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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詩적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2016년 03월 18일 22시 41분  조회:4236  추천:0  작성자: 죽림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시인·문학평론가)

 1. 은유의 개념

 

은유를 지칭하는 메타포(metaphor)는 일반적으로 희랍어 ‘metapherei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살펴볼 때, 은유란 ‘meta’의 ‘초월해서’(over․beyond)란 뜻과, ‘pherein’의 ‘옮김’(carrying)의 합성어로서 ‘의미론적 전환’을 뜻한다. 표현의 측면에서 직유가 외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직접적 비교라면, 은유는 내적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비교라는 점에서 차별된다. 은유는 합리적이고 산문적인 비교를 벗어나 질적인 도약을 통해 두 가지 대상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화하는 기법이다. 나아가 그 두 가지 특성의 교집합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관계망을 구축한다. 따라서 다수의 비평가들은 은유가 논리를 넘어서는, 혹은 우회하는 사고체계라고 정의한다.

야콥슨(R. Jakobson)은 회화를 예로 들어 아주 명쾌한 주장을 펼친다. 그에 따르면,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3차원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이기에 인위적 방법을 채택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림의 박진감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습적 방식이 반복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자어와 같은 ‘표의문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일그러뜨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은유에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지각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에 대한 정의는 러시아 비평가 쉬클로프스키(Shklovsky)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의 주장은 시가 ‘자동화’를 깨뜨려 버리면서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논리다. 이 두 학자의 변별점이 있다면, 쉬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를 궁구한다. 즉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고 부정하며 무시하고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자동화․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참신한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어느 한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선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비교조사의 유무에 따른 ‘직유’와 ‘은유’의 구별은 오늘날 크게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극복 방법을 내세운 이는 필립 휠라이트(P. Wheelwright)이다.

그는 자신의 역저인 『은유와 실재』에서 비유가 이미 알려진 것과 체험한 것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제시하는 방편으로 서술의 형식을 지향한다고 단언한다. 즉 A를 이용하여 B를 제시하는 형식은 결국 ‘A는 B다’라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단순한 서술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논리적 제약에 집착하다 보면 시가 지닌 비논리적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논리적 관계에 치중하는 비유를 치환(置換, epiphor)이라고 하고, 비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비논리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병치(竝置, diaphor)라 하여 구별한다. 은유는 본의(tenor)와 매재(vehicle)의 관계가 외면적으로는 결합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성 내지 이화성의 형식으로 드러나며 시의 가장 주된 요소를 차지하는 시적 화법 중의 하나이다.

 

 

1) 1:1 치환의 방식

 

은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하다. 차라리 은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 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가 발견된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은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은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하나의 본의에 두 개 이상의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관념이나 대상(본의)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댈 대상(매재)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명백히 가시화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하여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의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상으로 보면, 치환이란 용어에서도 드러나듯 ‘A는 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치환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본의, 내 마음)을 이미 잘 알려진 정황이나 사물(매재, 호수)로 대체하여 의미론적 전이를 일으키는 은유의 대표적인 전범이다. 야콥슨의 논리에 의하면 ‘옮겨 놓기’란 등가성의 원리에 입각한 계열의 축으로 구성된다. 또한 직유에서와 같이 비교조사가 직접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인 표현에서도 꿰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표현의 문리가 트이면 트일수록 널리 활용하는 표현 기교에 속한다.

 

 

 

(1) 유사은유

 

앞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은유는 본의와 매재를 결합하는 구조적 특질을 지닌다. 그런데 습작생들의 시에서는 본의 따로 매재 따로 노는 경우와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이라는 용어에서 ‘결합’이란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결합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적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에 적합한 이름이 다른 사물로 전이된 형식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와 어떤 유사성도 없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며, 또 ‘내 마음’이 ‘호수’로 변환되면서 의미론적 전이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문학 비평가는 물론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의 초점을 모아온 수사적 기법 중의 하나이다. 두 가지 대상을 하나로 버무려 새로운 영역을 유추적으로 재현해 내는 독특한 세계 인식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은유는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돌려 말하기’인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효율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유사은유’(類似隱喩)란 본의(T)와 매재(V)가 1:1 유사성을 축으로 결합하면서 공분모를 드러내는 양식으로서 기존의 ‘치환은유’를 좀더 세분화하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용어이다.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구토(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 유종인, 「팝콘」 전문

 

상기 인용시에서 유사성의 축은 “팝콘―꽃/내 마음 진창―속/창문 깨고 투신―밖/내 속을 까뒤집은 것―꽃, 구토” 등으로 추출해볼 수 있다. 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T, 본의)이다. 이것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마음의 상태이지만, “팝콘”(V, 매재)의 특성을 통해 명쾌하게 구상화된다. 화자는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화자는 자신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새로운 내적 도약을 예비한다.

화자는 “창문 깨고 투신하”듯이 현재 화자는 힘든 상황을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 같은 표현을 통해 하얀 속살을 내밀며 팝콘으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화자가 말한 ‘꽃’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 시에서 ‘꽃’은 표면적으로 ‘팝콘’을 나타낸다. 팝콘은 옥수수 씨앗이 뜨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변혁을 이룩해낸 무의식의 표지이다.

나아가 ‘팝콘’은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진 화자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꽃’을 “견딜 수 없는 구토”라고 표현한다. 즉 밖이/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안은/밖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화자도 내적인 고통의 분화구가 터져 제 속을 밖으로 꺼내 몸을 뒤집어 쓴 형국이다. 뜨거워 견딜 수 없는 마음은 밖으로 나오고 단단한 몸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고통의 몸부림과 뒤틀림이 꽃이란 몸의 형상으로 동일화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도약의 순간이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윤기가 잘잘 흐르는 털. 궁창이 열리고

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풀이다. 땅의 털인

풀.

욕망이 없다면

땅이 풀을

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겠지.

아, 시원해

물 먹고

주전자 옆에 야구르트 먹고

아, 개운해.

날이 저물고

바람이 불면

빼빼마른 창녀들이

잠자리처럼 날아다니겠지.

궁창이 열리고

땅의 혼돈이 시작되겠지.

― 원구식, 「털」 전문

 

앞서의 시와는 다르게 이 시는 ‘털’(본의)이 ‘풀’(매재)이라는 전이적 은유 구조로 변용되어 있는 수작이다. 털과 풀은 외형상의 조건은 유사하지만, 내용상의 의미는 이질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질성을 축으로 하는 확실한 두 대상의 결합은 ‘욕망=생명’이라는 모호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털은 화자에 의하면 “궁창이 열리고/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가장 나중에 완성”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이나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꼼지락거리”는 욕망의 이름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반해 ‘풀’은 “궁창이 열리고/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존재로 긍정화된다. 만약 “욕망이 없다면/땅이 풀을/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전자 옆”에 있는 ‘털’과 ‘야구르트’는 “개운해”로 동일화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결합된다. 창녀로 야기된 털(음모, 욕망)과 천지 창조(사랑, 탄생)라는 쾌락과 생명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환기하는 특성으로 재조합된다. 동양적 사유와 맞물려 있는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일여적 관점으로 정관한다는 것은 시인의 확장된 의식이 있었을 때만이 가능한 사유 방식이다.

이와 같이 ‘유사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본의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매재로 전이하거나, 구체적인 대상이 다른 이질적인 대상과 결합하기도 한다. 전자에 속하는 유종인의 시가 불확실한 관념을 새롭게 재생하는 효과를 거둔다면, 후자에 속하는 원구식의 시는 두 대상의 차이를 동일화하여 아이러니한 삶의 국면을 보여준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은 동일성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며,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측면이 중시된다. 이처럼 치환의 방식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사성의 축이 시적 인식과 의미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 이접은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은유를 ‘천재의 상징’으로 보았다. 전혀 다른 사물들 사이에서 공통점이나 비슷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화감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분명 천재들에게만 주어진 신의 특별한 선물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상이한 사물들이 각도에 따라 유사하게 보인다면, 아마 그 유사성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인지되는 공분모의 발견과 다르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들, 예를 들면 ‘노 젓기’와 역에서 바라보는 ‘지나가는 기차’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다양한 영감을 병렬하여 물리학의 수많은 추상적 이론을 완성했다. 또한 그 어려운 이론을 일상적인 은유를 통해 대중에게 쉽고 친근하게 설명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은유는 비유할 의도를 숨기면서, 표면에 직접 그 형상만을 꺼내 보여주는 특질을 지닌다. 시인은 독자가 상상적 유추를 동원하여 그 본질적인 상사성(想事性)을 해석할 수 있는 함축적인 구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은유는 시인의 언어에 관한 인식과 대상에 대한 태도 및 표현에 대한 정신의 긴박감 등이 문제가 된다. 은유가 만일 안이하게 사용되면 이미지가 아니라 혼란만 야기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를 은유의 결정체라고 했을 때, 시작 기술에서 본의(T)와 매재(V)가 1:1 동일성을 축으로 하여 결합하는 동시에 다시 상반된 이미지나 의미로 분리되는 특별한 방식이 바로 ‘이접은유’(異接隱喩)이다. 이 기법은 자연스럽게 ‘낯설게 하기’의 효과도 거두면서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장점이 있어 현대 시인들이 즐겨 구사하는 양식 중의 하나이다.

 

염소를 매어놓은 줄을 보다가 땅의 이면에

음메에 소리로 박혀 있는 재봉선을 따라가면

염소 매어놓은 자리처럼 허름한 시절

작업복 교련복 누비며 연습하던 가사실습이

꾸리 속에서 들들들 나오고 있네

비에 젖어 뜯어지던 옷처럼, 산과 들

그 허문 곳을 풀과 꽃들이 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상처 하나 없는 예쁜 염소 한 마리

말뚝에 매여 있었네, 검은 색 재봉틀 아래

깡총거리며 뛰놀던 새끼 염소가, 한 조각 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네

구멍난 속주머니 꺼내 보이던 언덕길 너머

보리 이랑을 따라 흔드는 아지랑이 너머

예쁜 허리 잡고 돌리던 봄날이었네

쑥내음처럼 머뭇머뭇 언니들은

거친 들판을 바라보던 어미를 두고

브라더미싱을 돌리고 있었네, 밤이 늦도록

염소 한 마리 공장 뒤에 숨어 울고 있었네

부르르 떨리는 염소 소리로, 가슴도 시치며

희망의 땅에, 가느다란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이

이제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기염소 뛰어노는 여기저기

소매깃에 숨어 있다 돋아나는 봄날

언니의 속눈썹 같은 실밥을 나는 뜯고 있었네

― 구봉완, 「재봉질하는 봄」 전문

 

상기 인용시는 70년대의 검은색 몸통의 “브라더미싱”(본의)을 “염소”(매재)로 변용하여 은유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염소”가 봄날 상처하나 없이 깡총거리는 “예쁜 염소”(화자)와 응달진 공장의 뒤편에서 “부르르 떨리는 염소”(언니)로 양분되면서 화자의 유년시절을 재생해 내고 있다. 인용시의 은유 체계를 세분화해 보면, 유사성의 축은 ① ‘검은 염소―브라더 미싱’/ ② ‘염소의 음메에 소리―재봉질 소리’/ ③ ‘염소의 발자국―재봉선’/ ④ ‘황폐한 거친 들판―공장 뒤’ 등이다.

이에 반해 이화성의 축은 ① ‘해지고 허문 곳―희망의 땅’/ ② ‘상처 하나 없이 깡총거리는 새끼 염소―공장 뒤에서 부르르 떨리는 염소’/ ③ ‘비에 젖어 뜯어지던 산과 들―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④ ‘구멍난 속주머니―햇살로 박은 옷’ 등이다. 이 시의 시적 구획은 생계를 책임진 언니의 희생(공장의 미싱)과 그 혜택을 받아 가사실습(학교의 미싱)에 임한 화자의 상반된 삶의 양면이 한 꾸리로써 병치되어 있다. 언니의 ‘고통스런 현실’과 화자의 ‘내면적 상처’가 염소의 울음이라는 ‘재봉질 소리’에 의해 극복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봄날의 생명력 있는 이미지와 공장의 신산한 현실이 접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화자는 우리 근대사의 음영을 상호 화사하고 화해로운 재봉질로 갈무리한다. 시 속의 언니에게는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화자가 “한 조각 천”으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고 있는 정황이다. 삶의 간극과 환부를 아름답게 봉합하는 이 은유적 상상력은 낯선 의미 충돌을 유발하는 동시에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을 상상 공간에서 마름질하며 아름답게 완성된다.

 

÷의 달이 호수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되물었다. 구름이 서행하다 몸의 스크럼을 푼 곳은 문자 이전일까, 이후일까? 그녀는 나와 괜히 결혼했다고 트집을 일삼으며 웃었다. 통통 튀던 %들조차 널 중심으로 나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 삐딱한 관점에서 너는 위장 이혼을 종용했다. 그들이 거주한 몸은 빗장뼈를 뽑았기 때문에 헐거웠다. 시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솔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忄에 고착된 그들은 양쪽 도어록을 잡고 울었다. 서로 힘껏 잡아당겨서 열리지 않았다. 예수의 발 뒤꿈치도 뒤집어 볼 수 없었다. 파경을 각오한 호수의 달빛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댔다. 기도로써 뽑아든 평등의 벽을 보았다

― 강희안 「÷%忄」 전문

 

인용시는 자아와 대상, 기표와 기의가 긴밀하게 동일화되어 의미를 명징하게 만드는 서정의 순기능이 거세되어 있다.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자아와 대상과의 파열을 겪는 서정의 역기능에 시선이 고정된다. 시인은, 은유를 통해 기호 표현의 양면성에 관심을 모으면서 기존의 세계가 고착화한 관념의 폭력성에 집중한다. 인용한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세계와 불화를 겪는 시적 정황을 초점화하고 있다. 제목은 ‘÷’(이성)라는 수식이 각도의 형태를 달리하면서 ‘%’(기대지평)로 미끄러지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평등이 벽이 되는 ‘忄’(감성)의 형태를 지향한다.

‘수식’이라는 가장 확실한 이성적 세계에서부터 ‘확률’이라는 모호한 가능성의 세계를 거쳐 ‘마음’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심리적 세계까지를 함축한다. 인용시에서는 수식을 대표하는 ‘÷’(T)가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호수의 표면에 비친 달’(V)의 형상으로, 확률을 대표하는 ‘%’(T)가 널뛰기의 ‘널’(V)의 형상(혹은 삐딱한 관점)으로, 마음을 대표하는 ‘忄’(T)은 문과 문고리가 되어 서로 “양쪽 도어록을 잡”고 있는 형상(V)으로 은유화된다.

이와는 역으로 이화성의 축에서 볼 때, “÷의 달”(주체)은 호수(객체)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진술하는가 하면, “%들”까지도 “널(타자) 중심으로 나(자아)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불화에 봉착한다. 나아가 시인은 “忄에 고착된 그들”(소통)은 “서로 힘껏 잡아당”긴 결과 자아와 기호의 관계가 “평등의 벽”(절연)이 된 심각한 국면을 포착한다. 결국 인용시의 골격은 “결혼했다고 트집” 잡혀 “위장 이혼을 종용”당하고, 결국 “파경”을 염두에 둔 형태로 분리되는 형국이다.

이상과 같은 ‘이접은유’는 동화와 이화의 두 축이 서로 넘나들며 의미를 생성하는 구조이다. 구봉완의 시가 상반된 삶의 음영이 화해로운 재봉질로 갈무리되는 동일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강희안의 시는 기호 표현의 양면성을 통해 자아와 대상의 불화감에 주목한다. 유사성과 이화성의 기능적인 측면을 볼 때, 동화의 축은 시적 인식을 새로운 관계망으로 응집하여 시적 골격을 만들어 낸다. 이에 비해 이화의 축은 아이러니한 삶의 보편적 진실이라는 결구를 이끌어 내는 힘을 발휘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유사은유’가 단순하지만 감각적이고 명료한 직접적인 이미지라고 한다면, ‘이접은유’는 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유기적이고 긴밀한 다중적이고도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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