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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민중시인 - 파블로 네루다
2016년 11월 01일 22시 09분  조회:4960  추천:0  작성자: 죽림

네루다

Pablo Neruda

본명은 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 수도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해 10월 〈제가(祭歌) La canción de la 〉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탔으며,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 〈클라리다드 Claridad〉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업자를 만나 〈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perada〉(1924)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를 쓴 것은 남아시아에서 지낸 이 무렵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ña en el corazó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 시인으로 불리며,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시인이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과 일상에 대해 노래하여, '사랑의 시인', '자연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 한편 극단적인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정치, 경제적 상황이 불안했던 칠레에서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투신해 동시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작가이기도 하다. 1971년,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운명과 희망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한 공로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본명은 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로, 1904년 7월 12일 칠레 중부의 파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 모랄레스는 철도원이었고, 어머니 네프탈리 바소알토 오파소는 교사였다. 파블로는 네프탈리가 39세의 늦은 나이에 낳은 아이였는데, 그 때문인지 네프탈리는 분만 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두 달여 만에 산욕열로 사망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테무코로 이사하고 재혼했는데, 새어머니는 억압적이고 거친 아버지의 손에서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의 첫 시는 '사랑하는 엄마'에게 드리는 시였다.

 

6세 때 테무코에서 마을 남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생 대부분은 유럽 이민자들이었다. 왜소하고 깡마르고, 조용한 네루다는 남자아이들 틈에서 잘 지내지 못했고, 혼자 동떨어져 책을 읽고 주변 곤충과 자연 풍경을 관찰하며 지냈다. 이 시기에 함께 공부하던 친구 헤라르도 세겔은 칠레 최초의 공산주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 된다. 또한 이 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로부터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을 비롯해 프랑스 상징주의자들, 특히 베를렌의 시를 접하는 기회를 갖는다. 미스트랄은 194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11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3세 때 일간지 〈라 마냐나〉에 기고문을 보내고, 각종 학생 잡지에 시를 발표했다. 16세 때부터는 문예지 〈셀바 아우스트랄〉에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네루다는 어린 시절부터 흠모했던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에서 따온 것이다. 필명을 선택한 것은 아들이 시 쓰는 것을 싫어했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42세 때부터는 파블로 네루다를 아예 법적인 이름으로 사용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산티아고 칠레 대학에 들어간 네루다는 사범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사가 될 준비를 했다. 또 그해에는 학생잡지 〈클라리다드〉에 정치 칼럼과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23년에는 첫 시집 《황혼의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펴냈는데, 이 시집은 우아함과 애수 어린 서정으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세의 네루다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비센테 우이도브로와 함께 칠레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올려 준 작품이다. 후일 전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네루다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이다.

 

1920년대 칠레는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다. 네루다는 졸업 후에 잠시 방황하다가 1927년 외교 공관에 취직해 미얀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어 칠레를 떠났다. 그 후 스리랑카, 싱가포르, 스페인 등에서 영사 생활을 하면서 자본주의와 식민 질서 아래에서 억압당하는 민중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스페인에서 내전을 경험하면서 희생당하는 민중을 직접 목도하고, 절친했던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이때 반프랑코 운동,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다가 파면되었다.

 

이 시기에 겪은 절망과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에 대한 관심, 낯선 외국 생활의 고독 등은 《지상의 거처》, 《내 가슴 속의 스페인》 등에 표현되었다.

1938년, 네루다는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다가 거부당하고 멕시코로 갔다. 멕시코에서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억압과 박탈의 역사에 대해 탐구하고, 《마추픽추의 산정》을 썼는데, 이는 후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이념, 사상을 포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로 발전한다.

 

1945년, 네루다는 칠레로 귀국하여 사면받고, 공산당에 가입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칠레는 경제가 악화되어 실업률이 증가하고,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네루다는 변호사 출신으로서 인민전선을 결정하고 사회 정의를 주장하는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에도 동참했다. 비델라는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하고 급진 좌파 연합 연립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곧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공산당과 맺었던 협약을 깨뜨렸다. 조직적인 파업과 시위가 경제에 악역향을 미친다고 보고, 이를 주도하던 공산당 지도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것이다. 네루다는 비델라 정권에 맞서면서 1948년 상원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비델라 정부는 네루다를 국가원수 모독죄로 수배하고, 네루다는 수배를 피해 칠레를 탈출했다. 이후 아시아, 유럽, 미국 등지를 전전하다가 3년 만인 1952년 정권이 교체되면서 귀국했다.

 

귀국 후 칠레 정부는 네루다에 대한 모든 혐의를 사면해 주었으며, 그는 이슬라 네그라에 정착해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기부터 네루다는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아내 마틸데 우르티아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은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에 대해 노래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소박한 것들에 바치는 송가(頌歌)》는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부터 양파, 커피잔, 사전, 돌멩이 같은 주변 사물을 따뜻하고 정감 어린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는 송시 모음집이다. 이 작품집을 통해 그는 삶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들로 세상을 바라보고, 민중의 일상 언어로 쓰는 소박한 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1960년대 칠레에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 재점화되면서 그는 다시 시를 쓰던 생활에서 정치의 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1969년 칠레 공산당위원회는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그는 이듬해 좌파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다. 그 결과 오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70년 아옌데 정권에서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어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

시인이자 정치가로서 네루다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았으며,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2년 여행 도중 암이 발견되어 대사직을 사임하고,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왔다.

 

칠레는 미국 등 외세의 정치, 경제적 압박 및 좌파 연합 내부의 갈등 등으로 계속 혼란스러웠다. 급기야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가 피살되고,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네루다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9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대해서는 네루다가 위독해져 구급차를 불렀으나 군사 정권이 구급차를 보내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생전에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의 자택에 묻히고 싶어 했으나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그를 산티아고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시인의 유해는 20년이 지나 국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슬라 네그라의 집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계의 명시/ 파블로 네루다 - 시(詩)

세계의 명시/ 파블로 네루다
시(詩)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출전: <네루다 시선>(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7)

시를 말하다
문태준 l 시인

바다와 자전거와 섬이 있고, 사랑과 신념과 열정이 있고, 음악과 시와 시인의 삶이 있어서 좋았던 영화 <일 포스티노>. 가진 것의 전부였던 자전거 한 대 덕분에, 정치적 탄압을 피해 외딴 섬에 살게 된 파블로 네루다 시인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 가난한 청년 마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섬의 모든 여자들이, 무엇보다 자기가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까지 네루다 '시인'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야.”, “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가슴을 활짝 열고 시의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해.”, “해변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게.” 그러면 메타포(은유)가 나타난다며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시의 길을 열어준다. 마리오는 바다를 보며,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메타포를 생각한다. 메타포는 매직과도 같이 네루다에게서 마리오에게로, 마리오에게서 베아트리체에게로 스며들고 또 분출한다. 시처럼! 사랑처럼! 시대처럼! 삶처럼! ▶영화 <일 포스티노> 포스터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긴 본명을 가졌으나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에서 필명을 빌려 왔던 시인,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당 대표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시인, 대부분의 남미 사람들이 그러하듯 칠레의 몸과 마음을 스페인어로 표출했던 시인, 외교관으로 망명객으로 여행자로 세계 도처를 떠돌며 자연과 사랑과 민중으로 시를 빚고 시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시인, 자신의 삶을 “모든 삶으로 이루어진 삶”으로 살아냈던 시인, 국제스탈린평화상(1950)과 노벨문학상(1971)을 둘 다 수상한 시인, 공산주의자였고 시인이었지만 공산주의 시인은 아니었던 시인, 시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시인… 그러니까, 그렇게 네루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었다.

네루다적인 시법(詩法)을 일컫는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말은 네루다의 시적 위상을 대변한다. 참신한 이미지가 범람하는 발견으로서의 메타포, 분출하는 정치적 선동성과 관능적 서정성, 초현실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자유로운 상상력, 격정적이고 거침없는 시 형식 등이 그 특징들이다. 열정과 연대, 사랑과 혁명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이런 다양성과 상극성의 혼연일치야말로 네루다의 삶과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라고 했던 그의 산문 한 구절은 그 자체로 네루디시모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 그는 6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정치가이자 시인으로서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모든 언어를 통틀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란 찬사를 들었다.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에 수록되었던 이 ‘시’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라스트 신을 장식한 시이자 네루다의 삶과 시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시다. 시가 어떻게 우리에게 들고나는지를 시로 쓴 시이고, 우주의 삼라만상과 내 안의 뜨거운 가슴이 언어적 스파크를 일으키는 네루디스모를 메타포한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까닭은 우리가 사람이라서고, 그 시가 사람을 사람이게 해서다. 그러니까, 시가, 상상과 꿈과 공감과 감동과 이해와 연대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네루다 또한 “시는 어둠 속을 걸으며 인간의 심장을, 여인의 눈길을, 거리의 낯선 사람들, 해가 지는 석양 무렵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중에 최소한 한 줄의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 ‘시’는 우리가 매일매일 보는 ‘하늘’과 ‘유성(流星)’이, ‘논밭’과 ‘어둠’이, ‘밤’과 ‘우주’가, 그리고 우리가 매일매일 쓰는 언어가 생생한 시가 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네루다에게 시는 큰 ‘별’들이 총총한 ‘허공’에 취한 내 ‘심장’이 하나 되는 때다. 3연에서처럼 ‘취하고’ ‘느끼고’, 더불어 ‘구르고’ ‘풀리’면서 말이다. 그 별과 허공과 심장을 자유롭게 들고나는, 그러니까, 생명이 가득 찬 ‘바람’과 같은 존재다. 그런 ‘바람’은 1연의 ‘모르겠어’, ‘아니었어’, ‘불렀어’, ‘건드렸어’라는 술어의 속성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대체로 ‘모르겠는’ 게 시이고, 늘 ‘아닌’ 게 시이고, 문득 ‘부르는’ 게 시이고, 툭 ‘건드리는’ 게 시이기 때문이다. 시란 때로 애매하고 모호해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늘 존재론적 호명을 통해 존재의 살갗에 닿는 것이다. 쉽사리 이름 할 수 없으나 눈멀게 하는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와도 같은 것이기에 불에 데고 잘려 나간 그 상처들을 쉼 없이 해독하면서 쓴 첫 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헛소리 혹은 무의미와도 같은 것이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지혜와도 같은 것이다. 시는 그렇게 우리를 시인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그런 시가, 그렇게 네루다에게 찾아왔으니, 또 그렇게 내게도 찾아왔으면 하고, 당신에게도 찾아갔으면 한다. 그리하여, 티끌만 한 우리의 심장이 허공에 취한 큰 별들과 더불어 떠돌며 바람 속에 풀려났으면 한다. 그 바람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 숨 쉬었으면 한다. 그렇게 시가 우리에게 스며들고 분출하였으면 한다. 상상만으로도 벅차고 아름다운 인간적 연대이자 우주적 합일이 아닌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7.12-1973.9.23)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 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위의 첫 시집 외에 <지상의 거처 Ⅰ,Ⅱ,Ⅲ>, <모두의 노래>,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 <이슬라 네그라 비망록>, <에스트라바라기오>, <충만한 힘> 등이 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국내 출간 파블로 네루다 작품

네루다 시선 (민음사)                                   충만한 힘 (문학동네)                                    안녕 나의 별 (살림어린이)
글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과 평론집에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년 7월 12일 ~ 1973년 9월 23일)은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이다. 그의 시집을 읽고 좋아한 시, 한 편을 올려본다. 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천상의 시인들>

파블로 네루다 

당신들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지드주의자들이여 
고매한 지식인이여 릴케의 제자들이여 
신비를 날조한 사기꾼들 
실존주의의 가짜 마법사들 
무덤 속에서 등불을 켠 
초현실주의자의 개양귀비들 
유럽의 최신식 유행의 의상을 걸친 시체들 
자본가의 치즈에 눈이 팔린 창백한 당신들 
도대체 당신들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 
저 비참한 인간의 모습과 마주하고 
인간의 존엄이 모욕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 가축우리와 같은 짚더미에서 잠을 자야 하는 인간과 
발에 채인 처참한 생활을 눈 앞에서 보면서

도망치는 일 외에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부스러기를 팔았을 뿐이다 
당신들은 찾아 돌아다녔던 것이다 천상의 머리카락을 
시들어 빠진 식물을 접혀진 손톱을 
'순수미'를 '주문'을 
현실에서 눈을 돌린 
가련한 비겁자들의 일을 
저 부르조아 신사들이 던져준 접시 위의 
더러운 음식찌꺼기로 살이 찌고 
섬세한 눈동자가 흐려지면서-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돌처럼 누워있는 사람들이 
그 눈동자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도 싸워 획득해야 할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묘지의 꽃다발보다도 맹목적인 것이다 
줄줄이 나열된 무덤에 바쳐져 
꿈쩍도 않는 말라빠진 꽃들 위에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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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

사랑의 시인, 저항의 시인,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중남미 민초들을 대변한 칠레의 외교관 · 정치가인 파블로 네루다의 대표작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가 출간되었다.  

'모두의 노래'는 칠레인, 아메리카인으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탐구하고 인류의 정의 구현을 염원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보여준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 당시 영사로 근무했던 네루다가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하다 해임되어 귀국한 1938년부터, 파리의 난민 담당 영사를 거쳐 멕시코 총영사로 근무하고 돌아와 정치가로 활동하다 정권의 박해를 피해 1949년 망명하기까지의 시를 모아 1950년에 펴낸 것이다. 

앞선 작품들에서 내면세계의 감정, 고뇌, 갈등을 표출했던 네루다가 시의 방향을 전환한 이유는 스페인 내전 때문이었다. 민중의 삶의 질을 좀더 높이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세력의 충돌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네루다는 시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이 시대의 충실한 증언자라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모국 칠레의 현실을 증언하려 했으나, 멕시코 총영사를 마친 뒤 귀국 길에 들른 페루의 마추픽추에서 그의 소명은 중남미 전체, 카리브 해 그리고 미국, 유럽의 그리스, 소련까지 공간적 범위를 넓힌다. 또한 잉카 시대의 유적을 보면서, 현재 시점부터 유적지를 건설한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 그 이전 시대, 아메리카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던 시원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적 약자, 가난한 노동자, 평범한 민초들을 대변했던 시인 네루다는 중남미 원주민의 문화를 내적으로 소화하여 당대의 민중의 삶과 접합함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대서사시를 완성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 소수의 사람들만이 감지하는 세계에 익숙한 귀를 가진 독특한 이 시인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네루다는 철학보다는 죽음, 지성보다는 고통, 잉크보다는 피에 근접한 시인이다.” _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시인, 극작가)  

시인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신을 둘러싼 외적 현실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주변 현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감시하고 반추하며, 이들을 이미지화해서 자신이 보는 관점의 세상을 시로 재창조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은 시대의 충실한 증언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모두의 노래'는 전체가 사회적, 역사적 증언만은 아니다. 네루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연환경, 동식물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이들을 주제로 시를 썼다. 「위대한 대양」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양과 관련된 동식물, 조개, 해양도시, 바다를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 속으로 

그 역사를 말하려고 나 여기 있다.  
버펄로의 평화부터  
지구 끝단, 영겁의 남극 빛 거품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낸 모래까지,  
그리고 그늘진 평화가 깃든 베네수엘라의  
깎아지른 곳에 난 굴에서까지  
그대를 찾았다. 조상이시여,  
검은 구릿빛의 젊은 무사여, [……] (I. 지상의 등불_22쪽) 


투쟁하며 죽었던 이들을 당신들에게 인도하는 날,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삭은 땅에 주어진 하나의 밀알에서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은 밀처럼 뿌리를 모으고,  
이삭을 모아,  
고통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밝은 곳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IV. 해방자들_260쪽) 


아메리카, 나는 너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  
마음에 칼을 매달고  
영혼에 떨어지는 방울을 참고,  
창문으로 새로운 너의 날이 내게 밀려올 때,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를 만들어낸 빛 속에 있고  
나를 규정하는 그림자 안에서 산다.  
포도처럼 달콤하나 끔찍하고,  
설탕을 만드나 체벌이 기다리는 너,  
너와 같은 종류의 정액에 젖어,  
네 유산의 피를 마시면서,  
너의 본질적 여명 속에서 자고 깬다.  
(IV. 아메리카, 나는 너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_374~75쪽) 


내 병든 심장은 여기 있네, 내 몸의  
피멍을 보게나, 얼마나 살게 될지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그대에게 다른 건 요구하지 않겠네, 그저  
그 못된 인간이 민중에게 하는 짓을 말하게.  
우리처럼 고산지대로 끌려간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자는 하이에나처럼 웃고 있다네. 동지,  
그대는 이걸 말하게, 말해야 하네. 투쟁이 길어지니,  
내 죽음은, 우리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네.  
그러나 이 고난은 알려져야 한다네.  
동지, 이 고난은 알려져야 하고, 잊혀서도 안 되네. (VIII. 그 땅 이름은 후안이라네_425쪽) 


“자, 이제 나가서 대통령께 자유를 달라고 해라.  
그 양반이 네게 이 선물을 보낸 거거든”이라고 하더군.  
몽둥이찜질을 당했지. 이 갈비뼈 그때 부러진 거야.  
그런데 내 속은 옛날 그대로야, 동지.  
죽이지 않고는 부러뜨릴 수 없는 게 우리지. (VIII. 그 땅 이름은 후안이라네 442~43) 


나는 일개 시인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를 사랑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세계로 떠돌아다닌다.  
내 나라에서는 광부들을 가두고  
군인들이 판사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작은 추운 나라의  
뿌리까지도 사랑한다.  
죽어야 한다면, 천 번이라도  
고국에서 죽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천 번이라도  
고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  
광부, 어린 여자아이,  
변호사, 어부,  
인형 만드는 사람이 내게로 와서  
함께 영화관에 들어가고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러 가기를.  

나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하러 오지 않았다.  

네가 나와 함께 노래하도록  
노래하러 왔다. (IX. 나무꾼이 잠에서 깨기를_481~82쪽) 


나는 내 민중이 제공한 층계를 통해,  
내 민중이 숨겨주는 동굴에서,  
내 조국과 비둘기 날개 위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꾸고, 네 국경을 쳐부순다. (X. 도망자_505쪽) 


지상의 어둠에서  
밤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민초, 셀 수도 없는 민초이다.  
내 노래는 침묵을 통과할  
순수한 힘을 가졌고  
어둠 속에서도 배태된다. (X. 도망자_508쪽)  


나는 다른 책들이 나를 가두도록 글을 쓰지 않고,  
백합을 열심히 배우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쓰지도 않는다. 
대신 물과 달, 바꿀 수 없는 질서의 요소들,  
학교, 빵과 포도주, 기타와 연장이 필요한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  

민중을 위해 글을 쓴다. 비록 그들이  
투박한 눈으로 내 시를 읽지 못한다 해도.  

단 한 줄이, 내 인생을 뒤흔든 대기가  
그들의 귀에 닿을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농부는 눈을 들 것이고  
광부는 돌을 부수면서 미소 지을 것이고,  
공장 직공은 이마를 훔칠 것이고,  
어부는 파닥대면서 그의 손을 태울  
물고기의 반짝임을 더 잘 볼 것이고,  
갓 씻어 깨끗해진 정비공은 비누 향기 풍기면서  
나의 시를 볼 것이고.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왕관이다. (XV. 나는_위대한 기쁨_685~87) 

파블로 네루다 지음 / 고혜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7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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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해줄래, 장미가 발가벗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그냥 그녀의 옷인지? 

나무들은 왜 그들의 
뿌리의 찬란함을 숨기지? 

 

 

 

누가 도둑질하는 자동차의 
후회를 들을까? 

빗속에 서 있는 기차처럼 
슬픈 게 이 세상에 또 있을까?
14 

루비들은 석류 주스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했을까? 

왜 목요일은 스스로를 설득해 
금요일 다음에 오도록 하지 않을까? 

청색이 태어났을 때 
누가 기뻐서 소리쳤을까? 

제비꽃들이 나타날 때 
왜 땅은 슬퍼할까?
32 

파블로 네루다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인생에 있을까? 

콜롬비아 하늘에는 
구름 수집가가 있나? 

우산들의 집회들은 왜 
항상 런던에서 열리지? 

시바의 여왕은 
색비름 색깔 피를 가졌었나? 

보들레르가 울 때 
그는 검은 눈물을 흘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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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을 때 ...... 시가

나를 찾아왔다. 모른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인지 나는 모른다.

아니다. 그건 누가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며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혼자 돌아오는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얼굴 없이 있는

나의 가슴을 움직였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熱(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한 내 나름대로 해보았다.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지.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구부러진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지.

 

 

 

 

 

네루다의 시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생동이다”라고 정현종 시인은 말했다. 민용태 시인은 네루다 시의 생동감을 한 단어로 ‘열대성’ 또는 ‘다혈성’이라고 표현했다. 실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폭우에 흠뻑 젖는 느낌, 강렬한 태양 아래 벌거벗고 선 느낌, 폭풍우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빽빽한 밀림 속에서 공룡알로 누워 있는 느낌이 교차한다.

 

 

 

네루다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파란만장한 삶을 산 만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어렵지만, 1945년 7월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야말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7월 8일, 네루다는 산티아고의 카우폴리칸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칠레 공산당 입당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대는 나에게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를 주었다. / 그대는 나에게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힘을 보태주었다”라고 노래한 그의 시 <나의 당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공산당 입당 이후 그의 생애는 격동의 세월 그 자체였던 칠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광과 고난의 길을 번갈아 걸어야만 했다. 시작은 대단한 박수갈채, 바로 그것이었다. 7월 15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파카엥부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서 열린 공산주의 혁명가 프레스테스의 환영 집회에서 네루다는 시를 낭송했고, 그의 시는 대중의 가슴속을 활화산으로 만들었다. 이후 네루다가 가는 곳에는 대중과 시가 있었고, 열렬한 환호가 있었다.

 

네루다가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희생당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들에게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이미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파시스트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때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힘이었다”라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이를 보면 네루다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사실상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선택이 그를 평생 가시밭길로 걸어가게 했지만, 그는 그 선택을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1934년 12월 6일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강연에서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루다의 시가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에너지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루다가 살아온 환경과 풍토가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시로 되살아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 초입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비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네루다는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와 같은 삶을 살았고, 그 비와 같은 시를 썼다.

 

1904년 7월 12일,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인 파랄에서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시 네루다의 어머니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노산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이 꽤 힘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출산하고 나서 두 달 후인 9월 14일 사망했다. 네루다는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해준 여인을 영영 알지 못했다. 네루다가 그토록 절절한 사랑의 시를 썼던 것의 근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매우 친절한 여교사로 학생들에게 시와 작문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네루다는 어머니의 이런 면모를 닮았음에 틀림없다.

 

네루다의 아버지는 자갈 기차 기관사였다. 자갈 기차는 침목 사이에 자갈을 제때 채워주지 않으면 철로가 유실되기 때문에, 그 자갈을 나르는 기차를 말한다. 이런 자갈 기차에서 일하는 인부는 철인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거칠었다. 아버지가 귀가할 때마다 문이 흔들리고 집 전체가 진동했으며, 계단은 삐걱거렸고, 험한 목소리가 악취를 풍겼다. 이런 아버지가 자식을 홀로 키워야 했다면, 네루다의 어린 시절은 몹시도 험난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재혼했고, 새어머니는 상냥하고 온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네루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은 누군가 상처 입은 고니 한 마리를 네루다에게 주었다. 네루다는 상처를 물로 씻어주고는 빵조각과 생선조각을 부리에 넣어주었는데, 고니는 모두 토해버렸다. 상처가 아물었는데도 고니는 네루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네루다는 고니를 고향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를 안고 강가로 갔다. 그러나 고니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20일 이상을 고니를 강으로 데려갔지만, 고니는 늘 너무도 얌전했고 네루다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니를 다시 데리고 집으로 오려고 안았는데, 고니의 목이 축 처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소년은 고니를 통해 죽음을 맨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1915년 6월 3일, 네루다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생애 첫 시를 썼다. 그는 새어머니에게 이 시를 바치기로 했다. 뮤즈의 첫 방문을 맞이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그는 부모님한테 가서 시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건성으로 읽어본 아버지가 “어디서 베꼈니?”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그때 처음으로 문학비평의 쓴맛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미 식을 줄 모르는 독서열로 밤낮을 거의 잊고 살 정도였다. 194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여성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그 고장의 여학교에 부임한 것은 네루다의 문학열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었다. 미스트랄은 네루다가 찾아갈 때마다 러시아 소설책을 주곤 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등의 소설을 읽은 네루다의 꿈은 자연스럽게 문학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시인을 꿈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미 학생시인으로서 필명을 날리고 있었던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노트를 창밖으로 던진 후 불태워버렸다. 네루다가 필명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탄압 때문이었다. 1920년 10월, 그는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바오로, 바울)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처음에는 단지 필명이었으나, 1946년도에는 아예 법적인 이름이 된다. 이 이름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1921년 산티아고의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한 네루다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의 창작열은 칠레의 자연만큼이나 왕성했다. 1923년 8월 그는 첫 시집 <황혼 일기>를 펴냈다. 20세가 안 되는 어린 시인의 가슴속에서는 맑고 투명한 정열이 샘솟고 있었다. “하느님, 당신은 하늘을 불 밝히는 이 놀라운 / 구릿빛 황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 황혼은 저 자신을 다시 기쁨으로 채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마루리의 황혼>)와 같은 구절은 젊은 영혼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황혼 일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학창시절 네루다가 숭배했던 칠레 시인 페드로 프라도는 “확신컨대, 나는 이 땅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높이에 다다른 시인을 따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칭찬은 네루다의 창작열을 더욱 북돋아 1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펴내게 한다. 이 시집이야말로 네루다를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인기 있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흥분제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들끓게 하면서도, 관능적이고 오묘한 여성의 몸처럼 아늑하고도 화려한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고,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의 세계 속으로 깊이 파 들어간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이 내게서 달아났고
밤은 내 가슴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그대를 벼렸다, 무기처럼,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은 오고, 난 그대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아 불두덩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그대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여, 나 언제까지나 그대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갈망, 막연한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뒤따르고,
고통이 한없이 계속되는 어두운 강 바닥이여.

- <사랑의 시 1> 전문(김현균 역)

 

네루다의 문학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후의 작품 <무한한 인간의 시도>(1926) <열렬한 투척병>(1933)을 거쳐, 초현실주의의 걸작으로 주목 받은 <지상의 거처>(1935)까지 그야말로 네루다의 시적 행진은 쾌도난마 그 자체였다. 그 사이에 1926년 버마의 랑군(오늘날의 양곤)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면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1935년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바르셀로나로 옮겨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것이 네루다를 공산당에 입당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도 역사의식을 가슴속 깊이 품게 되었고, 그 결과 <모두의 노래>(1950) 같은 총체적인 서사시를 생산해낸 것이다.

 

 

 

 

네루다처럼 떠돌이 삶을 오래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 거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끊임없이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혼인을 세 번이나 한 것도 보헤미안의 삶에 어울린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해지지만,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은 더욱 강화된다.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 1945년 3월 4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네루다의 본격적인 정치 행보가 시작된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한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이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을 파기하자 파블로 네루다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1948년 1월 6일의 의회 연설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네루다의 상원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2월 5일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영장을 발급한다. 네루다의 은둔생활 혹은 방랑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월 24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네루다는 파리, 폴란드, 헝가리를 거쳐 멕시코에 체류한다. 세계 곳곳을 거쳐 1952년 카프리 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칠레 정부는 네루다의 체포영장을 철회한다. 1969년 칠레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이듬해 살바도르 아옌데를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1970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루다는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된다. 

 

 

 

 

네루다는 세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으면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지만 수상의 영예는 쉽게 오지 않았다. 1971년 10월 21일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 해에 전립선암 수술을 해야 했고, 2년 후에는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1970년 7월 12일, 예순여섯 살 되는 생일에, 그는 의사인 친구 프란시스코 벨라스코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나 걱정거리가 있는데 말이야.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거든.” 벨라스코는 지금 즉시 산티아고 최고의 비뇨기과 의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전문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언가 작은 종양이 하나 보이는데, 한 달 안으로 다시 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가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항상 용감했던 네루다였지만, 죽을 병에 대해서는 용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1973년 건강상의 이유로 대사직을 사임했으면서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에게 칠레 내전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운명의 때는 오고 있었다.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칠레 독립기념일인 9월 18일, 네루다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아내 마틸데는 구급차를 불러 네루다를 병원으로 옮겼다. 9월 20일 멕시코 대사가 와서 네루다에게 칠레를 떠나도록 설득했다. 네루다에게 바깥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고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아내 마틸데에게 말했다. “그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 산산조각이 난 시신들을 건네주고 있다고. 노래하던 

시詩 / 파블로 네루다  *칠레의 민중시인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렸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POETRY 

And it was at that age...Poetry arrived 
in search of me. I don't know, I don't know where 
it came from, from winter or a river. 
I don't know how or when, 
no, they were not voices, they were not 
words, nor silence, 
but from a street I was summoned, 
from the branches of night, 
abruptly from the others, 
among violent fires 
or returning alone, 
there I was without a face 

and it touched me. 

I did not know what to say, my mouth 
had no way 
with names 
my eyes were blind, 
and something started in my soul, 
fever or forgotten wings, 
and I made my own way, 
deciphering 
that fire 
and I wrote the first faint line, 
faint, without substance, pure 
nonsense, 
pure wisdom 
of 

someone who knows nothing, 
and suddenly I saw 
the heavens 
unfastened 
and open, 
planets, 
palpitating planations, 
shadow perforated, 
riddled 
with arrows, fire and flowers, 
the winding night, the universe. 

And I, infinitesmal being, 
drunk with the great starry 
void, 
likeness, image of 
mystery, 
I felt myself a pure part 
of the abyss, 
I wheeled with the stars, 
my heart broke free on the open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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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여,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격자 위로 포도넝쿨이 기어오르는 곳:
당신보다도 앞서 여름이 그
인동넝쿨을 타고 당신 침실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 방랑생활의 키스들은 온 세상을 떠돌았다:
아르메니아, 파낸 꿀 덩어리—:
실론, 초록 비둘기—: 그리고 오랜 참을성으로
낮과 밤을 분리해온 양자강.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돌아간다, 내 사랑, 찰싹이는 바다를 건너
담벽을 향해 가는 두 마리 눈먼 새,
머나먼 봄의 둥지로 가는 그 새들처럼:

사랑은 쉼없이 항상 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삶은 담벽으로, 바다의 바위로 돌아간다:
우리의 키스들도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100편의 사랑 소네트 033> 전문(정현종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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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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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관련 알아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858

 

*정현종 시인이 옮긴 <100편의 사랑 소네트>(문학동네, 2004), <충만한 힘>(문학동네, 2007)은 시집

특히 <100편의 사랑 소네트>는 네루다가 세 번째 부인 마틸데에게 바친 사랑시를 모은 시집이다. 사랑을 꿈꾸고 있거나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에 진저리를 치고 있거나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네루다의 목소리로 그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네루다의 산문 또한 시처럼 거침없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약 1년 동안 집필한 이 책은 시인이 가장 시인답게 쓴 자서전이다. 시대순으로 엮여 있긴 하지만 시인의 자유로운 기질이 한껏 살아 있는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뜻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어느덧 우리는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인간과 시대의 격랑 속으로 휘말려들고 만다.

*스페인과 중남미 시인들의 시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민용태 시인의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창작과비평사, 1995)를 권한다. 외국 시의 감동을 우리말로 살리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 만들어낸 특별한 책이다. 이 책 속에서 네루다를 다시 읽어보라. 감동의 차원이 달라진다. 네루다 외에도 페데리코 카르시아 로르카, 세사르 바예호, 라몬 로페스 벨라르데, 올리베리오 히론도, 헤라르도 디에고, 마리아노 브룰, 비센테 우이도브로, 호세 후안 타블라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스페인어권 시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시인들의 시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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