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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시인 - 윤동주
2016년 06월 14일 21시 48분  조회:4105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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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무엇일까? 하는 건 어리석은 질문이겠지. 저마다 취향이 다르고 감정이 저마다인데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가 끼어들 소지가 좁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궁금하여 언론사가 나서서 알아본 적이 있어. KBS가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국민 설문조사를 했는데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1위를 차지한 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었고 시인들 사이에서 으뜸으로 꼽힌 시는 윤동주의 <서시>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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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시 이외에는 들여다본 적 없는, 척박 그 자체였던 나의 10대 시절에도 윤동주의 <서시>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었지. 워낙 시험에 자주 나오는 시이기도 했고 또 길지도 않아서 아예 외워 버렸던 기억도 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지금 외워 쓴 거다. 으쓱. 아직 내 머리도 쓸모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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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어. ...이 일대는 그야말로 ‘불령선인’들이 일제 강점기 내내 으르렁거렸던 곳이지. 윤동주가 두 살 때 일어난 3.1운동 당시에는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어. 훗날 윤동주도 다니게 되는 명동학교 브라스밴드 (그 시대에 브라스밴드라니!)가 시위에 앞장섰고 일본 영사관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19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기도 했어. 이들의 합동 장례식 때는 5천명의 조선인이 몰려들어 “해방되면 꼭 고국에 묻어 주겠소다!” 맹세하기도 했다니 분위기를 알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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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그 일대에서 유지로 통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어. 반일 분위기가 농후한 그곳에서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기독교 청년.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머리를 수그리고 침묵시위를 벌이기 일쑤였고 신사참배 거부하고 일본 경찰들 멱살 잡기는 으뜸이었던, 숭실학교를 다녔던 그는 자신의 진로를 ‘태극문양 널려 있고 조선어 강의도 하던’ 연희전문 문과로 잡았지. 이 과정에서 그때껏 유순한 청년이었던 윤동주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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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문과 가면 굶어 죽는다고 “네가 문과 가면 신문 기자 밖에 더하겠냐?”고 을렀고 윤동주는 이때만큼은 아버지에게 격렬히 대들며 단식투쟁까지 벌였다고 해. “굶어죽어도 나는 문과에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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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물그릇이 휙휙 날아다니는 활극이 여러 번 펼쳐진 끝에 할아버지에 의해 결판이 난다, “공부를 할 사람은 동준데 동주가 의학을 아니 하겠다니 어찌 하겠쑤. 문과로 보내기유.” 그런데 할아버지는 동주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대. “고등고시를 봐야 한다. 봐서 꼭 성공해야 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동생에게 이렇게 얘기했다지. “고등고시는 법과를 해야지 문과를 해서는 안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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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그는 서울에 입성하고 짧은 젊음의 황금기를 맞아. 그가 연희전문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는 그 후배에게 했다는 자랑으로 미루어 짐작이 가. “문학은 민족 사상의 기초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이벌이었던 보성전문 학생 들으면 발끈할 소리였겠지만. 그는 연전시절 수많은 아름다운 시들을 써냈다. 윤동주는 졸업하기 전에 자신의 시 가운데 19편을 묶어서 한정판 시집을 만들고자 했어. 그 제목으로 생각해 놨던 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고 그 시집의 서문 격으로 쓴 게 바로 우리가 아는 ‘서시’(序詩)야, 시를 지은 뒤 꼼꼼히 날짜를 적은 덕분에 우리는 이 시가 세상에 나온 날을 알 수 있어. 1941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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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슬슬 궁금해지지. 사각모를 쓴 윤동주는 사실 매우 뛰어난 미남이야. 저 외모에 운동도 잘하고 성품도 부드럽고 거기에 아름다운 시까지 써내리는 문학청년이라면 그를 따르는 서울의 신여성들이 서대문에서 연전 캠퍼스까지 줄을 섰음직도 한데 과연 청년 윤동주는 어떤 사랑을 누구와 나누었을까. 기실 그의 시를 보면 범상치 않은 것들이 엿보이지. 이를테면 툭하면 등장하는 미지의 여인 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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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내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습이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내려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이게 연전 1학년 때 쓴 건데..... 여기서 등장하는 순이는 계속 그의 시에 출몰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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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소년 중)” 같은 짝사랑을 토로한 듯한 시, 그리고 이별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시까지.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욱을눈이 자꾸 내려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1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눈 오는 지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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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랍게도 윤동주는 여자 앞에서는 무척 쑥맥이 되는 성격이었던가 봐. 여자가 윤동주에게 먼저 호감을 드러내도 수줍어하면서 피했고 여자에 대한 진지한 호감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거야. 요즘 말로 ‘초식남’이라고나 할까. 기껏 윤동주의 여자 관계를 ‘밝힌다’는 옛 후배의 전언이 이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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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문과 졸업반 여학생이 있었고 그와 협성교회와 바이블 클래스를 함께 했다. 동주 형은 물론 나이 어린 나에게 그 여자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든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저- 푸른역사 중) 그리고 다른 케이스로 일본 유학 중에 동생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며 “이 여자 어떠냐?”고 물었고 눈치 빠른 동생이 오빠가 이 여자를 마음에 두는구나 여기고 집안에 알려 온 집안이 기뻐했으나 그만 “그 여자 약혼했다더라.”는 편지로 싱겁게 끝나 버린 일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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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조선 말이 곧 사라질 테니 조선말로 된 것은 악보라도 다 모으라”고 했던 윤동주는 그 억척을 여자 사귀는 데에는 발휘하지 못했고 의대 가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단식투쟁을 하는 결연함을 여자 앞에서는 보여주지 못했어. 사람들의 답답한 속을 그야말로 그린 듯이 풀어낸 가객 김광석이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라고 버스 떠난 뒤에 노래한 것과 유사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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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너무도 아깝게 세상을 떠나고 해방이 왔을 때 그의 친구들은 해방 몇 달 전 아깝게 죽어간 친구의 기록을 모아 펴내게 되는데 윤동주의 시를 일부 보관하고 있다가 내놓은 친구 강처중은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네.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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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토해내지 못하고 간직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일 거야. 사랑은 소화불량 같은 거라서 손톱 밑을 따든 토하든 아래로 내리든 얹힌 것들을 기어코 내보내게 만드는 습성이 있잖아. 하지만 윤동주는 그 젊음의 소화불량을 꿋꿋이 그리고 아프게 삼키고 누르고 참았던 것 같네. 오로지 펜 끝 잉크에만 그 마음을 실어 백지에 흘려 보내면서. 바람에 별이 스치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그 심경 나는 이해가 되네 낄낄. 원래 입 밖에 내면 순간 속은 후련할지도 몰라도 그거 치우기엔 민망한 토사물이 되기가 십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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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를 살았던 한 여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줄줄 외우고 다닐 서시를 쓴 시인이 스스로를 하얗게 태워 가며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하는 윤동주의 토로에 공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그는 이렇게 노래했으니까.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 나 하나를 헨 다음 별 둘 너 둘을 셀 ‘그대’는 없었으나 아침은 오고 내일은 밝고 청춘은 아직 멀었다는 뜻이었을까? 아무튼 윤동주는 그렇게 영원한 청년으로 우리 역사에 남는다. 영원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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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일본식 이름: 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슈[*]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목차

   [숨기기] 
  • 1 생애
    • 1.1 생애 초반
    • 1.2 소년 시절
      • 1.2.1 중학 시절
      • 1.2.2 연희전문 시절
    • 1.3 일본 유학
      • 1.3.1 창씨개명
      • 1.3.2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 1.4 투옥과 최후
    • 1.5 사후
  • 2 작품
  • 3 경향 및 평가
  • 4 학력
  • 5 상훈 경력
  • 6 기념관과 기념물
    • 6.1 기념관
    • 6.2 기념물
  • 7 가족 관계
  • 8 기타
  • 9 대중 문화에 나타난 윤동주
    • 9.1 방송
  • 10 같이 보기
  • 11 주석
  • 12 참고 자료
  • 13 바깥 고리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2]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3]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기숙사인 핀슨홀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는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소년 시절[편집]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4]

중학 시절[편집]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편집]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유학[편집]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4]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5]

창씨개명[편집]

 
서시 육필 원고 (1942년)
 
윤동주의 원고 원본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6]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7][8] 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참회록을 썼다.[9]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편집]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10]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편집]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향년 29세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 말기에 있었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11]

사후[편집]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의해 제정되었다.

작품[편집]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새 명동》
  • 《서시(序詩)》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경향 및 평가[편집]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12][13]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14]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15]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1]

학력[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만주 북간도 밍둥 소학교(명동소학교) 졸업
  • 만주 지린 다라쯔 학교(대랍자학교) 수료
  • 만주 북간도 언전 중학교(은진중학교) 수료
  •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 만주 지린 광밍 중학교(광명중학교) 졸업
  • 경성 연희전문학교 졸업
  • 일본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 일본 도시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제적

상훈 경력[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서울 숭실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 국민훈장
  •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기념관과 기념물[편집]

기념관[편집]

연세대학교
 
핀슨홀과 윤동주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연세대는 2013년 2월 6일, 캠퍼스 내의 핀슨홀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개편할 것을 발표하였다.[16]
종로구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종로구는 2012년 7월 25일,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 문학관의 개관식을 연다고 발표하였다.[17]
연변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연길의 용정 중학교에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18]

기념물[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세대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 1985년부터 《월간문학지》에서 그를 기념한 「윤동주문학상」 수상자를 매년 선정, 수상하였다.
  •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9]
  • 1992년 9월, 모교인 용정 중학교에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20]
  • 1995년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21] 2005년에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그 옆에 건립되었다.[22] 또한 교토 대학 부근 그가 머물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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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부 : 윤재옥(尹在玉, 1844 ~ 1906)
  • 조부 : 윤하현(尹夏鉉, 1875 음력2.1 ~ 1948 9.4)
  • 조모 : 강씨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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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모 : 윤신영(尹信永)
    • 고모부 : 송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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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사촌 : 독립운동가 송몽규 宋夢奎, 1917.9.28 ~ 19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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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종조카 (송몽규의 조카) : 소설가 송우혜(宋友惠, 1947.12.5 ~ )
  • 부 : 윤영석(尹永錫, 1895 8.1 ~ 1965 4.20)
  • 모 : 김용(金龍, 1891 10.1 ~ 1948 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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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이 : (요절)
    • 누이 : 윤혜원(尹惠媛, 1924 ~ 2011.12.11)
    • 매제 : 오형범(1924 ~ 2015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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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카 : 오철주
    • 남동생 : 윤일주(尹一柱, 아명 윤달환, 1927 11.23 ~ 1985 11.28 前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
    • 제수 : 정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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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카 : 윤인석(尹仁石, 1956 ~ 現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 남동생 : 윤범환 (요절)
    • 남동생 : 윤광주 (尹光柱, 아명 윤성주, 1933.5.15 ~ 1962 11.30 시인)
  • 외삼촌 :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1868 9.12 ~ 1942 10.29)
  • 당숙 : 윤영춘(尹永春, 1912 12.12 ~ 1978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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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종형제(윤영춘의 아들) : 가수 윤형주(尹亨柱, 1947 11.19 ~ )
  • 사돈 : 정병욱(鄭炳昱, 1922 4.21 ~ 1982 국문학자)

기타[편집]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1990년대 이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창씨개명설을 지적받게 되자 윤동주를 연구하던 한 교수는 이를 언급하기를 꽤 난처해했다 한다.[6]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2005년 이후에 공식적으로 언급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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