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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白頭山)
백두산 고려시대 이전의 백두산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이 처음이 될 것이다. 이 유록은 그의 유저(遺著)인 《당주집(鐺洲集)》속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64년(영조 40) 여름, 5월 14일 경성군(鏡城郡)에 살던 박종이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 · 무산(茂山) · 임강대(臨江臺) · 풍파(豊坡) · 천평(天坪) · 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18일이 걸렸고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백두산유록>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 · 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집(保晩齋集)》속에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있다.
근래 외국인의 백두산에 대한 탐사기록으로는 우선 1900년에 러시아에서 간행된 《한국지(韓國誌)》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지리> 속에 인용된 스트렐비츠키의 백두산 등정기에서는 "6일 동안 우리는 빽빽한 타이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탄바이에서 60㎞ 떨어진 부르토파라고 불리는 자연경계선 뒤에서부터 숲은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도를 더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는 8~10㎞ 정도 떨어진 곳에 백두산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은 넓은 기저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기저는 커다란 그러나 완만히 상승되는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산기슭에는 몇 개의 작은 둥그런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 언덕들은 주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백두산과 비교하여 볼 때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더 선명하게 백두산의 높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이 책의 제1부는 해설과 탐행기록, 제2부는 사진, 부록에는 대만 · 천도(千島: 쿠릴열도) · 캄차카의 산들로 나누어 편찬되어 있다. 비록 일본제국주의 참략자들이 영토확장의 목적으로 탐행한 기록이지만, 광복 전에 백두산을 탐사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백두산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 폭포의 높이 등 부정확한 기록이 발견되며, 기행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 《백두산천지》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역시 시 속에 나타난 백두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몇 작품만 보면 고려시대 이색(字穡)의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 라는 시제 속에 "솟아오른 장백산과 험준한 철령관이 수천리에 가로놓여 있으니 하늘이 만든 험한 땅이라 가히 넘나들 수 없다…(長白山穹窿鐵嶺關峰山岏橫亘幾千里天險不可越‥‥‥"라는 한시가 있다.
진태하(陳泰夏)는 1984년 7월,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백두산' 이라는 시로써 토로했다. "민족도/국토도/분단된 슬픈 역사속에/통일의 그 날을 기다려/하마 하마 사십년/세월의 기만(欺瞞)에/분노는 열화처럼/이역(異域)길 돌아 돌아/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신들린 걸음으로/민족의 성지(聖地), 국토의 시원(始原)/백두산을 찾아/장강(長江)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잃어버린 우리의 땅/만주(滿洲)벌 수만리(하략)." 최근 백두산에 대한 장편시로서는 1987년 발행한 고은(高銀)의 《백두산》이 있다. 이 시는 전체 4부로서 8권을 출간할 예정인데, 현재 1부 2권이 발간되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그런데 시의 시발인 백두산은 정작 자료와 상상의 세계로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백두산을 등반해보지 못하고 작자의 상상과 동경 속에서 백두산을 묘사하였다. 이 시의 서시를 보면 "장군봉 망천후 사이 억겁 광풍이여/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는 광풍이여/조선 만리 무궁한 자손이 이것이다/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여섯 봉우리마다/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라고 쓰여 있다. 북한에서도 <백두산>이라는 장편 서사시가 발표된바 있으나 백두산을 무대로 한 김일성의 행적을 미화한 것으로, 문학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근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北間島)>를 들 수 있다. 1959년 4월 《사상계(恩想界)》에 제1부가 발표되면서 시작하여 1967년에 제5부로서 완료되었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은 이 소설에 대하여 "해방 뒤 10여년 내의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북간도>가 아니던가 느껴진다. 그만큼 <북간도>는 근래의 우리 문학사를 대표한 작품인 줄 안다."라고 평하였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북간도가 배경으로 되어있으나, 백두산일대의 묘사와 그에 얽힌 전설도 많이 삽입되어있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삶의 강인한 정신력이 등장인물 중 한복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한복이는 백두산의 혼을 닮아있다. 이외에 이미륵(李彌勤)도 그의 저서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육대조 호경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道詵)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을 수시로 괴롭히던 이민족의 집단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모래비가 내리어 그 지역을 덮어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두산 밑 무산땅 최가령 동쪽에 표면은 흙이지만, 파보면 5~6척이나 모래가 덮여 있고 그 속에는 또 흙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
곧 백두산에 포륵호리지(布勒湖哩池)라는 천지가 있는데, 선녀 세 자매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셋째 선녀의 우의(羽衣)위에 놓았다. 셋째 선녀는 이 열매를 먹고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 성을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곧 청제실(淸帝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변에 지암이라는 바위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로서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미술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 · 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작품으로서는 진태하가 1985년 3월에 《조선일보》에 보도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 대한 음악은 우리의 애국가(愛國歌)로부터 적지않은 노래가 있다. 이 가운데 <조선유람가>는 1947년에 최남선이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것으로 당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애창하였던 노래다.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한울을 버틔고선 백두의 성산/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럿네/…."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은 제목과는 달리 주로 백두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곡한 <아! 백두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흥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지구의 정수리/단군왕검 태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역사 드높다/아 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를 높이자/…."
그 실증으로 《북사》와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준비해간 그릇에 담아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외경(畏敬)한 산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괄지지(括地志)》에는 백두산의 조수초목(鳥獸草木)은 모두 백색이라고 기록할 만큼 상서로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백두산을 등정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제문에 공감할 것이다. 백두산 일대에는 천변만화로 삽시간에 변모하는 가공할 날씨에 누구나 인간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하늘에 의지하여 빌 수밖에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백두산은 우리 민족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언제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화합 단결하고, 미래의 밝음으로 지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내일을 있게 하였으며. 하늘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심을 낳게 하였다.
백두산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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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시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없는 웃음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 천년이끼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 곰팡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듯 고루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해지는 이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주저하는 이 절정! 세월의 류수에 추억의 배 거슬러올리라- 어느해 어느때에 이 나라 빨지산들이 이곳에 올라 천심을 떠닫으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이제 항일에 의로운 전사들이 사선에 올랐던 이 나라에 재생의 백광 가져왔으니 해방사의 혁혁한 대로 두만강 물결을 넘어왔고 백두의 주름주름 바로 꿰여 민주조선에 줄곧 뻗치노니 또 장백의 곡곡에 얼룩진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력력하노니 내 오늘 맘놓고 여기에 올라 삼천리를 손금같이 굽어보노라!
오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듯 넘나든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땅에서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머리에 섰느냐?
쉬! 바위우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여뻗치고 남쪽하늘 노려보다가 <따-웅-> 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시련듯 톱을 들어 <따-웅-> 그리곤 휘파람속에 감추인다 바위 호을로 솟아 이끼에 바람만 스치여도 호랑이는 그 바위에 서고있는듯 내 정신 가다듬어 듣노라- 다시금 휘파람소리 들릴지 산천을 뒤집어떨치는 그 노호소리 다시금 들릴지!
바위! 바위! 내 알리 없어라! 정녕코 그 바위일수도 있다 빨지산초병이 원쑤를 노렸고 애국렬사 맹세의 칼 높이 들였던 그 바위 이 땅에 해방의 기호치던 장백에 솟은 이름모를 그 바위 또 내 가슴속에도 뿌리박고 솟았거니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더듬으며 가난한 시상을 모으고 엮어 백두의 주인공 삼가 그리며 삼천만이여, 그대에게 높아도 낮아도 제 목소리로 가슴 헤쳐 마음대로 말하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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