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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의 아버지 -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
2016년 03월 18일 00시 17분  조회:5788  추천:0  작성자: 죽림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러시아 태생의 화가.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냈다. 미술의 정신적인 가치와 색채에 대한 탐구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며, 바우하우스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인 1896년 독일로 건너가 아즈베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900년에 뮌헨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 사사하며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동료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를 만났다.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 전시협회 및 미술학교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nter)를 만나 이후 몇 년 동안 그녀와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함께 작품 활동을 했다. 1908년 무르나우로 거처를 옮긴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다. 초기에 그는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들을 그렸으나,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음악과 철학, 근대미술과 추상작업에 대한 사상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그는 캔버스를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점과 색띠로 뒤덮음으로써 추상을 탐험했다.

칸딘스키는 1911년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했다. 그의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는 청기사파 그룹 탄생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년 동안 이 그룹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민족 계몽을 위한 위원회의 회화분과에서 활동하는 한편, 모스크바 아트워크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구성주의에 대해 연구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왔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수학적으로 제한된 엄격한 형태가 지배하게 되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원은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색채 사용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는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하자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프랑스 뇌이쉬르센에서 78년의 생을 마감했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음악적이고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이루어냈다. 그는 색채와 선, 면 등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으며, 형태와 색채가 사물의 겉모습을 그려내기보다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각에서 그는 추상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음악에 비유해 설명했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하얀 테두리가 있는 繪畵(회화)를 위한 밑그림

뮌헨의 신 예술가 동맹으로부터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 (靑騎士)에 이르는 시기, 즉 1909년부터 1914년까지에 칸딘스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한 가장 충실한 시기에 해당하며, 추상적 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규칙적인 선과 형태와 색채가 서로 응집과 확산이 교감하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전개는 내적 감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토매틱한 표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의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점이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색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앙포르멜이라든가 액션 페인팅 등 추상 표현주의가 대두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선구자적 성격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검은 곡선이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무대상(無對象)의 추상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을 보여준 역작이다. 불규칙적인 작고 큰 선이 교차하면서 불가사의한 형을 안고 있으며, 색채들은 형체를 안고 울려 퍼져 나오고 있다. 화면 구성의 중심은 명제가 말해 주듯이 검은 곡선이다. 칸딘스키는 곡선에 관하여 '점, 선, 면'에서 '임의의 곡선에 주어진 자유 자재인 악센트 한계는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 선에 대해 서도 일체가 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점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절대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에 의해서, 똑똑하지도 않고 또한 울림이 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계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제상으로 훨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흥 '30'

<즉흥>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어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밝은 바탕 위의 형상

1914년 7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칸딘스키는 러시아 사람이므로 뮌헨을 떠나야 했다. 뮌헨은 그 의 예술적 자기 발견의 실현과 예술의 성숙과 그의 일생에 하나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도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실은 가혹한 충격이었다. 상심(傷 心)한 칸딘스키는 취리히를 거쳐 16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가브리엘 뮌터와도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화풍도 점점 정적(靜的)으로 변화하고 색채는 더 어두워져 갔다. 이 시기의 칸딘스키는 제작이 적었으나,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비교적 큰 작 품이다. 불규칙적인 커다란 형상 속에 가두어 넣은 색과 형태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의 작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 우수와 상심이 화면에 깃들고 있다. 

 

 

 

빨간 달걀 모양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 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綱版(강판)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윌터 그로피우스는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했다. '모든 예술적 창작의 종합'을 목표로 삼고 그로피우스가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예술가를 교수로 초빙한 것은 유명하지만, 칸딘스키도 '공간과 씨름하는 일, 즉 건축과 협력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바우하우스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이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 생활에 큰 기대와 만족을 가지며 가장 결실이 많은 바우하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3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개최된 전람회 출품작으로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명확한 윤곽을 갖는 것이 늘고 사각형의 선이 교차한 그물 같은 것이 강조되어 기하학적인 요소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검은 정방형의 안에서

1917년 니나와 재혼한 칸딘스키는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제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창작 의욕은 고조되었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직선과 원을 기본적인 형태로 하고 조형 단위를 한층 더 승화시키고 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직선과 곡선, 예각과 둔각, 원 등 거의 기하학적인 요소만이 밝은 배경 위에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점, 면, 선'의 한 구절에 각(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 가지 각은 저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훌륭하게 도면적으로 번역한다. 1. 예각(銳角)-내면의 상면의 날카로움과 극도의 능동성. 2. 직각(直角)-노련한 완성(예술적 구상화) 때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 3. 둔각(鈍角)-제작을 완성한 후의 불만 스런 감정과 무력감.'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노랑=빨강=파랑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써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데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단단하고 부드러움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앞 끝의 위에

높은 이상을 내세우고 발족한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운동은 바이마르의 보수적인 기풍과 맞지 않아, 데사우 시의 호의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 4월에 데사우로 옮겼다. 칸딘스키 부부는 데사우에서 파울 클레 가족들과 이웃에 살았으며,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기능 주의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중시한 칸딘스키는 끝까지 그의 예술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학생들은 칸딘스키가 벽화, 클레가 스텐인드 글라스를 담당한 이외에 1주일에 한 번씩 연 자유화 학급에 참가하였다. 이 작품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지상에 강한 선으로 매고 있는 듯한 중력과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풀이된다. 

 

 

 

여러 개의 원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점·선·면》등의 저술도 남겼다.




Colorful Ensemble (738x550pix,, 96kb)

 

96kb) 

Nymphenburg 
(1904, 24x32cm; 904x1275pix, 920kb _ ZOOM to 1704x2403pix, 3420kb, 
and admire the texture of the canvas, bare in places, 
and which shows through the paint everywhere else, 
except in a few spots where the paint is slopped on thickly enough) 



Stressed Center
(600x1602pix, 467kb)



Autumn in Bavaria (1908, 33x45cm) 










Improvisation 7 (1910, 131x97cm) 



Composition IV (1911, 159x250) 



Composition V (1911, (190x275cm) 



Composition VI (1913, 195x300cm) 



Composition VII (1913, 200x300cm) 



Fragment 2 for Composition VII (1913, 88x100cm) 



Composition VIII (1923, 140x201cm) 



Composition IX (1936, 114x195cm) 



Composition X (1939, 130x195cm) 



Black Spot I (1912, 100x130cm) 


<
Ravine Improvisation (1914, 110x110cm) 



On White II (1923, 105x98cm) 



Small Pleasures



Black and Violet (1923) 



Contrasting Sounds (1924, 70x50cm) 



Painting with Houses (408x550pix, 50kb)



  
 

 
화가 / 제목
칸딘스키 / 노랑, 빨강, 파랑
소장처 / 제작년도
조르주 퐁피두센터 / 1925
명화 해설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노랑, 빨강, 파랑 3가지의 원색적인 색감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현대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칸딘스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구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노랑, 빨강, 파랑' 은 형태와 색채,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그림이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 재직 시절에 그린 '노랑, 빨강, 파랑' 은 색채에 대한 그의 연구 결과라는 평가를 듣는 작품이다. 이른바 3원색으로 불리는 노랑, 빨강, 파랑을 기본으로 이 색채에서 파생되는 녹색, 분홍, 초록, 보라 등을 캔버스에 등장시키고 있다. 
'노랑, 빨강, 파랑' 은 전체적으로 푸른 하늘의 가벼움을 표현한 푸른색이 있고 노랑과 빨강으로 채색된 직선, 곡선 원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색채와 형태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 동시에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가 단순한 선과 면, 그리고 색채를 배열한 것이 아니라 긴장과 조화를 통해 화면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형, 삼각형, 사각형이라는 기본 형태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그림의 면으로 제한된 혹은 전통적 원근법에 기초한 공간이 아닌 제한 없이 깊은 우주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관람자는 무제한적으로 펼쳐진 이 공간에 끌려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한다. 그는 원이나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과 단조로운 선과 색채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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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땡!~ 물을 사서 먹더니 인젠 공기를 사서 마실 때 인가???... 2016-03-26 0 2410
183 [눈 즐겁게 쉬우기]- 하늘을 날고 있는 공작새 2016-03-19 0 2194
182 [눈 즐겁게 쉬우기]- 자연의 거대한 美 2016-03-19 0 1895
181 추상미술의 아버지 -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 2016-03-18 0 5788
180 추상파 사진 2016-03-18 0 2642
179 추억의 사진 두매 / 끝없는 시공부 2016-03-01 0 2605
178 열번, 100번이상 반복해 그려라... 2016-02-24 0 3021
177 그림의 마력에 빠지다... 2016-02-18 0 2505
176 그림과 詩와 과학, 그리고 점묘화 2016-02-18 0 4753
175 프랑스 화가, 신인상주의 점묘화 - 예술 하모니 2016-02-18 0 4162
174 땡!- 미술시간ㅡ 새 두마리로 남은 화가 2016-02-08 0 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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