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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槪說〕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며 신라틴어, 즉 로망스어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변천하여 그당시 이탈리아 각 지방의 방언이 수세기의 부화기를 거친 뒤에 문학어로서의 이탈리아어로 발전해 나왔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기까지 피렌체의 경제적, 정치적 생활을 지배하게 된 칼리말라(arte di calimala ; 조합)의 영향으로 인문주의의 요람기가 싹트기 시작하여 교회와 봉건영주의 정권을 벗어난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 등 자유 도시국가들은 실천적 학문인 법률과 의학에 흥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등에도 관심을 가져 고유한 문학을 찾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국민문학의 형성에 있어 전통적인 라틴 문학은 물론이요, 프랑스 문학의 영향도 크게 입었다. 남부 이탈리아 반도와 여러 섬의 방언이 혼연일치 되어 시칠리아어를 이루어 이탈리아어로서의 최초의 시어(詩語)를 구성했다. 즉 13세기 전반 프랑스 남쪽의 서정시가 시칠리아 섬에 있는 페데리코 2세의 궁전에 전파되어 이탈리아 문학어로 된 연애시가 각 지방으로 유행되어갔다. 1250년 페데리코 2세가 사망하자 그당시 상공업의 융성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민주적 자유도시를 이루고 있던 토스카나 지방에 문화가 재흥되어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이 문학어는 점차적으로 북상하여 토스카나 지방인 볼로냐로 옮겨갔다. 그당시 토스카나 방언은 라틴어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 유지하고 있었기에 시칠리아의 연애시가 이 지방에 번지자 시칠리아어 내부의 라틴어적 요소, 즉 토스카나어에 가장 가까운 요소가 확장 강화되고 다른 요소를 제거하여 그 후부터는 토스카나어가 문학어로서 계승되게 되었다. 그 당시 볼로냐에는 유럽 학문의 중심의 하나인 대학이 있었고 이 도시에서 구이도 구이니첼리(1235-1276)가 청신체(淸新體)로 시칠리아어의 서정시보다 훨씬 순수하고 숭고한 시를 쓰기 시작하여 단테(1265-1321)에 이르러 그 청신체를 모방하여 서정시집 <신생(新生)>을 출현시켰고, 그의 걸작 <신곡(新曲)>을 완성하여 신곡에 의해 단테는 문학 예술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면에까지 널리 인류 문화 전반에 걸쳐 하나의 계시를 던져 주었고, 토스카나어의 문학어로서의 지위를 부동하게 만들었다. 14세기에는 단테의 뒤를 이은 거장 페트라르카(1304-1374)와 보카치오(1313-1375)의 등장으로 위대한 창조력이 발휘된 시기였다. 페트라르카는 라틴 산문과 시를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이탈리아어로 <서정시집(Canzoniere)>을 썼다. 또한 각 지방을 여행하면서 고전서를 수집하며 그 가치를 재발견하여 15세기에 배출하는 인문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보카치오는 설화문학을 통해서 이탈리아어의 지위를 굳건히 했고 그의 걸작품인 <데카메론>은 시민의 승리를 높이 찬양하는 소리이며 건전한 현세향락의 문학이었다. 또한 13, 14세기경에 이탈리아 각 지방에 일어났던 인문주의 운동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연구를 북돋았고 그리스어, 라틴어가 존중시되어 여태까지 쌓아올렸던 이탈리아 문학어는 저급한 소설, 연가, 통속문에만 사용되어 경멸시되는 경향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15세기에는 참된 의미의 이탈리아어 문학은 지지부진하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16세기에 와서 폴리치아노, 로렌초(Lorenzo, Magnifico), 보이아르도(Boiardo), 그리고 산나차로(Sannazzaro)의 노력으로, 특히 1520년에 간행된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 1470-1547)의 속어 <산문(Prose della vplgar lingna)> 3권은 이탈리아어 연혁사에 매우 중요했고 크루스카 학회(Accademia della Crusca)가 1612년에 간행한 사전을 중심으로 활발한 이탈리아어를 더욱 발전시켜 이탈리아 문학을 라틴 문학의 지위에까지 끌어올리려고 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여 마키아벨리(1469-1527)는 <군주론>으로 등장했고 아리오스토(1474-1533)는 보이아르도보다 더욱 예술의 조화를 보여준 <광란의 오를란도>를 저술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문학은 아리오스토의 사망 후 쇠퇴해 갔다. 즉 르네상스가 스스로 무너져 교회가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게 되어 창작활동을 억압하게 되었다. 17세기는 모든 정신적 활동면에서나 사회의 실생활면에서 침체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국민은 외국(에스파냐)의 압제에 허덕이며 교회의 완고한 탄압에 억눌렸다.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바로크기(期)라 불리운 시대로서 문학에 있어서는 바르고 참된 감정이 결여된 비유와 허실이 남용된 시대였다. 마리니스모(Marinismo)는 문학 분야에 있어서 바로크적 자세로서 그 명칭은 1623년 파리에서 <아도네(Adone)>를 저술했던 마리노(1569-1625)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해방(Gerusa-emme liberata)>을 저술한 타소(Torquato Tasso, 1544-1595)가 있어 그의 서사시는 바로크적 문학 경향 가운데서도 이탈리아와 유럽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전반에 와서는 아르카디아(Arcadia)학회의 정신운동이 반바로크적인 운동으로 야기되어 ‘마리니스모’에 대한 증오심이 치솟아 문학재건을 목표로 하여 시에 대한 형식상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 시기의 시인 메타스타시오(1698-1782)는 새로운 감각이 풍긴 시를 작시하여 빈에서는 궁전시인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은 계몽주의 문학시대로서 이성의 계몽을 통하여 인간생활의 진보, 개선을 목적으로 진리탐구를 위해 각지에 학술단체가 생겨났는데 중심지는 밀라노와 나폴리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많은 해외작품도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시안의 노래(Ossian)> 낭만주의 문학(Il Romanticismo)시대의 시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옹의 실각 이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국가 통일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여 문학면에서도 낭만주의가 19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맨 처음 밀라노에 있는 <콘칠리아토레(Il Conciliatore)>신문지상에 1년 이상이나 활기를 띠며 전개되었다. 그 예술적인 최대의 수확은 알렉산드로 만초니(1785-1873)의 역사소설 <약혼자>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탈리아의 독립이 성취되자 낭만주의의 이상은 그 빛을 잃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국가통일로 해서 아무런 변혁도 입지 아니 했다. 시칠리아인 베르가(1840-1922)는 이러한 상황에서 원시적 본능에만 의존해서 사는 인간을 독특한 문체로 묘사하기도 했다. 소설분야에서 베르가를 대표자로 하는 레알리스모(Realismo)문학은 베리스모(Verismo), 즉 사실주의(寫實主義)라 명명되었다. 이러한 자연주의, 진실주의 이론에 대항한 것이 유럽에서는 19세기 말엽에 신비주의자가 배출한 데카당 문학이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단눈치오(1863-1938)가 그 대표자였다. 20세기 초가 되면서 이탈리아 문학은 미래파운동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가 쓴 <미래파 선언>(1909)은 기계문명의 속도와 역동성, 격렬함 등을 은유적인 언어로 찬미하였고, 피란델로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와 현실의 부조리를 주제로 소설과 희곡을 썼으며 스베보(Italo Svevo) 역시 이런한 주제들을 소설에 사용했다. 철학적 비관주의와 더불어 20세기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시인인 몬탈레, 콰시모도, 웅가레티의 시에도 나타나고 있다. 즉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계기로 해서 이탈리아 문학은 새로운 세기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에 발표된 문학 개량운동 프로그램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기고했던 <론다(Ronda)>지(誌)를 통해서 반단눈치오적 논쟁을 전개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모든 문학운동에 참여했던 상징주의의 창시자 웅가레티는 이탈리아 현대시의 혁신을 단행했고, 1959년 노벨문학상의 수상자 콰시모도(Salvatore Quasimodo) 역시 이러한 상징주의파에 속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해서 이탈리아가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을 무렵, 영국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새로운 설화문학과 서사시적 형식이 대두되기 시작하여 신사실주의(Neorealismo)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에는 모라비아(1907-1990), 토비노(1910- ), 카솔라(1917-1987) 등이 있다. 이후에 많은 이탈리아 작가들이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러한 실험 작가군에는 소설가 가다(Emilio Gadda), 시인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등이 있다. 20세 후반의 주요 작가로는 소설가 칼비노(Italo Cavino), 극작가 포(Dario Fo)를 들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철학과 문학을 장려하는 입장에서 로마 대학에 철학연구소(Istituto di studi filosotici)가 창설되어 그 기관지로서 <철학학보>가 발간되고 있다. <許 寅>
-世紀文學 13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고 있었다. 봉건제도가 존속하며 도시국가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경제적 발전은 활발하였고 종교활동도 열렬하였다. 문화활동의 전반에 걸쳐 리틴어의 교훈이 현존하며 알프스 너머의 프랑스 문학은 ‘황금의 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성 프란체스코의 <성가(聖歌)>는 중부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민의 종교적 분위기로부터 생겨났다고는 하나 라틴어 성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서정시는 시칠리아 왕(王) 페데리코 2세를 중심으로 하는 시인들에 의해 이탈리아어로 불리었다. 바로 ‘시칠리아파(派)’의 탄생이었다. 13세기 문화의 파노라마는 광대하고 잡다한 바가 있다. 북이탈리아에서는 종교시가 불리었다. 한편 연애시, 시민적 테마의 시가 ‘시칠리아파’의 시형태를 본뜨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가미하여 중부 이탈리아에서 기토네(1225-94)에 의하여 불리었다. 연대기·성자전(聖者傳)·설화가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로 각지에서 쓰여졌으나 지방적인 차이가 있고 작품의 수준에도 차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피렌체나 토스카나 지방이 사회적·문화적으로 가장 활발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문화의 기초가 준비되어 14세기에 개화를 보았다. 14세기에 있어서 토스카나 지방이 문화적으로 지도적 지위에 서게 된 것은 뛰어난 문학자의 배출에 의한 것으로서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작품으로 구체화되었다. 단테의 <신생(新生)> <리이메> <속어론(俗語論)> 등은 ‘시칠리아파’의 서정시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가지 대립을 극복하여 기드 구이니첼리, 기드 카발칸티와 같은 청신된 이탈리아어 서정시의 전통의 성과였으며, 페트라르카의 <서정시집>에 있어서 최고의 성과에 도달하는 준비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단테의 세계는 서정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단테를 통하여 단테 이전의 모든 문화적 실험이 집약되어 있다. 14세기의 활발한 사회에 있어서 <신곡>은 경이적인 보급을 보이며 주석(註釋)되고 예찬되었다. 주석자 가운데 보카치오가 있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피렌체 부르주아지의 서사시로서 이 작품 속에서 이탈리아어가 성숙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보카치오의 단테에 대한 존경이 그의 일생에 걸쳐 지속된 것이라고 한다면 인문주의라는 이름 아래 또는 고전에 대한 공통의 애정에 있어서 보카치오는 페트라르카와 상통한다. 페트라르카는 인문주의 운동에 그 기초와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고대작가들이 갖고 있던 지식과 미에 대한 애정, 청명한 조화를 배워 터득하려 하였던 것이다.
-派 프로방스어와 남이탈리아어가 크게 달라서 프로방스어가 이해를 얻지 못하였지만 페데리코 2세의 궁정에서는 프로방스 서정시가 환영을 받아 이를 모방하는 사람이 있었다. 페데리코 2세, 황태자 엔초, 피에르 텔라비냐, 지아코모 다 렌티니, 지아코미노 프레체, 리나르도 다쿠이노이 등이 이탈리아어로 연애시를 읊어 이탈리아 국민문학의 성립에 이르는 제일보를 기록했다. 시의 주제는 주로 프로방스 시인들이 부르던 것으로 여성의 미, 사랑의 기쁨과 고뇌, 봉건기사도의 부인 예찬 등과 같은 것이었다.
淸身體派 단테와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은 성 프란체스코의 종교시가 아니고 볼로냐나 피렌체에서 시작된 시개량운동이었다. 당시 학원도시(學園都市)였던 볼로냐에서 구이니첼리가 ‘청신체파’를 창시하였다. ‘시칠리아파’의 시인들에게 사랑은 발랄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고 천박한 모방적 정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나 ‘청신체파’에게 있어서 사랑의 개념은 일신되고 정신화(精神化)되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이미 그 애인에게 기사도의 미풍(美風)을 고취케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부정(不淨)으로부터 애인의 마음을 정(淨)케 하여 가장 숭고한 것, 즉 진과 선과 신(神)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파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단테, 구이니첼리, 카발칸티 등과 치노 다 피스토이아, 디노 프레스코바르디, 라포 쟌니 등이다.
Dante Alighieri (1265-1321) 이탈리아 시인·사상가·정치가.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 중세기 정신의 총합, 문예부흥의 선구, 또는 예언자라고 불리던 그의 경력에 관한 객관적 자료는 너무나도 적다. 가령 공문서에 남아 있는 것에 의하면 그는 30세가 되어서야 시인·학자 등 소위 지식층 회원이 가입된 직업조합(약제사 및 의사)에 등록(1295)하였다는 기록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 공적 생활에 들어가고 더 나아가 정부 최고기관인 통령(統領=Priori)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공교롭게 네리 당(黨)의 음모에 의하여 또 법왕과 샤르 왕(王)의 야심에 의해 피렌체 정부는 전복된다. 네리 정부에 의해 단테는 여러 가지 죄명으로 영구 추방을 당한다(1302). 공인으로서의 단테는 내정과 외교에 관하여 성실 근면하게 봉사하였음은 종종 시행된 투표나 발언 또는 사절들의 입을 통하여 뚜렷이 나타나지만 그의 모처럼의 노력도 헛되이 당쟁과 동란의 희생이 되었다. 그의 죄는 적정부(敵政府)의 날조에 의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이후의 활동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동향, 동시대의 사가(史家)인 빌라니는 그의 <피렌체 사기(史記)>의 1항(項)을 특히 그를 위해 할애하여, “1321년 7월 피렌체 시민 단테 알리기에리는 베네치아 사절의 임무를 다하고 라벤나에 돌아오자 서거…향년 56세”라고 시작하여 “그의 높은 덕망·박식은 위대한 시민으로서의 기억을 영구히 전한다”라고 끝맺고 있다. 이와 같이 보면 단테의 탄생은 1265년이 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빌라니의 말에 의하면 단테는 그가 살던 시(市)의 영주 포렌타가(家)의 극진한 보호와 존경을 받아 오랜 유랑생활에서 헤어나 얼마 동안 여생을 누리다 사망하였다. 그리고 사회장의 예우를 받고 매장되어 지금도 시민의 변함없는 경모 속에 잠들고 있다. 그의 필생의 걸작 <신곡>은 그가 작고하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 한다. 단테의 일생은 13세기 후반으로부터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으로 유럽의 신시대 태동기에 해당된다. 십자군의 종막, 성 프란체스코가 종교와 인간에 관해 끼친 순수하고 새로운 기풍, 성 아퀴나스를 통해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과 철학의 신체계, 남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 시작된 근대 유럽 서정시의 서광(曙光), 프랑스에 있어서의 문예부흥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단테는 “아름다운 아르노강(江)에 연한 거룩한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자율과 근면과 번영을 자랑한 피렌체도 당파싸움이라는 고질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포학한 혼란에 빠진다. 단테는 일체의 가재와 가족을 잃고 생명만 건져 피신하였다. 항거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추방자의 비참한 생활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준엄한 윤리에 의해 세상의 비리(非理)를 꾸짖던 불세출의 천재로 하여금 ‘의지할 곳 없는 일엽편주’와 같이 ‘걸인이나 진배없는 모습’으로 세인의 조소감이 되게 하기 20년, 그러나 그는 불후의 문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다. <속어론(俗語論)>은 국어의 중요성과 본질과 표준을 제시한 최초의 서적(2권, 미완성, 라틴어). <제정론(帝政論)>은 종교와 정치의 근본 정의를 교시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의 대도(大道)를 제창한다(3권, 라틴어). <향연(饗宴)>은 14편의 자작 애창시를 주제로 하여 궁극의 진리를 구하면서 철학적 사변(思辨)을 전개한다(4편, 미완성, 이탈리아어). <단테 서간집>(13종, 그중 10종은 진본, 라틴어)은 그의 추방 기간 중 행동이나 사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재료이다.
Divina commedia (1307?-1320) 단테 작 시편. 제명은 원래 없었으나 후세의 사람들이 감탄을 억제하지 못한 나머지 붙인 호칭이라 한다. 즉 황량한 것으로 시작되어 환희로 끝맺는 절묘 신성의 시라는 뜻이다. 집필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테의 청년기에 있어서의 젊고 청순한 동경을 나타낸 시인 <신생>의 권말에 서술된 불가사의한 환영(幻影)이 <신곡> 창작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신곡>은 1300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나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1307년경부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완성되어 있었다. <신곡>은 가지가지의 경험과 부단한 연구와 관찰, 투철한 사색과 격렬한 감정, 보다더 준엄한 도의심과 부동의 신앙, 강인하기 그지없는 의지의 사람이 품은 원숙한 인생관과 예술관을 탁월한 시재(詩才)로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자아상(自我像)을 완성한 작품이다. 특히 <신곡>은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구성과 무대와 인물과 사건을 선택하여 그 효과를 높였다. 우주와 인생에 대응하려는 듯이, 시는 <지옥편>,<연옥편(煉獄篇)>,<천당편>의 3부곡(曲)으로 나뉘어져 각 부33장(章=Canto), 총서 1장, 1만 4233행으로 되어 있다. 용어는 극히 정선되어 각행 11음절의 삼운구법(三韻句法)을 교묘히 구사하고 있다. 지옥계는 예루살렘의 지하로부터 지심(地心)에 이르는 대동굴이 아홉 둘레(環)로 나뉘어져 큰강, 삼림, 황원(荒原), 단애, 성곽, 폐허, 다시 여러 갱(坑)과 구덩이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색욕, 탐식, 탐욕, 방종, 수욕(獸慾), 계간, 고리대금, 성직매매, 거짓 예언자, 독직, 위선, 절도, 불성실한 진언, 분쟁의 원흉, 사기, 위조, 친족·국가·결사·친구·군왕·은인 등에 대한 배반자들이 각자에 맞는 가책을 되풀이해서 받게 된다. 음산한 광경으로 묘사되어 있고 인물과 자연에 대한 묘사는 극히 웅장하고 교묘한 바가 있다. 연옥계(煉獄界)는 남반구 대양(大洋)의 고도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암석 봉우리로서 7개 봉우리로 나뉘어 있다. 각 봉우리에는 죄를 씻고 깨끗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오만, 질투, 나태, 탐욕, 애욕을 정화하며 정진하여 자유롭고 티없는 깨끗함을 얻으려 한다. 한편, 모범을 깨우쳐주는 조각과 찬가가 그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밝은 정경으로 묘사되고 있다. 천당계(天堂界)는 월천(月天), 수성천, 금성천, 태양천, 화성천, 목성천, 토성천 등의 칠성천(七星天), 정명천(晶明天), 원동천(原動天)으로 되어 있다. 천당계의 끝은 대광명천으로 신의 좌위(座位) 축복의 비밀을 간직하며 7천에는 성니행(聖尼行), 순애(純愛), 영명(令名), 성애(聖愛), 신려, 용기, 정의 등으로 구분된 거룩한 사람들의 환희와 예찬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단테는 이 3계를 친히 돌면서 관찰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묘경을 터득하는 달관의 경지로 들어간다.
Giovanni Boccaccio (1313-1375) 이탈리아 소설가·시인. 그의 아버지는 상인으로서 환전상을 경영하였으며 그는 사생아로 체르타르도라는 고장에서 출생하였다. 피렌체에서 아버지의 업을 익히는 한편 초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14세 때에 장사를 배우기 위해 나폴리로 보내졌는데 보카치오는 “그 6년간은 시간낭비 외에 얻은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 6년간을 법학연구에 보냈으나 별로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에 대해서는 깊은 감격과 의욕을 가져 열심히 독학을 하였다. 당시 문예부흥 운동이 한창이던 나폴리에서 그는 유쾌한 사교 모임에도 참여하고 친구도 사귀며 인문학자에 의해 고전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 여성에 대한 열렬한 연애경험은 그의 청년기 문학창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럴즈음 아버지의 파산과 죽음을 맞아 백방으로 직업을 구하다 피렌체시(市) 정부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의 학식과 재능, 능변으로 법왕이나 그 밖의 여러 영주(領主)에게 사절로 파견되는 행운이 있었다. 이즈음 그에게 있어서 가장 뜻있고 줄거운 사건은 청년시대로부터 만나고자 소원했던 페트라르카를 만나게 된 일이었다(1350년). 그의 만족과 기쁨은 비길 데가 없었으며 친교는 더욱더 두터워져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1362년 점쟁이가 말한 죽음의 예언을 믿은 그는 운둔생활로 들어가 모처럼의 고전연구를 그만두려 하였으나 페트라르카의 권유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노령과 빈곤, 질병에 시달린 나머지 나폴리에도 피렌체에도 흥미를 잃어 고국에 돌아가 숨어 살며 고전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페트라르카의 죽음(1374)에 크게 충격을 받아 전년에 피렌체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맡았던 <신곡>의 강의도 중단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거하여 산야코포에 묻혔다. 그 후 그곳에 기념상(記念像)이 건립되었다. 그의 작품은 많으나 그 중 여러 가지의 시형(詩型)을 갖는 서정시는 사랑을 주제로 하며 단테나 페트라르카의 영향을 받은 바가 현저하다. 다음으로는 그 시절에 널리 유행되었던 로맨스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 작품의 대부분은 연애의 여러 가지 중세 모습을 서술했지만, 소재로는 고전 속의 신화 전설이나문학에서 취하였다. 그러나 그 중 핵은 자신의 경험과 감상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필로콜로> Filocolo (1336) 로마 전설에서 취재한 나폴리 시대 최초의 작품으로 프로리오와 비안코피오레의 사랑을 주제로 한 모험 이야기이다. 문체는 산문형식으로 되어 있다.<필로스트라토> Filostrato (1338) 트로이의 왕자와 적측의 그리스 처녀 그리세이다 사이의 비련을 그린 연애시로 9장으로 엮어져 있다.<테세이데> Teseide (테세오의 노래) 그리스 전설에서 소재를 얻어 쓴 12장의 장시. 아존 여왕의 동생 에밀리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알치테, 파레모네 두 청년간의 사랑싸움을 묘사하고 있다.<난팔레 다메토> (아메토 요정의 희곡) (1342) 한 목동의 요정(妖精)에 대한 순정을 그린 이야기로 시와 산문을 한데 엮어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아모로자 비디오네> (사랑의 환영) 비유와 교훈을 담은 장시 50장. <닌팔레 다메토>와 같은 취향의 것이다. 환영에 이끌려 넓은 광장에 이르고 거기서 학문·영광·부유·연애로 고명한 고금의 사람들과 이와는 반대로 운명의 희생이 된 사람들의 명화상을 보고 깨닫고, 좁은 문으로 찾아들어 선덕(善德)을 구하며 낙원에 이르러 피암메타를 만나 무한의 축복을 얻는다는 내용이다.<피암메타> (1343) 깊이 사랑하는 남자 판피로에게 배신당하여 괴로운 나머지 죽음까지도 택하려 한다. 심리해부의 명작으로 산문 50장으로 이루어진다.<닌팔레 페조라노> (페조레의 요정) (1338?) 젊은 목동과 요정의 깊은 사랑이 신의 계율로 막혀 이뤄지지 못하자 둘은 아르노강에 투신해 죽는다는 비련의 목가로서 신화에서 취재한 것이다.
Decameron (1348-1353) 보카치오 소설 이 제명은 그리스어의 10일이란 뜻으로 ‘열흘간의 이야기’라는 뜻. 보카치오의 걸작. 제1일의 유명한 서문에서 작품의 창작동기를 비치고 있다. 1348년 미증유의 전염병 만연으로 피렌체의 인구가 전멸상태에 처해 말세적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화했다. 우연히 용모가 수려한 세 사람의 청년과 일곱 처녀가 산타 마리아 노베라 성당에서 만나 이 재난을 피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교외의 페조레 언덕 위에 있는 별장에서 당분간 머무르기로 하여 유쾌하고 규율있는 즐거운 지상낙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14일 중 10일간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춤으로 보내기 위해 한 사람의 여왕(사회자)의 지도 아래 행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매일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이야기를 하여 모두 10가지로 10일간에 총 100가지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 내용은 모두 단편으로 장단의 차는 있으나 모든 이야기가 긴밀하게 줄줄이 연결되어 있고 설화와 설화 사이에 노래와 무용의 정경을 교묘히 엮어 넣어 단조로움을 없애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토박이 피렌체 시민의 때묻지 않은 말―문학적으로 세련되어 있는―을 쓰고 있어 마치 머리 속에 잘 간직한 명화라고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왕후, 기사, 법관, 시장을 비롯하여 의사, 공증인, 상인, 직공, 예능인, 광대, 요리사, 승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있다. 승려도 오늘날과는 달리 고승(高僧), 역승(役僧), 파계승, 탁발승 등이 등장하여 흥미롭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성도 질세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등장한다. 이들 남녀는 천성과 처지에 따라 선인, 성승(聖僧), 탐욕과 교지와 무지의 매승(賣僧), 악한, 우자(遇者), 성공자와 실패자, 비장형(悲壯型)의 인물과 익살꾼이 각각 상이한 성격으로 그려져 있다. 여인상으로서는 정절의 열부, 비련에 우는 여인, 음부, 무지와 교활에 젖은 여인 등 천태만상인, 참으로 인생의 축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풍부한 소재는 고금의 전설·고전, 중세의 문학 및 이탈리아·프랑스 라틴계의 문학, 그리고 작자 자신의 경험이 토대가 되어 창작적 도가니 속에서 용해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갱생을 보았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심각한 비극보다는 희극이 그의 장기(長技)였던 듯하다.
Francesco Petrarca (1304-1374) 이탈리아 시인·인문주의자. 아레초에서 출생하여 법왕천이 아비뇽에 옮겨짐에 부친을 따라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 그곳에서 중세의 삼학(三學)을 이수하고 또한 몽펠리에와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327년 봄 아비뇽의 성 크레르 교회에서 최초로 라우라를 만났다. 그의 서정시는 주로 그녀의 미를 찬미하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였다. 법왕을 비롯하여 상류층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그들의 외교사절로 활약한 바도 있으나 보크류즈에 은거하면서 라틴어 저술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를 찬미하는 장시 <아프리카>로 1341년 봄, 로마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학식과 애국심을 짐작하기에는 족하였으나 시적 가치는 낮은 것이었다. 1343년 콜라 디 리엔초(이탈리아 정치가. 1313-1354)를 알게 되어 그의 로마 공화정 부흥이라는 대망에 공명하였으나 1350년 콜라는 실각되고 라우라의 부음을 접했다. 1350년 피렌체에서 보카치오를 만나 평생토록 친교를 맺었다. 만년에는 파도바 근교의 아르카에서 살았다. 1374년 7월 14일 애독하던 베르길리우스의 시집을 베개삼아 떠났다. 그는 단테에 이어 출현한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으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4행시는 13세기 시칠리아파(派)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나, 그가 이 형식으로 쓴 300여 장의 운조(韻調)나 시상이 모두 아름다웠으므로 그가 사용한 이 형식은 유럽 제국에 있어서 표준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어 작품을 중시하지 않았으므로 <서정시집>과 연애, 명성, 정절, 죽음, 시간 등이 각기 소멸하고 영원한 것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는다는 구상의 장시 <개선(凱旋)>이란 작품이 있을 뿐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금욕생활을 찬양한 <고독한 생활에 관하여> <종교자의 무위에 관하여>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빌어 마음의 괴로움을 풀려고 한 <나의 비밀> 등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세속적 쾌락이나 명성을 구하는 한편 종교적 고독에 묻혀,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로 번민한 근대인이었다. 또 그에 의하여 발견된 고전들의 고본(稿本)도 많으며 등산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산에 오른 유럽 최초의 등산가이기도 하다.
Canzoniere (1342?-1348) 페트라르카의 시집. 1342년경 착수하여 1348년에 일단 완성, 그 후에도 얼마나 퇴고를 계속 하였는가 하는 것은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는 원고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2부로 나뉘어 제1부는 라우라의 생전에 쓴 시로 소네트 225편, 칸초네 21편 등 합계 246편이며 제2부는 그녀 사후의 시로 소네트 90편, 칸초네 8편 등 합계 100편으로 되어 있다. 라우라는 베아트리체와 달리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으되 사후는 ‘손바닥만한 땅에 묻히는’ ‘한 줌의 흙’이 된 여성으로, 시인에게는 그녀의 눈이나 가슴, 금발의 아름다움은 기쁨이자 괴로움으로, 그 심정의 기복을 자연의 묘사, 고전의 인용, 용어의 멋진 표현을 통하여 완벽한 시형으로 다듬은 시집으로 기나긴 성모의 찬송으로 끝맺고 있다. 그 밖에 정쟁(政爭)이나 법왕청 비난의 시 “나의 이탈리아여”로 시작하여 “나는 외치고 외치노라. 평화, 평화, 평화라고”하는 명구로 끝나는 애국시 등도 포함한다.
人文主義期-期-文學 이탈리아 문학사상의 인문주의는 거의 페트라르카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여 15세기 전반에 미치나 그 진전(進展)은 직선적인 것은 아니다. 14세기 피렌체의 거장들에 의해 다듬어진 이탈리아어는 지배적 지위에 오름에 따라 점차 이탈리아의 각 지방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라틴어와 고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문제를 다른 단계로 옮겨가게 하였다. 라틴어적, 인문주의적인 공통의 이상(理想) 아래 이탈리아의 문화인은교류를 활발케 하였다. 각종의 인문주의적 분위기는 일체화하는 경향을 보이나, 문화적·국민적으로 광범위한 통일성을 얻기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피렌체의 인문주의적 역사이다. 제1단계는 콜치오 살타티 등에 의해 행해진 젊고 활기차며 벅찬 감격과 풍성한 내용의 공공생활에 활발히 작용한 인문주의였다. 이에 이어 일련의 정치적 위기와 때를 같이하여 출현한 신단계(新段階)로 넘어갔다. 메디치가(家)의 코시모 시대 인문주의자, 시인, 예술가의 세대를 거쳐 로렌초 데 메디치(1448-1492)의 시대에 도달한다. 로렌초의 주변에는 폴리치아노가 있어 세련된 시의 정점을 이루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1433-1499)는 플라톤 철학의 사색을 추구하였다. 한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직면한 정치적·도덕적 위기를 의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만일 이탈리아 전토로 그 시계를 넓힌다면 15세기의 인문주의가 있었다 할 것이다. 16세기에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배출되었다. 아리오스토 시대의 페라라에서는 전쟁이 다반사로 되풀이되었다. 프랑스나 에스파냐의 대군대가 페라라의 성주 에스테공(公)의 영토를 통과하는 이 전쟁이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의 작품 <사랑의 오를란도>를 중단케 했고, 아리오스토는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오스토의 작품 속에서 찰스 대제와 아그라만테의 군대 간에 전쟁이 반복되는데, <광란의 오를란도>(1516)는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표면상 오락적인 읽을거리로 보이나 현세로부터의 도피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이 속에서 무수히 많은 현실과 인간의 정열이 배어 있으며, 경험을 통한 지혜, 16세기 외교상의 뒷거래가 기술되어 있음을 작품을 숙독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16세기가 정치적·사회적 위기와 외국의 지배로 인해서 암담한 세기였다고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과거의 유산으로 배양되어 새로운 운동으로 그 내용을 풍부히 한 활기찬 시대이며 르네상스의 황금기시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아어의 정확한 문법규칙이 정해져 교본으로 14세기 거장의 것이 선택되었다. 시에 있어서는 페트라르카, 산문에 있어서는 보카치오가 선택되었다. 또한 일상생활의 규범이 정립되었다. 그 일례로 카스틸리오네(1478-1529)의 <정신론(廷臣論)>(1528)이 있다. 그리고 최후로 토르콰토 타소와 같은 위대한 시인이 배출되었다. 타소의 날카로운 관능성, 고뇌, 영웅적 희망, 시의 음악성에 있어서 이탈리아어 시와 인문주의 전통의 소산이 집약되어 있다. 이탈리아 문학은 아리오스테가 타계한 후로는 피로하고 퇴색한 빛이 역력했다. 문예활동이 인간성의 제고(提高)를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 르네상스의 위기가 닥치고 모든 분야에 교회의 지배권이 행사되기에 이르렀다. 문학적 고전주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독재적 개혁의 과정과 때를 같이 한다. 카톨릭 교회에 의한 16세기의 작품검열의 역사는 눈물겨운 바가 있으며 금서목록(禁書目錄)은 교회의 무기로 문학자들에게는 공포와 의혹의 대상으로 화하여 모든 것을 부패케 하여 1530-1570년 사이에 자유로운 창작활동은 사장되었다. 이 문학적 고전주의기(期)에 베르니나 델라카자라는 시인이 있다. 자신(自身)을 상실하고 교회의 뜻대로 움직여 자기 포기의 생활 속에 가냘픈 평화를 구한 시인이었다.
Matteo Maria Boiardo (1441-1494) 이탈리아 시인·기사(騎士). 북이탈리아 에밀리아주(州)의 근교인 스칸디아노성(城)의 백작가(家)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전연구에 노력하였다. 페라라공(公)에게 중용되었으나 망부의 유산상속 싸움에 말려들어 독살을 당할 뻔한 일도 있다. 1481년 모데나시(市) 장관, 1487년 레죠시(市) 장관을 지냈고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주저 <사랑의 오를란도>는 1479년경 착수한 것으로 팔행운시(八行韻詩)를 이은 장편 69가(歌)나 되는 것이었으나 1494년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과 시인의 죽음으로 미완성인 채 끝났다.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그 속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종래 민간에 인기가 있던 샤를마뉴계(系)의 영웅전설에 새로이 아더왕계(系)의 그것을 융합시키고 마법의 창이나 반지, 사랑의 샘이나 증오의 샘이라는 황당무계한 대목을 넣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동시에 풍자나 유머를 엮어넣어 기사도 문학의 걸작을 낳았다. 그 밖에 연애시집, 시극(詩劇) 등이 있다.
Poliziano (1454-1494) 이탈리아 시인으로 본명은 안젤로 암브로지니. 시에나 근교의 몬테푸르치아노에서 태어났다. 아호(雅號)는 지명에서 딴 것이다. 피렌체 대학에서 수학한 후 그 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40세). 주저 <마상시합(馬上試合)의 노래>(1476)는 불과 1400행 미만으로 중단되었으나 고전으로부터의 인용을 아름답게 수놓아 청신한 맛이 넘치는 그림병풍과 같아 보티첼리(이탈리아 화가, 1444-1510)는 이 시에 의해 걸작 <봄>을 그렸다 한다. 1480년, 단지 2일 만에 완성했다는 <오르페오의 이야기>는 속어를 사용한, 성극(聖劇)이 아닌, 시극(詩劇)의 최초의 것으로 중요하다. 또한 단편이기는 하나 그의 <무가(舞歌)> 가운데의 수편은 고전학자로서의 흔적을 띠지 않으면서 경쾌한 운율(韻律)로 아쉬운 청춘을 한탄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14세기 최고의 이탈리아 시인으로서 추앙을 받고 있다. 그 밖에 라틴어의 저작도 적지 않다.
Ludovico Ariosto (1474-1533) 이탈리아 시인. 에밀리아주(州) 레죠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전을 배웠다. 1497년 펠라라의 에스테가(家)의 정신(廷臣)이 되어 1503년 이후 이폴리토 사교(司敎)의 비서로 일하여 종종 법왕과의 위험한 교섭을 위하여 외교사절로 파견되곤 하였다. 그 후 1522년에 가르파냐나의 총독에 임명되어 3년간 일하다 사임하였다. 그 후로는 페라라에서 자기 작품의 퇴고나 정원가꾸기로 여생을 보냈다. 주저 <광란의 오를란도>는 보이아르도의 <사랑의 오를란도>의 이야기 줄거리가 끊어진 데서부터 기필(起筆)하여 그리스도교군(軍)과 회교도군과의 파리 공방전을 배경으로 ⑴ 중국의 왕녀 안제리카를 사모한 용사 오를란도의 실연, 광란. 친구가 달나라로 날아가 정기(精氣)가 든 병을 얻어와 회복, 그의 분전에 의한 종전(終戰). ⑵ 그리스도교군의 용사 룻제로와 적군의 여장 부라다만테 간의 연애와 결혼을 원 줄거리로 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여성들의 로맨스를 엮어넣은 영롱한 기사도문학의 최고작이다. 그는 마치 끊임없는 미소를 띠며 유유자적 자유롭게 장면을 바꾸면서 해학조(諧謔調)가 넘치는 팔행운시(八行韻詩)로 전편 46가(歌)를 일관하고 있다. 그 각 노래의 서두에는 시인의 경험에서 얻어진 교훈이 서술되어 있어, 그 중 “타인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명심해야 할 바를 배우는 사람은 참으로 다행하다” 등의 명구가 있다. 이 책은 대환영을 받는 가운데 16세기 중에만도 154판을 거듭했으며 갈릴레이나 라마르틴도 이것을 애독하여, 이 책에서 얻은 영감으로 스펜서는 장시 <선녀왕(仙女王)>을 쓰고, 가르니에(1544-90)는 희곡 <브리다만토>를 저술했다. 역사소설가 월터 스콧도 매년 한 번쯤은 이것을 읽곤 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 이탈리아 희극의 최초가 된 희극 5편, 자서전적인 흥미를 담은 풍자시 7장 등이 있다.
Niccolodi Bernardo Machiavelli (1469-1527) 이탈리아 인문학자·정치가. 기념비의 명문(銘文)엔 “이처럼 위대한 명성에 대한 찬사란, 사족에 불과할 뿐”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그의 유자(遺子)는 “부친이 남기고 간 것은 빈곤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피렌체의 명문에서 태어나 신흥 인문학을 통달하였으며 분망한 정치생활로 시종했다(1498-1512). 유명한 대(大)로렌초가 가고,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이 있은 지 5년 만에 태어나 샤를 왕이 사망한 해에 정부에 참여하여 군정·재정 특히 외교의 난국에 잘 대처하였던 것은 그의 수다한 정책론·건의·외교보고에 관한 여러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12년 메디치의 독재정치 부활로 그 직위를 잃고 여생의 무료함을 문필로 달래며 <만도라고라>를 위시하여 수다한 순수문학, <리비우스론(論)> <피렌체사(史)> 등 역사학상의 명저를 저술함으로써 평범·정확·엄정한 작품의 모범을 남기었다. 특히 <군주론(君主論)>(1532)은 근대정치의 근본원칙을 과학적으로 논구(論究)하려 시도한 것으로 26장으로 되어 있다. 국가의 성질·종류·획득·유지 방법, 상실의 이유 등의 항목으로 나뉘어져 이론이 명철하고 예증이 적절하며 문장은 평이와 정확을 기하고 있다. 고래로 이 저서만큼 논의의 대상이 되고 많이 인용된 것은 드물다. 신성로마제국의 침공이 있던 해에 서거하였다.
Torquato Tasso (1544-1595) 이탈리아 시인. 소렌토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서사시 <리날도>를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다. 그의 부친도 정신(廷臣)이자 시인이었다. 일찍이 어려서부터 시재를 인정받았다. 부친을 따라 각지를 편력하였으며 파도바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며 장학금을 얻어 볼로냐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필화사건으로 퇴학을 당하였다. 페라라의 에스테가(家)의 정신이 되어 처음에는 추기경 루이지데스테에게, 다음은 공작 알폰소 2세에게 봉사하면서 동가(同家)자매의 애호를 받았다. 1573년 목가극(牧歌劇) <아민타>를 저작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목동 아민타는 아름다운 님프를 짝사랑하여 반수신(半獸神)에게 나체로 묶여 있는 그녀를 구해 주었으나 냉대를 받는다. 그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살하려 할 때 살아서 달려온 그녀와 맺어진다는 내용으로 밀턴의 <코머스>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17세 때부터 이탈리아 문학에 결여되어 있는 서사시를, 십자군을 소재로 하여 쓰고자 마음먹고 장시 <리날도>(1562)를 습작으로 썼으며 1575년에 <예루살렘 해방>을 완성하여 공작에게 바쳤다. 전편 8행운시 형식으로 일관, 26수로 된 대작인데 제1회 십자군의 성지 탈환을 배경으로 용사 리날도 (에스테가의 조상)와 요녀(妖女) 아르미다, 올린도와 소프로니아, 탄그레디와 에르미니아, 아르간테와 클로린다 간의 여러 가지 사랑의 갈등을 엮어 넣어 그 관능적 묘사가 특히 아름답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반(反)종교혁명 시대로 종교재판소의 감시 아래에 있어 이 걸작 가운데의 사실(史實)이 왜곡된 것이며 교리로부터 이탈되었다고 하는 비평가들의 추궁 때문에 박해 공포증에 걸려 피신하였다. 약 2년간의 방랑끝에 7년 여의 감금생활을 했다. 귀비(貴妃)의 도움으로 풀려나 로마 법왕의 보호를 받으며 주저 <예루살렘 수복(收復)>을 완성하였다. 캄피도리오 언덕에서의 계관(桂冠)을 목전에 두고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 밖에 다수의 시편, 시론, 서간 등이 있으나 그의 주저와 <아민타>를 통해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문학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또한 괴테는 그의 전기를 빌어 극 <타소> 속에 시와 현실의 상극을 묘사하였다.
-期文學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인간이 우주 속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우주의 존재를 인식함에 따라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신은 우주와 동일체며 필멸의 운명에 처해 있는 인간은 항상 이 우주의 파악과 신에의 접근을 위한 싸움이 강요되었다. 이것이 바로크 시대의 철학적·종교적 배경이었다. 고전주의와 바로크는 공통의 면이 있다. 그리스·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하면서 창조적 활동을 십분 발휘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 분야에 있어서의 바로크 특질로서 유럽에 현저한 교훈을 주었다. 이탈리아에 있어서 이 시대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도 확신도 얻을 수 없으며 현실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꼈다. 마리노는 이 바로크기(期)에 처해 양심의 혁신보다는 문학의 혁신에 뜻을 두어 기교적인 방향으로 기울어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데에 보다 관심을 쏟아 타소의 문학상의 기교면의 모방에 시종하였다. ‘마리니즘(Marinism)’은 이탈리아 문학 분야에 있어서의 바로크주의의 구현으로 그 명칭은 마리노에서 유래한다.
Giovanni Battista Marino (1569-1625) 이탈리아 시인. 나폴리에서 태어나 방종끝에 집을 쫓겨나고 로마, 베네치아, 라벤나, 토리노 등을 방랑, 세 번이나 감옥에 갇히는 쓰라림을 겪는다. 시인으로의 명성은 20세 미만에 쓴 <입맞춤의 노래> 이래 점차 높아져 시집 <거문고(琴)> 등에 의하여 한층더 이름이 올라갔다. 1615년 파리로 나가 왕후 마리아 디 메디치와 그 아들인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아 1623년 <아도네>를 왕에게 바치었다. 그 후 금의환향하였으나 2년쯤 후에 세상을 떠났다. 17세기에 있어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를 휩쓸며 인공적인 이미지를 구사하였던 시풍(詩風)은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이를 대표하였다. 주저 <아도네>는 사랑의 여신에게 사랑받는 미소년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여 여기에 갖가지 기발한 이야기들을 삽입하고 현란한 비유 등을 더해서 장장 4만 5천 행에 이른다. 작중에 나오는 “시인의 목적은 놀라움의 세계이다”라고 하는 한 구절이 적절하게 전작품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한때 절찬을 받다가 그 후 오래도록 공허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 애욕묘사의 특이성으로 해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文學 아르카디아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前半)에 걸쳐 일어난 정신(精神) 운동이었다. 마리니즘에 대한 혐오감에서 대두하여 문학재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운동인데 로마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아카데미노 운동의 범위에 머물지 않고 이 시기의 문명·문학상에 광범위하게 그 자취를 남기었다. 아르카디아는 반(反)바로크의 기치를 앞세운 고전주의적 정신운동으로 비록 그당시의 시대정신에 깊은 혁신을 끼치지는 못하였으나 시작에 있어서 기술적인 면의 문제를 해결하며 다음 시대의 문학을 위하여 유익한 문학적 실험을 한 것이었다.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회장이었던 크레심베니는 안이한 고전주의를 주장한 데 대하여 이 아카데미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그라비나는 그의 작품 <시론(詩論)>을 통하여 그리스·라틴 정신에의 복귀를 주장하는 동시에, 문학이 근대성을 갖추기 위한 합리적 탐구를 주장하였다. 이 그라비나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고 양자가 되어 그의 지도로 성장한 사람이 메타스타시오로서 살롱풍(風)의 우아한 시와 우수한 멜로드라마를 써서 아르카디아기(期) 최대의 시인이 되었다.
Metastasio (1698-1782) 이탈리아 시인이며 가극 대본의 작가. 본명은 피에트로 트라파시. 로마에서 출생. 1709년 그가 가두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읊는 것을 본 평론가 그라비나(1664-1718)의 인정을 받아 고전관계 교육을 받고 그라비나의 양자가 되어 유산을 상속받았다. 1720년 나폴리에 이사하여 그 다음해에 가극(歌劇) <서방(西邦)의 화원>으로 성공을 거두고 극중 비너스 역(役)으로 분한 스타의 사랑을 얻어 가정을 이루었고, <버림받은 디도네> 등 그녀를 위해 저작했다. 1730년 오스트리아의 궁정시인으로 추대되어서 빈으로 나아가 <티토의 인자(仁慈)> <데미스토크레> 등을 발표, 그 명성을 널리 떨치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걸작 <아틸리오 레골로>(1740) 외에 62편의 멜로드라마를 썼으나 경쾌한 가락의 아름다움과 쉽고 밝은 대사로 대중 취향의 뛰어난 가극이었을 뿐 깊이도 강한 감격도 없는 작품이었다. 마침내 독일풍의 오케스트라가 발달을 보아 새로운 오페라 대본이 등장함에 따라 잊혀지는 바 되었다. 그 밖에 수다한 시편(詩篇)과 그리스극(劇)에 관한 평론, 자서전적인 흥미를 풍기는 서간집이 있다.
啓蒙主義期-文學 계몽주의에 있어서는 이성(理性)이 인간행동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 이성에 의하여 진리를 발견하며 행복을 얻으려는 데에 주된 목표를 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각지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의도에 의해 진리탐구를 위한 학술단체가 생겨 다수의 계몽주의자를 배출하여 카톨릭 교회의 특권 제한, 법률 운용의 합리화, 재판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또 과학 이론의 해설,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보급 등이 저서·논문·신문 등에서 행하여졌으나 프랑스에 있어서의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가 끼친 것과 같은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없고, 문예와 사회의 협력은 결정적인 형태로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밀라노와 나폴리는 가장 활발하게 운동이 전개된 지역이었다. 밀라노에서는 ‘푸니아카데미’가 기관지 <일 카페>지(誌)를 갖고 있어 피에트로 베리(이탈리아의 경제학자, 1728-97), 알렉산드로 베리 등이 열성적인 추진자들이었으며 이 그룹에 속한 체사레 베카리아(이탈리아의 법률·경제학자, 1738-94)의 <범죄와 형벌>(1764)은 당시의 유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폴리 그룹은 프랑스 문화를 불신하는 태도로 관찰하였다. 이 그룹의 안토니오 제노베지(1712-69)는 승려였으나 나폴리 대학에 개설된 경제학 강좌를 담당하였다. 페르디난도 가리아니(1728-1787)는 <화폐론>의 저자였다. 이탈리아 문화혁신의 한 방편으로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외국작품의 번역이 이 시기에 성행하였다. 번역가로 저명해진 사람으로는 <오시앙의 노래>를 번역한 메르키올레 체살로티(1730-1808)가 있다. 원시적 감정이 힘차게 표현된 이 노래는 독자를 압도했으며 이탈리아 계몽주의기(期)와 낭만주의기(期)의 시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학적 취향(文學的趣向)을 낳게 한 점에서 중요한 뜻을 갖는다. 이 시기에 골도니 가스파로 고친(Gasparo Gozzi)(1713-86), 파리니, 알피에리 등이 배출되었다. 골도니의 희극에 있어서의 새로움은 등장인물의 선택과 이들을 자연의 환경에 배치한 것이었다. 고치의 인간으로서의 새 경지(境地)는 신문 편집활동에서 드러났으며 평소 일어나는 일로부터 이야기 줄거리를 끄집어내는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었다.
Il caffe 피레트로 베리가 이 기관지의 추진자였다. 그 내용은 상업·마(麻)의 재배·종두(種痘)·음악 등에 관한 기사로 백과전서적인 것이었다. 베리의 제자 알레산드로와 체사레 베카리아는 열렬한 협력자들이었다.
Giuseppe Parini (1729-1799) 이탈리아 시인. 코모 근처에서 명주짜기 직인의 집안에 태어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성직자가 되었다. 그 후 귀족의 가정교사, <밀라노 신문>의 편집자, 브레다 고등학교의 교사 등을 역임하고, 1797년에 치잘피나 공화국이 수립되자 밀라노시(市)의 시정에 참여하는 등 별로 성직자와는 관계가 없는 일생을 보냈다. 주된 작품으로는 풍자시 <하루(一日)>와 19편의 <오드(詩歌)>(1757-95)가 있다. 작품 <하루>는 ‘아침’(1763), ‘낮’(1765), ‘저녁’, ‘밤’(’저녁’과 ‘밤’은 미완성인 채 그의 사후 1801년에 출판되었다)의 4부로 되어 있어 예능익히기, 모양내기와 턱없는 소동으로 지새는 젊은 귀족들에게 가정교사가 하룻동안의 행사를 가르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당시 귀족의 나태한 생활을 풍자함과 동시에 사회적 양심의 고취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19편의 ‘시가’는 그의 도덕상·예술상의 이상(理想)을 피력한 것 16편과 연애를 다룬 것 3편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시집 <리파노 에우피리노의 시>(1752, 에우피리노는 그의 필명이다) 등이 있다.
Vittorio Alfieri (1749-1803) 이탈리아 시인. 이탈리아 근세 최대의 비극시인이며 이탈리아 비극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북부 이탈리아의 소읍 아스티의 백작가에 태어났다. 토리노의 귀족학교에서 수학한 후 5년간 유럽 각지를 편력하며 화려한 연애사건을 일으키는 등 갖가지 인생체험을 함과 동시에 문학에 친근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에 돌아온 후에는 쉬지 않고 각지를 도는 한편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비극 <클레오파트라>(1775)로 명성을 얻은 다음 1776년에서 1786년에 걸쳐서 무운 십일음철구(無韻11音綴句) 형식을 갖는 19편의 비극을 썼다. 그 중에서도 무도한 에스파냐 왕 필리포와 그의 아들 카를로와의 싸움을 묘사한 <필리포>,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오레스테>, 부친을 남몰래 연모하다 종내 자살하는 여인을 그린 <미라>, 성서에서 힌트를 얻은 <사울> 등이 걸작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죽기 수개월 전까지 집필하였던 <자서전>도 유명하다. 자유에 대한 정열과 압제자에 대한 심각한 증오를 나타내는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인의 정치의식을 각성시켜 독립과 통일의 비원을 간직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다했다. 1800년 전반(前半)의 낭만주의 문학자나 애국주의자들에게 애독되었다.
Carlo Goldoni (1707-1793) 이탈리아 극작가. 베네치아 출생. 법학부를 졸업했지만 결국 극작활동에 투신하여 이탈리아어와 베네치아 방언으로 수다한 희극(喜劇)을 썼다. 그간에 이탈리아 희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극의 큰 줄거리만 써 있을 뿐, 나머지는 배우가 즉흥적으로 대사나 동작을 꾸미는 것)에 대신하여 배우들이 연출할 대사·동작을 자기 자신이 쓰는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동시에 종래의 가면희극 대신에 현실세계에 입각한 성격희극(性格喜劇)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극작상의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는 바 되어 1762년 파리로 옮겨가 그곳에서 프랑스어로 희극을 쓰기도 하고 왕실의 이탈리아어 교사를 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마치었다. 150편에 달하는 극 가운데 대표작으로서는 <골동품상 일가(骨董品商一家)>(1749)와 <거짓말쟁이>(1750), <커피숍>(1750), <여인숙의 안주인>(1751), <부채>(1763)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프랑스어로 쓰인 <회상록>(1787)은 그의 일생을 아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新古典主義期文學 신고전주의는 19세기 초에 불과 1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한 문학 운동으로 나폴레옹 1세(재위 1804-1814)가 황제로서 유럽에 군림하던 특수한 정치적 정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문예작품은 호화로운 형식을 즐겨 썼으나 이것은 고전의 모방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문학분야에서 빈첸초 몬티가 그 대표자로서 세론을 들끓게 한 사건을 화사한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vincenzo Monti (1754-1828) 이탈리아 시인·극작가. 신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적 인물. 페라라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에 전념하여 시재(詩才)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시 <에제키엘로의 환상>(1776)으로 보르게제 추기경에게 인정받아 법왕청에 들어갔다. 로마에서는 법왕 피오 6세의 비호 아래 고전주의 색채가 강한 <우주의 미>(1781), 기구(氣球) 발명가를 찬양하는 <몬테고르피에리 형제 찬가>(1784), 비극 <아리스토 데모>(1786), <가레오토 만프레디>(1788) 등을 저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지조가 없어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고 법왕청에 아첨하는 시 <바스빌리아나>(1793)를 썼지만, 얼마 안 가서 혁명파에 투신하여 그 후도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곧 그를 찬양하는 시 <검은 숲의 시인>(1806)을 헌시하는 등 변절이 무쌍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육체와 정신으로 감득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한 예술적 형식으로 표현할 수가 있었던 천재적 기교파 시인임에는 변함이 없다. 대표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번역(1810)으로, 비록 그것이 그리스어를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고 라틴어를 통한 중역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기는 하나 미려(美麗)한 문체로 해서 오늘날에도 애독되고 있다.
Ugo Foscolo (1778-1827) 이탈리아 시인. 낭만주의적 색채가 짙은 신고전주의자. 이오니아 해상의 섬 잔테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사별 후 베네치아로 옮겨가 그리스·라틴의 고전은 물론 내외 문학상의 깊은 지식을 쌓았다. 후일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알피에리에 열중하여, 일찍이 젊은 나이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나폴레옹의 진보적 사상에 공명하나 그 후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하여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에 할양됨을 보고 반(反)나폴레옹 기치를 들었으며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자 반(反)오스트리아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 결과 망명이 불가피해져 1816년 영국으로 건너가서 불우한 가운데 런던에서 객사하였다. 대표작에는 루소의 <신 엘로이즈>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간체 연애소설 <야코프 오르티스의 최후 편지>(1802)와 그의 신고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우국시 <분묘(墳墓)>(1807)가 있다.
浪漫主義期文學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발생하고 프랑스와 영국으로 확대되어 19세기 전반(前半)에 이탈리아에 도입되었다. 문학작품의 내용상의 실재성, 문학용어의 평이성은 18세기 이래의 이탈리아 문학 경향으로 이탈리아에 낭만주의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부분적인 기초의 구실을 하였다. 이탈리아의 낭만주의자들은 <콘칠리아토레>지(誌)를 간행하여 낭만주의 운동의 봉화를 들었다. 주필은 펠리코, 협력자에는 베르세(1783-1851), 디 브레메 등이 있었다. 펠리코의 <나의 옥중기>는 순국하는 애국지사의 숭고한 교훈이었고,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건한 신념은 국민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베르셰는 낭만주의 최대의 이론가였으며 또한 이 시기의 열렬한 애국시인이기도 하였다. 낭만주의기의 문학의 최대 성과는 만초니의 <약혼자>이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특질로 요구되는 고전 문학적 규칙의 배격, 작품내용의 실재성, 윤리적 가치, 용어의 대중성을 충족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로서는 세계 최초로 서민이 작품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서민이 승리를 거둔다고 하는 데모크라틱한 내용으로 서민들의 꿈을 만족하게 하며, 당시의 현실적 종교였던 카톨릭 신앙이 독실한 서민을 등장시키고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애국적 작품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고립적 존재이었던 레오파르디는 뛰어난 서정시로 세계적 명성을 떨쳤다. 데 아미치스와 콜로디는 만초니파(派)의 작가였다.
Conciliatore 1818년 9월에서 1819년 10월 사이에 간행되어 오스트리아 관헌의 탄압으로 폐간되었다. 그 주장하는 바는 “작품상의 표현수단 및 내용의 개혁, 광범위하게 독자를 가르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테마를 찾음으로써 작품은 모름지기 인간의 풍속을 개선하고 독자의 공상과 감정을 만족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육적 도덕적 요청에 문학을 종속케 하려는 경향은 만초니 및 만초니파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Alessandro Manzoni (1785-1873) 이탈리아 시인·소설가. 밀라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체사레 베카리아(이탈리아의 법률·경제학자. 1738-94)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계몽주의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만초니는 외가 쪽의 성격을 많이 닮고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의 시작으로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자유의 승리>(1801)이었다. 1805년 어머니가 애인과 파리로 나가자 그도 그 뒤를 좇았다. 어머니와 더불어 파리의 지식계급간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바 되어 콘도르세 후작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그 사이 중세사 연구가인 클로드 포리에르를 사귀어 오랫동안 친교관계를 가졌다. 만초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포리에르의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 1808년 엔리케타 블론텔과 결혼, 그해에 처와 어머니를 동반하고 다시 파리로 나갔다. 회의론(懷疑論)·인도주의·감각론·칸트 철학 등을 섭렵하면서 또 파스칼, 기타 호교론자(護敎論者)의 저작과 카톨릭교로 개종한 자기 처 엔리케타의 영향을 받아 피비린내 나는 전세기(前世紀)의 반동으로 19세기 초의 파리를 온통 휘감은 카톨릭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개종하였다. 그의 개종은 만초니의 인생 창작활동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와 1812년 이후로는 기독교적 낙원이라는 이상에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결부시킨 작품이 속속 발표되었다. 개종한 감격으로 교회의 대제일(大祭日)을 노래한 <성가>(1812-22), 역사상의 인물을 주제로 한 비극 <카르마뇰라 백작>(1820), 외세의 압제 아래 시달린 이탈리아 국민의 고민을 그린 극작 <아데르키>(1822), 이탈리아 근대소설의 선구가 된 <약혼자> 등이 있다. 1833년 크리스마스에 처 엔리케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만초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활동은 정지된 듯 보였으며 그 후로는 언어문제에 몰두하여 이탈리아어의 통일에 최대의 관심을 쏟았다.
Ipromessi sposi (1827) 만초니 작. 1827년에 출판된 초판은 13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40년에 언어 수정판이 나왔다. 이것은 이탈리아 문장의 교본이기도 하다. 만초니가 살던 시기의 롬바르디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이 역사소설은 150년 전의 에스파냐 지배시대의 북이탈리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천민 출신으로 약혼 중의 렌초와 루치아는 사악한 에스파냐 귀족의 폭력으로 고향에서 추방된다.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며 정의, 두터운 신앙으로 무장하여 에스파냐 귀족을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내용이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약혼자> 가운데서 신(神)은 인류 역사의 숨은 주재자로서 신에게 부름받은 자는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놓여진다. 신의 의지(意志)가 인간의 폭력에 휘말려들어가는 일이 있을지라도 성스러운 의지를 감수치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높고 또 순수한 신앙이야말로 정의의 법도이며 투쟁의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전세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Giacomo Leopardi (1798-1837) 이탈리아 시인. 마르케주(州)의 레카나티의 귀족 문중에 태어났다. 소년시대부터 부친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17세가 되기까지 독학으로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 영어, 프랑스어를 완전히 이해하였으나 이런 무리한 면학이 화가 되어 39세로 죽는 날까지 병마에 시달렸다. 처녀작은 18세 때에 쓴 <죽음에 이르는 찬가>이며, 이에 이어 <시가집(詩歌集)> 중에 수록되어 있는 애국시가 있다. 그 후 우주·자연·추억을 읊은 것이 있으며 1828-1830년은 그의 시인으로서의 성숙기로서 걸작이 많다. 철학적인 칸초네는 시작활동의 전시기에 걸쳐 볼 수 있으며 1833년-35년에 쓴 연애시가 있고 죽기 직전에 쓴 <그런 연고로>와 <달은 기운다> 등이 있다. 레오파르디는 특히 인간의 고뇌를 절감한 시인이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가정이라는 희귀한 선물을 받았으나 인간에게는 이성(理性)이 있어 이것이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레오파르디에게는 자연과 인간정신과의 대립은 미해결인 채 숙제로 남는다. 시작(詩作) 외에 <윤리적 소작품>과 <지발도네>가 중요하다.
詩歌集 레오파르디 작 시집. 4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레오파르디형(型)의 칸초네라고 불릴 수 있는 것으로 행수(行數)·배열(排列)·각운(脚韻)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자유로운 구성을 갖는 구절로 되어 있다. 이 형태의 시는 레오파르디가 공상과 반성(反省)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가집> 속의 시는 각기 개성이 있으나, 시인으로서의 성장과도 관련하여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이탈리아의 가련한 현상을 슬퍼하는 애국시 <이탈리아를 생각하며>와 <단테의 비(婢)에 붙여>의 2편이 있다. 시는 미숙하나 청년다운 정열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어 제1기 목가시(牧歌詩)로 그는 자연을 노래한다. 자연은 인간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미워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무궁(無窮)>과 <축제일의 저녁>이 뛰어난 작품이다. 다음에 제2기 목가시로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나 추억이 가미되며, 특히 소년기의 추억을 노래한 것이 훌륭하다. <추억> <고독한 참새> 등은 새로운 의미에서 그의 기억 속에 되살아난 것들이다.
Le Avventure di Pinocchio (1883) 어린이들을 위한 소설이다. 이 작품의 작가는 콜로디(Collodi)로 본명은 카를로 로렌치니(Carlo Lorenzini, 1826-90). 1881년 여름, 피렌체의 유명한 <아동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당초의 제명(題名)은 <만든 인형 이야기>였다. 그 후 1883년에 한 권에 수록되어 제목도 <피노키오의 모험>이라 바뀌었다. 마음 착한 제페트 할아버지가 만든 장난꾸러기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여러 가지 유혹에 넘어가 아버지 속을 썩이다가 마음씨 착한 아이로 변해 푸른 머리의 천사에 의해 진짜 인간의 아이로 탈바꿈을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철학자와 같은 말을 하는 귀뚜라미나 교활한 여우와 고양이 등 여러 가지 동물이 나오는 외에 상어에게 먹힌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모험 장면도 나온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아동문학 작품 중의 하나이다. 로렌치니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참가한 후 피렌체에서 잡지, 신문의 기고가로서 활약했다. 콜로디라는 필명은 그의 모친의 출생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Cuore (1886) 아동문학 작품.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 (Edmondo de Amicis, 1846-1908) 작. ‘쿠오레’란 ‘마음’ ‘애정’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탈리아 통일 달성 후의 국민의 침체된 생활을 걱정하여 장차 나라를 짊어질 소년소녀에게 조국애와 올바른 윤리관을 심어주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토리노에 사는 초등학교 4년생 엔리코의 1년간의 생활을 그린 일기체(日記體)로 되어 있다. 일기에는 필요에 응하여 엔리코에게 보낸 부모와 누이의 편지와 한달에 한 번 담임선생님이 해주시는 매달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매달의 이야기 중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엄마 찾아 3만리>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라든가 <사르데냐의 소년 고수(鼓手)>와 같은 휴머니즘과 애국심을 북돋아 주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데 아미치스는 통일전쟁 당시의 군대생활에 관한 추억을 작품으로 써서 문단에 등장한 후 장·단편 소설이나 여행기를 많이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의 특징은 감상적인 애국주의와 도덕적·교훈적 작풍과 아름다운 이탈리아어의 구사이다.
-世紀後半-文學 19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낭만주의 문학의 한 경향이기도 하였던 사회의 구체적 현실에 관한 관찰이 더욱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통일을 달성한 이탈리아가 구체적으로 국가건설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점, 철학에 있어서는 정확한 과학에 중요성을 두려는 개념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점, 문학에 있어서는 현실생활에 그 소재를 구하려는 경향 등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이 시기의 시는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나, 소설의 경우는 ‘진실주의’라고 칭한다. 진실주의에 대한 반동――유럽 전체에서 볼 때에는 사실주의·자연주의에 대한 반항――은 19세기 후반에서 말기에 걸쳐 ‘세기말 사조’라고 불리는 독특한 사상적 시대를 가져왔다. 유럽의 전면 전쟁의 기운, 그로부터 생긴 사람들의 불안, 불안으로부터 벗어어나려는 갖가지 생활양식이 ‘세기말 문학’을 탄생케 하였다. 소위 테카당스 문학이다.
眞實主義 이탈리아의 진실주의는 유럽의 사실주의 경향 중에서도 특색이 있는 것이다. 즉 지방적·방언적·원시적이며 때묻지 않은 미지의 세계의 발견이었다. 소설의 무대는 남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사르디니아섬의 농부와 장인(匠人)의 세계로서 근대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세계의 많은 사람의 절망을 문자화하며 대변하는 임무가 진실주의 작가에게 과해졌다.
-文學 세기말의 불안에 쫓긴 문학자들은 실로 형형색색의 형식으로 작품에 전심전력하였다. 어떤 사람은 신비주의에, 또 어떤 사람은 가없는 데캉당스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데카당스의 세계 중에서도 단지 소극적으로 퇴폐에 몸을 맡겨 죽음의 문학을 형성시켜 가는 자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만 도취하는 탐미주의자 등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 예술지상주의가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단눈치오가 그 대표자이다.
Giosue Carducci (1836-1907) 이탈리아 시인·고전문학자. 중부 이탈리아의 바르 디 카스텔로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리스·라틴을 위시한 고전작품을 가까이 하였고 근대의 작가로서는 만초니와 베르셰의 작품을 애독하였다. 피렌체의 카톨릭계(系) 중학교를 거쳐 피사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소위 수재 코스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러나 1858년에 형(兄) 단테가 자살하고 곧이어 부친도 사망하자 출판 편집에 종사하며 일가를 부양했다. 1860년에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볼로냐 대학 국문학교수에 취임하였다. 정치 비밀결사원인 부친의 혈통을 이어받아서인지 국가 통일시대에는 신정부를 통렬히 비난하는 시 <청춘 시절>과 <경중 시집(輕重詩集)>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점차 민족주의자의 성격을 띠어 오히려 지도자계급의 어용 시인·문학자로 전락하였다. 1890년에는 상원의원에 임명되고, 190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Giovanni Verga(1840-1922) 근대 이탈리아 소설가·극작가. 시칠리아섬 카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문재를 보여 뒤마 페르를 본 떠 <산속의 카르보나리당(黨)>(1862)을 출판하였다. 청년시대에 피렌체로 이사하여 문학계에 출입하면서 감상적인 낭만주의풍(風)의 작품 <곤줄박이(山雀)이야기>(1871)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밀라노에 정착, 살롱과 카페에서 문학계의 신풍에 접하며 프랑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고향 시칠리아를 무대로 원시적이고도 소박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전례없이 엄격하고 간결한 문체로 단편소설집 <전원생활>(1880), <전원소설집>(1883), 장편 <마라보리아가(家)의 사람들>(1881) 등을 저술하였다. 몰자아(沒自我)와 객관의 시점에서 진실을 묘사하려는 작풍은 진실주의로 널리 알려져 네오리얼리즘 문학에까지 계승되어 있다.
Grazia Deledda (1871-1936) 근대 이탈리아 여류소설가. 사르데냐섬의 누오로에서 출생하였다. 처녀작은 <동방의 별>(1890)이다. 소녀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결혼 후에도 가사를 돌보는 틈틈이 계속 창작하여 생전에 50여 권을 저작하였다. 1926년 노벨상을 받았다. 꿈많던 유년·소녀시절의 누오로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회고록 <코지마>에 수록되어 있다. 누오로는 사르데냐섬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산속의 소읍으로 자연의 풍치가 아름다우며 오늘날에도 거칠고 소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델레다는 그들의 원시적 사랑, 충동적인 정열, 또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 있어서 받는 절망적 고통을 리얼리즘 작풍으로 묘사하였다. 대표작에는 <엘리아스 포르톨루>가 있다. 수법상으로는 뒤마의 낭만주의에서 출발하여 진실주의(Verism)에 이르러 결정적 영향을 받고 후기에는 러시아 자연주의로 기울어졌다. 1899년 칼리아리로 이주하였다가 이어 로마로 옮겨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1959년 누오로로 옮겨졌다.
Giovunni Pascoli (1855-1912) 이탈리아 시인. 로마냐에 있는 작은 마을 상마우로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8월 부친이 암살당하고 집안에 불행이 겹쳐왔다. 1873년 볼로냐 대학 입시 때 카르두치에게 인정받는 바 되어 수석의 성적으로 급비생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의 불합리에 격분하여 한때 학업을 중단하고 인터내셔널에 가맹하여 약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882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각지에서 고전어교사를 역임, 1905년 후에는 모교에서 국문학교수로 봉직했다. 평생 독신으로 여동생과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다 볼로냐에서 사망하였다. 시집 10권, 라틴 시집 1권, 단테 연구 3권 등의 저작이 있으나 주저는 <미리체>이다. 전원의 아름다움, 유년시대의 추억, 사별한 가족과의 영교(靈交) 등을 시재(詩材)로 하는 짤막한 내용의 것으로 되어 있다. 종래의 시인들이 지나쳐 버렸던 것과 같은 사소한 인상을 포착하는 그의 단편적 시풍은 현대 이탈리아 시단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Gabriel D’Annunzio (1863-1938) 이탈리아 시인·소설가·극작가. 아브루치의 페스카라에서 출생하였다. 1880년 시집 <조춘(早春)>으로 인정받았다. 정력적인 작가로 시집 13권, 단편집 4권, 소설 8권, 극작 17편, 그 밖에 평론, 산문집 등이 있다. 1893년에 <죄없는 자>의 불역(佛譯)이 나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1910년에 빚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 1915년 세계대전에 조국 이탈리아의 참전을 주장하고 귀국, 그해 7월 의용군에 가담하여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그 이듬해 비행 중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종전 후 국제연맹의 결정에 항의하여 피우메시(市)를 점령하는 장거를 감행하였다. 1921년 동시를 자국군에 인계하고 귀국, 1924년 몬테 네보소공(公)으로 봉(封)하여져 파쇼 정부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1938년 가루다 호반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본질은 시인(詩人)인 점에 있었다. 그의 시는 풍부한 시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활기에 찬 운율로 생의 환희를 노래하며 관능적 미가 넘치는 것이었다. 특히 <하늘과 땅과 바다와 영웅의 찬가>중의 제3권 <알초네>(1904) 가운데에 우수작이 많다. 소설로는 <쾌락>(1889), <죄없는 자>(1892), <죽음의 승리>(1894) 등이 걸작이다. 육체의 쾌감을 추구하면서 항시 불안에 괴로워하는 향락주의자의 심리를 시와 같이 응축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극작에서는 <죽은 도시>(1898),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901), <요리오의 딸>(1903)이 걸작이다. 어느 작품에나 대중 취향을 꺼려한 니체적인 초인사상(超人思想)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한없는 미의 추구자이던 그는 동양 문물에도 흥미를 가져 이를 작품 속에 취급한 것이 있다.
Antonio Fogazzaro (1842-1911) 이탈리아 소설가·시인. 북부 이탈리아 비첸차에서 출생하였다. 법학을 공부하여 한때 변호사가 되었으나 1866년 결혼 후에는 문학에 전념하였다.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렬한 관능성과 진지한 기독교 정신을 아울러 갖고 있던 관계로 영육(靈肉)의 문제에 고민하였다. 처음에는 경건하며 자연미를 사랑하는 시인으로 출발하여, 처녀작 <미란다>(1874)는 목가적 서사시로서 호평을 받았다. 그의 부친도 일독 후 감동한 나머지 아들의 문학 정진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소설의 제1작인 <말롱브라>(1881)에서는 심령학적 현상을 믿고 발광하여 연인을 살해하는 여인상을 그려 일찍이 그 특성을 발휘하였다. 제2작인 <다니엘레 코르티스>(1885)에서는 맺어질 수 없는 남녀의 대립을 묘사하였고, 주저 <오랜 작은 세계>(1895)는 남녀간의 상극을 취급하여 사랑하는 자식의 익사와 전쟁의 개시로 화해에 이른다는 줄거리이다. 어느 작품에서나 호반의 자연미를 배경으로 주역의 주변인물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만초니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말해진다. <성도(聖徒)>(1905)는 과학과 종교와의 조화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여 그로인해 법왕청으로부터 금서처분을 받고 저자는 파문되었다.
-世紀-文學 제1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이탈리아 사회는 위기의 양상을 드러내어 작가들은 새로운 것을 모색하였다. 이 세기의 문학 개량운동은 개인적인 시도를 벗어나 잡지나 문학운동의 프로그램 속에 명료하게 구체화되었다. 시단(詩壇)에서는 포가차로, 파스콜리, 단눈치오 등에 대한 반발로서 ‘황혼파(黃昏派=Crepuscolarsmo)’의 시가 탄생, 대표자로서 고차노(1883-1916) 등을 배출하였다. 또 모든 전통을 떨어버리고 찰나적 인상을 중시한 마리네티(1876-1942)의 ‘푸투리즘(Futurismo)’운동이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이미 ‘황혼파’나 ‘푸투리즘’을 문제삼는 시인은 없어졌다. 이 전쟁의 귀중한 체험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인 웅가레티의 시집 <희열>이 나왔다. 단시(短詩)로서 <에르메티즈모>의 시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이탈리아 현대시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피렌체에서 탄생된 <보체>지(誌)는 유럽 문화의 커다란 운동을 소개하는 한편 사상·정치·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파피니가 그 창간에 관여하였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후 로마에서 창간된 <론다>지(誌)에는 현 문단의 최고 원로인 바켈리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 잡지의 동인(同人)들은 국민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1926년-1936년에 피렌체에서 간행된 <소라리아>지(誌)는 외국문학의 소개에 주력하였다. 비토리니도 이 잡지에 협력하는 가운데 작가로서 성장하여 네오리얼리즘 소설의 원형이라고 하는 <인간과 비인간>을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베르가의 작풍을 충실히 계승한 토치(1883-1920)나 정신분석을 처음으로 문학작품에 반영케 한 즈베보의 가치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극장에 있어서는 피란델로가 극의 테마, 극적 기교에 있어서 새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세계에 널리 애독자를 갖고 있던 파피니의 방대한 작품 중에는 카톨릭교 사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 많다. 판치니(1863-1939), 파라체스키(1885- ? ) , 모레티는 19세기의 평화와 소박함을 20세기의 병적인 문화와 대비(對比)시키려 하였다. 시로네(1900- ), 파르디니(1889-1962), 레비(1902-1975), 모라비아는 현대사회의 날카로운 관찰자인 것이다. 특히 모라비아는 그의 처녀작 <무관심한 사람들>(1929)로 전통문학에 순응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모랄이 저하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중산계급의 붕괴상을 대담하게 묘사하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미켈레에게서 실존주의적 인간의 대두를 발견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주제가 이 작품 이전에는 출현한 일이 없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Ermetismo=Hermeticism 웅가레티는 시집 <희열>에 의해 이탈리아 현대시의 혁신을 이루고 또한 시집 <시간(時間)의 지각(知覺)> 제1기에 있어서 에르메티즈모의 시작법(詩作法)을 확립하였다. 이 시작법은 어구를 읽을 때 그 어구가 우리에게 이미지를 주는 것에 기초로 두는 것이다. 이 이미지의 교류는 독자의 직감에 맡기자고 하는 것이다. 이후 시집 <시간의 지각> 제2기·제3기 또는 시집 <약속의 땅>으로 웅가레티의 시는 진전을 보였다.
Neorealism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대중의 취향도 있고 하여 다수 작가의 손을 통하여 이탈리아 사회의 현실적 모습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사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록문학(記錄文學)이 탄생하였다. 이런 작품의 대부분은 순수한 시가 아니어서 우리들의 미학적 관심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적인 표현으로 생명력이 넘치고 새로운 문제를 제공하여 관심을 환기시켜 준다. 참다운 리얼리즘 문학은 단순한 현실묘사나 폭로에 그쳐서는 안 된다. 현실의 묘사를 세차게 추진함으로써 현실 가운데서 새로이 솟아나는 서광(曙光)이나 모랄이 추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네오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는 비토리니의 <인간과 비인간>, 파베제의 <피곤을 주는 일>이 있다.
Italo Svevo (1861-1928) 이탈리아 소설가. 본명은 에토레 시미츠(Ettore Schmitz)이다. 국경의 항구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유대계(系)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이동안 전통적인 이탈리아 작가들보다는 오히려 외국 근대작가들에 친근감을 가졌던 결과 특이한 문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청년시절에는 은행원이 되었고 결혼 후에는 공장을 경영하여 재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문학에의 정열은 버릴 수 없어 <어떤 일생(一生)>(1892), <노년>(1898) 등을 저술하였다. 조이스나 프루스트에 앞서 내적 독백을 내용으로 하는 심리소설을 썼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즈음 트리에스테에 살던 조이스는 즈베보의 영어 가정교사가 되고 그 후로 두 사람 사이는 친교가 두터웠다. 장편 <제노의 의식>(1923)은 조이스 등에 의해 프랑스에 소개되어 세계문학상 걸작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도 알려져 있다.
Luigi Pirandello (1867-1936) 이탈리아 극작가·소설가. 시칠리아섬의 아그리젠토에서 출생하였다. 팔레르모 대학과 로마 대학을 거쳐 본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로마에 살면서 여자사범학교에서 국문학을 강의하였다. 부친의 파산으로 발단된 아내의 발광은 그의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가 남긴 극작은 약 40편, 장편소설 7편, 그 밖에 단편이 250편이 있다. 가령 장편 <1, 무(無), 10만(萬)>(1925)에 있어서 사람은 자기만이 특별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에는 무(無)이며 또한 그 누구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존재의 이중의 가면, 진실을 둘러싸고 있는 정기(正氣)와 광기(狂氣),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에 관하여 <엔리코 4세>(1922)와 그 밖의 작품에서 예리하게 추구하고 있다. 그는 종종 진실주의(verism)의 재현자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베르가가 현실 중에서 비애와 고뇌를 느낀 데 반해, 피란델로는 희극성(喜劇性), 더욱이 괴기성을 보다 강하게 받아들였다. 1934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Giovanni Papini (1881-1956) 이탈리아 소설가·평론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일찍이 젊어서부터 수다한 문학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1903-1907), <보체>(1908-1914), <라첼바>(1913-1915)의 여러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제임스(미국의 심리학자·철학자)의 프래그머티즘이나 베르그송(프랑스의 철학자, 1859-1941)의 직관주의를 도입하여 금세기 전반(前半)에 있어서 문예사상계의 주역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양의 철학자>(1906)나 <24의 뇌수(腦髓)>(1912) 등은 이 시기의 주저이다. 이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1912)를 발표하고 난 후부터는 이상주의로 기울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상계의 퇴폐상을 목도하고는 거꾸로 유신론으로 쏠려, 청년시절에 그렇게 매도(罵倒)하던 신(神)을 인정하고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전(傳)>(1921), <성 아우구스티누스>(1930) 등을 저술하고 만년에는 감각 마비라는 기병(奇病)에 걸렸으면서도 두뇌만은 명석의 도를 더하여 <불행한 자의 행복>을 구술(口述)로 발표하였다.
Giuseppe Ungaretti (1888-1970) 이탈리아 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소년시절의 아프리카 생활에서 터득한 무(無)에의 감각으로서의 사막(砂漠), 재생의 상징으로서의 바다는 그의 영원한 이미지였다. 청년시절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배우고 아폴리네르 등과 사귀어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지원병으로 대(對) 오스트리아 전선에 참가하여 죽음에 처한 참호 속에서 일체의 허식을 떨쳐버린 단시(短詩)를 수첩에 썼다. 이것은 후일에 제1시집 <희열>(1914-19 사이의 시)로 정리 수록되어 소위 순수시파(純粹詩派)를 대두시켰다. 제2시집 <시간의 지각>(1915-35 사이의 시)은 그 내용상 3개 시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제2기에서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라치오 지방을 배경으로 유적(遺蹟)의 폐허를 통해서 느껴지는 인간상을 역사와 시인과의 비극적 의식 교감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제4시집 <비애>(1937-46 사이의 시), <약속된 땅>(1950), <외치는 소리와 풍경>(1952) 등의 저작이 계속 발표됨에 따라 초기의 구두점(句讀點)이 없는 짧은 단편시법(斷片詩法)은 자취를 감추고 보다 서정성을 더하며 시적 기법도 페트라르카와 타소에 접근하고 있다. 1965년의 대담집(對談集) <시인이라는 직업>에 의하면 그의 만년의 시는 바로크 예술의 출발점으로서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Riccardo Bacchelli (1891- ? ) 이탈리아 소설가·평론가·극작가·시인. 볼로냐에서 출생하여 카르두치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성장하였다. <서정시집>(1914)으로 일약 문명을 얻고 <사랑의 말<語>>(1935), 그 밖의 작품으로 난숙한 관능적인 사랑을 주제로 하는 시집을 발표하였다. 피렌체의 <보체>지(誌)동인이 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포병사관으로 참전하였다. 전후에는 카르다렐리와 더불어 황폐한 정신풍토에 전통의 부활을 주창하여 <론다>지(誌)를 창간했다. 정치평론·문예평론·극작·우화·소설 등 활약의 범위도 넓어 그의 저서는 방대한 양에 달했으나 그의 전문분야는 역사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장편 3부작 <포강(江)의 물레방앗간>(1938-40)은 19세기의 사실(史實)을 토대로 모든 계급의 인간상·사회사건·정치운동을 바로크적(的) 형식이라고 해야 할 언어와 문체로 면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아카데미 회원이며 문예와 사상계의 중진이다.
Cesare Pavese (1908-1950) 이탈리아 소설가·시인.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주(州) 산토 스테파노 베르보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베르보강(江)은 구릉을 누비며 포강(江)으로 빠져 토리노시(市)를 관류하고 있다. 이러한 구릉(丘陵), 강, 도회지 등이 작품의 배경으로 일관되어 있다. 토리노 대학을 졸업한 후 고교 교사와 <문화>지(誌)의 편집을 하는 한편 현대 영미문학을 다수 소개 또는 번역했다. 특히 조이스나 포크너로부터는 수법상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1935년 반(反)파쇼 활동으로 인하여 남이탈리아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처녀작 <너의 고향>(1941)은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문학이라 인정되었으며 그 후에도 더렵혀진 목숨, 자살의 유혹, 좌절된 사랑 등 신화와 현실과의 교착(交錯)을 주제로 하여 독자적인 서정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름>(1949)으로 스토레가상(賞)을 받는 등, 작가로서 크게 성공한 후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숙명에 처해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자살하였다.
Elio Vittorini (1908-1966) 이탈리아 소설가. 시칠리아섬 시라쿠사시(市)에서 출생하였다.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북부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공장기사의 생활을 하면서 처녀작 <소시민>(1931)을 발표하였다. 또한 영미문학의 번역에 손을 댔고 특히 멜빌이나 포크너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전쟁 중에는 지하조직에 참여, 저항운동을 계속하여 파시즘 타도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다. 그동안의 경험이 독자적 문체를 낳게 하는 계기가 되어, <시칠리아에서의 대화>(1941)는 파베제의 작품과 더불어 네오리얼리즘 문학의 모체를 이루었다. 전후에는 <포리테크니코>, <메나보아>지(誌) 등의 주필이 되어 사르트르 헤밍웨이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이탈리아 문학계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가 키우지 않은 전후(戰後)작가는 없다고 할 정도로 지도적 활동을 하였다. 대표작에는 <인간과 비인간>(1945), <붉은 카네이션>(1948) 등이 있다.
Alberto Moravia (1907- ) 이탈리아 소설가로 본명은 알베르토 핀케르레(Alberto Pincherle)이다. 로마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척추 카리에스를 앓아 초등학교를 중퇴하였다. 고독한 투병생활을 보내면서 동서고금의 문학서를 독파하였다. 처녀작 <냉담한 사람들>(1929)을 발표, 로마 중산계급의 퇴폐상을 예리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문학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파시즘 정권하에서는 창작의 자유가 박탈되어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해외에 머물렀다. 전쟁 중에는 침묵을 지켰으며 전후에는 <신평론>지(誌)를 창간하여 네오리얼리즘 이론의 일각을 지켰다. 저작으로서는 장·단편 소설을 속속 발표하였는데 장편으로는 중산계급을 배경으로 성(性), 자기 소외, 부조리 같은 철학적 주제를 전개하는 한편 <로마 이야기>(1954), 기타의 방대한 단편소설집에서는 갖가지 직업의 서민계급을 묘사하며, 결국 이상 두 가지 면을 상호 긴밀하게 연결지으면서 현대 로마의 사회상을 다각적이며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Euglnio Montale (1896-1981) 몬탈레는 웅카레티·콰시모도와 함께 이탈리아의 현대 3대 시인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제노바에서 태어나 처음엔 음악가가 되는 수업을 받았으나 22세에 문학 잡지 <프리모템포>지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현대적 구조, 자유스런 리듬, 그리고 혁신적 언어의 조화와 융합을 위한 운동의 하나인 에르메티즘(Ermetism)의 주역이 되어 파시즘의 언론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제한에 저항했다. 50년이 넘는 저작활동 중에 <기회>(1939), <오징어 뼈>(1925), <폭풍과 기타>(1956), 그리고 <71년과 72년의 일기> 등 몇 편을 출판했을 뿐이다. 1975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Umberto Eco (1932- ) 이탈리아 현대 작가·기호학자·철학자·역사학자. 1932년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현대의 가장 저명한 기호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볼로냐 대학 교수이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 박식한 사람이다. 에코 교수는 완벽한 본격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전세계 지식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켰으며, 기호학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푸코의 추>는 독자들의 찬사와 교황청의 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 <전날의 섬>을 종교시대를 마감하고 이성시대를 맞이하는 유럽의 정신적 혼란과 대탐험 시기에 가져온 세계관의 변혁 속에서 새롭게 눈뜬 인간들의 모순을 보여준다. 에코의 장편 소설로는 <장미의 이름>(1980)과 <푸코의 추>가 있고, <폭탄과 장군>(1988), <세 우주 비행사>(1988) 등 두 권의 동화가 있다. 또한 이론서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 문제>, <열린 작품>, <기호학 이론> 등 10여 권이 있다. <장미의 이름>은 40여 개의 국어로 번역되어 2천만 부가 넘게 팔렸고, 에디치 상(佛), 스토레가 상(伊) 등 각종 문학상을 석권했다.
-文學〔槪說〕 에스파냐 문학의 기원은 카스틸리아 왕국을 거점으로 하여 12세기부터 시작된다. 8세기초에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모로족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800년이나 소위 재정복전(再征服戰)을 벌였는데 이동안에 카스틸리아 왕국이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국토통일의 성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카스틸라어(語)가 에스파냐어의 동의어가 되었고, 또한 ‘카스틸라’ 문학이 에스파냐 문학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세기 초에 최초로 나타난 카스틸리아 문학, 즉 에스파냐 문학은 모로족과의 싸움을 영웅적으로 노래한 서사시 <나의 시드의 노래>(작자 미상)를 그 시발점으로 하였다. 13세기에 와서는 성직자 곤살로 데 베르세오가 시인으로서 에스파냐 문학사에 최초로 그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뒤를 이어 14세기에는 환 루이스가 <아름다운 사랑의 서(書)>를, 로페스 데 아알라가 <왕국의 시>를 각각 써서 에스파냐 문학의 터전을 굳건히 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뒤 문예부흥기를 맞이했다. 가르실라소 데 베가가 서정시인으로서 불멸의 시작들을 남겼고 유명한 희곡체 소설 <라 셀레스티나>(작자 페르난도 데 로하스)도 이때 햇빛을 보았다. <라 셀레스티나>는 실로 에스파냐의 <춘향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에스파냐 민중의 도덕적 기질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16세기와 17세기는 에스파냐 문학사상 ‘항금세기’라 불리울 만큼 그 문학은 전성기에 달했다. 시에서는 공고라, 에레라 같은 불세출의 대시인들이 배출되었고 희곡에는 무려 22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한 자연의 괴물 로페 데 베가를 위시하여 돈 환을 창조한 티르소 데 몰리나, 에스파냐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금세기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돈키호테>라는 특이한 인물이 세르반테스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세계문학사에 크게 영향을 끼친 피카레스크 소설(惡人小說)도 이때에 나타났으며, 피카레스크 소설의 대표작인 <라사릴료 데 토르메스의 일생>(작자 미상)는 지금까지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또 이때에 신비주의 문학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성녀(聖女) 테레사, 성(聖) 환 데라 크루스 등이 크게 이름을 남기고 있다. 황금세기가 물러간 다음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에스파냐 문학은 명실공히 쇠퇴기를 맞이했다. 정치 문화를 비롯하여 문학 등이 철저할 만큼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주체성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19세기가 들어서면서 낭만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에스파냐 문학은 재빨리 주지적(主知的)인 고전주의, 다시 말해서 신고전주의를 탈피하고 자아를 부르짖으면서 격렬한 감정 속으로 뛰어 들었다. <돈 알바로 또는 운명의 힘>을 쓴 낭만파의 거두 앙헬 데 사이베드라를 위시하여 에스파냐의 바이런이라고 불리는 에스프론세다 등이 문학적 기적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한때를 풍미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그 시대의 과학 만능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문학이 성행했다. 국민소설의 창시자인 페레스 갈도스를 위시하여 환 발레라, 로페스 데 아얄라,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등이 에스파냐 소설의 황금탑을 이룩하였다. 시에서는 아들포 데 베켈이 서정시로서 불멸의 명성을 남기었다. 이때에 자연주의 문학도 파르도 바산, 팔리시오 발데스 등에 의해 에스파냐에 소개되었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그 까닭은 감정이 강한 에스파냐인(人)들에게 자연주의 문학 같은 것이 생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두 조류의 문학운동이 일어났다. 즉 ‘모더니즘’(근대주의)과 ‘98년 사조(思潮)’이다. 모더니즘은 니카라과의 출신인 루벤 다리오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서 개성의 우위성과 이를 추구하는 순수한 문학운동인데 반해 ‘98년 사조’는 예술과 사상 방면에 걸쳐 당시의 정치적 쇠퇴기에 처해 있던 에스파냐의 비운을 극복하기 위한 애국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우나무노, 오르테가 이 가셋아소린 등은 철학자로서 ‘98년 사조’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에도 뛰어난 소설가들이 배출되었는데 <묵시록의 네 기사>의 작자 블라스코 이바네스를 비롯하여 피오 바로하, 바에 엉클란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희곡부분에서는 1905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에체가라이와 19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신토, 베나벤테가 각각 극작가로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으며 시에서는 안토니, 마챠도, 가르시아 데 로르카, 환 라몬, 히메네스(195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전통적인 에스파냐의 서정시를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에스파냐 내란(1936-1939)은 에스파냐 문학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어 놓았다. 전후에 나타난 작가들은 ‘98년 사조’에 속하는 작가들이 보여준 열의와 역량에는 불급하지만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재질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카밀로 호세 셀라는 전후의 참담한 모습을 그린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가족>을 통하여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애독되고 있는데 평론가들은 셀라를 전후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류작가인 카르멘 라포레는 <나다(아무렇지도 않다)>라는 작품을 24세에 발표하여 문단을 놀라게 하였고, 그 외에도 안나 마투테미겔 델리베스 등이 각각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희곡에서는 알레한드로 카소나를 첫째로 손꼽을 수 있겠고, 시에서는 헤라르도 디에고 알레익산드레, 다만소 알론소 등이 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전후에 속하는 작가들은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내파와 해외파이다. 국내파는 대부분이 전후에 문학활동을 한 이들이고 해외파는 전전(前戰)에 작가생활을 하다가 내란을 통하여 해외로 망명한 자들이다. 국외로 망명한 작가들은 계속하여 망명지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는데 대표적으로 소설가 프란시스코 아얄라와 라몬 센데르, 극작가 알레한드로 카소나 등을 들 수 있다. <張 鮮 影>
中世-文學 중세의 문학을 특징상으로 크게 구분한다면 12세기는 서사시의 시대, 13세기는 산문 확립의 시대, 14세기는 중세 최대의 시인 이타의 수석사제인 환 루이스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국토 회복운동이라는 그리스도 교도와 이슬람 교도의 영속적인 전쟁상태하에서 영웅들의 위업을 높이 찬양하는 서사시가 발생하고 또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2세기 중엽의 <나의 시드의 노래>이다. 한편 성직자·지식인에 의한 ‘메스데르 데 클레레시아’라는 시파가 종교적인 것, 또는 고대의 여러 사건들을 노래했다. 13세기의 시인 곤살로 데 베르세오(1195-1268)는 이 시파에 속하여 있으면서 카스틸라의 최초의 시인으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산문 분야에서는 13세기 후반에 알폰소 현왕(1221-84)이 <칠부법전(七部法典)>의 작성, <대연대기>의 편집 등, 산문의 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 14세기에 들어와서는 돈 환 마누엘(1281-1348?)의 우화집 <루카노르 백작>이 있는데 셰익스피어, 안데르센의 작품원형이라고 하는 우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비교문학상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와 거의 같은 시대의 시인 환 루이스는 <아름다운 사랑의 서>의 작자로서 중세문학을 대표한다.
Poema del Cid (1140?) 카스틸라어(語)에 의한 문학으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 1070년경 활약한 국민적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즉 시드 칸페아도르의 위업을 찬양한 무훈시(武勳詩). 시드라는 말은 모로인(人)들의 주군(主君)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호칭이다. 이 영웅의 무용·명예·신앙·충성·가족애·동지애를 사실(史實)과 전설을 교묘하게 혼합시켜 노래하고 있다.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사시인데 <나의 시드의 노래>가 그 내용에 있어서 훨씬 현실적이며, 표현형식에 있어 시로서 어느 정도 갖추어지지 않은 대신 오히려 소박하고 힘차 에스파냐 문학의 특징인 사실성(寫實性)이 이미 여기에 나타나 있다.
Juan Ruiz (1283-1350?) 에스파냐 시인. 그의 일생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르카라 데 에나레스에서 출생하여 구아다라하라와 트레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이타의 수석사제가 되었다. 이유는 불명하지만 13년 동안 옥중생활을 했다고도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아름다운 사랑의 서>뿐이다. 내용이나 그 형식에 있어 아주 잡다한 운문인데 작자 자신의 연애 편력을 주제로 한 자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세태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풍자와 해학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15세기 말의 <라 셀레스티나>와 함께 ‘피카레스크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다.
-文學 15세기 에스파냐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인쇄기의 발명이나 카스틸라어(語)의 표준어화(化)에 따라서 다음의 ‘황금세기’ 개화의 실마리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 문학작품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몇 개의 <시가집>이다. 이는 당시의 서사시를 모은 것이다. 신틸라나 후작(1398-1458)은 민요풍의 아름다운 서사시를 만들었고, 환데 메나(1411-56)는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거대한 작품 <미궁(迷宮)>을 남기고 있다. 호르헤 만리케(1440?-79)의 <부친 돈 로드리고의 애도가>(43편)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한다. 종전의 무훈시가 민중 사이에서 ‘로망세’로서 발달하여 14세기 후반에 가서 최성기에 이르렀다. 연극에 있어서는 환 델 엔시나(1468-1529?)가 15세기 말에 교회로부터 연극을 해방 독립시켜, 질 비센테(1465?-1537?)와 토레스 나로(?-1524)가 발전시켰다. 이 세기 최대의 문학작품은 <라 셀레스티나>이다.
La Celestina (현존하는 초판 1499) 작자는 개종한 유대인 페르난도 데 로하스(?-1541)라고 하며 올바른 제명은 <카리스트와 메리베아의 비희극(悲喜劇)>. 줄거리는 메리베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카리스트가 간계에 능한 노파 셀레스티나에게 사랑의 청부를 의뢰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냉엄한 리얼리즘에 의한 최고 걸작으로서 ‘피카레스크 소설’의 원류가 되었다.
黃金世紀-文學 정치적으로 에스파냐는 16세기의 부흥과 17세기의 쇠퇴라는 곡선을 그리고 있으나 문학사적으로 본다면 이 두 세기는 ‘황금세기’라고 불리며 특히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중엽에 걸쳐 절정을 이루어 뛰어난 시인·작가가 나타났다. 서사시 분야에서는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1501-36), 루이스 데 레온(1527-91), 페르난도 데 에레라(1534-97) 등 유명한 시인이 많고 그 중에서도 루이스 데 공고라는 에스파냐 최고 시인의 한 사람이다. 신대륙의 정복을 노래한 알론소 데 에르실라(1533-94)의 <라 아라우카나>는 대표적인 서사시다. 이 시대의 새로운 연극은 로페 데 루에다(1510-65)가 시작하여 환 데 라 쿠에바(1550-1610?)가 그 뒤를 이었고, 이어서 에스파냐 고전극의 네 거장에 의해 보기좋게 개화되었다. 로페 데 베가, 티르소 데 몰리나, 루이스 데 알라르콘, 그리고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이 그들이다. 소설에서는 <기사도 이야기>가 16세기 전반에 성황을 이루었고 도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1520?-61?)의 <디아나(Diana)>와 같은 ‘목인(牧人) 소설’도 유행했다. 에스파냐에서 발생한 특이한 문학양식 ‘피카레스크 소설(惡者小說)’은 16세기 중엽의 <라살릴료 데 토르메스의 일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에는 마테오 알레만(1547-1614?)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의 일생>, 케베도의 <엘 부스콘>, 비센테 에스피넬(1550-1624)의 <하인 마르코스 데 오브레곤의 일생>, 루이스 베레스 데 게바라(1579-1644)의 <절름발이 악마> 등 일련의 걸작들이 나타났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부터 근대소설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이 작품의 제1부가 1605년, 제2부가 1615년에 출판되었다. 이 밖에 산문에 있어서는 안토니오 데 게바라(1481?-1545)가 영국에 있어서 소위 유피즘(미사여구로 이어진 수식어가 많은 문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환 데 바르데스(?-1541)의 <언어에 있어서의 대화>, 케베도의 <사랑>, 발타사르 그라시안(1601-58)의 <비평쟁이>는 각각 개성적인 작품이다. 또 신(新)대륙의 발견·탐험·정복에 수반된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지만 콜럼버스, 곤사로 페르난데스 데고마라, 베르나르 디아스 델카스틸료, 호세 데 아코스타 등의 기록이 중요하다. 끝으로 종교개혁과 반(反)개혁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의 성직자들의 ‘신비주의’는 특색있는 문학을 ‘황금세기’에 남기고 있다. 루이스 데 그라나다, 산타 테레사 데 헤수스, 루이스 데 레온, 산 환 데라 쿠르스 등이 신비주의 작가를 대표하고 있다.
Lazarillo de Tormes (초판 1554) 작자 불명. 에스파냐가 낳은 특이한 문학 ‘피카레스크 소설’의 최초 작품. 천하게 태어난 소년 라사로가 마치 간지(奸智)의 덩어리 같은 장님 거지, 가난한 승려(僧侶), 무일푼이면서 거만하기만 한 양반 등, 사회의 저변에서 생활하는 자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모진 고생을 한끝에 나중에는 시(市)의 포고령을 전달하는 역을 맡게 되어 높은 승려와 불미스러운 관계가 있다고 소문이 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를 최고의 출세, 다시없는 행운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 당시 유행하고 있던 기사도 이야기의 영웅들이 높은 가문과 혁혁한 무훈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 라사로는 자기의 천한 성장과정과 일상생활에 관한 일만을 이야기한다. 담담한 서술 가운데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에 신랄한 풍자를 담아서 묘사하고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최고 걸작.
Miguel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에스파냐 작가.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서 알카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부정규적인 교육을 받았다. 1569년 이탈리아에 건너가 어느 추기경 밑에서 일을 했다. 그 다음해 병사(兵士)가 되어 그 다음 다음해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 왼손이 불구가 되었으나 그는 일생을 통해 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1575년 튀니스 원정에서 귀국하는 도중 해적에게 습격을 받아 알제리에서 포로생활을 5년간 계속해서 그동안 용감하게 행동하였다. 1580년 자유의 몸이 되어 귀국했으나 냉대를 받아 환멸을 느꼈다. 극작(劇作)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 1584년 결혼했으나 행복하지는 못했다. 1585년 소설 <라 갈라테아>를 발표했다. 그 후 무적함대의 식량조달계라든가 징세역원 등에 종사했다. 1592년 승회(僧會)의 식량을 부당하게 징발했다는 이유로 파문되었고, 1597년과 1602년 공무상의 실책으로 투옥되었다. 1605년 <돈키호테>의 제1부가 출판되었다. 그 후 <모범소설집>(1613), <파르나소산(山)여행>(1614), <여덟 개의 코미디어와 엔트레메스(幕間喜劇)>(1615)를 발표. <돈키호테>의 제2부는 1615년에 출판되었다. 그 다음해 4월 23일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1617년 소설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고난>이 출판되었다. 세르반테스의 일생은 만년을 제외하고는 실의와 환멸의 연속이었으나 그는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의 작자로서 세계 문학사상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Don Quixote (제1부 1605, 제2부 1615) 세르반테스의 소설. 정확한 제목은 <재치 넘치는 기사 돈키호테 데 라 만차>. 세르반테스가 제1부를 발표한 것은 이미 60세가 가까워서였다. 작품은 곧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실패의 연속이었던 인생의 만년에 가서 작자는 겨우 영광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1614년 아베리아네다란 사람이 <돈키호테>의 속편을 출판하여 크게 분개한 세르반테스는 제2부를 재빨리 썼다. 그것은 그가 죽은 바로 전년(前年)이었다. 이 소설을 쓴 최초의 목적은 당시 유행됐던 ‘기사도 이야기’를 희극화시켜 이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작자는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집필을 계속해 나가는 도중에 작자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체험을 삽입한 대하소설(大河小說)이 되었던 것이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주변에 전개되는 기묘한 사건을 통하여 인생에 있어서의 이상과 현실의 상극이 너무나도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단순한 해학소설 이상의 진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고, 특히 스탕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열렬한 찬미자였다.
Luis de Gongora (1561-1627)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시인. 콜도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분방한 생활을 보냈다. 고향으로 돌아와 승적(僧籍)에 들어가, 나중에는 왕실 예배당 사제에 임명되어 수도에서 살았다. 그는 소위 ‘공고리즘’을 완성시킨 위대한 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작품은 두 개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민중적인 주제를 간결하고 우아한 형식으로 표현한 초기 작품 <로망세>나 <소곡>으로 이는 당시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 그리고 <고수(孤愁)>, 이 두 작품을 포함하는 후기의 작품으로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사법을 구사하여 쓴 난해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찬사와 비난이 서로 엇갈렸다. 그러나 그 영향은 절대적이었고 후에 프랑스의 상징파나 에스파냐의 근대파 시인들이 ‘공고리즘’을 재평가하게 된 이후 그 위치는 확고하게 되었다.
Francisco de Quevedo (1580-1645)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작가. 시대의 양상을 체현(體現)한 것처럼 복잡하고 모순에 찬 성격의 천재적 작가로 여러 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했다. 우선 시 분야에서는 엄격한 소네트가 있는 한편 시닉하고 자유분방한 소곡으로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산문 분야에서는 철학자·신학자·모랄리스트·비평가·소설가 등 다양했으며 그 작품에 있어서는 특히 <꿈>과 <엘 부스콘>이 유명하다. 전자는 풍자로 채워진 산문집으로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인물·풍속·사건 등을 야유하고 있다. 후자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걸작. ‘부스콘’이란 말은 사기꾼 정도의 의미에 해당된다.
Lope de Vega (1561-1627)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국민연극(國民演劇) 창시자·시인. 마드리드 태생. 무적함대(無敵艦隊)를 타기도 하고 화려한 연애편력을 갖기도 하여, 그 일생은 파란곡절로 점철되어 있으나 극작가로서 또 시인으로서 많은 작품을 남겨 ‘재지(才智)의 불사조’라고 불리었다. 그는 일생 동안 1800편에 달하는 코메디와 400편의 성찬 신비극(聖餐神秘劇)을 썼다고 하나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전자가 436편, 후자가 43편뿐이다. 코메디라는 것은 일종의 비희극으로 연극은 자연의 이면성(二面性)에 속해 있어서 비극과 희극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푸엔테 오베후나> <국왕만이 최상의 판관> 등이다.
Tirso de Molina (1584?-1648) 에스파냐 극작가. 본명은 가브리엘 텔레스.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여 메르세데스 수도회사(修道會士)에서 관구장을 지냈다. 4백 편의 연극을 썼다고 하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86편. 특히 <세빌랴의 난봉꾼과 돌의 초대객>은 방탕아 돈 환을 처음으로 문학에 등장시켰던 극으로 유명하다. 여성을 차례로 유혹하곤 버린다는 테마와 묘지의 석상(石像)이 돈 환을 초대하여 복수한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몰리에르, 메리메, 바이런, 모차르트 등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Juan Ruiz de Alarcon (1581?-1639) 에스파냐 극작가. ‘황금세기’의 4대 극작가의 한 사람. 멕시코에서 출생.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 신대륙 행정원의 기록관이 되었다. 36편의 극작품은 성격창조가 특출하며 이해하기 쉽고 평이하고 간명한 운문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의아한 진실>이 대표작. 선천적 꼽추였고 그를 질투하는 자들로부터 비열한 중상을 받았다.
Pedro Carlderon de la Barca (1600-1681) 에스파냐 극작가. ‘황금세기’의 4대 극작가의 한 사람. 마드리드에서 출생.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하고 궁정(宮廷)시인이 되었다. 그의 방대한 양의 작품 특징은 카톨릭에의 절대적 귀의(歸依), 국왕에의 충성, 극단적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명예감정(名譽感情)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유형적(類型的)이었으나 로페데 베가의 뒤를 물려받아 오랫동안 연극계에 군림했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황금세기는 그 막을 내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살라메아 촌장> <인생은 꿈> 등이 있는데 19세기에 독일 낭만파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世紀文學 1681년 칼데론의 죽음과 함께 ‘황금세기’의 영광은 끝났다. 18세기초 에스파냐에는 부르봉가(家) 출신의 국왕이 들어와서, 에스파냐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완전히 프랑스에 종속되었다. 문예사조의 주류를 이룬 ‘신(新)고전주의’도 프랑스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비교적 주목을 끌었던 작가로서는 연극에 <아가씨가 승낙할 때>의 작자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짧은 소극(笑劇)으로 실생활을 그린 라몬 데 라 크루스와 산문에서는 <모로코 통신>의 호세 카달소 등이 있고 이 밖에 우화시(寓話詩)를 쓴 사마니에고, 이리아르테 등이 있다.
-世紀- 서(西)유럽에 일어난 로만티시즘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에스파냐에 도입되었다. 페르난드 7세의 독재정치를 피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국외로 망명했는데 그들은 영국이나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또는 그곳에 체재하면서 그 나라의 문예와 사상을 익혔다. 그리하여 후에 귀국함과 동시에 그들은 에스파냐에 있어서의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자기 나라의 옛 전통에 눈을 돌렸다. 예술에 있어서의 자유의 관념, 힘찬 문체, 지방색에의 애착, 그것은 즉 18세기에서는 잊혀졌던 것의 회복이었다. 에스파냐의 전통을 낭만주의에서 찾으려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로만티시즘은 겨우 15년 만에 쇠퇴하고 만다. 로만티시즘 작가들이 보여 준 특성은 다른 유럽 사람들이 목표로 한 것과 공통되지만 원래 외국의 영향은 그 자체가 절대로 단일한 것이 아니다. 에스파냐 로만티시즘은 세 가지의 과정을 거쳤다. 첫번째 시기는 라라(1809-37)나 마르티네스 데 라 로사(1787-1862)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양식에의 과도기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리바스공(公)이나 에스프론세다를 중심으로 한 열광적 고양(高揚)의 시기이며, 세 번째는 소릴라에 의해 대표되는 로만티시즘의 에스파냐적 성숙기이다. 연대적으로는 페르난드 7세가 죽은 1833년 전후에서 19세기 중엽까지를 로만티시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Jos Espronceda (1808-1842) 에스파냐 시인. 마드리드에서 교육을 받은 후 정치범으로 금고형(禁錮刑)을 받았으나 포르투갈에 도망쳐 테레사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그 여자를 따라 런던으로 건너갔다. 파리에서는 혁명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832년에 특사(特赦)되어 에스파냐에 돌아와 공화주의 논설가로서 활약하기도 했으며 국회의원에도 선출되었다. 낭만주의 시인답게 혁명적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짧은 일생을 보냈는데 새로운 문학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에스프론세다의 자질을 어느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대투우장’의 정열에 비하기도 했다. 에스파냐 낭만파 가운데서도 다채로운 사랑과 혁명과 페시미즘의 시인이었다. <서정시집>(1840)은 그가 죽기 전 2년 동안에 그의 명성을 높였다. 서사시 <악마 현세>에서의 <테레사에게 바치는 노래>는 잘 알려져 있다.
Jose Zorrilla (1817-1893) 에스파냐의 시인·극작가. 일찍부터 시나 희곡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평범한 생활에 싫증을 느껴 프랑스, 멕시코 등지로 방랑했다. 에스파냐의 낭만주의 성숙기에 활약했으며 그의 시나 희곡은 많은 국민대중들에게 공감을 갖게 했다. ‘조국과 종교, 이 두 개야말로 최고의 이념’이라 부르짖었고 작품의 음악성은 하나의 큰 특색이기는 했으나 너무나도 운율적인 점 때문에 공허하다는 불만도 들었다. 시작(詩作)에 있어서는 국토회복을 취급한 <그라나다>를 비롯하여 <전설 시집>이 있다. 그를 국민적 극시인(劇詩人)으로 만든 것은 <돈 환 테노리오>의 성공이었다. 희곡 <돈 환 테노리오>는 티르소데 몰리나에 의해 윤색된 전설상의 인물 돈 환을 무대 위에 재등장시켜 국민적 희곡의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밖에 희곡으로는 <구둣방 주인과 국왕> <고트족의 단검> 등이 있다.
Gustavo Adolfo Becquel (1836-1870) 에스파냐 시인.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참된 내용을 다시 새롭게 썼다고도 할 수 있는, 후기 낭만파를 대표하는 사람. 그의 서정은 내적이며 섬세하고, 그리고 가볍고 음악적으로 차분하게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남부의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고 마드리드에 가서 가정적으로도 불우한 생활을 보냈으며 그의 <서정 소곡집>의 1편은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되었다.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단순한 형식이나 표현은 유럽의 낭만주의보다도 에스파냐 고유의 민요 전통을 많이 전해받고 있다. 그의 서사시는 널리 애창되고 산문집 <이야기>(1864)에는 독일풍의 환상으로 충만되어 있다.
生活寫生文學 생활·풍속·인물의 모든 사생문학은 17세기의 에스파냐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세르반테스의 <린코네티와 코르타딜료>도 그 한 예이다. 그것이 하나의 문학양식으로 다시 18세기 말에 일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최성기에 들어섰다. 당시의 절대주의적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수반되는 여러 사정도 취급하고 있다고들 한다. 낭만주의와의 관련은 지방이나 특정 사회의 인물이나 풍속 묘사 등에서도 생각될 수 있고, 또 사실주의에도 연결되어 있다. 에세이나 스케치 형식으로 잡지나 신문에 게재된 것이 처음이었다. 메소네로 로마네스(1803-82)의 <마드리드의 전망(展望)>은 수도의 생활을 포착하여 풍자적으로 썼다. 이어서 마리아노 호세 데 라라(1809-37)의 날카로운 비평 솜씨는 단순한 ‘생활 사생문학’이라기보다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문명비평의 문학을 만들었다.
-世紀- 로만티시즘의 쇠퇴는 뜻밖에도 빨리 찾아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리얼리즘으로 방향이 잡혀갔다. ‘생활 사생문학’이 수필이나 스케치 형식으로 먼저 유행하고 다시 이에 줄거리를 덧붙이는 말하자면 소설형식을 취하게 된다. 로만티시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에스파냐의 근대문학이 겨우 시작되려는 때의 선구자가 페르난 카발레로이며 다시 그것을 한 걸음 진보시킨 것이 발레라였다. 희곡에서는 19세기 중엽을 지나 낭만주의 작가가 계속하여 있었는데 이와 함께 젊은 극작가들은 무대를 중세에서 현대로 옮겨 사실(寫實)에의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반적인 경향은 여전히 감상주의적이고 과장된 작품이 그 대부분이었다.
Pedro Antonio de Alarcon y Ariza (1833-1891) 에스파냐 소설가. 젊었을 때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원병으로서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 건너갔다. 그 체험으로 아프리카 르포르타주를 썼다. 19세기의 지방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였으며 낭만적 정열을 느끼게 하는 묘사에 객관성도 잃지 않았다. 명쾌하고 흐르는 듯한 문장 속에 피카레스크적인 흥미와 자연스런 대화의 즐거움을 지닌 소설로 독자에게 환영을 받았다. 민화(民話)에서 소재를 얻은 <삼각모자>(1874)의 유머는 작가로서 이미 원숙해졌을 때의 것이다. <추문(醜聞)>(1875), <보르의 소년>(1880), <호랑이 대장>(1880) 등, 장·단편의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Fernan Caballero (1796-1877) 에스파냐 여류작가. 본명은 세실리아 벨 데 파벨. 독일인을 아버지로 하여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문학에의 관심은 양친, 특히 부친의 영향을 받은 점이 많다. 성장하여 이주한 안달루시아의 민화(民話)나 민요에 흥미를 갖고 이 방면에 대한 저작을 남기고 있다. 대표작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생활을 그린 소설 <갈매기> <아르바레다가(家)>로, 이들 작품에 의해 낭만주의적 소재에서 사실(寫實)에의 방향을 찾았고, 여성의 예리한 감수성에 의한 관찰과 묘사는 생활 사생문학 소설을 만들어내서, 에스파냐 근대소설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Juan Valera (1824-1905) 에스파냐 소설가. 상류가정에 태어나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서 활약, 미국 주재 공사로 일했다. 풍부한 교양을 배경으로 한 평론의 저작도 많았지만 소설집필이 가장 큰 일이었을 것이다. 대표작인 <페피타 히메네스>(1874)는 성직자를 지망하고 있는 청년이 야심적인 아름다운 미망인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서간체(書簡體) 소설이다. <도냐 루스>(1879)는 중년의 성직자에 대한 젊은 여성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그렸는데 전자의, 즉 육체의 승리에 대해 후자는 정신의 승리를 그려 아주 섬세한 심리탐구에 성공, 격조 높은 문장과 인간 의지에의 깊은 통찰은 새롭고 독자적인 근대소설을 만들어냈다. <재치있는 여파 파니타>(1895)는 만년의 작품.
Benito Perez Galdos (1843-1920) 에스파냐 소설가. 극작가로서 출발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소설로 전향하여 에스파냐 근대작가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유명한 문학자 가운데서도 가장 풍부한 창작력에 뛰어난 다작가(多作家)로 알려져 있다. <국민 삽화집> 46권은 19세기의 역사에서 소재를 얻은 규모가 큰 소설로 그 중에 있는 <트라팔가르>(1873), <헤로나>는 걸작으로 되어 있다. 역사상의 사건이 객관적인 필치로 묘사되어 전투나 폭동의 장면도 생생하다. 고증(考證)이 치밀하여 사실(寫實)의 필력(筆力)을 자랑하고 있다. 역사소설 이외에 ‘현대’를 취급한 사회소설이다. 종교적 편집(偏執)과 교권주의에 맞서는 <도냐 페르펙타>(1876)나 <그로리아>(1887)가 그것이다. <포르투나타와 하신타>(1887)는 불행한 결혼을 한 두 여자를 사회적인 눈으로 관찰한 장편으로 원숙기의 사실소설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상의 개종(改宗)을 테마로 한 <안헤르 게라>(1891)는 갈도스의 톨스토이적인 일면을 엿보이게 한 장편이며, 갈도스는 19세기의 리얼리즘을 힘찬 필치로 20세기까지 가져온 최대의 작가였다.
-年思潮 에스파냐 문학은 두 개의 운동으로 20세기를 맞이했다. 현대의 문학을 전망할 때 이 두개의 운동은 아직까지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는 ‘모더니즘’(근대주의), 그리고 또 하나는 ‘98년 사조’이다. ‘모더니즘’은 미를 추구하는 ‘예술’파, ‘98년사조’는 사상·정치·예술에 걸친 것을 말한다. ‘모더니즘’의 예술은 감각에 의해 생기는 내재적인 영원한 아름다움의 창조를 위해 형식을 닦고 과거의 양식을 종합하여 구성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98년 사조’는 초절적(超絶的)으로 이 점에 있어 ‘모더니즘’에 대립하고 있다. ‘98년’이란 에스파냐가 대미전쟁(對美戰爭)에서 패배한 1898년을 뜻하는 것으로 황폐된 조국의 특이한 환경 속에서의 문학의 작용 내지 반작용적인 공명이었다. 전시대(前時代)를 부정하고 고전을 다시 평가하고 유럽에 눈을 돌림과 동시에 지방의 생활에 새로운 의의를 찾으려 했던 청년들의 혁신운동이었다. ‘모더니즘’ 활동은 니카라과의 시인인 루벤 다리오의 영향이 컸고 ‘98년’의 사상적 중심은 우나무노였다.
Miguel de Unamuno (1864-1936) 에스파냐 사상가·시인·극작가·소설가. 살라망카 대학의 학장을 지낸 철학자로 소위 ‘98년대’ 작가이며 사상가였다. 사색의 태도는 단순한 순리(純理)의 추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살과 뼈의’ 인간을 그 기반으로 하고 인간의 내부의식을 중요시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생의 비극적 의미>(1913)와 시, 그리고 <안개>(1914)와 같은 소설에서 신앙과 이성, 생명과 사상, 문화와 문명의 상극(相克)을 해명하고 <돈키호테와 산초>(1905)에서는 인생의 외적 행위를 논하여 돈키호테의 용기를 찬양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고민>(1925)은 영원의 혼(魂)을 갈망하는 현대 에스파냐의 정신적 고민을 논했는데 이것들은 우나무노의 중심사상을 나타내는 주요 저작들이다. 시·소설·희곡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우나무노는 재능을 나타냈으며 소설이나 시는 본질적으로 그의 철학의 구현이었다. 소설 중의 인물이 작자의 사상을 말하고 철학적 대화를 통하여 그 묘사를 극도로 정리하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을 썼다. <전쟁 속의 평화>(1897), <죽음의 거울>(1913), <안개>(1914) 등 작품이 많다. 우나무노는 실존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사조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우나무노는 에스파냐 내전(1936)이 시작된 날 사망했다.
Azorin (1874-1967) 에스파냐 소설가·평론가·본명은 호세 마르티네스 루이스. ‘98년 사조’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동남 해안에서 태어나 밝고 유연한 지중해적 성격은 감성을 낳게 했다. 짧은 문장의 단순한 문체도 그러한 감성의 소산이었다. 일상적인 하찮은 일이나 인물에 대한 사랑을 소설로 형성시켰고 모든 것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 정신적 전통의 재건에 힘을 썼다. <의사>(1902) <도냐 이네스>(1925) 등의 소설 이외에 <문학적 가치>(1914) <고전의 여백에>(1915) 등 평론집도 많다.
P o Baroja (1872-1956) 에스파냐 소설가. 페레스 갈도스 이후 20세기 전반(前半)의 대표적인 에스파냐 작가로 다작의 인물이었다. 바로하 소설의 본질은 플롯이나 성격 분석, 또는 그 줄거리의 형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줄거리의 흐름이나 움직임이 먼저 앞선다. 그리하여 작자 자신은 거리를 두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향토인 바스크 지방을 소재로 한 <아이스고리가(家)>(1900)나 <모험아 사라카인>(1909) 등 초기의 작품으로부터, 하급사회를 취급한 <인생의 투쟁>(1904), 역사소설 <행동가의 회상>(1935), 내적생활의 <환상적 생활>(1902)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98년 사조’작가의 한 사람인 바로하는 에스파냐 퇴폐를 냉정히 관찰한 비판자였다.
Antonio Machado (1875-1939) 에스파냐 시인. ‘98년 사조’ 작가의 한 사람으로 20세기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앙부의 카스틸라 지방의 풍토에 공감을 느껴 <카스틸라의 벌판>(1912)을 썼고, 이 작품에서는 그의 자연에의 애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극히 소극적이고 고독과 사색을 좋아했다. 초기 시집 <적요(寂寥)>(1903)는 지나칠 정도로 장식되지 않은 냉철한 작품으로 가사상태(假死狀態)의 에스파냐 현실에 분노를 터뜨렸다. 에스파냐 내란 후에는 프랑스에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형인 마누엘도 같은 시인이었는데, 동생과는 작풍에 있어서 대조적이었다.
Juan Ramon Jimenez (1881-1958) 에스파냐 시인. 에스파냐의 남단 모게르에서 출생한 그의 작품에는 안달루시아의 지방적 냄새는 거의 없었다. 초기의 <수심에 찬 아리아>(1903), <머나먼 정원>(1905), <엘레지>(1908) 등은 모더니즘 시인답게 자연이나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을 반영한 시집이다. 음울하면서도 화려하다고도 할 수 있는 소리나 색채로 충만된 시풍은 1916년경부터 시인들이 말한 소위 ‘벗은 시’에의 전개를 의미한다. 운율이나 형식 등 모든 외적인 장식을 버리고 순수한 형태를 자유시(自由詩)에서 구했다. <신혼 시인의 일기>(1917), <돌과 하늘>(1919) 이후의 작품이 곧 그것이다. 장편 산문시 <프라테로와 나>(1917)는 여러 나라의 국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195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얼마 안 가서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망했다.
Jacinto Benavente (1866-1954) 에스파냐 극작가. ‘모더니즘’과 ‘98년 사조’의 두 종류와 상관없이 전시대의 ‘생활 사생문학’을 연극을 통해 이어받은 극작가. 도시의 상류생활을 세련된 필치로 예리하게 풍자한 <지명인>(1896), 심리극 <사모님>(1908), 우화극 <조작된 이해(利害)>(1909) 등은 각기 분위기를 달리하는 작품이며 이 밖에 아동극에도 손을 대었다. <바다를 난 나비>(1926)는 대표작인 <조작된 이해>와 함께 외국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20세기 전반의 에스파냐 연극을 발전시켰으며 또한 연극의 대표적 작가로 1922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Vicente Blasco Ibanez (1867-1928) 에스파냐 소설가. 정치에 흥미를 갖고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 파란많은 청년기를 보냈으며 시종 왕정반대의 필봉을 굽히지 않았다. 졸라의 영향을 받아 발렌시아 지방에서 소재를 얻은 향토소설<갈대와 진흙>(1902), <농가>(1898)는 자연주의적인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들 향토소설에서 국내문제를 다룬 사회소설로 전향했으며 다시 유럽이나 남미(南美)를 무대로 한 말하자면 세계소설로 발전한다. <피와 모래>(1908)는 가끔 영화화되고 있으며, 특히 <묵시록의 네 기사>(1916) 등은 영화화되어 너무나 유명하다. 가끔 문장이 통속적이고 소설적 구성에도 약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그 상상력·표현력이 풍부하고 유창하여 세계의 독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Federico Garcia Lorca (1899-1936) 에스파냐 시인·극작가. 에스파냐의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표현했으며 향토인 안달루시아의 마을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노래했다. 최초의 <시의 책>(1927)에 이어 <집시시집>(1927)에서 그의 시는 성숙해졌다. 희곡 <동 페르린 프린의 사랑>(1933), <피의 결혼>(1933), <이에르마>(1934),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936) 등 전부 에스파냐 연극에 있어 혁신적인 것이었다. 1931년경, 이미 실험극장을 결성하여 여행을 했다. 작품도 실험적인 시도를 구사했으며 항상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시는 주제나 그 형식과 수법이 잡다하고 음악적·연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용어에 있어서는 어느 때는 철없이 보이고 어느 때는 신비한 베일에 싸여 있다. 에스파냐 내란이 일어났을 당시 최초에 살해를 당했다.
Rafael Alberti (1902-1999) 에스파냐 시인·극작가. 후기 모더니즘에 속한 시인 <육지의 뱃사공>(1925)으로 일찍부터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했으며 에스파냐 내란 때에 남미(南美)로 망명하여 아르헨티나에 정주했다. 초기에는 초현실주의 사상을 비롯한 여러가지 영향을 받으면서 늘 작품 속에 자기의 특질과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으나, 최근에는 구도적(求道的)인 작풍으로 전향하고 있다. 대표작을 스스로 <시>(1943) 한 권에 선정 수록하여 발표했다. 희곡으로는 <프라드 미술관의 전야(戰夜)>(1956) 등이 있다.
-年思潮以後-文學 알폰소 13세 치하의 에스파냐의 지식인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어떤 불만을 품고 있었다. ‘98년 사조’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25년 사조’의 젊은 작가·사상가의 배출이 바로 이 시기에 해당된다. 알폰소 13세의 부르봉 왕조는 1931년에 종막을 고하고 공화국이 수립된 후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공화국도 실패로 끝나고 결국 1939년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승리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25년 사조’의 사람들은 넓은 유럽적인 교양과 시야를 지니고 높은 비약에의 꿈을 안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낡은 것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전(前)시대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나 평가를 잊지는 않았으나 사상적으로 또는 예술에 있어서 가끔 대립되고 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1883-1955), 그레고리오 마라뇽(1887-1960),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1886-1963), 아메리코 카스트로(1885- ? ) 등은 이 연대 이후의 에스파냐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소설가로는 페레스 데 아알라(1881-1962)가 있고 그레게리아스라는 특이한 문학적 장르의 창시자 라몬 고메스 데라 세르나(1888-1963)도 이채로운 존재였다. ‘98년 사조’의 작가군에 있어서는 한쪽에 모더니즘 시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25년대’ 이후에는 ‘후기’모더니즘의 카테고리에 속한 시인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호르헤 길렌(1893-1984), 헤라르토 디에고(1896- ? ), 비센테 알렉산드레(1898- ? ) 등이 바로 이에 속하였다. 이들은 에스파냐 시단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한편 가르시아 로르카의 독자적인 예술적 경지는 해외에서 주목을 끌었다. 20세기 중엽 후기까지 생존하여 예술활동도 비교적 길었던 작가 바로하와 시인 히메네스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에 계속되는 ‘25년 사조’의 사람들도 이미 젊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현재 겨우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하게 되어 소설분야에서는 카밀로 호세 셀라(1916- )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운 시인들도 많이 탄생되어 1930년 이후의 시인으로서는 루이스 로사레스(1910- ), 호세 루이스 카노(1912- ), 라파엘 모라레스(1919- ), 호세미에로(1922- ) 등을 들 수 있다.
Jorge Guillen (1893-1984) 에스파냐 시인. 후기 모더니즘에 속하는 시인으로 20여 년에 걸쳐 수년마다 작품을 추가해 온 시집을 갖고 있다. 현실과 정신의 융합이라는 에스파냐 시인의 전통을 계승받아 그의 ‘순수시’는 고전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학문적 저서도 있다.
Pedro Salinas (1892-1951) 에스파냐 시인. 국내 또는 해외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했으며 살리나스의 시의 주제는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으나 그 작품에서는 낭만주의적 고민을 발견할 수 없다. 표현은 지적이며 무리가 없고 쉬운 현대어만을 사용했다. <전조(前兆)>(1923)가 처녀시집이며, 내란 때의 <사랑의 조리(條理)>(1936)와 그 이외의 다른 시집이 있다.
Vicente Aleixandre (1898- ? ) 에스파냐 시인.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알렉산드레의 시에서 결합하고 있다. 알렉산드레는 “시인은 예언자이며, 시는 인간 속의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주위에 많은 젊은 시인들이 모여 현재는 그 원로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마음의 역사>(1954) 이외에도 많은 시집이 있는데 그 형식에 있어서 장시가 많다.
Damaso Alonso (1898-1990) 에스파냐 시인. 유럽이나 미국에 대한 넓은 지식을 갖고 있으며, 시인인 동시에 세련된 학식을 가진 사람으로 현재 마드리드 대학 교수이다. 영미시(英美詩)의 번역도 있으며, 에스파냐 시의 연구 결과 <현대 에스파냐 시>(1952)를 저술했으며, 시집으로는 <도시의 시>(1921), <인간과 신>(1955) 등 수권이 있는데 깊은 성실과 감동을 전하고 있다.
Arturo Barea (1897-1957) 에스파냐 소설가. 어린시절에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이 어려워 독학을 했다. 에스파냐 내란을 극적으로 묘사한 <용기와 공포>(1938)를 발표한 후에 영국에 망명했다. 자서전인 3부작 <반역자 대장장이>는 처음에 영어로 발표, 그 후 남미에서 에스파냐어 판을 출판하고 이어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를 얻었다.
Ra-mon Perez de Ayala (1881-1962) 에스파냐 시인·소설가·비평가. 공화정부 때 대사로 영국에 주재했으며 그 후 아르헨티나에 망명한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시나 평론을 발표하고 있었는데 후에는 세련된 문장에 비꼬는 듯한 유머를 섞은 지적인 소설을 썼다. <시적 소설집>(1916), <벨라르미노와 아폴로니아>(1921), <호랑이 환>(1926)이 대표작이다.
Alejandro Casona (1903-1965) 에스파냐 극작가. 공화국시대에 <육지에 올라온 인어>(1934), <우리들의 나타차>(1936)를 발표한 후 아르헨티나에 망명했다. 이미 에스파냐에서 극작가로서 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아르헨티나에서도 <새벽부인>(1944), <나무들은 말라죽는다>(1949) 등 작품마다 평판이 대단하여 극장에서는 관객을 많이 모았다. 꿈과 현실의 보기좋은 결합과 조화, 이것이 카소나의 희곡이었다.
Ramon Jose Sender (1902-1982) 에스파냐 소설가. 1935년에 국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내란 후 미국에 망명하여 정주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독자를 갖고 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아프리카 군대생활의 체험보고(報告) <이만(Iman)>(1929)이 처녀작이며 <반격(反擊)>(1938)은 우수한 내전소설(內戰小說)의 하나이다. <새벽의 역사>(1942)는 소년생활과 감정의 기록이며 <아리아도나의 다섯 권의 서적>은 반(半)자서전 소설이다. 테마나 그 작풍에 있어서 한 작품마다 변화를 주었으며 사회와 인간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다룬 작가이다.
Camilo Jose Cela (1916-2002) 에스파냐 소설가. <파르쿠알 두아르테의 가족>(1941)은 엄격한 리얼리즘으로 우선 주목을 끌었으며 다시 내란 후의 마드리드의 서민생활을 음산한 터치로 묘사한 <벌집>(1951)으로 문명을 떨쳤고 현대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이 외에도 <금발의 여인>(1955), <풍차>(1956) 등의 소설이나 시·수필·기행문 등이 있다.
Juan Antonio de Zunzunegui (1902-1982) 에스파냐 소설가. 갈도스의 계보라 할 수 있는 에스파냐 리얼리즘 작가로 지나치게 관찰이 외면적이며 사실적이라는 비평도 있기는 하다. 최초의 장편은 <치리피>(1931)이고 이 외에 <파산>(1947), <지상선(至上善)>(1950),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1954) 등 마드리드나 빌바오를 묘사한 작품들은 주로 국내에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Carmen Laforet (1921- ) 에스파냐 여류작가. <나다(아무렇지도 않다)>(1944)는 바르셀로나에 이사를 해서 거주한 한 여성의 생활을 소박하고 생생하게 그린 작품인데 이 한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은 에스파냐 내란 이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나다르상(賞)을 수상했다. 특히 이 작품은 주인공인 평범한 한 여성의 인생을 내다보는 작자의 리얼리즘이 너무나 투철했던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새로운 여자>(1955)는 간통사건을 소재로 한 것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결국 첫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은 쓰지 못했다.
-文學 포르투갈 문학은 그 기원이 프로방스로부터 시작된다. 우선 서사시로 시작되는 최고(最古)의 것은 1189년의 것으로 음유시인(吟遊詩人) 파이오 소아레스 데 타베이로스의 서정적 연애시이다. 이때에 디니스 왕(王)을 비롯하여 많은 음유시인들이 배출되었다. 산문에서는 1192년의 <유산 분배의 서(書)>가 가장 오랜 문헌으로 이 밖에도 승려(僧侶)에 의한 성자의 언행록, 계보서(系譜書), 귀족 명부, 그리고 기사 이야기들이 있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에스파냐 시파에 속하는 궁정시가 유행되었으며 산문에 있어서는 궁정의 교훈적 산문과 로페스 등의 편년사(編年史)가 등장했다.
古典期 16세기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문학의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탈리아의 시형식(詩型式)을 도입한 시인 미란다, 국민극의 창시자 비센테, 묵가의 베르나르딘 리베이로, 그리고 포르투갈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大)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의 시성(詩聖) 카몽이스 등이 유명하다. 이 세기는 포르투갈이 해외로 발전된 시기였기 때문에 핀토 등의 탐험기·여행기·역사서 등이 저술되었으며 17세기에는 희곡에서 메로, 종교방면에서는 유명한 비에이라와 베르나데스가 이채를 띠었으며 18세기에서는 시인 보가제의 이름을 빼어놓을 수가 없다.
浪漫期 낭만주의시대에는 가레트, 에르쿨라노, 카스틸리오의 세 거장이 같은 시기에 탄생했다. 이 밖에 소설에서는 카스텔로 브랑코와 디니스가 주목된다. 1865년 이후를 사실주의시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운동의 중심은 시인 켄탈과 문호 케이로스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준케이로, 데우스, 브라가 등의 시인들도 있다. 또 고답파(高踏派)의 크레스포, 자연파의 베르데, 상징파의 에우제니오 데 카스트로 등이 있으며 동양의 일부를 소개한 수필가 모라이스의 존재도 잊을 수 없다.
-世紀 ‘근대주의’의 대표적 시인은 페소아, 소설에서는 아키리노 리베이로, 신사실주의 작가로는 페레이라 데 카스트로가 있으며 1950년 이후에는 루이스 등의 여류작가가 주목되고 있다.
Luis Vaz de Camoes (1525-1580) 포르투갈 시인. 출생지는 리스본인데 면학(勉學) 때문에 학문의 도시 코임브라에 1542년까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돈 조웅 3세의 궁정에서 일을 보았는데 1547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에서 벌어진 무어인(人)과의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그 후 고국에 돌아갔는데 1552년 궁정의 한 청년에게 상처를 입혀 체포되었다. 그 이듬해 석방되어 인도에 건너갔다. 그런데 이 투옥 중에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1572) 제1편을 썼다. 고아에서는 각지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1558년에 마카오에서 부재자와 사망자의 재산관리인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다시 <우스 루지아다스>를 6편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직무태만으로 구속되어 고아에 호송되던 도중, 메콩강(江) 하류에서 조난당했다. 이때에 <우스 루지아다스>의 초고를 한 손에 쥔 채로 거센 물결을 헤엄쳐 나왔다고 한다. 고아에서는 다시 체포되었으나 1567년 고국을 향해 출발하여 리스본에 도착한 것은 1569년이었고 그 후 3년이 지난 다음 <우스 루지아다스>가 출판되었다.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지급받았지만 극도의 빈곤으로 신병을 앓는 중에 리스본에서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불후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우스 루지아다스>로서, 제명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酒神) 박쿠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인(人), 즉 포르투갈인(人)이라는 뜻인 것이다. 인도 항로 발견과 바스크 다 가마의 첫번째 원정을 축(軸)으로 한 극적인 줄거리를 부각시켜 포트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어 그 영웅적 위업을 높이 찬양하는 애국적 대서사시이다. 왕년의 대국 포르투갈의 위대함과 작자의 애국심이 전편에 넘쳐흐르고 있으며 11음절의 8연시(聯詩) 10편, 전부 1102절(節)로 되어 있어 포르투갈 국민의 성서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성을 갖는 문학이다. 서정시는 소네트, 대화체의 목가·비가·6연시·단시 등 여러 형태로 복잡하고도 섬세한 감정을 교묘하게 표현했는데 특히 소네트가 우수하며 <시집>(1595)과 세 개의 희극이 있다.
Fernao Mendes Pinto (1509?-1583) 포르투갈 여행가·저작가. 몬테모르 오 베리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1537년에서 1558년까지 아프리카, 동양 등지에서 13번 포로가 되었고 17번 팔려가는 등 파란 많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저술 <순력록(巡歷綠)>(1614)은 인도, 아라비아, 중국, 일본에 있어서의 작자의 수많은 모험이나 진기한 풍경 등을 기록해 낸 책으로 허풍쟁이 핀토라고들 했으나 근년에 와서 그의 진실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Joao Baptista da silva Leit o de Almeida Garrett (1799-1854) 포르투갈 소설가·시인·극작가·정치가. 오포르토에서 태어난 아일란드계 사람으로 어린시절에는 한동안 아조레스 군도의 테르세라섬에서 보냈다. 입헌자유주의자였던 그는 1823년과 1828년 페드로 4세와 돈 미겔 친왕(親王)과의 정쟁(政爭)에 의한 내란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 망명에 의해서 이후 포르투갈에 낭만주의를 도입하게 되는데 내란은 돈 미겔의 전제파의 패배로 끝났으나 조국에 돌아와서는 정계와 문단에서 활약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시에 있어서 포르투갈 낭만주의의 최초의 작품인 <카몽이스>(1825), 희곡으로는 근대 포르투갈극의 백미(白眉)인 비극 <수도사 루이스 데 소자>(1843)가 새로운 국민극을 형성했다. 소설에 있어서는 역사소설 <산타나의 공문(珙門)>(1845), 기행문학 <나의 향토여행>(1846) 등인데 가레트는 카밀로, 에르쿨라노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의 3대작가이다.
Camilo Castelo Branco (1825-1890) 포르투갈 소설가. 리스본 출신으로 통칭 카밀로라고 부른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며 만년에 가서는 그의 아들까지 발광(發狂)했고 자기 자신은 실명되어 불치병임을 알자 스스로 권총으로 자살하기까지의 파란 많은 그의 일생은 그 자체가 이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낭만파의 문호로 풍속소설의 창시자인 그는 근 260편에 달하는 소설·희곡·시·평론·번역 등을 남겼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소설은 <파멸의 사랑>(1862)으로 자기 숙부를 모델로 한 격정소설이며 또 사실주의적 경향을 나타낸 <미니오 이야기집>(1875-77)은 전원소설의 걸작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집 가운데서 주옥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 모이제스>는 포르투갈 문학의 명장의 하나이며 이 밖에도 <에우제비오 마카리오>(1880), <플라진스의 브라질 태생 아내>(1882) 등이 있다.
Julio Dinis (1839-1871) 포르투갈 소설가. 오포르토 출신으로 본명은 조아킨 기리에르메 고메스 코에료라고 한다. <어떤 영국 사람의 가정>(1868)을 제외하고는 거의 미니오 지방의 전원소설을 써서 세상을 풍미했다. 부드러운 문장으로 청순한 사랑을 그렸으며 또 교훈적인 문체도 그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교구장(敎區長)의 후견 아가씨들>(1867), <감자밭 주인의 외동딸>(1868) 등이 대표작으로 지금도 많은 부녀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작품들이다.
Jose Maria E a de Queiros (1845-1900) 포르투갈 소설가·외교관. 포보아 데 바르진 출신으로 보통 에사라고 부른다. 시인 켄탈과 함께 포르투갈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며 1869년 근동 여러 나라를 향해 출발했는데 이 여행이 종교감정의 기원이나 인간의 위선성을 취급한 <성자(聖者)의 유물>(1887)을 쓰게 된 바탕이 되었다. 그는 1873년 하바나 영사가 되고 외교관으로 구미 여러 나라를 전전했으며 파리에서 객사했다. 1866년-1875년 초기에는 낭만파에 속해 있으면서 <가제타 데 포르투갈>지(紙)에 기고했었는데 1875-1887년에는 승려의 죄많은 연애를 소재로 한 <신부(神父) 아마로의 죄>(1875)로 사실소설로 전향하여 타인의 아내 불륜을 그린 <종형 바지리오>(1878), 근친상간을 테마로 한 <마이아가의 사람들>(1888) 등의 대작을 썼다. 1887년 이후에는 <성자(聖者)의 유물> 이외에 지방의 소시민의 생활을 묘사한 <명문 라미레스가(家)>(1900), 도시의 반자연적 생활을 비판한 <도시와 산국(山國)>(1901) 등의 명작을 썼다. 그의 작품에는 세련된 감수성, 예민한 비판감각 양식, 보기 드문 예리한 심리적 통찰력 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함부로 외국어를 사용하거나 고전적인 순수성이 결여되었다고는 하지만 유연성이 있는 적절한 표현으로 포르투갈의 산문을 혁신했다. 또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유머와 풍자에 넘치는 근대적 문체로 사회를 비판했다. 에사는 포르투갈 문학을 탄생시킨 근대 최대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Fernando Antonio Mogueira Pessoa (1888-1935) 포르투갈 시인. 리스본 출신으로 카몽이스, 켄탈과 함께 포르투갈의 대표적 시인이다. <오르페>지(誌)(1915)를 가지고 모더니즘 시파(詩派)를 개척했으며 알바로 데 칸포스, 알베르트 카에이로, 리카르도 레이스라는 별명을 썼다. 시집 <전언(傳言)>(1934), 영어로 된 시집 <영시(英詩)>(1921)가 있는데 그의 중요성은 점차 인정되고 있다.
Juje Saramagu (1922- ) 포르투칼 소설가. 1922년 포르투칼 중부 지역에서 태어나 3세 때 수도 리스본으로 이주했다. 고등학교만 마치고 기능공, 공무원, 번역가, 평론가, 신문기자, 잡지사와 출판사의 편집위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사라마구는 1947년 첫 소설 <죄악의 땅>을 발표했으나 우파독재자 살라자르 시절 내내 문학창작보다는 정치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66년, <가능한 시> 라는 시집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시, 소설, 희곡, 콩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발표했지만 문학적 명성을 공고히 한 작품은 79년작 <바닥에서 일어서서>다. 이후 <수도원의 비망록>(1982년), <돌로 만든 뗏목>(1986년) 등이 크게 인기를 얻으며 그의 작품은 25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은 독자들을 몹시 긴장시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소설 속에 쓰이는 문장부호는 마침표와 쉼표뿐, 직간접 화법조차 구분하지 않는다. 거기에 눈에 보이는 사실의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초자연적인 요소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상상력이 특징이다.1998년 95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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