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상상력들
흔히 뒤샹의 〈샘〉을 언급하면서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는/못하는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게 모냐구요? 어케 1917년 뒤샹이 대량생산된 상품(소변기)을 ‘작품’으로 전이시키는 유쾌?상쾌?통쾌한 발상을 하게 된 것일까?
흔히 그 발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뒤샹의 진술, 즉 “나는 소변기나 병걸이 등을 고상한 예술 애호가들에게 하나의 야유이자 도전으로 던진 것인데, 네오-다다이스트들은 그 오브제를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취급한 것이다”라는 진술에 대부분의 뽕론가들은 기댄다.
Fountain, 1917. Marcel Duchamp(photographed in 1917 by Alfred Stieglitz)
물론 뒤샹의 〈샘〉 논의가 단지 뒤샹의 진술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소변기의 형태에서 성적 요소를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소변기의 비어있는 내부 형상이 마치 자궁형태를 닮았다 혹은 소변기의 형태가 여성신체의 곡선을 뜻한다고 말이다. 어느 뽕론가는 뒤샹의 진술을 뒤집어 네오-다다(neo-dada) 작가들의 행위를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확장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허나 뒤샹의 진술뿐만 아니라 소변기의 형태에서 볼 수 있는 미적 요소 그리고 일종의 ‘네오-다다 일병 구하기’ 역시 뒤샹의 레디-메이드 발상을 가능케 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아니다. 그와 같은 기존 뽕론가들의 논의는 오히려 뒤샹의 〈샘〉을 마치 현대미술의 ‘사생아’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뒤샹은 신화적 인물로 포장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뽀 역시 이것이 뒤샹의 레디-메이드 발상 비하인드 스토리이다라고 당당하게 썰을 풀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따라서 대뽀는 이곳에서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발생하게 된 동기(사례)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물론 그 사례들 또한 대뽀의 주관적 판단에서 선택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불온한 상상력’이 될 것이다. (대뽀는 이미 1999년 뒤샹의 〈샘〉에 관해 단행본 분량의 텍스트를 탈고했고, 현재 단행본 출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는 그 텍스트에서 빠진 부분만 보충하고자 한다.)
흔히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언급할 때 등장하는 것이 다다(dada)다. 핼 포스터(Hal Foster)는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1996)에서 뷔르거(Peter Buerger)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네오-아방가르드라는 대립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다다의 틀에 가두어두었는데, 그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다.
와이?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일명 ‘안티-아뜨’로 불리는 1916년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발한 다다(dada)보다 2년전,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뽀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등장하기 전(前) 특히 유럽미술계 상황을 뒤적거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909년 2월 20일 시인 마리네티(Marinetti, Filippo Tommaso Emilio)는 프랑스 파리의 일간지 르 휘가로에 〈미래주의 선언(Manifeste de Futurisme)〉을 게재했다. 그 선언문 중 자주 인용되는 한 문장만 인용해 보자.
“기관총의 탄환처럼 질주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NIKE of Samotrace)보다도 아름답다.”
마리네티 진술은 질주하는 자동차, 즉 미래파가 속도(기계)에 열광했음을 알려준다. 1913년 뉴욕에서 처음으로 열린 아모리 쇼(Armory Show)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Nude Descending a Staircase)〉(1912)는 흔히 미래파의 영향으로 간주되곤 한다.
흥미롭게도 뒤샹이 속도/기계에 열광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뒤샹은 1912년 레제(Fernand Leger) 와 브랑쿠지(Constantin Brancusie)와 함께 항공전시회를 보러갔단다. 당시 뒤샹은 항공기 프로펠러를 보고 부랑쿠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뒤샹 왈, “이제 아트는 끝났어. 누가 저 프로펠러보다 더 잘 만들 수 있겠나? 자네 할 수 있겠나?”
아마 뒤샹은 미끈하게 잘빠진 프로펠러에게 반했나 보다. 와이? 그 어느 조각 작품보다 잘 제작된 것으로 뒤샹의 눈에 보였으니까. 그래서 미끈한 조각 작업에 열중하는 브랑쿠지에게 너, 저 프로펠러보다 잘 만들 자신 있어?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당시 부랑쿠지는 열라 열 받았을지 모른다. 그런 까닭인지 부랑쿠지는 그 이후 프로펠러보다 더 미끈한 조각 작품들을 제작한다. (특히 부랑쿠지의 〈공간 속의 새〉를 보라) 버뜨(but), 뒤샹은 브랑쿠지와는 달리 프로펠러보다 더 잘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뒤샹은 그 이후 아예 기성품(ready-made) 자체를 ‘작품’으로 자리바꿈시킨다. 그 첫 작품이 〈병걸이〉(1914)이다.
그럼 뒤샹의 〈병걸이〉는 단지 자신이 2년전에 브랑쿠지에게 씨부린 진술을 그냥 현실화시킨 것이란 말인가? 만약 그랬다면 왜 뒤샹은 1912년에 레디-메이드를 고안하지 못한 것일까?
레디-메이드는 장구한 서구미술사가 추구했던 ‘재현주의’에 똥침을 놓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뒤샹 이전에 재현주의에 똥침을 놓은 작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린버그가 열광하고 주장했던 추상회화들을 보시라.) 20세기초 유럽에서 적잖은 작가들이 재현주의를 넘어서는 작업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누구보다도 뒤샹의 눈을 사로잡은 작가의 작품이 있었다. 그 작가는 추상을 통해서 재현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실재 오브제(사물)를 작품에 직접 차용한 이었다.
그 작가가 누구냐고요? 피카소(Pablo Picasso). 뒤샹이 항공전시회를 방문했던 1912년 피카소는 평면에 오브제를 꼴라쥬한 작품(〈Still Life with Chair-Caning〉)을 제작했다. 아마도 피카소의 작품은 적잖은 화가뿐만 아니라 뒤샹에게도 커다란 충격으로 보였을 것이다.
피카소의 작품은 회화에 실재 오브제를 접목시킨 첫 사례다. 근데 뒤샹은 한술 더 뜬다. 1913년 뒤샹은 오브제와 평면을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와 오브제, 즉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목시킨 작품(〈Bicycle Wheel/Roue de bicyslette〉)을 제작한다. (흥미롭게도 그 뒤샹의 작품은 마치 항공기의 프로펠러처럼 자전거 바퀴를 돌릴 수 있다.) 그 다음 해인 1914년 뒤샹은 드뎌 단일 품목, 즉 하나의 오브제를 작품으로 전이시키기에 이른다.
자, 이제 대뽀의 ‘불온한 상상력들들’에 대한 결론을 때려보자. 대뽀가 볼온한 상상력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뒤샹의 〈샘〉이 결코 ‘갑자기’ 등장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레디-메이드가 등장한 1914년 전(前)을 고려한다면 당시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사회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대뽀는 그 단적인 사례로 (유럽미술계로 국한해서) 입체파와 미래파를 들었다.
흥미롭게도 입체파와 미래파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것. 말하자면 입체파 역시 기계에 열광했던 미래파처럼 흔히 ‘만화경’으로 불리는 기계(입체사진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이다. (이 점은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연속촬영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교차한다.) 그럼 20세기초 적잖은 작가들은 당시 사회적 변화 특히 새로운 미디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 아닌가?
뒤샹은 항공기 프로펠러를 보고는 이제 아뜨는 끝났어라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레디-메이드의 등장은 다름 아닌 '예술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미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미술사를 지탱하였던 ‘시각미술의 종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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