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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은 “김수영의 미발표 시 15편을 발굴했다”며 “김수영 연구사에서 실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창작과비평’의 발표는 일대 사건에 가깝다. 다름 아닌 김수영의 시여서다. 김수영은 스스로 한국 현대시의 한 줄기를 형성한 시인이다. 하나 그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170여 편에 그친다. 그 10%에 가까운 새 작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단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다. 한데 무언가 찜찜했다. 원고 성격부터 엇갈렸다. 원고를 공개한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가 간직해온 원고”라며 “『김수영 전집』이 간행된 뒤 부인이 일부의 원고를 돌려받았는데 이게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 『김수영 전집』을 제작한 시인의 여동생 김수명(60년대 ‘현대문학’ 편집장)씨의 설명은 다르다. “오빠는 죽기 전에 발표 원고를 직접 골랐고 목록 작업까지 손수 마쳤다. 나는 내가 받은 원고 그대로 책으로 만들었다. 점 하나 빼거나 더하지 않았다. 책을 만들고나서 언니에게 돌려준 원고는 당연히 없었다. 즉 이번 원고는 오빠가 마음에 안 차 묵혔던 미완성 초고로 보인다.” 김명인 교수도 이번에 찾아낸 시 15편 대부분이 미완성이라고 인정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생전의 시인이 덜 여물었다고 판단해 내다 놓지 않은 초고를, 후세의 연구자가 미발표작이라 이름붙여 발표해도 되는가. 미(未)발표가 아니라 ‘비(非)발표’ 아닌가. 유고작가의 작품을 발굴했다는 건 지면에 발표된 작품을 찾아냈을 때 적용되는 어법 아닌가. 일기 안에 들어있는, 운문 구조의 몇 줄 글을 떼어내 제목을 달면 시가 되는 건가.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김수영을 말하고 있다. 꼼꼼하다 못해 깐깐했던 시대의 인텔리겐차 김수영 말이다. 이 원고가 세상에 까발려지는 걸 김수영은 순순히 동의했을까. 김수영은 이 원고를 진정 ‘내 작품’이라 여겼을까. 김수영을 전공한 비평가 5명으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연구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대신 “김수영 문학의 진본(珍本)이라는 김명인 교수의 주장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자, 그럼 이 원고는 『김수영 전집』 1권(시 전집)에 추가로 수록되는 게 옳은가. 전집에 실린다는 건, 대중 앞에 김수영의 시라고 도장을 찍어 내놓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저승의 김수영에게 혹여 흠이 되는 건 아닐까. 정말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이번에 공개된 작품 중에 ‘...만세’란 게 있다. ‘연꽃’과 함께 완성도가 인정된 두 편의 시다. ‘...만세’는 1960년 ‘잠꼬대’란 제목으로 발표하려다 실패한 작품이다. ‘...만세’ 다섯 글자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이 김수영 일기에도 나와있지만(『김수영 전집 2』, 339∼340쪽), 전문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요즘 네티즌이 이걸 보고 쑥덕이는 모양이다. ...만세! 라니, 이런 반응이 대세란다. 하나 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얘기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이다. 김수영은 사회의 금기를 대놓고 따지고 싶었던 거다. 하니 이젠 제발, 이러지 말자. 시방 이딴 걸로 호들갑떠는 건 외려 우습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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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1921~68) 시인의 미발표 시 15편과 일기 등 산문 30여 편이 새로 발굴됐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교수(인하대 국어교육과)가 발굴해 다음주 발간되는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공개한 김수영의 미발표 작품은 '...만세','연꽃'등 시 15편과 미완성 습작 소설, 소설 구상 메모, 독후감을 포함한 일기 등 산문 30여 편으로 1954년 1월~1961년 5월에 작성된 것들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양의 김수영의 시와 산문이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원고들은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씨가 보관해 오던 것으로, 10여 권의 수첩과 노트, 서류 봉투와 엽서, 광고지 등에 남긴 것이다. 이 가운데 '...만세(...萬世)'라는 시는 4ㆍ19가 일어난 반년 뒤인 1960년 10월6일 탈고했지만 이념적인 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다.
...만세 김수영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만세> 부분. 한자는 한글로,
<창작과 비평>에 새로 발굴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공개하면서 ‘제 모습 되살려야 할 김수영의 문학세계’라는 해제를 쓴 김명인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김수영은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최대의 금기였던 ‘...만세’를 제목을 포함해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상당한 시적 울림을 확보한 문제적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5ㆍ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1년 3월에 쓴 <연꽃>이라는 시에서도 “긴장하지 말라구요/ 社會主義 동지들/ 사랑이 있지 않어/ 작란이 있지 않어/ 냄새가 있지 않어/ 해골이 있지 않어”라며 ‘社會主義’를 지지하는 듯한 표현을 쓰고 있어 주목된다.
김명인 교수는 “부인 김현경씨 말고도 김수영의 누이동생인 김수명씨 역시 김수영의 미발표 원고를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번에 대거 발굴된 새 작품들과 앞으로 더 찾아내야 할 추가 원고들을 포함해 명실상부한 ‘원본 김수영 전집’을 다시 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발굴 원고 전체를 포함한 상세한 내용물 발표.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도봉산 입구의 김수영 시비에 새겨져 있는 대표시 <풀>의 전문이다. 1969년 그의 1週忌를 맞아 조성된 시비는 시만큼이나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풀은 한사코 눕는다. 동풍에 나부껴 눕고, 울다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다가 다시 눕고, 종당에는 뿌리째 눕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다.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나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풀>은 그의 卒詩다. 시를 쓴 지 보름 만에, 김수영은 대취하여 귀가하던 중 인도로 돌진한 좌석버스에 치어 비명횡사했다.
김수영은 두 얼굴의 사나이 정도가 아니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의 시는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소시민적 자학을 담고 있기도 하다. ‘서정주와 함께 한국 시문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라는 평론가도 있다. 그에 대한 호불호는 매우 극단적이다. 그가 6‧25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국군에게 총탄을 퍼부었던 경력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으니 이후 세상살이가 울매나 고단했을지 상상만 해도 그저 아득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위축되지 않고 우상을 파괴하고 완전한 언론자유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시는 세상의 편견에 맨몸으로 부닥친 용기 있는 외침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그가 좌익 인사였다면 마음속으로라도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시는 2012년 강신주의 評傳 「김수영을 위하여」에 처음 발표되었다. 신경림이 「시인을 찾아서」를 집필할 때까지는 이 시가 상굿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김수영을 저와 같은 좌파로 여기면서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옹골짜다. 한겨레신문을 비롯하여 좌파들은 이 시를 진정 ... 찬양詩로 알고 빠짐없이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김수영은 ...을 찬양하자는 게 아니라 이념이나 표현에 구애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의 시정신은 이미 이념을 넘어서 있었다.
...만세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은 선린상고 시절 오스카 와일드의 시를 영어로 모두 외울 정도로 일찍부터 시에도 조예가 있었고 영어실력도 뛰어났다. 왜국으로 건너가 동경상대에 다녔지만 학도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도망갔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잠시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47년 종합문예지 「藝術部落」에 시 <廟庭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이듬해 박인환‧김경린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6‧25가 끝나고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에는 신문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며 詩作과 번역 일을 겸했다. 1959년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했다. 그가 죽은 뒤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이 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다.
김수영의 시를 난해하고 모호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의 시에 내재하는 시정신은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새롭게 깨어난다. 이러한 특성에 대한 신경림의 해석은 참으로 ‘난해하고 모호하여’ 소개할 마음이 없다. 신경림은 <그러나 나는 이 시인은 이러한 경향의 시인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같은 문장으로 독자의 실망을 배가시킨다. ‘시인이다라는’과 같은 표현은 국어실력이 모자라는 자들이 쓰는 틀린 어법으로 ‘시인이라는’으로 써야 맞다. 맞춤법을 몰라도 크게 욕될 것 없는 인사들이 TV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모국어를 생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런 어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시는 몰라도 산문 쓰는 일은 당장 그만둬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수영이 현실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담고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김수영은 도덕적 순결성을 지향하는 시민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질타하기 위해 일부러 장황하게 여러 상황들을 끌어들였다. 김수영이 이 시를 쓴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시의 내용에 상당히 공감이 간다. 지난 시절에는 이러한 자유조차 누릴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요즘은 자유가 방종이 되어 오히려 자유를 얽매고 있다. 시가 절제된 언어로 인간의 내면과 세상을 표현하듯이, 자유도 누리는 자가 스스로 절제할 때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친북좌파들은 참여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며 순수문학의 가치를 폄하한다. 그러나 참여문학은 이기적인 특정 부류의 비위를 맞추는 데 국한되지만, 순수문학은 만인의 정서를 위무하고 교양을 함양시켜준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등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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