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魏晋南北朝時代-文學 이 시대의 문학은 한(漢)의 문학이 달의(達意)의 실용적 문학이었던 것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인위적 형식을 중시하는 수사(修辭)주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위(魏)의 건안 연간(建安年間=196-220)에 종래의 <시경(詩經)> <초사(楚辭)>의 형식을 따른 시문학은 일변하여 새 형식의 5언시가 형성된다. 조조(曺操, 155-220 : 후한의 정치가)는 전통의 제약을 벗어나 준수(俊秀)를 모아 6조 문학의 길을 열었다. 조비(曺丕 187-226 : 조조의 장남), 조식(曺植) 이하 건안의 7자(七子) 등이 5언 시형에 격조 높은 문학성을 부여하여, 5언시는 이후의 역사의 정형(定型)이 되었다. 조비의 <전론(典論)>은 6조에서 융성해지는 문예 비판의 선구이다. <건안의 풍골(風骨)>은 강개에 넘치고, 아직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힘이 넘치는 조식의 시의 풍격에 의해서 대표된다. 정시 연간(正始年間=240-248)에 왕필(王弼, 226-249), 하안(何晏, 190-249)이 노장(老莊)사상을 고취하여, 이것이 문학에 영향을 주어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 혜강의 <유분시(幽憤詩)> 등이 나타난다. 이 둘을 포함하는, '죽림 7현'이 이 시기 문학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문사들은 세속을 피하고, 술을 마시고, 청담(淸談)에 지새워 은일(隱逸)의 사상이 나타난다. 태강 연간(太康年間=280-289)에 개화된 현란한 수사주의 문학은 육기(陸機)와 아우인 육운(陸雲)이 대표한다. 그 5언시는 기품이 넘치고 격조가 높다. '문부(文賦)'는 문학 지상(至上)을 말하고, 수사의 중시(重視)를 주장한다. 그 발언은 수사주의에의 과도(過渡)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목된다. 당시 장협(張協), 장재(張載), 장항(張亢) 형제, 반악(潘岳)과 반니(潘尼), 좌사(左思) 등이 유명하여 이것을 '삼장이육양반일좌(三張二陸兩潘一左)'라고 한다. 동진(東晋)은 강남으로 옮겨가서 귀족사회가 확립된다. 곽박(郭璞, 276-324)의 시는 노장사상을 반영하고 문사들은 정치권외로 피하고 산수에 자적하여 산수문학이 일어났다. 왕희지(王羲之, 307-363)는 회계(會稽)의 산수에 심취, 난정(蘭亭=절강 소흥현)에 모인 41명의 참가자는 산수문학의 원천이 되는 시를 읊었으며, 이와 함께 산수화(畵)도 왕성해졌다. 자연미에 대한 관심은 진·송의 도연명, 사영운에 의해서 풍부히 노래 불려지고 있다. 연명은 전원의 풍광을 평담(平淡)하고 깊은 사색 속에서 노래했고, 사영운은 귀족적 감각으로 정치(精緻)하고 율동적인 시를 많이 남겼는데, 사영운의 계통은 당시 시단의 주류였다. "노장(老莊) 퇴(退)하기를 고하여 산수 바야흐로 자미롭다"란 것은 당시의 새로운 경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불전(佛典)의 번역 유입도 다른 의미로서 중시된다. 지겸(支謙), 법호(法護),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의 역경(譯經) 등 불교사상을 중국에 들여와서 이상한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그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는 당시 시문의 풍조와 대조적이다. 송(宋)의 원가 연간(元嘉年間=424-453)에 성명(聲明=인도 음운학)의 영향을 받아 성률(聲律)에 대한 관심, 4성의 발견이 시작된다. 제(齊)·양(梁)의 심약(沈約, 441-513)이 그 중심이었고, 시에서는 평측(平仄)·구말(句末)의 압운이 연구되어, 문학적인 기교는 세련되고, 문(文)에서의 46변려체(騈儷體)도 이 시기에 확립된다. 그 대구(對句)를 사용하는 아름다운 문체는 6조문학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명연간(永明年間=483-493)에는 소자량(蕭子良)을 중심으로 '경릉팔우(竟陵八友)'가 활약하여 문학은 다시 번영했고, 사조(464-499)는 그 중에서도 청신하고 뛰어났다. 소명태자(昭明太子), 간문제(簡文帝), 원제(元帝) 등은 모두 문학을 애호하여, 간문제를 대표로 하는 궁중부인의 정을 염려하게 노래한 시는 '궁체(宮體)'라고 불린다. 당시의 사화집(詞華集)으로서는 <문선(文選)>(소명태자 撰), <옥대신영(玉臺新詠)>(徐陵 撰)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종영(鐘嶸)의 <시품(詩品)>,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문예 비평의 책으로서 쌍벽을 이룬다. 한나라 이래의 민간가요인 악부는 서진의 멸망(316)부터 남쪽으로 이동되었고, 북조에는 따로 이민족의 문화와의 융합에 의한 슬픈 가요가 탄생하였다. <목란사(木蘭辭)> <칙륵가(勅勒歌)>는 그 대표작이며, 6조의 <공작동남비>와 함께, 현재까지 민중의 마음 깊이 노래 불려지고 있는 이야기 시이다. 남조의 가요는 반대로 남녀의 정을 사랑스럽게 노래했고, 많은 5언시형을 갖는 점도 주목된다. 6조의 정신은 신비주의적 일면을 보여, '지괴소설(志怪小說)'이 많이 출현하였고, <수신기(搜神記)>는 그 대표작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는 개인의 일화를 모았고, 거기에는 6조에서의 개성의 발견을 엿볼 수 있다. 사상과 해학(諧謔)이 풍부하고, 문체도 자연 청신하며, '소설'에 속한다. 괴(怪)를 적은 소설 외에 경구집(警句集), 소화집(笑話集)도 당시에 나타났는데, 모두 청담(淸談)에서부터 도불(道佛)사상, 괴이(怪異)에의 관심 등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建安七子 후한 헌제(獻帝)의 건안 연간(196-220)에 조조(曹操) 부자 밑에서 활약한 문학 집단 가운데 특히 뛰어난 재자(才子) 7인을 가리킨다. '업하의 7자'라고도 한다. 공융(孔融=자는 文擧, 공자의 末裔) (153-208), 완우(阮瑀=자는 元瑜)(? -212), 서간(徐幹=자는 偉長) (170-217), 진림(陳琳=자는 孔障) (? -217), 응양(應▩=자는 德璉) (? -217), 왕찬(王粲=자는 仲宣) (177-217), 유정(劉楨=자는 公幹) (? -217)의 7인으로서, '삼조(三曹)'의 위성(衛星)으로서, 신흥 업도에서 20년 동안이나 활발히 시작(詩作)을 계속했다. 그 중에도 왕찬, 유정이 뛰어나, 이 집단이 5언시의 발전, 문학의 서정화에 이룩한 공적은 지극히 크다.
蔡琰 (177- ?) 후한의 여류시인. 자는 문희(文姬). 진류(陳留=허난성) 사람이다. 학자 채옹(蔡邕, 132-192)의 딸로서, 그의 학문을 전하였으며, 박학하고 음악을 잘하였다. 처음 남편 위씨(衛氏)와 사별하고, 친정에 돌아가 전란을 만나(192), 흉노에게 붙잡혀 그 곳 산시성(山西省) 남부에 12년간 살면서 두 자식을 낳았다. 조조(曹操)가 그 재능을 인정하여, 귀향시켜 동사(董祀)의 아내가 되었다. <비분시(悲憤詩)> 2수는 자작시라고 하며, 지난날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 긴 시는 5언시의 가장 초기의 믿을 수 있는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曹植 (192-232) 위(魏)나라 시인. 자는 자건(子建). 시호(諡號)는 사(思)이다. 최후의 봉지(封地)의 이름을 따서 진사왕(陳思王)이라고도 한다. 조조의 셋째 아들. 비(丕=文帝)의 아우. 조조 부자는 삼조(三曹)라고 불린다.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있어 업도의 동작대(銅雀臺)를 노래한 부(賦)는 형들을 능가하여 부친의 총애를 받았다. 29세에 부친이 죽고 맏형인 비가 즉위하자, 후계자 경쟁의 실패 때문에 엄중한 감시 아래 이후의 생애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콩을 삶는 데는 콩깍지로 태운다(煮豆持作羹). 같은 뿌리의 형제가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느뇨(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라고 노래한 7보의 시(七步之詩)는 전설이라고 전하지만 상징적이다. 아내가 살해당하고 연이어 딸도 잃는 등 불행한 생애를 40세로 마감하였다. 우수(憂愁), 감시와 속박에 대한 반항이 강했고, 또한 마음속에 침잠(沈潛)시켜서 5언의 시로 결정시켜, 5언시의 기초를 굳혔다. 악부에도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천부의 재능은 증답시(贈答詩)에서의 테마의 확대, 고도의 서정성의 발휘, 화려한 수사 등 다방면에 걸쳤고, 강개의 기가 넘치는 건안의 풍골은 그로써 대표된다.
위나라 문제(文帝=曹丕)가 경전이나 문학을 논한 저서. <문선> 52에 전해진다. 이 가운데는 "주의(奏議)는 바르게, 서론(書論)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 비문(碑文)은 실을 중히 여기고, 시부(詩賦)는 아름다워야 한다" 등의 주장을 볼 수 있으며, 또한 건안의 7자의 특징을 논평하여 문예비평의 선구를 이루었다. "개문장 경국대업 불후 성사(蓋文章 經國大業 不朽盛事)"라는 말은 가장 유명하며, 문학에의 태도, 문학의 지위의 고양에 기여한 역할은 높이 평가된다.
竹林七賢 위진시대에 살았던 완적(阮籍), 혜강, 산도(山濤, 205-283), 유영(劉伶), 완함(阮咸, 3세기 후반경 : 완적의 조카), 향수(向秀), 왕융(王戎, 234-305)의 7명을 가리킨다. "언제나 죽림 아래 모여 거칠 것 없이 술을 마셔, 죽림 7현이라고 불렀다"라고, 6조 송의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7인을 한 그룹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사상적 중심은 혜강과 완적의 두 사람이며, 다시 산도와 향수, 유영과 완함·왕융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죽림이란 방외(方外)의 땅, 즉 자연이란 뜻이다. 조씨의 위(魏)에서 사마(司馬)씨의 진(晋)으로의 정권 항쟁기에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죽림과 술에 자기도회(自己韜晦)하려고 하였다. 혜강은 반사마(反司馬)의 거병(擧兵)을 하려 했고, 완적은 혜강이 사마소 때문에 형사(刑死)한 다음해에 죽고, 그 다음해에야 사마씨의 진왕조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산도는 이 정권교체기에 79세의 장수를 누리다가, 진나라 원훈(元勳)으로서 죽었다. <장자>의 주서(註書)를 쓰고 은일(隱逸)의 뜻을 보인 향수도 사마소에 사관(仕官)을 구했다. 완적에게서 속물이란 평을 받은 왕융은 진나라 시대까지 장수했으며, 인색하여 밤낮 돈계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주덕송(酒德頌)>을 쓰고, 언제나 술을 휴대하고, 종자(從者)에게 괭이를 가지고 따르게 하여, "내 죽은 곳에 나를 묻어라" 하고 기이한 말을 토한 유영의 과대한 도가적 언사는 자기도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계절(季節)에 명철보신(明哲保身)하지 않으면 안 된 중국의 사군사(士君士)들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전해 내려온 사람들이다.
阮籍 (210-263) 중국 위 말의 시인. 자는 사종(嗣宗), 진류(陳留=허난성) 사람이다. 혜강과 함께 죽림 7현의 중심인물. 부친인 완우(阮瑀, ? -212)는 조조를 섬긴 '건안 7자'의 한 사람이었다. 완적은 형인 혜희에 대해서는 아첨하는 선비에 대한 백안(白眼)으로 대했으나, 아우인 혜강에게는 청안(靑眼)으로 대하여, 여기서 죽림 교유의 중핵이 이루어진다. 원래 제세(濟世)의 뜻이 있었다고 하는 그의 유가적 지조는, 위진 사이를 전변(轉變)하는 경박한 군자들을 외면하려는 도가적 '과장된 언사'로서 자기도회하려고 했다. <도덕론(道德論)> <통로론(通老論)> <달장론(達莊論)>이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 등의 노장적 세계를 그린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감음을 일삼고, 차바퀴가 다하는 곳에서 통곡했다고 하는 완적의 심정은 <영회시(詠懷詩)>에서 볼 수 있다. 5언시 82수의 이 연작은 미인을 찾아서 원유하면서도 옛 고향을 생각하는 굴원의 <초사>의 세계와 유사하나, 보다 개인적 감회에의 경향이 강하다. 당나라 초의 진자앙(陳子昻)의 <감우시(感遇詩)> 38편이나, 성당(盛唐)의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59편 등에 계승되는 그의 시풍은, 중국 사인(士人)에게 하나의 자기표현의 형태를 제시했다. 죽림 7현 가운데서도 은자적 성격을 진하게 갖는 점에서 대표적 인물이다.
(223-262) 중국 위 말의 사상가. 자는 숙야(叔夜). 조씨와 같은 초군 사람. 조조의 손녀를 아내로 하여, 중산대부(中散大夫)가 되었다. 13세 연장인 완적과 함께 죽림 7현의 중핵적인 존재였다. 서로 군자지교(君子之交)를 맺었으나, 두 사람은 지조와 세계를 달리했다. "완사종(阮嗣宗)은 사람의 과오를 나무라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이를 본받으려고 하나 미치지 못하노라"란 글은 산도(山濤=죽림 7현의 하나)에 대한 절교서(絶交書)에 나타난 말이다. 또한 은자(隱者)인 손등(孫登)에게 3년 동안 제자의 예를 갖추고서 행방을 감추려고 했으나, 그 성질의 준열(峻烈)함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훈계받았다고 전한다. 사실 반사마(反司馬)의 거병을 한 무구검(毋丘儉)에 가담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탕왕(湯王)·무왕(武王)을 나무라고, 주왕(周公)·공자(孔子)를 업신여긴다"라고 말하여, 탕·무의 방벌(放伐)뿐 아니라, <주례(周禮)>의 덕에 의한 선양(禪讓)도 배척했다. 사마씨의 사예교위(司隸校尉)인 종회(鐘會)로부터 "혜강은 와룡(臥龍)이다"라고 지적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스스로의 입장에 성실하려고 한 '편협성(偏狹性)'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그 편협성은 당시 군자들이 당연하다고 믿던 명교(名敎)의 세계의 허위성을 폭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혜강집>에는 옥중에서 집필한 <유분시(幽憤詩)> 등의 시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의론문(議論文)이다. 완간(阮侃)의 <택무길흉섭생론(宅無吉凶攝生論)>에 대한 박론(駁論)과 다시 그 답에 대한 장문의 반박문은 가장 정미(精微)를 극한 것으로 이 밖에 장막(張邈)의 <자연호학론(自然好學論)>에 대한 박론, 향수(向秀)의 <난양생론(難養生論)>에 대한 반박이 있고, 또한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도 진객(秦客)과 동야주인(東野主人)과의 문답체로 되어 있다. 논박의 대상은 풍화(風化)된 중국 사인(士人)의 속론(俗論)인데, 그러나 혜강 자신의 입장이 도가의 것으로서 확고했던 것은 아니다. 상대의 논거(論據)에 따라, 그 입론(立論)의 무근거함을 폭로한다는 식의 것이다. "혜강은 마음을 스승으로 하여 논한다"라고 <문심조룡(文心雕龍)>은 평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으로 중국의 사군자들 사상의 허점을 폭로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陸機 (261-303) 중국 서진(西晋)시대의 시인. 자는 사형(士衡). 오군(吳郡=장쑤성)의 명가 출신. 조부 손(遜)은 3국 오(吳)의 승상(丞相), 부친 항(抗)은 대사마(大司馬)였다. 일찍이 오나라에서 벼슬했으나, 20세 때에 오가 멸망하자 10년간을 향리에서 은거했다. 태강 말(太康末=289 ?)에 아우 육운(陸雲, 262-303)과 함께 수도 낙양(洛陽)으로 나와 장화(張華=6조 진의 文人)(232-300)에게 재질을 인정받았다. 정치적 야심으로 권력자에게 접근했으나 그것이 화근이 되어, 8왕의 난 때 아우와 함께 처형되었다. 의고(擬古) 및 악부체(樂府體)의 시에 뛰어나 당시 제일이라고 칭해졌다. 그 세련된 수사(修辭)는 육조시(六朝詩)풍의 개척자로 지목된다. 또한 <문부>는 문학에서는 수사·정의(情意)·독창(獨創)을 중시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한 획기적인 문학평론으로서 이름이 높다.
左思 (250 ?-305 ?) 중국 서진(西晋)시대의 시인. 자는 태충(太沖). 임류(臨溜=산둥성) 사람으로, 비교적 신분이 낮은 집안에서 출생했다. 누이가 궁중에 들어간 연줄로 해서 낙양(洛陽)으로 나왔다.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삼도부(三都賦)>를 지어 장화(張華)의 상찬(賞讚)을 받음으로써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됨은 추남이나 입이 무거웠고, 시는 장려(壯麗)하고 풍격이 있으며, <영사(詠史)> <초은(招隱)> 등의 작품은 "반악(潘岳)·육기(陸機)를 능가한다"고 하여 오늘날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陶淵明 (365-427) 중국 동진(東晋) 송대(宋代)의 시인. 자는 원량(元亮). 또는 본명 잠(潛), 자를 연명(淵明)이라고도 한다. 오류(五柳) 선생이라고 불리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심양(?陽=장시성) 사람. 동진 초기의 군벌의 대인물 도간(陶侃)의 증손이라 하는데, 부조(父祖)의 이름은 분명치 않다. 하급 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일찍 사망했다. 젊어서 면학에 전념하여 입신의 포부를 가졌으나 29세경에 비로소 주(州)의 관리로서 관직에 임했다. 그 후 13년간 지방 관계에 있었으나 입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팽택령(彭澤令)을 80일간 근무한 후 향리로 돌아갔다. "내 5두미(斗米)의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향리의 소인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라고 한 말은 현(縣)을 시찰하러 온 군의 관리(郡 아래 縣이 있다)에게 절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현령의 자리를 내동댕이쳤을 때의 명문구이다. 그때 전원으로 돌아갈 심경을 말한 것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그 후에는 심양에서 은일(隱逸)의 선비로 처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0년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좌저작랑(佐著作郞=당시 隱士에게 주어진 관직)을 수여받았다. 그의 시는 현재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20수 정도가 남아 있다. 내용은 전원에서의 은사의 생활을 읊은 것, 자적(自適)의 심경을 토로한 것, 지방관리와의 증답시(贈答詩), 영사(詠史), 의고(擬古) 등이 주가 된다. 한아(閑雅)한 취향 속에도 때로는 격한 감정이 나타나 있으며, 소동파(蘇東坡=蘇軾)는 "그의 시는 소박하나 그 실(實)은 아름답고(綺), 파리하지만(?) 실은 풍부(?) 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연명 시의 특색은 은자로서의 시인을 주장한 점이다. 종영(鐘嶸, ? -518)은 <시품(詩品)>에서, "고금을 통해 은일(隱逸)시인의 종(宗)이다"라고 그를 칭찬했다. 즉 그는 은자의 처세를 훌륭한 감각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은사의 눈으로 본 자연, 은사의 태도로 접한 세상을 시로 읊어서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시풍이 당시로서는 특이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시단의 주류(主流)에는 없고, <시품>에도 중품(中品)에 있는 데 불과하다. 같은 시기의 사영운(謝靈運), 안연지(顔延之=남조 송의 시인, 384-456) 등의 수려한 시풍이 육조시의 본류로 대접받은 것에 비한다면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 영향도 <문선(文選)>을 편찬한 양(梁)의 소명태자 등의 존숭(尊崇)을 받고는 있으나, 호사(好事)의 영역을 넘지 못하여 6조기에는 볼 수 없다. 당(唐)대에 들어서,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689-740), 위응물(韋應物, 737- ?), 유종원(柳宗元) 등의 자연파 시인의 추앙을 받게 됨으로써 크게 위치를 높였고, 송나라 소동파의 상찬에 이르러서는, 6조 제일뿐 아니라 고금 독보(獨步)의 시인이란 명성을 확립시켰다. 은일·전원시인으로서의 평가 이외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의 선비, 권력자에 저항하는 경골(硬骨)한 인간으로서의 평가도 예로부터 뿌리깊은 것이었다. 또한 리얼리즘의 입장에서의 평가도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아직 재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연명의 작품은 시 이외에 부(<閑情賦> 등), 산문(<自祭文> <아들 儼 등에게 주는 疏> 등), 잡전(雜傳)(<五柳先生傳> <五孝傳> <四八目> 등)이 있다.
(405) 산문시. 도연명 작. 도연명이 41세 때의 가을, 팽택(彭澤=장시성 심양 부근)의 현령을 그만두고 향리(심양)로 돌아갔을 때의 작품. 13년간에 걸친 관리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드디어 향리로 돌아가서 이제부터 은자로서의 생활로 들어간다는 선언(宣言)의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관리생활은 마음이 형(形=육체)의 역(役=노예)으로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전원에 마음을 돌리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생활 속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기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바로 거칠어지려는데 아니 돌아갈소냐.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의 명구에서 시작되어, 전체적으로 영탄적 어조가 강하나, 그려진 자연은 선명하고 청아한 풍이 넘쳐 있다. 짧으면서도 구성·표현이 정연한 걸작이며 연명의 대표작으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謝靈運 (385-433) 중국 유송(劉宋)의 시인. 통칭 강락(康樂). 본적은 진군(陳郡=허난성)이나, 진(晋)의 남도(南都) 후는 회계(會稽=저장성)로 본거를 옮긴 명문 출신이다. 조부 현(玄)은 회비의 싸움(383)에서 대공을 세워 강락공(康樂公)에 책봉되었다. 부친 환은 일찍 죽었고, 젊어서 조부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사강락(謝康樂)이라고 칭해졌다. 명문 출신이었으므로 정치에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진이 멸망하고 송이 서자 작위(爵位)를 강등당한 후 중요한 관직에도 있지 못해서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불만의 배설구로서, 회계와 영가(永嘉=저장성)의 아름다운 산수에 마음을 두어 훌륭한 시를 남겼다. 결국 최후에는 모반(謀反)의 죄를 쓰고 처형되었다. 그의 시는 종래의 노장류(老莊流)의 현언시(玄言詩)의 풍을 배제하고, 새로이 산수시의 길을 개척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동시대의 도연명의 자연시에 비해서, 인위적인 수사(修辭)의 아름다움에 기울어졌다는 결점이 있으나 당시 사영운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정통적이었으며, <문선>에 40수가 수록되어 있다.
(4세기 중엽) 간보(干寶)의 저서. 중국 육조시대의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지괴란 '괴를 적는다'는 뜻. 육조시대에는 초자연적인 설화나 일화를 기록한 지괴서가 많이 나타났다. 동진(東晋) 조정의 관리가 되어 국사편찬의 일을 맡았던 간보의 이 저서는 내용이 다채롭다는 점과 문장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지괴서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원전은 명(明)대에 출판된 20권본과 8권본이 있는데 전자가 비교적 원저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고 추정된다. 20권본에는 46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방사(方士=도사)·점술·민간신앙·전조(前兆) 등에 관한 이야기, 효자·열녀·정부(貞婦)의 이야기, 인간과 동물과의 교섭, 재생(再生)·유귀(幽鬼)의 이야기 등을 볼 수 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육조의 지괴는, 당나라 전기(傳奇)를 비롯하여 후세의 소설·희곡의 소재를 제공하여, 중국 특유의 괴이소설(怪異小說)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
(5세기 중엽) 유의경(劉義慶, 403-444)의 저서. 중국 육조시대의 일화집(逸話集). 3권. 저자는 육조 송 무제(宋武帝)의 조카로서 임천왕(臨川王)에 책봉되었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 유행되고 있던 인물비평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여 후한 말부터 동진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일화를 모아서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의 특징과 인물의 성격에 따라서 덕행, 언어, 문학, 방정(方正), 호상(豪爽), 임탄(任誕), 검색(儉嗇) 등의 이름을 붙여 36편으로 분류되어 있다. 양나라 유효표(劉孝標)가 주를 달아서, <세화(世話)> <세설신서>의 이름으로 읽히나 송나라 이후의 재편에서는 현재의 명칭을 쓰고 있다. 같은 종류의 다른 책과 비교해서 간결한 표현으로, 인물이나 사건을 선명하게 전하는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동시에 청담유행(淸談流行)의 실태 등 동란기(動亂期)에 사는 지식인의 모습을 아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530 ?) 시(詩) 문선집. 양나라 소명태자 소통(蕭統) 편찬. 3권. 위로는 주(周)대 춘추 말부터 아래로는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내용은 부(賦)·시·소(騷) 등의 운문과 소(詔)·책(策)·표(表)·서(序)·논(論)·제문(祭文) 등의 산문이며 수록된 작자는 거의 130명, 760편으로 되어 있다. 그 선택의 기준은 "깊은 생각에서 나오고 미려(美麗)한 표현에 의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부를 첫째로 시를 둘째로 하였고, 이 양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위진(魏晋) 이래의 문학관의 정통에 입각한 선집으로서, 시문의 종합적 선집의 최초의 것이며, 후세에 끼친 영향은 커서 "문선난수재반(文選爛秀才半)"(문선에 익숙하는 일은 서생에게 불가결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550 ?) 시선집. 진(陳)나라 서능(徐陵) 편으로 10권. 이 책은 처음 양(梁)의 간문제가 태자 때에 당시 유행하고 있던 염시(艶詩=궁체라고 함)를 수집(蒐集)하고, 만년에는 양 이전 한위(漢魏) 이후의 작품까지 넓혀서 편찬했다고 한다. '옥대(玉臺)'란 말이 미인의 집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수록된 시의 내용은 남녀의 애정(愛情)에 관한 것뿐이며 시풍도 염려(艶麗)하다. <문선>이 각 문학의 정수를 뽑아 전아(典雅)한 것을 모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권1에서 권6까지는 한(漢)에서 위(魏)까지의 5언시, 권7은 양의 황족, 권8은 양의 여러 시인의 5언시, 권9는 잡언체(雜言體), 권10은 5언4구(후의 절구체)로 되어 있다.
시집. 송나라 곽무청 편. 100권으로 되어 있다. 태고부터 5대에 이르기까지의 악부시를 모두 수록한 것. 교묘가사(郊廟歌辭=제사 때 부르는 노래)·연사가사(燕射歌辭=연회 때 부르는 노래)와 같이 노래하는 경우에 따른 분류 외에 고취곡(鼓吹曲=피리와 징을 사용)·횡취곡(橫吹曲=피리)처럼 사용하는 악기에 따른 분류 등 여러 가지 분류법에 의해서 12류로 나누어져 있다. 모두 고사(古辭)를 앞에, 모방작을 뒤로 연대순으로 배열하였고, 처음에 해제(解題)를 실었다. 해제는 널리 사료(史料)를 인용하고, 가사의 채록(採錄)도 망라해서 유래 연구 및 악부 연구에 필수의 것이 되고 있다.
(5세기) 서사시. 작자 미상. 북위(北魏)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목란이란 딸이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장을 하고 종군 12년 동안 싸워서 공을 세웠으나 아무도 여자인 줄 몰랐으며 귀가하여 여자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줄거리이다. 후에 소설 <목란종군(木蘭從軍)>(<隋唐演義>에 수록)이 되었고, 또한 희곡으로도 되었다.
중국 육조시대의 문학 평론. 양 나라의 유협의 저서. 모두 50편 10권으로 되어 있고, 최후의 서지편(序志篇)은 전체의 자서(自序)에 해당한다. 전반 25편, 후반 24편으로 나뉜다. 46 변려체(騈儷體)에 의해 씌어졌고, 각 편의 끝에 붙은 4언 4구의 찬(讚)은, 말하자면 게(偈=4구)에 해당한다. 유협은 승우(僧佑)의 문하에서 배우고, <멸혹론(滅惑論)>을 쓰고, 만년 출가하여 혜지(慧地)라고 칭했다. 따라서 24편과 25편은 불교의 계품(界品)과 문론(門論)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易)>에 표현되어 있는 "대연(大衍)의 수는 50, 그 용(用)은 49"라는 생각에도 대응하는 것이다. '문심'이란 말은 글을 지음에 있어서 마음의 작용을 뜻하며, '조룡'이란 말은 표현의 조탁(彫琢)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文)이란 유교의 성인의 서(書)인 6경 이하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도(道)와 문을 종합적으로 절충시키려는 태도는 <문선>을 편찬케 한 소명태자의 애고(愛顧)를 받은 유협의 입장을 말해 주고 있다. "문장은 방탕해야 한다"고 한 간문제(簡文帝)의 <옥대신영>과는 판이한 것이다.
(518 ?) 문학평론. 양나라의 종영(鐘嶸)의 저서이다. 한(漢)에서 양에 이르기까지 5언시의 작가 122명을 상·중·하 3품으로 나누어 품평한 것으로 평론으로서는 최초의 저작이다. 각 품(品)에 총평, 각 시인에 단평을 붙였는데, 평어(評語)는 깊이가 있고 날카롭다. <시경> 국풍(國風), <고시십구수>의 흐름을 중시하여 조식(曹植)을 가장 높이 평한다. 그 품등(品等)은 대부분 타당하나, 도연명을 중품(中品)에 둔 것은 후세의 비난을 받았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