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시인
성춘복시인 탐방 (문학과 창작 7월호)
90년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가뭄이 온 국토를 메마르게 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땅이 말라가고, 하늘이 말라가고 사람들의 마음마저 비틀어져 가고 있다. 누군가 건들기만 하여도 폭발하기 쉬운 날들이다. 아침 방송을 들으니 민노총에서도 폭발 직전이란다. 항공기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고, 민노총 산하 연맹에서도 자신들의 목청을 높인다고 한다. 물론 노동자는 정당한 보상은 받아야할 것이다. 다만 온 산하가 목말라하는 지금의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시인과 통화하고 날짜를 잡은 것이 하필 오늘인 것이다. 아침에 다시 한 번 시인과 시간 약속을 하였다. 3시까지 시대문학 편집실로 찾아 뵙기로 한 것이다. 시대문학이 혜화동로타리에 위치한 탓으로 종각에서는 집회가 열리는 대학로를 거치지 않고 비원 쪽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러나 한 쪽이 막히면 다른 한 쪽도 비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 느리게 가는 택시 안에서 시인과 이야기할 몇 가지를 추스리며 조급함을 달랬다. 사실 성춘복 시인은 그 전에도 몇 번 뵈었었고, 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신 탓으로 잘 알려져 있어 외면적으로는 특별하게 문의할 내용이 없어 보였다.
시인이 알려주신 주유소와 파출소 사이를 따라 20미터를 올라가자 소극장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출판사가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다시 전화를 드렸더니 극장 앞 건물 2층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마침 손님이 계신 관계로 책이 쌓여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시인과 마주 앉게 되었다. 시인께서 먼저 많이 본 얼굴이네 하시면서 낯설음을 씻겨주셨다.
시인과의 대담은 몇 가지의 질문과 시인의 답변, 그리고 시인의 최근 근황에 대한 순서로 이어졌다. 시인은 최근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시인은 그 동안 세계 방방곡곡 가보지 않는 나라가 별로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시인에게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체험과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여행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시인은 여행을 하면서 그냥 일반적인 체험 외에도 꼭 들려보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 나라의 유명한 작가들의 생가나 집필실 그리고 살았던 곳들을 방문하는 데, 무엇보다도 부러웠던 것은 단 6개월 밖에 하숙을 하지 않았던 곳마저도 잘 보관하여 팻말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고인이 된 작가의 안경이나 옷 및 서적 등이 너무 잘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시인이 자주 방문하는 곳은 시인들의 무덤이란다. 온 국민들에게는 문학의 현장이 될 뿐 아니라 유적지로도 발전하고 있단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실정은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은 늘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시인은 생가보전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고, 문학박물관과 문학도서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문화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누군가 앞장서서 추진해야할 것들이라고 말씀 하셨다.
오지에서
오지의
더욱 깊숙한
하늘은 둥글고
해 하나 중천에
떨어질 날이 없지만
빛으로 어두워진
내 눈은
사방이 무너져
황홀을 볼 수가 없다
빛이여
눈이 따가운 언제나의 대낮에
안락의 그림자를 흘려
어두움을 내리고
초라한 옷자락에도
선풍이 일어
고목도
바람의 갈대처럼
흔들게 하라
나그네여
가시일 줄 모르는
빛의 한복판,
타오르는 오지에
내가 성장하듯
모든 것을 소생케 하고
빛을 거두어
나의 정원을 떠나게 하라.
-제1시집 <오지행>에서 1965
이 시를 읽으면서 여행이란 의식과 인연을 떨어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기억해본다.
시인은 1936년 경북 상주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부산에서 성장하셨으며 55년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공부를 하셨다. 시인이 3학년 때 신석초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을 마쳤으며, 25세인 60년에 시 추천 완료하고 문단에
정식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2년에 걸친 3회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아주 젊은 나이에 문단에 나오셨고, 이후 40여년의 문단생활은 그리 흔한일은 아닐 것이다. 63년에는 이형기, 문덕수, 박재삼시인 등과 <시단>동인을 형성하여 활동하셨으며, 65년 제1시집 <오지행>을 발간하였고, 동년 발간한 장시화첩 <공원파고다>로 제1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하셨다고 그 때 나이가 31세 였다.
시인은 또 걸어간 거리만큼 사람은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남보다 더 많이 걷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은 그 만큼 많이 산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도 하고 새벽시간을 여유있게 갖으시며, 늦어도 7시에 출근해 일을 하시는데 그렇게 되면 오전에 5시간이라는 많은 시간을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것은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 주셨다. 그렇게 부지런히 살아온 탓으로 남보다 더 많은 여행을 하셨고, 남보다 많은 활동을 하게 된 것이 아닌 것인가 생각이 든다. 같은 나이를 살아도 두배, 세배를 더 많이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쯤에서 요즈음 자꾸 게을러져가는 나 자신을 조용히 반성해 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잠 묻은 눈 씻고 나면
나는 언제나 꿈 밖이다
가난도 따습던 너의
저쪽 세상 이야기와 함께
환히 비쳐 속 다 보이는
구름 위의 우리집
네 생각 같은 어지럼도
발 벗고 나서는 길 하나다
쓸쓸의 그 길에다 흩뿌리는
섦으나 아름다운 사랑
언제나 혼자였던 나를
깔끔히 씻어 주는 이 찬 바람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아득하고 서글픈 긴 날들을
어떻게 더 살아야 할지
씁쓸하고 혼자인 이 노릇을.
제 8시집 <길 하나와 나는> 1990
새벽에 일어나 깔끔히 씻어주는 찬바람 앞에서 자신의 먼지들 다 털어 버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이제 시인에게는 하나의 삶의 절차요 기준점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시인은 40여 년의 문단생활을 하면서 13권의 시집과 4권의 산문집을 남기셨다. 등단을 하신 이후 연달아 시집을 발간하셨고, 70년대부터 5시집이 발간된 84년까지 잠시 휴식 공간이 있었을 뿐, 거의 매년 한 권의 시집이나 산문을 발간하시는 정열을 보여 주셨다. 93년 7월 발간된 예술가의 삶에는 산문과 시인이 모시던 몇 분의 스승, 월탄 박종화 선생님, 시인 신석초 선생님, 난계 오영수 선생님 등을 소개해 놓으셨고, 1시집에서 10시집까지의 대표시들이 실린 책이다. 나는 그 책의 사이사이에서 빛바랜 사진들과 서신왕래, 혹은 잊혀질 뻔한 삶의 귀중한 조각보들을 찾을 수 있었고, 그 조각보들을 연결하면서 우리 시단의 흐름과 사건들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대표 작품 중에서 제5시집 <복사꽃제>에 실린 몇 편의 서정적인 글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중년시절의 한 때를 회상보았다.
술래야
네가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네 속에 들어앉아
편히 두 발을 뻗고
가슴 깊은 골을 파고 있는데
바람처럼 일어난 너는
술래잡기만 하구나
두루마리로 펼쳐놓은
귀 넓은 마당,
살피고 찾아도 미궁인
너는
신열만 옮기누나
살아있는 자의 거리만큼
지독한 몸살로
아픔보다 더한 사랑을,
어떤 입맞춤으로도 구원될 수 없는
여기 나는 그대로 서 있노라
속의 속것 다 헤쳐놓고
바람으로 왔다가 쓰러져가는
두려움이여
소리치고 두드려도 술래로 숨는
비어 있음이여
돌아와 안겨라
돌아와 안겨라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또 한편의 시대적인 아픔을 끌어온 이 시는 80년대 초에 쓰여진 작품으로 추측이 된다.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혼자 사는 집>은 시인의 나이 이순에 이르러 발간된 것으로 그 나이에 책을 내시면서도 뻔뻔스러움은 없는지 걱정스럽다고 시인은 서문에 적어놓으셨다. 그 날 내가 시인에게 받은 책이 무려 6권이나 되었는데, 시집이 세 권이었다. 그런데 세 권 다 양장본으로 된 시집으로 다른 시집들보다 귀한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권의 시집 속에는 시인의 노작이 실려 있는 것으로, 이런 작품을 두고두고 보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야한다고 시인은 말씀 하셨다. 물론 시집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도 튼튼해야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인 <마음의 불>은 여행시들이 많이 들어 있다. 시인이 애초에 많은 여행을 다니신다는 맥락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예 땅을 밝으면서 얻은 것도 있고,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석림과 여강 등지를 지나며 쓰게 된 것도 있다.' '나이 들면서 늦게나마 깨달은 것의 하나는, 시는 짧아야 하고 감흥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절제미를 빚는 능력이 미숙하여 부지런만 피우고 있는 듯싶다. '꽃빛'과 '봄날'이 젊음의 장이라면 '노년'과 '몽유'의 장은 오늘의 내 형편이다'라는 서문을 읽으면서 시인의 시론과 내가 앞으로 가야할 시의방향도 정해본다. 열세번 째 시집에서 시인의 마음이 가득 실려있는 작품 한 편을 골라보았다.
돌 1
- 石林
거기 무덤들이 있지 않던가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굳은 시늉들만 포개놓아
나를 빤히 건너다보며
사설을 늘어놓지 않던가
가 닿을 수 있는 거리라며
발걸음을 끌어다 앉히고
어지러운 모양새를 가르친 다음
손을 뻗거나 짝을 맞추게 하여
어깨바람 엇구수하게 뿜지 않던가
많이는 표나지 않게
앞 뒤 맞춰 층층으로 쌓은 앞에
늘 내가 하는 버릇대로
활개쳐 맘껏 자유케 하는
저 울금색의 나무들
와,와
무덤들이 쏟구쳐 일어나서
좋은 것들의 모든 징표로
살아 있음을 자랑해 보이는
마음의 내 고향을 세워주지 않던가.
시인이 87년 관여하기 시작하여 금년으로 15주년을 맞이하게 된 '시대문학'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문학의 위기의식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도 없었던 같다. 언어의 혼탁으로부터 그 골격과 구조가 무너져가고 그 의미조차 상실해 가는 시대는 일찌기 없었던 싶다. 그러나 문학정신만은 더 첨예화되고 날카롭게 되어 내일의 정신세계가 결코 어둡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하고 있다. 그래서 창간 15주년이 되는 시대문학을 바꾸어 가장 비문학적인 시대와의 투쟁으로 '문학시대'로 개재하고 새로운 문학세계를 열고자 한다. 그런 뜻에서 새출발을 시도한다고 한다.'라는 명제 아래 첫걸음을 옮기셨단다. 문학시대의 안에 발표된 시인의 사진들이 유난히 시인답게 나온 것은 그 동안 시인이 꾸준히 다른 나라의 시인들을 실으면서 노력하신 결과란다. 사진 한 장이라도 시인을 시인답게 하는 요소가 된다면 각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 하셨다.
근래 문단에 우후죽순처럼 많은 문예지들이 발간되고 있는데, 너무 많은 것들이 질을 떨어지게 하는 요소가 되지 않는가 하고 시인에게 물었다. 일본은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의 수가 11,000명 정도 되는 데, 인구를 따져보아도 아직 우리 나라의 시인수는 그 절반에 못 미치고 있다고 하시면서 양적으로 많은 시인과 많은 문예지가 결코 나쁘지는 않다고 하셨다. 먹이사슬의 예를 드시면서 밑바닥에 많은 작가들이 포진해야만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할 우수한 작가들이 배출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으로 그 답을 해 주셨다. 자신이 없는 작가들만이 오히려 그런 것에 민감하다는 말씀도 곁들여 주셨다.
또 하나 외국에 나가서 시인들의 시낭송회를 가보면 우리와는 많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다. 시인은 자기 시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의 시를 100% 전달할 수 있도록, 독자의 시각, 청각, 후각을 건드려 줄 수 있도록 열심히 자신의 시낭송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를 들면 외국에서는 온 몸으로 땅에 뒹군다든가 더 나아가서는 옷을 다 벗고 독자의 시선을 끌면서 자신의 시를 전달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쯤에서 시인의 시 중에서 낭송에 적합한 시 한편을 골라본다.
뻐국새 운다
뻐국새 운다
내 꿈의 어둔 층계를 딛고
저녁이면 돌아눕는 산
그 산의 숲 어디서
못 견디게 설운 뻐꾹새 운다
너무도 가난하여
나는 늘 혼자이고
달이 밝지 않아도 외진 골방
인연 따위도 춥다 느끼며
어디서 뻐꾹새 운다
타다 남은 놀 끌어다가
불길 당기고
꽃들은 피었다 시들어
가슴엔 시린 눈발
뻐꾹새 운다
몇 점 별빛은 떠서
내 마음 병으로 깊어 가는데
눈물 속 이 적막
오, 사랑이여
나도 산꽃처럼 슬퍼 뻐꾹새 운다.
-제9시집 <그리운 죄 하나만으로도 나는> 1992
서정적이면서 독자의 청각 및 시각적인 이미지를 그려줄 수 있는 작품이라 보여진다.
시인은 오랫동안 문인협회에 관여해오시다 올해 3년의 문인협회 이사장의 임기를 마치고 이제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오셨다. 다시 돌아온 소감을 묻자 홀가분하시다면서 이제 다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들꽃사냥'이라고 시인은 모름지기 곤충과 식물의 이름을 세세히 알아야한다며 '이름모를 꽃', '이름모를 새'는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쓰는 부정확한 언어라는 말을 세기며 '문학시대'의 사무실을 나왔다. 찌는 날씨를 감안해서 시인과의 면담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금 나라의 중요한 경계령은 쏟아지는 빗방울일 것이다. 대학로를 걸어가면서 집회를 갖고 있는 노동자의 머리에서도 가뭄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오후 늦게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기쁨 마음을 적셔보며, 시인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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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감자
―정재영 (1963∼)
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재로 다스리며
땅에 묻히지 않고 어떻게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가 될 수 있을까?
반쪽의 감자로 나누어져서야
씨감자가 되는 달콤한 상처
티눈 몇 개를 두고
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
슬픔의 눈을 옆으로 옮겨 붙으며
서로에게 깊은 눈짓으로 이어지는 사랑
나는 왜 씨감자가 되지 못했을까
나누어야 밑드는 행복을
왜 알고도 노래하지 않았을까?
감자를 캐면서 이미 감자가 아닌
씨감자의 가벼워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감자는 감자를 되심어야 또다시 감자를 생산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영양번식작물의 대표적 작물이다.’ 그래서 그해 소출 감자 중 10분의 1을 씨감자로 남긴다고 한다. 어차피 식용이 되는 감자 입장에서는 씨감자가 되는 게 억울한 일은 아닐 테다. 땅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성체로 비로소 느긋이 말라가며 쉬고 있는데, 칼로 쪼개져 도로 땅에 묻히고 상처 입은 몸으로 열을 뿜으며 다시 생을 시작하는 건 틀림없이 고통스러울 테지만, 희열이기도 할 테다. 씨감자로 말미암은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는 씨감자의 보람이기도 하고 농부의 보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땅에 심겨진 씨감자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캐낸 뒤 무심히 뽑아버리는 감자 줄기 끝의, 까마득히 잊힌 ‘이미 감자가 아닌/씨감자의 가벼워진 죽음’을 화자는 기린다. 감자 작농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씨감자의 말로를 무화에서 건져내는 시인의 눈이며 마음이다.
‘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상처를 재로 다스리며/땅에 묻힌’ 씨감자는 후세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표상인데, 부모 된 사람과 학교 선생님이 떠오른다. 시인 정재영은 고등학교 교사란다. ‘티눈 몇 개를 두고/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라는 시구에서 갖게 되는, 왜 ‘씨눈’이 아니고 ‘티눈’일까 하는 의문이 해소된다. 어쩌면 그는 발바닥에 티눈이 생기도록 가출한 제자를 찾아다니느라 헤맸는지 모른다. 빗나간 제자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고생해도 보람 없는, 사제 간의 사랑과 존경이 실종된 현실에 맥이 빠졌을 수도 있다. ‘나는 왜 씨감자가 되지 못했을까’, 더 무작정 사랑하고 헌신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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