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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에게는 '9의 징크스'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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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도 못 피한 교향곡 9번의 징크스
말러는 왜 교향곡 9번의 작곡을 무서워했을까?
“그의 머리는 온통 일로 가득 차 있었고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화를 내었다... 나는 자신의 의지와 존재를 이미 포기했다. 그의 천재성은 나의 존재를 소모시켰고 나는 마치 줄에 묶여 끌려다니는 것처럼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그는 그조차 몰랐다. 그에게는 작곡, 오직 그것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풍경화가 안톤 쉰틀러의 딸이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 말러가 1902년 23살의 나이로 마흔 살이 넘은 말러와 결혼한 지 10년쯤 되던 시기에 남긴 글이다. 말러는 이 무렵 부인 알마가 나중에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되는 한 건축가와 가까워지자 젊은 아내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프로이트를 찾아 상담하는데 프로이트는 말러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원리를 즉각 이해하는 천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말러도 못 비껴간 교향곡 9번의 징크스
말러는 타고 난 천재이자 천재 특유의 신경증적 성향을 지닌 정서불안자였다.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소수 민족 중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인종적 차별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격렬한 성격의 독학자인 아버지와 교양 있는 집안의 섬세한 여성이었던 어머니의 끊임없는 갈등, 특히 아내에 대한 열등감을 육체적 학대로 보상받으려 한 아버지의 난폭함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경멸하고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병적으로 갖게 했는데 나중에 그를 상담한 프로이트는 놀랍게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14명이나 되는 말러의 열네 남매들 중에서 여섯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항상 앓거나 병들어 죽었으며 특히 막내는 자살까지 하는데 이같은 가족력은 죽음에 대한 말러의 남다른 공포를 이해하게 한다.
베토벤은 제9번 교향곡 ‘합창’까지 모두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슈베르트 또한 교향곡 8번을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9번까지 작곡하고 세상을 등졌다. 어디 그 뿐인가. 브루크너와 드보르작 역시 교향곡 9번까지만을 남기고 떠났다. 교향곡 8번을 작곡한 후 말러는 “9번을 작곡하면 나도 죽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실상 교향곡인 다음 작품을 ‘대지의 노래’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제10번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이제 겨우 위기는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그는 9번 교향곡의 초연 연주도 듣지 못하고 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그토록 9번 교향곡 징크스를 두려워하며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말러도 결국 9번 징크스의 또다른 주인공이 된 셈이다.
거듭되는 실패, 그러나 계속되는 작곡
1888년 5월에 라이프치히 극장 일을 그만 둔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제1번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하고 싶어했지만 초연은 그의 부다페스트 시절 필하모니 협회의 연주회에서 이루어졌고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청중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평론가들은 작곡가가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다고까지 여겼다. 첫 악장의 반응은 아주 나쁘지 않았지만 극장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울려대는 마지막 두 악장들을 청중들은 참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지휘한 말러는 교향곡 1번의 초연 이후 친구들을 멀리 할 정도로 완전히 실의에 빠졌다.
이후 교향곡 2번의 작곡까지에는 무려 7년이나 걸렸다. 2번의 초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주선으로 베를린의 필하모닉 콘서트장에서 1895년 3월 4일에 이루어졌다. 말러가 직접 지휘했지만 연주장은 절반 밖에 차지 않았고 비평가들의 평 또한 부정적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함부르크의 부유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한 번 베를린에서 연주하게 된다. 비록 표가 예매되지 않아 초대권을 남발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비평가들은 여전히 까다롭게 굴었으나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 같은 지지자들도 등장하였다. 그 뒤 말러는 실뱅 뒤퓌의 초청으로 리에지의 누로 콘서트에서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1900년의 겨울 뮌헨 연주는 마침내 말러를 유명한 작곡가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을 음악가 반열에 올리게 된 이 곡을 그는 1907년 비인에서 이별을 고할 때 그리고 1908년 뉴욕과 파리에 자신을 소개할 때 선택하기도 했다.
교향곡 3번의 초연은 1897년 3월 9일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대개의 말러의 작품 초연이 그랬듯이 역시 청중들의 야유로 끝났다. 비평가들 또한 적대적이어서 그 다음날 이들에 의해 말러는 '음악적 코미디언', '최악의 농담꾼'으로 묘사되었다. 이로부터 5년 후 1902년 6월 그의 교향곡 4번 전곡이 리네란트에서 연주되었는데 이번에는 비평가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던 마지막 악장의 주제인 '사랑'의 힘이 승리를 거두어 비평가들이 '베토벤 이후 가장 아름다운 느린 악장'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1904년 쾰른에서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5번을 초연한 말러는 스스로 “이 곡은 저주받은 작품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 이 작품이 50년 후에 초연되었더라면 좋았으련만.”이라고 말한다.
그의 교향곡 중 초연에서 성공하고 호평을 받은 것은 1910년 8월 뮌헨에서 연주된 제8번 교향곡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말러의 교향곡은 지금도 여전히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호평과 악평을 번갈아 듣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는 말러의 음악... 지금도 쾰른에서는 해마다 말러의 교향곡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으니 그의 음악은 말러 자신의 말대로 50년 후는 아니었을지라도 100년 후에야 비로소 이해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빈 오페라의 황금시기를 이끌다
대부분의 음악가가 그랬듯이 말러 또한 작곡가이자 위대한 지휘자였다. 위대한 지휘자들의 경우 대체로 독재적 성향이 있지만 말러의 경우는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 지휘봉을 잡는 순간 그는 작곡자보다 자신이 작품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신념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확신에 찬 이상주의자로 자신은 물론 단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했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단원들을 몰아부쳤다. 말러 해석자인 브루노 발터는 지휘봉을 잡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쨋든 그는 거기에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환상소설을 탐독한 소년들만이 상상할 수 있는 흥미롭고 마(魔)가 낀, 또한 사람을 위축시키는 악장 크라이슬러의 화신이었다.”
말러는 원하는 음악을 완벽히 만들어낸다는 목적 외에는 모든 것을 버렸다. 음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예술가들을 언제든지 해고했고 기량이 모자라는 단원은 따로 세워두고 솔로로 연주시켜 모욕을 주었다. 한마디로 그는 적을 만드는 데에는 타고 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말러를 모함하려는 온갖 모략에도 불구하고 그는 1898년부터 1907년까지 만 10년간을 오스트리아 빈 궁정극장 오페라단의 상임지휘자로 꿋꿋하게 버티는데 역설적으로 이 시기를 지금 ‘빈 오페라의 황금시기’라 부르고 있다. 빈 궁정극장 오페라 디렉터로서의 말러의 업적은 새로운 레퍼토리의 괄목할만한 증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당시 확립된 대가들의 오페라를 완벽한 공연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데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1903)’ ‘피델리오(1904)’ ‘돈 조반니(1905)’ ‘후궁으로부터의 도피(1906)’ ‘피가로의 결혼(1906)’ ‘마술피리(1906)’ ‘아우리데의 이피게니아(1907)’ 등 이른바 빈 오페라의 황금기에 말러의 손을 거쳐 다듬어진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완벽한 공연이라 평가되고 있으니 지휘자이자 무대연출가로서의 재능 또한 가히 천재적이라 하겠다.
1910년과 1911년에 걸쳐 미국을 순회하며 개최한 65회의 공연 중 48회를 직접 지휘할 정도로 열정을 쏟아부은 말러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네기홀로 달려가 휴식시간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다시 일어나 나머지 곡을 모두 지휘하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였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빈으로 귀향한 말러는 1911년 5월 18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 밤중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직전에 그는 초점을 상실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로 지휘하는 시늉을 했는데 눈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입으로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모차르트’라는 말이 두 번 새어나왔다.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미소를 잃지 않는 일생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일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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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였다는 건 몰랐던 사실인데,
당시 그의 주변상황들로 보아서 프로이트가 제대로 찝어낸 것 같긴하네요.
읽다보니 왠지 감동스럽다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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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에피소드~
어린 시절
베토벤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궁중지휘자였는데 술주정뱅이에다 난폭했다고한다. 아들을 모짜르트처럼키우고 싶은 욕심때문에 매질도 서슴치않고했다한다. 어린 베토벤은 개구장이에다 골목대장이였는데 그래서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고.베토벤은 살짝 곰보에다 키는 160정도인데 어깨는 넓어서 친구들이 '몽골대왕'이라는 별명을.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라 툭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질.
- 베토벤이 만난 작곡가들
어렸을때 모짜르트를 한번 알현(?)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모짜르트는'그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이 Bach를 만나서는 (직접 만난건 아니고 음악을 접하고는..) '당신은 Bach가 아니라 Merr다'고말했다.(독일어로 Bach는 시냇물, Merr는 바다란 뜻) 비유를 제대로 한셈이다.
당시 빈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로시니는 말년의 베토벤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같은 좋은 곡을 많이 작곡하라는 덕담을 했다.후에 로시니는 자기처럼 별볼일 없는 작곡가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데 이 위대한 음악가는 어떻게 저렇게 궁핍할수 있느냐며 가슴아파했다. 또 후에 로시니는 베토벤을 위해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때 관을 매고 장례행진을했다. 또 베토벤을 해부할때 슈베르트가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베토벤의 피아노 레슨
베토벤은 신세진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곤 했는데, 맘에 안들면 30cm자로 손등을 내려치기도. 심하면 어깨를 물어 뜯은 적도있다한다. 요하임이란 독일 음악학자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자기가 어렸을때 혹독하게 당한 체험을 복수하는 것이라고. 유달리 친절히 대해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교본 체르니로 유명한 체르니란 사람이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있었지만 넘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주회를 거의 갖지않았다고한다.
- 일상생활
베토벤은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곡을 시작하는 부지런한 아침형인간. 촛불의 심지를 자르는 시커멋게 그을린 가위로 식사후에 이를 쑤시는 습관. 칸트철학에 심취.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 어디엔가 써놓기도.베토벤의 IQ를 추정한 수치는 140정도. 하지만 수리계산력은 0점인 듯. 홀애비 베토벤은 가계부를 직접 꼼꼼하게 적었는데, 169 곱하기 3을 169+169+169 하는 식으로 계산. 더구나 그 합도 틀렸다.
- 베토벤과 조카 Karl
동생의 아들인 Karl을 놓고, 조카의 생모인 재수씨와 양육권 다툼으로 귀족법정에서 재판을 벌이기도.하지만 베토벤이 평민이라는게 들통나서(아마 귀족행세를 하고 다닌 모양이다)기각되었다. Ludwig Van Beethoven에서 중간의 Van이 독일에서는 귀족처럼 인식되지만(베토벤의 조부는 네델란드인. 따라서 베토벤은 네델란드계)당시 네델란드에서는 Van은 평민도 사용했다고한다. 귀족법정에서는 평민의 소송은 아예 취급하지 않아서 기각.
괴팍한 숙부에게 도망쳐서 엄마에게 가기도 여러번했다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좀 커서는 권총자살을 기도했지만 상처만입고 죽지는 않았다고한다.이 사건으로 베토벤은 상심이 컸다한다.
베토벤은 조카 Karl에 대단한 애정과 집착을 보인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상상해낸게 게리 올드만이 주연한 '불멸의 연인'이란 헐리우드 영화다. 베토벤의 연애편지 중 불멸의 연인이라 명명한 여성을 추적하는데, 결론은 그녀가 바로 베토벤 친동생의 아내라는거다. 영화는 조카 Karl이 베토벤이 친동생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베토벤의 아들이라는 설정이다. 조카도 되고 아들도되는...(정말 기분 나쁜 영화다)
어쨋든,악성의 조카인 Karl은 음악적 재능은 거의 없었다고한다.
- 베토벤과 신틀러
베토벤의 숭배자인 신틀러란 사람이 무보수로 개인비서처럼 자원봉사하기도했다. 하지만 베토벤에게는 푸대접을 받았고 업신여김을 당하기도했다. 이 신틀러란 사람은 베토벤이 죽은 후에 생전의 베토벤을 증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토벤 전기의 스탠다드로 평가받는 로망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는 신틀러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것. 하지만 어떤 베토벤 전기학자들은 신틀러가 많은 부분을
왜곡했다는 의심을 하곤한다. 신틀러가 베토벤 일가에게 푸대접 받은 원한으로 조카 Karl과 베토벤의 동생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한다는것.
- 베토벤의 9개 교향곡과 9번 교향곡 징크스
마지막 9번 합창교향곡 후에 10번을 작곡했는데 1악장만 스케치로 남겨진채, 미완성. 최근에 들어서야 복원. (인터넷 뒤져보면 10번 1악장 들어볼수있음)
베토벤이래 제9번에서 종말을 맞은 작곡가들- 슈베르트, 드보르작, 브루크너,말러...
-죽음
사인은 매독이라는 설과 납중독이라는설. 임종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씨였는데, 한쪽 주먹을 불끈쥐어 올리며 "제군들이여 갈채하라. 희극은 끝났다"라는 말을 남겼다.
악성의 최후.
예전에는 로망롤랑의 '베토벤의 생애'같은 고전에서처럼 베토벤을 신으로 추앙해왔지만 요즘은 베토벤의 인간적 본모습 그대로를 만날수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리려는 추세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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