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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모음
2016년 03월 18일 22시 56분  조회:5165  추천:0  작성자: 죽림

 

 

                                         / 오규원 시모음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全景)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드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한잎의 여자(女子) 1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女子),

그 한 잎의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

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여자(女子)만을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女子), 눈물 같은 여자(女子), 슬픔 같은 여자(女子), 병신(病

身) 같은 여자(女子), 시집(詩集) 같은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

는 여자(女子), 그래서 불행한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女子).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버스정거장에서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커튼 한쪽의 쇠고리를 털털털 왼쪽으로 잡아당긴다 세계의 일부가 차단된

다 그 세계의 일부가 방 안의 光度를 가져가버린다 액자속에 담아놓은 세계

의 그림도 명징성을 박탈당한다 내 안이 반쯤 닫힌다 닫힌 커튼의 하복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다른 한쪽 커튼을 쥐고 있는 내 손이 아직 닫히지 않

고 열려 있는 세계에 노출되어 있다 그 세계에 사는 맞은편의 사람들이 보

이지 않는다 집의 門들이 닫혀 있다 열린 세계의 닫힌 창이 하늘을 내 앞으

로 반사한다 태양이 없는 파란 공간이다 그래도 눈부시다 낯선 새 한 마리

가 울지 않고 다리를 숨기고 그곳에 묻힌다 봉분 없는 하늘이 아름답다

 

 

 

거리의 시간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사내가

간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의 모가지 하나가

여러 사내 어깨 사이에 끼인다

급히 여자가 자기의 모가지를 남의 몸에

붙인다 두 발짝 가더니 다시

사람들을 비키며 제자리에 붙인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여자의

핸드백과 한 여자의 아랫도리 사이

하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주전자가 올라붙는다 마리아의 한쪽 가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놀란 여자 하나

그 자리에 멈춘다 아스팔트가 꿈틀한다

꾹꾹 아스팔트를 제압하며 승용차가

간다 또 한 대 두 대의 트럭이

이런 사내와 저런 여자들을 썩썩 뭉개며

간다 사내와 여자들이 뭉개지며 감동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든다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이 시대의 순수시

 

자유에 관해서라면 나는 칸트주의자입니다. 아시겠지만, 서로의 자유를 방

해하 지 않는 한도 안에서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

기 위해 남몰래(이 점이 중요합니다.)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법은 나는 사

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자유를 사랑하므로, 세상의 모든 자유도 나의 품 속에서 나를

사랑 합니다. 사랑으로 얻은 나의 자유. 나는 사랑을 많이 했으므로 참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자유,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자유, 금주의 운세를 믿는 자유, 운세가 나쁘면 안 믿는 자유, 사기를

치고는 술 먹는 자유, 술 먹고 웃어 버리는 자유, 오입하고 빨리 잊어 버리

는 자유.

 

 

나의 사랑스런 자유는 종류도 많습니다. 걸어다니는 자유, 앉아다니는 자

유(택시 타고 말입니다). 월급 도둑질 상사들 모르게 하는 자유, 들키면 뒤

에서 욕질하 는 자유, 술로 적당히 하는 자유, 지각 안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봉급 봉투 털 어 기세 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자유, 찰칵찰칵 택시

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자유,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남

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자유.

이 세상은 나의 자유투성이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팔아서 공순이의 옷을

벗기는 자유, 시대라는 말을 팔아서 여대생의 옷을 벗기는 자유, 꿈을 팔아

서 편안을 사 는 자유, 편한 것이 좋아 편한 것을 좋아하는 자유, 쓴 것보다

달콤한 게 역시 달 콤한 자유, 쓴 것도 커피 정도면 알맞게 맛있는 맛의 자

유.

세상에는 사랑스런 자유가 참 많습니다. 당신도 혹 자유를 사랑하신다면

좀 드 릴 수는 있습니다만.


밖에는 비가 옵니다.

시대의 순수시가 음흉하게 불순해지듯

우리의 장난, 우리의 언어가 음흉하게 불순해지듯

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미망(미망), 무의미한 순결의 뭄뚱이, 비의

몸뚱이들……

조심하시기를

무식하지도 못한 저 수많은 순결의 몸뚱이들.
 

 

 

호수와 나무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와

귀는 접고 눈은 뜨고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개 한 마리

물가에 앉아 있다

 

사내는 턱을 허공에 박고

개는 사내의 그림자에 코를 박고

 

건너편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는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하늘과 두께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허공과 구멍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새가 지붕에 앉으면 새의 속도의 끝이 됩니다 허공은 새가 앉은 지붕이 됩

니다

지붕 밑의 거미가 됩니다 거미줄에 날개 한쪽만 남은 잠자리가 됩니다

지붕 밑에 창이 있으면 허공은 창이 있는 집이 됩니다

방 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남자의 발바닥이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

가 됩니다

침대 위의 벽에 시계가 있으면 시계가 되고 멈춘 시계의 시간이 되기도 합

니다

사람이 죽으면 허공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 들어갈 관이 되고 뚜껑이 꽝 닫히는 소리가 되고 땅속이 되고

땅속에 묻혀서는 봉분이 됩니다

인부들이 일손을 털고 돌아가면 허공은 돌아가는 인부가 되어 뿔뿔이 흩어

집니다

상주가 봉분을 떠나면 모지를 떠나는 상주가 됩니다

흩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페트병과 신문지와 누구의 주머니에서 잘못 나온

구겨진 천원짜리와 부서진 각목과 함께 비로소 혼자만의 오롯한 봉분이 됩

니다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틈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허

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강과 둑

강과 둑 사이 강의 물과 둑의 길 사이 강의 물과 강의 물소리 사이 그림자

를 내려놓고 서 있는 미루나무와 미루나무의 그림자를 몸에 붙이고 누워있

는 둑 사이 미루나무에 붙어서 강으로 가는 길을 보고 있는 한 사내와 강물

을 밟고서 강 건너의 길을 보고 있는 망아지 사이 망아지와 낭미초 사이 낭

미초와 들찔레 사이 들찔레 위의 허공과 물 위의 허공 사이 그림자가 먼저

가 있는 강 건너를 향해 퍼득퍼득 날고 있는 새 두 마리와 허덕허덕 강을 건

너오는 나비 한 마리 사이
 ===================================================

 

1941년 경남 삼랑진

부산사범학교 및 동아대 법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 등단

시집,『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시창작론,『현대시작법』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

현대문학상,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수상


안개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양철 지붕과 봄비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한 잎의 여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女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하나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한 잎의 여자 3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같은 여자, 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 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든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길 밖의 물


나는 지금 샛강에 서 있다
샛강은 길 밖의 물이요 물 밖의
길이라 이곳에서는 나도
길 밖의 물이요 물 밖의 길이다
그 물 속
그 길 위에

 

엉겅퀴와 개쑥갓 사이에 숨고 싶은 물과
엉겅퀴와 개쑥갓 사이에 숨겨지는
다 타지 못한 이제는 시대의
낡은 사랑 같은 연탄의 불기와
버려져 뒹구는 구두 속에 함께 흙에 묻히는
하늘의 밑창과
썩지 못한 콘돔처럼 방기된 새가
방기된 새처럼 날고 있는 물냄새의
샛강과 그리고 나는
여의도를 바라보다 물꼬를 놓쳐버린
물처럼 서서
그래도 물소리에 등을 밀리며


시집, 사랑의 감옥

 

들찔레와 향기

 

사내애와 계집애가 둘이 마주보고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고 있다

오줌 줄기가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서로 오줌 나오는 구멍을 보며

눈을 껌벅거린다 그래도 바람은 사내애와

기집애 사이 강물소리를 내려놓고 간다

하늘 한 켠에는 낮달이 버려져 있고

땅을 헤집고 있는 강변

플라스틱 트럭으로 흙을 나르며 놀던


뿌리와 가지


잡목림은 뒤를 숨긴다 그러나
새들은 뒤에서도 솟아오른다
잡목림을 돌아가면 전씨의 밭에
팥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맑은 날에는 팥배나무의 허리까지
먼 하늘이 내려와 걸리고
흐린 날에는 물론 흐린 날이 엉긴다
팥배나무는 밭의 둑 밑에
엄청난 뿌리를 숨겨두고 있다
그 주변을 열매가 가득 달린 들찔레와
망개의 넝쿨이 덮고 있다
새들도 자주 즐겁게 들찔레와 망개의
가지 사이에 몸을 밀어넣고
스스로 넝쿨이 된다


신생, 2002년 봄호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비가 와도 이제는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제 혼자 내리는 비뿐이다.

 

슬프지도 않은 비 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 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들고
오, 그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제 혼자 슬픈 비.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假面도 없이
맨 얼굴로
비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어느 것이 假面인가.
슬프지도 않은 비.
제 혼자 슬픈 비.


비가 와도 젖은 者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강은 처음부터 몸을 물로

낮은 곳이면 어디든 가서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강은

그곳을 떠날 때

물은 그대로 두고 갔다

새들도 강에서 날개를 접을 때는

반쯤 몸을 물에

잠그고 있는 돌 위에

두 다리를 놓았다


작은 별에 고독의 잔을 마신다

 

별을 낳는 것은 밤만이 아니다
우리의 가슴에도 별이 뜬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슴도 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에 별이 뜨지 않는 날도 있다
별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 있듯

 

우리가 우리의 가슴에 별을 띄우려면 조그마한 것이라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것을 조용히 그리고 되도록 까맣게 지워야 한다
그래야 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므로 별이 뜨는 가슴이란 떠오르는 별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잘 지워버린 세계이다

 

떠오르는 별을 별이라 부르면서 잘 반짝이게 닦는 마음-이게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은 마음일수록 별을 닦고 또 닦아 그 닦는 일과
검정으로 까맣게 된 가슴이다
그러므로 그 가슴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광채를 가진 사람이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므로 사랑은 남을 반짝이게 하는 가슴이다

 

사랑으로 가득찬 곳에서는 언제나 별들이 떠있다
낮에는 태양이 떠오르고 밤에는 별들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누구나 반짝임을 꿈꾸고 또 꿈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가득찬 가슴에 투망을 하면 언제나
별들이 그물 가득 걸린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귤을 보며

 

1

땅 위에는 작고 흔한 것이 많다 작고

흔하기로는 귤도 예외는 아니지만 느닷없이

 

왜 작고 흔한 것 가운데 귤이 거기에 끼여 있는지

나는 어리둥절하다 제주도에서

 

재배에 성공한 이후 귤은 몇십 원으로

어디서나 살수 있다 그러한 귤이

 

그러나 온몸의 무게로 앉으니까 앉은 자리와

주변이 슬그머니 정돈된다 자리와 주변을 정돈하는

 

그 조용한 무게는 크기와는 달리 나보다 오히려 무겁다

놓인 그 자리에서 밑으로 아무렇게나 그는 그 무게 하나로

 

이미 내가 감당하기 힘든 한 세계의

중량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의 무게는

 

순수해서 학문이나 신념보다 무겁다

온몸으로 아무렇게나 앉은 그 자세 하나로

 

이미 탈사물의 중량이다 그 무게는

정치나 권력 부정이나 부패의

 

무게가 아니라 존재의 무게여서

이 시대보다 순수하게 더 무겁다

 

2

땅 위에는 작고 흔한 것이 많다 작고

흔하기는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귤 하나가

 

저 주먹만한 크기로 작아진 이유가

오늘은 시보다 난해하다 난해한

 

시대 속의 이 작은 난해 앞에서 나는

종일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내가 작으므로 내 속의 역사 내 속의

정치 내 속의 권세와 영광도 이작은

 

귤보다 더욱더 작아진다

오늘은 이 귤보다 더 큰 존재는

내 앞에는 없다 정치도

 

작아진 정치를 보니까 귀엽다

작아져서 조그마한 권세와 영광도

 

이 작은 귤이 작아진 이유

이제야 알겠다 작은 것이 존재하는 이유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

그곳까지


不在를 사랑하는 우리집 아저씨의 이야기

 

빨래가 빨랫줄에서 마를 동안 빨래가 이름을

비워둔 사실을 아시나요?

코스모스가 언덕에서 필 동안 코스모스의 육신이 서 있는

위치를 혹시 아시나요?

우리의 확신이 거울 앞에서 빠져나간 뒤 어디에서

옷을 벗고 누웠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부재를 사랑하는 우리집 아저씨의 현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나요?

 

앞집 아저씨의 말은 언제나 분명하고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너무 분명한 것의 두려운 오류 때문에

나는 믿지를 못하고 우리집 사람들도

모두 믿지를 못하고

저 많은 나라의 외투를 벗기려 펄럭이는 한 자락 바람을

차라리 아끼는 우리집

뜰의 풀잎들은 제각기 흩어져

(풀잎 위의 이슬도 제각기 흩어져 흔들리며)

고독하게 귀가 마릅니다.

은하수를 아시나요?

 

빨래가 이름을 비워둔 그 부재는 방법입니다.

코스코스가 서 있는 그 위치는 이상입니다.

옷 벗은 확신은 참회입니다.

그리고

부재를 사랑하는 우리집 아저씨의 현실은 꿈의 대문 안쪽입니다.


아프리카

 

가뭄으로 나자마자 시들시들 곧 노인이 된 아프리카의 한 아이

사진을 보면서, 흔들흔들 젓가락 같은 다리로 그래도 직립 동물이

라고 끝까지 서서 찍은 사진을 내가 보면서, 문득 내가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 느닷없음과 죄송함,이

아픔의 터무니없는 만남을 어이할꼬.

 

내가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이 시대의 이상도 희망도

좌절도 아니라고, 내가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치사한 개인주

의라고, 개인주의란 이기주의라고, 이기주의 사소한 탐닉이고 사

소한 탐닉이란 가치가 없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이렇게 나를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일은 사랑의

일로 남아 사랑의 일이 여기 있다 하니, 이 사랑의 비극 저 아프리

카의 비극을 어이할꼬.

 

거리의 태앙은 어떻든 빛나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단추도 어떤든

빛나고 빛나는 것은 모두 어디서나 빛나는데, 이 빛나는 거리에

서 빛나지 않으려는 것은 더 빛나지 않으려고 하는, 저 지랄 같은

사랑의 그림자.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1

어둠이 내 코 앞, 내 귀 앞 , 내 눈 앞에 있다.

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

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면 어둠의 코도 역시 어둡고

눈도 귀도 어둡다.

어둠울 자세히 보는 방법은 스스로 어둠이 되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거리를 두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듬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

어두운 게 어둠이라는 사실이다.

 

2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모든 것은 어둠이다.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꽃도 사랑도 청춘도 어둠이고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태양도 어둠이다.

그러니까 어두운 것으로 뭉친 어둠은 어둡지 않은 날 봐도 역시

어둡다.

 

3

어둠이 어두운 것이라면, 만약 어둠이 어두운 것이라면,

그러므로 결국 어둠 외에는 어두운 게 아니다

라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친절히 내가 말해도

사람들은 나더러 말장난한다고 말한다.


원피스

 

여자가 간다

비유는 낡아도

낡을 수 없는 생처럼 원피스 입고

여자가 간다 옷사이로 간다

밑에도 입고 Tv광고에 나오는

논노가 간다 가고 난 자리는

한 物物이 지워지고 혼자 남은

땅이 온몸으로 부푼다 뱅뱅이

간다 뿅뿅이 간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땅을 제자리로 내리며

길표양말이 간다 아랫도리가

아랫도리와 같이 간다

윗도리가 흔들 간다 차가 식식대며

간다 빈혈성 오후가 말갛게 갈리고

여자가 간다 그 사이를 헤집고 원피스를 입고

낡은 비유처럼

 

구멍

 

1

뚫린 구멍마다 뚫린 구멍이 있습니다.

구멍은 뚫린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구멍 속은 구멍이 구멍을 비워놓고 없어 깜깜하기도 하고 구멍이

구멍을 들여다보느라고 들고 있는 거울에 하늘이 좀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뚫린 구멍마다 마개가 있을 것 같아 찾아보면 모두 마개를 가지

고 있습니다.

제일 잘 만들어진 마개를 가진 것은 마개를 버리고 온몸으로

마개가 되어 있는 구멍입니다.

그 구멍은 구멍이 스스로 꽉 차 있습니다.

 

2

뚫린 구멍마다 뚫린 구멍이 있습니다.

구멍은 뚫린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시작이 시작과 시작의

가운데와 시작의 끝이므로 사랑도

뚫린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뚫린 구멍은 그러므로 뚫린 구멍의 끝이 아닙니다.

 

시작이니 끝이니 하고 내가 주워넘기고 있지만 시작도 끝도 사실

은 다 뚫린 구멍이 스스로 마개가 되어 있는 스스로 텅 비워놓은 구

멍입니다.

그러나 나는 존경하옵는 인간이 만든 말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이 '끝'이 어떻게 있는지 잘 지내는지 한번 만나보기 위해 뚫 구

멍의 존재와 뚫린 구멍을 사랑합니다.

아시겠지만

내가 사랑하므로 뚫린 구멍은 뚫려 있습니다.


사랑의 기교 2

--라포르그에게

 

사랑이 기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나뭇잎 나무에 매달리듯 당나귀

고삐에 매달리듯

매달린 건 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사랑도 꿈도.

 

그러나 즐거워하라.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유행가라는

사실은 이 시대의

기교가 하느님임을 말하고, 이 시대의

아들딸이 아직도 인간임을 말한다.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기교, 나의 하느님인 기교여.


70년대의 유행가 中

 

서러움이 정말 서러운 것은

자신의 서러움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서러움이 정말 서러운 것은

자신이 왜 서러운 존재인지 어느덧 모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르고도 계속 이날까지 서러움이었고

서러우면서도 계속 서러움이었다는 점이다

 

서러움이 정말 서러운 것은

서러움의 서러울 권리가 남에게 있지 않고

서러움에게 있기 때문이다.

서러움이 정말 서러운 것은

모든 서러움이 서러움 앞에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왜 평등해야 하는지 어느덧

모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르고도 계속 이날까지 서러움이었고

그래서 더러운 서러움이었다는 점이다


한 구도주의자의 고백

 

내 사랑하는 여자도 세상의

다른 여자처럼 두 개의 탐스러운 유방과

때가 잘 끼는

한 개의 배꼽을 가졌지요.

 

내 사랑이 때가 잘 끼는 배꼽임을

시인하듯

나도 당신의 자유,당신의 평등, 당신의 꿈, 당신의 主義의 그때

가 잘 끼는 배꼽임을 시인하마.

 

늘 시인하기만 하고

늘 패배하기만 하고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는

그래서 사랑의 방법만 생각하는

 

내 사랑이 가엾거든 신이여

손톱 밑의 때라도 씻으며

이 세상을 잊으십쇼.


겨울숲을 바라보며

 

겨울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순간의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얻는다.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죄,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雨季(우계)의 시

 

빗속으로 달음질쳐 너는 가고.

지금

네가 남긴 한 짝의 신발에

안개가 괸다.

눈을 감고 기억을 밀며

안개가 괸다.

나는 젖은 사방.

나는 오로지 기간에 기대어

따금씩 상실과 획득 그 사이

뚜욱 뚜욱 떨어지는 빗방울의

중량을 받는다.

구속에서 가능했던 너의

자유의 땅, 가운데서 나는 있다.

그곳을 덮은 우거진 숲인 나.

가지 끝에 미명을 사르던

잎새들의 통합을 조용히 받는다.

붉디 붉은 입술로 햇살의

投情(투정)을 빨던 꽃나물들이

하나의 기호로 무르익은 것

던져진 육신을 받는다.

계절은 지난날 치닥거리던

그 시간들을 석방했다.

 

잃어버린 의미 속에서 混性(혼성)을

그냥 웃어버린 일월이 덮친다.

스물네 개의 허이연 이빨이 열린다.

빗속으로 달음질쳐 너는 가고.

비 젖은 둘레에서 한갓 사실로 돌아온

생명의 무게를 나는 주워든다.

아니 너의 한 짝 신발을 든다.

한 짝 신발에 괸 강우량

속으로 달음질쳐 너는 가고.

 

웃음

 

문에 '외출 중' 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방에 들어와 누웠다. 얼

굴을 문질러보니 권태와 광기가 범벅이 되어 떨어졌다, 방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들고 생긴 모양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의거탑

뒤 무덤 속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의 산기슭에 몇 평의 땅을 마련

한 친구 녀셕이 요즘은 찾아오는 놈도 없다고 투덜대며 들어왔다.

문에 붙여놓은 팻말을 보았느냐고 물으니 '병신 같은 것' 하며 낄

낄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밖으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내 옆에

누워, 내 옆에서 잠이라도 자야겠다기에 잔소리는 집어치고 잠이나

계속 자라고 빈정대는 말을 녀석의 전신에 덮어주고 나도 웃었다.

말이 필요한 때. 말의 말이 아니라 말의 빛이 필요한 때. 수심,

깊은 수심. 내가 잠이 깨었을 때는 임 녀석은 종적이 묘연했고,주

먹만한 오후 2시의 햇빛이 내 옆에서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 정말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푸른 잎 속에 며칠 더 머물며

--순례 18

 

꽃을 죽이고, 꽃 속에 들어가 꽃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지하

로 숨은 뿌리를 적발해내고, 마지막으로 꽃의 시체를 뜰에다 내려

놓으면

 

죽이고 죽임을 당한 꽃과 나는

하느님

오늘의 할 일은 다 끝났지요?

 

비가 그친 거리에는 아이들 몇몇이

구름 깔린 하늘의 일부를 뜯어내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어디서 죄를 짓고

罪質(죄질)이나 씹으며

저 푸른 잎 속에

죄질이나 씹으며 며칠 더 머물며

푸른 잎이나 더푸르도록 하고

 

사람들은 심심하면 햇볕을 찾아

몇몇은 집을 나와

긴 다리를 건너 다른 마을로 갈 겁니다.


바람은 뒤뜰에 와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 그대를 보며 나는 그대가 지난날 즐겨

찾던 때묻은 말들을 골라본다.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는 지나가

는 아이들의 욕지거리나 무릎 위에 앉히고 ,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

대의 뜰, 그대 뜰의 새가 한밤중이면 무슨 얘긴지 뒤뚤에서 주고받

는 소리를 잠결에 혼자 가끔 듣는다.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바람은 뒤뜰에 와 나뭇잎 몇 개만 건드리

다 그냥 떠나고, 계절은 개나리 몇 송이를 벌려놓고 그대 집 앞을

총총히 지나간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을 알아들은 그대 뜰의 새가

그대의 말이 되어 때때로 담벽을 넘어 어디론가 다녀오는 모습을

나는 본다.


 

1

 

나는 미국 문학사를 읽은 후 지금까지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데, 좋아하는 그녀의 신장 머리칼의 길이 눈의 크기 그런 것은 하나

모른다.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다고 시에 적

는다.

 

2

 

노래가 끝나고 난 뒤에는 노래를 따라 나온 한 자락 따스한 마음

이 이 지상의 기온을 데운다. 우리의 노래는 언제나 노래로 끝나지

못하고 노래가 끝난 다음의 무서운 침묵의 그림자가 된다. 그것이

노래의 사랑, 노래의 죽음이다.


기댈 곳이 없어 죽음은

--순례 3

 

아무도 죽음을 부축할 수는 없다.

기댈 곳이 없어 죽음은 눕는다.

그러나 움켜쥔

죽음의 손은 펴지지 않는다.

집힌 사람들은 그의 손에서 떠나지 못한다.

 

비가 내린다, 거울 속에

구름이 간다, 그 거울 속에.

비가 내린다.

비를 먹고 무성히 자란 잡풀 속에.

 

움직여라 죽음이여

그대는 풀잎 하나 흔들지 못한다.

 

사랑의 기교

 

제1부

김씨의 마을-별과 언어

 

..거울 속의 새들이 나와

나무 위에 앉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그러나 아직은

흔들리는 다리.

오, 여기에 그대의 불빛을.

 

제2부

순례의 서-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제3부

사랑의 기교3-

...아프지 않게 기술적으로 포기하는 법을 익히고 마는 것들의

이름과 이름 사이로 쓸쓸히 걸어가는, 그 사랑의 처마 밑에서

사랑해요, 당신만을 사랑해요 라고 사랑을 나는 고백한다, 계속해서.


아직도 아름답다

 

어미새가 먹이를 먹인다.
옆으로 뻗은 가지를 믿고 앉아
먹을 것을 새끼에게 먹인다.
새끼들의 입이 노랗게 꽃핀다.
살아있는 것들이 아직도
저렇게 아름답다.
새끼의 입 속으로 어미가
먹이가 잘 소화되도록 자기 입 속의
디아스타제를 좀 섞어 먹인다.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도 좀 섞어
거친 말도 좀 섞어
새끼를 먹인다 먹이다가 잠깐씩
하늘의 웅덩이에 몸을 담구었다가
고개를 시간 밖으로 잠깐씩 돌렸다가
정확히 입을 조준하여 어미새가
먹이를 먹인다 새끼들이 먹는다.
살아있는 것들이 아직도 저렇게


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오래된 책 끝

 

벽은 숨을 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굳어지려고 하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벽은 언제나 주검의 냄새가 난다

 

길을 가다가 보면 길과 발이 서로 배가 맞아 저희들끼리 잘도 갈 때가 있다
이럴 때, 저희들의 몸뚱이를 완전히 잊어 버리는 게 근사한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신념과 신명의 갈림길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느님, 아니면 아무라도 좋으니,
공자, 맹자, 노자여, 우리를 어여삐 여겨 무지하고 무죄한 저희들에게 이 표지판 하나만
이라도 허락하소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을 사랑하지 않고 말과 말의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사랑한다
사랑은 그 골짜기가 높고 험할수록 깊다
말을 사랑하는 사람과 말에 미친 사람의 차이는 그 골짜기의 길을 얼마나 알려고
하느냐에 있다

 

허공과 구멍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새가 지붕에 앉으면 새의

속도의 끝이 됩니다 허공은 새가 앉은 지붕이 됩니다

지붕 밑의 거미가 됩니다 거미줄에 날개 한쪽만 남은 잠자리가 됩니다

지붕 밑에 창이 있으면 허공은 창이 있는 집이 됩니다

방 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남자의 발바닥이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가 됩니다

침대 위의 벽에 시계가 있으면 시계가 되고 멈춘 시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허공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 들어갈 관이 되고 뚜껑이 꽝 닫히는 소리가 되고 땅속이 되고 땅속에

묻혀서는 봉분이 됩니다 인부들이 일손을 털고 돌아가면 허공은 돌아가는 인부가 되어

뿔뿔이 흩어집니다

상주가 봉분을 떠나면 묘지를 떠나는 상주가 됩니다

흩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페트병과 신문지와 누구의 주머니에서 잘못 나온

구겨진 천원짜리와 부서진 각목과 함께 비로소 혼자만의 오롯한 봉분이 됩니다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틈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허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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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하고
한잔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

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

꽃과 그림자



붓꽃이 무리지어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왼쪽과 오른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

편지지와 편지봉투



당신의 편지를 오후에 받았습니다
그래도 햇빛은 뜰에 담기고 많이 남아
밖으로 넘쳤습니다
내 손에서는 사각사각 소리가 났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사각봉투였습니다
사각봉투 끝은 오후의 배경을 가리켰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A4용지였습니다
A4용지는 단정하고 깍듯했습니다
A4용지는 나의 그늘은 잘 담기었지만
바람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두 겹으로 하얗게 접혀 있었습니다

~~~~~~~~~~~~~~~~~~~~~~~~~~~~~~~~~~~~~~~~~~~~~~~~~~~~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가는 일이다

~~~~~~~~~~~~~~~~~~~~~~~~~~~~~~~~~~~~~~~~~~~~~~~~~~

한 잎의 여자 1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한 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트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트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 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레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트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

한 잎의 여자 3 / 오규원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커피같은 여자,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
자,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그녀도 뒤집
히며 엉덩이가 짝짝이되네.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내일이면 왼쪽 엉덩
익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
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감
한 여자,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그녀도 앉아
있네.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보여 주지 않는 여자,앉으면 앉은,서먼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물푸
레 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문학과지성사, 1978

~~~~~~~~~~~~~~~~~~~~~~~~~~~~~~~~~~~~~~~~~~~~~~~~

사랑의 대낮



솟구치는 질경이는 잎 뒤의 햇볕을
어디에다 두었나 잎 뒤가 텅 비었다
송장풀과 개비름은 잎 뒤의 그림자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그림자가 없는
육체라니! 숨긴 그림자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나 허물어진 아파트 단지
외곽의 땅이 개쑥갓과 쑥부쟁이처럼
부풀고 있다 드러누워 기고 있는
외풀은 다리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그곳에 나는 오늘 가보고 싶다)
野古草와 바랭이는 허리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어디에다



시집 '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1991)

~~~~~~~~~~~~~~~~~~~~~~~~~~~~~~~~~~~~~~~~~~~~~~~~~

봄과 밤 / 오규원


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 놓았네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 놓았네

~~~~~~~~~~~~~~~~~~~~~~~~~~~~~~~~~~~~~~~~~~~~~~~~~

눈송이와 전화



한 죽음을 불쑥 전화로 내게 안기네
창 밖에 띄엄띄엄 보이는 눈송이를 따라 내리다가
내리다가 돌에 얹혔다가 허물어졌다가 마른 풀에 얹혔다가
나무 가지에 얹혔다가 흙에 얹혔다가 스며들다가
무끄러미 아직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내 손을 보네

~~~~~~~~~~~~~~~~~~~~~~~~~~~~~~~~~~~~~~~~~~~~~

겨울 나그네 / 오규원



지난 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 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애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여,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쪼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根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日月이여
모두 떨어져 덤숙히 쌓인 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발자국이 하나씩 남는다.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나가고.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나가고.

서서 작별을 지지하는 발
발가락 사이 이 차가운 겨울을
부수며
무엇인가 아낌없이 주어버리며
오늘도 딛고 있다.

바람을 흔들며 선 고목 밑
죽은 언어들이 히죽히죽 하얗게 웃고있는
겨울을.
첨탑에서 안식일을 우는 종이
얼어서 얼어서 들려오는
겨울을.

이번 겨울에도 나의 발은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日月이 부서지는 소리
그 밑 누군가가 무게를 받들고......

~~~~~~~~~~~~~~~~~~~~~~~~~~~~~~~~~~~~~~~~~~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1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
몇 가닥을 뽑았고,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어 보였고, 또
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
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

어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는 정오에 출근했고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한 번 훔쳐 보았고,
이 여자 또한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점을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이 여자의 눈에도 별이 뜨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나는 어제 버스가 쉽게 달리는 것을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때문에 이 시대의 우리들이 얼마나 무능
한가를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아도
거리에 선 우리들의 상상력은 빈약해 보였고
그 옆에 선 아이들조차
다시 태어나리라는 상상력을 방해했고,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버스가 고장이 나기를 희망했다.
버스가 탈선되기를, 탈선의 장치의
거리가 준비되기를,
허락받은 사람들은 허락받은 냄새와 지랄의 아름다움을 위

셋방이라도 하나 얻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나는 갈구했고, 그리고
사랑의 말에는 모두 구린내가 나기를 희망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랑이란
맹물이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잊어버려서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너무나 먼
이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려면
셋방을 얻어 주는 그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나에게 질문하며.

2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술과 함께 오기도 좀, 개뿔도 좀, 흰소리도 좀, 십원짜리
도 좀 마셨고
그러나 오늘 새벽 잠이 깨었을 때는
오기도 개뿔도 다 어디로 가고
후줄근히 젖은 시간이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새벽의 창문과 뜰과
이웃집 지붕 위로
그만그만한 어제의 오늘 하루가 내복바람으로 나를 보았
고,
나는 일어나 있었고,
찬물을 한 사발 마신 후
오늘 하루 그것의 사랑에 박힌
티눈의 정체에게 안부를 나는 물었다.
카세트에 녹음된 금강경의 독경을
한 번 듣고, 뒤집어서
반야경을 한 번 듣고.

오늘 나는 오늘의 어제처럼 출근했고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한 잔 마셨고
전화 두 통화 받았고
전화 한 통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워물고 새삼 어제
집에 무사히 도착한 일을 신기해하며
아직도 서정시가 이 땅에 씌어지는 일을 신기해하며
아직도 사랑의 말에 냄새가 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맹물 사랑의 신도들을 신기해하며.

3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고
살 것이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므로
내일 나는 사랑할 것이고,
친구가 오면 술을 마시고
주소도 알려 주지 않는 우리의 희망에게
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

손님이 오면 차를 마실 것이고
죄 없는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할 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은 일만큼 배부른 일을
궁리할 것이고,
맥주값이 없으면 소주를 마실 것이고
맥주를 먹으면 자주 화장실에 갈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하며 만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게 전화도 몇 통 할 것이고,
전화가 불통이면
편지 쓰는 일을 사랑할 것이다.


시집 ; 이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 문학과지성사

~~~~~~~~~~~~~~~~~~~~~~~~~

그대와 산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
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집 ; 두두 / 문학과 지성사

~~~~~~~~~~~~~~~~~~~~~~~~~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巡禮8 / 오규원


멸망하지 않는 그대의 꿈일지라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저기, 멸망이라는 말을 모르는 바다.
멸망이라는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바다의 슬픔을
해변의 때찔레꽃이 오늘도
울며 대신 떨어진다.

매일
그 뜻을 전하려 바다로 가는 소리.

그대, 돌아오지 마라
누구도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바다에 가면
누구나 옷벗은 사람끼리 만나리라.


사랑의 技巧 / 민음사

~~~~~~~~~~~~~~~~~~~~~~~~

사랑의 技巧.1 / 吳圭原오규원


K에게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게 당신을 사랑해 하며
아양을 떨고,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버스가 다니는 길과 버스 속의 구린내와
길이 오른쪽으로 굽을 때 너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훔치는 한 사내의 不道德부도덕에게
사랑의 法법을 묻는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취하는 法을 소주에게 묻는다.
어리석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취해야만 法에 통한다는 사실과
취하는 法이 기교라는 사실과
技巧가 法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안하게도 술집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취해서 깨닫는다.

내가 사는 法과 내가 사랑하는 法을
낡아빠진 술상에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깨닫는다.
젓가락이 둘이라서
장단이 맞지만,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法은 하나뿐이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장단은 엉망이다.

江 건너 마을에는 後庭花후정화 노랫가락이
높고
밤에도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좌석 밑의 구린내와 지린내를 사랑하고
商女상녀는 망국한을 몰라
노랫소리가 갈수록 유창해진다.

나는 이곳의 技巧派기교파로 울면서, 이 울음으로
몇 푼의 동냥이라도 얻어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여기 이렇게 울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사랑의 技巧, / 민음사,1978

~~~~~~~~~~~~~~~~~~~~~~~~~~~

부처


남산의 한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뉘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

마음이 가난한 者


성경에 가라시대 마음이 가난한 者에게 福이 있다 하였으니

2백억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9억 원을 축재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 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1백9십9억 원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8억을 축재한 사람 또한 그민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적은 20억 원이니 30억 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재한 사람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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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한국 詩人 김억 / 인도 詩人 타고르 2016-04-04 0 7027
1305 인도 詩人 타고르 / 한국 詩人 한용운 2016-04-04 0 4608
1304 [봄비가 부슬부슬 오는 이 아침 詩 읊다]- 쉼보르스카 2016-04-04 0 4622
1303 [이 계절의 詩 한숲 거닐다]- 사려니 숲길 2016-04-04 0 4537
1302 [월요일 첫 아침 詩 한잔 드이소잉]- 하루 2016-04-04 0 4226
1301 [청명날 드리는 詩 한컵]- 황무지 2016-04-04 0 4685
1300 <작은 것> 시모음 2016-04-04 0 4460
1299 詩와 思愛와 그리고 그림과... 2016-04-03 0 5291
1298 詩, 역시 한줄도 너무 길다... 2016-04-03 0 5955
1297 詩, 한줄도 너무 길다... 2016-04-03 0 4457
1296 [이 계절 꽃 詩 한다발 드리꾸매]- 벚꽃 시묶음 2016-04-03 0 5373
1295 <할머니> 시모음 2016-04-02 0 4394
1294 {童心童詩}- 텃밭에서(詩를 쉽게 쓰라...) 2016-04-02 0 4801
1293 {童心童詩} - 꽃이름 부르면 2016-04-02 0 3971
1292 <발> 시모음 2016-04-02 0 4549
1291 도종환 시모음 2016-04-02 0 5252
1290 [이 계절의 꽃 - 동백꽃] 시모음 2016-04-02 0 5279
1289 이런 詩도 없다? 있다!... 2016-04-02 0 4102
1288 [한밤중 아롱다롱 詩한컷 보내드리꾸이]- 모란 동백 2016-04-02 0 4499
1287 [머리를 동여매고 하는 詩공부]- 자연, 인위적 언어 2016-04-02 0 4289
1286 [머리가 시원한 詩공부]- 죽은자는 말이 없다... 2016-04-01 0 4107
1285 [머리 아픈 詩 공부]- 문학과 련애 2016-04-01 0 5190
1284 [싱숭생숭 봄날 아롱다롱 봄, 풀꽃 詩 한 졸가리] - 풀꽃 2016-03-31 0 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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