에 첫발을 딛으려 할 때였다.
선원실 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와서는 그와 영춘을 지나쳐 선미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좀 전의 그 일본 여자인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의 형태와 색감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걸로 보아 곧 날이 밝아올 모양이었다. 곧이어 선원실에 있던 감시병이 달려 나와 여자를 뒤쫓아 갔다. 여자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는 층계를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갑판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조타실 쪽에서 급사로 보이는 선원 하나가 달려와 선원실 문을 급히 열고, 안에다 뭐라고 냅다 한 마디 지르고는 다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선원실에 있던 승조원 대여섯이 급사가 간 방향을 따라 뛰어갔다. 무슨 큰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그와 영춘도 그들을 따라 선미 쪽으로 갔다. 공연히 의심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멀찍이 서서 조타실 쪽을 살펴보았다. 후미 갑판 위에 감시병을 비롯해 승조원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영춘이 좀 더 가까이 가보자고 하였지만 그가 만류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둔탁한 엔진 소음이 뚝 멈췄다. 그와 함께 배도 멈췄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객실에 불이 들어왔다. 그와 영춘도 적잖이 놀랐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밝아왔다. 좀 전보다 얇아진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지만 비가 오거나 풍랑이 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후미 갑판에 모여 있던 승조원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갑판 난간에 매달려 여객선이 지나온 뱃길을 주시하고 있었다.
승조원과 감시병들은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협의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장인 듯한 사람이 조타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엔진이 돌기 시작했다. 뱃머리가 서서히 왼쪽으로 기울더니 시모노세키 쪽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요, 형님? 배가 회항하고 있어요.”
서너 시간만 더 가면 부산인데, 왜 뱃머리를 돌리는가? 그는 궁금했지만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영춘이 2등실로 올라가려는데 1등실 승객 서너 명이 그와 영춘을 지나쳐 갑판으로 내려갔다. 회항의 이유를 묻기 위해 그들은 조타실로 가는 것이리라.
“저들이 뭔가 소식을 알아올 테니 좀 기다려 봅시다.”
영춘이 선실 문옆 선창을 향해 돌아앉으며 말했다. 그도 영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영춘이 허리춤에서 편지를 꺼냈다.
“날이 밝았으니 예서 읽어 봅시다. 도대체 궁금해서 원…….”
영춘이 편지 두 통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누렇게 빛이 바랜 봉투를 눈 가까이 가져가 들여다보았다. 소인이 지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수신인의 주소는 아들이 기거하던 자취집으로 적혀 있었다.
형무소에서 시모노세키로 오기 전에 그와 영춘은 아들의 자취집에 잠시 들렀었다. 아들의 유해를 안고 자취집에 들어서자 관리인 듯한 늙은 남자가 깜짝 놀랐다. 그와 영춘이 아들이 기거하던 자취방을 한 바퀴 돌아나와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까지 ‘히라누마’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허리를 굽신거렸었다.
수신인 부분에 일본어로‘히라누마 도오주’라고 쓰여 있는 아들의 이름을 읽는 순간 그는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창씨개명을 하고 몇 날 며칠 동안 굴욕감으로 괴로워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일본을 알고, 더 큰 세계를 배워야 한다며 유학을 결심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제 한 목숨 따윈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의 두 눈에서 이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기 시작했다.
편지를 꺼내 펼쳤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그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춘이 가져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히라누마君,
하루 종일 장맛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속을 걸어 君의 거처인 다케다(武田) 아파트까지 갔지만 君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부재중이더군요. 조선으로 간 건가요? 아니면 소무라 무께이(송몽규)君한테로 간 건가요?
‘별 말 없었다’는 자취집 관리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君은 아직 교토 시내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그런 君에게 혹시 불상사가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서 끼니도 거르고 학교로 갔습니다.
君이 자신의 처지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도서관에 틀어박혀 키에르 케고르를 탐독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습기가 몸에 감겨 가뜩이나 어두운 마음을 더욱 무겁게 조여 옵니다.
문학부 강의실 앞 연못가 庭園石 위에 우산을 받쳐 들고 앉아서 물속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그 빗방울은 이내 빗줄기가 되어 물속으로 내리꽂히고, 수많은 바늘이 되어 내 마음을 찌릅니다.
히라누마君,
내 마음을 옭죄고 있는 이 불안과 고통의 원인을 君은 모를 겁니다.
장맛비 속을 헤매면서 왜 내가 君을 찾으려는지, 君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사소한 불찰로 인해 君의 불행이 시작될 것 같은,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특별고등경찰이 이미 君의 신상조사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엊그제 우리 영문과 학생 20명이 木村 俊夫(키무라 토시오) 교수를 방문했을 때 키무라 교수가 君에게 했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적국 사람이 있어. 일본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히라누마君, 자네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아.”라는…….
“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君은 강하게 부정했지요. 하지만 키무라 교수는 君에게 ‘조선 친구들을 만나서 민족의식을 유발하는데 전념하고, 징병제도에 대해 비판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맞서면서 ‘그것이 反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했죠. 평소 君을 따르던 영문과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고,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지요.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君이 자리를 뜨고 난 뒤 오히려 엉망이 되었습니다.
키무라 교수댁에서 보았던 君의 분노한, 아니 절망적인 표정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지난 10여개월 동안 君을 지켜보았지만 그렇게 험한 표정을 지은 君의 얼굴은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뒤따라 나가서 君에게 사실대로 말하려 했으나, 君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말입니다.
그날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 때문에 카모(鴨川) 강변을 한참 동안이나 서성였습니다.
내가 君의 영문법 책을 빌리지만 않았어도 君이 키무라 교수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 그 책갈피에 끼워져 있던 君이 지은 詩가 내 눈에 띄지만 않았어도 君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君이 궁금했습니다. 君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君이 어떤 詩를 썼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君의 시를 읽어보려 했지만 조선말이라서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영문과에서는 君이 유일한 조선인이었기에 저는 그 시를 조선말을 아는 다른 반 친구에게 번역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세 편의 시를 건네받고 <쉽게 씌여진 시> 라는 시를 번역하여 읽어 내려가다가는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히라누마君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전 단지 君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君의 이름을 밝힌 것인데, 君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를 읽던 그 친구가 ‘이 시를 특별고등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우리도 다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하여 큰일을 내고 말았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그래서 전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마다, 이 詩가 히라누마 君의 책갈피에 끼워져 있다고 해서 그가 쓴 詩라는 증거는 없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신고해서도 안 되고, 누구에게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
저는 야마다 손에 들려 있던 詩가 적힌 종이를 낚아채 제 가방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히라누마君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가 말했습니다.
“마리코, 영문과에 적군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아. 조선말로 詩를 쓴다는 게 얼마나 큰 反日행위인지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야마다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 뒤에 엄습해 오는 불안감 때문에 잠시 서성거리다가 저는 야마다가 번역해 놓은 君의 詩 <쉽게 씌여진 시>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될 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시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멀리 낯선 땅에 와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시였고, 부모님을 고생시키며 의미 없는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뇌하는 모습도 엿보였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는 힘들고 어려운 때를 잘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아침을 기다리는’)와 자기연민의 감정(‘눈물과 위안으로’)이 녹아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육첩방(六疊房)은 적막한데’라고 수정한다면 특고(특별고등경찰)에 신고 된다 하더라도 큰 피해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君의 詩를 읽으면서 저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속에 감추어져 들여다볼 수 없었던 君의 고뇌와 고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송별회 때 우지(宇治)강가에서 ‘아리랑’을 부르던 君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우리가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三津井 慶二(미쓰이 케이지)君이 제안했었죠.
“히라누마(平沼)君, 노래 한곡 불러주지 않겠어?”라고.
‘君과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래’라고 그가 덧붙였을 때 君은 거절하지 않고 곧 바로, 그 노래를 불렀죠. 조금은 부드러우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君의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흘렀습니다. 멀리 강변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신록이 우거진 강 언덕 위에는 뭉게구름이 목화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죠. 좀 의외였어요. 평소에 조용하고 온화했던 君이 그렇게 용감하게?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항상 강의실 뒷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사람이었잖아요, 君은, 수줍음 많은.
그렇게 낯가림이 심하고, 외로워 보이는 君의 얼굴 위로 특고의 포악한 고문과 쇠철창의 잔혹한 이미지가 겹치면서 君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안겨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몸이 떨립니다. 君을 찾아다니는 일 외에 3일 동안 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히라누마君,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그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키무라 교수에게 알려지고, 특고와 연결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발 나타나지 마십시오. 제발 특고에 잡히지 마십시오. 지금은 위험합니다. 제가 君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특고에서도 君을 찾아내지 못하기를 빌고 빕니다.
여기, 사진 한 장 동봉합니다.
송별회 때 우지강 구름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히라누마君과의 정답던 청춘의 한 때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잘 은신해 있다가 君의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히라누마君.
이 편지가 히라누마君에게 전달되는 偶然이, 아니 기적이 일어나기를 엎드려 빌고 또 빕니다.
昭和 18年(1943年) 7月 14日
北島 萬里子(키타지마 마리코)


“7월 14일이면, 동주가 용정으로 출발하겠다던 날이죠? 특고에 잡혀간 날이 그날이니까. 참, 내. 아니 이 마리콘가 말콘가 하는 이 여자는 왜 동주의 시를 번역해 달라고 해서는……. 맞네요, 형님. 맞아, 이 여자가 우리 동주를 죽인 게 맞아요.”
편지 읽기를 마친 영춘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젖은 얼굴을 소매로 훔치던 그가 편지봉투를 거꾸로 흔들었다.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일곱 명의 학생이 그 사진 속에 있었다. 아들 동주가 첫째 줄 중앙에 서 있었고, 아들 옆에 그 여자, 마리코도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들이 아직도 교토의 하늘 아래서 푸른 꿈을 꾸며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을 자신의 가슴에 얹고 두 손으로 꼭 눌렀다.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 두려는 듯.

두 사람이 편지를 읽고 있는 사이에 좀 전에 조타실 쪽으로 갔던 1등실 승객 한 명이 선실로 올라갔다. 잠시 후, 대여섯 명이 웅성거리며 다시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와 영춘은 두 번째 편지를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 편지에는 昭和 20年(1945년) 2월 15일자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동주가 죽기 하루 전에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사연은, 1년 가까이 ‘히라누마君’의 행방을 모르다가 우연히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코가 죄책감으로 인해 불면증이 걸렸다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히라누마君’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갔지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몇 번 되돌아 왔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소문에 의하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데, 그 실험의 희생자들의 시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는 내용까지 언급하면서, ‘히라누마君’이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죽음으로 용서를 빌고자 자살까지 기도하려 했다는 내용이었으나 그는 그 편지를 다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등실과 이등실의 승객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와 영춘도 갑판으로 내려갔다.
승객들이 조타실 방향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영춘이 이등실에서 눈에 익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자가 바다로 뛰어내렸답니다. 그래서 시체를 찾느라 배를 돌린 거래요 30여분 동안 찾았지만 허탕이랍니다.”
“마리코?”
그와 영춘의 입에서 동시에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둠 속에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가던 마리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기어코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구나. 선원실로 내려간 그녀에게 감시병들이 무슨 모욕이라도 준 것일까?
일본인이지만 마리코라는 여자는 순수하고 지조가 있어 보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리코는 자신의 부주의로 한 사람이 참혹하게 죽어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후쿠오카 형무소 주변을 맴돌았을 것이다. 동주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 말이다.
2월 15일에 보낸 마리코의 편지는 18일경 형무소에 도착했을 것이고, 동주가 받을 수 없음이 확인되어 반송되었을 것이다. 반송된 우편이 마리코에게 되돌아가기까지 3, 4일이 소요되고, 그것을 받은 마리코가 형무소에 오기까지 이틀 정도가 걸렸다면 마리코는 그와 영춘보다 하루 전쯤이나 같은 날 형무소에 도착했을 거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하였다.
마리코는 ‘수취인 부재’라는 반송사유를 ‘동주의 사망’ 으로 인식하고 형무소에 왔던 것일까?
마리코는 화장터와 동주의 자취집 등으로 이동하는 그와 영춘을 따라다니며 고해성사의 기회를 엿보다가 여의치 못하자 결국에는 관부연락선까지 타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감시병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용서를 빌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화가 났고, 더군다나 ‘히라누마 도오주’의 아버지인 그에게 오히려 결례를 범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담백한 성격의 그녀는 무척 난감했을 거라고, 그는 애써 마리코의 처지를 헤아려 보았다.
마리코가 우리 동주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고 아프게 한 죄,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하고 용서받지 못한 죄. 마리코는 그래서 더욱 자신을 들볶으며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을 사랑했던 젊은 여자의, 아니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인간적인 고뇌와 상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불쌍한 것들. 세상을 잘못 만나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꺼져버린 가엾은 불빛들.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마리코의 부모 또한 딸을 잃은 슬픔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리라.
그가 서둘러 선실로 올라갔다. 그는 짐칸에서 흰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꺼내 펼쳤다. 하나는 유골함, 또 하나는 골분함이었다. 유골함에 있는 유골은 머리와 팔, 가슴과 다리에서 하나씩 추려낸 것으로 용정 선산에 묻을 것이다. 그는 유골함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있던 자리에 놓고 골분함을 들고 일어섰다. 그것은 유골을 추려내고 남은 뼈를 빻아 담은 것이었다.
의아해 하는 영춘에게 성냥을 준비시키고 그는 선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승객들이 선실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모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판으로 내려갔다. 배는 바다 한 가운데를 넓게 돌아 다시 부산을 향하고 있었고, 해가 떠오르려는지 동쪽 수평선 끝이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마리코로부터 받은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영춘에게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라고 하였다. 편지봉투에 불을 붙였다. 그는 불붙은 편지봉투의 한 끝을 들고 일어나서 난간으로 갔다. 손끝까지 다 탄 종이가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리코, 이제 걱정하지 마. 동주는 마리코를 용서할 거야. 동주는 마리코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동주는 마리코 때문에 자기가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는 갑판 위에 있던 분골함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분골을 한 움큼 집어 바다 위에 서서히 뿌리기 시작했다. 하얀 가루가 바다로, 공중으로 흩어지며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아들아, 일본제국주의는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마리코는 용서하거라. 아무리 세상이 혼란해도 영혼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죄는 그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현해탄을 오가며 느꼈던 모든 굴욕과 절망에서 자유로워 지거라. 이 넓은 태평양에서 맘껏 너의 꿈을 펼치거라. 이제 모든 아픔에서 해방 되거라. 네가 원했던 평화의 시간은 올 것이다. 너와 같이 깨끗하고 맑은 영혼들이 수없이 역사의 제단 위에 스러져 갔으니……. 너와 같이 작은 불빛들이 모여 큰 빛이 되리니…….
구름이 흩어지며 쇳물처럼 맑고 붉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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