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이미지와 상상력
강사/김영천
1)상상력의 전개 양상
먼저 상상력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도 늘 많이 쓰고
또 잘 알고 있는 상상력에 대해서 막상 시에 대비하여선
낯설어지는 단어입니다.
상상력이란 과거에 체험했던 이미지를 재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즉 어떤 상황에 의해 생긴 감정을 하나의 詩작품
으로 형상화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숭원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제가 이렇게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말씀 드리는 것은 좀 어렵기는 해도
여러분의 지식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니, 너무
어려우면 그냥 읽고만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전환되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상상력의 작용이다. 상상력은 시심을 발동
시키고 사유를 발전시켜 구체적인 시작품으로 시상을 완결
지어 주는 창조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시인이
체험한 다양한 내용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상상력이 중시된다.
이 시적 상상력은 우리의 메마른 삶에 생기를 주고 허무의
사막과 암흑의 동굴을 의미있는 삶의 터전으로 전환시킨다.
우리는 시작품을 통하여 시인의 상상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수용한다. "
이어서 그는 미학자나 문학이론가들이 상상력을 구분하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했는데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보기
쉽게 나누어서 설명드려보지요.
< 콜리지>
제1상상력: 인간이 어떤 대상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지각능력
제2상상력: 대상을 재구성하고 부분과 부분을 통합하는
의식적인 상상작용을 뜻한다.(시에서 중시)
< 러스킨>통찰적상상력, 연상적상상력, 명상적상상력
<윈체스터>창조적상상력, 연상적상상력, 해석적상상력
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깊이 알 필요없고 그렇게 나누는 것이다
라고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문학비평에 가장 많이 쓰이는 바슐라르의 상상력
을 말씀드리는데요. 이 이론은 가능하면 알고계시면 좋습니다.
문학비평에 이 이론을 적용하거나, 그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 바슐라르>
상상력을 창조의 원동력이자 존재생성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상상력은 인간이 접촉하는 네 가지 근원적 물질
즉 불, 물,공기,땅이라는 물질의 본질과 관련되어 생성된다고
본 것이지요. 대상의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 물질의 본성을
꿈으로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상과의 진정한 만남에
이르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것이 유명한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입니다만, 다 외우지 마시고 그냥, 바슐라르
의 물질적 상상력의 이론은 불, 물, 공기, 땅 이 네가지의
물질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 정도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서정주시를 연구한 논문의 제목을 보면 조금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예를 들면 <서정주 시에 나타난 물의 의미>, <서정
주 시에 있어서의 바람 이미지 연구>, 여기서 바람은 공기로
보면 되겠습니다. <서정주 시에 나타난 물질적 상상력 연구>
등 문학작품을 바슐라르 물질적 상상력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논문이 아주 많습니다.
오늘 강의는 너무 딱딱하네요.
그러나 어차피 거쳐야할 과정이니 그렇게 아시고, 지금까지
배운 것 중에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이란 것이 있고,
여기엔 물, 불, 공기, 흙이 있다더라는 것만 아시면
아주 잘 배운 것입니다.
2)이미지는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힘
상상력은 영어로 imagination 이구요. 이미지는 image로 그
어원이 같습니다. 어떤 이는 상상력과 이미지는 동전의 양면
처럼 불가분의 관계라 하지만 어원상으로 보면 분명 한 몸과
같습니다.
루이스는 "이미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그런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하여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고 말했습
니다. 이 말은 결국 이미지에 의해 독자들이 시적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상상력을 빼놓고는 이미지를 이야기 할 수 없고
이미지를 빼놓고는 상상력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상상력에 의하지 않고는 이미지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독자들 또한 이러한 이미지에 의히여 시적 세계와 의미들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상상을 불
러 일으키는 근원이며, 시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합
니다. 따라서 시인은 이미지라는 장치를 통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는 그 상상력을 통해 시인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정현종님의 <초록 기쁨-봄숲에서>를 읽어보겠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神殿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즈시 주고 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다 읽으셨으면 모두 한번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마음껏
상상을 해보세요. 어떤 그림이 떠오르십니까?
봄날 숲 속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축제를 느끼십니까?
아마도 여러분의 상상은 푸르른 나무들의 온 몸에서 배어
나오는 생명의 환희, 싱그러움, 경이와 아름다움이 마음
의 눈을 통해 하나의 선연한 그림으로 띄어 올릴 것입니다.
출렁이며 내려오는 햇빛의 살결, 그 햇빛으로 만들어진
왕관, 그 왕관을 저마다 쓰고 있는 초록, 꽃들의 모습, 스
스로도 어쩔 줄 모르고 솟아나는 초록의 기쁨들을 떠올리면
어느새 여러분도 하나의 꽃이나 초록이 되어 그 생명의
향연에 동참하는 착각에 빠질 것입니다.
김광균님의 <설야>를 아주 예쁘고 낮은
목소리로 두 번만 연속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매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희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태일님의 해설을 잠깐 들어보지요.
"위의 시 역시 이미지를 통해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들의 상상에 호소해 온다. 우리에게 눈 내리는 겨울 밤
을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황홀한 체험으로 느끼게 해주며,
깊고 그윽한 정서의 세계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순전히
이미지 때문인 것이다. 특히 눈 내리는 모습을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바꾸어 버린 청각적 이미지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켜서 강렬한 힘으로 우리들을
사로 잡아버린다."
앞으로 이미지의 종류에 가서 청각적 상상력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쉬운 이야기들을 학문으로 만드니 복잡한 감이 있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에서 마치기로 하구요.
좋은 시 감상에 들어가지요.
『시안』2001,가을호에 실린 길상호님의 <나무의 결을 더듬다>
를 한번 읽어보지요.
그녀가 쓰던 나무주걱을 꺼낼 때
나는 지나온 길과 만나게 된다
나무의 결을 따라 깊이 새겨 있는
발자국, 그 소리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여자,
돌아오지 않는 사내를 마음에 묻고
그을음 어두운 부엌에 혼자 서서
뚝뚝 수제비 반죽을 떼 내고 있다
주걱 위에 올려진 새하얀 반죽이
숟가락 끝에서 잘려 나갈 때
거칠게 일어나곤 하던 나무의 결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걱 위에서
그녀 지워 버렸을까. 끓는 가슴에
하나 둘 응어리로 떠올랐을 얼굴
휘휘 저으며 익혀내고 있던 것일까
이제 다시 주걱의 결을 더듬어 보니
그녀 옹이로 단단하게 박혀 있다
결은 옹이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더 촘촘하게 파장을 그린다
그 상처를 쉽게 지나칠 수 없어
오래 서성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나무의 결을 더듬어 가며 나는
아궁이의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 작가는 신춘문예출신의 전도가 유망한 작가의 글입니다.
같은 책에 실린 오규원 교수님의 <포도와 길>을 싣습니다.
마른 잎들이 서로 몸을 말며 포도는
서로 몸을 밀치며 둥글둥글해져 있습니다
먼저 익은 포도송이는 덩굴의 길 밖에 붙어
어둑어둑 썩고
썩고 있는 포도송이와 포도송이 밑으로
망가지며 뭉개지며 문드러지며 달콤한 길
오늘은 여기서 강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여기 올린 시들은 여러분들께서 잘 소화시키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읽었지만 오규원님의 시는 아주 잘 된 시이군요.
시는 이렇게 써야 합니다.
그렇게 쓰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합니다.
앞으로 시간들은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말 알아야할 것들이 많으니 더욱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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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선에 기대어
―남진우(1960∼)
이른 아침 눈뜨면
머리맡에 배 한 척 밀려와 출렁이고 있네
찢긴돛폭사이말간햇살들바삭거리며부서져내리고있네
그 배 문가에 기대어 놓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한없이 걸어가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어디론가 가고 없는 배
잠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종이를 접어 배를 만드네
한 척 두 척 내 손을 떠난 배는
내 방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나가고
험한 물살에 시달리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리고
다시 누워서 눈을 감으면
이 밤도 저 멀리서 흔들리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네
물살에 실려 그 배는 이리저리 떠돌다
잠에서 깰 무렵이면 어느덧 내 머리맡에 와 있네
배를 얻고 잃기를 되풀이하며
매일 낮 매일 밤 나 세상을 떠돌았네
닿을 길 없는 부두를 찾아 덧없이 헤매 다녔네
어느덧 늙고 지친 내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와 나를 굽어보고 있는 낡은 배 한 척
부서진 뱃전에 머리 기대고
나 다시 떠나야 할 하루의 먼 길을 헤아려보네
“내 얘기네….” 이 시의 설득력 있는 쉬운 은유에 동감할 직장인이 많을 것이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폭삭 지쳐서 집에 돌아오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어느새 노년! 대다수 현대인의 삶이다. 그중 어떤 이는 간간, 잠들기 직전이나 잠에서 막 깼을 때, 까마득히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찰랑거리며 밀려와 가슴이 아리기도 할 테다. 그런 때가 있었지. 훤칠한 돛을 올리고 꿈을 향해 늠름하게 떠날 참인 새 배 같았던 나!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요,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 채, 이제는 아무 지향도 없이 용골 삭은 배가 되었구나.
화자는 어영부영하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걸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세파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배도 흔들려 마모됐단다. 자아의 투영이며 자아실현의 꿈인 배. 그 배는 화자가 현실을 버텨나가게 하는 힘이 돼 주기도 하지만, 배 때문에 그와 현실의 관계는 차가운 미지근함으로 어딘지 외롭다. 화자의 몸은 현실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다른 곳을 떠돈다. 그의 얼굴에는 그 다른 곳의 그림자가 어룽거린다. 폐선, 낡아버린 꿈의 유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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