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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위대한 작곡가와 "9의 징크스"
2016년 08월 13일 17시 33분  조회:5676  추천:0  작성자: 죽림

 

​위대한 작곡가에게는 '9의 징크스'가 있다

 

 

​베토벤·슈베르트·브루크너 등

교향곡 9곡 남기고 목숨 잃어
17세기 오페라 반주였던 '심포니',

청중 요구에 맞춰 악기만 합주
하이든이 '4개 악장' 형식 갖췄죠

     벤의 '운명' 슈베르트의 '미완성'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 작품들은 모두 교향곡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스트라가 출연하는 대규모 음악회에서는 이런 교향곡을 반드시 한 곡은 연주한답니다. '교향곡(交響曲)'은 영어 '심포니(symphony)'를 번역한 말인데,

   니는 '소리의 조화' 또는 '연주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심포니아(symphonia)'에서 유래한 단어예요.

  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심포니는 '함께 소리를 낸다'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되는 '합주'를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처럼 '오케스트라가 조화로운 합주를 하는 클래식 작품'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17세기 초부터라고 합니다.

◇오페라의 반주였던 '심포니'

  만 17세기 초 유럽에도 지금 같은 거대한 오케스트라는 없었어요. 그저 음역이 높고 낮은 다양한 악기가 모여 합주하는 정도였죠.

   합주는 주로 성악곡의 반주나 오페라의 배경음악으로 활용되었다고 해요. 그러다 성악가들이 쉬는 틈이나 오페라 막간에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만 합주하는 '심포니'가 등장했다고 해요.

   데 오페라보다 오히려 심포니를 더 재미있어하는 관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자 오페라나 성악가의 콘서트가 아니라 심포니만을 연주하는 음악회도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스레 작곡가들도 이런 청중의 요구에 맞추어 '심포니'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교향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만 이때 만든 심포니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향곡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짤막하게 만든 합주 음악을 모아놓다 보니 악장이 너무 많고 중간중간에 춤곡을 많이 넣어 산만한 '댄스 메들리'처럼 들리는 작품이 많았어요.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이에요.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렇게 뒤죽박죽이던 교향곡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죠.

   든은 '교항곡의 악장은 넷이어야 한다'고 정하고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템포 느린 곡, 3악장은 세 박자로 된 춤곡,

  4악장은 템포 빠른 곡으로 지어야 훌륭한 심포니가 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이든은 이런 기준에 따라 직접 교향곡 104곡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들이 비로소 초창기 심포니와 구별되는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위대한 작곡가의 '교향곡 아홉수'

  하이든이 교향곡 시대를 열자 천재적 작곡가들이 뒤를 이어 훌륭한 교향곡을 쏟아냈어요.

  '불후의 천재' 모차르트는 35년이란 짧은 생애에 41곡을 남겼어요.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장점을 골고루 흡수해 자신의 독창성을 불어넣은 교향곡을 9곡 지었는데,

   이 작품들은 지금도 위대한 걸작으로 일컫는답니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베토벤, 드보르자크, 슈베르트, 윌리엄스예요. 위대한 작곡가로 불리는 이들은 공교롭게도 4명 모두 죽기 전까지 교향곡 9곡을 남겼어요. /Getty Images / 이매진스·위키피디아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작곡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능가하려고 애썼어요.

  베토벤을 너무나 사랑했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비슷한 작품들을 작곡한 반면,

   멘델스존이나 슈만 같은 작곡가들은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음색을 부각해 낭만적 정서를 강조한 교향곡을 지었어요.

   프란츠 리스트는 교향곡 형식을 조금 부드럽게 한 '교향시'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답니다.

   안톤 브루크너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은 지금도 세계적 지휘자의 내한 공연이나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 공연 때 단골처럼 등장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두 사람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웅장한 교향곡으로 유명해요. 말러의 8번 교향곡이 처음 공연됐을 때에는

   연주자가 무려 1000명 동원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말러의 8번 교향곡을 '1000명의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해요.

한편 음악계에서는 "위대한 작곡가는 교향곡을 10곡 이상 지을 수 없는 '9'의 징크스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브루크너를 비롯해 베토벤과 슈베르트, 드보르자크, 본 윌리엄스 같은 훌륭한 작곡가들 모두 교향곡 9곡을 작곡한 뒤 세상을 떠났어요.

   말러도 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1악장 악보만을 남긴 채 숨을 거두어 '9의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9의 징크스'가 모든 작곡가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에요. 20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공산주의 정권의 검열과 탄압에도 교향곡을 15곡 남겼고, 그의 선배 격인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도 무려 27곡을 남겼답니다.

◇교향곡의 부제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처음 교향곡을 접할 때에는 우선 제목에 흥미가 가는 교향곡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아요.

   유명한 교향곡은 그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곡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답니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교향곡이 갖춰야 할 네 악장 중 1·2악장만이 남아있고

   3·4악장의 완성된 악보가 발견되지 않아 '미완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이에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베토벤이 1악장 첫 부분을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표현한 것을 계기로

  '운명 교향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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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러`도 못 피한 교향곡 9번의 징크스

말러는 왜 교향곡 9번의 작곡을 무서워했을까?

 

 “그의 머리는 온통 일로 가득 차 있었고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화를 내었다... 나는 자신의 의지와 존재를 이미 포기했다. 그의 천재성은 나의 존재를 소모시켰고 나는 마치 줄에 묶여 끌려다니는 것처럼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그는 그조차 몰랐다. 그에게는 작곡, 오직 그것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풍경화가 안톤 쉰틀러의 딸이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 말러가 1902년 23살의 나이로 마흔 살이 넘은 말러와 결혼한 지 10년쯤 되던 시기에 남긴 글이다. 말러는 이 무렵 부인 알마가 나중에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되는 한 건축가와 가까워지자 젊은 아내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프로이트를 찾아 상담하는데 프로이트는 말러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원리를 즉각 이해하는 천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말러도 못 비껴간 교향곡 9번의 징크스

 

  말러는 타고 난 천재이자 천재 특유의 신경증적 성향을 지닌 정서불안자였다.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소수 민족 중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인종적 차별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격렬한 성격의 독학자인 아버지와 교양 있는 집안의 섬세한 여성이었던 어머니의 끊임없는 갈등, 특히 아내에 대한 열등감을 육체적 학대로 보상받으려 한 아버지의 난폭함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경멸하고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병적으로 갖게 했는데 나중에 그를 상담한 프로이트는 놀랍게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14명이나 되는 말러의 열네 남매들 중에서 여섯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항상 앓거나 병들어 죽었으며 특히 막내는 자살까지 하는데 이같은 가족력은 죽음에 대한 말러의 남다른 공포를 이해하게 한다.

 

  베토벤은 제9번 교향곡 ‘합창’까지 모두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슈베르트 또한 교향곡 8번을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9번까지 작곡하고 세상을 등졌다. 어디 그 뿐인가. 브루크너와 드보르작 역시 교향곡 9번까지만을 남기고 떠났다. 교향곡 8번을 작곡한 후 말러는 “9번을 작곡하면 나도 죽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실상 교향곡인 다음 작품을 ‘대지의 노래’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제10번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이제 겨우 위기는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그는 9번 교향곡의 초연 연주도 듣지 못하고 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그토록 9번 교향곡 징크스를 두려워하며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말러도 결국 9번 징크스의 또다른 주인공이 된 셈이다. 

 

 

 

거듭되는 실패, 그러나 계속되는 작곡

 

  1888년 5월에 라이프치히 극장 일을 그만 둔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제1번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하고 싶어했지만 초연은 그의 부다페스트 시절 필하모니 협회의 연주회에서 이루어졌고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청중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평론가들은 작곡가가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다고까지 여겼다. 첫 악장의 반응은 아주 나쁘지 않았지만 극장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울려대는 마지막 두 악장들을 청중들은 참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지휘한 말러는 교향곡 1번의 초연 이후 친구들을 멀리 할 정도로 완전히 실의에 빠졌다.

 

  이후 교향곡 2번의 작곡까지에는 무려 7년이나 걸렸다. 2번의 초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주선으로 베를린의 필하모닉 콘서트장에서 1895년 3월 4일에 이루어졌다. 말러가 직접 지휘했지만 연주장은 절반 밖에 차지 않았고 비평가들의 평 또한 부정적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함부르크의 부유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한 번 베를린에서 연주하게 된다. 비록 표가 예매되지 않아 초대권을 남발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비평가들은 여전히 까다롭게 굴었으나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 같은 지지자들도 등장하였다. 그 뒤 말러는 실뱅 뒤퓌의 초청으로 리에지의 누로 콘서트에서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1900년의 겨울 뮌헨 연주는 마침내 말러를 유명한 작곡가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을 음악가 반열에 올리게 된 이 곡을 그는 1907년 비인에서 이별을 고할 때 그리고 1908년 뉴욕과 파리에 자신을 소개할 때 선택하기도 했다.

 

  교향곡 3번의 초연은 1897년 3월 9일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대개의 말러의 작품 초연이 그랬듯이 역시 청중들의 야유로 끝났다. 비평가들 또한 적대적이어서 그 다음날 이들에 의해 말러는 '음악적 코미디언', '최악의 농담꾼'으로 묘사되었다. 이로부터 5년 후 1902년 6월 그의 교향곡 4번 전곡이 리네란트에서 연주되었는데 이번에는 비평가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던 마지막 악장의 주제인 '사랑'의 힘이 승리를 거두어 비평가들이 '베토벤 이후 가장 아름다운 느린 악장'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1904년 쾰른에서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5번을 초연한 말러는 스스로 “이 곡은 저주받은 작품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 이 작품이 50년 후에 초연되었더라면 좋았으련만.”이라고 말한다.

 

  그의 교향곡 중 초연에서 성공하고 호평을 받은 것은 1910년 8월 뮌헨에서 연주된 제8번 교향곡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말러의 교향곡은 지금도 여전히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호평과 악평을 번갈아 듣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는 말러의 음악... 지금도 쾰른에서는 해마다 말러의 교향곡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으니 그의 음악은 말러 자신의 말대로 50년 후는 아니었을지라도 100년 후에야 비로소 이해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빈 오페라의 황금시기를 이끌다

 

  대부분의 음악가가 그랬듯이 말러 또한 작곡가이자 위대한 지휘자였다. 위대한 지휘자들의 경우 대체로 독재적 성향이 있지만 말러의 경우는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 지휘봉을 잡는 순간 그는 작곡자보다 자신이 작품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신념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확신에 찬 이상주의자로 자신은 물론 단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했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단원들을 몰아부쳤다. 말러 해석자인 브루노 발터는 지휘봉을 잡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쨋든 그는 거기에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환상소설을 탐독한 소년들만이 상상할 수 있는 흥미롭고 마(魔)가 낀, 또한 사람을 위축시키는 악장 크라이슬러의 화신이었다.”

 

  말러는 원하는 음악을 완벽히 만들어낸다는 목적 외에는 모든 것을 버렸다. 음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예술가들을 언제든지 해고했고 기량이 모자라는 단원은 따로 세워두고 솔로로 연주시켜 모욕을 주었다. 한마디로 그는 적을 만드는 데에는 타고 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말러를 모함하려는 온갖 모략에도 불구하고 그는 1898년부터 1907년까지 만 10년간을 오스트리아 빈 궁정극장 오페라단의 상임지휘자로 꿋꿋하게 버티는데 역설적으로 이 시기를 지금 ‘빈 오페라의 황금시기’라 부르고 있다. 빈 궁정극장 오페라 디렉터로서의 말러의 업적은 새로운 레퍼토리의 괄목할만한 증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당시 확립된 대가들의 오페라를 완벽한 공연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데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1903)’ ‘피델리오(1904)’ ‘돈 조반니(1905)’ ‘후궁으로부터의 도피(1906)’ ‘피가로의 결혼(1906)’ ‘마술피리(1906)’ ‘아우리데의 이피게니아(1907)’ 등 이른바 빈 오페라의 황금기에 말러의 손을 거쳐 다듬어진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완벽한 공연이라 평가되고 있으니 지휘자이자 무대연출가로서의 재능 또한 가히 천재적이라 하겠다.

 

 

1910년과 1911년에 걸쳐 미국을 순회하며 개최한 65회의 공연 중 48회를 직접 지휘할 정도로 열정을 쏟아부은 말러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네기홀로 달려가 휴식시간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다시 일어나 나머지 곡을 모두 지휘하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였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빈으로 귀향한 말러는 1911년 5월 18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 밤중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직전에 그는 초점을 상실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로 지휘하는 시늉을 했는데 눈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입으로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모차르트’라는 말이 두 번 새어나왔다.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미소를 잃지 않는 일생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일생이 아닐까.

.

.

.

 

말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였다는 건 몰랐던 사실인데,

당시 그의 주변상황들로 보아서 프로이트가 제대로 찝어낸 것 같긴하네요.

읽다보니 왠지 감동스럽다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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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에피소드~

 어린 시절
베토벤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궁중지휘자였는데 술주정뱅이에다 난폭했다고한다. 아들을 모짜르트처럼키우고 싶은 욕심때문에 매질도 서슴치않고했다한다. 어린 베토벤은 개구장이에다 골목대장이였는데 그래서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고.베토벤은 살짝 곰보에다 키는 160정도인데 어깨는 넓어서 친구들이 '몽골대왕'이라는 별명을.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라 툭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질.
- 베토벤이 만난 작곡가들
어렸을때 모짜르트를 한번 알현(?)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모짜르트는'그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이 Bach를 만나서는 (직접 만난건 아니고 음악을 접하고는..) '당신은 Bach가 아니라 Merr다'고말했다.(독일어로 Bach는 시냇물, Merr는 바다란 뜻) 비유를 제대로 한셈이다.
당시 빈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로시니는 말년의 베토벤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같은 좋은 곡을 많이 작곡하라는 덕담을 했다.후에 로시니는 자기처럼 별볼일 없는 작곡가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데 이 위대한 음악가는 어떻게 저렇게 궁핍할수 있느냐며 가슴아파했다. 또 후에 로시니는 베토벤을 위해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때 관을 매고 장례행진을했다. 또 베토벤을 해부할때 슈베르트가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베토벤의 피아노 레슨
베토벤은 신세진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곤 했는데, 맘에 안들면 30cm자로 손등을 내려치기도. 심하면 어깨를 물어 뜯은 적도있다한다. 요하임이란 독일 음악학자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자기가 어렸을때 혹독하게 당한 체험을 복수하는 것이라고. 유달리 친절히 대해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교본 체르니로 유명한 체르니란 사람이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있었지만 넘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주회를 거의 갖지않았다고한다.
- 일상생활
베토벤은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곡을 시작하는 부지런한 아침형인간. 촛불의 심지를 자르는 시커멋게 그을린 가위로 식사후에 이를 쑤시는 습관. 칸트철학에 심취.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 어디엔가 써놓기도.베토벤의 IQ를 추정한 수치는 140정도. 하지만 수리계산력은 0점인 듯. 홀애비 베토벤은 가계부를 직접 꼼꼼하게 적었는데, 169 곱하기 3을 169+169+169 하는 식으로 계산. 더구나 그 합도 틀렸다.
- 베토벤과 조카 Karl
동생의 아들인 Karl을 놓고, 조카의 생모인 재수씨와 양육권 다툼으로 귀족법정에서 재판을 벌이기도.하지만 베토벤이 평민이라는게 들통나서(아마 귀족행세를 하고 다닌 모양이다)기각되었다. Ludwig Van Beethoven에서 중간의 Van이 독일에서는 귀족처럼 인식되지만(베토벤의 조부는 네델란드인. 따라서 베토벤은 네델란드계)당시 네델란드에서는 Van은 평민도 사용했다고한다. 귀족법정에서는 평민의 소송은 아예 취급하지 않아서 기각.
괴팍한 숙부에게 도망쳐서 엄마에게 가기도 여러번했다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좀 커서는 권총자살을 기도했지만 상처만입고 죽지는 않았다고한다.이 사건으로 베토벤은 상심이 컸다한다.
베토벤은 조카 Karl에 대단한 애정과 집착을 보인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상상해낸게 게리 올드만이 주연한 '불멸의 연인'이란 헐리우드 영화다. 베토벤의 연애편지 중 불멸의 연인이라 명명한 여성을 추적하는데, 결론은 그녀가 바로 베토벤 친동생의 아내라는거다. 영화는 조카 Karl이 베토벤이 친동생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베토벤의 아들이라는 설정이다. 조카도 되고 아들도되는...(정말 기분 나쁜 영화다)
어쨋든,악성의 조카인 Karl은 음악적 재능은 거의 없었다고한다.

- 베토벤과 신틀러
베토벤의 숭배자인 신틀러란 사람이 무보수로 개인비서처럼 자원봉사하기도했다. 하지만 베토벤에게는 푸대접을 받았고 업신여김을 당하기도했다. 이 신틀러란 사람은 베토벤이 죽은 후에 생전의 베토벤을 증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토벤 전기의 스탠다드로 평가받는 로망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는 신틀러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것. 하지만 어떤 베토벤 전기학자들은 신틀러가 많은 부분을
왜곡했다는 의심을 하곤한다. 신틀러가 베토벤 일가에게 푸대접 받은 원한으로 조카 Karl과 베토벤의 동생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한다는것.
- 베토벤의 9개 교향곡과 9번 교향곡 징크스
마지막 9번 합창교향곡 후에 10번을 작곡했는데 1악장만 스케치로 남겨진채, 미완성. 최근에 들어서야 복원. (인터넷 뒤져보면 10번 1악장 들어볼수있음)
베토벤이래 제9번에서 종말을 맞은 작곡가들- 슈베르트, 드보르작, 브루크너,말러...
-죽음
사인은 매독이라는 설과 납중독이라는설. 임종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씨였는데, 한쪽 주먹을 불끈쥐어 올리며 "제군들이여 갈채하라. 희극은 끝났다"라는 말을 남겼다.
악성의 최후.
예전에는 로망롤랑의 '베토벤의 생애'같은 고전에서처럼 베토벤을 신으로 추앙해왔지만 요즘은 베토벤의 인간적 본모습 그대로를 만날수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리려는 추세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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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라는 숫자에는 '많다', '완벽에 가깝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안타깝게도 9번에 얽힌 '저주'(?)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베토벤이 남긴 9개의 교향곡에서 비롯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꼽히는 베토벤이 9개의 교향곡만 남긴 이후,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 위대한 거인이 남긴 교향곡 9번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기이한 징크스이지요.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평생을 바친 브루크너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은 생전에 베토벤 9번의 짝퉁이라는 비야냥까지 받았던 작품입니다. 브루크너는 신에게 이 곡을 완성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약 10년간이나 작곡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끝내 3악장까지만 작곡해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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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8 [쉼터] - 곰팡이, 의사, 정치가 그리고 꿈... 2017-03-06 0 5658
1067 [쉼터] - 실수(곰팡이)로 인해 만들어진 약 - 페니실린 2017-03-06 0 7557
1066 [이런저런] - 세계에서 제일 비싼 비둘기 2017-03-06 0 3464
1065 [쉼터] - 곰팡이의 진실과 오해 2017-03-06 0 6821
106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연변에 "한옥마을"이 없다?... 있다!... 2017-03-04 0 3459
106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두 장애인 정말 위대한 사람!!! 2017-03-03 0 4245
1062 저항시인 윤동주도 축구선수였다... 2017-03-03 0 5442
1061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축구선수였다... 2017-03-03 0 5818
1060 [이런저런] - 축구선수 심판에게 총을 쏘다... 2017-03-03 0 4959
1059 [쉼터] - 축구판 심판 = 주심 + "제4부심" 2017-03-03 0 3796
105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의 나이 46억살?!... 2017-03-03 0 3628
1057 [쉼터] - 우리 고향에서도 "감자축제"를 열어보자... 2017-03-02 0 3799
1056 [록색평화주의者]우리 고향에도 "차 없는 마을"이 있었으면... 2017-03-02 0 3618
1055 [쉼터]-결혼식용 감자와 장례식용 감자가 따로 없다?...있다!... 2017-03-02 0 4504
1054 [쉼터] - 축구스타와 "사인"받기 2017-03-02 0 3463
105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야생동물 겨울나기가 잘 되기만을... 2017-03-01 0 4114
1052 [쉼터] - 봄꽃 꽃말 2017-02-28 0 5955
1051 죽림선생님, 안녕하심둥?... 2017-02-28 0 6290
1050 [쉼터] - 뒷간에서 "삼각함수의 법칙"을 발견하다... 2017-02-27 0 3230
1049 백두산호랑이 "드론" 사냥하다... 2017-02-24 0 3739
1048 [이것이 알고싶다] - "가짜 손"과 진짜 손?!... 2017-02-23 0 3290
1047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호머 헐버트 2017-02-22 0 7707
1046 [이런저런] - 세상에?... 몇억조분에 일 정도일가???... 2017-02-22 0 4600
1045 [이것이 알고싶다] - 최초의 신문은?... 2017-02-22 0 4872
1044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 없었다?... 있었다!... 2017-02-22 0 5318
1043 [자료] - 최초 "한글 띄여쓰기"를 한 사람은 외국인?... 2017-02-22 0 5719
1042 [자료] - 우리 말과 글의 력사를 알아보다... 2017-02-22 0 3159
1041 96년 만의 귀향길에 백두산호랑이와 "기생충"과 함께였더면... 2017-02-21 0 3470
1040 [이것이 알고싶다] - 목화는 인류의 보배 2017-02-18 0 5084
103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목화씨"가 호랑이를 먹어버리다... 2017-02-18 0 3885
1038 세계 유명인들의 墓碑名 2017-02-18 0 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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