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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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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시원한 詩공부]- 죽은자는 말이 없다...
2016년 04월 01일 22시 37분  조회:4102  추천:0  작성자: 죽림
요절 시인 기형도(1960~1989) / 금은돌
손 안 가득 개구리가 쥐어 있었다*
 
     
 


오후 4시의 희망

 
기형도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비와, 우린 언제나
서류 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튀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형도 / 경기 옹진 출생. 1985년 〈동아일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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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죽음은 사건이자 문화적 충격이었다. 단순히 요절이라는 것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을 맞이한 공간의 특이성 때문이다. 그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왜 그 시간이어야 했을까. 기형도는 1960년 3월 13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집안이었으나, 10살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뒤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아버지는 1991년 8월 19일 사망할 때까지 20년 넘게 병상에 있었다. 기형도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10월에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다음 해,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적 활동을 한 시기는 불과 4~5년에 불과했다.


1989년 3월 7일 새벽 4시경 종로구 낙원동 한 극장. 주검 옆에는 시집 원고를 간직한 가방이 있었다. 새벽 극장과 가방, 가방 속 시 원고 뭉치, 그 백지에 담긴 희망. 당대 문인들은 기형도 시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이며, 그들 각자의 트라우마와 파토스를 투사했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글들이 쏟아졌다. 죽음으로 생전보다 강력한 문학적 출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4~5년이라는 짧은 문단 활동이 아니라, 그 이후가 출발선이 되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이 그것이다.


시집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그 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점. 그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여전히 새롭다. 예전에 눈치채지 못했던 시구들이 튀어나온다. 연어처럼, 불쑥. 왜 뜨거울까. 《입 속의 검은 잎》은 그동안 죽음의 상징이 되어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켜 왔다. 거대 담론이 무너진 시기였고, 1990년대 문단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시집은 단절과 시작을 동시에 보여준다. 결절점의 위치이다. 기형도는 그 자체로 문화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영화나 연극,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방식으로 재생산되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스템, 다시 말해 집·학교·군대·사회라는 규제와 통제 시스템 안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모습을 가장 쓸쓸하게 보여준다.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시적 주체는 떠돌고 흐르고 변화한다. 유령의 몸이 되어 어느 순간 목소리를 드러내고, 불현듯 사라진다. 이런 측면은 기존 1980년대 시의 흐름과 다른 궤도에 있다. 시인들은 말한다. 1980년대 시의 흐름에서 90년대 이후로 넘어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기형도의 시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꼭짓점에 서 있다. 응축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유도한다. 이에 그의 죽음을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다뤄야 할 일이다. 현실적인 죽음, 글 쓰는 자의 죽음, 텍스트로서 죽음, 통과제의적인 죽음 등으로 말이다. 더불어 기형도의 시적 주체에 대한 연구도 그러하다.


2015년, 헬조선이라는 기괴한 단어가 공공연하게 떠도는 시기, 아마도 기형도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리라. 유년 시절부터 대학·군대·사회인으로 거듭나기까지 겪어야 하는 방황이 농축되어 있으므로. 거대담론이 무너지면서,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지점에, 끊임없는 부재와 결핍, 불안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냈으므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기형도는 세대 담론과 가장 어울리는 텍스트가 아닐까 한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 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비가 2-붉은 달〉) 그는 죽지 않았다. 자기만의 실험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만든 시인으로서 살아 있다. 그야말로 ‘위대한 혼자’가 되어 거듭 확장한다. 시인의 어머니가 얼떨결에 내뱉었던 꿈속 아포리즘이 맞아떨어진다. “손 안 가득 개구리가 쥐어 있었다” 손 안의 시(詩). 개구리가 새롭게 가득하다. 3월 7일 새벽 4시경. 뒷다리를 내밀고 여전히 살아 움직일, 기형도 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엄마가 방금 잠에서 ‘손 안 가득 개구리가 쥐어 있었다’고 묘한 아포리즘적 묘사를 하시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들었다” 1981. 3. 9. 〈참회록〉(기형도 전집 편찬위원회 엮음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1년,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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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내 안의 외뿔소 / 이은봉










내 안의 외뿔소

이 은 봉

내 안에도 남들처럼 여러 놈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몇 마리의 나, 몇 놈의 나, 몇 개의 나, 몇 포기의 나, 몇 자루의 나…… 심지어는 낯 뜨겁게 몇 새끼의 나까지도 내 안에 살고 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내 안의 저 많은 나들 가운데 어느 놈이 진짜 나인지 알기 어려웠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나를 지켜볼 때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무슨 카멜레온이라도 되는가 함부로, 제멋대로, 뻔뻔하게, 아무데서나 얼굴을 바꾸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나를 내가 크게 미워하지 않으며 잘 살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다
대견하다니? 정작 대견한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가운데 외뿔소라는 놈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뿔을 들이밀며 제 생의 평원을 향해 불쑥불쑥 걸어 나가는 외뿔소라는 놈!
이놈은 인내심과 성실을 상표로 삼아 제게 주어진 역사를 향해 언제나 뚜벅뚜벅 잘도 걸어 나갔다
너무도 느려터진 이놈으로 하여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와 크게 다투지 않으면서도 그런대로 잘 살 수 있었다
가끔은 어디서든 불쑥불쑥 제 주둥이를 열어젖히는 놈이 있어 마음이 상할 때도 있기는 했다
내 안의 나와 심하게 다투고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목에 동아줄을 걸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내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나는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해 훌쩍 이 세상에서 저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어 우울해하고는 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내 안의 수많은 나와 잘 놀기 위해 서로를 다독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안의 저 싸가지 없는 나들을!
시간의 불수레를 타고 종종대며 달려가다 보면 더러는 꽤 괜찮은 나를 만날 때도 있기는 했다.


이은봉 시집 <책바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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