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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손은 어디에...
2016년 04월 06일 00시 06분  조회:4364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의 손은 어리둥절해야 한다

                                      / 이원

 


 

 

시인의 손은 늘 어리둥절해야 한다.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문득 바람이 차다.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저무는 것도 모르고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나는 하루가 간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헉헉거리는 것이 참 이상하다. 아니 아무 것도 못하고 있으니 헉헉거린다. 몸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몸이 고요해져야 몸 밖을 볼 수 있는데 그게 어렵다. 순간에 더 가까이, 더 깊게 다가가려면 우선 내 몸이 고요해져야 한다.

 

*

 

'시적詩的'이라는 말 속에는 어둑어둑한 가을 해변도 들어 있고 봄날 아득하게 흩날리는 꽃잎도 들어 있다. 어떻게 하면 '시적'이라는 말의 해변을, 봄날 꽃잎을 배반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 가을 해변을, 봄날의 꽃잎을 뜻밖의 경로로 데려올 수는 없을까를 생각한다.

 

*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호랑이와 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 '눈이 내리는 날에 호랑이를 본다면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어느 봄날 여자는 승용차를 몰고 간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있다. 여자는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여자 앞에 동물원 문이 열리면서 탈출한 호랑이가 나타난다. 경이로 가득 찬 여자의 눈은 만약에 라는 '가정'과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은 샴쌍둥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눈이 내리는 순간에 호랑이가 나타난다면-이라는 가정과 현실, 우연과 필연은 오른발과 왼발이다. 시적 세계는 바로 오른발의 우연과 왼발의 필연 사이에서 탄생한다.

 

*

 

어떻게 사람 속에서 사람이 생겨나요-어떻게 사람이 점점 커졌다 다시 쪼그라들어요-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에 사라져요-이 관점이 인간 중심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사람인 것이다.

 

*

 

자주 햇빛 속에서 채찍으로 맞고 있는 말에게 달려가 말머리를 잡고 울다 미친 니체를 생각한다. 말을 죽도록 때릴 수도 있고 그런 말에게 달려가 울 수도 있고 울다 미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

 

풍경은 어울리는 순간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상투화된다. 낯선 풍경은 어딘가 불균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는 낯선 풍경이어야 한다. 초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의 사물들은 이제 막 만난 것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손은 풍경의 시간 속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손은 최초의 시간에 닿아야 하며 만져야 하며 그것을 언어로 데려와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손은 피비린내가 나고 미끈거리고 늘 어리둥절해야 한다.

 

*

 

조각가 존배는 1cm가량의 철사 수만 개를 용접하여 작품을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우환은 큰 캔버스에 단 하나의 점을 찍는 작업방식을 선택했다. 점을 찍음으로 해서 여백이 생기니까, 점은 여백을 존재하게 하는 최소한의 표시다. 그런데 그토록 넓은 여백을 탄생시키는데도 이우환의 작품은 동양적이거나 선적이지 않다. 직관을 통해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의 모든 곳에 가정의 점을 찍어보는 지난한 시간을 지나 단 하나의 점을 찍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배와 이우환의 표면적 작업 방식은 정반대지만 내면적 접근은 똑같은 것이다.

 

*

 

집요해진다는 것은 좁고 가파른 곳을 걷겠다는 선택이다. 낭만이 아니라 탐미로 갈 때, 그곳은 가파르고 숨차지만, 분명 예술이 가는 방향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병적이고 불균형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 시대의 취향이 아니라 운명인 것이다.

 

*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각별해진다는 것이니까, 각별해진다는 것은 그 너머, 다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것은 내가 그것을 알고, 그것이 나를 아는 것이니까, 그것은 믿고 안 믿고의 층위가 아니니까, 나는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쓰고 그러기만 하면 된다.

 

*

 

지족自足이라는 말은 아름답고 무서운 말이다, '자'(스스로, 몸소, 자연히, 저절로)와 '족'(발, 뿌리, 근본, 산기슭, 그치다, 머무르다, 가다, 달리다)이 만나서 이루어내는 세계라니! 예술이야말로 스스로 자족의 공간과 시간이 되는 이상한 세계다. 크고 작은 위로나 보상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조건적인 구애를 내내 해야 한다. 아니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족의 세계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렇게 무모한, 무용한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 붓겠는가.

 

*

 

시간에서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나 또는 시간 둘 중의 하나는 암벽이다.

 

*

 

어떻게 보이도록 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니까 그렇게 쓰는 것이다.

 

*

 

내 시를 내내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있는지 잠깐 내 시에서 낙엽의 소리가 나기도 한다. 아주 깨끗하고 과장 없는 적멸의 소리.

 

*

 

눈이 사락사락 내리는 하루 종일 시를 쓰면 좋겠다. 그럼 나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나를 알고 있는 언어 때문에 마음이 미어질지도 모른다.

 

*

 

밤에 층층이 불이 켜진 아파트의 맞은편 동을 보고 있으면 흐느끼는 짐승 같다. 한 시가 지나 불이 다 꺼지면 그때서야 울음을 그치고 잠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

 

이상선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림이 유머러스하고 시적이다. 가벼운데 찡하다. 사무치는 지점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림에 들꽃이 자주 날린다. 새벽 두 시 이상선의 얇은 도록을 펼친다. 그의 그림을 보다 그가 써놓은 작업일기들을 한참 들여다본다.

 

꽃이요?

낭만적이잖아요......

사람?

인간적이잖아요....

너무 작업이 하고 싶어서 자다 깬 적 있어?

그럼 작업 노트를 안고 잔 적은?

그럼 작업이 인생의 전부였던 적이 있어?

 

스물 몇 살 때, 시 비슷한 것 하나 쓰면 너무 좋아서, 매일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보고 또 보고 했었다. 카페에서도 보고 버스에서도 보고 자기 전에도 보고 혼자 낄낄거렸다. 스스로 의기양양해져 걸을 때도 소읍의 불량배처럼 걸었다.

한 가지를 계속하면 더 사무쳐야 하고 더 단순해져야 하고 더 무모해져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할까.

지금부터 다시 그 시간으로 걸어가야겠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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