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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말한다...
2016년 11월 01일 00시 28분  조회:4047  추천:0  작성자: 죽림
 

                                        조기천의 서사시백두산

1. 조기천의 생애 

분단이후 북한 문학사가 "평화적 건설시기"(1945. 8-1950. 6)의 걸작으로 꼽고있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강승한의 서사시 『한라산』과 함께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이 서사시는 비단 이 시기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분단시대의 북한문학 전시기를 통틀어서도 이념적 경직성이 지나치지 않는 8·15직후의 빈약했던 우리 문학가에서 드물게 보는 성과로 평가받을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1970년대를 전후해서 본격화된 주체이념의 유일사상화 시기를 북한문학의 이해와 평가의 시대적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방법론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도 『백두산』은 오히려 주체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예술작품이 지닌 그 부정적 측면을 잘 극복한 뛰어난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 조기천은 1913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내 시베리아로 이주해 갔다. 소련에서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방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짤막한 시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옴스끄의 고리끼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앙 아시아 끄실 오르따 조선사범대학에서 약2년간 교직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8·15때 조기천은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왔던 소련군에 참여했다가 이내 북한으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북한 문단의 구성요인이었던 재북·월북파,연안파,소련파 등의 구분에 따르면 소련파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조기천은『조선신무넬에서 일하면서 1946년 3월 서정시「두만강」을 발표하여 처음 시인으로서의 얼굴을 나타낸다.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수난받는 민중상과 항일투사들의 투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8·15의 감격을 노래한「울밑대에서 부른 노래」,토지개혁을 읊은「땅의 노래」등을 거쳐 1947년 『백두산』을 쓰게된다. 

소련파였던 조기천이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항일유격전을 소재로 하여 김일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에 손을 댄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으나 어쨌건 이 시로써 그는 일약 북한문단의 일급으로 부상한다. 1948년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항쟁의 려수」를 발표하여 그는 북한당국으로부터 공로메달을 받았는가 하면 8·15기념예술축전에서 연 세 번이나 수석 표창을 받았다고 전한다.

 

1949년 여름에는 휴가를 이용하여 흥남인민공장을 방문하여 약20일간 노동자들과 함께 한 체험을 바탕삼아 1950년6월에 장편 서사시『생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2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도록 노동자들을 독려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6·25가 일어나자 조기천은 9월에 종군작가로 나서서 낙동강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중에 저 유명한「조선은 싸운다」를 비롯하여「불타는 거리에서」「죽음을 우너수에게」「나의 고지」등 시작품을 썼다. 특히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로 시작되는「조선은 싸운다」는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지도에서 도시와 마을은 폭격으로 불타고 없으니 찾지 말아라는 이 시는 선전과 서정이 조화된 반전시로 세계문학사에 알려져 있다. 

1951년 3월 조기천은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피선된다. 그 해 5월 그에게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이 수여되기도 한다. 그 두 달 뒤인 7월 31일 조기천은 39세로 평양에서 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품 속에서는 유고『비행기 사냥군』이란 서정서사시가 있어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전한다. 

조기천의 생애는 짧았기에 북한의 어떤 정치적 격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애국적 시인"으로 남았고, 또한 그의 작품활동 기간은 "평화적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시기"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기천은『생의 노래』에서 투철한 자신의 문학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소련 시절부터 익혔던 사회주의 미학관의 한 표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엔

시가를 풍월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화조월석을 찾았고

초로인생을 설어했는가?

 

그래서 그들에겐

외적의 나팔소리보다

꾀꼬리소리 더 높이 들리었고

달이 둥그는 걸 잘 알았는가?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병든 마음을 파고들며

인생의 비애를 찬미하며--

 

무엇 때문이었느냐?

지는 곷이 서러웠드냐?

조선의 가슴에

일제의 칼이 박혔는데--

-『생의 노래』에서

 

8·15뒤 북한문학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조를 그 바탕으로 삼으면서 민족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는데 비록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낸 조기천 일지언정 이런 원칙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성 싶다. 

2.백두산의 주제로서의 보천보 전투 

8·15직후 남북한은 문학적으로 다 일제잔재 청산과 새 사회 건설을 위한 완전독립을 이루려는 반외세운동 등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친일파에 대한 처벌문제와 반제·반봉건 의식의 문학이 가장 긴박한 과제로 등장했으며 이를 다룬 작품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남북한에서 다 토지문제를 다룬 작품이 상당량에 이르며 그 뒤로 오면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탐구를 주로 다루는 한국문학과 사회주의 개혁의지를 다룬 북한 문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조기천의 『백두산』은 바로 그 갈림길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면서 그 당시로서는 직접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항일빨치산을 소재로 했다는데서 이 시인의 특이한 역사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서사시의 소재인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항일투쟁사에서 여러 각도에 걸쳐 고찰된 것이 많은데 최근 소개된 와다 하루키(和母春樹)의「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사회와 사상』1988.11-12 연재)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이 시작되면서 국내로까지 손을 뻗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지휘자는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커민테른 제7차대회의 새방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의 힘으로 조선독립투쟁을 수행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져 3개사가 공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입안하게 된 것이라고 와다 교수는 보고 있다. 

즉 제6사는 장백에서 보천보를 공격하고, 제4사는 무송-안도-화룡으로 돌아서서 조선의 무산을 치며, 제2사는 임진강 일대에서 장백으로 향하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제안은 김일성이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적으로 간삼봉(間三峯)에서 만나기로 한 이 3개사 합동작전은 제4사의 최현의 이름을 유명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의 제6사는 근대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북한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하 와다 교수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김일성의 제6사는 무산에서의 행동을 통보받고 6월 4일밤, 100여명이 강을 건너고, 대안에서 조국광복회 청년 80여 명과 합류하여 보천면 보전(保田)을 공격했다. 보건은 일본인 26호, 조선인 280호, 중국인 2호, 합계 308호인 소읍으로서 조재소에는 5명의 경관이 있었다. 이 주재소를 비롯하여 면사무소·삼림구(森林區)·우체국·관공서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부대는 〈10강령〉의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철수할 때 혜산서(署)의 오가와(大川)의 경부가 이끄는 병력의 추격을 받자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물러갔다. 

보천보 작전을 성공리에 끝마친 제6사는 장백의 밀영으로 일단 철수했다가 제4사·제2사의 도착을 기다려 간삼봉으로 이동했다. 총인원 400이라고도 하고 600이라고도 한다. 그 사이 조선 침입사건으로 초조해진 일본군은 함흥의 제74연대를 김석원 소좌의 지휘하에 출동시켜 국경 일대의 토벌전을 시도했다. 이 군대에 6월 30일, 간삼봉에서 기다리고 있던 3사 연합군의 타격을 가했다.

(『사회와 사상』1988. 11. 187쪽)

 

이어 와다 교수는 이 사건으로 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원이 일제 기관에 의하여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쓴다. (보다 자세한 자료는 남현우 엮음『항일무장 투쟁사』대동, 253-266쪽 참고) 

이 1937년 6월4일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조기천의 『백두산』으로 이는 북한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많은 예술작품이 다뤄온 역사적인 한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 보천보 사건을 다루면서도 결코 이 사건 하나만에 국한시키지 않는 항일빨치산 투쟁의 보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서가고 있다. 즉 이 시에서는 김을 비롯한 몇몇 고유명사만 빼면 어떤 특수한 사건이 아닌 항일 투쟁의 민족적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했다고 풀이한다. 예술적인 일반화를 시도하려는 동기에서 이 시는 사건발생의 명확한 연도와 지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예컨데 H시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웅주의를 벗어난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민족적으로 일반화된 민중주체의 항일투쟁을 전형화 시킨다는 의도로 평범한 농민투사들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김만은 예외적 구상으로 이뤄져 있다. 

3.백두산의 구성과 특징

머리시와 1-7장에다 맺음시로 이루어져 있는『백두산』은 조기천 자신의 서정시「두만강」을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즉「두만강」에 나오는 국토와 민족애가 『백두산』에 그대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째진 가난 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주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여인이 아닌가?"(「두만강」)에 나타난 여인상이 그대로『백두산』의 꽃분이로 승화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의 민족문학에 나타난 여인상은 모두가 꽃분이일 수밖에 없다는 민족적 보편성이 성립할 소지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보편성을 먼저 내세우느냐 하면 분단 44년이 지나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지만 민족문학사의 긴 뿌리에서 본다면 결국은 동질성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대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백두산』의 모든 인물들은 근대 이후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반성을 지닌 인간상이 아닐까? 예컨데 꽃분이는 가난 속에서 민족의식을 지닌 채 자라나 빨치산 활동에 투신하여 박철호와 위험을 무릎 쓰고 항일선전 및 무장투쟁에 까지 가담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박철호가 죽어간 뒤에도 미래의 조국 건설을 위한 후비대로 눈물을 삼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한 여인상의 고난은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너무나 많은 변형으로 나타난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아사녀로 상징되며, 소월의 시에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님을 보내드리는 그 여인상 모두가 우리의 꽃분이가 아닐까. 

『백두산』은 그 앞머리부터 역사적인 현실성으로서의 평범성(곧 민중성)과 초자연적인 영웅성이 조화를 이룬 채 장엄하게 묘사된다. 이 조화로운 자연묘사는 영웅주의와 민중성을 하나의 역사적 진보의 작용으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난 영웅상은 한 개인적인 위대성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영웅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시에는 김을 그 정점으로 삼아 짤막하나마 초인화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다른 빨치산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홀로인 영웅주의로 우뚝 솟은 인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민중적 영웅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적 구도로 『백두산』은 가장 민중적 형식인 구비문학의 각종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는 철저한 전통적 민중성을 혁명의 기초로 삼으려는 의도된 문학적 형식이기도 한데 민요조로 이루어진 가락은 독자들에게 한결 친근감을 준다. 

시적 사건 전개방법은 오히려 극히 단조롭다. 아내를 일본인에게 잃은 김운칠은 혜산에서 솔개 마을로 옮겨와 화전농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딸 꽃분이는 조선광복회 회원일시 분명한 박철호가 정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왔을 때 그에게서 1년동안 지도를 받는다. (2장) 꽃분이와 철호는 유인물을 만들다 일본경찰에게 들킬뻔 했으나 꽃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3장) 임무를 끝낸 철호는 16세 소년 영남이와 떠났으나 압록강을 건너다 영남은 사살되고 만다. (5장) 이미 국내에 조직되어 있는 과옥회 회원들과 연계하여 잠입한 빨치산은 쉽게 폭동에 성공한 후 각종 정치사업을 끝내고는 물러간다. 폭동 성공은 물론 꽃분이와 철호가 그 앞장을 선다. (6장) 그러나 압록강 뗏목을 타고 국경을 넘어가던 중 철호와 청년빨치산 중 가장 용감했던 석준이 총에 맞아 전사한다. (7장) 

이미 밝힌 것처럼 보천보 전투를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특정 지명을 쓰지 않은 것은 항일투쟁의 보편성을 전형화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투쟁의 전형성은 먼저 투철한 조직의 부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H시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이미 만들어진 조직을 통하여 힘들이지 않고 잠입하여 쉽게 폭동을 일으킨 후 여유있게 물러간다. 그리고 이런 힘이 원천을 이 시에서는 민중의 편에 선 민중을 위한 조직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인 제4장은 나흘째 굶은 빨치산 대원들이 소 두 마리를 끌고 오자 그 소가 일본의 것이 아닌 조선과 중국 농민의 것임을 알고는 되돌려 주려다 실패하곤 그 대가라도 치뤄야 한다는 철의 규율이 나오는 대목이다. 제4장의 5절에 나오는 민중성의 강조는 근대이래 우리 민족문학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구절이다. 

항일빨치산이 지닌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하여 『백두산』의 맺음시는 "그러면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오늘은 무엇을 보느냐?/ 오늘은 누구를 보느냐?"고 묻도록 만든다. 바로 8·15직후의 한반도로 항일의 의지를 끌어들여 역사적 진로를 모색코자 하면서 이시는 끝난다. 물론 문학의 당시 입장이 선명하게 스며있다, 그러나 8·15직후의 북한 입장이란 오늘의 분단고직화 시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자유의 나라!/ 독립의 나라!/ 인민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외친다!/ 백성은 이렇게 외친다!"는 마지막 구절은 당시 남북한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이었기도 하다. 

이래서『백두산』은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옹고되기 이전의 동질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서사시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일제 식민지 아래서의 구체적인 민중적 삶의 실체가 좀 약하다든가 하는 나대로의 비판이 따를 수도 있지만 8·15직후의 작품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 문학의 수확인 점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흰 바위에 앉아서(외1수) 

      *조기천 



나는 개울물과 이야기하노라 
바위에 바위 돌에 돌을 지나 
구름인양 내리는 개울물 
딩굴어 달리며 쫓으며 
무삼 이야기 그리도 기쁘뇨? 

골짜기를 지나 바위를 뚫고 
이곳까지 밤낮 달리였노라 
어려운 앞길이 천리 또 천리 
그래도 어느 때나 웃어 떠들며 
한갖 믿음으로 깊어 흐르겠노라---- 

맑은 물줄기여 
나도 너처럼 씩씩하리라 
또 싸움의 길에 낭떠러지가 있으면 
떨어져서 천야만야 창창 떨어져서 
산산이 부서져야 된다면 
내 서슴없이 뛰여들리라! 

어느 때나 인민을 위해 
너처럼 내 살리라 
맑게 
쟁쟁하게 
줄기차게--- 

흰 바위에 앉아서 
나는 개울물과 이야기하노라 
-------------------------- 

휘파람 

  

                            조기천 

 오늘 저녁에도 휘파람 불었다오 

 복순이네 집앞을 지나며 

 벌써 몇 달째 휘파람 부는데 

 휘휘 ... 호호 ... 

 그리도 그는 몰라준다오 

  

 날마다 직장에서 보건만 

 보고도 다시나 못볼 듯 

 가슴 속엔 불이 붙소 

 보고도 또 보고 싶으니 

 참 이 일을 어찌하오 

  

 오늘도 생긋 웃으며 

 작업량 삼백은 넘쳤다고 

 글쎄 삼백은 부럽지도 않아 

 나도 그보다 못하진 않다오 

  

 그래도 그 웃음은 참 부러워 

 어쩌면 그리도 맑을가 

  

 한번은 구락부에서 

 나더러 무슨 휘파람 그리 부느냐고 

 복순이 웃으며 물었소 

 난 그만 더워서 분다고 말했다오 

 그러니 이젠 휘파람만 불 수밖에 ... 

  

 몇 달이고 이렇게 부노라면 ... 

 그도 정녕 알아 주리라! 

 이 밤도 이미 늦었는데 

 나는 학습 재료 뒤적이며 

 휘휘 ... 호호 ... 

  

 그가 알아줄가? 

-------------------------------- 
〈주체문학의 거성들-4-〉 조기천(1913.11.6∼1951.7.31) 
시대와 함께 산 열혈시인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없는 웃음에도 
격파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 
곰팽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듯 고루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머리시에서) 

  장편서사시《백두산》(1947년)은 20세기 조선문학의 최대명작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혁명시인 조기천은 언제나 사색하고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것을 좌우명으로 한 열혈시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멀리 씨비리로 간 그는 조국해방과 함께 귀국하였다. 

  광복된 조국땅의 자유로운 현실과 밝은 미래를 시《두만강》(1946년)에서, 광복의 감격을 《을밀대에서 부른 노래》(1946년)에서, 력사적인 토지개혁을 《땅의 노래》(1946년)에서, 장편서사시《백두산》에서는 광복의 해빛을 삼천리강토에 비치여 개선하신 백두산의 호랑이 청년영웅을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남녘의 군민항쟁을 련시《항쟁의 려수》(1949년)에, 새조국건설에 나선 로동계급의 영웅적투쟁을 장편서사시《생의 노래》(1950년)에 담았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군복을 입고 락동강계선까지 간 시인은 《조선은 싸운다》, 《나의 고지》, 《불타는 거리에서》, 《죽음을 원쑤에게》 등의 전투적시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951년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조직되자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대동강반에 자리잡은 작가동맹의 청사에서 서사시《비행기사냥군》을 집필하다가 붓을 둔채 미제의 폭격에 의해 희생되였다. 

  광복후 그의 창작생활은 불과 6년이다. 그러나 그가 시문학발전에 남긴 업적은 너무나도 크다. 변천된 새로운 현실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열정적인 시인이였을뿐아니라 전투적기백과 높은 열정, 풍부하고 세련된 언어로 시 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다른 나라말로 번역되여 널리 애독되고있다. 일본에서도 서사시《백두산》은 번역출판되고있다.(허남기역, 1952년 ハト書房, 1974년 太平洋出版社, 1987년 レンガ書房新社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

1. 조기천의 생애
분단이후 북한 문학사가 "평화적 건설시기"(1945. 8-1950. 6)의 걸작으로 꼽고있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강승한의 서사시 『한라산』과 함께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이 서사시는 비단 이 시기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분단시대의 북한문학 전시기를 통틀어서도 이념적 경직성이 지나치지 않는 8·15직후의 빈약했던 우리 문학가에서 드물게 보는 성과로 평가받을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1970년대를 전후해서 본격화된 주체이념의 유일사상화 시기를 북한문학의 이해와 평가의 시대적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방법론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도 『백두산』은 오히려 주체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예술작품이 지닌 그 부정적 측면을 잘 극복한 뛰어난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 조기천은 1913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내 시베리아로 이주해 갔다. 소련에서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방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짤막한 시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옴스끄의 고리끼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앙 아시아 끄실 오르따 조선사범대학에서 약2년간 교직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8·15때 조기천은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왔던 소련군에 참여했다가 이내 북한으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북한 문단의 구성요인이었던 재북·월북파,연안파,소련파 등의 구분에 따르면 소련파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조기천은『조선신무넬에서 일하면서 1946년 3월 서정시「두만강」을 발표하여 처음 시인으로서의 얼굴을 나타낸다.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수난받는 민중상과 항일투사들의 투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8·15의 감격을 노래한「울밑대에서 부른 노래」,토지개혁을 읊은「땅의 노래」등을 거쳐 1947년 『백두산』을 쓰게된다.
소련파였던 조기천이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항일유격전을 소재로 하여 김일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에 손을 댄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으나 어쨌건 이 시로써 그는 일약 북한문단의 일급으로 부상한다. 1948년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항쟁의 려수」를 발표하여 그는 북한당국으로부터 공로메달을 받았는가 하면 8·15기념예술축전에서 연 세 번이나 수석 표창을 받았다고 전한다.
1949년 여름에는 휴가를 이용하여 흥남인민공장을 방문하여 약20일간 노동자들과 함께 한 체험을 바탕삼아 1950년6월에 장편 서사시『생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2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도록 노동자들을 독려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6·25가 일어나자 조기천은 9월에 종군작가로 나서서 낙동강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중에 저 유명한「조선은 싸운다」를 비롯하여「불타는 거리에서」「죽음을 우너수에게」「나의 고지」등 시작품을 썼다. 특히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로 시작되는「조선은 싸운다」는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지도에서 도시와 마을은 폭격으로 불타고 없으니 찾지 말아라는 이 시는 선전과 서정이 조화된 반전시로 세계문학사에 알려져 있다.
1951년 3월 조기천은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피선된다. 그 해 5월 그에게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이 수여되기도 한다. 그 두 달 뒤인 7월 31일 조기천은 39세로 평양에서 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품 속에서는 유고『비행기 사냥군』이란 서정서사시가 있어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전한다.
조기천의 생애는 짧았기에 북한의 어떤 정치적 격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애국적 시인"으로 남았고, 또한 그의 작품활동 기간은 "평화적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시기"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기천은『생의 노래』에서 투철한 자신의 문학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소련 시절부터 익혔던 사회주의 미학관의 한 표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엔/ 시가를 풍월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화조월석을 찾았고/ 초로인생을 설어했는가?/ 그래서 그들에겐/ 외적의 나팔소리보다/ 꾀꼬리소리 더 높이 들리었고/ 달이 둥그는 걸 잘 알았는가?/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병든 마음을 파고들며/ 인생의 비애를 찬미하며--/ 무엇 때문이었느냐?/ 지는 곷이 서러웠드냐?/ 조선의 가슴에/ 일제의 칼이 박혔는데--
『생의 노래』에서

8·15뒤 북한문학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조를 그 바탕으로 삼으면서 민족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는데 비록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낸 조기천 일지언정 이런 원칙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성 싶다.

2.『백두산』의 주제로서의 보천보 전투
8·15직후 남북한은 문학적으로 다 일제잔재 청산과 새 사회 건설을 위한 완전독립을 이루려는 반외세운동 등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친일파에 대한 처벌문제와 반제·반봉건 의식의 문학이 가장 긴박한 과제로 등장했으며 이를 다룬 작품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남북한에서 다 토지문제를 다룬 작품이 상당량에 이르며 그 뒤로 오면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탐구를 주로 다루는 한국문학과 사회주의 개혁의지를 다룬 북한 문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조기천의 『백두산』은 바로 그 갈림길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면서 그 당시로서는 직접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항일빨치산을 소재로 했다는데서 이 시인의 특이한 역사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서사시의 소재인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항일투쟁사에서 여러 각도에 걸쳐 고찰된 것이 많은데 최근 소개된 와다 하루키(和母春樹)의「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사회와 사상』1988.11-12 연재)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이 시작되면서 국내로까지 손을 뻗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지휘자는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커민테른 제7차대회의 새방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의 힘으로 조선독립투쟁을 수행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져 3개사가 공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입안하게 된 것이라고 와다 교수는 보고 있다.
즉 제6사는 장백에서 보천보를 공격하고, 제4사는 무송-안도-화룡으로 돌아서서 조선의 무산을 치며, 제2사는 임진강 일대에서 장백으로 향하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제안은 김일성이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적으로 간삼봉(間三峯)에서 만나기로 한 이 3개사 합동작전은 제4사의 최현의 이름을 유명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의 제6사는 근대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북한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하 와다 교수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김일성의 제6사는 무산에서의 행동을 통보받고 6월 4일밤, 100여명이 강을 건너고, 대안에서 조국광복회 청년 80여 명과 합류하여 보천면 보전(保田)을 공격했다. 보건은 일본인 26호, 조선인 280호, 중국인 2호, 합계 308호인 소읍으로서 조재소에는 5명의 경관이 있었다. 이 주재소를 비롯하여 면사무소·삼림구(森林區)·우체국·관공서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부대는 〈10강령〉의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철수할 때 혜산서(署)의 오가와(大川)의 경부가 이끄는 병력의 추격을 받자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물러갔다.
보천보 작전을 성공리에 끝마친 제6사는 장백의 밀영으로 일단 철수했다가 제4사·제2사의 도착을 기다려 간삼봉으로 이동했다. 총인원 400이라고도 하고 600이라고도 한다. 그 사이 조선 침입사건으로 초조해진 일본군은 함흥의 제74연대를 김석원 소좌의 지휘하에 출동시켜 국경 일대의 토벌전을 시도했다. 이 군대에 6월 30일, 간삼봉에서 기다리고 있던 3사 연합군의 타격을 가했다.
『사회와 사상』1988. 11. 187쪽 

이어 와다 교수는 이 사건으로 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원이 일제 기관에 의하여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쓴다(보다 자세한 자료는 남현우 엮음『항일무장 투쟁사』대동, 253-266쪽 참고)
이 1937년 6월4일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조기천의 『백두산』으로 이는 북한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많은 예술작품이 다뤄온 역사적인 한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 보천보 사건을 다루면서도 결코 이 사건 하나만에 국한시키지 않는 항일빨치산 투쟁의 보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서가고 있다. 즉 이 시에서는 김을 비롯한 몇몇 고유명사만 빼면 어떤 특수한 사건이 아닌 항일 투쟁의 민족적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했다고 풀이한다. 예술적인 일반화를 시도하려는 동기에서 이 시는 사건발생의 명확한 연도와 지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예컨데 H시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웅주의를 벗어난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민족적으로 일반화된 민중주체의 항일투쟁을 전형화 시킨다는 의도로 평범한 농민투사들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김만은 예외적 구상으로 이뤄져 있다.

3. 『백두산』의 구성과 특질
머리시와 1-7장에다 맺음시로 이루어져 있는『백두산』은 조기천 자신의 서정시「두만강」을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즉「두만강」에 나오는 국토와 민족애가 『백두산』에 그대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째진 가난 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주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여인이 아닌가?"(「두만강」)에 나타난 여인상이 그대로『백두산』의 꽃분이로 승화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의 민족문학에 나타난 여인상은 모두가 꽃분이일 수밖에 없다는 민족적 보편성이 성립할 소지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보편성을 먼저 내세우느냐 하면 분단 44년이 지나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지만 민족문학사의 긴 뿌리에서 본다면 결국은 동질성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대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백두산』의 모든 인물들은 근대 이후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반성을 지닌 인간상이 아닐까? 예컨데 꽃분이는 가난 속에서 민족의식을 지닌 채 자라나 빨치산 활동에 투신하여 박철호와 위험을 무릎 쓰고 항일선전 및 무장투쟁에 까지 가담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박철호가 죽어간 뒤에도 미래의 조국 건설을 위한 후비대로 눈물을 삼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한 여인상의 고난은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너무나 많은 변형으로 나타난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아사녀로 상징되며, 소월의 시에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님을 보내드리는 그 여인상 모두가 우리의 꽃분이가 아닐까.
『백두산』은 그 앞머리부터 역사적인 현실성으로서의 평범성(곧 민중성)과 초자연적인 영웅성이 조화를 이룬 채 장엄하게 묘사된다. 이 조화로운 자연묘사는 영웅주의와 민중성을 하나의 역사적 진보의 작용으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난 영웅상은 한 개인적인 위대성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영웅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시에는 김을 그 정점으로 삼아 짤막하나마 초인화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다른 빨치산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홀로인 영웅주의로 우뚝 솟은 인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민중적 영웅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적 구도로 『백두산』은 가장 민중적 형식인 구비문학의 각종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는 철저한 전통적 민중성을 혁명의 기초로 삼으려는 의도된 문학적 형식이기도 한데 민요조로 이루어진 가락은 독자들에게 한결 친근감을 준다.
시적 사건 전개방법은 오히려 극히 단조롭다. 아내를 일본인에게 잃은 김운칠은 혜산에서 솔개 마을로 옮겨와 화전농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딸 꽃분이는 조선광복회 회원일시 분명한 박철호가 정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왔을 때 그에게서 1년동안 지도를 받는다. (2장) 꽃분이와 철호는 유인물을 만들다 일본경찰에게 들킬뻔 했으나 꽃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3장) 임무를 끝낸 철호는 16세 소년 영남이와 떠났으나 압록강을 건너다 영남은 사살되고 만다. (5장) 이미 국내에 조직되어 있는 과옥회 회원들과 연계하여 잠입한 빨치산은 쉽게 폭동에 성공한 후 각종 정치사업을 끝내고는 물러간다. 폭동 성공은 물론 꽃분이와 철호가 그 앞장을 선다. (6장) 그러나 압록강 뗏목을 타고 국경을 넘어가던 중 철호와 청년빨치산 중 가장 용감했던 석준이 총에 맞아 전사한다. (7장)
이미 밝힌 것처럼 보천보 전투를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특정 지명을 쓰지 않은 것은 항일투쟁의 보편성을 전형화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투쟁의 전형성은 먼저 투철한 조직의 부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H시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이미 만들어진 조직을 통하여 힘들이지 않고 잠입하여 쉽게 폭동을 일으킨 후 여유있게 물러간다. 그리고 이런 힘이 원천을 이 시에서는 민중의 편에 선 민중을 위한 조직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인 제4장은 나흘째 굶은 빨치산 대원들이 소 두 마리를 끌고 오자 그 소가 일본의 것이 아닌 조선과 중국 농민의 것임을 알고는 되돌려 주려다 실패하곤 그 대가라도 치뤄야 한다는 철의 규율이 나오는 대목이다. 제4장의 5절에 나오는 민중성의 강조는 근대이래 우리 민족문학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구절이다.
항일빨치산이 지닌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하여 『백두산』의 맺음시는 "그러면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오늘은 무엇을 보느냐?/ 오늘은 누구를 보느냐?"고 묻도록 만든다. 바로 8·15직후의 한반도로 항일의 의지를 끌어들여 역사적 진로를 모색코자 하면서 이시는 끝난다. 물론 문학의 당시 입장이 선명하게 스며있다, 그러나 8·15직후의 북한 입장이란 오늘의 분단고직화 시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자유의 나라!/ 독립의 나라!/ 인민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외친다!/ 백성은 이렇게 외친다!"는 마지막 구절은 당시 남북한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이었기도 하다.
이래서『백두산』은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옹고되기 이전의 동질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서사시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일제 식민지 아래서의 구체적인 민중적 삶의 실체가 좀 약하다든가 하는 나대로의 비판이 따를 수도 있지만 8·15직후의 작품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 문학의 수확인 점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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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우수리스크 출생. 함경북도에서 이민간 농부의 아들로 1937년부터 시작된 I.V. 스탈린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따라 조선인이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때 카자흐로 이주하였다. 크질오르다에서 2년간 문학수업을 하였으며 당국의 명령을 어기고 모스크바 고리키문학대학에서 문학공부를 하다가 투옥되었다. 41년 독·소전쟁 때 소련군에 징집되어 모스크바·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였는데 제 2 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위로 한국 관련 문서를 번역하다가 소련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그의 부대는 소련으로 복귀하였으나 그는 계속 평양에 남아 조선작가동맹부위원장을 맡았다. 51년 7월 31일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서사시와 서정성 짙은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작품으로 장편서사시 《백두산》, 서정시 《휘파람》 《어머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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