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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리태백과 두보와 같다...처..ㄹ... 썩...
2016년 10월 09일 23시 13분  조회:3902  추천:0  작성자: 죽림

詩를 쓰기위한 몇가지 준비 

윤석산 


젊은 날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글을 쓰고 싶어합니다 먼 훗날 이름도 모르는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읽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자신을 기억해준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싶다는 욕망 때문에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대개 몇 편쯤 쓰다가 이내 포기하고, 시인이나 작가가 되어도 자기 혼자 좋아서 쓸 뿐, 독자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기가 일쑤입니다. 

우리들의 빛나는 꿈이 덧없이 스러지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해 잘못된 습관을 기르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려는 사람은, 그리고 문학사 속에 길이 살아남고 싶은 사람은 작품을 쓰기 전에 대한 자기 관점들을 검토해봐야 합니다. 이 장에서는 글을 쓸 때 누구나 잘못 생각하기 쉬운 문제 몇 가지를 골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글쓰기가 취미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이 시쓰기를 쉅게 포기하는 것은, 시인이 되는 것도 좋지만 자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거나, 그런 재능이 부족하다고 속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쓰기를 취미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고 싶어하는 욕망은 일종의 취미가 아닙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길러야 할 기초 능력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외면하면 자아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개발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신적 안정과 성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글쓰기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사르트르(J. P. Sartre)의 분류에 따라 자아를 <홀로 있는 나(en-soi)>와 <타인과 관계를 맺은 나(pour-soi)>로 나눌 경우, 자아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은 나>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정치나 경제처럼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분야의 지도자가 되거나, 신문 방송 같은 매체를 통하여 자기를 들어내는 글을 쓰는 방법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나 경제 분야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다분히 자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자기 의도대로 이뤄질 확률이 적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이런 요소들은 바뀌기 때문에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글쓰기는 홀로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 앞에 서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빛나는 꿈을 지닌 젊은이들이나, 그를 실현하려다가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든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하는 것도 이 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글쓰기가 인간의 기본적 능력 가운데 하나이며, 반드시 길러야 할 기초능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 활동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情報)를 수용(受用)하는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表現) 활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수용 활동은 주로 언어를 통해 <듣기>와 <읽기>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언어를 통한 표현 활동은 <말하기>와 <글쓰기>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런데, 수용은 표현을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그리고 같은 표현이라고 해도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고차적 기능에 속합니다. 말하기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대면하여 언어를 통해 주고받지만, 몸짓이나 표정 같은 연행적(演行的) 요소들의 도움을 받는 반면에, 글쓰기는 문자라는 추상적인 기호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웅변가나 달변가처럼 말할 수는 없어도 논리적으로 타인을 잘 설득할 수 있고, 인간과 인간 관계를 다루는 <인문>·<사회>·<예능> 계열 학문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시쓰기는 인간에 관한, 또는 인간과 인간 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수학(數學) 과학(科學) 논리학(論理學) 같은 분야에서도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정신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직관(直觀)과 상상력(想像力)이고, 인문과학(人文科學)이냐 자연과학(自然科學)이냐 하는 차이는 상상력을 어떻게 발휘하고 입증하느냐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뉴톤이 발견했다는 "만유인력(萬有引力)"의 이론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뉴우톤이 가을날 사과밭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잘 익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곧바로 수학으로 풀어 그 이론을 입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곧바로 복잡한 계산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꼭지가 없는 데도 왜 떨어지지 않는데, 그보다 낮은 곳에 꼭지에 매달린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도 모르게 <달=사과>라는 동정화(同定化), 즉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 다음 계산에 들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상상한 것을 언어로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시인이고, 숫자나 공식으로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과학자이며, 효율적인 제도를 입증하려는 사람들은 사회과학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글쓰기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초 능력 가운데 하나임을 입증하는 제도로는 과거(科擧)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근대까지 시문(詩文)에 능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임명해왔습니다. 그것은 문학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문사회는 물론 자연 과학적 능력 역시 탁월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글쓰기를 포기하는 것은 특수한 취미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춰야 할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말과 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듯 글을 쓰면 됩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듯 쓰면 논리가 비약할 뿐만 아니라, 엉성한 글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말은 문학적 담화와 일상적 담화의 제재와 어법이 별도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리어리즘 이후의 문학관을 대변하는 것일 뿐, 일상적 담화를 그대로 옮겨 써서 시나 소설 같은 문학적 담화가 됩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상적 담화에서 택하는 제제를 골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되, 문자언어와 음성언어의 차이를 알고, 문자언어를 통하여 표현할 경우 무엇을 보완해 줄 것인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콥슨(R. Jakobson)이 말했듯이, 문학적 담화든 일상적 담화든 모든 담화(discourse)는 <화자(speaker)-정보(message)-청자(hearer)>의 역동적 관계에서 탄생됩니다. 이를 알기 쉽게 도해하면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습니다. 

문학적 담화 

일상적 담화 

이와 같은 관계에서 <실제 화자>는 작가나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 청자>는 독자나 듣는 이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 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축적 화자>에서부터 <함축적 청자>까지는 논리상으로 정해놓은 관념적 존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함축적 화자>는 이야기 속에에서 그 화제에 대한 실제 화자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존재이고, <함축적 청자>는 실제 시인이 예측한 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담화는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쌍방향의 화살표로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작가>, <화제=작품(텍스트)>, <듣는이=독자>라고 해도 문학적 담화와 일상적 담화는 화자와 청자가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느냐 여부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음성언어(音聲言語)를 매재로 하느냐 문자언어(文字言語)를 매재로 하느냐는 점에서 또 차이가 납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얼핏 생각하면 담화의 기본 구조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담화는 화자와 청자는 시간적(時間的).공간적(空間的) <배경(背景)>과 <상황(狀況)>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화자가 처한 <언제>, <어디에서>라는 시간적·공간적 배경과 상황을 밝힐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 분리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문학적 담화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상황을 눈에 보이듯 묘사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글이 첫머리에 배경과 상황을 제시한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를 넘어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또 일상적 담화는 상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면 부연하여 설명하거나 이야기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에서는 청자의 반응을 살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매재(媒材)의 차원에서 살펴볼 경우, 음성언어는 <높낮이>, <빠르기>, <크기>, <뉴앙스>, <몸짓>, <표정> 등의 보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자세하기 이야기하면 장황하게 들립니다. 반면에 문자언어는 이런 보조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작중 인물의 행동을 묘사할 때에는 이와 같은 연행적(演行的) 요소들을 묘사하여 부각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다음 문장들을 비교해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는 나즉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아주 음산한 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는 그냥 고맙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처럼 "나즉히"이라는 음성적 요소를 묘사하고, ⓒ처럼 표정과 뉴앙스와 음성의 높낮이를 묘사하면 "고맙다"는 이야기는 보복하겠다는 협박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글로 바꿀 때에는 화자가 등장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음성적 특징과 표정 등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기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예로부터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독서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작(模作) 충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 동안에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든지, 내가 쓰면 이보다 더 잘 쓸 수 있다는 창작 의욕이 일어나고, 그러기 위해 꼼꼼히 살피며 읽기 때문에 문학적 관습(literary convention)을 터득하고, 자기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티프(motif)나 소재(material)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안목이 높아져 퇴고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글쓰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에서 문학사(文學史)나 창작론(創作論)을 가르치는 교수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문학 작품을 많이 읽은 사람들에 속하지만, 실제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것은 그들의 독서 방법이 글쓰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려는 사람은 글쓰기에 알맞은 독서 유형을 선택해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글만 읽지 말고 여러 유형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의 유형은 크게 <이해(理解)의 독서>, <감상(鑑賞)의 독서>, <비판(批判)의 독서>, <창조(創造)의 독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해의 독서>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밑줄을 그으며 그 글의 주제를 잡고 낱말 뜻이나 숨은 의미를 파악하며 읽는 방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형의 독서는 정보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증가시킬 뿐 글쓰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읽고 있습니다. 

< 감상의 독서>는 전체 줄거리가 주는 재미나 뛰어난 표현을 맛보며 읽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런 유형의 독서는 글을 쓰는 데 <이해의 독서>보다 한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뿐, 실제로 글을 쓰는 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품이 주는 재미에 빠져 그 글의 구조나 표현 기법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글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와 같은 차이가 어떤 특질로 나타나는가를 따져보지 않고 읽기 때문입니다.

< 비판의 독서>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의 테마와 그를 구현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적합한가, 작중 인물의 행위는 개연성(蓋然性)과 개성(個性)을 지니고 있는가, 앞뒤 단락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가, 각 문장에 동원된 어휘들은 인물과 상황에 적절한가, 그 어휘의 음성 조직은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고 화자의 기분까지 드러내고 있는가 등을 분석하며 읽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런 방식은 우선 그렇게 읽기가 어렵다는 게 단점입니다. 따지는 일이 번거롭거니와, 자기도 모르게 그 글이 주는 재미로 끌려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글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상대방 글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단점을 발견하여 고칠 수 있어 앞의 두 방식보다는 글쓰기에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 유형인 <창조의 독서>는 <비판의 독서>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유형으로서, 그 속에 등장하는 것들을 제재로 삼아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작품을 구상하며 읽는 방식을 말합니다. 가령,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있다고 합시다. 문장이 지시하는 의미만 떠올리지 않고, 작품 속에 그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해풍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릿결과, 군데군데 금발로 물드린 머릿결 색깔과, 간밤에 그녀 머릿결을 쓰다듬던 연인과, 그들이 앉아 있었던 카페 탁자 위로 내리던 조명의 빛깔과, 그 조명에 반짝이던 그라스를 떠올리면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독서는 그 작품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는 게 단점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한 소재를 떠올리기 어려울 경우에도 아무 데서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방법으로 상상에 빠지면 아주 훌륭한 글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문학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문인들의 작품만 골라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문학 연구자에게는 필요한 방법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작품만 읽으면 어느 덧 그 문인의 아류(亞流)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면서 장점을 반영시키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문학적 깊이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의 총화(總和)가 그 사람의 개성(個性)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적 가치>와 <문학사적 가치>를 구분해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문학사적 가치는 그 작품이 쓰여진 때의 미적 기준으로 삼아 판단합니다. 그리고 문학적 가치는 그 작품이 읽혀지는 현재의 미적 기준에 의하여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경우, 문학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반드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라든가 김소월의 [진달래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서정적 장르가 가요적(歌謠的) 차원에 머물던 시절에 최남선의 신체시(新體詩)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 <소년> 창간호, 1908.1 

그러나 오늘날의 비평적 안목으로 보면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거론되는 것은 시조(時調)나 창가(唱歌)와 같은 정형시 시대에 자유율(自由律)을 채택한 작품이라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작에 목적을 둔 사람들은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은 문학사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만 읽고, 현대문학적 특성을 띈 작품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많이 쓰고, 부지런히 다듬고, 꾸준히 발표하며 끝없이 되돌아봐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단번에 미끈한 작품을 써내려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브라크가 말했듯이 예술가는 아주 조잡한 악상을 다듬어 위대한 교향곡으로 만드는 <베토벤 형(形)>과 단번에 완벽한 작품을 쓰는 <모차르트 형>이 있고, 단번에 모차르트처럼 완벽한 작품을 써내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번에 완벽한 작품을 써냈다고 해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작품은 어느 한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완성하는 것보다는 오랜 동안 고치고 다듬어야 깊이와 크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조(朝鮮朝) 때 과거를 보는 젊은이들을 위해 언해(諺解)한 시가 술잔을 앞에 놓고 칠보시(七步詩)를 지은 이백(李白)의 시가 아니라 오랜 동안 다듬고 고친 두보(杜甫)의 시였던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작품이냐 아니냐 여부는 문인의 작품이냐 비문인의 작품이냐 여부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문단에 나서지 않은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오랜 동안 고쳐 일정한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다면 작품이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조잡하고 깊이가 없으면 작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인이냐 아니냐 여부는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고치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치려고 마음을 먹는다고 무조건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개작(改作)의 정도는 그 사람의 문학적 안목에 좌우됩니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충 쓰고 팽개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작품을 고치려면 일정한 절차를 밟아 검토해봐야 합니다. 우선 그 작품의 의미적국면(意味的局面)이 자기가 쓰려는 것과 일치하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신비평에서는 <작가의 의도(intention)>와 <작품(work)>가 일치한다고 보는 것은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라고 비판하지만, 의도에 어긋나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의 경우는 직접 말하려 하고 있는가, 비유하고 있는가, 전체를 비유하고 있는가 부분을 비유하고 있는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가 화제에 걸맞는가, 화자의 태도와 발언이 입체적인가 어느 한 요소만 나타내고 있는가, 화자에 적절한 배경과 상황을 부여했는가, 전경화(fore-grounding)한 곳이 있는가, 행(行)과 연(聯)은 바르게 설정되었는가, 동원한 시어는 적절한가 등의 구조(構造)와 조직적(組織的) 국면을 살펴본 다음 문맥과 어법과 맞춤법 등을 검토하면서 고쳐야 합니다. 

작품을 고칠 때 마지막 유의할 것은 그 작품이 다른 사람의 작품은 물론 자기의 먼저 작품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검토하라는 겁니다. 다식판(茶食板)에 다식을 찍어내듯 계속 비슷비슷한 작품만 쓰고 있으면 일단 발표를 중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걸 개성(個性)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의사개성(擬似個性)으로서, 사고와 정서가 타성화 내지 고정관념화된 상태로서, 그런 작품은 존재성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타성화되었을 경우에는 우선 자기 문학관부터 검토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문예사조(文藝思潮)에서 말하는 관점과 자기 관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기 관점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판단되면, 이제까지 택해온 제재를 바꾸거나 다음 장에서 소개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기법상으로 관습화되어 있으면 자기 작품에서 작품을 이루는 데 참여하는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 과잉되고, 또 어떤 것들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작을 하려는 사람들이 문예이론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작품을 써서 책상 속에 채곡채곡 쌓아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개고나 퇴고의 능력은 문학적 안목과 직결된 것으로서 하루 아침에 높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싶으면 발표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글을 쓰려는 것은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는데 언제까지 이를 억누르면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로 바뀌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되었다고 생각되면 그 글을 완성했다는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읽어본 다음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발표해야 합니다. 

발표 후 다른 사람의 평을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애써 쓴 작품에 대해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면 누구나 섭섭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정확히 말하지 못할 경우에는 괜한 트집으로 받아들이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남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그 부분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남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테두리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비판이 온당하지 않을 경우라고 해도 어딘가에 자기 작품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자기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을 보완할 것인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를 했나요? 그럼, 다음 장에서는 좀더 논리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잠시 쉬면서 다음 사항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윤석산 교수님 프로필 


1946충남 공주군 계룡면에서 출생. 
1965공주 교육대학 입학. <석초> 동인으로 활동. 동인으로는 이장희 이관묵 등. 
1967 위 대학을 졸업하고 충남 당진군과 공주군에서 국민학교교사로 근무함(1975) 

2000년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협의회>, <현대시인협회> 등과 협력 약정을 체결하고, 인터넷에 <한국문학 도서관>구축에 전념
2001년 : 한일 신예 시인 1000인선 <새로운 바람>을 발간하고, 
7월 20일부터 23일까지 제주도에서 한일 시인대회 개최. 
마루치 마모루(丸地 守)와 공동 대회장을 역임.
계간문예 <다층> 창간
현재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
한국문학도서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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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조―70년 추석에 ―천상병(1930∼1993)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시 ‘귀천’으로 유명하다. 더불어, 사람들을 만나면 소주 사먹게 100원만 달라고 졸랐다는 일화도 유명해서 천상병 시인 하면 천진함과 어눌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천상병은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똑똑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고전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어는 물론 미국 통역관을 맡을 정도로 영어도 잘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67년 옥살이와 고문을 겪으면서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1971년에는 거리의 행려병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소릉조’라는 작품은 바로 그 즈음, 시인이 아픈 몸과 마음으로 여기저기 떠돌 때의 것이다.
 

 

몸은 상하고 집도 돈도 없는데 추석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추석이 되면 고향에 가야지. 시인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이 시에서 말하는 고향은 경남 창원의 진북이다. 그곳에 부모님이 잠들어 계시니 보러 가야 하는데 갈 길이 없다. 여비가 없는 탓에 형제도 만날 수 없다. 이때 가난은 서러움이 되고 외로움은 배가된다. 이때 시인은 막막해하며 ‘두보’를 떠올린다. 한평생 객지를 떠돌며 시를 썼던 두보의 호가 ‘소릉’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보처럼 외롭고 가난한 마음이라 해서 제목을 ‘소릉조’로 붙였다. 쉽게 풀이하자면 가난한 추석의 노래인 셈이다.

추석의 풍성함이 가을 햇살 같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추석에도 일하는 사람이 있고, 일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천상병의 ‘소릉조’를 읽는다. 45년 전의 외롭고 슬픈 추석과 오늘의 외롭고 슬픈 추석을 잊지 않기 위해 ‘70년 추석에’라는 부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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