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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와 자아 찾기 - 이은봉
3. 참된 나 ; 없는 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는 이 혼돈에 구태여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혼돈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혼돈 그 자체를 '나'라는 존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의 '나'는 나 자신을 혼돈 그 자체로 내버려두지 못한다. 혼돈은 내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혼돈이 주는 무질서, 무질서가 만드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끊임없이 이름을 붙여 '나'라는 질서를 만든다. '나'라는 질서를 만들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살아간다.
이 때의 '나'라는 질서로 하여 '나'는 무수한 상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다 보면 '나'는 상처 자체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의 상처는 '나'에게도 작용하고 '남'에게도 작용한다. 나를 억압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이 '나'라는 질서, 상처로서의 질서이다.
내가 만든 '나'라는 질서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내'가 참된 '나'일까. 참된 '나'이기 어렵다. 이 때의 '나'는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너이고, 그이고, 세상 자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변용되는 것은 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 속에서도 내가 등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매 편의 시는 매 편의 '나'를 만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한 편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 된다.
서정시는 본래 '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독백의 형식이다. 독백의 형식이라는 것은 시적 화자인 '나'의 혼잣말로 시의 언어가 진술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혼자서 지껄이고 독자는 몰래 엿듣는 화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서정시이다.
시를 통해 만들어진 '나'는 시 밖의 '나'가 아니라 시 속의 '나'라고 해야 옳다. 시 속에도 시 밖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분열된 '자아'가 존재한다. 시 속의 '나'가 시 밖의 '나'와 얼마간 다른 '나'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바 없다. 이 때의 '나'는 나에 의해 만들진, 가공된 '나'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시 밖의 '나'와 시 속의 '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나', 내가 만든 '나'……,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를 알면서도 모르겠다. 이 때의 '나'는 마땅히 '나'이면서도 '나'가 아니고, '나'가 아니면서도 '나'이다. 시 속의 '나'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10년 전에 쓴 시 속의 '나'와 지금 막 쓴 시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 속의 '나' 역시 정지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아니다.
하지만 시 속의 '나'가 가공되고 제작된 '나', 꾸며지고 장식된 '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참 '나'가 아니고 시 밖에 존재하는 '나'가 참 '나'인가. 그렇지는 않다. 시 밖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며 가공되고 꾸며지는 것이 '나'이다. 시 속에서든 시 밖에서든 고정된 실제로서의 나는 없다. 시 속에서처럼 시 밖에서도 계속해서 저 스스로를 변모시켜 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 속에서의 '나'는 본래 이처럼 꾸며지고 장식된 채로 존재한다. 시 속에는 내가 창조한 무수한 내가 散開된 채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시를 통해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꾸미고 장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미 '나'는 이렇게 저렇게 가공되고 제작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시 속에서의 '나'는 하나의 기교이고, 허구일 따름이다. 허구와 기교로서의 나, 일종의 장식으로서의 나……. 시 속에서 나는 항상 대상으로 분산되고 스며들면서 존재한다. 따라서 시인이 선택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나라고 할 수 있다. 시 속에서 내가 이처럼 타자화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풍경이나 화폭이 그 자체로 세계관의 선택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저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고 위장하는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 아니 '나'의 본질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의 '나'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시 밖의 내가 시 속의 '나'를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만드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는 시 밖의 내가 시 속의 '나'를 만들기도 하고,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만들기도 한다. 전자의 나와 후자의 내가 상호 상생시켜 가는 것이거니와, 詩作過程이 수양의 한 방법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의 안팎에서 '내'가 이처럼 상호 유추되고 전이되는 것은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나'는 나 밖의 '너'로, 나아가 '그'로 변환되는 가운데 존재한다. '너'로, 나아가 '그'로 존재하면서도 '나'는 '나'로 존재한다. 이것이 시의 안팎에서 '내'가 존재하는 역설이다.
이처럼 시의 안팎에서 '나'는 '나'일 수도 있지만 '나'가 아닐 수도 있다. 가공된 인물로서의 나, 제작된 존재로서의 나, 장식되고 꾸며진 주체로서의 나……. 욕망에 쫓기는 나, 허위로 위장된 나……. 그런가 하면 진실로 포장된 나…….
이들 '나' 역시 수많은 '나'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나' 중의 나……. 물론 그 '나'는 흔히 시 속에서 '진실'을 포획하기 위해 희생되기 일쑤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 '나'라는 뜻이다. 이 때의 '나'가 詩作過程에 끊임없이 저 자신을 깎고 덧붙이고 공글려진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시가 완성되었을 때 발화자로서의 '나'는 정작의 '나'이든, 배역(시인이 임의로 창조한 화자)의 '나'이든 말갛게 세면을 하고, 곱게 화장을 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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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스테인드글라스 / 정호승
스테인드글라스
정 호 승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을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정호승 시집 <포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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