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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꽃 - 동백꽃] 시모음
2016년 04월 02일 22시 55분  조회:5263  추천:0  작성자: 죽림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동백꽃
유치환

그대 위하여
목 놓아 울던 청춘이 이 꽃 되어
천년 푸른 하늘 아래
소리 없이 피었나니

그날
한장 종이로 꾸겨진 나의 삶은 죽음은
젊음으로 말미암은
마땅히 받을 벌이었기에

원통함이 설령 하늘만 하기로
그대 위하여선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리 없는
아아 나의 청춘의 이 피꽃!
 
 
오동도로 가는 問喪
유홍준

남해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한 ?의 늙은이들이 몸을 흔들고 있다 늙음마저도 한때, 제 늙음을 탕진하기 위하여 지랄, 발광을 해댄다 늙어빠진 것이 무슨 바다를 뛰어들겠느냐 늙고 병든 것이 무슨 염병할 계단을 올라가 동백을 보며 한숨을 쉬겠느냐 진작 술이 올라 시뻘게졌다 단숨에 뚝 떨어져버리면 그만, 呪文도 呪術도 없이 금방 한 무더기 진달래군단이 되어 어라, 냅다 동백 무찌르러 달려나간다 후문으로 왔다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불륜 같은 삶, 섬진강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마다 늙은 항문 늙은 후문 뭉텅뭉텅 피동백을 피워 놓고 동백 다 봤다 동백 다 피웠다 제 몸 속의 동백을 다 흘려보낸 늙은이들, 귀청 때리는 트로트 메들리가 장송곡으로 들려오는 남해고속도로, 죽음도 한때, 나는 속도를 늦추고 관광이라고 쓴 영구차를 따라 천천히 조문을 간다

 

동백 울타리
이경림

키가 어른 허리만큼 거두절미된 동백 울타리가
마을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잘린 허리에도 툭툭

피같이 꽃이 피어서는 마을로 들어가고
연둣빛 이파리가 터져서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러고도 동백은 사이사이에 새들을 키워
어린 새들, 무시로

돌팔매처럼 날아올라 마을로 가기도 합니다
가서는 소식이 없습니다

동백 울타리는 누구든 마을 입구까지만 데려다 줍니다.
그 끝에서 길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아아 누군들, 소문처럼
그 곳으로 간 꽃들이 작부가 되고
어린 새가 협잡꾼이 되리라 생각이나 할까요.
저기, 누군가 또 허리춤에 동백을 데불고 마을로 갑니다.
그 속에서 다시 누우런 해가 솟구쳐 올라서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동백 신전
박진성

동백은 봄의 중심으로 지면서 빛을 뿜어낸다 목이 잘리고서도 꼿꼿하게 제 몸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파르테논도 동백꽃이다 낡은 육신으로 낡은 시간 버티면서 이천 오백 년 동안 제 몸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먼 데서부터 소식 전해오겠는가 붉은 혀 같은 동백꽃잎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쯤
주워 내 입에 넣고 싶다 내 몸 속 붉은 피에 불지르고 싶다 다 타버리고 나서도 어느 날 내가 遺蹟처럼 남아
이 자리에서 꽃 한 송이 밀어내면 그게 내 사랑이다 피 흘리면서 목숨 꺾여도 봄볕에 달아오르는 내 전 생애다
ㅡ 2005년 [교단문학상] 당선작
 

 

꽃처럼 살려고
이생진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동백
문정희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동백
문인수

섬진강 가 동백 진 거 본다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동백 져 버린 거
아, 마구 내다 버린 거 본다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낭자하구나
나는 그러나 단 한번 아파한 적 없구나
이제 와 참 붉디붉다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 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동백꽃 화인
정재록

선창가 뒷골목의 동백여인숙 비닐 장판에
800℃짜리 동백 한 송이 졌던가 보다
보일러의 파이프 자국이 물결치는 노르께한 비닐 바닥에
섬처럼 던져진 까만 점 하나

아까 다방에서 티켓 끊어 차 배달 나가던
핫팬츠의 손목에도 세 개나 찍혀 있던 동백꽃 자국
여인숙의 장판만이 아니라 사람의 살 속으로도
불을 찔러 넣을 수 있다는 증표

불의 도장을 꾹 찔러 넣은 화인火印
불이 심어놓은 뿌리는 깊고 깊다
보온병을 든 손목을 종두자국만하게 파고든 불도
이 막다른 선창까지 뿌리가 한참 깊을 것이다

그 불씨 한 점 가슴에 묻고
이 선창가 후미진 여창에서 너를 생각한다
네 속 깊이 찍혔을 화인을 눈여겨보고 있다
네 몸에 숙명처럼 떠 있을 섬 하나를
이 허름한 여인숙의 비닐장판에서 본다
볼 덴 자국을 증거인멸할 수도 없는 너
그 깊은 뿌리를 더듬어 너에게 가리라.

ㅡ 2007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문학세계사)
 
 
 
 

 

 

 

허공
김영미

어디를 들이받는지 옷을 벗다보면
늘상 여기저기 피멍이다
통증이 피었다
진 자리
떨어진 동백 서너 송이

어디에 심하게 받쳤는지
석달 열흘 내내 정신이 멍하다
장산역을 내렸을 때
필히 들고 와야 할 전화번호를
탁자 위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멍청은 허공의 다른 말
멍청해진다는 것은
몸에
허공의 개수가 늘어난다는 말

내가 지금 나온 곳이 9번 출구던가
오락가락 헤매기를 한참
7번 출구 밖 다리를 쉬었던 돌부리에
거적때기로 버려져 있다
그 속에
팔다리가 없는
몸뚱이 하나가 누워 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머리와 가슴이 없다
내가, 허공이다
 
 
 
흰동백꽃
백영수


파도처럼 부서지고 싶은 게다
내가 다시 너를
찾아왔을 때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이 겹겹이
하얗다
왔다 가는 바람을 잡아 두고 싶은 것이었을까
퍼런 손등 위로
너는 또 그렇게 새 하얀 눈을 모아 두었지만
핏줄을 내려 앉힌
뿌리를
깜깜한 눈에 나는 결국 알 수가 없었다
깃들어 슬픈 동박새의 자리에
곡(哭)이 아리도록
그 자리마다 노란 꽃 입술은 그래, 용서하지 못할 기억일 게다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 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겨울 선운사에서
이상국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뾰로통하게 토라진 동백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절 아래 레지도 없는 찻집
담벼락에서 오줌을 누는데
분홍색 브래지어 하나 울타리에 걸려 있다

저 젖가슴은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는지

중 하나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고해(苦海)만한 절마당을 건너가는 저녁

나도 굵은 체크무늬 목도리를 하고
남이 다 살고 간 세상을 건너가네
 
 
 
 
교감
고영
 
동백나무 꽃망울 속에
내가 평소 갖고 싶던 방을 들인다
겹겹이 붉은 단열벽도 치고
아무나 침범할 수 없도록
출입문은 딱 한 개, 봄을 향해 단다
아아, 갑갑해, 너무, 갑갑해,
세상 구석구석 다 볼 수 있도록
천장엔 하늘문을 단다
동백꽃숲은 위성 안테나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한다
침침하던 동백꽃망울 속에
환한 생기가 돈다
이 단촐한 방에서 나는
겨울바람과 채팅도 하고
떨어지는 눈(雪)과 몸도 섞는다
좀 더 우주적으로 省察하고 싶어
밤마다 전갈자리별과 사랑도 주고받는다
내가 사랑한 전갈자리별을
동백나무 꽃망울 속
내 붉은 방에
은밀히 초대하고 싶다
 

 

 
동백을 보며
이향아

봄이라고 너도나도 꽃피는 게 싫다
만장일치 박수를 치며
여름이라 덩달아서 깔깔대는 게 싫다
봄 여름 가을 꿈쩍도 않다가
수정 같은 하늘 아래 기다렸었다
마지막 숨겨 놨던 한 마디 유언
성처녀의 월경처럼 순결한 저 피
헤프게 웃지 않는 흰 눈 속의 꽃
사람들은 비밀처럼 귀속말을 하며
늦게 피는 꽃이 무서운 꽃이라네
발끝으로 숨을 죽여 지나가면서
늦게 피는 꽃이 그중 독한 꽃이라네
맴돌다가 맴돌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이
늦게 피는 꽃이 처음 피는 꽃이라네
 

 

 
동백나무는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송재학

백련사 동백숲 근처는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이월이면 사람의 병이 옮겨 가는 동백나무에는 매듭이 없다
그 나무의 여성성은 잘려진 분지를 둥글게 감싼다
어떤 흉터라도 희고 부드러운 껍질로 감싸 버리는
동백의 잎은 범종의 공명으로 두터워졌다
번개도 그 나무의 속을 엿볼 수 없다
혹한만이 그 나무를 서서히 열어 보인다
동백이 피운 꽃이란 동백이 스스로 불켠 창의 넓이
붉은색의 극점까지 가서 꽃잎으로 흰 눈의 숨은 핏빛을 비교하는
붉은색이란 그때 떠도는 넋에 가깝다
엎드린 꼽추처럼 병을 집어삼킨 둥근 혹을 달고 동백은
다시 움츠린 몸으로 제 신열의 암자를 세운다

 

 
 
 
 
 
제주섬, 동백꽃, 지다
변종태

어머니는 뒤뜰의 동백나무를 잘라버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뎅겅 죽어버린 아버지 생각에
동백꽃보다 붉은 눈물을 흘리며
동백나무의 등걸을 자르셨지요.
계절은 빠르게 봄을 횡단(橫斷)하는데,
끊임없이 꽃을 떨구는 동백,
붉은 눈물 떨구는 어머니, 동백꽃
목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먼 산 이마가 아직 허연데,
망나니의 칼 끝에 떨어지던 목숨,
꼭 그 빛으로 떨어져 내리던,
붉은 눈물, 붉은 슬픔을
봄이었습니다, 분명히
떨어진 동백 위로
더 붉은 동백꽃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심장 위로 덜커덕,
쓰린 바람이 훑고 지나갑니다.
먼저 떨어진 동백꽃 위로
더 붉은 동백이 몸을 날렸습니다.
봄이었구요,
아직도 한라산 자락에 잔설(殘雪)이 남은 4월이었구요.
 

 

 
붉은 동백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 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붉은눈, 동백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 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ㅡ 2000년도 제 1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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