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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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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詩 읊다]- 詩 몇쪼가리
2016년 05월 05일 00시 09분  조회:4715  추천:0  작성자: 죽림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필리핀 어느 대학 여자화장실 벽에 쓰인 낙서
       
           드니스 두해멀(D Duhamel·1961~)


 
기사 이미지
잘 가꾸는 것을 잊지 마라. 멋 부리는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여드름투성이 여자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

입에서 박하향이 나게 하고 이빨은 늘 희고 깨끗하게.

열 개의 진주처럼 빛나게 손톱을 칠해라.

(...)

갈망에 무릎 꿇지 말고 늘 날씬해야

DA 300

 


뽐내며 춤출 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릴 수 있지.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

교수와 결혼하지 말고 학장과 해라.

백작과 결혼하지 말고 왕과 해라.



희극적 묘사지만 이 시는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다양한 허상을 보여준다. 스스로 존엄한 여성(인간)이라면 이런 주문을 정면으로 거부할 것이다. 타자의 시선과 허영에서 벗어나 자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여성뿐 아니라 모든 존귀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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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 유경희(1964~ )


 
기사 이미지
초지를 찾을 수 없어서 집을 짓기 시작했지

바닥을 놓으니 땅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기둥을 세우니 풍경이 상처를 입는다

DA 300

 

지붕을 만드니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낮에는 갈 곳이 없었고 밤에는 무엇엔가 쫓겼어

내가 지상에서 바라는 것 하나

우루무치행 편도 티켓 하나


질 들뢰즈에 의하면 진리는 늘 생성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구축(構築)의 감옥을 거부한다. 그것은 유목민(노마드)처럼 끝없이 탈주한다. 집을 짓는 정주(定住)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땅의 노래”를 들을 수 없게 하고 “풍경”에 상처를 입히며,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한다. 시인이 지상에서 바라는 유일한 것은 “우루무치행 편도 티켓 하나”이다. 그는 정주를 거부하며 고원(高原)에서 고원으로 이어지는 탈(脫)영토화의 삶을 꿈꾸고 있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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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 심언주(1962~ )


 
기사 이미지
뭉텅뭉텅 쏟아 놓은 아이들

아침마다 피는 아카시아 꽃

앞산, 뒷산

정강이에 발등에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토끼풀 꽃, 찔레꽃

얼굴이 하얀 아이들

바람만 불어도 까르르 까르르

DA 300

 


들길을 흔들며

숲길을 흔들며

햇빛 공화국으로

햇빛 네트워크로


꽃들이 세상을 덮을 때, 세상은 유쾌한 악보가 된다. 어린 음표들이 “까르르 까르르” 웃는 “햇빛 공화국”에서의 한때는 얼마나 큰 위로인가.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아픈 텍스트이지만, 자연은 한 번도 어김없이 때맞추어 우리를 방문한다. 그중에서도 만화방창(萬化方暢), 봄의 ‘위문공연’이 최고다. 잠시 위로받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도 좋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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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신대철(1945~)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박꽃은 소음(“벌떼”)과 “뜬소문”과 공격성(“침”)을 다 내려놓은 상태의 고요함을 상징한다. 내 안의 프리즘이 완벽하게 지워진 상태에서 사물과 만날 때 사물의 속이 들여다보인다. 그제야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욕망과 소음으로 어지러운가. 박꽃은 담비들도 다 돌아와 제 집에서 잠든 시간에 피어난다. 검은 밤과 흰 박꽃과 물소리로 단순화한 수묵(水墨)의 공간에서 나를 지우고 없는 듯 있기. 싸우지 않고 그냥 존재하기. 신대철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수록.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

 

 

 

 

어부(漁夫)
-김종삼(1921~1984)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그 흔한 문학상도 별로 받지 못했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김종삼은 수많은 시인들로부터 오래도록 ‘내밀한’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순수하고 소박하고 맑고 따뜻하다. 바닷가에 매어진 채 외로이 출렁이는 작은 배 한 척의 풍경이 그대로 김종삼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풍경에는 삶의 난제(難題)와 희망이 고즈넉하게 들어가 있다. 존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풍랑”도 날을 세우지 않고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겠다는 포부도 요란하지 않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는 생각도 허풍스럽지 않다. 그러니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는 중얼거림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가.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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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1

동물계 척추동물문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 52

- 권혁웅(1967~ ) 

 

 

소가 트림의 왕이자 이산화탄소 발생기라면

이 동물은 방귀의 왕이자 암모니아 발생기입니다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점점 소파를 닮아가고 있죠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배꼽에 땅콩을 모아두고 하나씩 까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렇게 위장하고 있다가 늦은 밤이 되면

진짜 먹잇감을 찾아 나섭니다 치맥이라고 하죠

치맥이란 술 취한 조류인데 날지 못하는 녀석입니다

이 동물의 눈은 카멜레온처럼 서로 다른 곳을 볼 수 있죠

지금 프로야구 하이라이트와 프리미어리그를 번갈아 보며

유생 때 활발했던 손동작, 발동작을 회상하는 중입니다

 (......)

 

 

시는 새로운 렌즈로 세계를 읽는다. 이 시는 ‘고급 동물’인 “남자 사람”의 하루를 코믹하게 건드린다. 세상에, “치맥”이 “술 취한 조류인데 날지 못하는 녀석”이라니. 낄낄거리며 이 시를 읽다 보면 어느덧 “동물의 왕국”에서 지리멸렬한 생애를 보내고 있는 ‘내’가 보인다.<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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