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평서형 문장은 시의 의미나 시인의 개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니 그의 형태야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어가 생략이 되버리거나
혹은 일인칭으로 되는 경우가 있으며 사람이 아닌
명사가 주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박노해님의 <월요일 아침>을 예문으로 들
어 보겠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 속에 흘러보낸다
푸르름 녹슬어가도록 아직 맛보지 못한
상쾌한 아침, 생기찬 의욕, 울컥이면서
우울한 월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생존 행진곡에 몸을 던져 놓는다
이 시는 작가가 시의 첫 행에 일인칭 주어인
'나'가 나오는 예로 들었지만 여기에서 주어
가 생략된다고 해도 그 의미 전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요. 하지만 여러분께서 '나'란
주어를 생략하고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주어의 생략으로 인해서 시적 분위기나
화자의 태도 등은 상당히 다르게 인식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이 자리에 '나'라는 주어
를 놓음으로써 다른 사람과 차별돠는 오직 자신
만의 삶의 모습이 확실하고 뚜렷하게 부각될 것
이며 그럼으로써 그의 언술이 보다 솔직하고
진실성 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주어인 '나'를
시인이 사용함으로써 거짖없는 독백의 어조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 잡을듯 강하게 어필될 것
입니다.
다음에는 주어가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 오는 경
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오장환님의 <북방의 길>입니다
눈 덮인 철로는 더욱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두 예문을 올려드렸지만
평서형의 문장이 시의 첫 행으로 오는 경우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나 구체적 사물의 이름,
관념어들이 오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시를 읽으면
평서문이 나오는 경우에 그 주어들을 살펴보면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김명리님의 <배밭 속의 길>을 올립니다.
枯死(고사)된 배나무밭 사이로 길은 사라지고 없다
이미 반 년도 넘게 한쪽 옆구리가 기우뚱한
적산 가옥이 한 채.
한 겹의 얇은 슬레이트로
내려앉으려는 하늘을 간신히
떠받들고 있다
떠나가고 없는 사람들
죽은 나뭇가지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죽은 배나무 잎사귀들
쿵, 쿵쿵쿵
한 때는 저 잘 익은 먹골배의 씨방 속에
한 종지의 설탕물처럼 제법 흥건히 깃들었을
두근거림 따위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후려칠 기세로
앙상하게 배배 틀린 회초리 같은 배나무들
아직은 한 사나흘 더
죽은 나뭇가지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죽은 배나무들의 잎사귀들!
이 시를 해설한 이광호님은
-시는 "길은 사라지고 없다"는 묘사로 시작되는데
우리는 마치 어떤 존재의 길들을 본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주어는 길이란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다음엔 제3인칭인 경우를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김상미님의 <사랑>을 보실까요?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우리가 배우는 주제와는 관계없지만 이왕 시를 읽
으셨으니 이남호님의 해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상미의 사랑 노래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절
실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남쪽에 있다. 이때 남쪽
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따뜻한 곳, 생명의 근
원인 곳이다. 그곳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화자는 꽃
핀다. 화자는 남쪽으로 젖혀지는 붉은 꽃이다.그
것으로도 모자라서 화자는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내 몸으로 들어온다>고 말하고, 그
길을 닦고 또 꽃으로 장식한다. 그리고 그 길 위로
새와 바람과 짐승들처럼 화자의 그리움은 지나다
닌다.
7)비유로써 첫 행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배우신 바와 같이 비유는 낯설게 하는 장치
등을 통해서 우리들의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
려 충격을 주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이르
키는데 크게 기여를 합니다.
유용주님의 <매운탕>을 읽어보겠습니다.
도시는 거대한 솥,
펄펄 끓는다
반짝이며 수없이 떠오르는 고기떼들
썩은 고기들의 끝없는 악취
그래도 매운탕엔 향기가 나야 제맛이지
깻잎과 미나리와 쑥갓을 듬뿍 넣고
소주 한잔 카아악!
어디에선가 무지막지한 큰 손이
자꾸만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핀다.
여러분은 물론이고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면
누구나 당돌한 이 시의 첫 행에 관심을 가지고
다음 구절을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비유를 첫 행에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하며, 시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박형준님의 <저녁별>을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창을 두드리고 간 얼룩들.
물 빠진 담벼락에 기댄
꽃대가 허공에 밀어올리고 있다.
누구나 하나씩은
흘려보낸 바구니.
작은 창에
저녁별 들어와
그 환함이 오래오래
한 자리에 앉아 있게 할 때.
먼 세상의 내륙에 가 닿아
갈대밭에서 우는 새들.
바구니에 담긴
가엾은 아이
소금처럼 단단해져 꽃대 위 머문다.
비유와 이미지가 살아있는 시입니다.
첫 행이 비유인 예로 올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가능하면 예시를 많이 올려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시를 공부하다가 막히면
옛날 강의를 다시 한번 경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제 강의실에 들어가서 여러분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어보았습니다.
쉽게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딱딱하고 어려운 부
분이 많았으며, 오자가 가끔 발견되어서 미안했
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공부하면
그렇게 어렵게 생각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지금쯤 더러 저보다
앞 서 가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번 강의의 특징은 강의 말미에 따로 최근에
발표된 시 중 좋은 시 한 두 편을 올린다는 것
입니다.
그 날 강의한 주제와는 특별한 상관이 없더라도
좋은 작품 읽기의 일환이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김선우님의 <물로 빚어진 사람>을 올립니다.
월경 때가 가까워 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 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 주면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마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 때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 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이 시에 대한 남진우 님의 해설도 곁들입니다.
"달과 여인과 바다. 이 이미지의 연상망은 원형적인
만큼이나 상투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기계적이고 작위적으로 연결시켜 놓지 않고
구체적이고 토속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함으로
써 설드력을 얻고 있다. 여인의 몸은 바다의 조류가
넘나들고 달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흘러 나오는 무한한 생산성을 약
속한다. 여인의 몸에서 <퍼올린 즙>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발상 속에는 풍요를 기원하는 대지모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시인의 시가 지닌 건강성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기 힘든 에너지를
과시하고 있다."
시를 참 잘 썼습니다.
몇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평안한 하루 보내시구요.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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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 하나 묻어 두고
―이연희(1973∼ )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
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굵은 손마디
찬바람 속에서 한 해 먹을 고추장을 담그며
말하지 못한 속내를 어머니는
장독 속에 묻었다
새빨간 고추장에 싹싹 비빈 밥을 입속에 퍼 넣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 언니와 나는
흔적 없이 잘 삭은 어머니 속내를 먹었다
더러는 짜고 더러는 매웠던
소리 내지 않는 한 시절을
온가족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
장독대의 봄날처럼
베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덜 삭은 마음들이 맵고 짠 맛을 내며
가슴에서 밀려올 때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
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화자는 젊은 주부일 테다. 어쩌면 늙은 어머니가 담가 보냈을 그의 집 고추장이 냉장고에 있을 테다. 장독 항아리 같은 건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 화자가 화분 몇 개 놓여 있을 베란다에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장독대의 봄날’을 떠올린다.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에서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 시절 어머니의 ‘말하지 못한 속내’를 비로소, 사무치게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자의 마음이 시리고 아픈 것이다.
어머니는 소금과 고춧가루를 들이부은 것 같았을 그 마음을 잘도 삭히셨군요. 썩히지 않고 삭혀서 시어머니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있게 먹이셨군요. 그렇게 우리 식구를 지키셨던 거군요.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이렇게 맵고 짠 건 덜 삭혀서일까요? 어머니와 딸은 용모와 표정뿐 아니라 성정도 닮을 테다. 고추장처럼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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