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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테두리가 있는 繪畵(회화)를 위한 밑그림 뮌헨의 신 예술가 동맹으로부터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 (靑騎士)에 이르는 시기, 즉 1909년부터 1914년까지에 칸딘스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한 가장 충실한 시기에 해당하며, 추상적 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규칙적인 선과 형태와 색채가 서로 응집과 확산이 교감하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전개는 내적 감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토매틱한 표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의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점이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색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앙포르멜이라든가 액션 페인팅 등 추상 표현주의가 대두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선구자적 성격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검은 곡선이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무대상(無對象)의 추상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을 보여준 역작이다. 불규칙적인 작고 큰 선이 교차하면서 불가사의한 형을 안고 있으며, 색채들은 형체를 안고 울려 퍼져 나오고 있다. 화면 구성의 중심은 명제가 말해 주듯이 검은 곡선이다. 칸딘스키는 곡선에 관하여 '점, 선, 면'에서 '임의의 곡선에 주어진 자유 자재인 악센트 한계는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 선에 대해 서도 일체가 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점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절대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에 의해서, 똑똑하지도 않고 또한 울림이 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계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제상으로 훨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흥 '30' <즉흥>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어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밝은 바탕 위의 형상 1914년 7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칸딘스키는 러시아 사람이므로 뮌헨을 떠나야 했다. 뮌헨은 그 의 예술적 자기 발견의 실현과 예술의 성숙과 그의 일생에 하나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도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실은 가혹한 충격이었다. 상심(傷 心)한 칸딘스키는 취리히를 거쳐 16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가브리엘 뮌터와도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화풍도 점점 정적(靜的)으로 변화하고 색채는 더 어두워져 갔다. 이 시기의 칸딘스키는 제작이 적었으나,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비교적 큰 작 품이다. 불규칙적인 커다란 형상 속에 가두어 넣은 색과 형태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의 작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 우수와 상심이 화면에 깃들고 있다.
빨간 달걀 모양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 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綱版(강판)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윌터 그로피우스는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했다. '모든 예술적 창작의 종합'을 목표로 삼고 그로피우스가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예술가를 교수로 초빙한 것은 유명하지만, 칸딘스키도 '공간과 씨름하는 일, 즉 건축과 협력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바우하우스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이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 생활에 큰 기대와 만족을 가지며 가장 결실이 많은 바우하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3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개최된 전람회 출품작으로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명확한 윤곽을 갖는 것이 늘고 사각형의 선이 교차한 그물 같은 것이 강조되어 기하학적인 요소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검은 정방형의 안에서 1917년 니나와 재혼한 칸딘스키는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제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창작 의욕은 고조되었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직선과 원을 기본적인 형태로 하고 조형 단위를 한층 더 승화시키고 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직선과 곡선, 예각과 둔각, 원 등 거의 기하학적인 요소만이 밝은 배경 위에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점, 면, 선'의 한 구절에 각(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 가지 각은 저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훌륭하게 도면적으로 번역한다. 1. 예각(銳角)-내면의 상면의 날카로움과 극도의 능동성. 2. 직각(直角)-노련한 완성(예술적 구상화) 때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 3. 둔각(鈍角)-제작을 완성한 후의 불만 스런 감정과 무력감.'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노랑=빨강=파랑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써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데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단단하고 부드러움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앞 끝의 위에 높은 이상을 내세우고 발족한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운동은 바이마르의 보수적인 기풍과 맞지 않아, 데사우 시의 호의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 4월에 데사우로 옮겼다. 칸딘스키 부부는 데사우에서 파울 클레 가족들과 이웃에 살았으며,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기능 주의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중시한 칸딘스키는 끝까지 그의 예술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학생들은 칸딘스키가 벽화, 클레가 스텐인드 글라스를 담당한 이외에 1주일에 한 번씩 연 자유화 학급에 참가하였다. 이 작품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지상에 강한 선으로 매고 있는 듯한 중력과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풀이된다.
여러 개의 원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점·선·면》등의 저술도 남겼다.
Colorful Ensemble (738x550pix,, 96kb)
96kb)
Nymphenburg
(1904, 24x32cm; 904x1275pix, 920kb _ ZOOM to 1704x2403pix, 3420kb,
and admire the texture of the canvas, bare in places,
and which shows through the paint everywhere else,
except in a few spots where the paint is slopped on thickly enough)
Stressed Center
(600x1602pix, 467kb)
Autumn in Bavaria (1908, 33x45cm)
Improvisation 7 (1910, 131x97cm)
Composition IV (1911, 159x250)
Composition V (1911, (190x275cm)
Composition VI (1913, 195x300cm)
Composition VII (1913, 200x300cm)
Fragment 2 for Composition VII (1913, 88x100cm)
Composition VIII (1923, 140x201cm)
Composition IX (1936, 114x195cm)
Composition X (1939, 130x195cm)
Black Spot I (1912, 100x130cm)
<
Ravine Improvisation (1914, 110x110cm)
On White II (1923, 105x98cm)
Small Pleasures
Black and Violet (1923)
Contrasting Sounds (1924, 70x50cm)
Painting with Houses (408x550pix, 5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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