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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뗑하게 하는 詩공부]- 詩作 첫줄 어떻게 쓰나
2016년 04월 07일 07시 57분  조회:4103  추천:0  작성자: 죽림

제5장 첫줄은 어떻게 쓰나


1) 시의 성패는 첫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시 쓰기의 기본 공부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 쓰기 공부는 필수적이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기 위하여 바이엘, 체르니를 거처 소나타 등을 열심히 연습한 끝에 우리에게 아름다운 곡을 들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습 없이 피아노를 치는 사람의 소리를 상상해 보라. 시도 마찬가지이다. 지루하지만 기초를 익히는 것이 좋다.

때로는 지루한 나머지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정을 하나하나 쌓아 가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의외로 시의 참 맛에 빠지는 황홀감을 맛볼 수 있다. 마치 연습을 많이 한 피아니스트가 스스로의 연주에 황홀해 하듯 말이다. 이번에는 첫줄을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에 관하여 알아보겠다.

시에서 첫줄은 아주 중요하다. 첫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대부분 그 시의 성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시 뿐만이 아니라 산문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읽을 때 첫줄이 마음에 들면 자연히 그 글을 읽게 되지만 첫줄이 지리하고 도식적이거나 군더더기가 많으면 잘 안 읽게 된다.(솟대 문학의 게재 작들을 보면 의외로 첫 행과 첫 연이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긴 문장이 많다.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우선 깔끔한 맛이 없다. 구체적인 예문을 들고 싶지만 작자들이 원치 않는 것 같아 생략하겠다.)

산문도 그런데 시야 무었을 더 말하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시인들은 쓰려는 내용을 구상을 해 놓고도 첫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더욱 고심한다. 사실 시에서 첫줄의 시작이 좋으면 중간도 끝도 다 괜찮게 된다. 그러고 보면 첫줄을 잘 살려 내는 것이 성공의 열쇠인 셈이다.

그런데 첫줄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다는 원리라든가 방식이나 무슨 표준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런 기준이 없다. 시인 각자의 기질이나 체질에 맞게 써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첫줄만 잘 써지면 그 다음부터는 대체로 거미가 줄을 뽑으며 집을 짓듯 술술 잘 써지게 되지만 반대로 아무리 착상이 좋아도 첫줄이 잘 안되면 영 이야기를 못 풀어 나가게 된다.그래서 대체로 시인들이 첫줄을 어떻게 시작할 것이며 어떤 어휘와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인다. 나름대로 첫줄에 접근하는 방법을 구분해 보겠다. 세분화해서 구분할 수 있겠지만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것 같으니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법을 구분해 보겠다.


방법1> 이야기 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상황을 직접 설정한다.

방법2> 주제가 되는 글귀나 포괄하는 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첫줄을 짧은 단문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다음줄로 이어 읽어 가게 된다. 되도록 짧게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찾으면 반은 성공한 셈이다. 주요한의 <빗소리>를 예로 설명해 보겠다.

 

빗 소 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꺼리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듯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두운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해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뿐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요즈음 이런 종류의 서정시를 쓰면 진부하다 하여 아무도 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1930년대에 쓰여진 시임을 염두에 두고 보기 바란다.위의 글은 첫줄을 <비가 옵니다.> 하고 비가 오는 상황 설정을 직접 해 놓고 시작했다. 즉, 1의 방법처럼 비가 오는 상황 설정을 뚜렷이 하면서 접근한 방법이다. 많은 시인들의 접근 방법이다. 이 시를 2의 방법으로 읽는 사람이 <왜 이런 말로 시작했나?> 하고 의문이 생기도록 써 본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빗 소 리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비가

뜰 위에 속삭입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는데

...........

 

<빗소리>라는 제목의 시 첫줄이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라고 시작하고 보면 읽는 사람이 <빗소리>란 시에 왜 <병아리>란 비유가 나오나 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줄을 보면 <빗소리가 그렇게 뜰 위에 속삭인다>는 비유가 아닌가. 이렇게 써 보아도 감칠맛이 난다.


2) 의미를 형상화해 본다.


어느 방법이 더 좋으냐는 쓰는 사람의 기호이다. 여기서 어느 것이 바른 표현법이란 논쟁은 의미가 없다. 단지 어떤 방법으로 첫줄을 시작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방법 2의 예를 또 좀 보자.

 

골 목


골목은

흔들리는 목선(木船)이다

집들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빠져나가지 못한 매운바람은

미친 듯 회오리치다

그대로 나자빠진다.


---문덕수의<골목>전반부--

 

<골목>이란 제목에 첫줄을 <흔들리는 목선이다.>라고 시작했다. 첫줄을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필자가 왜 골목을 흔들리는 목선이라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다음을 읽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그 첫줄을 수렴하며 첫줄을 형상화해 나가는 다음 줄을 읽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첫줄을 아주 짧은 단문으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지루하게 첫줄을 끌고 가지 말고 간결하게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은유나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인 셈이다. 예문을 몇 개 더 들어 보겠다.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김현승의<푸라타나스>전반부--

 

<플라타너스>라는 제목의 시 첫줄이<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이다. 플라타너스를 의인화한 첫줄의 형상화 작업은 다음 줄로 이어진다.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는>다는 표현으로 바로 첫줄에 대한 형상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즉 첫줄에 주제가 되는 의미나 또는 포괄하는 말이 되도록 시작하면 그 다음 줄은 그 의미를 형상화하면서 쓰는 사람이 이야기하려는 의도로 풀어 갈 수 있다. 또 보자.

 

바 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첫줄)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둘째 줄)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셋째 줄)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넷째 줄)

억년 비정의 함묵에.............(다섯째 줄)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여섯째 줄)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일곱째 줄)

흐르는 구름....................(여덟째 줄)

머언 원뢰......................(아홉째 줄)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열째 줄)

두 쪽으로 깨어져도.............(열한째 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끝줄)


---유치환의<바위>전문---

 

첫줄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라고 주제가 되는 말로 시작하고는 그 다음둘째 줄부터 열한째 줄까지 바로 첫줄의 주제가 되는 <바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전부이다. 이렇게 첫줄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계속되면서 점차적으로 첫줄의 속뜻이 점점 자리 잡혀 나가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연습해 보라.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첫줄이 시의 실마리인 셈이다. 마치 붓글씨를 쓸 때 굵게 쓰기 시작하느냐 가늘게 쓰기 시작하느냐에 따라 글씨 전체가 다르듯이 시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 굵은 선이 나오기도 하고 여린 선이 나오기도 한다. 더 자세히 나눌 수 있겠지만 습작

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위에 이야기한 두 가지 방법으로 첫줄에 접근해 보라. 첫 번째 방법보다는 두 번째 방법으로 연습을 더 많이 해 보라. 보다 감칠 맛나게 첫줄에 접근할 수 있을 게다. 다른 시인들은 어떻게 접근했나. 예를 좀 들어 보겠다.

 

방법1>의 예


.비가 옵니다./주요한의 <빗소리>

.님은 갔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

.산에는 꽃이 피네./김소월의 <산유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박목월의 <나그네>

.온 종일 비는 내리고/김종삼의 <비옷을 빌어 입고>

.진주 장터 생 어물전에는/박재삼의 <추억에서>

 

방법2>의 예


.꿈을 아느냐/김현승의 <푸라타나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김춘수의 <꽃>

.시퍼렇게 밀려오는 바람을 따라/이성교의 <약쑥>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김종길의 <성탄제>

.골목은 흔들리는 목선이다./문덕수의 <골목>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의 <바위>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김광섭의 <마음>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의 <깃발>

.목숨은 때 묻었나/신종집의 <목숨>

.의식은 한 마리 작은 산새/홍윤숙의 <한 마리 작은 새>

.흰 팔들의 여인이 온다./이승훈의<눈>

.소망이란 2월 하늘아래 목련꽃 봉오리 같은 것/이길원의<목련의 2월>

 

첫줄을 잘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 첫줄이 제 맛이 나야 시가 제대로 되었다 할 수 있다. 어쩌면 시인들은 그 첫줄을 쓰는 맛에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첫줄에 맛이 날 수 있도록 연습하길 바란다. 아무리 해도 잘 안된다고 불평하지 마라. 대부분의 시인들도 바로 그 점을 고민하고 있다.(*)

 

 

제6장 시와 소재에 관하여


1) 소재와 시는 다르다


시를 처음 써 보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시를 좀 써 본 사람들 중에도 시의 소재를 시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어떤 소재를 나열해 놓고 그것을 시로 착각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때로는 시와 소재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 중에서도시와 소재를 혼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또 시와 생활체험을 혼동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대할 때도 많다. 예를 보자.

 

봄길

꽃눈

내리네.


두어 장

날개수풀 속


나비 되어

살포시 내리네.

 

<봄>이란 제목아래 <벚꽃>이라는 부제를 단 이 시는 소재의 나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작자의 감정이 약간 반영된 소재를 그냥 행 가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집으로 묶어서 발표한 것을 보면 작자는 시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소재의 나열로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다시 작자의 상상력이라는 용광로에 넣어 다시 창조하는 과정을 거처야 한다. 또 보자.

 

깊은 산곡(山谷)

외딴 초가(草家)

사뭇 외롭다

 

<산가(山家)>라는 제목이 붙은 시의 첫 연인데 이 역시 시라고 보기보다는 소재의 나열에 불과하다. 어떤 현상을 그저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해 시적 호소력을 잃고 있다는 말이다. 김 춘수 시인은 위의 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산곡>과 <초가> 앞에 <깊은>과 <외딴>이란 형용사를 붙여 <외롭다>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려 시도했으나 <산곡>이니 <초가>하는 용어조차 시어로는 통속적이고 보면 시인의 상상력이 약했다고 볼 수밖에는 없다."

 

--김춘수의 <시의 이해와 작법>중에서--

또 다른 시를 보면서 비교해 보자.

 

(A) 세계의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고

세계의 민주주의 꽃에 물을 주는

민주주의의 원정


(B)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서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김남주의<함께 가자, 우리들>전반부--

 

위의 시(A)는 광복직후에 발표된 시이고, (B)는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강점하던 시기에 발표된 시다. 그 당시에는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의도적으로 조명해 준 탓도 있겠지만 제법 알려진 시들이다. 그러나 이 시들은 모두 소재에 약간의 목적 관념을 반영시켜 그것을 행 가름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A)에서는 <민주주의의 씨>니 <민주주의 꽃>이니 하는 어구가 무슨 데모의 구호 같기도 할 뿐더러 시어로 진부하기도 하다. (B)역시 무슨 집회의 앞장에 서서 선동하는 구호 같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식의 수사법으로 쓴 시를 시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어떤 소재를 시의 세계, 즉 예술의 차원까지 끌어 올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광복직후 또는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강점하던 시기에 이런 종류의 시를 마구 쓰면서 시인이라고 으스대던 시대가 있었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으나

그런 감정과 의욕이 그대로 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감정이나 의지는 다만 시의 소재나 체험일 뿐이다. 이것을 시로 승화하기에는 섬세한 표현으로 연마된 언어의 묘미를 보여 주어야 한다. 자기의 느낌이나 뜻을 솔직하게 읊는다(?)는 명분아래 이런 작품을 써 놓고 시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목적, 특히 정치적 사회적인 선전을 목적으로 적당히 행만 바꾸어 시의 형식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시들과 역시 광복 직후에 발표된 서정주의

<밀어>라는 시를 비교해 보자.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리를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

차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를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듯한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를 보아라.

 

문덕수 시인은 위의 서정주 시와 (A)나 (B)와 같은 시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시와 정치 구호와 같은 시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알 수 있지 않은가. '굳이 잠긴 잿빛 문'은 감옥과 다름없는 죽음의 문이 굳게 담긴 일제 36년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리'라든가, '뺨으로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등은 광복을 맞는 새로운 기쁨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이 시가 광복 직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시는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시이다. 여기에 운명이니 희망 또는 자신이니 하는 따위의 추상어가 들어 있지 않다. 이런 단어가 들어가야 '새나 라의 찬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꼭 광복이라든가 민주주의라는 말을 써야만 민주주의나 광복의 기쁨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시의 상징적이며 미적인 짜임새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결과다."

-문덕수의 <시론> 중에서-


2) 소재와 시는 어떻게 다른가.


만약 실생활이나 사회에서 경험한 소재가 곧 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시인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숲 속의 꽃이라든가 거리의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길 가던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은 장면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도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일반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체험으로 끝나지만 시인은 이것을 시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하나 더 들겠다. 다음의 경우 어느 것이 시의 꼴을 갖춘 것이고 어느 것이 소재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인가 구별해 보라. 기본 소재를 설정하겠다.


<소재의 설정>

1월이나 2월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산사에 들렸다고 하자. 바람은 세차게 부는데 붉은 산수유 열매가 아름답게 아주 고혹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눈에 띄게 아름다운 그 산수유 열매 곁에는 목련꽃이 몽우리를 만든 채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산수유 열매가 아름답구나.'하는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좀더 발전한다면 만지면 곧 터질 듯한 붉은 산수유 열매가 '젊은 여인의 허벅지 같다'고 느낄 것이다. 또 산수유 열매 곁에 목련꽃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색깔로 몽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목련꽃이 저렇게 몽우리를 만든 채 겨울을 넘기는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 더 생각이 발전하면 '아, 목련꽃이 그렇게 몽우리를 만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봄이 되기 무섭게 다른 꽃보다 먼저 꽃을 활짝 피우는구나'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바로 그 자연의 신비함을 시로 쓰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게 시인이다. 바로 이 상황과 생각이 시의 소재인 셈이다. 이 소재가 그저 소재로 남느냐 시가 되느냐를 예로 들어 보겠다.

 

(C)그 겨울 산사에는

붉은 산수유 열매

터질 듯한 살결로 매달려 있는데

곁에는 목련꽃

꽃망울 만들고

봄을 기다린다.

칼날처럼 등에 꽂히는 찬바람 맞으며

봄을 기다린다.

훈풍이 부는 봄이 오면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긴 목련꽃

활짝 열릴 게다

어느 꽃보다 먼저 피어

 

제목도 <겨울 목련>이라고 붙여 보면 제법 시의 꼴을 갖춘 듯이 보일 게다. 또 제법 의미라도 담은 듯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소재의 나열에 불과하다. 보이는 상황을 그림이라도 그리듯이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 시를 처음 써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써 놓고 잘 썼다고 생각하며 보아 달라고 내 놓는 경우가 많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잘 느껴지지 않으면 같은 소재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 예문과 비교해 보라.

 

(D)소망이란

2월 하늘아래 목련꽃 봉오리 같은 것

허벅지 자랑하는 조급한 계집처럼

붉은 산수유 열매

소름 돋는 살결 오그릴 때

칼날처럼 등에 꽂히는 찬바람 맞으며

가슴에 꽃잎 싸안고 기다리는 것


어느 꽃인들 먼저 피어

바람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가

어느 꽃인들 따듯한 바람에

꽃몽우리 못 만들겠나.


남해 바람 한줄

얼음 같은 하늘 뚫고 천릿길 달려오면

참았던 울음 와락 터트리듯 그렇게

진달래보다 먼저 피어

웅크린 풀잎과 지친 나무들에게

삶이란 때때로 기대해 볼만하다며

참고 기다리는 맺힌 꽃잎인 것

 

여기에 <목련의 2월>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다.(C)의 예문과 (D)의 예문이 어떻게 다른가. 비교해 보자. 찬찬히 읽어 보면 (C)와 (D)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첫 연을 <소망이란/2월 하늘 아래 목련꽃 봉오리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모든 꽃들이 엄두도 못내는 추위에 몽우리를 만들고 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을 좋은날을 꿈꾸며 고난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소망 같은 것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왜 필자가 (C)는 소재의 나열이고 (D)는 시적 표현이라고 하는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소재의 나열과 시적 표현은 백지 한 장의 차이다. 그러나 시의 형태로 볼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소재가 될 수 있는 어떤 사물이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시란 그러한 소재에 생각과 상상을 담아 언어로 표현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그렇다고 시적 용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시를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상어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시인인 윌리암 워즈워드(1770~1850)가 일상어로 시어를 쓰기를 주장했고 1930년대의 김 기림 시인도 일상어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일상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될 수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서투른 시인이나 시를 처음 써 보는 사람들이 소재를 행 가름해 놓고 시라고 생각하듯이 일상어를 그대로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다. 일상어를 소재로 하지만 그 일상어를 깎고 다듬어 의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한다. 마치 조각가가 우리 주변의 흔한 돌을 가지고 아름다운 형상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보자.

 

(E) 물아

쉼 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하게도 나로 하여금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으로 나의 혼을

꾀이어 간다.


--오상순의<허무혼의 선언> 제1,2연--

 

(F) 여울지어

수척한 흰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정지용의<비>제 5,6연--

 

(E)와 (F)를 비교해 보면 언어를 갈고 닦은 수준의 차이를 볼 수 있다.(E)의 경우 느끼는 대로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언어를 다듬었다고 볼 수는 없다. 언어가 연마되어 있지 않은 소재의 수준이라고 느껴진다. 거기에 비하면 (F)는 일

상어이지만 언어가 연마되어 있다. 시적 표현에 일상어를 쓰면 좋으냐 아니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일상어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숙련이 필요할 뿐이다.


3) 같은 소재라도 시대에 따라 시각도 변한다.


소재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어느 때는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회 현상을 주 소재로 다루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시인의 관심이 되는 소재는 역시 자연이다. 하늘이나 산, 강, 바다. 꽃, 바람 등은 옛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꾸준히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소재를 보는 시각에는 시대에 따라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시인이 보는 눈도 다르기 때문이다. 진달래를 소재로 한 시의 예를 보자.

 

(G)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곳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진달래>전문--

 

(H) 조숙했나 보다. 이 계집

계곡에는 아직도 겨울이 웅크리고 있는데

잎이나 피워 그 알몸 가리기도 전에

붉은 꽃잎 내밀어 화사하구나

싸늘한 가시 바람 억세게 버틴

가냘픈 가지들의 이 꽃 덤불

아, 이 꽃 덩어리 꽃 등불

에덴의 이브도 잎새 하나야 있었는데

유혹할 사내도 없는 이 천부적 화냥기는

제 알몸 열기로 불태우는구나.

아직도 파란 겨울 하늘이 남아 있는 걸

진달래야 진달래야 진달래야 진달래야


--이길원의<진달래>전문--

 

(G)와 (H)는 그 소재가 다 같이 <진달래>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보는 진달래에 대한 시각과 1990년대에 보는 진달래에 대한 시각은 이렇게 큰 차이를 나타낸다. 현대 젊은이들이 임이 떠난다고 해서 김 소월 식으로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하는

시각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소재라도 시대에 따라 그 소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요즈음 어느 시인이 진달래를 김 소월 식으로 표현하면 진부하다고 할 것이다. 그건 역시 1930년대의 발상이다.

결론을 내리겠다. 소재가 곧 시가 될 수는 없다. 소재를 어떻게 시로 표현해야 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시로 표현하기까지 많은 생각과 상상이 필요하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라. 그런 연후에 시로 표현해라. 즉흥시를 못 쓴다고 부끄러워하지도 마라. 시인은 아무 때나 노래할 수 있는 가수가 아니다. 오히려 철인(哲人)이라는 편이 옳다.(*)

 

 

제7장 시에서의 <말하는 이>


1) 시에 따라 말하는 이가 달라야 맛도 난다


대부분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시에서 말하는 이가 곧 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독자들이 시를 읽으면서 "이 시의 작자는 여성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였다."라면서 놀라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실 어떤 각도나 입장에서 말하든

시에서의 말은 곧 바로 시인 자신의 말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말하는 이가 따로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시에 쓰인 말들을 곰곰이 분석해 보면 작자와 말하는 이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사실 시인들이 시를 쓸 때 말하는 이를 자기 자신으로 하지 않고 따로 세워,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와 관념을 보다 적절히 드러내는 경우를 흔히 본다. 양 왕용의 <도회의 아이들>이란 시 한편을 예로 들겠다. 시인은 말하는 이로 어린이를 내세워 문명에 밀려 사라져 가는 자연에 대한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개나리가 보고 싶어

할머니

병아리떼 물어낸

개나리가 보고 싶어

봄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도 찾아낸

그 병아리는

닭장에서 나오지 않고

그림책 속에만 갇혀 있지

할머니 봄비도 보고 싶어

종이 우산이나 삿갓 쓰고

볼 수 있는

그 비 보고 싶어

숨 막히는 비니루 옷

훌훌 모두 벗고

병아리떼 놀러 간

들판이나 울타리 밑으로

가고 싶어

호랑나비만 날면

억수 비와도

그냥 가고 싶어

그런데, 할머니

오늘도 보이지 않아

저녁때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잘도 보이는데

나비도 병아리도

개나리도 보이지 않아

할머니


--양 왕용의<도회의 아이들>중에서--

 

이 시에서 말하는 이는 어린이이지만 양 왕용 자신이 결코 어린이는 아니다. 어린이를 말하는 이로 세웠기 때문에 문명에서 밀려난 자연을 찾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잘 나타내고 있다 할 수 있다. 세파에 찌든 어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어린이의 눈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호소력 있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서와 관념을 상황에 맞추어 표현하는 훈련과 연습이 잘되면 때때로 나이를 높이기도 하고 또는 낮추기도 하면서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도 호소력 있는 표현 방법의 하나이다. 또 때로는 시인들이 말하는 이로 자신과 성별을 바꾸어 표현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그때그때에 따라 잘 판단하여 사용해야 한다. 훈련이 잘된 시인들은 이와 같은 방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2) 말하는 이는 어떻게 세우나


그러면 시인들이 때때로 처지를 바꾸어 가며 흔히 사용하는 방법들을 보자. 이 경우 시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3가지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첫째, 나이를 높이거나 낮춘다.

둘째, 남녀의 위치를 바꾼다.

셋째. 어떤 사물이나 제3자를 말하는 이로 만든다.


양 왕용의 <도회의 아이들>같은 시가 바로 나이를 낮춘 경우이다. 노인 문제를 이야기하려할 때는 말하는 이를 노인으로 내 세울 수도 있다. 이때 흔히 <나는…….>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하여 <작자가 스스로가 정말 노인인가 보다.>라고 착각하지 말고 시에 담긴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번에는 남녀의 위치를 바꾸어 표현한 예를 보자. 만남의 간절한 사연을 노래한 것들이 대체로 여성적이다."님"을 간절한 대상으로 삼기에는 그래도 여인의 음성이 보다 가슴을 더 파고든다고 보는 경우다. 한 용운의 <나는 잊고자>를 예로 보자.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히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이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 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 가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생각이 더 괴롭습니다


---한 용운의 <나는 잊고자> 전문---

 

이 시의 작자가 한 용운이라고 밝혔으니 망정이지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면 작자는 틀림없이 여성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말로 표현할 때 임을 그리는 섬세한 감정이 잘 살아날 수 있다. 이와 같은 표현법을 자주 구사한 시인으로는 한 용운, 김 소월, 김 영랑 외에도 수 없이 많다. 사실 어찌 보면 우리의 서정시가 다분히 여성적이기도 하다. 우리 시를 읽다 보면 말하는 이를 여성으로 내세운 경우를 자주 대하게 된다. 또 보자.

 

바람이 되고 싶어요.

여보,

죽으면 바람이 될까요?

살아서 바람이 안 되는데

죽으면 바람이 될까요?

바람이 되면 좋을 거예요.

꽃이나 나뭇가지 스치며

구름이나 별빛 어루만지며

울면 그만인 것을

여보, 죽으면 바람이 될까요?

살아서 바람이 안 되는데

죽으면 바람이 될까요?

바람이 되는 방도를 알려 주세요.


-- 김광협의 <바람>--

 

언어의 흐름이나 어투로 보아 말하는 이는 여자의 음성이다. 딱히 여자라고 단정지울 수는 없지만 텁텁한 김 광협 시인은 분명 여성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깊은 의미를 담은 다소 철학적인 시라면 오래 살아 온 노교수의 음성이 적절하지 않겠나. 이렇게 자신의 나이를 낮추거나 높이거나 남녀의 위치를 바꾸거나 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보다 적합한 표현법을 찾는 것도 시 쓰기의 중요한 방법이다. 이번에는 어떤 사물이나 제3자를 말하는 이로 삼는 경우를 보자. 필자 스스로도 즐겨 사용하는 이 방법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또는 제3자이건 시인 스스로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 그 사물이나 대상이 되어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겠다.

 

A)나는 수족관 열대어

고향을 남방에 두고

질주하다 멈추어 춤이라도 추듯

지느러미 펄럭인다.

이승과 저승을 가로막는 유리벽

여기는 나의 우주

차량 사이 헤집듯 해초 틈 헤적이다

아파트에 발소리 울리는 해거름이면

이마에 유리벽 두고

오늘을 흘린다.


-- 이길원의 <수족관 열대어>--

 

B) 공주여

그대의 암내에 눈을 베이고도

사랑질 모르는 것을

용서하라 용서하라


나의 귀에

봄비가 시린 발자국을 놓고 가듯

그렇게 한 톨의 웃음이라도

놓고 간다면

목구멍에 뼈마디에

양심의 가시 하나 걸리지 않고

그대를 앗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봄이 와도 봄일 수 없어

가장 인간적인 것이

그리운 때


--정의홍의 <서동의 말>--

 

A는 수족관에 갇혀 사는 <열대어>를 말하는 이로 설정하였다. 내 스스로 수족관에 갇힌 열대어가 되어 독백을 하지만 사실은 인간들의 허무하고 제한적 삶을 묵시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B는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서동>을 말하는 이로 설정하여 가장 인간적인 그 어떤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정의홍 시인이 <서동>의 입을 빌린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이를 이야기하려는 주제에 맞도록 제3자나 어떤 사물로 설정하는 것 또한 중요한 표현 방법의 하나이다. 이럴 때 말을 하고 있는 그 대상 자체의 이미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의 무게와 의미를 한층 강하게 할 수 있다.

예문 A의 시에서도 인생은 허무하다느니 우리의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무것도 아니라는 등의 표현은 시로서 감도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더 설명치 않아도 작자는 수족관 열대어와 우리의 삶이 닮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남의 시를 읽을 때도 이와 같은 점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시를 쓸 때도 이런 점에 주의하면서 쓰기 바란다. 이 경우 주의할 점은 말하는 이를 설정했으면 일관되게 한 목소리로 끌고 가야만 한다. 흔히 처음 시를 써 보는 사람들은 이 <말하는 이>가 같은 시에서 어린이가 되었다가 어른도 되기도 하는 둥 혼미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점에 주의하면서 이야기 하고자하는 의도를 보다 심도 있게 표현하는 훈련을 계속하도록 바란다. (*)

 

 

제 8 장 시의 마무리


1) 시를 마무리하기 전에


엄격하게 말한다면 시인들은 죽을 때까지 습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 공부가 끝난 완성된 시인이란 없다. 시인이 스스로 완전한 작품을 썼다고 만족한 나머지 거기에 안주할 때 그 시인은 시인으로써 생명이 끝난 셈이다. 시인들은 그래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하여 스스로 무엇인가 부단히 모색한다. 천성의 시인이란 없는 법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만이 훌륭한 시를 남긴다. 이번에는 시를 완성하는데 마지막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마무리 작업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서정주 시인이 <국화 옆에서>를 완성했을 때의 이야기를 작자 스스로가 자작시를 해설한(시창작법: 예지각 발행.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강우식 공저 중 ‘시작의 과정’) 부분을 살펴보자. 우선 시부터 읽어 보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는 무서리가 저리도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국화 옆에서>전문--

 

위의 시를 생각하고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3,4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시인은 ‘과수가 되어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40대 누이의 청초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무엇이라 표현하고 싶었으나 마땅히 표현할 길이 없어서 고심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한 3,4년을 보내던 어느 늦가을, 이른 새벽 숙취를 달래려고 마당에 있는 우물가로 나왔다가 새벽 달빛을 받으며 피어 있는 한 송이 국화꽃을 보았단다. 그러자 불현듯 오래 전부터 표현하고 싶었던 누이의 아름다움이 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거다. 청초했던 누이의 모습을 바로 이 국화에 비유하면 되겠다.”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이의 모습을 어디에 비유해 표현할까 하는 생각이 3,4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늦가을 새벽 국화꽃을 보았기에 제대로 형상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국화는 이 시의 주제인 3연의 <이제는 거울 앞에 선 내 누이>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그러므로 1,2연과 4연은 청초한 <누이>를 상상할 수 있도록 국화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누이의 모습을 <청초하고 아름답다.>는 그 무슨 형용사를 동원해서 표현했다면 아마도 이 시가 오늘날까지 명시로 우리에게 애송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 13행의 이 시에서 누이가 청초하다든가 아름답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청초함이나 아름다움을 이미 국화꽃이라는 이미지에서 추출할 수 있지 않은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간 안에 숨어 있는 셈이다. 좋은 시란 보통 생각하듯이 그렇게 단숨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2) 마무리를 잘 해야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도 시로서의 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실패한 작품이다. 그래서 훌륭한 시인은 시를 써 놓은 후 탈고하기까지 마무리 작업에 상당시간 뜸을 들인다. 마치 외출 준비를 하는 여인이 화장이라도 하듯 정성들여 써 놓은 시를 갈고 닦는 작업을 한다. 부수수한 채로 대중 앞에 나설 수도 없지만 지나치게 멋을 내면 천박하지 않겠는가. 시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리듬을 강조하거나 어떤 관념을, 관념 그 자체를 들어낸다거나 기교만 있고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면 빈축을 사기가 십상이다. 위에서 예로 든 서정주 시인도 3,4년이란 긴 시간을 누이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기 위해 뜸을 들인 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다.

우선,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둘째로는 시의 씨앗이 되는 청초한 누이의 이미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사실 시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런 점에서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거나 이런 점에서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시는 실패한 시라고 보아도 좋다. 아름다운 한마디 표현만으로도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점에 우선 비중을 두고 자신의 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탈고 과정에서 이런 점을 유심히 볼 줄 아는 사람은 일단 실패한 시를 쓰지는 않는다. 후대에 길이 남을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은 실패작을 쓰지 않는 일이 우선 중요하다. 그러므로 시를 써 놓은 후 마무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점이 충족되었다면 그 시는 제대로 된 시라고 보아도 좋다. 우선 말이 제대로 되어 있고, 불필요한 말이 없으며, 이미지가 제자리에서 제 기능을 다하고,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제대로 살아 있다면, 적어도 그 시는 실패작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제대로 표현되었는가를 살핀다.

둘째, 이미지는 제대로 살아 있는가를 살핀다.

셋째, 내재율은 제대로 살아 있는가를 살핀다.

넷째, 불필요한 말이나 중복된 말은 없는가 본다.


대체로 위와 같이 4가지 점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실패한 시를 한편을 예로 들겠다.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처절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라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하 략)


--- O O O의 <사랑>전반부---

 

따온 시는 소위 민중시인으로 1980년 경 신문이나 또는 다른 지면을 통하여 각광을 받던 모씨의 <사랑>이라는 시의 전반부이다. 이 시를 읽는 사람 모두가 시인이 쓰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에서 내재율이 살아 있다거나 이미지가 제대로 살아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드러내고자 하는 속뜻이란 아예 없고 하고 싶은 말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았음을 알 수 있다.


3) 이미지가 살아야


이제 우리는 왜 이 시가 실패한 시인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쓸 수 있는 어떤 관념을 그냥 서술했을 뿐이 아닌가. 행 가름도 했으니 시의 꼴을 갖추긴 했으나 지금까지 공부한 시에 대한 우리의 생각으로 본다면 시로 분류할 수는 없다. 차라리 성서 고린도전서 13장이 이 보다는 훨씬 시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시대적 격동기나 한순간 사회의 흐름에 따라 언론의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시가 있는 것은사실이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는 시가 될 수는 없다. 잘된 시는 아니지만 필자의 <분재(盆栽)>라는 시도 한번 예로 들겠다.

 

애초엔 등이 곧은 선비였다.

가슴엔 푸르름을 키우며

높은 하늘로 고개를 든 선비였다

예리한 삽이 뿌리를 자르고

화분에 가두기까지


푸르름을 키우면 키울수록

가위질은 멈추질 않았다

등이라도 곧추세우려면

더욱 조여 오는 철사줄

십년을 또 십년을.....


나는 꼽추가 되었다

가슴에 키우던 푸르름을

언뜻 꿈에서나 보는

등 굽은 꼽추가 되었다

사람들은 멋있다 한다


--이길원 <분재>전문--

 

사람들은 한 생애를 살아오며 그의 꿈이라든가 그가 추구하는 어떤 이상이 좌절되기 일쑤다. 자기의 주장이나 신념조차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하여 굴절되기도 한다. 제대로 등 한번 펴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그런 이면을 숨긴 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살면서 스스로 비굴감조차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자신은 도덕적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위하며 살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스스로의 과오에도 관대하기도 하며, 때로는 너무 쉽게 어떤 불의도 용납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살이에 얽매이고 적당히 길들여졌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 때때로 잘난 척하기 일쑤이다. 그와 같은 나의 번민을 시로 옮겨 놓고 싶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하는 점 때문에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분재를 유독 좋아하는 친구 집에 들렀다가 그 친구가 소나무 분재를 다듬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모양을 내기 위해 잎을 다듬고 철사 줄을 구부리고 동여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소나무는 쭉쭉 자라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그렇게 잎이 잘려 나가고 어깨가 동여매진 채 하늘이 아닌 땅 쪽으로 구부러지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내 스스로 소나무가 되는 고통을 느꼈다. 그런 연후에 나온 시가 위의 분재이다. 만일 내가 이런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보자.

 

나의 꿈은 늘 좌절되었다

등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 온

나의 젊음

때로는 나의 은빛 머리에서

세월을 읽은 사람들이

좌절된 나의 의지와 이상에

...................

 

어쩌고 해 보았다면 과연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겠는가. 그리고 읽는 사람이 시에서 이야기하려는 점이 무엇이며 시의 핵심이 무엇인지지도 모를 것이다. 조급한 시인들이 바로 그렇게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서술해 놓고 무슨 큰 철학이라도 이야기한 듯 착각에 빠지기 쉽다.

예문으로 든 위의 시는 제목이 <분재>이지 사실은 우리 자신들 삶과 의식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시를 예문으로 든 이유는 독자들도 시를 쓸 때 어떤 상황이나 느낌을 곧바로 표현하려 하지 말고 한번쯤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가령 자연의 어떤 상태나 또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어떤 상황에 대비하거나 비유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할 수 있는가 보라는 말이다. 그럴 때 시가 시로써 제 맛이 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 그럴 때 시가 또한 감동을 줄 수 있다. 시를 써 놓고 마지막 단계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제대로 표현되었는가? 그리고 들어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제대로 들어냈는가?’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러면 적어도 실패한 시는 쓰지 않는다.

 

그동안 시에 대한 나의 견해가 다소라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어 좋은 시를 쓰는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는 많은 솟대 문인들이 배출되길 바라며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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